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15일 금요일

20. 보타산 (普陀山, Putuoshan)


전남 곡성군 오산면에 관음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순천 조계산 송광사의 성보박물관에 이 절의 역사를 기록한 관음사 사적이 보존되어있다. 사적에 의하면 관음사는 서기 300년께 창건된 유서깊은 절이다. 사적에 기록된 창건설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심청전의 근원설화를 담고있다. 충청도 대흥현에 원량이라는 장님이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한 홍장이라는 외동딸과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공덕을 쌓으면 눈을 뜰 수 있다는 흥법사 성공스님의 말을 듣고 외동딸 홍장을 절에 시주하였다.


2007년 1월 16일 중국 浙江省 舟山市 普陀山의 沈家門鎭에서 沈家門 沈院 개원식이 열렸다. 이는 효녀심청공원이며 순 한국식 전통 건축양식으로 건축되었다. 곡성군수이하 23명의 곡성 축하사절이 참가하여 우리 농악놀이가 울려퍼졌다.

중국 보타도에는 효녀 심청의 본명이 원홍장이고 심봉사로 알려진 원량의 딸이었으며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부처님께 바쳤다가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 상인인 심국공에게 팔려갔고 결국 그의 부인이 되면서 심청으로 개명했다는 설화가 전해 와 이곳 보타도가 심청의 무대임을 보여준다. 홍장은 서기 301년 지금의 완도군 소량포에서 배를 타고 보타도에 왔고 312년 고향에 관음상을 보낸다. 이 관음상이 곡성군성덕산 기슭에 안치되고 관음사가 창건된다.

주산군도의 보타도라면 지금도 쉽게 갈 수없는 머나 먼 땅 같지만 옛날 옛적 사람들이 왕래했던 흔적이 나타나서 놀라게 된다. 보타도는 고려 충숙왕(1294 – 1339), 문장을 날렸던 이제현(1287 – 1367) 그리고 나옹화상(1320 – 1376)이 다녀 간 여행자의 순례코스였다. 普陀山志에 의하면 863년 일본승려 Huie(惠萼)가 오대산에서 모셔 온 목조 관음상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탔던 배가 닝보를 떠나 보타도에 와서 신라초에 좌초했다. Huie는 조음동(潮音洞)에서 상륙하여 자죽림(紫竹林) 한 가운데 장씨댁 (張氏宅)에 관음상을 안치했다. 이 곳이 후에 Bukenqu 관음원(不肯去觀音院, Reluctant to go guanyin yuan)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보타산에 동진시대(317 – 420) 이미 관음암이 있었다고 한다. 고기잡이와 장사로 척박한 삶을 살았던 이 지역사람들은 일찍부터 관음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관음신앙이 산동반도의 법화원으로 그리고 완도의 관음암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장씨댁에 관음상을 안치했다는 대목에 주의한다. 이상하게 이 무렵 장보고의 장씨가, 장영(적산포 장보고의 휘하로 장보고 사후 청해진 대사가 된 인물), 장지신(장보고 시대 명주와 보타도에 근거를 둔 신라상인이며 쾌속항해가), 장춘(818년 일본에 4마리의 노새를 헌상), 장종언, 장공청, 장각제(819년 형제가 야마가타 현에 표류)등,일본과 중국기록에 많이 나온다. 혹시 보타도에 근거를 두었던 장씨의 집성촌이 있지 않았을까. 장보고의 아이덴티티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Bukenqu Guanyin Yuan(不肯去觀音院)을 검색하면 일본승려 Huie의 이야기가 나오고 Bukenku관음원이 아예 일본승려가 지은 사찰이라고도 나온다. 산동반도 적산 법화원을 일본승려가 지었다고 주장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일본 관광객들은 긍지를 가지고 조상들의 자취를 찾아서 이곳에 몰려든다. 역사에 그럴싸한 기록을 한 글자만 발견해도 일본인은 침소봉대하여 자랑스런 조상의 기록으로 만든다. 이 고래심줄보다 끈질기고 주도면밀한 일본인의 집념과 아집앞에 독도가 아무리 우리 땅이라고 고함을 질러도 저 사람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확실한 학술적인 반론이 없는 한, 잊을만 하면 자기 땅이라고 들고나올 것이다. 저들은 이미 한국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들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 잊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예상하고 휴가를 떠났다.

보타산은 관음신앙의 거점으로 2006년 한해 320만의 관광객이 찾았고 외지의 방문자는 무조건 25달라의 입장료를 내야된다. 보타산 조음동(潮音洞)은 높이 10미터 깊이 30미터의 자연동굴로 파돗소리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신라의 상인들은 明州(현 닝보)를 왕래하면서 보타도에 들렀는데 항로에 암초가 있어 이를 신라초라 부른다. 2003년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舟山市와 협력하여 신라초기념비를 세웠다. 고려시대에도 상인과 승려의 왕래가 빈번하여 고려도두(高麗道頭)라 불리는 해변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선박이 정박하던 해변이다.

우리는 자연과학이라는 신앙에 빠진 나머지 옛날 사람들은 행동반경이 극히 좁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옛 사람들도 대양을 무대로 당당하게 살았던 것 같다. 위에서 거론된 장지신이란 사람은 847년 6월 22일 37명의 선원과 함께 닝보를 출항하여 6월 24일 현 나가사끼현 五島列島의 和平島에 도착하였는데 이 기록이 중일간 범선 최고 항속 기록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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