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書 順帝 昇明1년 (서기 477) 倭에서 사신이 와서 興이 죽고 동생 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武는 스스로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을 칭하였다.
송서 순제 승명2년(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여기서 그는 고구려의 무도함을 규탄하고 부형의 시절부터 고구려를 응징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와 형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나 이제 자신이 그 뜻을 실현코자 한다고 하며 송 황제의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황제는 그를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앞서 “14. 왜의 5왕(The five kings of Wa)” 편에서 다룬 이 기사는 한일 양국의 학자들에게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있고 또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이므로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설명이 되지 아니할까? 중국사서도 사람의 손으로 씌여진 이상 전적으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은 사마천이 확립한 역사 편집의 정신만은 유지하면서 역사를 다루어 왔다. 일본서기는 황실의 정통성을 확보하여, 당시의 황실이 영원히 군림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씌여진 것이므로, 역사기록에 작위의 가능성이 커진다. 진실보다 황실의 이해관계가 우선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은 하나의 왕조가 끝 나고 역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현 왕조의 영원성을 확보하려는 작위를 역사서에 가미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송서에 나온 당시의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많으며, 이 사실이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는 일본서기가 오히려 작위의 냄새를 풍긴다. 서기 478년의 상표문을 살펴보자.
황제의 책봉을 받은 저희 나라는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外臣으로서 그 藩屛이 되는 나라입니다. 옛부터 저희 祖先은, 스스로 갑주를 입은 채, 산과 강을 누비며, 쉬는 날도 없이, 東으로 毛人을 정벌하기를 55국, 西로 衆夷를 굴복시키기를 66국, 바다건너 평정하기 海北 95국에 이르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었읍니다. 王道는 멀리까지 고루 미치고, 영토는 광활하게 펼쳐져, 중국의 위세가 머나 먼 변방까기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고, 저희 나라는 대대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을 빠지지 않았읍니다.
저는 비록 아둔하지만, 황공하옵게도 先代의 뜻을 받들어, 제 밑에 있는 사람들을 독려하여, 천하의 중심인 중국에 歸一하고, 백제를 경유하는 항로를 통하여 조공할 수 있도록 선박을 마련하였읍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게도 백제의 정복을 꾀하여 변경을 침범하고 살륙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조공이 지체되고 순풍이 불더라도 배를 띄울 수 없고, 사신이 길을 나서더라도 순조롭게 조공을 바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읍니다.
저의 亡父 濟王은, 원수의 나라 고구려가 倭가 중국에 가는 길을 가로 막는 것에 분노하였고, 백만의 병사는 이 정의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떨치고 일어나 바다를 건너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때, 돌연히 아버지와 형들을 잃어 모처럼의 기회를 잃고 말았읍니다. 그리하여 상을 치르기 위하여 군을 움직일 수 없어 결국 잠시동안 휴식하느라 고구려 세력을 꺾지 못하고 있읍니다. 이제 때가 되어 武備를 갖추어 父兄의 유지를 다하려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용사로서 떨쳐 일어나, 눈 앞에 번쩍이는 칼날이 들어 와도 물러 설 수 없읍니다.
황제의 은혜를 입어, 이 강적 고구려의 힘을 꺾고 곤란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父祖의 공로에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의 官을 칭하고, 제 밑에 있는 제장에게도 각각 칭호를 내려 충성을 독려하고자 합니다.
封國偏遠, 作藩于外. 自昔祖禰, 躬擐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忝胤先緖.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遙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 道圖欲見呑. 掠抄邊隸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或通或不. 臣亡考濟, 實忿寇讐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堰息未捷, 至今欲鍊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効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仮開府儀同三司 其余咸仮授 以勸忠節
5세기의 왜왕 武는 한 반도의 고구려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니 송 황제도 지원해 달라는 상표문을 올리고 있다. 한반도의 작은 나라들은 그의 눈에 보이지도 않은 것처럼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명칭을 요구하더니 478년에는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의 관직을 요구한다.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는 황제 밑에 있는 최고의 관직이다. 그러나 이 요구에 대하여 송 황제는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까지는 허락한다. 백제를 빼고 6국제군사는 인정한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의 諸國보다 우월한 왜왕의 지위에 만족해 한다.
그런데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기사가 있다. 모인55국, 중이66국이 일본열도라는 것은 일본학자도 인정한다. 문제는 渡平海北 九十五國부분이다. 이 부분이 한반도를 지칭하는 것은 확실하게 보인다. 과연 그 시절 倭武王의 아버지 倭濟王이 한반도에 건너와 95국을 평정한 역사가 있었을까? 또 그가 고구려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 사실일까? 한국 역사가들이 단연 No라 하는 이 부분을 우리는 Yes라고 답한다.
앞에서 거론한 바 있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를 지금 우리의 현재의 가치판단을 가지고 이해하면 안 된다. 임진왜란 한일합방등으로 얼룩 진 굴절된 역사에 의하여 형성된 현재 한국인의 대일 감정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새로운 의식지평에서 이해되고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기분이나 이념성향으로 5세기의 역사를 볼 수는 없다. 그때 일본과 백제는 같은 나라였으므로 백제왕은 아버지가 맡고 왜왕은 아들이 맡고 있었다. 백제왕과 왜왕이 한 집안 식구였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시절 서기 392년부터 백제는 시련을 맞는다. 야마토의 신라공격과 대방공격 및 고구려의 가야정벌 기사가 나오는데, 일본열도는 그 시절 고구려로 부터 자유로웠을까? 일본서기는 이에 대하여 말이 없다. 일본황실은 만세일계를 고집하므로 일본을 정복한 사람도 皇系의 사람으로 위조하여 역사를 기록한다. 한 두번이 아니다. 일본의 19대 允恭천황이 바로 광개토대왕의 왕자로 일본을 정복하고 왕이 되었으나 일본역사는 그가 정복자임을 감추었다.
다만 그의 이름을 해괴하게 기록하였다. 고사기에 允恭天皇 (393 - 453 )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라 하였다. 宿禰는 천황의 신하의 姓인데 宿禰天皇이라고 야유했으며, 間稚子란 이름을 썼는데 이는 高安(광개토왕의 이름)의 어린새끼라는 뜻이 된다. 일본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만세일계를 믿는다. 신용할만 한 동시대의 문자자료가 없으면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기록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서기 432년 允恭은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즉위한다. 일본열도도 마침내 고구려 세력이 된 것이다.
백제의 반격은 개로왕자에 의하여 서기 440년경부터 시작된다. 近畿지방의 允恭의 예봉을 피하여 모인55국, 중이 66국의 關東, 東北지역과 九州의 남부지역이 이에 포함된다. 고구려군에게 초토화된 한반도의 가야지역 역시 민심을 수습하고 백제를 중심으로 다시 결속하도록 독려한다.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95국이라는 숫자는 얼마나 의미를 갖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國이란 신라나 백제같은 國이 아니라 훨신 작은 단위의 인간집단을 가리킨다.
서기 453년 允恭이 친 아들에 의하여 독살되고 456년 安康이 살해되는 혼란을 틈 타 雄略이 정권을 잡았으나 백제세력은 때를 놓치지 않고 458년 雄略을 제거하고 야마토를 탈환한다. 서기 455년 개로왕자가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461년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내 일본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한다. 이 해 시마왕이 태어난다.
바로 그 무렵,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51 년 (서기 463) : 송나라 세조(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장수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책봉하였다.
일본열도는 백제가 다시 장악하였으나 백제 위례성에 들어 온 개로왕은 자나깨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당한 치욕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중국의 북위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개로왕 18년(서기 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렸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서기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四道]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危懼] 혹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일본서기 雄略 20년(서기 475)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 와 7일간 밤 낮으로 왕성을 공격했다. 왕성은 함락되고 본거를 잃었다. 국왕과 황후, 황자들은 적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 년 (서기 476) : 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漢北)의 백성(民戶) 들을 이주시켰다. 3월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여름 4월에 탐라국(耽羅國)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가을 8월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서기 476년 문주왕 2년 송나라에 가던 사신이 고구려에 막혀 되돌아 왔다. 이 시대 왜나 백제에서 송나라에 가는 항로는 九州 후쿠오카, 잇키 섬, 쯔시마, 거제도, 한산도, 남해도, 돌산도, 완도, 해남, 진도, 압해도, 지도, 변산반도, 선유도, 태안반도, 덕적도, 영종도, 강화도를 경유하여 백령도에서 중국의 산동반도에 이르고 거기서 양자강 하류까지 육지를 따라 내려간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의 남진이후 황해도 전역이 고구려 영토가 된다. 당연히 상기 항로의 요충 백령도와 황해도 장연, 옹진지역이 고구려 수중에 들어가 고구려의 Coast Guard가 관할한다면 백제와 왜의 대중국 항로는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3 년 (서기 477) :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重修]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 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封)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서기 477년 야마토의 淸寧천황 곤지가 백제에 나왔다. 야마토를 떠날 때 시마왕을 倭武王으로 봉하여 왕권을 넘겼다고 본다. 왜무왕은 일본서기에 천황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락되었다. 8세기의 일본에 있던 백제의 역사가들은 왜무왕의 정체가 1971년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에서 백일하에 드러 날 것을 알고 누락시킨 것처럼 절묘하다.
宋書 順帝 昇明1년 (서기 477) 倭에서 사신이 와서 興이 죽고 동생 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武는 스스로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을 칭하였다. 전사한 개로왕의 장자가 백제를 포함한 7국제군사를 자칭하는 것이니 별로 모순되는 요구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송서 순제 승명2년(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거기서 백제에 대한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송 황제는 그를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한 것은 서기 463년 장수왕이 송으로 부터 이 관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무왕의 상표문에 의하면 亡父 濟는 475년 이전 고구려를 응징하려고 하였으나 475년 고구려가 먼저 침입하여 아버지와 형들이 죽었다고 한다. 472년 북위를 끌어들인 일이 성사되었다면 고구려 응징이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북위도 고구려를 두려워 하고 있었으므로 개로왕의 상표문은 장수왕에게 그대로 알려진다. 그리하여 장수왕의 백제 섬멸 계획은 3년간 치밀하게 이루어 졌다.
일본서기 雄略 23년 (서기 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하고 있는 곤지왕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찌쿠지국(筑紫國)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24대 동성왕이다. 雄略 23년이라 하나 淸寧천황 즉 곤지의 치세이며 그에게는 이 때가 가장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될 시기였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同年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거기서 찌쿠지국(筑紫國)의 아치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 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이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는 유일한 관련기록이다. 이때, 479년, 淸寧천황과 왜무왕이 위의 선단과 함께 일본에서 사라진다. 그들이 어디서 무었을 하였는지 모른다. 야마토는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이 두 사람이 일본을 비운 사이 顯宗천황 武烈천황을 거치면서 大伴金村이 권력을 장악하고 백제에 저항하였던 이야기는 앞에서 나왔다. 서기 479년부터 501년 왜무왕이 백제 무령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나 478년 송에 보낸 상표문과 관련하여 고구려에 대한 적대행위를 했을 것으로 본다.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실적이 미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기 484년 삼국사기 동성왕 6년 대 중국 항로가 고구려에 의하여 제지 당하는 모습이 또 나온다. 봄 2월에 왕은 남제(南齊)의 태조[祖]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을 책봉(冊封)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복속[內附]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가을 7월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약사(若思)는 서해 바다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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