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6일 금요일

41. 선광사 연기 (善光寺緣起)

2008년 (平成 20년), 선광사는 같은 불교도로서 중국의 티벳 탄압을 반대하는 동시에 이와 관련하여 참배객에 대한 위해가 미칠 것을 피하기 위하여 당초 예정되어 있던 북경 올림픽 성화 봉송 출발식 회장으로 선광사 경내를 사용하지 않도록 나가노시(長野市)에 요구하였다. 2008년 4월 18일 선광사는 출발식 회장(會場)으로 부터 사퇴한다고 발표하였다. 성화 봉송 시간에 맞춰 티벳사태 희생자 (중국인 및 티벳 쌍방의 희생자)를 위한 추도 법요를 실시하였다. 성화 봉송 출발지 사퇴에 대하여 2008년 11월 달라이 라마 (Dalai Lama)가 감사의 표시로 석가상을 보냈다.


현재의 나가노시 (長野市)는 선광사의 문전마을로 발전한 도시로서 선광사라는 사찰 때문에 생긴 도시이다. 원래 선광사 참배로 부근에서 현재의 信州대학 교육학부 부근에 걸쳐있는 완만한 경사지를 나가노로 불러왔다. 중세말 水內郡 長野村 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선광사 경내와 문전마을을 포함 대강 현재의 長野市大字長野에 상당하는 구역을 영역으로 하였다. 平成10년 (1998) 2월 개최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선광사의 범종이 세계평화를 염원하여 전 세계로 울려 퍼졌다.

선광사의 본존인 선광사식 삼존상 “일광삼존아미타여래 (一光三尊阿彌陀如來)” 는 절대비불로 지금까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전해온다. 선광사 연기에 의하면 선광사 여래는 일본에 온지 약 100년후 信州長野에 왔고, 나가노에 온지 10년정도 지나, 불상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여 秘佛로 되었다 한다. 그후부터 7년만에 한번 御開帳(고가이쵸, 장막을 걷고 일반에 공개하는 것)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선광사 본당 안 깊이 수납장 안에 안치되어있다. 御開帳에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것은 마에다치 본존 (前立本尊)이라 하며 비불을 모조하여 만든 것이고, 비불은 지금까지 참배객뿐 아니라 선광사의 승려에게도 보인 적이 없다. 삼존상은 아미타여래 (阿彌陀如來)를 중심으로 오른편에 관음보살 (觀音普薩), 왼편에 세지보살 (勢至普薩)의 세 보살이 하나의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서 있다. 선광사의 본존 일광삼존아미타여래는 백치 5년 (654)이래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절대비불이므로, 가마쿠라(鎌倉)시대 이를 모조한 前立本尊(주요문화재)이 제작되고 7년에 한번 선광사 御開帳時에 공개되고 있다. 다음번 고가이쵸는 2009년 4월 5일부터 5월 31일까지의 57일간이다.

信州 善光寺는 일광삼존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창건 이래 약 1400년에 이르고 아미타여래와의 결연의 장소로서 민중의 마음을 어루 만져 주는 의지처로서 넓고 깊은 신앙심을 고취시켜 왔다. “선광사연기”는 다음과 같은 내력을 전한다.

옛날, 인도의 비샤리국에 월개(月蓋)라는 장자가 살았다. 나이 50넘어서야 여시(如是)라는 딸을 두었는데 너무 귀여워 한 나머지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진다. 석가가 이를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본인의 자각이 없다. 귀신이 역병을 돌리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월개는 집안을 단속하였으나 여시도 역병에 걸린다. 인도 최고의 명의를 불렀으나 석가이외에 아무도 병을 낫게 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는다.

월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석가에게 매달리니, 석가는 염불을 권한다. 석가의 지시데로 월개가 실천하자 극락에서 일광삼존아미타여래가 나타나 이마에서 빛을 발하자 여시는 물론 모든 사람들의 병이 나았다. 월개는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그 삼존상을 남겨 주기를 석가에게 간청한다. 이리하여 일광삼존상이 월개에게 하사되어 7대 5백년에 걸쳐 공양하였다.

월개는 다시 태어나 백제의 성명왕(백제 26대 성왕)이 된다. 일광삼존불도 하늘을 건너 백제에 닿아 나라를 구한다. 성명왕은 일본을 구제하려 이 불상을 欽明 13년 (552) 欽明天皇에게 선물한다 (欽明天皇은 백제 성명왕의 친 동생). 천황으로 부터 불상을 부탁받은 蘇我씨는 가람을 만들어 불상을 안치 숭배했다. 그러나 그때 역병이 유행하자 숭불 때문이라고 비난하며 모노노베(物部)씨가 폐불을 주장하며 절을 불 태우고 불상을 나니와의 호리에에 던져버렸다. 다음의 敏達천황이 병으로 쓰러지자 불상을 소홀히 한 것을 후회하고 호리에에서 불상을 찾아내 궁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모노노베씨가 또 호리에에 갖다 버렸다.

후에 信濃國司 (시노노 쿠니노 미야쓰코)의 종자로 수도에 올라온 本田善光 (혼다 요시미쓰)이 나니와(難波)의 호리에(堀江) 를 지나다가 물속에서 빛나는 광선을 보았는데 불상이 물속에서 뛰어나와 善光의 등에 업혀 東國(아즈마노 쿠니, 동쪽의 나라)로 데려갈 것을 명하였다. 월개장자. 성명왕의 환생이라고 들은 선광은 부처와 함께 信濃國에 돌아와 처음에 長野縣 飯田市에서 예배드리다, 황극천황 원년 (642)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황극천황 3년 (644) 칙원(勅願)에 의하여 가람이 조영되고 本田善光의 이름을 따서 선광사라 명명하였다. 창건이래 11회의 화재를 당했으나 여래 부첫님을 흠모하는 민중의 마음이 모여 옛 모습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광사는 일본에서 어떤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절이며, 信州 善光寺 이외에 가이(甲斐) 善光寺, 모토(元) 善光寺, 소부에(祖父江) 善光寺 동해별원, 세끼(關) 善光寺, 기후(岐阜) 善光寺가 있다.




이상의 선광사와 관련된 많은 정보를 기록한 것은 백제왕자 善光 (또는 禪廣)을 거론하기 위함이다. 일본서기 天智3년 (664) 3월 百濟王 善光(구다라노 고니키시 선광) 등을 나니와에 살게 하였다. 敍明朝(631) 풍장과 함께 입시하였으나 백제가 멸망하자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 되었다. 天武 4년 (675) 1월 1일 대학료의 모든 학생, 음양가, 외약료와 인도여인, 태국여인, 백제왕선광, 신라의 仕丁(쓰가에노 요보로)등이 약과 진귀한 물건들을 진상하였다. 朱鳥원년 天武紀의 최후 (686) 에 백제왕 양우(良虞)가 선광을 대신하여 뢰(誄, 시노비고토, 우리말의 弔辭)를 읽었다. 686년 62세의 선광이 늙어, 손자인 양우가 대신 조사를 읽었다. 持統 5년 (691) 정월 정광사(正廣肆) 선광(禪廣), 동족의 遠寶, 南典등과 함께 왕족우대의 사급을 받다. 持統 7년 (693) 죽은 선광에게 正廣參을 추증하고 부물(賻物)을 하사했다. 이상 보이는 것이 일본서기에 나온 백제왕 선광과 관련된 기록이다.

이보다 앞서 674년 天武 3년 정월 백제왕 창성(昌成)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창성은 선광의 장자이며 674년 부친 선광보다 먼저 죽었다. 1983년 아스카의 키토라(鬼虎)고분이 발굴되었는데 피장자가 창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선광과 창성의 몰년은 확실하나 생년기록이 없어 추측할 뿐인데, 선광 625년, 창성 645년쯤으로 본다. 그러면 창성은 나이 30세로 요절한 셈이다. 추측컨데 창성은 원보(遠寶, ? – 734)), 양우(良虞, ? - 737), 남전(南典, 667 – 758)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양우의 아들 경복(敬福, 697 – 766, 남전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음)이 750년 오오사카 히라까타(枚方)에 百濟寺와 百濟王神社를 남겨 현존한다. 聖武천황때 東大寺大佛을 건립하는데 도금할 황금이 필요하였으나 이를 구할 수 없어 노심초사 하던 중, 749년 무쓰노가미(陸奧守) 敬福이 직할지에서 황금 광산을 개발하여 생산한 황금 900량을 조정에 바쳐 대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경복은 이 공로로 일거에 7계급 특진, 종삼위의 궁내경 가와치 노가미(河內守)에 임명된다.

구다라노 고니끼시 선광 (百濟王 善光, “구다라노 고니끼시” 가 姓 )으로 일본서기에 그려진 인물은 敍明과 齊明사이에서 태어났고 풍장(天武)의 친동생이다. 631년 풍장 10세때 九州의 어머니를 떠나 아스까의 부친 敍明天皇에게로 왔다. 그때 7세의 선광도 함께 아스까의 아버지에게 왔다. 이 사실이 “백제 의자왕의 왕자 풍장이 인질로 왔다”고 서기에 기록되었다. 선광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백강의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686년 天武天皇의 장례식 때, 弔辭를 읽는데 선광이 참석하였으나 선광 대신 손자 양우가 조사를 읽는다. 이때 백제왕 선광이 天武의 장례에서 조사를 읽은 것을 두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왜 망해 없어진 백제의 왕자가 일본천황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는 반열에 들었는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인데 백제와 일본이 같은 나라였고 天武와 善光이 형제간 이라면 당연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691년 持統천황에게서 사급을 받고 693년 정광삼을 추증받는 것으로 봐서 선광은 692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왕 선광은 젊어서 昌成이란 아들을 두었고,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로 살았던 것 같다. 위에 나온 혼다 요시미쓰 (本田善光)의 전설이나 선광사 전설이 이 사람과 연관되어 생겨났다. 혼다 요시미쓰의 전설은 현대식 이름으로 봐 훨신 후대에 생긴 전승일 것이다. 우리 추측데로 백제왕자 선광이 625 – 692년간 살았다면 그가 30세인 655년 백제의 의자왕이 그의 부친이니, 지금 선광사의 비불이라는 일광삼존아미타여래상은 의자왕이 아들에게 보낸 비원의 선물이 아닐까? 당시 백제왕의 선물이면 비불의 취급을 받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선광사를 건립하는데 백제와 일본왕실의 도움으로 당시까지 교통이 불편한 멀고 먼 오지의 산악지방, 東國(아즈마노 쿠니)에 그런 거대한 불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644년 皇極天皇 3년 칙원에 의해 가람이 조영되었다는 것은 선광사가 황실의 사찰이라는 뜻이 된다. 백제 위덕왕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비운의 아버지 백제 성왕의 명복을 빌며 그의 신격화를 구상했으리라. 당시의 신격화는 부처화를 뜻하지만 위덕왕의 후손들 또한 성왕의 모습을 부처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절대비불로 예배하지 않았을까? 백제 성왕의 형상이라고 주장되는 또 하나의 비불이 있으니 호류지 유메도노(夢殿)의 구세관음이다. 구세관음에 관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다룰 예정이다.
이 자리를 빌어 우리는 먼 옛날 백제와 倭 사이에 얼마나 많은 교류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있다. 오랜 옛날 일이고 기록이 많지 않으므로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정보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보인다. 백제멸망 이후 일본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하여 백제를 부정했지만 양식있는 후손들은 알게될 것이다. 일본의 뿌리는 백제라는 것을.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