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카도 신 (寺門 伸) 교수의 “조선반도에서 일본을 바라본다”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4)의 연재를 계속합니다.
그러면 “이중구조모델”설은 이러한 바이어스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을까. “이중구조모델” 가설이 종래의 설보다 우수한 점은, 渡來人과 歸化人이라는 2개의 개념을 확실히 구별하고, 도래인이 일본의 국가형성에서 달성한 역할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이라는 불변의 주체가 있고, 그것이 외래의 문화를 받아들여, 繩文시대가 彌生시대로 되었다고 하지않고, 彌生문화를 가진 도래인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일본열도에 이주함으로서 이 열도지역이 새로운 문화단계로 진입하였다는 것, 그리하여 일본의 최초의 국가는 그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니하라(埴原)씨는 인정하고 있다.
하니하라씨는 이렇게 도래인의 역할을 바르게 평가하고는 있으나, 거기서 당연히 따라 나올 결론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중구조모델”이란 명칭 자체가 종래의 설 (繩文人자연진화설)에 대한 배려가 느껴져, 이 새로운 가설도, 우리들 마음속에 숨어있는 바이어스를 완전히 극복하는데 까지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중구조모델”이란 “繩文文化”와 “彌生文化”가 각각 일정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현재의 일본문화의 주요한 구성요소로 되어있다는 뜻이다. 여기 繩文문화와 彌生문화가 等價値로 놓여있는 셈이다.
彌生문화를 갖고 온 도래인들이 이 열도에 왔을 때 (에가미 나미오 (江上波夫)씨의 기마민족정복설의 주장처럼 단숨이 아니라, 아마 소그룹 단위로, 수백년 걸쳐 서서히 이주해 왔다고 생각된다). 거기 토착의 繩文人들 (繩文人들이 어디서 일본열도에 들어왔는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이 살고있었던 셈인데, 繩文문화보다 彌生문화쪽이 문명단계로서 앞 서 있었고, 도래인들은 선진의 무기를 갖고 있었으니까, (최초에는 도래인의 수가 적어서 繩文人과 공존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도래계의 彌生人들은 토착의 繩文人을 압도하였다라고 생각하는것이 자연스럽다.
이때 일본열도의 선주민인 繩文人들이 고를만한 선택은 2가지밖에 없다. 彌生人의 지배를 받을까 아니면 자기들도 彌生人의 뛰어난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스스로 彌生人 (彌生문화를 가진 사람)이 될까이다. 결국 피정복자로 되거나 나아가 동화의 길을 걸을까의 양자택일이다. 피정복자로 되면, 살해되든지 강제적으로 동화되든지 어느 쪽이다. 어찌되었든 살아남은 繩文人들은 거의 모두가 彌生문화로 동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보충> 彌生人을 (인종적.민족적이 아니라) 문화적 개념으로 치면, “彌生문화를 가져 온 사람들” (渡來人) “彌生문화를 받아들인 사람들” (토착의 繩文인) 도, 모두 “彌生人”이므로, 소수민족인 繩文人에만 스폿라이트를 대면, “(대다수의) 繩文人은 자연히 彌生人으로 변화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그러나 “繩文人이 자연히 彌生人으로 변화하였다”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동화된 繩文인의 수가 많다면, 그들이 갖고있던 문화와 생활습관의 일부가, 거꾸로 彌生人들에 의하여 채택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彌生人들이, 자기들의 기본적인 생활 스타일 (문화)를 버린다는 것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일본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繩文문화와 彌生문화의 두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이 2개는 “繩文人 자연진화설”이 주장하듯, 단계적 발전, 또는 점차적 이행으로 직접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 “이중구조모델”설과 같이, 이 두개의 문화를 현재 일본문화를 성립시킨 2개의 대등한 요소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日本列島史”라는 것이 있다면, 일본열도에는, 彌生문화 이전에 繩文문화가 번성하였다고 기술하여도,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 그 경우, 일본열도에 살고있는 사람 이쿠얼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가장 알고싶은 것은, 현재 일본인의 민족적 뿌리이며, 일본문화의 뿌리이다. 결국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이다. “일본열도의 역사”가 아니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일본사”에서, 일본열도의 역사가 그데로 일본의 역사로 되었다는 것, 그 점에 먼저 의문을 갖는 것으로 시작하자.
현재 일본인에게 “繩文人”과 “彌生人”의 혼혈의 비율은 “3대7”이라는 설을 들어도, 일본 최초의 국가는 彌生人이 건국하였다고 들어도, 변함없이 많은
일본인은 자신들의 祖先을 繩文人이라 믿는 것은 무었 때문일까. 여기서도 역시, 일본인의 끈질긴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 같다.
<보충1> 繩文人과 彌生人의 혼혈의 비율이 3대7이라는 것은, 繩文人과 彌生人의 인종적 특징에 의해 추계하였으므로, 여기서 彌生人이라 말해진 사람들이 모두 도래계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 3대 7이란 숫자 자체도 당연 오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繩文人도 (열도에 도래한) 彌生人도, 각각 단일 인종은 아닐 터이다. 도래계의 彌生人 가운데 繩文人의 인종적 특징을 갖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토착의 繩文人 가운데 彌生人의 인종적 특징을 갖는 사람이 전혀 없다고 단언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보충2> 전회의 바이어스 가운데 “繩文문화의 과대평가”라는 항목을 첨가하고 싶다. 일본인은 자기들의 祖先이 繩文人이라는 그릇된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으므로 繩文人과 그 이전의 구석기시대의 原일본인이 아주 고도의 문명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일본인은 최초부터 뛰어난 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하므로서, 외래의 彌生人들의 문화에 압도된 굴욕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藤村新一 동북구석기문화 연구소 前副이사장에 의한 구석기발굴훼조사건에서, 연구자들이 너무 간단하게 속아 넘어간 것도, 이러한 점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현재 일본인의 (문화적) 뿌리는 彌生人이라는 것을 옳바르게 인식하면, 이런 문제는 일거에 해결되지 않을까.
<보충3> “(자기의) 아이덴티티”란, 알기 쉽게 말하면,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이다. “아이덴티티의 확립”은 인간이 세계를 질서화하는 수단의 하나이며, 객관적 사실과는 전혀 관계 없다. 先祖나 가계도라는 것도 인간의 아이덴티티의 하나이다. 가계도는 男系만을 거슬러 오르는 것으로 되어있어, 가계도에 여성은 무시된다. 또 장남만이 직계, 그 이외의 차남이나 3남은 방계로 보는데, 이 남성중시, 장남중시에 생물학적 근거는 전혀 없고, 결국 인간의 약속인 것이다. 이러한 약속이 없다면 세계는 혼돈으로 나타나 보여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家系圖는 樹木에 많이 비교되곤 하는데 (Family Tree) 강(川)의 이미지와도 닮아있다. 강도 본류와 지류가 있다. 독일의 라인강에는 모젤강, 마인강, 넷카강이라는 지류가 있는데 나무로 치면 가지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래도 강의 경우는, 어째서 (나무의 가지에 해당하는) 하나 하나의 지류에 다른 이름이 붙어 있을까. 모젤강, 마인강, 넷카강은 왜 라인강이 아닐까. 본류와 지류를 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강을 하구에서부터 수원을 향하여 거슬러 올라가 2개의 강의 합류점과 만나면, 그 중의 하나가 본류이며, 다른 하나가 지류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마 합류점에서부터 원류까지의 거리에 따를 거라고 생각되는데, 이 거리가 거의 비슷하다면 곤란하게 되고만다. 어느것이 본류히고 어느것이 지류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인강 자신은 그런 재미없는 사람들의 생각에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단지 흘러 갈 뿐이다.
아이덴티티에 관하여 나중 더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덴티티를 결코 객관적 사실이라고 혼동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아이덴티티란 “문화”속에만, 결국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소슈우르 (Ferdinand de Saussure, 1857 – 1913)의 용어를 빌리면 아이덴티티란 자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뭐든지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봐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의 아이덴티티의 선택 (인간은 보통 이것을 선택이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은 때로는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적으로 바꿔 버릴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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