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일 토요일

18. 慈覺大師 圓仁 (794 – 864)

9세기 동지나해의 항해와 관련된 기록이 圓仁의 여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 나온다. 그의 여행기 가운데 항해관련기록과 그가 중국여행중 동행하거나 만난 신라인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더듬어본다. 8세기이후 일본의 견당사선은 척당 135 – 150명의 인원이 승선하고 4척 총 550 - 60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반 정도가 선원이고 나머지는 외교사절단, 의사, 통역, 사수(경비원), 유학생, 유학승, 세공사등이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는 하까다를 출발하여 잇끼, 쓰시마를 경유 한반도 남해안,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고구려령을 피하여 황해를 횡단, 산동반도에 상륙했다. 백제가 없어진 뒤에는 한반도 항로를 택할 수 없어 일본에서 바로 동지나해를 횡단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후로 견당사선의 난파사고가 급증한다.

Ennin의 견당사선은 4척으로 구성되었는데 837년 출발하다가 4척중 제3선이 파선되고 제2선은 책임외교관이 꾀병을 부려 도망하는 바람에 1선과 4선의 두척의 배가 838년 6월 13일 하까다에서 승선, 3일간 바람을 기다리다 18일 志賀島까지 가서 또 5일간 바람을 기다린다. 22일 五島列島의 宇久島에 닿고 다음 날 오후 6시 중국으로 출항한다. 두 배는 모닥불을 피워 신호를 하면서 첫 밤을 보내고 6월 24일 항행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밤 사이에 두 배는 서로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27일 선체의 목제를 잇는 철재이음매들이 선체요동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탈락된다. 28일 출항 5일 만에 대륙연안에 도달한듯 바닷물이 황톳빛이다. 사람을 육지에 보내 알아보니 장강하구의 양주 해능현이라 한다.



이때 단기유학승으로 당에 온 Ennin의 나이 45세였다. 7월 2일 상륙허가가 나오고 함께 일본을 출항했던 4선은 산동반도 북방의 발해에 표착했다고 들었다. 839년 2월 12일 Ennin일행의 천태산유학이 거부되고 일본에 귀환하라는 조칙이 내린다. 견당사가 일본에 돌아갈 신라선 9척을 사들이고 해로에 익숙한 신라인 60여명을 고용하여 각선에 나누었다. 이때부터 Ennin은 불법체류를 무릅쓰고 중국에 남을 궁리를 한다. Ennin과 두명의 승려가 신라인 통역 김정남과 짜고 출항하는 견당사선에서 도망하여 천태산으로 향하던 중 당의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해주아문으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4월 10일 다른 견당사선 편으로 강제송환되어 일본으로 출항했는데 몇차례나 조난을 당하여 표류에 표류를 거듭하다 6월 23일 산동반도의 적산포에 표박한다. 그러다 7월 16일 Ennin을 비롯한 승려 3명을 불법체류자로 남기고 이 배는 출항한다. 이런 연유로 적산포에 있던 법화원에 이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장보고의 법화원은 이들에게 최대의 편의를 제공한다.

Ennin이 장보고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법화원을 담당하고 있던 신라사람들, 압아 장영, 욱정, 왕훈등의 도움으로 여행허가를 받아 순례에 나서기 전인 840 년 2월 17일 Ennin은 장보고 앞으로 편지를 쓴다. “求法의 여행이 끝나면 적산으로 돌아왔다가 청해진을 경유하여 일본에 돌아가고 싶읍니다. 돌아가는 것은 대강 841년 가을쯤이 되리라고 추정됩니다. 혹시 청해진 방면에 사람이나 배의 왕래가 있을 때 소승 일행이 묻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소승일행이 일본에 돌아갈 수 있으냐 없느냐는 오로지 각하의 손에 달려있읍니다.”

840년 4월 1일 여행허가를 받아 오대산으로 떠난다. 5월 1일 오대산 도착, 8월 22일 장안도착, 841년 1월 당 무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회창이라 함. 이 해 11월 청해진의 장보고가 신라 조정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된다. 842년 10월9일 회창폐불이 시작되어 승려의 환속, 재산몰수, 승려의 외출금지, 외국승려의 추방등의 정책이 추진된다. 845년 5월15일 추방령에 따라 장안출발, 6월 양주, 7월 초주, 해주를 거쳐 밀주, 8월 채주경유 등주도착, 그리고 적산포 법화원에 초최한 모습으로 돌아와 장영의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그들은 다시 3년간 적산포 법화원의 신세를 지면서 일본에 갈 배를 기다린다. 드디어 847년 9월 2일 정오 신라사람 김진의 배를 얻어타고 적산포 출항하여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9월 4일 날이 밝을 무렵 동쪽에 산이 보이기 시작하다. 충청남도 해안에 도착한것이다. 그날 밤 10시경 전라남도 진도서쪽의 高移島(김대중 대통령 출생지 하의도)에 정박하다. 9월 6일 오전 6시 무주(광주)의 남방영역 黃茅島(丘草島라고도 함, 진도군 거차도)의 泥浦도착하여 정박하다. 9월 9일 전라남도 여수 근처 안도(雁島)에서 휴식하고 남동으로 나아가자 9월 10일 날이 샐 무렵 동쪽 저 멀리 대마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오부터 일본의 산하가 보이고 오후 8시경 히쩬국 마츠우라 북부의 시카시마에 도착 정박하다.

이렇게 圓仁의 일기는 838년부터 847년까지의 기간을 기록하고있다. 그간의 우여곡절은 헤아릴 길이 없고 감개무량 했을 법하지만 일기는 담담하게 특별한 감상도 없이 끝맺는다. 그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인(백제때 진출했던 백제교민을 지칭)들의 도움으로 밀입국, 불법체류, 체포, 강제송환, 조난, 표류, 회창법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장보고에 대한 최상의 존경과 예의를 갖춰 그의 일기를 기록하고있다. 엔랴쿠지에서 적산명신(赤山明神)을 모시는 것은 장보고를 추모하는 圓仁 자각대사의 유언에 따라 이루어 진 것이다. 이 일기에 의거하여 9세기의 선박이 어떻게 대양을 횡단하였는지, 얼마나 많은 인원이 승선하였는지는 물론 당시 장보고의 활동무대와 신라교민에 관한 많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 기록의 도움으로 장보고는 비로소 역사의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nnin은 그런 식으로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장보고에게 진 신세를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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