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륙의 원주민 대신 오늘날의 미국을 차지한 유럽의 이주민들은 원주민과 시종 갈등과 긴장관계였다. 2세기 무렵의 백제와 일본열도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이주민이 월등한 문명과 무력을 가지고 토착민을 제압했으리라. 백제인이 말(馬)을 들여오기 전 일본에는 말이란 동물이 없었다고 한다. 장창을 흔들며 말을 타고 달리는 백제왕자 스사노오 (Susanoo, ? – 214)나 오호쿠니 누시 (Ohokuninushi, 大國主神, ? – 234)를 본 원주민들은 아마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일본열도의 원주민은 이때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을 처음 보았으리라. 2세기의 인물 스사노오, 2 - 3세기의 오호쿠니누시, 4세기의 야마토 다케루 (Yamato Takeru,日本武尊, 295 – 374)), 이들 모두가 신화속에 잠 들어있으나 백제왕실에서 파견된 왕자들이다.
대강 2세기부터 백제는 국가정책으로 대대적으로 일본을 개척해 나갔다. 강원도 소시모리(牛頭州)를 떠나 일본 이즈모(出雲)에 정착한 스사노오(백제 초고왕, ? – 214)) – 오호쿠니 누시 (백제 귀수왕, ? – 234) – 야마토 다케루 (백제 근초고왕, 295 - 375) – 호무다 천황 (백제 근구수왕, 320 - 394)으로 이어지는 백제왕실의 정복전쟁은 2세기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백제인은 국지적인 토착세력을 하나하나 굴복시켜 4세기 말경 야마토라는 강력한 정권을 수립하였다.
국가의 조직화 능력이 없는 자연상태의 일본열도를 조직화의 노하우를 먼저 터득한 백제왕실이 규합해 나간 것이 이 시대의 역사이며, 일본사서에 많이 나오는 용어로 쿠니쓰쿠리(國作)에 전념하여 倭를 세우고 군림한 사람들이 백제인이었다. 일본의 고대역사 기록에서 백제인에게 귀화인이나 도래인이란 말은 적당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래인의 숫자가 원주민보다 훨신 더 많았다고 하며, 백제인은 일본역사에서 타자(他自)가 아니라 즉자(卽自)적 존재이며 지배계급이었다. 이 시대 백제사람과 倭人간에 통역없이 말이 통하였다고 전한다.
근래 형질인류학이나 분자인류학등이 발전함에 따라 골격이나 두개골의 형상과 치형, 또 DNA등의 엄밀한 검사가 가능해졌는데, 비교검사결과 일본의 원주민과 도래인은 같은 인종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이 분석결과 일본인의 원주민과 도래인의 비율은 3 : 7 또는 2 : 8정도로 추산한다. 한반도의 신라, 또는 고구려사람들도 일본으로 이주했지만 국가가 개입했다는 흔적은 없다. 가야사람들은 지정학적 근접성 때문에 옛부터 많은 왕래가 있었고 많은 이주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백제는 왕실의 정책으로 일본을 경영코자 계획적으로 대량의 인력을 일본으로 이주시켰다.
한반도에 가까운 九州와 긴끼(近畿)지방에서 시작하여 소수의 원주민과 다수의 백제인이 서로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섞여 살았다고 봐야한다. 일본인은 백제인인 것이다. 서기 663년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의 일본역사는 독립된 역사가 아니라 백제역사의 일부로 봐야하지 않을까? 일본서기는 백제의 기존역사서를 기본으로 하여 일본측 기록을 짜 집기해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이해해야만 한일 양국의 고대사를 있는그데로 볼 수 있다. 백제인이 조직적으로 들어오기 전의 일본은 문자 그대로 순박한 원시의 평화로운 섬 나라였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자존심 상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백제가 착취를 목적으로 열도를 지배하려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백제는 군림하되 합병하지는 않았다. 수 많은 가야의 작은 나라들이 독립을 유지하면서 백제와는 공존의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열도의 각 지방에 흩어진 토착호족 세력과의 관계 역시 가야의 관계와 비슷했으리라. 백제의 담로제란 그렇게 느슨한 공동체같은 것이었다.
단지 조직화되지 못 한 원주민들을 백제의 인력, 선진기술과 문물로 조직화 해 나간 역사, 그것이 백제의 야마토 경영이었고 아스카문화였다고 본다. 야마토(倭), 아스까 (飛鳥)또는 나라(奈良)라는 명칭보다 요새말로 New Kudara(新百濟)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그런 관계가 백제와 일본의 관계였다. 이주한 백제인들은 일본의 여러 곳에 구다라 (百濟)란 이름을 붙였다. 百濟宮, 百濟寺, 百濟川, 百濟郡, 百濟觀音, 百濟大井 하는 식으로….
이 시대의 이민정책, 문화정책, 율령제도에서 불교의 전래까지 모든 것이 백제왕의 정책이었다. 서기 587년 불교의 전래를 둘러싸고 소가씨등의 숭불파와 모노노베노 모리야등의 배불파의 암투가 있었던 것처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식으로 당시의 역사를 보는 것은 국지적인 안목에 불과하다.
당시 백제왕의 의중을 읽고있던 세력과 읽지 못한 세력이 있었을 뿐이라고 본다. 소가씨는 헌신적으로 백제왕을 따르는 그룹이었고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소위 국제감각이 없는 그룹이었다는 것 뿐이다. 불교는 이 시대 이미 백제의 국교이므로 백제의 위덕왕은 불교를 수용하여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도록 동생인 일본천황들을 압박하였을 것이다. 소가씨가 무력으로 모노노베노 모리야을 죽이고 배불파를 제거한 것이 어찌 소가씨 혼자의 결단이겠는가?
백제 위덕왕은 일본의 敏達, 用明, 崇峻천황의 형님이며 推古천황의 오빠이다. 백제의 수도 부여에서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던 위덕왕은 적극적으로 일본에 불사를 일으키는 것을 장려하였다. 그리하여 소부리(所夫里, 부여의 백제시대 이름)의 구드레 포구 (현 부여시 구드레 공원일대, 구다라의 어원이라고 생각되는 한국말) 에서 일본의 나니와 (難波 – 현 오오사까) 에 이르는 뱃길은 백제의 인력과 물자를 실어 나른 하이웨이였다. 불교의 전래란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대규모적인 문물의 전래를 수반하였다.
일본의 불교전래기원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일본서기”는 552년 欽明天皇 13년 (552) 백제 성명왕이 조정에 사자를 보냈는데 그 중 한명이 누리시치게이 (怒唎斯到契)로 금동제 석가불 1체, 번개(幡蓋, 하타키누가사), 경론수권을 헌상하였다. “上宮聖德法王帝說”이라는 서물은 8세기초 성립하였다 하는데 일본서기와 비견되는 서적으로 주로 성덕태자의 전기가 적혀있다. 이 책에 의하면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欽明天皇 시대(538) 백제국의 주명왕 (성명왕)이 처음으로 건너와 불상, 경교(經敎), 僧等을 바쳤다고 나와있다.
577년 일본서기 기술에 의하면 “敏達天皇 6년 (577) 11월 백제국왕은 귀국하는 사신 大別王(오호와께노기미)등에게 경론 약간권, 律師, 禪師. 비구니, 呪禁師(쥬곤노 하까세), 조불공, 造寺工의 6인을 바쳤다. 그리하여 나니와(難波)의 오호와께노 기미의 절에 안치시켰다.
584년 9월 백제에서 鹿深臣(가후카노 오미)가 미륵보살 석상 1체와 佐伯連 (사에끼노 무라지)가 불상 1체를 가져왔다. 소가노 우마꼬가 전국에 수행자를 구하더니 하리마(播磨)에 惠便이라는 고구려 사람을 찾아내 불교의 스승으로 하고 3명의 소녀을 출가시켜 여승으로 하였다. 또 자기 집 동쪽에 불전을 건립하고 미륵보살의 석상을 안치하였다. 또 우마꼬는 石川( 이시가와)의 자택 – 石川精舍에도 불전을 짓고 불상을 안치했다. 585년 오호노노 오까 (大野丘)에 탑을 건립하였다.
587년 소가노 우마꼬 (蘇我馬子)는 무력을 의지하여 배불파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를 죽이고 불법흥륭을 목표로 본격적인 사원건립에 착수한다.
崇峻天皇 원년 (588) 백제가 외교사절이며 승려인 혜총(惠總)등 6인의 승려을 파견하여 불사리를 헌상했다. 이때 6인의 승려와 함께 寺工2인, 爐盤工1인, 瓦博士 4인, 화공 1인도 동시에 보냈다.”는 내용이 보인다.
588년 崇峻원년 최초로 건설된 것이 아스카촌 (明日香村)의 法興寺이다. 불법흥륭에서 두 글자를 따 法興寺라 한 것이다. 백제의 위덕왕은 백제의 정림사 (定林寺), 능산리사 (陵山里寺), 왕흥사 (王興寺)를 건축한 기술자를 보내,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기둥을 초석위에 세우는 백제의 최첨단 건축기술을 과시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사원으로 인하여 기와지붕을 처음 보았고, 주춧돌위에 세워진 기둥을 처음 보았으며 (이전에는 땅을 파고 기둥을 땅 속에 묻었다), 백제의 선진문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593년 推古원년 탑의 심초에 불사리을 안치하고 심주를 건립, 596년 推古 4년 주요가람을 완성하고 낙성식을 거행한다. 이때 백제에서 들어온 기술자들이 그데로 일본에 살게 되니 인력, 기술과 문명의 도입이 동시에 진행된다.
593년 推古 원년 나니와의 아라하까(荒陵)에 시덴노지(四天王寺)건립에 착수한다. 594년 推古2년 “불법흥륭의 조(詔, 미고토노리)”가 발표되어 각지에서 사원건설이 경쟁적으로 시작된다. 생명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받은 은혜가운데 가장 큰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고, 불상을 가까이 모시고 명복을 빌것을 장려하였다. 일본의 불교신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603년 추고 11년 야마시로(山城, 京都 南部)에 고류지(廣隆寺), 이까루가(斑鳩)에 호류지 (法隆寺) 건립에 착수한다. 고류지는 京都市 太秦(우즈마사) 에 있는 秦(하타)氏의 氏寺로 京都最古의 사원이며 국보인 미륵보살반가상을 가진 사원으로 유명하다. 추고천황 11년 (603) 황태자가 “내게 존귀한 불상이 있는데 누가 이것을 예배하겠느냐고 묻자 귀화인계의 호족 秦河勝 (하다노 가와까쓰)가 이 불상을 받아 蜂岡寺 (하치오까데라)를 세웠다한다.
推古천황 31년 (623) 신라와 임나의 사자가 내일(來日)하여 미래불의 불상을 葛野秦寺 (가도노하다데라)에 안치했다. 하치오까데라와 가도노 하다데라는 고류지의 다름 이름이다. 또 무로마치(室町)시대 편찬된 廣隆寺由來記에 백제의 불상이 황태자에게 바쳐졌다는 기록이 있어 廣隆寺 불상이 백제에서 왔다는 학설의 근거가 되었다. 황실의 대대적인 장려에 힘입어 불교는 비약적으로 신장되었고 推古 32년 (624) 사찰 46개, 승려 816인, 여승 569인으로 집계되었다.
현재 오오사까에 본사를 두고 사원건축 설계 시공 문화재건조물의 복원 수리등을 특기로 하는 金剛組 (Kongo Gumi)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143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회사이다. 아스까(飛鳥)시대 敏達천황 6년 ( 578) 창업된 회사라고 팜프렛에 기록하고 있으며 호꼬지(法興寺)를 건축하고 일본에 남아 시덴노지(四天王寺), 호류지(法隆寺)등의 사원을 건축한 백제의 기술자들이다. 현 오오사카 성 ( Osaka Castle, 大坂城)도 그들의 작품이다. 그로부터 40대 후손이 지금 회사를 맡고 있다 하니 백제 위덕왕의 시대와 21세기의 오늘은 면면히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아스까 문화를 두고 그 문화의 주역이 일본인지 백제인지 지금와서 다투는 건 今으로 古를 보는데서 생긴 오해이다. 古에서는 이들이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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