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3일 토요일

60. 繼體天皇

서기 2007년11월4일 福井縣 후쿠이시(福井市) 아스와야마(足羽山)의 아스와신사(足羽神社)에서 繼體天皇 즉위 1500년 봉축기념대제가 열렸다. 서기 2007년은 제26대 繼體天皇 (450 – 531)이 서기 507년 즉위한 이후 꼭 1500년이 되는 해이다. 야마토의 중심지 나라분지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의 바닷가에 위치한 변방이었던 코시노쿠니 (越國)에서 배출된 유일한 천황이니 지금도 그 곳 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자랑거리로 봉축기념대제를 열어 향토애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제외하면, 까마득한 그 옛날, 변방에 살던 사람이 어떻게 제왕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기사는 없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506년 武烈천황 (489 – 506)이 후사없이 붕어하였으므로, 오호무라지(大連) 오호토모노 카나무라(大伴金村)등이 에치젠(越前)에 가서 應神천황의 5세손, 오오도왕(男大迹王)을 추대하였다. 이를 승낙한 왕은 다음 해 58세때 가와치국(河內國) 쿠스바노 미야(樟葉宮)에서 즉위하고 仁賢천황의 황녀 타시라카노 히메미코 (手白香皇女)를 황후로 하여 사내아이를 낳으니 그가 아메쿠니 오시 하라키 히로니와노 미코토 (天國排開廣庭尊, 欽明 510 – 571)이다. 이 사람이 본처소생으로 嫡子이나 나이 어린 관계로 2명의 형들이 먼저 국정을 잡은 후 천하를 다스렸다.

즉위 前의 妃였던 오와리노 무라지 쿠사카(尾張連草香) 의 딸 메노코히메(目子媛)는 시코부(色部)라고도 하며 2인의 아들을 낳았다. 첫째를 마가리노 오오에 황자 (勾大兄皇子)라 하며, 그가 훗날의 히로쿠니 오시타케 카나히 천황 (広国排武金日天皇, 安閑 466 – 535)이다. 두째를 히노쿠마노 타카다 황자(桧隈高田皇子)라 하며, 훗날의 타케오히로쿠니 오시타테 천황 (武小広国排盾天皇, 宣化 467 – 539)이다.

일본서기는 오오도왕(男大迹王)이 應神천황5世의 孫으로, 父는 히코우시왕(彦主人王), 母는 垂仁천황7世의 孫, 후리히메(振媛, 434 – 485)라 하고 있으나, 應神에서 繼體에 이르는 중간4대의 계보는 생략되어 있다. 중간4대의 계보는 카마쿠라(鎌倉) 시대의 “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逸文에 의하여 밝혀졌다. 이에 의하면 應神天皇 –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 오오호도왕(意富富杼王 또는 大郞子) – 오이왕(乎非王) –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 彦主人王) – 乎富等大公王 (=繼體天皇)으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나 上宮記에 의하면 오오도왕(男大迹王)의 父는 近江의 高嶋郡三尾 (滋賀縣高島郡) 나리도코로(別業)에 있던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이다. 코시노쿠니 미쿠니(越國三國) 사카나이(坂中井)의 타카무쿠(高向)에서 절세의 미인으로 알려진 후리히메(振媛)가 近江의 高嶋郡三尾의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을 모신 것은 서기 449년 경의 일이다. 다음 해 출생한 오오도왕(男大迹王)이 어려서 부친을 잃고 후리히메(振媛)의 친정, 사카나이(坂中井)의 타카무쿠(高向) 에서 성장하였다.

그 시절 5세기의 에치젠(越前)은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변경의 땅으로 알기 쉬우나 福井평야에서 고분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중앙의 정치세력에 뒤지지 않는 선진성과 강대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 졌다. 쿠즈류가와(九頭竜川)가 福井平野로 흘러드는 마쯔오카쵸우(松岡町)와 마루오카쵸우(丸岡町)의 산에 거대한 古墳群이 있다. 松岡町의 테구리가죠우야마 고분(手繰ケ城山古墳), 니혼마쯔야마 고분(二本松山古墳), 카스가야마 고분 (春日山古墳), 丸岡町의 로쿠로세야마 고분 (六呂瀬山古墳)등 百 미터를 넘는 前方後円墳이 계속된다. 古墳에는 九頭竜川에서 운반해 온 후키이시(葺き石)가 있고, 하니와(埴輪)가 나란히 서 있다. 福井市 아스와야마(足羽山)의 샤쿠다니이시(笏谷石)로 만든 巨大한 石棺을 古代人은 山頂까지 운반해 왔다.

振媛의 実家는 이런 巨大한 古墳을 건설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豪族이었다. 近江에서 母에 이끌려 온 男大迹王은 그러한 환경의 외갓집에서 자랐다. 백제왕가의 후손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으리라. 그들은 당시 最新의 文化圏이었던 朝鮮半島와 密接한 関係를 갖고 있었다. 男大迹王이 살아 있었을 五世紀末 축조된 標高273미터의 山頂에 있는 二本松山古墳의 石棺에서 金과 銀을 칠 한 冠, 甲冑나 鏡등 豪華한 副葬品이 出土되었다. 以前 話題가 되었던 奈良県의 후지노키 고분(藤ノ木古墳)에서 出土된 有名한 冠보다도 一世紀 빠른 時代의 것으로 畿内보다도 越前 쪽이 오히려 文化의 先進地였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출토된 유물과 산 꼭데기에 축조된 고분은 가야와의 관련성을 강력히 암시한다.

男大迹天皇의 治世元年春1月4日、大伴金村가 회합의 참석자들에게 말한다. “男大迹王은 性情이 너그럽고, 효심도 깊다하니, 皇位를잇기에 적합한 분인 것 같소. 우리 모두 나서서 그 분에게 권하여 황위를 번영토록 해야 하오”. 物部麁鹿火가 응대한다. “황손들을 골라 살펴보니, 賢者는 확실히 男大迹王이라 할 수 있읍니다”. 許勢男人도 맞장구를 친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男大迹王에게 天下를 다스리도록 합시다” 이렇게 세 사람이 합의한 뒤 6日、무라지(連)들이 君命을 받든 황제의 깃발과 가마를 준비하여, 미쿠니( 三国)로 향했다. 보무도 당당히 호위무사들이 도착하자 男大迹王은 평상시의 넉넉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侍臣을 整列시키고 이미 天子의 風格이 있었다.

서기 507년 2월 男大迹王은 大阪府 히라카타시(枚方市) 쿠스바노미야(樟葉宮)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오호토모노 카나무라(大伴金村)를 오호무라지(大連)로, 코세노 오히토(許勢男人)를 오호오미(大臣)로, 모노노베노 아라카이 (物部麁鹿火)를 오호무라지(大連)로 옛 職位를 그대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코시노쿠니(越國)에서 야마토에 왔는데 전임의 천황들이 있었던 카시하라(橿原) 또는 사쿠라이(櫻井) 지역이 아닌 쿠스바노미야(樟葉宮)가 繼體천황에게 처음 주어진 皇居이다. 현 메트로 오오사카의 최북단으로 나라분지의 카시하라(橿原) 또는 사쿠라이(櫻井)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4년후 서기 511년10월 현 京都府 京田邊市의 쯔즈키노미야(筒城宮)로 황거를 옮긴다. 7년후 서기 518년3월 현 京都府 長岡京市의 오토쿠니노미야 (弟國宮)로 황거를 옮긴다. 8년후 서기526년9월 드디어 奈良縣 사쿠라이시(櫻井市) 이와레노 타마호노미야 (磐余玉穗宮)로 옮긴다.

야마토의 변두리를 전전하기 무려 20년, 왜 繼體천황이 곧 바로 야마토의 수도에 들어오지 않고 변두리에서 20년을 보내야 되었는지 알려주는 역사서는 없다. 쿠스바노미야(樟葉宮)는 요도강(淀川)가에 위치한 현재 오오사카府 히라카타시(枚方市) 쿠스바(樟葉), 쯔즈키노미야(筒城宮)는 키즈강(木津川)가로 현 京都府 京田邊市, 오토쿠니노미야(弟國宮)는 카쯔라강 (桂川) 을 끼고 있는 곳으로 현 京都府 長岡京市에 해당한다.

継体天皇의 墓는 古事記등에 미시마노 아이노노 미사사기(三嶋藍野陵)라고 적혀있다. 이 능을 궁내청은 大阪府 이바라기시 (茨木市)의 오오다챠우스야마 고분 (太田茶臼山古墳)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축조시기가 5세기 중엽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最新의 研究결과 이웃한 타카쯔키시(高槻市)에 있는 이마시로쯔카 고분 (今城塚古墳)이 継体陵이라고 거의 断定되어, 市教委에 의하여 発掘調査가 행해지고 있다. 2006년12월1일 10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사적공원 정비공사가 진행중이다. 궁내청의 관할이 아닌 高槻市敎委소관이므로 발굴조사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궁내청은 고대 천황가와 그 친척들의 무덤으로 740개의 고분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으나 지정된 고분의 신분이 확실한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고분들의 학문적인 조사를 청원하고 있으나 고고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천황가의 고분들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今城塚古墳은 요도가와(淀川) 北岸에 위치한 거대한 전방후원분으로 전장 약 350미터, 분구장 190미터, 전방부의 폭 148미터, 높이 12미터, 후원부직경 약 100미터이다. 고분이 축조된 것은 6세기전반으로 상정되며 고분에서 높이 약 1.7미터로 일본최대급의 家形하니와(埴輪), 갑옷을 입은 武人하니와외 여러가지 모양의 하나와가 출토되었다.

고분발굴시 石棺의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3종류의 석재가 확인되었다. 熊本縣, 大阪府의 二上山, 兵庫県 播磨의 세 地方에서 나온 것으로 3개의 석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継体천황의 석관이라면 나머지 두개는 누구의 관일까? 3가지 석재 가운데 熊本의 阿蘇山의 噴火로 만들어 진 핑크色의 석재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이것이 継体의 石棺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出土되는 하니와(埴輪)나 石棺의 破片은 요도강(淀川)을 사용한 水上交通은 물론 九州와의 交流를 암시한다.

繼體天皇(450 – 531)의 계보는 應神天皇 –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 오오호도왕(意富富杼王 또는 大郞子) – 오이왕(乎非王) –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 彦主人王) – 乎富等大公王 (=繼體天皇)으로 되어 있다.

應神(320 – 394) -稚野毛二派(372 – 424) -意富富杼王(391 – 432) -乎非王(412 – 465) -彦主人王(429 – 475)의 계보를 백제의 계보로 대치하면 근구수왕(320 – 394) – 아신왕(372 – 424) – 전지왕(391 – 432) – 毗有왕(412 – 465) – 개로왕(429 – 475, 倭濟王)이 된다. 繼體(450 – 531)와 무령왕(461 – 523, 倭武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이렇게 백제와 야마토의 왕들은 두 얼굴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우리는 意富富杼王의 富杼를 浮屠와 같은 초기 불교용어 Buddah로 보았다. 따라서 男大迹王의 오도(大迹)는 富等, 浮屠가 되어 오오도는 小浮屠의 의미로 증조부 큰 부처의 이름을 딴 작은 부처라는 뜻이다.

古事記 雄略時代의 기록을 보자. 일본서기는 이 부분을 훨신 완화하여 박진감이 떨어진다. 천황은 葛城山에 올랐는데 거대한 맷돼지가 나타났다. 천황이 활을 쏘자 맷돼지가 성을 내고 굉음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천황은 겁에 질려 개암나무 위로 뺑소니쳤다.

또 어느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모든 수행원들이 빨간 허리띠를 메고 파란 옷을 입었다. 그 때 건너 산에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복이나 모양이나 사람들이 천황의 행렬과 꼭 같았다. 거기서 천황이 “야마토에 나 말고 왕이 없는데 거기 가고 있는 것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는 모양도 천황과 똑 같았다. 그래서 천황은 크게 노하여 모두 활을 겨누자 저 쪽에서도 똑 같이 활을 겨누었다.

거기서 천황이 “이름을 대라. 이름이나 알고 싸우자”하니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알려주마. 나는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한 마디로 분별하여 말하는 葛城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 이다” 라 하니 천황이 겁에 질려 “알아 모시겠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신령님께서 現世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읍니다.”라 하며 大御刀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 그러자 一言主神는 손을 치며 모든 물건을 받았다.

위의 구절을 서기 458년 雄略이 백제의 개로왕과 곤지에게 제압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大御刀는 천황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雄略은 이후 퇴위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된다. 雄略의 재위가 23년간이라고 기록되는 것은 역사의 표면에 백제가 드러나는 것을 덮기 위하여 고안된 장치이다. 신화와 역사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강은 넓고도 깊다.

위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가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이며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이며 백제의 개로왕이 젊을 때 일본에서 불린 이름이다. 후쿠이(福井)는 왜무왕의 상표문에 나오는 毛人55국의 하나이다. 倭濟王은 아주 활동적이고 가는 곳마다 여자를 밝히던 정력적인 사나이였던 것 같다. 倭武王의 아버지 倭濟王이 允恭천황 시절 후쿠이를 근거로 모인55국을 평정하였는데 그 무렵 후쿠이의 호족의 딸 후리히메(振媛)를 만나 男大迹王을 낳았다.

백제왕실은 이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奈良분지와 가와치(河內)는 백제의 조상들의 무덤이 남아 있는 聖地이다. 따라서 백제의 무령왕은 繼體天皇의 奈良進入을 강력히 경고하였을 것이다. 무령왕이 죽은 후 서기 526년에야 繼體는 奈良縣 사쿠라이시(櫻井市) 이와레노 타마호노미야 (磐余玉穗宮)에 들어온다.

継体天皇은 1명의 황후와 8명의 妃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어디까지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신하들이 불러들인 나이 58세의 노인이 결혼동맹을 맺어 왕권을 강화하였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의 관심은 천황을 배출한 皇后 타시라카노 히메미코(手白香皇女)와 妃 메노코히메(目子媛)뿐이다. 황후는 欽明을, 妃는 安閑과 宣化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타시라카노 히메미코(手白香皇女) 즉 欽明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황후로 보고, 메노코히메(目子媛)는 개로왕의 妃로 본다. 安閑과 宣化는 欽明의 형제가 아니라 작은 아버지이다.

백제혈통을 야마토 獨自의 혈통으로 만드는데 필요했던 것이 일본역사의 継体天皇이다. 그가 후쿠이에서 지방의 호족으로 살았다면 행복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의 大伴金村의 정략에 이용되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大伴金村는 백제의 압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던 継体天皇을 중앙으로 불러내 욕보인 셈이다.

일본서기는 繼體천황 마지막 부분을 묘하게 끝맺고 있다. “ 어떤 책에 의하면 천황은 치세 28년 붕어했다고 한다. 그것을 치세 25년붕어로 한 것은 백제본기에 의해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 “치세 25년 3월, 진군하여 安羅에 이르러 걸둔성(乞屯城)을 쌓았다. 이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 들리기를 일본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와 맞춰보면 신해년은 치세 25년에 해당한다. 후세에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백제의 무력 시위 앞에서 야마토의 大伴金村는 繼體천황, 황태자, 황자를 모두 죽이고 구주백제군을 야마토에 무혈 입성시킨다. 이 때부터 구주백제의 斯我王이 야마토의 27대 安閑천황 (466 – 535)으로 기록된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 535년 安閑천황이 야마토에서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며 구주백제왕인 사비왕이 야마토로 가서 28대 宣化천황(467 – 539)으로 즉위하고 구주백제왕으로 무령왕의 두째왕자 사귀왕(斯貴王)이 부임한다. 이 사람이 29대 欽明天皇(510 – 571) 이며 백제 聖明王( - 554)의 친 동생이다. 

일본 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安閑, 宣化, 欽明이 다음 천황으로 즉위하는 것은 이들이 繼體의 자식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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