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위덕왕의 장자 아좌태자 (일본명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의 기록이 일본서기 597년 기사로 나와있고, 일본에 성덕태자의 초상화가 전해 오는데, 아좌태자가 그려 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일본의 만원권 지폐에 이 초상화의 성덕태자상이 인쇄되어있다. 그런데 이 초상화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위작이라는 논란에 쌓여있다. 혈연상 아좌태자는 성덕태자의 사촌형이며 당시 장손집안의 장손이었으므로 왕위계승 서열상 차세대의 리더로 추앙받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598년 아좌태자는 부왕보다 한달 먼저 사망하였다. 2007년 부여 왕흥사사지에서 발굴된 사리함 기록으로 위덕왕은 577년경 아들을 잃었다 하므로 위덕왕은 생전에 아들 둘을 잃은 것이다.
2008년 2월 10일 “다시 쓰는 聖德太子像”이라는 東京新聞 사설에 주목한다.
실재에서 비실재로, 성덕태자상을 대부분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戰後 역사학이 도달한 성과임과 동시에 진실추구의 학문이 갖는 비정함이라고나 할까. 성덕태자를 모르는 일본인은 없다. 교과서풍으로 말하면, 6세기말부터 7세기전반의 아스까시대, 일본의 전통정신위에 불교와 유교의 외래사상을 터득하여 일본의 국력과 문화를 비약적으로 높여 세계의 선진국으로 진입시킨 것이 황태자였다. “융화가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라는 가르침,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그윽한 사랑의 눈길, 태자의 말씀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世間虛假 唯佛是眞” (인간세 허망하고 부처만이 진리이다)라는 무상관(無常觀)등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데……
그러나 근래의 실증적 역사학이 도달한 결론은 성덕태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결말이 날 것같다.
일본서기에 聖德太子 (574 – 622)라는 이상적인 성인이 등장하여 지금까지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아왔는데 최근 성덕태자의 실재성을 의문시하는 새로운 연구성과가 나와,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오오야마 세이이치 ( 大山誠一, 1944 - )가 저술한 “성덕태자의 진실”은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성덕태자 관련자료에 역사적사실은 전무하며 모두 후대의 창작임이 명료해졌다. 성덕태자는 가공의 인물이다. 성덕태자란 가공의 인물을 처음 창조한 것은 일본서기의 편자이다. 일본서기의 편찬은 681년 시작되어 720년까지 꼭 40년이 걸렸다. 면밀이 관찰하면 推古시대의 긴요한 부분에 성덕태자는 등장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의 관련은 신중히 배제되어 있으나 일본인은 “황태자 섭정”이라는 명칭에 현혹되어 당시의 정치전반에 성덕태자가 연관되어 있다고 착각하여왔다.
성덕태자 연구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서기에 태자의 작품으로 내용을 기록한 “십칠조헌법”과 삼경의소 (三經義疏). 수 많은 전승과 자료 가운데 태자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업적을 든다면 이 두 가지로 한정될 수 있다. 이 중 십칠조헌법은 이미 에도(江戶)후기의 고증학자가 태자작이 아니라고 단정하였고, 戰前 쓰다 소우키치 ( 津田 左右吉, 1873 – 1961)박사가 내용, 문체, 사용언어로 봐서 서기편집자들의 창작이라 결론을 내린 일로 와세다 대학에서 쫒겨난 것으로 유명하다.
삼경의소는 불교의 주석서로 태자자필로 알려진 법화의소도 현존하지만, 이것도 돈황학 (敦煌學) 권위의 후지에다 아끼라 ( 藤枝 晃, 1911 – 1998) 京都大 교수에 의해 6세기 중국에서 저작된 것으로 논증되었다. 세상에 알려진 법륭사 금당의 석가삼존상과 약사여래상, 中宮寺의 천수국수장 ( 天壽國繡帳 )도 그 광배의 명문연구나 사용된 달력의 검증으로 태자시대보다 후대의 작품임이 확실시 되었다. 국어국문학, 미술건축사, 종교사분야에서도 실재성이 점차 부정되어, 史實로 인정되는 것은 用明天皇의 實子 또는 친족으로 우마야도 (廐戶)王이 실재하였고 이까루가궁 (斑鳩宮)에 살았으며 이까루가 데라 (斑鳩寺), 일명 호류지(法隆寺)를 세웠다는 정도이며, 성덕태자는 일본서기에 의해 창작되고 후세에 날조가 더해졌다는 결론이 학계의 대세이다.
태자상이 창작, 날조되었다면, 누가 무었때문에, 또 그 근원에 있는 일본서기란 무었일까가, 고대사회 해명의 촛점이 되는 것은 필연. 이 모든 의문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이 持統天皇 (645 – 703) 측근의 후지와라 후히토 (藤原不比等, 659 – 720)라는 것이 오호야먀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서기는 養老4년 (720) 완성된 最古의 正史로 그 편찬과정에 율령체제의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었다. 수, 당의 통일과 동 아시아의 대동란, 그에 따른 大化의 改新과 壬申의 亂을 거쳐 고대사회의 倭의 大王(오호기미)은 일본의 천황으로 바뀌었다. 대 변혁의 시대 일본서기의 임무는 새로 탄생한 천황의 역사적 정통성과 권위의 구축이었다. 그것이 다까마노하라(高天原) – 천손강림 – 神武天皇 (Emperor Jimmu) – 현 천황으로 연결되는 만세일계의 사상과 논리, 중국황제에 견줄수 있는 聖天子 聖德太子의 권위의 창작, 이렇게 일본서기는 정치적 의도가 삽입된 역사서였다.
일본서기가 전개한 사상과 논리는 천삼백년의 현실을 그 모습 그데로 현대로 잇고 있다. 헌법과 황실전범은 “황위는 세습”되며 “황통에 속하는 남계의 남자가 이를 계승한다”고 정해져 있다. 그러나 만세일계는 자기자손을 황위로 세우려는 持統天皇 (Empress Jito)의 지칠줄 모르는 집념과 후지와라 후히토 (Fujiwara Fuhito)의 구상에 의해 생겼고 父系原理도 일본고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건국기념일에 영원할 듯 보이는 일본의 원리의 유래와 미래를 따져 보는 것도….
건국기념일, 2월 11일은 昭和 41년 (1966) 국민의 축일로 지정되어 1967년 2월 11일부터 적용되었다. 이 날은 일본서기에 神武天皇 ( Emperor Jimmu)이 즉위했다는 辛酉年春正月, 庚辰朔을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한 기원전 660년(660BC) 2월 11일에서 연유한다.
오호야마 세이이치 (大山誠一)교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성덕태자의 업적중에서 다음항목의 진실성을 부정한다.
관위 12계를 정하여 문벌주의를 배제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17조 헌법을 제정하여 천황중심의 국가이념과 도덕을 제시하였다.
오노 이모꼬(小野妹子)를 수나라에 파견하여 수나라와 동등한 외교관계를 열었다.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짓고, 소가노 우마꼬(蘇我馬子)와 함께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 가운데 1, 2, 3항은 이미 전회의 연재 “28. 왜왕 多利思北孤의 견수사” 에서 거론한 바 있다. 성덕태자 전설과 관련된 最古의 사료는, 法隆寺金堂의 약사상광배명, 석가상광배명, 中宮寺천수국수장의 명문등의 法隆寺관련사료와 일본서기에 국한된다. 통설로는 약사상 607년, 석가삼존상 623년, 천수국수장은 622년이후의 7세기전반에 제작되었다고 되어있다. 만약 이 말이 맞다면 720년 완성된 일본서기보다 앞 선다. 따라서 일본서기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사료라고 할 수 있으나 실재로 그럴까?
법륭사는, 현재의 가람보다 오래 된 와까쿠사(若草)가람적이 발굴되었으므로, 우마야도황자(廐戶皇子)가 건립한 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일본서기 기록데로 우마야도황자 사후, 天智天皇 9년 (670) 法隆寺가 전소했다면, 현 法隆寺내에 있는 석가삼존상이나 약사여래상등도, 推古朝시대의 오리지날이 아닌 셈이다. 물론, 불상이 복제되었다 해도 명문이 당초의 내용을 정확히 전하고 있다면 성덕태자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사상광배명도 석가상광배명도 천수국수장명문도 사용된 언어가 후대의 것으로 우마야도황자시대의 문장이라고 보기 힘들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약사상광배명과 천수국수장명문에 “천황”이란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 천황이란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당의 고종(高宗)으로 서기 674년 때이다. 이 말이 일본에 들어 와 689년 아스까 기요미하라령 (飛鳥 淨御原令)에서 정식으로 채용되어 天武天皇에게 처음으로 天皇號가 붙여졌다. 이 시대보다 앞 서 “천황”이란 말을 기록한 목간도 출토된 적이 없다. 만요슈(萬葉集)에서도 持統帝이전의 노래에는 천황이라 할 때 大王(오호키미)이란 칭호가 사용된다. 수서왜국전에 전해 오듯 推古朝시대의 천황은 대왕이라 불리었을 것이다. 석가광배명에는 법황(法皇)이란 칭호가 보이는데 이는 천황과, 불전에서 석가를 뜻하는 법왕과의 합성어라고 생각되므로 석가광배명도 天皇號의 성립이후에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외 이들 法隆寺관련사료에는 “法興元”과 같은 연호나 推古天皇의 화풍시호, 東宮, 佛師등 당시 사용될 리 없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점등을 고려하면 법륭사관련사료는 일본서기이후 성립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재 일본서기는 이들 사료에 대해 아무 언급도 없다.
일본역사상 성인의 반열에 드는 성덕태자를 일본서기에 기록하였는데 편찬자가 고의적으로 내용을 왜곡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서기의 왜곡을 짚어가며 외로운 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 가운데 일본학계에서도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양심적인 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이런 그룹의 학자들도 수나라의 배세청이 만나고 간 多利思北孤가 누구인지, 남송시대 왜의 5왕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만 통쾌한 답을 내 놓지 못한다.
추고 10년 (602) 신라 정벌군 대장 구메황자(來目皇子)가 2만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九州의 쓰쿠지(筑紫)에 상륙한다. 그해 6월 그가 병이 들어 다음 해 2월 사망하였다. 603년 4월 다기마황자(當麻皇子)를 다시 신라정벌군 대장으로 임명하고 7월 나니와(현 오오사까)를 출항하였다. 같은 달 다기마황자가 하리마에 도착하였을 때 종군중이던 사령관의 아내 도네리히메 (舍人姬)왕이 죽어 아까시에 장사지내고 신라정벌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해 10월 推古天皇은 오하리다노 미야 (小墾田宮)로 옮겼다.
추고 10년 기록된 위의 기사는 매우 중요하다. 신라를 정벌하려고 602년 2만 5천의 군사를 九州에 보냈는데 603년 사령관이사망하였다. 신라는 핑계일 뿐이고, 多利思北孤의 구주백제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전쟁에 패배한다. 603년 7월 2차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하리마의 아까시에서 구주백제군의 반격으로 정벌군 사령관의 아내가 사망한다. 구주백제군은 아스카를 점령하고 推古天皇은 거처를 오하리다 궁으로 옮긴다. 推古天皇, 황태자 우마야도황자 (廐戶皇子, 성덕태자의 모델), 소가노 우마꼬(蘇我馬子)등 아스카의 지배자들은 구주백제왕 多利思北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후 推古天皇이 황위에 있었지만 아스카의 실재권력자는 구주백제의 多利思北孤였다. 推古天皇은 多利思北孤의 고모 할머니이므로 상징적인 황위가 허용되었고 그녀의 사망후 多利思北孤가 敍明天皇으로 부임한다. 그는 할아버지 위덕왕처럼 불교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고 불교의 흥륭을 지원한 왕이었다. 일본의 현대 역사학자들은 아무도 多利思北孤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 多利思北孤, 敍明天皇, 백제 의자왕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일본서기에 603년 12월 구주백제의 관위 12계를 시행하고, 604년 4월 헌법 17조가 반포되고, 오노 이모꼬의 견당사 기사가 이어진다. 이렇게 7세기초 多利思北孤에 의해 세상이 바뀌었는데,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8세기초의 현실인식을 7세기초의 이 무렵에 삽입하여 일본이 관위 12계 – 불교흥륭 - 헌법 17조 – 견당사 파견 - 을사의 변 – 다이까노 가이신 (大化改新) - 중국의 선진문물 도입 – 율령국가의 확립에 자기조상들이 일관된 정책으로 국가에 공헌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을사의 변이라는 쿠데타의 주역, 나까토미 가마타리(中臣 鎌足, 614 - 669)의 아들, 후지와라 후히토(藤原不比等, 659 - 720)와 나까노 오호애황자의 딸 元明天皇(Empress Gemmei, 661 – 721)이 일본서기 편찬당시 권력자로서 자기 아버지들의 을사의 변이 일본의 근대국가 성립의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이 무렵 일본서기 기록이다. 거기 덧붙여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당의 고종에 비견될 성덕태자의 Fiction이 삽입되어 후대의 신격화가 이루어진다.
역사책에 씌여 있다 하여도 그것이 사실임을 보장받지 못한다. 진실한 뜻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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