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문제의 기사가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기(紀)에 나온다. 진구우(神功) 49년 춘삼월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군세를 인솔하여 신라를 공격시켰다. 구테이(久低)등과 함께 토쿠쥰노 쿠니(卓淳國)에 닿자 어떤 사람이 “군사가 적어서는 신라를 이길 수 없다. 사하쿠(沙白)와 카후로(蓋盧)를 보내서 군사를 증원하자”고 말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모쿠라콘시(木羅斤資)와 사사나코(沙沙奴跪)에게 원군을 인솔시켜 보냈다. 이 두 사람은 성씨를 알지 못 한다고 한다. 다만 모쿠라콘시(木羅斤資)는 백제의 장군이다. 이리하여 토쿠쥰노 쿠니(卓淳國)에 군세를 집결하고 신라를 쳐부셨다.
그리고 또 히시호(比自火, 창녕), 아리히시노카라(南加羅, 가락국), 토쿠노쿠니(喙国, 김해시 진영읍?), 아라(安羅, 함안), 다라(多羅, 합천), 토쿠쥰(卓淳, 창원), 가라(加羅, 고령)의 7국을 평정하여 세력하에 두었다.
또 백제의 군세는 서방을 돌아 코케이노쯔(古奚津, 강진)에 닿아, 남만(南蠻)의 토무타레(忱弥多禮, 전남 해남?)를 토벌하였다. “?”가 달린 곳은 아직도 그 위치를 비정하는데 논란이 있다는 뜻이다.
또 초고왕(근초고왕을 뜻함)과 귀수왕자( 근구수왕자의 의미)의 군세가 나아가자 히리(比利, 전주), 헤치우(辟中, 김제), 호무키(布弥支, 담양?), 한코(半古, 반남면)의 4촌(四村)이 자연스럽게 복종하였다. 백제왕 부자(父子)는 아라타와케 (荒田別) 모쿠라콘시(木羅斤資)들과 호루스키(意流村) 또는 쯔루스키(州流須祗)라 하는 곳에서 합류하여 전승을 함께 기뻐한 뒤 정중하게 아라타와케(荒田別)를 배웅하였다. 치쿠마노 나가히코(千熊長彦)는 백제왕을 따라 백제국에 동행하였다. 백제왕은 헤키노무레(辟支山, 김제 성산?)나 코사노무레(古沙山, 정읍 은선리 천태산?)에 오르자 바위위에 앉아 “풀은 불에 타고, 나무는 물에 흘러가고 말지. 그래서 돌 위에서 영원의 우호를 맹세한다. 이번에 입은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봄 가을 조공을 올리겠다” 고 말했다. 그런 연후에 도읍지에 가서 환영식을 거행하고 쿠테이(久低)등을 딸려 보냈다. 진구우(神功) 50년 춘2월 아라타와케 (荒田別)가 귀환하였다.
삼국사기 AD 8년 온조왕이 군사를 몰고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고 1년뒤 마침내 마한은 멸망했다고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적혀있다. 그러면 위의 일본서기 기록이 문제가 된다. 서기 8년 백제가 병탄한 지역과 가야까지를 369년 일본이 평정하여 근초고왕에게 주니 영원의 우호를 맹세하고 일년 두번씩 조공을 바치겠다고 언약한다?
진구우(神功) 49년은 서기 369년으로 본다. 이 해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양전투에서 반격하여 승리한다. 서기 371년 백제의 근구수 왕자가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한다. 우리는 근구수 왕자가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오우진 천황(應神天皇, 320 – 394)과 동일 인물이라고 본다. 이 무렵 그는 야마토의 오우진(應神) 천황이었고 야마토에서 군대를 데려 와 남해안의 배후를 경계하거나 평양성 공격에 투입할 수 있었으리라. 이들은 일본에서 차출한 군사라는 뜻이지 당시의 백제로서는 외국의 군대가 아니다. 서기 369년 백제의 근초고왕은 74세의 노령이었고 근구수 왕자는 49세 때 일이다. 아버지는 백제왕, 아들은 야마토의 왕이다.
근구수 왕자와 오우진 천황이 동일인이라면 일본서기는 오우진 천황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 된다. 백제가 이 부분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백제 근구수 왕자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백제와 야마토가 같은 나라라면 오우진은 백제왕자이므로 역사의 주체는 백제이다. 따라서 이 기록을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서기 369년의 일본서기 기록은 서기 364년에서 369년 까지의 사이에 근구수 왕자가 가야제국과 협조체제를 구축하였다는 뜻으로 풀면 된다. 그러나 가락국의 명칭을 남가라라 한 점은 의문이 남는다. 김해의 가락국은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몰락하여 소국으로 전락한 뒤 남가라로 불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서기 369년 경이라면 김해의 가락국을 남가라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국력을 총동원하였고 총사령관은 근수수왕자 즉 야마토의 오우진 천황(應神天皇)이다. 그는 야마토에서 일부의 군대를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군대가 우군의 영토인 가야나 백제를 통과하여 평양성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일본서기 기록데로 신라를 쳐부시고 가야를 평정하고 침미다례를 토벌하면서 북상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 기사 때문에 한국 역사학자들은 369년 근초고왕에 의해 가야 및 침미다례가 백제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남북으로 두개의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다. 일본서기는 8세기 초의 일본황실의 이해를 반영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무렵의 역사를 읽어야 된다.
일본의 역사기록이 중국사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147년간 (266년 부터 413년까지) 일본에는 전방후원분 (前方後圓墳) 이라는 특이한 묘제(墓制)가 나타난다. 역사는 없고 고분만 남아 고분으로 역사를 추적하는 형편이다. 남아있는 고분들의 규모가 거대하여 길이가 몇 백미터에 이른다. 일본이외에 이러한 묘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일본에서 자생한 특수묘제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1985년 전남 해남 장고봉 고분에서 전방후원분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1990년 전남 함평 신덕고분을 조사한 국립광주박물관은 신덕고분 또한 전방후원분으로 조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 명화동 고분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방후원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이런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 6세기 전반 즉 약 50여년간 나타나다가 사라졌으며 영산강 유역에서만 13기가 확인되었다. 반면 일본에는 7000기 이상 확인되었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 – 6세기 까지이다.
지금 여러 곳에 있는 전방후원분을 찾아 놓고 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방후원분이 있는 지역에서는 옛부터 이들을 장고산이라고 불러왔다. 규모가 커서 무덤인 줄 모르고 장고처럼 생긴 산이라고 생각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 연유로 한국에서는 전방후원분 대신 장고형고분이라고도 불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유적정비 차원에서 전남 해남군 삼산면 용두리고분을 발굴조사하여 2008년 11월 현재까지 전방후원분 13기중 7곳이 발굴되었다. 지금까지 확실시 되는 전방후원분은 전북 고창 칠암리 고분, 전남 영광 월산리 월계고분, 담양 고성리 고분(월성산 고분)과 성월리 고분(월전고분), 광주 월계동 1.2호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 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고분군 중 제 1호분, 함평 신덕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 영암 자라봉 고분, 해남 방산리 고분외에 이번 해남 용두리 고분이 꼽힌다. 전방후원분은 드문 드문 산재해 있고 축조시기는 대강 6세기 중반이며 일본열도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고대 한일관계사 특히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두 나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실재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박천수 교수는 2006년 충남대 백제 연구소 기관지인 “백제연구” 43집에 투고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을 통해 본 5 – 6 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 라는 논문에서 한국측 일부 연구자중에는 임나일본부와 관련을 우려하여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또는 부정하려는 현상조차 보인다고 지적하였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의 군곡리 패총, 1983년 처음 확인되었으며 1986년 목포대 박물관이 광주박물관과 함께 1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패각층이 노출된 범위는 너비 약 200미터, 길이 약 300미터에 이르는 서남해안지역 최대이며 출토유물도 많았다. 유물로 보아 철기시대의 유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 신(新)나라 화폐 화천(貨泉)이 1매 출토되어 당시의 편년을 짐작케 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의 유적으로 삼천포 늑도 패총, 남해 세전리 유적이 있으며 김해패총, 마산패총, 제주 곽지패총등과 비교된다. 한편 복골(卜骨)에 쓰이는 뼈도 사슴과 멧돼지 뼈의 비율이 높았다. 복골은 동물뼈를 이용해 점을 치는 것을 말하는데 군곡리 패총에서 사슴과 돼지의 어깨뼈을 이용한 복골이 발견되었다. 군곡리의 복골은 김해의 부원동 패총의 것과 같으며 일본의 쯔시마, 잇키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1995년 전남대 박물관은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 대한 정비복원 사업을 맡았다, 특히 이 중 3호분은 안동권씨의 선산이었는데 분구가 계속 유실되자 복원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3미터에 달하는 대형옹관 26기를 비롯해 금동신발과 장식대도등 수 많은 유물이 나왔다. 특히 이 고분은 하나의 봉분에 41기의 무덤을 3층 아파트처럼 조성하였다. 이는 동일집단이 3 – 7세기 사이 400년동안 고분을 가꾸어 왔다는 것으로 영산강지역 무덤의 변천양식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사기등 어떤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 영산강지역의 옹관묘세력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다 언제 사라졌을까? 또 5세기말 – 6세기초 영산강유역에 홀연히 등장했다 50년도 안돼 갑자기 사라진 전방후원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대표적인 독자적 묘제로 3세기 중엽 시작되어 5 – 6 세기 절정에 이르다 7세기에 소멸된다. 그런 전방후원분이 영산강유역에서 지금까지 13기 확인되었다. 이는 일본인이 영산강유역에 진출했다는 의미일까?
전남 나주 영산강 유역의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산재한 30여기의 반남 고분군이 있다. 덕산리 3호분의 남북둘레가 46미터이고 높이 9미터에 달한다. 이 정도 수준의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던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또 신촌리 9호 무덤에서는 다섯개의 옹관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그 가운데 옹관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이 반남고분군은 매장방법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매장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거대한 하나의 봉토내에 수개 혹은 수십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이 합장돼 있는 것이나, 몇몇 고분조사에서 봉분주위에 도랑이 존재했던 점도 특이하다. 옹관규모도 큰 것은 길이 3미터 무게가 0.5톤이나 되는 것도 있다. 그 안에는 금동관및 금동제의 호화로운 장신구와 환두대도 등의 무기류들이 부장돼 있었다.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한 금동관은 일본 구마모토 현의 후나야마(船山)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특이한 점들 때문에 반남고분군은 일제시대 초기 비상한 관심이 됐다.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 한(韓)과 왜(倭)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천리쯤이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 진한, 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납작머리)이고,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瀆盧國, 거제도)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 (與倭接界).”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竃皆在戸西 其瀆盧國與倭接界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 에서 왜의 위치를 표기하기를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라고 되어 있다. 접해 있다는 의미는 육지로 붙어 있다는 뜻이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삼국지는 서진의 진수(陳壽, 233 – 297) 의 찬(撰)으로 황초(黃初)원년(220) – 태강(太康) 원년(280)간의 위-촉-오의 역사서이며, 후한서는 남조 송 범엽(范曄, 398 – 445)의 찬으로 후한 (25 – 220)의 역사서이다.
그러다가 5세기의 송서 왜국전에 오면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이 바뀐다.
중국대륙이나 만주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뱃길로 왕래하는데 몇 천년 동안 동일한 방법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돛단배를 타고 육안으로 보이는 곳으로 뱃길을 잡았다. 산동반도에서 서해를 건너 충청도 해안을 따라 남하하고 현재의 해남을 돌아 남해안으로, 남해도와 창선도, 늑도을 거쳐 한산도 거제도를 왼쪽으로 보면서 짝섬 (對島, 짝섬이 쯔시마로 변화) 을 향해 간다.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짝섬을 거쳐 다시 잇키섬을 향해 항해하여 큐유슈우의 하카타에 닿았다. 만주 요동반도에서는 한반도 연안을 따라 내려 와 같은 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전남 해남지방은 이 항로의 요충이며 나중 9세기의 장보고가 확보한 청해진이 바로 해남과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따라서 이 항로에 위치했던 이 시대의 항구에서 유사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서기 1274년 고려와 원나라의 수군도 일본 원정시 지금 거론하고 있는 항로를 따라 큐우슈우에 상륙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에게 그렇게 노출되면서도 한산도, 노량, 명량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수로)을 통과하고자 했던 이유는 대양을 우회할 수 있는 튼튼한 배를 만들 수 없었고 물표 없이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지를 보지 않고는 현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삼국지나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의 전라남도 남서 해안지역에 삼한과는 다른 인종인 왜(倭)가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신비의 147년동안 일본전역은 전방후원분으로 덮히고, 5세기의 중국 사서는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로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왜(倭)란 나라를 의미하기 보다는 인종을 뜻한다. 영산강 유역의 역사는 이렇게 난마처럼 얽혀 역사가에게 갈등의 역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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