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일 월요일

22. 조선식산성 (Korean-style fortress in Japan)

7세기말 백제 의자왕의 아들 天武天皇이 황실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백제와 관련된 사실을 감추려고 애 쓰던 태도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본의 학자들이 큐우슈우에 즐비한 조선식산성을 놓고 한반도와 관련이 있는 이 용어자체를 쓰지않으려고 고대산성이란 용어를 생각해냈다. 그들은 사실데로의 역사가 아니라, 좋은 역사만 후손에게 가르치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본다. 그들은 역사란 진실의 기록이 아니라 권력에 이로운 기록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교과서 문제, 독도문제, 과거사 사과문제, 위안부문제,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인권유린행위에서 야쓰쿠니신사 참배문제까지 문제의 본질은 일본인의 이러한 역사인식에 있다. 일본은 진리보다 체면과 이해관계를 우선시키는 나라이다

백촌강전투이후 수 많은 백제유민을 수용하면서 일본은 당과 신라연합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백촌강에서 참패한 663년부터 당의 군사가 한반도에서 물러가는 676년까지의 13년간 패전국 일본은 시종 전전긍긍하면서 한반도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하여 백제출신 장군들을 동원하여 백제식산성을 축조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64년 미즈끼(水城), 665년 나가도노끼(長門城), 오호노쬬(大野城), 기이쬬(基肄城), 667년 타까야스노끼(高安城), 야시마노끼(屋島城), 가네다노끼(金田城)등의 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있으며 실재로 백강(백촌강) 패전후 축조된 산성이 12개소에 남아있다. 이들은 자연의 산을 이용하며 많은 돌을 쌓아서 돌담을 축조하는 등 그 형태나 구조가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산성과 닮아 있으며 백제에서 망명해 온 장군들의 지휘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인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이러한 성은 훨신 후대 전국시대의 아즈찌성(安土城)이 처음이다.

일본어로 성(城)을 읽을 때 “-쬬” 또는 “-노끼”로 읽히는데 외국인은 틀리기 쉬우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읽는데 자신이 없으면 한자로 쓰는게 가장 안전하다. 일본역사학자들이 조선식산성대신 고대산성으로 표현코자 하였으나 코우고이시 (神籠石)라 불리는 고대산성이 출현하여 용어의 혼란이 생기자 하는 수 없이 고대산성 = 코우고이시 and 조선식산성으로 타협해서 쓰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확한 명칭은 백제식산성이라 해야하나 백제관련사실은 몸에 두드러기가 날듯 오리발을 내미는 판이라서 조선식산성으로 된 것이다.



서기 1898년 큐우슈우의 고우라산(高良山) 에서 이상한 돌담이 학계에 처음 보고된 이래 비슷한 돌담이 북 큐우슈우에서 세도나이 연안에 걸쳐 16개소나 알려졌다. 이들 돌담의 특징은 표고 200 – 400 미터의 산정에서 중턱에 걸쳐 수 킬로미터의 길이에 이르고 한 변이 70센티미터 정도로 깬 돌을 배열하고 골짜기를 통과시는 수문을 설치했다. 이 돌담이 옛부터 코우고 이시라고 불렸다 하여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지금도 코우고이시(神籠石)라 부른다. 이 코우고이시를 고대산성의 하나로 취급하게 되자 이와 다른 성격을 가진 백강전쟁 패전후 축조된 산성을 의미하는 조선식산성이란 용어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세이조(成城)대학교 후루다 다케히코(古田武彦) 교수는 일본천황가보다 먼저 큐우슈우에 큐우슈우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역사학자이다. 그는 이 코우고이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있다.

코우고 이시는 수백 미터에서 천 미터 가까히 산 중턱에 벽돌 모양 가공된 거석으로 산 허리주위를 둘러 싼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 일부에는 반드시 수문이 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산중에 몸을 피할 병사나 민중을 위해 만들어진 물의 시설이다. 이것은 외적 (고구려나 신라 또는 당 등) 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군사적 요새의 잔해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성립시기는 종래 6 – 7세기로 알려졌지만 최근의 연륜측정법에 의하면 5 – 6세기 성립가능성이 높다. 이 군사요새지의 건설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이러한 방어물의 대상이 되는 치쿠지(현 후쿠오까현)와 히쩬(현 사가현)에 군림하였을 왕조일 수 밖에 없다. 결단코 긴끼지방(야마토)의 천황가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명치이후 관찬의 역사학은 외면하였고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삭재되었다. 이 군사요새는 당연히 백촌강 전투이전 건설되었다. 따라서 7세기 전반의 스이코(推古, 536 – 628)천황. 쇼토쿠(聖德, 574 – 622)태자를 마치 일본열도의 군주중의 군주인 것처럼 선포해 온, 명치이래 금일에 이르는 일본의 학계와 교과서는 모두 결정적으로 부정직했던 것이다.

이 神籠石가 언제 – 왜 – 누가 만든 것인지 기록에 나타난 바는 없다.

백강전투 이후 조선식산성을 열심히 쌓았던 天智천황시절 국방관련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664년 5월 백제진압군 당나라 장군 유인원이 파견한 곽무종이 일본에 왔다. 이 해 대마도, 잇끼도, 북 큐우슈우에 수비병을 배치하고 봉화대를 설치한다. 또 쯔쿠지(현 후쿠오카 다자이후)에 큰 제방을 쌓고 물을 저장한 미즈끼(水城)를 축조한다.

665년 8월 백제 달솔 달본춘초(達本春初)를 보내 長門國에 축성, 또 달솔 억례복류(憶禮福留)와 달솔 사비복부(四比福夫)를 쯔쿠지국에 보내 오호노쬬(大野城)과 키이쬬(基肄城)를 축조한다.

665년 9월 당의 사신 유덕고, 곽무종등 254명이 왔다가 12월 돌아가다. 이들은 일본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667년 3월 조정대신과 백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수도를 내륙의 오오미(近江, 현 시가현 오오즈시)로 옮긴다. 이로 인해 민심이반이 생기고 매일 밤 도처에 화재가 발생한다. 이 해 10월 고구려 남생이 당나라에 귀순한다.

667년 11월 9일 백제진장 유인원의 웅진도독부 웅산현령 법총등이 와서 쯔쿠지도독부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13일 돌아가다. 이 달 야마토에 다까야스노끼(高安城), 사누끼(讚岐)에 야시마노끼(屋島城), 쓰시마(對馬)에 가네다노끼(金田城)을 쌓았다.

668년 9월 신라 사단급찬 김동암(金東巖)등 진조. 김유신에게 선물로 배 한척, 또 신라왕에게 배 한척을 선물. 668년 대당장군 영공(英公)이 고구려 멸망시킴.

670년 신라와 당이 전쟁상태 돌입하고 9월 쓰라타리를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

671년 12월 3일 오오미노미야(近江宮)에서 天智天皇 사망.


백촌강 전투가 끝난 뒤 당의 사신들이 수시로 일본을 드나드는데 구체적인 역사기술은 없으나 당은 전승국으로서 일본의 전쟁책임문제로 여러가지 질문을 했을 것으로 보이나 큰 문제없이 지나갔다. 일본의 백제관련 역사왜곡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당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시작되었으리라. 일본은 이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한반도에서의 침입로에 해당하는 곳에 백제사람들의 힘을 빌려 성을 쌓았고 이것들을 후대에 조선식산성이라 불린 것이다.

댓글 2개:

꼬비에뚜 :

선생님 이 글 제 블로그에 옮겨실었습니다.
백강(백촌강)전투에 대해서 조금 조사해보았습니다,

: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