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토요 황녀가 쯔노사시궁에서 남편과 첫날 밤을 지내고 나서, 여자의 길을 한번 알았으니 더 알아 무얼 하랴. 더 이상 남정네와 볼 일 없네 라 하며 평생 남정네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淸寧천황기에 나온 이 기사는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후세에 남기고 싶어서 역사의 행간에 끼어 넣은 에피소드라고 본다. 후세에 남겨두고 싶은 인간세의 아픈 이야기, 이것은 여인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사실은 남정네의 순결한 사랑을 후세에 전 하고자 함이 아닐까.
일본서기는 淸寧천황의 황후를 기록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던 중 淸寧2년 11월 하리마(播磨)국에 숨어 살고 있던 황자 – 億計와 弘計 (양쪽 모두 일본어로는 오케로 발음)황자를 발견하여 카즈라기(葛城)의 오시누미(忍海)에 있는 타카키노 쯔노사시노미야(高城 角刺宮)에서 그들의 누나 飯豊皇女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飯豊皇女(이이토요 히메미코, 440 – 484) 는 이치노헤노 오시하노 미코 (市邊押磐皇子, 414 – 456) 의 딸로 應神천황의 4대손이다. 應神천황 시절 일시 백제가 장악하였던 일본열도는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의 영향 아래 놓이고 광개토대왕의 왕자 高珍이 19대 允恭천황이 되었다. (전편 23. 允恭천황 그 역사기록의 허상 참조). 應神의 아들로 야마토의 천황이었던 닌토쿠(仁德)는 419년 전사하였고 닌토쿠의 아들 리츄(履中)천황 ( ? – 432)도 432년 전사하였다. 일본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고 고구려의 왕자 고진은 야마토의 19대 允恭천황으로 기록된다. 이때 履中천황의 아들,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 (市邊押磐皇子)가 시가(滋賀)현으로 도망가 모습을 감추고 숨어 살았다. 飯豊황녀는 이 사람의 딸이다.
서기 432년 일본을 장악한 윤공천황은 453년 자기 아들에 의해 독살된다. 그 후 安康천황을 거쳐 456년 安康 사후 允恭천황의 아들 雄略이 정권을 장악하고 시가현에 숨어 살던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를 색출하여 처단한다. 서기 458년 雄略은 다시 백제의 개로왕과 昆支王에게 패배하여 연금되고 일본은 백제의 관리로 돌아간다. 458년 飯豊皇女는 8촌 오빠인 개로왕에게 발견되어 백제로 따라간다. 이 때까지 飯豊皇女의 두 남 동생 億計와 弘計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서기 461년 백제의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 개로왕은 동생인 코니키시(軍君)에게 “ 너는 일본에 들어가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행정로장군 좌현왕 餘昆 (= 昆支) 코니키시는 “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읍니다. 다만 국왕의 부인 한 사람을 저와 동행시켜 주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는 임신한 부인을 코니키시에게 맡기며 “ 이 부인은 이미 출산이 가깝다. 혹시 가는 도중 출산하면 어디서든 배에 태워 보내라” 이 부인이 바로 飯豊황녀였다. 우리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연재의 1. 백제 무령왕 참조). 역사기록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飯豊皇女가 먼저 야마토에 가기를 원 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행방불명된 두 명의 남동생, 億計와 弘計를 찾으려는 일념에서.
6월 카스리노키시 말데로 부인은 쯔쿠지(筑紫)의 카카라시마(各羅島, 현 加唐島)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세마키미(嶋君)라 지었다. 코니키시는 모자를 귀국시켰다 (기록은 이러하나 정황상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훗날의 백제무령왕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 (현대어의 임금 섬) 라 부른다. 가을 7월 코니키시(軍君) 는 도읍에 도착하였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이로부터 아마 2년후 億計와 弘計를 찾았고 이들 형제는 누이와 함께 쯔노사시노미야에서 살게 되었다.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는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삽입한 기사이다. 왜냐하면 곤지는 이때 겨우 스무 살 남짓 할 나이이므로 아들을 다섯 씩이나 둘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479년 백제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곤지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마타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 하였다. 그리하여 무기를 주고 쯔쿠지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이 사람이 바로 동성왕이다.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무왕의 상표문 참조). 이 동성왕은 飯豊황녀의 동생 億計이다. 그는 곤지의 아들이 아니라 곤지와 8촌 형제간이다.
이 때는 475년 한성백제 멸망시 왕과 왕자들이 모두 희생 당하여 왕실의 인재 풀이 거의 바닥 난 시점이었다. 461년 코니키시가 일본에 올 때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는 479년 이후에 등극한 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왕실의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5명의 아들을 거론하였다고 본다. 479년 億計를 백제로 내 보낼 때 이미 “곤지의 5명의 아들중의 차남”이라고 이 카드를 쓰고 있다.
또 여기 나온 천황은 곤지 자신이며 일본서기에 淸寧천황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서기는 곤지의 기사를 가능한 한 감추려고 한다. 곤지가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淸寧천황 앞의 雄略천황은 고구려 允恭천황의 아들로 458년 이미 실각되었으므로 그의 집권기간은 겨우 3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雄略이 雄略 23년(479년)까지 황위에 있었던 것 처럼 기록하여 곤지가 역사에 노출되는 것을 막았다. 실재 昆支는 461년 일본에 들어오자 마자 야마토의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그때부터 484년까지 천황이었다. 따라서 雄略紀의 기사 대부분이 실재로는 昆支 즉 淸寧천황의 기록이다.
일본서기는 飯豊황녀의 집권기간을 10개월여로 484년 11월 崩하였다고 표기하였다. 崩이란 천황에게만 사용되는 글자이므로 천황급의 대우를 하고 있으나 記紀에서 천황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세의 사서인 扶桑略記에는 飯豊天皇 24대女帝로 기록하여 천황으로 취급하고 있다.
飯豊황녀를 매장했다고 전해진 미사사기(御陵)가 奈良縣葛城市新庄町의 키타하나우치(北花內)에 있다. 고고학계는 “北花內大塚古墳 (키타하나우치노 오오쯔카 고분)”, 궁내청은 “葛城埴口丘陵 (카쯔라키노 하니쿠치노 오카노 미사사기)”라 부르는 전방후원분이다. 현재의 皇統譜에 飯豊황녀는 천황으로 기록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천황취급을 받고 있지 않다. 그러나 北花內大塚古墳은 천황릉으로서 궁내청의 관할하에 있고, 요배소(遙拜所) 입구에 궁내청이 세운 간판에는 “飯豊天皇 埴口丘陵” 이라 씌여있다.
일본서기는 飯豊皇女가 스스로 忍海飯豊靑尊 (오시누미노 이이토요노 아오노 미코토)로 부르고 忍海角刺宮 (오시누미노 쯔노사시노 미야)에서 정치를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고 전해진 다음과 같은 노래 한 수가 이어진다.
야마토를 통 털어 가장 보고 싶은 것은, 忍海 땅 高城(타카키)에 있는, 아름다운 角刺宮.
서기 479년 億計를 백제 동성왕으로 즉위시킨 뒤 淸寧천황 昆支王와 飯豊황녀의 아들 斯麻王의 행방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무왕의 상표문에서 이미 나왔다. 따라서 479년부터 飯豊황녀가 천황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서기 484년 飯豊황녀가 사망하자 그녀의 동생 顯宗천황 (弘計)이 뒤를 이었다고 되어 있다. 백제 무령왕은 서기 502년 나이 40세(무령왕릉 기록에 462년 출생으로 되어있음) 에 즉위하므로 479년부터 502년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떠나 이 글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왜 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은 이런 엉뚱한 飯豊황녀의 프라이버시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역사서 속에 남겨 놓았을까?
456년 웅략천황의 공격을 받아 아버지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 (市邊押磐皇子)는 살해되었고 그 때 이후 남동생 億計와 弘計는 행방불명이었다. 이때 몸을 숨기고 있던 飯豊황녀는458년 8촌 오빠인 개로왕에게 구조되어 백제에 나왔고 지금 개로왕의 아이를 뱃속에 갖고 있다. 이때 그녀의 나이 스물 하나, 곤지의 나이도 대강 그 부근일 것이다. 461년 산월이 가까운 몸으로 昆支를 따라 일본행을 관철한다. 곤지가 일본에 가라는 명령을 받고 만삭이 된 飯豊황녀를 요구했는데 곤지와 飯豊황녀 사이에 남녀간의 감정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개로왕은 飯豊황녀를 친동생 昆支에게 하사했으므로 飯豊황녀는 이후 곤지의 여자인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 다시는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는 淸寧천황이 아내를 갖지 않았고 자식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은 軍君 昆支라는 사나이는 이 여인만을 평생동안 바라보고 살았다는 의미일까? 일본서기를 기록했던 사람들도 이 일만은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주)飯豊皇女(이이토요 히메미코, 440 – 484) 는 이치노헤노 오시하노 미코 (市邊押磐皇子, 414 – 456) 의 딸로 應神천황의 4대손이다. 이 여인의 혈통에 관한 기사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명백하다. 그런데 이이토요
황녀가 전직 천황들과 어떤 관계였는지 기술하지 않고 얼렁뚱땅 세이네이(淸寧) 천황과 켄조우(顯宗) 사이에 나라를 통치하였다고 나온다.
일본서기 유랴쿠기
서기 461년 개로왕의 후비가
곤지와 일본에 가던 중 큐우슈우의 가카라지마(各羅島)에서 시마왕을 출산하니
그가 백제의 시마왕(무령왕)이다.
그럼 시마왕의 모후는
누구인가? 일본 역사서에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는가? 이 의문에 가설을 세운 유일한 사람이 구자일입니다. 전후의 역사서를 깊게 읽어보면 시마왕의 모후가 이이토요 황녀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아무도 모를 때 그 가설을 세운 사람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구자일 씨를 모릅니다만
그가 세운 많은 가설 가운데 무령왕의 모후가 이이토요 황녀라는 가설을 가장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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