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3일 일본 아시히 신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내 보냈다. 율령제도 중국 -> 백제 -> 일본?
성덕태자에 의하여 시작되어, 나라(奈良 )의 도읍에 이르는 고대일본의 현대국가 만들기, 그 프로세스가 한국 부여에서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보이기 시작했다. 부여는 나라시대 일본과 가까운관계에 있던 백제의 수도. 중국에서 탄생한 율령제도가 백제경유로 일본에 전 해졌을 가능성과 아스까 시대 불교의 원류를 밝혀줄 새로운 역사상이 수면에 떠 올랐다.
앞면에 3행60자, 반대편 2행 57자가 해독되었다. 부여에서 4월에 출토된 길이 약 30센티의 목간을, 국립역사민속발물관의 平川南 관장등은 보자마자 出擧(스이꼬)의 기록으로 판단하였다. 618년 일본에서 율령제도가 아직 시작되기 전, 성덕태자의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파종시기에 벼의 종자를 농민에게 빌려 주고 수확기에 이자를 붙여 회수하는 것이 出擧. 이런 종류의 대차(貸借)는 어느 농경사회에도 있었다고 생각되나 나라 – 平安期 일본의 율령제도하에서 국가의 재정의 기둥으로 자리잡았다. 세금으로 걷어들인 벼를 운용하여 지방관아의 운영이나 사원의 운영등 폭 넓은 사회활동이 이 이자에 의존하였다. 중국의 율령에서는 보이지않는 재정운용제도로 일본 독자적인 제도로 이해되어 왔다.
목간에는 다수의 인명과 숫자가 기입되어 있었다. 빌려 준 벼의 회수상황의 기록이었다. 함께 출토된 목간에는 外(木+京)部 라는 글자가 있다. 일본의 大藏省에 해당하는 백제의 관청이다. 발견장소의 바로 윗쪽은 관청지구로 일대에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가 있었을 것이라고 발굴을 맡은 백제문화재연구원의 박태우연구실장은 추측했다. “국고에 수납된 벼를 운용하는 출거의 기록이다”라고 히라가와 씨등은 판단했다. 서식도 일본의 출거목간과 공통이며 이자도 일본과 동일한 5할이었다.
“제도도 기록방법도 일본과 동일하다. 재정제도로서의 출거는 백제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와세다대학의 李成市 교수는 말했다. 이번 목간의 발굴로 출거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출토품 가운데 종이 두루마리를 붙인 타이틀인 제첨축 (題籤軸, 다이센지쿠)가 1점 포함되었다. 기록된 2문자를 히라가와 씨는 “여장(與帳)으로 판독했다. 출거목간에도 “與 (공여하다의 의미)”의 문자가 있고, 전후문맥으로 봐서 “회수할 수 없는 分”의 의미라고 히라가와 씨는 해석했다.
율령체제는 문자에 의한 정치제도이다. 중국에서는 율령행정문서에 종이를 썼는데 일본과 조선에서는 목간과 종이를 병용하였다. 정창원문서와 목간의 연구에 의하여, 개개의 출거의 대부, 회수등이 목간에 기록되나 빌려 간 상대가 사망한 경우에 면제하는 등 감수(減收)의 경우, 인명과 이유를 일람하여 종이문서로 보고하였다.
제첨축은 종이 문서가 존재했던 것을 의미하며 여장은 출거로 빌려 주었으나 회수할 수 없는 상대와 그 이유를 기록한 리스트의 두루마리였을 것으로 히라가와 씨는 본다. 목간과 종이를 어떻게 구분하여 썼을까. 고대일본과 백제는 동일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출거뿐 아니고 행정시스템 전체가 백제에서 들여 온 게 아니겠는가.
중국을 모델로 한 일본의 율령제도라 하나 중국과 다른 것도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행정의 최소단위. 일본에서는 50호이나 중국은 100호. 이 차이는 일본의 독자적인 사정때문일까 아니면 조선제국의 영향일까. 견당사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알려졌으나 도입의 구체적 과정은 알려진 것이 없었다. 백제의 관여를 생각하더라도 백제의 행정제도 자체가 파악되지 않았다. 외경부라는 관청은 중국 북조의 사서에 기록이 있을 뿐으로 이번 그 실재성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한국의 목간연구는 아직 일천하다.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원 이용현 씨의 조사로는 발견된 목간은 전국 통 털어도 500점 정도로 대부분 화물을 보낼 때 붙인 꼬리표. 백제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 발견을 포함해도 60여점. 약 20만점 확인된 일본의 연구에 촉발되어 목간학회가 작년에야 발족되었다.
부여의 고고학 조사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으나 왕궁지역 중심. 일반지역은 개발계획이 있으면 조사한다. 이번 발굴은 창고건설을 위하여 30미터 X 30미터정도의 면적을 발굴한 것 뿐이다. 부여에서 어느 정도나 조사가 이루어졌느냐고 박 실장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0.01퍼센트라 한다.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열쇠가 이 古都의 땅 속에 잠들어 있으리라는 기대가 부풀고있다.
2008년 7월 19일 한국의 연합뉴스는 상기목간 발굴결과를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백제문화제연구원이 백제 마지막 수도인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발굴한 백제시대 목간은 정부가 구황기에 곡물이나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이른바 환곡문서이며 이런 공문서로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공문서를 통해 6 – 7세기무렵 백제조정이 구황기에 곡물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사실도 명확히 드러났다.
문자학 전공인 경기대 연구교수 손환일 박사는 최근 발간된 학술잡지 한국사상과문화 43집에 투고한 “백제목간 좌관대식기 (佐官貸食記)의 분류체계와 서체”라는 논문에서 이 목간은 좌관대식기라는 제목이 적힌 공문서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쌍북리 공장 창고 예정지의 백제시대 저습지에서 발견된 목간은 백제 위덕왕 5년(558)이나 무왕 19년(618)중 하나일 가능성이 큰 무인년 6월에 좌관(佐官)이라는 정부관직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세 각종 곡물을 대여한 기록으로 이보다 훨신 후대이긴 하지만 조선시대 환곡제도의 원류로 간주할 수 있는 자료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환곡제도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백제시대에 곡물을 대여하면서 정부가 이자놀이를 했다는 사실이 이번 쌍북리 목간을 통 해서 드러난 것이다. 이와같은 이자놀이 문서는 삼국시대 이전 자료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일본측 기사에 비해 한국측 기사는 내용이 빈약하고 피상적으로 느껴져 어쩐지 가슴 한켠이 허전한 느낌이다. 한일간의 역사의 진실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학문의 깊이로 결정될 것이다.
성덕태자에 의하여 시작되어, 나라(奈良 )의 도읍에 이르는 고대일본의 현대국가 만들기, 그 프로세스가 한국 부여에서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보이기 시작했다. 부여는 나라시대 일본과 가까운관계에 있던 백제의 수도. 중국에서 탄생한 율령제도가 백제경유로 일본에 전 해졌을 가능성과 아스까 시대 불교의 원류를 밝혀줄 새로운 역사상이 수면에 떠 올랐다.
앞면에 3행60자, 반대편 2행 57자가 해독되었다. 부여에서 4월에 출토된 길이 약 30센티의 목간을, 국립역사민속발물관의 平川南 관장등은 보자마자 出擧(스이꼬)의 기록으로 판단하였다. 618년 일본에서 율령제도가 아직 시작되기 전, 성덕태자의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파종시기에 벼의 종자를 농민에게 빌려 주고 수확기에 이자를 붙여 회수하는 것이 出擧. 이런 종류의 대차(貸借)는 어느 농경사회에도 있었다고 생각되나 나라 – 平安期 일본의 율령제도하에서 국가의 재정의 기둥으로 자리잡았다. 세금으로 걷어들인 벼를 운용하여 지방관아의 운영이나 사원의 운영등 폭 넓은 사회활동이 이 이자에 의존하였다. 중국의 율령에서는 보이지않는 재정운용제도로 일본 독자적인 제도로 이해되어 왔다.
목간에는 다수의 인명과 숫자가 기입되어 있었다. 빌려 준 벼의 회수상황의 기록이었다. 함께 출토된 목간에는 外(木+京)部 라는 글자가 있다. 일본의 大藏省에 해당하는 백제의 관청이다. 발견장소의 바로 윗쪽은 관청지구로 일대에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가 있었을 것이라고 발굴을 맡은 백제문화재연구원의 박태우연구실장은 추측했다. “국고에 수납된 벼를 운용하는 출거의 기록이다”라고 히라가와 씨등은 판단했다. 서식도 일본의 출거목간과 공통이며 이자도 일본과 동일한 5할이었다.
“제도도 기록방법도 일본과 동일하다. 재정제도로서의 출거는 백제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와세다대학의 李成市 교수는 말했다. 이번 목간의 발굴로 출거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출토품 가운데 종이 두루마리를 붙인 타이틀인 제첨축 (題籤軸, 다이센지쿠)가 1점 포함되었다. 기록된 2문자를 히라가와 씨는 “여장(與帳)으로 판독했다. 출거목간에도 “與 (공여하다의 의미)”의 문자가 있고, 전후문맥으로 봐서 “회수할 수 없는 分”의 의미라고 히라가와 씨는 해석했다.
율령체제는 문자에 의한 정치제도이다. 중국에서는 율령행정문서에 종이를 썼는데 일본과 조선에서는 목간과 종이를 병용하였다. 정창원문서와 목간의 연구에 의하여, 개개의 출거의 대부, 회수등이 목간에 기록되나 빌려 간 상대가 사망한 경우에 면제하는 등 감수(減收)의 경우, 인명과 이유를 일람하여 종이문서로 보고하였다.
제첨축은 종이 문서가 존재했던 것을 의미하며 여장은 출거로 빌려 주었으나 회수할 수 없는 상대와 그 이유를 기록한 리스트의 두루마리였을 것으로 히라가와 씨는 본다. 목간과 종이를 어떻게 구분하여 썼을까. 고대일본과 백제는 동일하게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출거뿐 아니고 행정시스템 전체가 백제에서 들여 온 게 아니겠는가.
중국을 모델로 한 일본의 율령제도라 하나 중국과 다른 것도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행정의 최소단위. 일본에서는 50호이나 중국은 100호. 이 차이는 일본의 독자적인 사정때문일까 아니면 조선제국의 영향일까. 견당사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알려졌으나 도입의 구체적 과정은 알려진 것이 없었다. 백제의 관여를 생각하더라도 백제의 행정제도 자체가 파악되지 않았다. 외경부라는 관청은 중국 북조의 사서에 기록이 있을 뿐으로 이번 그 실재성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한국의 목간연구는 아직 일천하다.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원 이용현 씨의 조사로는 발견된 목간은 전국 통 털어도 500점 정도로 대부분 화물을 보낼 때 붙인 꼬리표. 백제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 발견을 포함해도 60여점. 약 20만점 확인된 일본의 연구에 촉발되어 목간학회가 작년에야 발족되었다.
부여의 고고학 조사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으나 왕궁지역 중심. 일반지역은 개발계획이 있으면 조사한다. 이번 발굴은 창고건설을 위하여 30미터 X 30미터정도의 면적을 발굴한 것 뿐이다. 부여에서 어느 정도나 조사가 이루어졌느냐고 박 실장에게 물었더니 대답은 0.01퍼센트라 한다.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줄 열쇠가 이 古都의 땅 속에 잠들어 있으리라는 기대가 부풀고있다.
2008년 7월 19일 한국의 연합뉴스는 상기목간 발굴결과를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백제문화제연구원이 백제 마지막 수도인 충남 부여 쌍북리에서 발굴한 백제시대 목간은 정부가 구황기에 곡물이나 식량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음을 기록한 이른바 환곡문서이며 이런 공문서로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공문서를 통해 6 – 7세기무렵 백제조정이 구황기에 곡물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다는 사실도 명확히 드러났다.
문자학 전공인 경기대 연구교수 손환일 박사는 최근 발간된 학술잡지 한국사상과문화 43집에 투고한 “백제목간 좌관대식기 (佐官貸食記)의 분류체계와 서체”라는 논문에서 이 목간은 좌관대식기라는 제목이 적힌 공문서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쌍북리 공장 창고 예정지의 백제시대 저습지에서 발견된 목간은 백제 위덕왕 5년(558)이나 무왕 19년(618)중 하나일 가능성이 큰 무인년 6월에 좌관(佐官)이라는 정부관직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에세 각종 곡물을 대여한 기록으로 이보다 훨신 후대이긴 하지만 조선시대 환곡제도의 원류로 간주할 수 있는 자료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환곡제도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백제시대에 곡물을 대여하면서 정부가 이자놀이를 했다는 사실이 이번 쌍북리 목간을 통 해서 드러난 것이다. 이와같은 이자놀이 문서는 삼국시대 이전 자료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일본측 기사에 비해 한국측 기사는 내용이 빈약하고 피상적으로 느껴져 어쩐지 가슴 한켠이 허전한 느낌이다. 한일간의 역사의 진실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학문의 깊이로 결정될 것이다.
댓글 1개:
imped백제국 주명왕---> 백제국주 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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