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2일 금요일

21. The Battle of Baekgang (AD 663)

백제 의자왕의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중국에 끌려간 것은 660년이지만 백제 부흥군이 활동한 것은 663년까지이다. 의자왕 다음에 그의 왕자 부여풍장이 풍장왕으로 663년까지 부흥전쟁을 이끌었으며 백강의 전투를 끝으로 백제는 완전히 저항력을 상실하였다. 백강의 전투란 당 – 신라의 연합군과 백제 – 왜의 연합군이 백제의 마지막 명운을 걸고 맞 붙은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젊은 시절 해동의 증자라는 칭호를 듣던 의자왕도 그의 말년엔 범용한 군주가 되어 사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 했고 적국의 정보에 어두웠던것 같다. 당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5만 대군이 코 앞에 나타날 때까지 백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며 마지막에 죽기를 각오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의자왕이 가진 것의 전부였다. 계백장군은 전쟁터에 가기 전 아내와 자식들을 자기의 손으로 죽인다. 적에게 사로잡혀 수모를 당하느니 나라와 함께 모두 죽어야 할 때가 왔다고 믿었다.

야마토의 Jomei (舒明, 593 - 660) 천황이 629년 즉위하여 640년 사망했다고 일본기록에 씌여있는데 백제 의자왕은 641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다. 舒明천황은 야마토의 히꼬히토(日子人)태자의 아들이고 의자왕은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우리기록은 의자왕이 무왕의 왕자로 되어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위덕왕의 장자 아좌태자는 부왕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역사에 별로 기록이 없다. 여기서 히꼬히토 태자와 아좌태자가 동일인인가 아닌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일본측은 역사적으로 백제와의 연결고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황실에서 개인소장의 역사기록까지 죄다 압수하여 없애버렸다. 분서란 진시황의 독점물이 아니다.

660년 7월 9일 계백이 이끄는 5천의 백제군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백제군은 계백을 포함 전멸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서해를 건너 사비성에 이른지 3일만인 7월 13일 왕성이 함락되고 왕과 대신들이 당의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 당나라에 끌려 간 의자왕은 얼마 안 되어 사망했고 낙양성에서 10리 떨어진 북망산에 묻혔다. 곧 이어 백제의 대신이었던 귀실 복신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항전의지를 고취하니 도침, 흑치상지등이 합류하여 백제부흥군을 결성하고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해 한때 사비와 웅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을 회복하였다.

660년 10월 야마토의 사이메이(齊明)여왕(603 –661)은 조서를 발표하고 백제를 구원하기위해 거국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詔曰「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絕, 著自恒典。 百濟國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枕戈嘗膽, 必存拯救。 』遠來表啟,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雲會雷動, 聚集沙彔, 翳其鯨鯢, 紓彼倒懸。 宜有司具為與之, 以禮發遣。 」云云。 送王子豐璋及妻子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立豐璋為王, 立塞上為輔, 而以禮發遣焉。

“옛적에도 백제가 우리에게 군사적지원을 요청한 경우가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단절된 왕조를 복원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언제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다. 백제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우리의 지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처한 우리의 결단은 확고하다. 나는 우리 장수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갈래로 진군하도록 명 할 것이다.”

661년 1월 여왕이 몸소 노쇄한 몸을 이끌고 지원군을 진두지휘하기 위하여 큐우슈우를 향해 서쪽으로 항진한다. 이 해 쯔쿠지의 아사쿠라에 임시행궁을 설치하고 구원작전을 지휘하다가 7월 24일 여왕이 사망한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장(622 – 686)이 지원군을 이끌고 661년 백제부흥군과 합류하여 풍장왕이 되어 부흥군을 지휘한다. 한편 웅진도독 유인원은 본국 당나라에 추가병력을 요청한다. 고구려 정복전쟁에 바쁜 와중에도 당은 7천의 추가병력을 보내 2차 나당 연합군이 결성된다. 663년 8월, 2년 5개월동안 준비를 끝낸 야마토의 지원군 2만 7천이 800척의 배에 타고 백제부흥군의 거점 백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제 해전사에서도 유명한 백강의 전투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백제부흥군의 본거지는 주류성,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이 성은 지금 우금산성이라 불린다. 백제부흥군은 이 주류성에서 사비성 탈환을 위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주류성을 포위하고 있다. 야마토 지원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 나당 연합군의 목표였다. 아마토의 지원군은 목이 좁은 동진강 (역사에 백강, 백강구 또는 백촌강으로 기록됨)으로 들어와 강변에 상륙하여 성안의 부흥군과 합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의 7천 군사가 170척의 함선으로 동진강 입구를 차단했다. 야마토의 대군이 한꺼번에 동진강으로 들어올 수 없는 지형이었고 일본군은 이 곳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는 지식이 없었다. 663년 8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야마토의 지원군은 처절한 패배에 직면한다. 400척의 함선이 파괴되고 10,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부흥군의 부여풍장은 몸을 빼어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9월 7일 주류성이 함락되고 백제의 부흥시도는 좌절되었다. 백제왕족과 대신가족들은 주유성을 빠져나와 나흘동안에 광주를 거쳐 보성군 득량면까지 200리 피난길을 강행군으로 돌파한다. 피난민들은 보성군 득량면에서 야마토 수송선을 타고 보성만을 탈출하여 큐우슈우에 상륙, 야마토의 백성이 된다. 6.25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남으로 피난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이들은 백제의 관직에 따라 일본에서 직책이 부여되고 정착지를 배정받았다. 백제의 지식층이 대거 일본에 유입된 것이다. 이 후에도 통일신라에서 배척받게 된 백제시절의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은 이 전쟁에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개입하였을까? 일본영토에 위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반도에 국한될 전쟁에 일본이 왜 국력을 총 집결하면서 사이메이 천황이 여자의 몸으로 노구를 이끌고 큐우슈우까지 나와 전쟁을 독려하였을까?

역사학자들이 지금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백제와 일본이 서로 다른 나라였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 온 독자들은 백제와 일본이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있다. 의자왕은 629년 – 640년까지 야마토의 Jomei (舒明)천황이었고 641년 백제왕으로 부임했다. 그때 그는 이미 49세였고 660년 당에 끌려 갈 때 68세였다. Saimei 천황은 백제 무왕의 딸로 의자왕의 후비이며 부여풍장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 난 아들이다. 백강전투에서 패배한 부여풍장은 역사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일본으로 돌아가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추고 살았다. 형님이며 천황인 天智에게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승려가 되어 입산까지 해야 했다. 671년 12월 3일 권력의 화신 天智천황이 사망하고 672년 부여풍장은 왕위에 있던 어린 조카를 무찌르고(임신의 난) 673년 2월27일 왕위에 오르니 그가 天武천황이다. 이때부터 처음으로 살아있는 현직의 왕이 천황으로 호칭된다.

681년 3월 17일, 덴무천황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 야마토 왕국을 위한 역사를 편찬하라고 명한다. 백제와의 단절을 통하여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을 예방하고 일본열도의 토착세력임을 내세워 국내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려는 천황가의 심모원려였다. 古事記는 덴무천황이 옛 상고역사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뿌리를 부정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이후로 일본에서는 역사란 국익에 부합해야 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명치유신이후 현재까지도 일본인은 역사란 국가가 편찬한 국사를 뜻한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 역사가 기술되므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역사기술이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일본이다. 중국에서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의 사기이래 형성된 정사(正史)라는 개념은 일본에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적 스칼라 슆의 기준으로 보면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역사가 아니라 옛날 이야기(物語 – 모노가타리)에 불과하다. 중학교 교과서 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본조야의 시각은 1300년전의 텐무의 시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역사란 현재의 관심을 표현한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모든 사가들이 백강을 금강으로 비정하였으나 백강과 주류성의 실재위치는 1997년 원광대학교 전영래 교수에 의해 비로소 확인되었다. 주류성은 현 전북 변산반도에 있었으며 백강은 동진강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세만금 간척지 남측 제방이 변산반도에서 시작되어 군산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동진강은 세만금 간척지 내부의 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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