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7일 토요일

38.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2)

일본은 역사의 시대구분을 繩文時代 (Jomon Period, 14000 – 400 BC), 彌生時代 (Yayoi Period, 400 BC – AD 250), 古墳時代 (Kofun Period, 250 - 538), 飛鳥時代 (Asuka Period, 538 - 710), 奈良時代(Nara Period, 710 – 794), 平安時代(Heian Period, 794 – 1185), 鎌倉時代(Kamakura Period, 1185 – 1333)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연재에서 彌生時代, 古墳時代를 지나 지금 아스까 시대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야마토조정(倭 또는 大和朝廷)이라고 하면 위의 古墳시대와 아스까시대가 포함된다. 백제의 인물들을 이 시대에 대입하면, 스사노오(肖古 또는 建速古, 素盞鳴尊, Susanoo) 150년경, 구수(仇首 또는 貴須) = 오호쿠니누시 (大國主神) 170- 200년경이 된다. 일본서기는 이 시대를 가미요(神代)의 신화로 처리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사람의 역사로 처리되는 첫번째 인물, 神武天皇(Emperor Jimmu)을 BC 660년경의 인물로 기록하고 있으나 우리는 194 – 256년대의 실제 존재했던 인물로 본다.

이 보다 후대의 백제 근초고왕은 346 – 375년간, 50세에서 79세까지 왕위에 있었다. 20대에서 50세때까지 그는 일본에 있었는데 그의 활약상이 야마토 다케루(日本武尊)의 신화형식을 빌어 일본서기에 남겨져 있다. 이 사람의 아들이 그 유명한 근구수왕이며 백제왕은 375 – 384년간, 54세에서 63세까지 10년밖에 하지않았다. 나머지 세월은 일본의 應神天皇(Emperor Ojin)과 호무다천황(譽田天皇)으로 사실상 야마토의 건국시조이다. 근초고와 근구수의 부자가 백제와 야마토의 정상에 있던 이 시절부터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백제사람이 일본으로 이주되었다고 믿어진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 백제와 일본열도의 인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궁금하였는데 일본의 獨協의과대학교 독일어 문법교수, 테라카도 신(寺門 伸)교수가 2001년 쓴 “조선반도에서 일본을 바라본다 –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를 발견하였다. 이 글은 우리의 주제와 너무 어울려서 몇 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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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는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언어학의 입장에서, 그 친족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어를 공부해 보고, 나는 “일본에게 한국이란 무엇일까”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므로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주> 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란 정확히 말하면 “조선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의미한다. 현재의 한국과 북조선, 결국 조선반도 전체를 일괄하는 명칭으로 조선과 코리아가 생각되나 , 여기서는 - 문제가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 한국으로 대표하는 것으로 한다.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뿌리, 그리하여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립에 관련하여 여러 가설이 세워졌으나, (예를 들면 고교 교과서에 기록되어있는) 종래의 정설은 대강 다음과 같다. 태고적부터 일본열도에 살고있던 우리들의 祖先은 繩文文化라고 불리는 문화를 개화시켰으나 前 4세기무렵부터 대륙 또는 조선반도로부터 선진의 문화(彌生文化)를 받아들여 다시 발전하고 드디어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 그 국가를 통치한 왕이 현재의 황실의 祖이다. 繩文문화의 담당자를 繩文人, 彌生문화의 담당자를 彌生인이라고 하면, 繩文人 = 彌生人이라는 것이 이 설의 주장하는 바이다. 繩文문화의 담당자였던 일본인의 선조들이, 대륙과 조선반도의 진보된 문화를 받아들여 彌生문화라고 하는 새로운 문명단계로 진입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년, 형질인류학과 분자인류학, 바이러스학등의 발달과 더불어 골격이나 두개골의 형상과 치형, 그리고 바이러스와 DNA등에 의하여 엄밀한 비교가 가능하여졌고, 그 결과 繩文人과 彌生人은 도저히 동일인종이라 볼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이 밝혀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학자의 하니하라 가즈로오(埴原和郞, 1927 – 2004)씨는 “이중구조모델”이란 가설을 제출하고있다. 좀 지루하나 “일본인의 뼈와 뿌리”라는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이 가운데 埴原씨는 繩文系와 渡來系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도래계란 彌生人을 뜻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일본인에게 북동아시이적 특징이 많은 것은, 도래집단으로 부터 받은 강한 영향 때문이리라. 다시 말하면, 도래인의 수는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했다고 생각하지않으면 설명되지 않는다. 현재 일본인집단의 형성사는 새로운 시각으로 보지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단지 인류학적 연구성과에 의한 것 뿐아니라, 잇달은 고고학의 새로운 발견과 여러 유전자연구등에 힘 입은 바 크다. 이런 성과를 포함시켜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델이 적합할까. 일본의 구석기시대인과 繩文人은 원래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던 옛날옛적의 아시아인 집단 – 原아사아인 – 을 뿌리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 된다. 繩文人은 일만년이상의 장기간에 걸쳐 일본열도에서 생활하며, 온난한 기후에서 자란 독특한 문화를 성숙시켰다. 기후가 서늘해 짐에 따라 북동아시아 집단이 도래해 왔으나 , 아마 그들도 원래는 繩文人과 동일한 뿌리을 가진 집단이었으리라. 다른 점은 장기간에 걸쳐 극단의 한냉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냉적응을 이루어 그 祖先집단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륙에서 일본열도에의 도래는, 대략 繩文말기때 시작되었을까. 彌生시대가 되자 급히 증가하여 이후 7세기까지 거의 1,000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도래집단은 먼저 북부九州나 本州 일본해연안부에 도착하여, 도래인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조그만 나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그들은 동진하여 近畿지방에 이르고, 작은 나라끼리 항쟁을 거쳐 드디어 통일 정부, 결과적으로 朝廷을 수립하였다. 그후 조정은 적극적으로 대륙으로부터 학자, 기술자등을 받아들여, 近畿지방은 도래인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 토착의 繩文계집단을 동화하기위하여 북으로 남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여 일부지방에 정부의 출장소도 설치되었다. 도래계의 유전자는 이와같이 서서히 확산되었으나 繩文系와 渡來系의 혼혈은 近畿로 부터 멀어질 수록 희박해진다. 현대에 보이는 일본인의 지역성은 양 집단의 혼혈의 농담에 의해 설명된다. 혼혈이 거의 또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北海島과 남서제도에 繩文系의 특징이 농후하게 남겨 진 집단이 살고 있는 것도 같은 원리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일본인의 뼈와 뿌리에서)

이 “이중구조모델”가설은 현재 거의 학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것 같다. 이 설에 새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繩文문화의 담당자와 彌生문화의 담당자는 인종적으로 다르며, 현재의 일본인은 繩文인과 彌生인의 혼혈이다. (관서와 관동과 같은) 일본의 지역에 따른 문화적 차이는 양 집단의 혼혈의 비률의 차이로 설명된다.>
<彌生문화의 담당자는 渡來人들이며 近畿지방에 최초의 통일정부(조정)을 만든 것이 이들이다.>

현재는, 전에 말 했듯이, 인골(특히 두개골과 치형)과 DNA의 해석, 체내의 바이러스의 조사등으로 인종의 차이를 엄밀히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성과에 의하면 현재 일본인중 繩文人과 彌生人의 비율의 평균치는 “3대7”정도라 한다. ( “2대8”이라는 설도 있다.) 彌生人을 도래계라 부른다면 繩文系는 토착계라 할 수 있으므로 도래계의 비율이 토착계의 2배이상이라 할 수 있다.

<주>繩文人과 彌生人이라 하여도, 인류학적으로 말하여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이 그러 하듯) 대개 단일민족일 리는 없으므로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繩文문화과 彌生문화를 담당한 母 集團 (=동일한 문화를 담당한 인종적으로 동일한 다수파집단)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은 존재하므로 그것을 繩文人이나 彌生人으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해연안에서 발굴된 많은 유적으로 볼 때, 도래계인 彌生人들이, 주로 조선반도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은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어와 한국어 (=조선어)가 “기분나쁠 정도의 유사성”과, 일본인과 한국인의 멘탈리티의 친근성으로 봐서, 繩文문화가 일본문화에 준영향 (또는 남긴 영향이라 말하는 쪽이 정확할 지도 모름)은 종래 생각하여오듯 그렇게 크지않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주>국립민족학박물관교수의 고야마 슈우조(小山修三, 1939 - )씨는, 고대 일본인구의 추이를 통계학적 처리에 의해 추측하였는데, 일본의 인구는 繩文시대 말기에 한번 극단적으로 감소했고, 彌生시대에 들어와 폭발적인 증가를 보인다고 한다. 이 점도 일본문화와 일본인의 뿌리를 탐구할 때 참고가 될 것이다.

<주>”선사시대의 인구와 인구밀도”와 “선사시대의 인구추이”를 보면, 繩文시대의 초기 (8천년전, 20,100명)로 부터 전기 (6천년전, 105,500명)에 걸쳐 인구가 급증, 중기 (4천 3백년전, 261,300명)에 피크를 맞는다. 그후 감소하여, 웬지 만기 (3천년전, 75,800명)에 들어서는 중기의 3분의 1이하에 해당하는 7만5천인대까지 떨어진다. 이것은 괴멸상태로고도 할 수있는 인구붕괴이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彌生시대 (2천년전, 594,900명)에는 8배가까운 59만인대로 격증하고있다. 다시 그로부터 700년이 경과한 奈良(土師期, 5,399,800명)시대가 되자 열배 가까이 불어난다. (쿠마모토 히로히코( 隈元浩彦, 1961 - ) “우리들은 어디서 왔는가”매일신문사 P.139)

정직히 말하면, 계산할 당시, 내 자신, 외부에서의 인구유입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벼 농사를 시작한 영향 때문일거라고 생각하였다. 하니하라 (埴原)씨가 이 숫자를 보더니, 그렇다 하더라도 이 증가률은 너무 높다고 지적하였다. 역시 거대한 무리의 도래인이 열도에 들어왔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하니하라씨란 일본인의 “이중구조모델”론을 제기한 東大명예교수의 하니하라 가즈로오(埴原和郞, 1927 – 2004)씨를 말한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네, 그래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인구가 彌生시대가 되어 급격히 늘어나고 있어요. 한번 인구가 줄어들면 좀처럼 회복되기 힘 든 법이지요. 빠찡꼬나 경마를 할 때 계속 지면, 돈을 꾸어오더라도 본전 찾기 힘들거든. 그와 같은 이치지요. 지금 외부로 부터의 인구유입이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한번 인구가 감소경향에 진입하면 본래의 수준으로 회복하기 힘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彌生시대에 들어 인구가 급증한다. 이것을 설명하는데, 小山씨는 埴原씨와 마찬가지로 바다건너 도래한 사람들에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同書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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