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0일 금요일

43. 구세관음(救世觀音)


국보 관음보살입상 (구세관음)은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 八角圓堂으로 알려진 유메도노(夢殿)의 본존비불로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던 불상이다. 이 불상은 높이 178.8센티미터. 하나의 구스노끼 (樟木) 통나무로 만든 것이다. 밑에 칠을 하고 금박을 입혔다. 장기간에 걸쳐 백포로 싸 두어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내력은 수수께끼에 쌓여있다. 호류지 동원가람의 본존으로서 천년이상 모셔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옛 기록에는 이 불상이,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일절 기술하고 있지않다. 天平寶字5년 (761) 호류지 사료에 “上宮王 (성덕태자)等身관세음보살상”이라 나와있어, 성덕태자의 등신상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왜 비불화되었는지 그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호류지는 서원가람과 동원가람의 두개의 브록으로 되어있다. 유메도노 (夢殿)는 동원가람의 중심적인 건물인데 天平11년 (739) 성덕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팔각원당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덕태자는 推古천황 9년 (601) 2월 이까루가노 미야 (斑鳩宮) 의 조영에 착수하여 4년반 후 推古13년 (605) 10월 궁이 완성되자, 20여년간 살던 가미쓰노미야 (上宮)를 떠나 이까루가궁으로 이사했다. 성덕태자는 推古30년 (622) 49세로 서거할 때까지 17년간 이 궁에서 살았다. 그의 사후 장남 야마시로노 오호애 (山背大兄) 황자가 이곳에서 살았는데 皇極천황2년 (643) 권력투쟁으로 보이는 정변으로 야마시로노 오호애황자의 일족이 몰락하고 이까루가 궁은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약 100년 후 天平11년 (739) 이까루가 궁을 방문한 行信僧都는 너무나 황폐한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황태자인 阿倍內親王 (훗날의 孝謙천황)에게 진상하여 上宮王院를 부흥하였다. 그것이 동원이다. 이 때 行信이 유메도노의 본존(本尊)으로 안치한 것이 구세관음이다. 그러나 본존으로 새로 彫像한 것이 아니고 성덕태자와 연고를 가진 다른 사원에서 양도받아 안치했다 한다. 이 관음상은 페놀로사(Fenollosa, 1853 – 1908)가 동양의 모나리자에 비유한 신비한 미소를 띄고있으며, 당시의 도리(止利) 양식의 특징을 답습하고 있다. 일본의 미술사가는 7세기초의 彫像으로 추측하며, 태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작되었거나, 아니면 태자 자신의 모습이라 말하여 진다.

아스까(飛鳥) 彫刻의 巨星, 구라쓰쿠리노 토리 (鞍作止利)는 아스까시대를 대표하는 불사(佛師)로서,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상을 위시하여 소위 도리양식(止利樣式)이라 불리는 많은 불상을 남겼다. 도리란 이름이 정사에 처음 보이는 것은, 일본서기 아스까 元興寺의 彫像에 관한 기술이다. 이에 의하면 推古13년 (605), 아스까 元興寺 丈六금동불과 繡佛(천에 수를 놓은 것)의 제작을 구라쓰쿠리노 도리에게 명하여 다음 해 금동상이 완성되었으나, 상이 너무 커서 문을 부수지 않으면 안치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도리가 궁리하여 堂內에 안치할 수 있었다. 도리의 아버지는 다스나(多須奈), 할아버지는 시바 다쓰도 (司馬達等)라 하며 蘇我氏와 관계깊은 백제의 기술자들이다.

호류지에는 석가삼존상과 구세관음상, 百濟관음상과 같은 아스까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불상들이 있다. 석가삼존상은 금당에, 구세관음은 유메도노(夢殿)에 안치되어 있었지만 百濟관음상은 금당과 강당등을 전전하는 “유랑하는 불상”이었고, 1900년 무렵에는 奈良의 帝室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 그후 1998년 호류지안에 새로 百濟觀音堂을 지어 현재의 모습으로 안치되었다. 석가삼존상과 구세관음상은 아스까 전기, 百濟관음상은 아스까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삼존상은 광배에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이 불상을 도래인인 도리(止利)가 서기 623년 제작했음을 알수 있다. 구세관음상은 도리가 만든 건 아니지만 “도리(止利)양식의 보살상의 계보에 속한다고 하며, 중국 남조, 양(梁)나라 양식을 원류로 삼은 백제양식으로 부터 받은 영향을 지적할 수 있는 彫像이라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일본측의 견해이다.

현재는 1년 2회 봄과 가을에 일반에 공개된다. 이 불상 역시 한일간에 제작주체를 둘러싸고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세관음을 말 하려면 꼭 거론해야 될 사람이 있는데 미국인 어네스트 페놀로사 (Ernest Fenollosa, 1853 – 1908) 이다. 하바드 대학을 나오고 1878년 일본동경대학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는 繪畵에 특별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일본의 역사적인 고미술품의 발굴, 등록 및 문화재보호법 제정등의 탁월한 업적을 일본에 남긴다.

1884년 31세때 그는 일본정부의 보물조사단에 임명되어, 문부성직원이며 그의 제자인 오까쿠라 텐신 (岡倉天心)과 함께 나라와 쿄오토의 고대 신사와 사찰을 역방한다. 이 조사의 최대의 목적은 호류지 유메도노의 개비(開扉). 내부에는 천년전 창건시부터 “구세관음상 (등신대의 성덕태자상)”이 보관되어 있지만, 주지마져도 봐서는 안 되는 “절대비불” 로 되어있었다. 절대비불이란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되는 것으로 전 해 오는 비밀의 부처로 일본에 가끔 눈에 띄는 전통이다. 호류지의 승려들은 “개비하면 지진이 일어나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저항하였으나 페놀로사는 정부의 허가증을 내밀고 자물통을 열도록 압박하였다. 밀고 당기는 기나 긴 실랑이를 거쳐 유메도노에 들어가자, 승려들은 겁에 질려 모두 도망쳤다. 관음상은 천으로 돌돌 감겨 있었다.


페놀로사는 감격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오랜세월 동안 사용한 적이 없는 열쇄가 자물통속에서 금속음을 내었을 때의 감격은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다. 불상이 안치된 전각의 문을 열자, 목면의 천으로 붕대처럼 몇 겹이고 둘둘 감아진 사람 키 높이 정도의 물건이 있었다. 천은 약 450미터나 되었고, 그것을 푸는 것도 쉽지 않았다. 드디어 감겨있던 마지막의 천이 풀려 나가자, 이 경탄할 만한, 세계에 둘도 없는 彫像은 수세기를 지나 우리의 면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세관음은 보일 듯 말 듯, 미소짓고 있다. 이 장면을 바라 본 사람 모두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할 말을 잃었다. 호류지의 승려들이 믿고 있던 개비하면 세상이 멸망한다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세관음과 만나고 난 다음 해 1886년 32세때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도로 개종한다. 시가현 미쓰이데라 (三井寺 = 園城寺) 에서 수계(受戒), 체신(諦信)이란 법명을 받았다. 2008년은 그의 사후 100년이 되는 해라서 일본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많은 행사가 열렸다.

이상의 기록은 일본측 자료에서 찾은 내용인데 한국측의 홍윤기교수는 “성덕태자전력”과 “부상략기”속에 <백제 위덕왕이 부왕 성왕을 추모하여 왜 왕실에 보냈고, 호꼬지(法興寺) 금당에 서기 593년 안치시켰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불상은 백제에서 만들었으며, 왜 나라에 보내왔을 당시에는 호꼬지에 모셨던 것을 뒷날 호류지로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덕왕이 구세관음을 倭 나라로 보낸 발자취를 상세하게 기술한 것은 호류지 고문서 “성예초(聖譽抄)이다. 지난 날 필자 (홍윤기 교수)가 발굴한 성예초의 구세관음 기술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 위덕왕은 서거한 부왕인 성왕을 그리워하여 그 존상을 만들었다. 즉 그것이 구세관음상으로서 백제에 있었던 것이다. 성왕이 죽은 뒤 환생한 분이 일본의 가미쓰노미야(上宮) 성덕태자이다.( 저자 주: 성덕태자는 성왕의 손자). 가미쓰노 미야태자의 전신(前身)은 백제 성왕이다.> 성예초는 지금부터 약 600년전인 오에이(應永)연간 (1394 –1427) 호류지에서 저술된 귀중한 고문서를 1786년 호류지의 학승 센한(千範)이 다시 필사한 고문헌이다. 성예초보다 약 200년전인 13세기 사서인 부상략기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금당에 안치된 금동 구세관음은 백제국왕이 서거한 뒤에 국왕을 몹시 그리워 하면서 만든 불상이다 (故威德王 戀慕父王 狀所造顯之尊像 卽救世觀音像是也).이 불상이 백제국에 있을 때 백제로 부터 불상과 함께 율론(律論), 법복, 여승등이 왜 왕실로 건너왔다. (推古 원년조)>. 이 당시 6세기 말 경 벌써 백제로 부터 여승도 왜 왕실로 건너왔다고 한다. 또 여기서 금동불상으로 기술한 것은 녹나무에 금박한 것을 당시에는 나무가 아닌 청동에 도금한 것으로 잘못 알았던 것 같다.

홍윤기 교수는 동아미술사강 (有賀長雄 譯, 1912)에서 발췌한 것이라며, 페넬로사가 구세관음을 발견했던 장면묘사를 덧 붙히고 있다. < 마지막으로 감싼 천이 떨어지면서 이 경탄 해 마지 않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조상(彫像)은 대뜸 본인의 눈 앞에 나타났다. 모습은 인체보다 조금 컸고, 어떤 단단한 나무로 매우 면밀하게 조각했으며 금박을 입혔다. 머리에는 경탄스러운 조선식 금동조각으로 된 관(冠)과 보석을 흩뿌린 것 같은 여러 줄의 긴 영락이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일견 이 불상이 조선에서 만든 최상의 걸작이며 推古시대의 예술가, 특히 성덕태자에게 있어서 강력한 모델이 된 것이 틀림없다고 인식했다.> 이상이 홍윤기 교수가 쓴 구세관음 기사이다.

백제 위덕왕이 부왕의 모습데로 불상을 제작하여 외국의 왕 (당시의 推古천황) 에게 보내서 예배하도록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백제와 일본이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단순한 국가간의 외교관계라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 백제 왕을 포함하여 아스카의 왕들도 성왕의 아들과 딸이라고 알고 있다. 아버지 성왕의 모습으로 불상을 만들어 일본의 동생들에게 예배하도록 했다면 이야기는 쉽게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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