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898년 찌쿠고국(筑後國) 코우라산 코우고이시(高良山神籠石)가 학계에 소개되면서 코우고이시(神籠石)의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코우라산(高良山)은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 치쿠고강(筑後川)의 남안에 동서 방향으로 돌출한 미노우산지(耳納山地)의 서단부에 있다. 코우라산(高良山) 남측 약 1500미터에 걸쳐 약 1300개의 열석(列石)이 확인되었다. 북측에도 열석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확인된 바 없다. 高良山神籠石가 알려진 뒤 북부 큐우슈우에서 10개소, 세토나이(瀨戶內) 연안 6개소에 걸쳐 神籠石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앞으로 더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神籠石란 표고 200 – 400미터의 산 허리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한변이 대략 70 cm 정도의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배열한 것을 말한다. 골짜기에는 성벽을 쌓고 수문을 설치하였다. 高良山神籠石가 발견되고 나서 처음에는 신성한 영역(靈域)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후 발굴성과가 쌓여 가면서 산성(山城)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神籠石의 축조주체와 건설의 경위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주장이다.
대략 70 cm x 70 cm x 100 cm 규격으로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표고 200 – 400 미터의 산허리을 감싸, 山頂쪽으로 板築된 土壘를 설치하고 이 列石 바깥에 목책을 두른 것이 이 산성의 본래 모습이었다고 본다. 전쟁이 터지면 민간인과 군인이 모두 산 정상에 피신하여 적과 대치할 수 있도록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텐찌(天智)천황 때 산성(山城)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나와 있다. 백제 멸망 후 큐우슈우(九州)를 비롯한 여러 곳에 조선식산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神籠石에 관해서는 역사 기록이 없다. 神籠石가 조선식산성보다 시대적으로 앞 선다고 보나 누가, 언제, 왜 축조하였는지 모른다. 역사가들이 이러한 성을 쌓을 필요가 있을 만한 시대를 찾기 위하여 아무리 역사책을 더듬어 보아도 서기 527년의 이와이(磐井)의 난 이외에 九州에서 역사적 이벤트를 발견 할 수 없다. 역사에서 찾아지는 것이 없으니 이와이(磐井)에게서 설명을 구하려 하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현실이다.
九州의 이곳 저곳에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 10개소의 神籠石가 확인되는데 왜 일본의 역사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이 없을까? 이런 기록이 없는 것은 일본서기나 고사기가 객관성이 결여된 역사서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황실의 만세일계라는 신화를 위하여 역사서에 작위가 가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일본 고대사의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았다는 기록은 반 쯤 거짓이다. 천황가의 만세일계는 천황가에서 만든 신화일 뿐 인간세의 역사의 격류는 고대사의 천황만을 피해 가지 않는다. 천황의 재위기간도 작위가 많다. 일본서기의 단편적 기사는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 있으나 위의 천황의 혈통과 재위기간은 믿을 게 못 된다.
그 옛날 0.7 x 0.7 x 1 미터의 석재를 가공하여 표고 200 – 400미터의 산 허리까지 운반하여 산성을 쌓으려면 수 많은 인력과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대규모의 전쟁 행위가 역사에 빠져있다. 일본황실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이 기원전 660년부터 현재까지 만세일계로 내려 왔으니 아무도 황실에 도전하면 안 된다는 신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일본 역사서는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황실이 정복되었던 역사적 사실은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였다.
코우라야마(高良山)는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에 있고 서쪽으로 뻗은 미노우산(耳納山)의 서쪽 끝 부분이다. 미노우 연산(耳納連山)의 서단에 위치한 코우라산(高良山)은 표고 312미터로 시내 어디서도 바라보이는 쿠루메시 (久留米市)의 심벌이며, 옛날에는 타카무레야마 (高牟禮山)라고 불렸다.
미노우 산지(耳納山地)는 쯔쿠시평야(筑紫平野)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며 아리아케해(有明海)에서 치쿠고강(筑後川)을 따라 북상하면 평야가 병 목처럼 좁아지는 부분에 반도상으로 돌출해 있다. 高良山神籠石가 묻혀져 있는 그 선단부 부근은, 히젠(肥前), 히고(肥後), 찌쿠젠(筑前), 후젠(豊前) 방면등 큐우슈우 각지로 빠지는 교통로가 전부 이 근방을 통과해야 되는 전략적 요충이다. 거기에 찌쿠고강(筑後川)을 끼고 있으니 하천을 매개로 하는 수상교통으로 보더라도 전략거점에 다름 아니다.
이 高良山 중턱에 高良大社가 자리잡고 있고, 이 高良大社는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高良玉垂命)라 불리는 카미사마(神樣)를 모신다. 高良大社는 닌토쿠(仁德)천황 55년 (서기 367) 또는78年 (서기390) 진좌(鎭座), 리쮸우(履中)천황 원년 (서기400)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高良玉垂命神社”로 기재되었고, 명신대사(名神大社)로 지정된 찌쿠고국(筑後國) 제1의 궁(宮)이다. 또 제신(祭神)의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高良玉垂命)는 국내최고의 신명장(神名帳)으로 알려진 “筑後國神名帳”에 의하면 조정으로 부터 정일위(正一位)가 수여되었다고 한다.
닌토쿠(仁德)천황은 313년부터 399년까지 8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초대천황 진무(神武)의 즉위를 기원전 660년으로 올리기 위하여 인교우(允恭)이전의 천황연대를 고무줄처럼 늘려 잡은 탓이다. 실제 닌토쿠(仁德)천황은 서기 397년 즉위하여 419년 전사할 때까지 22년간 왕위에 있었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사망 서기 394년은 정확한 기록이며 공위(空位)의 3년을 계산에 넣으면 닌토쿠 원년은 서기397년이 된다. 따라서 닌토쿠(仁德) 55년이나 78년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고 역사를 다루어야 되는 역사가들이 딱할 뿐이다. 그러므로 상기의 高良大社 유서내용(由緖內容) 가운데 닌토쿠(仁德)천황 또는 리쮸우(履中)천황의 시대는 취하나 서력에 해당되는 연도는 고구려, 백제, 유송의 기록과 일본서기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정한다.
광개토대왕비문을 따라가 보자. 서기 400년 영락10년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비병… 농성 왜구.. 성을 쳐부시고 ….안라인 수비병……….…쳐부시고……안라인 수비병.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서기 404년 영락14년,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서기 407년 영락17년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佳城,○○○○○○, 나○성 등을 다시 깨트렸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가장 요긴한 대목에서 해독불가한 글자가 너무 많아 안타깝다. 서기 400년 기사를 보면 고구려군은 임나가라국 종발성까지 쫒아 가는데 종발성이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대강 현재의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이 있는 지역 또는 김해시의 가락국 왕궁이 있던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
서기 404년 야마토의 仁德천황은 야마토의 군대를 파견하여 아신왕의 백제군과 연합작전으로 대방땅을 공격한다. 仁德천황과 아신왕은 근구수(應神王)의 아들로 친 형제간이다. 서기 407년 고구려의 응징이 따르는데 서기 400년 정벌한 한반도를 넘어 큐유슈유(九州)로 작전지역이 확대된다. 고구려는 대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일거에 장악하는 작전을 쓰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왕자 한 사람을 파견하여 열도를 점차적으로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 임무를 받고 큐우슈우에 들어 온 왕자가 진(珍)이었고 쿠루메시(久留米市) 코우라산(高良山) 중턱에 고구려의 전초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곳에 지금 코우라 대사 (高良大社)가 자리잡고 있다.
서기 412년 영락 22년 10월 광개토대왕이 나이 39세로 사망한다. 서기 414년 9월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진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는 이때 고구려에 들어가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417년 경 쿠루메시(久留米市)에 돌아왔다.
일본서기 仁德 12년 (서기 417) 7월 고구려가 철로 만든 방패와 표적을 보내왔다. 8 월 고구려의 사자를 환대했다. 오하쯔세노 미야쯔코(小泊瀨造)의 祖先의 스쿠네노오미(宿禰臣)를 천황은 사카노코리노 오미(賢遺臣)라 불렀다. 무심하게 기록된 이 부분을 주의깊게 살펴야 된다. 인교우(允恭) 천황의 시호가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으로 宿禰天皇이기 때문이다. 고진(高珍)이란 이름의 고구려군 사령관이 직접 야마토의 닌코쿠(仁德)천황을 찾아와 고구려의 무기를 과시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14년 (서기 419) 천황이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사냥하였다. 큰 사슴, 원숭이, 멧돼지가 여기저기 흘러 넘치도록 많이 있는데도 파리처럼 잽싸게 도망가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점을 쳐 보니 섬을 지키는 귀신의 심술 때문임을 알았다. 아카시(赤石, 현 兵庫縣明石市)의 바닷속에 진주가 있는데 그 진주를 갖다 바치면 짐승을 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신탁을 얻었다. 여기저기서 아마(海人)을 모아 赤石의 해저로 내려 보냈으나 수심이 깊어 아무도 바닥까지 잠수하지 못 하였다. 그러자 아하노쿠니(阿波国) 나가노무라(長邑)에 사는 오사시(男狭磯)란 아마(海人)가 허리에 줄을 감고 잠수하였다. 한참만에 나온 그는 “해저에 커다란 전복이 있는데 뭔가 빛을 발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오사시(男狭磯)는 다시 잠수하여 큰 전복을 안고 나왔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그 전복을 쪼개자 뱃속에서 복숭아씨와 같은 커다란 진주가 나와, 그 진주를 신에게 바치고 많은 짐승을 사냥하였다. 또한 오사시(男狭磯)의 희생을 슬퍼하여 묘를 만들어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그 묘는 지금도 있다고 전한다. 사카이(堺)의 거대한 仁德천황릉을 연상하면 된다.
위의 기사를 우리는 仁德천황의 사망기사로 이해한다. 仁德천황의 이름은 오호사자키(大鷦鷯)인데 윗 기사는 오사시 (男狭磯)의 사망을 전한다.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호사자키(大鷦鷯)가 전사하고 야마토는 패배하였으나 고구려군은 야마토로 진격하지 못 하고 九州로 퇴각한다. 이번 전쟁에서 사카노코리노 오미(賢遺臣)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고 본다.
고구려의 왕자 高珍은 이때부터 병석에 누워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이 때 高珍이 머문 곳이 현 高良大社이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가 高良山의 高良大社에 진좌하여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군은 쿠루메(久留米)로 퇴각하여 사령관이 완치될 때까지 공격에서 수비로 작전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백제와 킨키(近畿)의 야마토로부터 언제 반격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고구려군은 만주에서부터 자기들의 장기(長技)인 산성축성에 들어간다.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랴오닝성 본계시 환런의 오녀산성(五女山城) 사진을 보면 고구려인들이 九州에서 무슨 대비를 할 지 감이 잡힌다. 고구려가 개국초기 자기보다 강한 적을 예상할 때 그들은 산 정상에 피난처를 마련하였다. 九州에 집중되어 있고 세토나이 (瀨戶內)의 전략적 요충에 고구려의 산성이 건설된다.
그리하여 高珍이 야마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전쟁행위가 모두 역사기록에서 제외된다. 천황가의 만세일계 그리고 영원한 군림만이 천황가의 목표였고 이를 위한 심모원려가 일본서기였다. 이런 역사서를 기본으로 고대사를 연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학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천황가의 역사조작은 치밀하고 완벽하여 지금까지 아무도 일본열도의 神籠石가 고구려의 유물이라고 생각 해 보지 않았다.
참고로 지금까지 神籠石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코우라산 (高良山): 福岡県久留米市 高良山 南側의 約1500미터에 걸쳐 約1300個의 列石이 確認되었다. 北側에도 돌이 있었다고 推定하나 確認된 바 없다. 이 부분은 日本書紀에도 기록된 天武7年12月(서기 679)筑紫의 大地震으로 崩壊되었다고 생각된다.
2. 조야마 (女山): 福岡県미야마市瀬高町女山에 있다. 가까운 高田町의 竹飯의 山에서 1미터 内外의 長方形의 石을, 잘라내서, 山위로 날라 총 3킬로 가까이 整然하게 나열하였다.
3. 오쯔보산 (おつぼ山): 佐賀県武雄市橘町에 있다. 昭和39年調査에서 列石의背後에 版築에 의하여 축조된 土塁가 存在하며, 또 列石의 全面에 3 미터 間隔으로 堀立柱의 痕跡이 발견되어 山城임이 確定的으로 되었다.
4. 라이잔 (雷山): 福岡県前原市의 雷山(標高955m)의 北中腹, 標高400 – 480 미터의 山中에 축조된 고대산성이다. 城의 範囲는 東西300m, 南北700m정도로 생각된다. 여기서 糸島地方은 물론 博多湾이나 玄界灘까지 일망무제로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5. 고쇼가타니 (御所ヶ谷): 福岡県行橋市西南部와 京都郡勝山町, 犀川町가 境界를 接하는 山塊에 位置하며, 그 대부분이 유쿠하시시 (行橋市) 側의 南斜面에 있다. 列石東端部에 있는 標高 247m의 호토기산(ホトギ山)을 最高所로 하여, 그 延長은 約3km에 달한다. 土塁는 높이 約5m、幅 約7m로 質이 다른 흙을 版築工法에 의하여 쌓아 올렸다.
6. 카케노우마 (鹿毛馬): 福岡県嘉穂郡頴田町에 있다. 서기 1997년까지의 調査 結果, 水門部(西側谷部分)에2개의 暗渠와 版築에 의한 土塁의 모양이 알려졌다. 이번 調査에서 土塁中에 直径45cm의 기둥(柱)이 발견되고, 약 3m 間隔으로 8本을 나열한 것이 確認되었다. 以前부터 確認된 바 있는 約3m 間隔으로 列石前에 설치된 直径 約30cm의 기둥과 今回 発見된 土塁中의 기둥을 組合하여, 다시 板材를 써서, 列石을 基礎로 설치된 土塁를 축조했다고 생각된다. 土塁中의 柱列의 存在는, 古代의 版築이라는 土木技術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暗渠는 모두 全長約 18m 規模로, 土塁幅 約9m, 柱의 間隔3m를 단위로 하는 工事의 規格性이 엿 보인다.
7. 하키 (杷木): 福岡県朝倉市杷木地区에 있다. 神籠石은 長尾城과 우노기죠우 (鵜木城)를 둘러 쌓듯 약 2km에 걸쳐 縦横70 cm정도의 큰 돌을 이어놓고 土塁를 쌓았다. 2 곳에 水門이 보이고, 옛날의 土木工事가 나무랄 데 없었음을 보여준다.
8. 이와키산 (石城山): 山口県熊毛郡大和町에 있다. 서기 1909년 秋 発見되었다. 당시까지 九州이외에는 存在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던 神籠石의 遺跡이 本州에서도 発見되었으므로, 考古学界의 注目을 받았다. 列石線은 南側鶴ヶ峰부근標高342m를 정점으로 下向하여, 石城五峰(高日ヶ峰・星ヶ峰・鶴ヶ峰・築ヶ峰・大峰)을 둘러 싸고, 下部는 北水門의 標高 約268m까지 내려온다. 列石線의 総延長은 2533m에 이르는 大規模의 것이다. 列石線이 골짜기를 건너지른 곳에는 높은 돌담 벽을 쌓고, 그 중앙부에 수문을 설치하였다.
9. 키노죠우 (鬼の城, 오니노키라고도 읽는다): 岡山県 소우샤 (総社) 市에 있다. 壁은 要所에 높은 돌담을 쌓아 연결하기도 하며 強固한 土塁를2 .8 Km정도 둘러 쌓았다. 城壁은 幅 約7m, 높이 約6m, 外・内側에 평평한 돌이 1.5 m幅으로 깔려있다. 城壁이 골짜기 부분에 水門이 설치되어 있다. 現在6개소 確認되었고, 모두 하반부는 돌담, 상부는 土塁의 構造이다. 이 水門은 城内의 물을 管理하기 위한 排水口이다.
城門은 東西南北의 4 개소에 있고, 모두 通路部分에 바닥돌이 깔려있다. 西門 南門은 거의 같은 規模의 門으로, 12本의 기둥으로 지지된 楼門으로 생각된다. 西門부근에는 角楼라 불리는 防御施設이 있다. 城内는30 ha에 달하는 넓이이며, 城庫로 보이는 礎石建物跡도 6 -7棟 発見되었다. 여러 神籠石遺跡 가운데서도 중요도가 높은 城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오부쿠마 (帯隈): 佐賀市 北部山麓에 있는 오부쿠마야마 (帯隈山) 에 축조된 古代山城의 흔적이다. 서기 1941년 発見되고, 1964년 発掘調査되었다. 切石을 연결한 列石線은 北側山頂部에서 내려와 南側山 기슰을 돌아, 말굽쇠 형상을 하고 있다. 돌은 花崗岩으로, 높이 60센티 정도의 直方体로 절단하여 이어 나갔다.
고구려군은 만주에서부터 자기들의 장기(長技)인 산성축성에 들어간다.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랴오닝성 본계시 환런의 오녀산성(五女山城) 사진을 보면 고구려인들이 九州에서 무슨 대비를 할 지 감이 잡힌다. 고구려가 개국초기 자기보다 강한 적을 예상할 때 그들은 산 정상에 피난처를 마련하였다. 九州에 집중되어 있고 세토나이 (瀨戶內)의 전략적 요충에 고구려의 산성이 건설된다.
일본서기 인교우기(允恭紀)를 인용한다. 오아사즈 마와쿠고노 스쿠네 (雄朝津間稚子宿禰) 천(第19代允恭天皇)은 한제이 천황 (反正天皇)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천황은 어려서부터 소극적이었다. 어른이 된 뒤에 큰 병을 앓았던 일도 있어 별로 활동적이지 못 했다. 한제이(反正) 5년 봄 1월 한제이(反正)천황이 사망했다.
이 돌연한 붕어에 호족들이 당황하여, 닌토쿠(仁徳)천황의 아들, 오아사즈마 (雄朝津間) 황자와 오호쿠사카 (大草香) 황자의 두 사람가운데 조용한 성격의 雄朝津間 皇子가 더 나으리라고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길일을 골라 그에게 나아가 즉위를 구하였으나 雄朝津間 皇子가 사양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중병을 앓아 걸어 다니는 것 마저 힘 들어.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처참한 치료도 해 보았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그것이 부왕 (仁徳天皇)에게 알려져, “치료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의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 해서야 설사 오래 산다 하더라도 중책을 맡기겠느냐?” 하고 질책받은 일도 있다. 천황이 된 형님 두분도 내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내막은 호족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호족들이 다시 엎드려 “천황이 없어서는 인민이 다스려 지지 않읍니다.”하며 간원했으나 雄朝津間 황자는 다시 “병인(病人)에게는 무리다”라며 고사했다.
원년(元年)의 겨울 12월 비(妃)의 오시사카 오호 나카쯔 히메 (忍坂大中姫, 백제 아신왕의 딸)가 호족들의 곤혹스러워 함을 알고, 물이 든 그릇을 황자에게 내 갈 때 “당신이 즉위하지 않으니, 호들이 당황해 하고 있읍니다.”라고 말을 붙여 보았으나 황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돌아 보지도 않았다. 大中姫命도 난처한 나머지, 잠시동안 그냥 서 있었다. 한 겨울이라 거센 바람에, 들고 있던 용기의 물이 넘쳐, 얼 정도의 추위속에서 大中姫命는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황자가 놀라서 일으켜 세우며 “즉위는 중대사이므로 지금까지 거절했으나 호족들의 바램이 진지하니 더 이상 사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大中姫命가 기뻐하며 호족들에게 궁에 모이도록 전했다. 이렇게 하여 雄朝津間 황자는서기 432년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의 遠飛鳥宮에서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3년 춘정월 사자를 신라에 파견하여 의사를 구하였다. 가을 8월 신라에서 온 의사가 천황을 진찰하였다. 곧 병이 나아 천황은 의사를 후하게 사례하여 귀국시켰다고 나오는 것이 允恭천황의 병과 관련된 내용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동맹국이므로 자국의 군대를 九州에 파견하고 있었다.
후쿠오카시(福岡市)에 사와라구(早良區)가 있다. 무로미강 (室見川) 이라는 실개천의 동안(東岸)이다. 실개천 무로미강 (室見川)을 따라 올라가면 카나타케시(金武市)가 나오고 근처에 요시타케 타카키(吉武高木)유적이 있다. 천손강림의 전설의 고개 히무쿠토우케 (日向峙)도 이 부근이다. 사와라(早良)는 신라(新羅)에서 따 온 말이며 카나타케(金武)는 김무(金武)로 신라군의 사령관의 이름이다. 이 때 고구려군의 동맹군으로 九州에 상륙하여 현 카나타케시(金武市)에 주둔하였다.
서기 419년 부상으로 쓰러진 고구려군 총사령관 高珍은 병상에서 여러 해를 보낸다. 고구려 최고의 무당을 불러 와 굿을 하고 신의 가호를 빌었으나 사령관은 완쾌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에 급히 고구려식 산성이 축조된다. 그 산성의 흔적을 지금 코우고이시(神籠石)라고 부르고 있다. 처음 발견될 때 영역설(靈域說)을 연상하였던 학자들이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코우고이시 (神籠石)란 카미사마 (神樣)가 강림하여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된 이와쿠라(磐座)를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소위 신(神)이 들어 박힌 돌이다.
서기 428년경 신라군의 김무(金武)가 신라에서 명의를 한 사람 데려 온다.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신라에서 의사가 오고나서 곧 고진(高珍)의 병이 나은 것 같다. 金武는 이후 高珍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金武城의 安羅羅國王으로 봉 해 진다. 현 福岡市 전체가 金武의 安羅羅國이다. 安羅羅國은 이때 고구려의 가장 가까운 맹방인 것이다. 신라군의 金武가 允恭 다음에 등장하는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즉위를 둘러 싼 병(病)치레 이야기의 진상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다. 당시의 진실과 일본서기 기록의 의미에는 지대한 편차가 존재한다.
일본서기에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천황이 된 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리쮸우(履中)天皇, 한제이(反正)天皇, 인교우(允恭)天皇의 3명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 났다고 되어 있다. 리쮸우(履中)는 닌토쿠(仁德)의 아들이 맞고, 한제이(反正)는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의 아들이다. 인교우(允恭)天皇은 고구려의 왕자 高珍으로 야마토를 정복한 적장(敵將)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만들어 만세일계로 만들었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28년 (서기 429)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그 상표문에 “고구려의 왕, 야마토국를 지도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가 격노하여 고구려의 사자를 야단치고 상표문을 찢어 버렸다고 나온다. 우리는 이 기사가 서기 429년 高珍이 건강을 회복하고 야마토에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으로 본다. 이 당시 야마토의 천황이란 한제이(反正)을 말한다. 태자 兎道稚郞子는 이때 이미 고인이었고 反正천황은 兎道稚郞子의 아들이니 일본서기 저자가 착각한 것 같다.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한 反正천황은 미야즈로 도망간다. 서기 432년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의 遠飛鳥宮에서 高珍은 19대 인교우(允恭)천황으로 즉위한다. 일본서기는 그가 닌토쿠(仁德)천황의 셋째 아들이라 기록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神籠石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코우라산 (高良山): 福岡県久留米市 高良山 南側의 約1500미터에 걸쳐 約1300個의 列石이 確認되었다. 北側에도 돌이 있었다고 推定하나 確認된 바 없다. 이 부분은 日本書紀에도 기록된 天武7年12月(서기 679)筑紫의 大地震으로 崩壊되었다고 생각된다.
2. 조야마 (女山): 福岡県미야마市瀬高町女山에 있다. 가까운 高田町의 竹飯의 山에서 1미터 内外의 長方形의 石을, 잘라내서, 山위로 날라 총 3킬로 가까이 整然하게 나열하였다.
3. 오쯔보산 (おつぼ山): 佐賀県武雄市橘町에 있다. 昭和39年調査에서 列石의背後에 版築에 의하여 축조된 土塁가 存在하며, 또 列石의 全面에 3 미터 間隔으로 堀立柱의 痕跡이 발견되어 山城임이 確定的으로 되었다.
4. 라이잔 (雷山): 福岡県前原市의 雷山(標高955m)의 北中腹, 標高400 – 480 미터의 山中에 축조된 고대산성이다. 城의 範囲는 東西300m, 南北700m정도로 생각된다. 여기서 糸島地方은 물론 博多湾이나 玄界灘까지 일망무제로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5. 고쇼가타니 (御所ヶ谷): 福岡県行橋市西南部와 京都郡勝山町, 犀川町가 境界를 接하는 山塊에 位置하며, 그 대부분이 유쿠하시시 (行橋市) 側의 南斜面에 있다. 列石東端部에 있는 標高 247m의 호토기산(ホトギ山)을 最高所로 하여, 그 延長은 約3km에 달한다. 土塁는 높이 約5m、幅 約7m로 質이 다른 흙을 版築工法에 의하여 쌓아 올렸다.
6. 카케노우마 (鹿毛馬): 福岡県嘉穂郡頴田町에 있다. 서기 1997년까지의 調査 結果, 水門部(西側谷部分)에2개의 暗渠와 版築에 의한 土塁의 모양이 알려졌다. 이번 調査에서 土塁中에 直径45cm의 기둥(柱)이 발견되고, 약 3m 間隔으로 8本을 나열한 것이 確認되었다. 以前부터 確認된 바 있는 約3m 間隔으로 列石前에 설치된 直径 約30cm의 기둥과 今回 発見된 土塁中의 기둥을 組合하여, 다시 板材를 써서, 列石을 基礎로 설치된 土塁를 축조했다고 생각된다. 土塁中의 柱列의 存在는, 古代의 版築이라는 土木技術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暗渠는 모두 全長約 18m 規模로, 土塁幅 約9m, 柱의 間隔3m를 단위로 하는 工事의 規格性이 엿 보인다.
7. 하키 (杷木): 福岡県朝倉市杷木地区에 있다. 神籠石은 長尾城과 우노기죠우 (鵜木城)를 둘러 쌓듯 약 2km에 걸쳐 縦横70 cm정도의 큰 돌을 이어놓고 土塁를 쌓았다. 2 곳에 水門이 보이고, 옛날의 土木工事가 나무랄 데 없었음을 보여준다.
8. 이와키산 (石城山): 山口県熊毛郡大和町에 있다. 서기 1909년 秋 発見되었다. 당시까지 九州이외에는 存在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던 神籠石의 遺跡이 本州에서도 発見되었으므로, 考古学界의 注目을 받았다. 列石線은 南側鶴ヶ峰부근標高342m를 정점으로 下向하여, 石城五峰(高日ヶ峰・星ヶ峰・鶴ヶ峰・築ヶ峰・大峰)을 둘러 싸고, 下部는 北水門의 標高 約268m까지 내려온다. 列石線의 総延長은 2533m에 이르는 大規模의 것이다. 列石線이 골짜기를 건너지른 곳에는 높은 돌담 벽을 쌓고, 그 중앙부에 수문을 설치하였다.
9. 키노죠우 (鬼の城, 오니노키라고도 읽는다): 岡山県 소우샤 (総社) 市에 있다. 壁은 要所에 높은 돌담을 쌓아 연결하기도 하며 強固한 土塁를2 .8 Km정도 둘러 쌓았다. 城壁은 幅 約7m, 높이 約6m, 外・内側에 평평한 돌이 1.5 m幅으로 깔려있다. 城壁이 골짜기 부분에 水門이 설치되어 있다. 現在6개소 確認되었고, 모두 하반부는 돌담, 상부는 土塁의 構造이다. 이 水門은 城内의 물을 管理하기 위한 排水口이다.
城門은 東西南北의 4 개소에 있고, 모두 通路部分에 바닥돌이 깔려있다. 西門 南門은 거의 같은 規模의 門으로, 12本의 기둥으로 지지된 楼門으로 생각된다. 西門부근에는 角楼라 불리는 防御施設이 있다. 城内는30 ha에 달하는 넓이이며, 城庫로 보이는 礎石建物跡도 6 -7棟 発見되었다. 여러 神籠石遺跡 가운데서도 중요도가 높은 城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오부쿠마 (帯隈): 佐賀市 北部山麓에 있는 오부쿠마야마 (帯隈山) 에 축조된 古代山城의 흔적이다. 서기 1941년 発見되고, 1964년 発掘調査되었다. 切石을 연결한 列石線은 北側山頂部에서 내려와 南側山 기슰을 돌아, 말굽쇠 형상을 하고 있다. 돌은 花崗岩으로, 높이 60센티 정도의 直方体로 절단하여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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