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무도오세이(神武東征) 란 천황가의 초대 가무야마토 이와레 비코 (神武天皇, Emperor Jimmu) 가 쓰쿠지(筑紫)의 히무꾸(日向)를 출발, 야마토(大和)를 정복하고 가시하라궁 (橿原宮)에서 즉위할 때까지의 일본신화의 기록이다. 이 신화를 두고, 가공의 전설이라는 설과, 九州에 있던 세력이 야마토로 옮겨와 야마토 왕권을 구축한 사실을 신화화하여 전해진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신용할 만한 동시대의 문자자료가 없는 한 神武東征을 학문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일본 사학계의 입장이다.
神武天皇 (BC 711년 2월13일 – BC 585년 4월9일)은 일본의 전설적인 초대천황으로 BC 660년 2월 11일 – BC 585년 4월9일까지 재위하였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있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없다.
일본서기를 보면 가무야마토 이와레 비코 (神日本磐余彦天皇) 가 45세때 형제와 자식들을 불러놓고 말한다. 天祖 니니기 (瓊瓊杵)가 天降한지 179만2470년이 지났다. 그러나 요원(遼遠)의 지(地)는 아직 왕화(王化)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모두 따로따로 갈라져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시오쓰치노 오지(鹽土老翁)에게 물어보니, 동방에는 아름다운 나라가 있고, 사방이 靑山으로 쌓여 있다더라. 그 속에 아마노이와후네(天磐船)를 타고 강림한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곳은 천국의 계승자로서의 대업을 이루고 천하에 군림하는데 적합한 곳이다. 틀림없이 나라의 중심이 될 땅이니라.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자는 니기하야히 (饒速日, 신무천황 동정보다 먼저 야마토에 강림한 인물) 일 것이다. 거기에 가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지 않겠는가. 황제 스스로 황자들을 대동하고, 수군을 이끌고 東征에 나서니 太歲 甲寅 10월 5일의 일이다.
일본서기는 출발지를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고 출발한 뒤 최초로 쓰쿠지(筑紫)의 우사(宇佐)에 기항한 것으로 되어있다. 고사기는 日向을 출발했다고 되어있어 학자들은 모두 日向를 출발지로 간주하나 日向가 어디인지는 논란에 싸여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기록의 선후는 있으나 이들의 항로를 추적하면 다음과 같다.
히무꾸((日向) 출발 – 쓰쿠지의 오까노 미나토 (岡의 水門) – 쓰쿠지의 宇佐 (현 오오이다현 우사시) – 아끼의 에노미야 (安藝의 埃宮, 현 히로시마) – 기비(吉備, 현 오까야마현) 의 다까시마노 미야 (高島宮) – 아까시 가이쿄 (明石海峽) – 나니와노 미사끼 (難波 岬) – 가와치(河內)의 쿠사가무라 (草香邑, 현 오오사카시 日下) 에서 상륙하여 이꼬마산지 (生鉤山地)의 남쪽으로 연결된 信貴山 南麓의 타쓰다(龍田)고개를 넘어 나라분지로 침공을 시도하나 험로를 돌파하지 못하고 철수한다. 다시 이꼬마산 의 북쪽을 넘어 침공하려 하였으나 쿠사까사까 (孔舍衛坂, 東大阪市 日下) 에서 나가스네히코(長髓彦) 의 반격으로 패배한다. 이 싸움에서 神武의 兄(?)으로 기록된 이쓰세(五瀨, 184 - 239)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방비가 견고한 오오사카 만에서의 공격을 포기한 神武軍은 나라분지의 동쪽으로부터 침공하기 위하여 紀伊半島를 우회한다.
이상의 내용이 神武東征의 도입부로 기록되어 있다. 시대개념이 배제된 기록이므로 일본사가들은 일본서기에 적힌데로 기원전 660년경의 신화로 취급한다. 천황제의 뿌리에 해당하는 기사를 신뢰할 수 있는 문자자료의 도움도 없이 의심하면 천황에 대한 불충이 되므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의 주인공 神武天皇이 누구이며 神武東征이 언제 적 일이고, 큐우슈우에 있던 神武천황은 어떤 정치세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며 나라분지에는 당시 누가 군림하고 있었는지 알아 보고자 한다.
古事記에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고토(神倭伊波禮毗古命), 일본서기에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천황 (神日本磐余彦天皇) 으로 기록된 神武天皇(194 – 256)의 이름은 호호데미(火火出見)라 한다. 그런데 중국의 삼국지 위지왜인전의 히미꼬(卑弥呼) 기사 가운데 景初2년6월 (서기 238) 여왕 히미꼬는 大夫 難升米와 次使의 都市牛利를 대방군에 파견하여 천자를 배알하기를 청 하였다. 이때 중국의 황제는 난승미를 率善中郞將에 임명하였고 또 正始6년 (245) 황제가 대방군을 통하여 난승미에게 “황제의 황색 깃발”을 하사하였다라고 보인다.
서기 238년 야마타이국(邪馬臺國) 히미꼬(卑弥呼) 여왕의 使者 大夫 難升米란 누구일까. 升米란 되미 – 데미 - 뜨기라는 우리 말의 차자(借字)가 되고 難이란 일곱 칠을 뜻하는 부여의 언어이다. 이 부여말이 남아 지금 일본에서 일곱을 나나라고 한다. 일곱 달만에 태어난 아이를 칠뜨기라고 부르는건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되미 – 데미 - 뜨기는 다시 出見으로 표시된다. 難升米는 難出見 (난데미) 도 될 수 있고 위대한 사람이 된 훗날 難 대신 더욱 고결한 火火로 바꾸어 火火出見로 쓰고 호호데미로 읽는다. 난승미는 일곱달 만에 태어나 칠뜨기라고 조롱을 받으며 자란 아이였다. 그는 天孫降臨에 기록된 니니기노미고토(瓊瓊杵尊)를 아버지로, 고노하나사쿠야히메(木之花佐久夜姬)를 어머니로 서기194년 태어났다. 일본서기에서 그가 45세때 東征에 나섰다 하므로 서기 239년 10월 5일 쓰쿠지(筑紫)의 히무꾸(日向)에서 출병한 것으로 된다.
명백하지 않은 역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수 많은 전승을 만들어낸다. 많은 지방에서 역사를 훔쳐 자기지방의 전설로 가공하여 관광객을 부른다. 천손강림이나 신무동정같은 역사적 사실(?)을 이용하여 오늘도 많은 지방이 소위 비지니스를 하고 있으므로 전승이 있다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보증하지 못한다. 일본신화는 신화가 또 신화를 낳아 동일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적용된 경우도 보인다. 神武천황의 출생설화가 대표적인 예로 대마도에서 두 세대가 더 나타나며 이모와 결혼해서 神武를 네째 아들로 낳았다는 것은 전승의 중복적용으로 생긴 오류로 본다. 고노하나하쿠야히메의 네째 아들 호호데미로 끝 난 이야기를 히코나기사다케 우가야 후끼아에즈노미코토 (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尊)를 낳고 후키아에즈가 이와레비코를 네째 아들로 낳았다고 전승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호호데미가 곧 바로 이와레비코이며 이와레란 우리 말의 이파리(잎)이다. 바로 瓊枝玉葉의 葉이 이파리인 것이며 瓊에 해당되는 것이 니니기(瓊瓊杵)로 父子를 합쳐 경지옥엽의 천강손이 된다. 따라서 瓊枝(니니기)가 玉葉(이와레)를 직접 낳은 것이지 그 사이에 불필요한 두 세대가 더 끼어들 필요가 없다.
히무꾸(日向)란 여태까지 일본학자들이 주장해 온 미야사키현(宮崎縣)의 휴가시(日向市) 가 아니라 쓰쿠지의 히무꾸(日向) 이다. 고노하나사쿠야히메 (木之花佐久夜姬)는 전 남편 오호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 의 자식을 셋이나 낳은 여자로서 難升米가 네 번째 아이였다. 그 첫번째 아들이 호데리노미고토(火照命, 187 – 241)로 難升米(194 – 256)와 이부동모형제간이다. 古事記는 호데리를 후하노모지 구노스노가미(布波能母遲久奴須奴神)으로 표기했는데 구노스노가미란 久須男 즉 貴首男으로 백제구수왕을 뜻하며 호데리가 그의 아들이다. 호데리는 대마도의 우미사치(海幸) 였고 난승미는 쿠마소(熊襲)의 야마사치(山幸) 였는데 서기 214년 호데리가 무력으로 쿠마소를 빼앗아 바꿔치기하여 난승미는 대마도로 쫒겨간다. 그후 호데리는 히미코의 야마타이국에 적대적이었으며 위지왜인전에 狗奴國의 男王 卑弥弓呼와 불화하여 전쟁상태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卑弥弓呼가 바로 호데리이며 하야토(隼人)씨의 시조가 되었다. 대마도로 쫒겨간 난승미는 기회를 엿보며 야마타이국의 히미코를 도와 중국을 왕래하였다. 그 때 기록된 이름이 대부 난승미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難升米는 239년 구야한국(狗邪韓國)의 군대(久米軍)를 빌려 야마토 정벌에 나선다. 히미코는 난승미의 증조 할머니이며 구야한국은 그의 아버지의 외가이니 히미코의 야마타이국(邪馬臺國)과 구매(久米, 현 김해라는 지명은 통일신라 이후에 중국식으로 고친 명칭이며 원래 이름은 구매였을 것으로 추측함) 의 구야한국(狗邪韓國)은 그의 강력한 배경이었다. ( 연재기사중 9.히미코와 11.천손강림편 참조)
쿠사까사까에서 패배한 神武軍은 온갖 시련을 겪으며 기이(紀伊)반도를 우회하여 구마노(熊野)와 이세(伊勢)의 경계, 아라사카노즈(荒坂津)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한다. 거기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열병에 걸려 대부분의 군사들이 쓰러진다. 가까스로 천우신조의 도움을 받으며 열병에서 회복되어, 높고 험난한 구마노(熊野)산중을 야타가라스(八咫鳥)의 도움으로 돌파하고 우다(菟田)의 우가치무라 (芽邑) 에 이르러 다시 奈良의 방어군과 대치한다.
나가스네히코(長髓彦)와의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금색의 솔개가 날아와 가무야마토이와레비코(神日本磐余彦)의 활끝에 앉았다. 솔개가 빛을 발하자 나가스네히코의 군사들은 눈이 부셔 싸울수 없었다. 나가스네히코는 이와레비코(磐余彦)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가 모시는 쿠시타마니기하야히 (櫛玉饒速日命)는 옛적에 아마노이와후네(天磐船)를 타고 天降하였다. 천강신(天降神) 이 둘이 있을 수는 없으므로 너는 가짜일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와레비코와 나가스네히코는 서로의 증표를 확인한 뒤 양쪽 다 천강신의 자손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나가스네히코는 전쟁을 멈추지 않았으므로 니기하야히는 나가스네히코를 죽이고 이와레비코에게 귀순하여 그 신하가 되고 物部氏의 원조가 되었다.
辛酉년 춘정월의 庚辰 朔 (1일) 천황은 가시하라노미야 (橿原宮) 에서 즉위했다. 이 해를 천황의 원년으로 하고 코토시로누시노가미 (事代主神, 202 – 268, 백제 7대 사반왕)의 딸 이스즈히메노미고토 (五十鈴媛命, 219 – 273)를 정비로 세웠다. 辛酉년 춘정월의 庚辰 朔 (1일) 을 그레고리오曆으로 환산하여 BC 660년 2월 11일이 되고 1967년부터 일본은 이 날을 일본의 건국기념일로 지키고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神武天皇은 “ 동방을 정벌한지 6년이 지났다. 위로는 皇天二祖의 다가미무스히노미고토 (高皇産靈尊)와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 (天照大神)가 나라를 내려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황손 니니기노미고토 (瓊瓊杵尊)가 정의를 실현코자 했던 정신을 이어가자.”라고 선언한다. 서기 245년의 일이며, 狗邪韓國(가야)에서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구한 것이다.
중국의 위지왜인전의 기록 “正始6년 (245) 황제가 대방군을 통하여 난승미에게 황동 (황제의 군사지휘권을 의미하는 군기)을 하사하였다” 라는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히미코가 247년 사망했다 하므로 히미코의 생전에 히미코가 아닌 난승미에게 황제의 군기를 하사한 이유는 무었일까. 난승미가 일본열도의 새로운 왕이 된 것을 중국에서 알고 있었을까?
高皇産靈尊 또는 高木神(다까끼노가미)은 구야국(가야)의 김수로왕 또는 가야의 왕, 天照大神은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여왕을 뜻한다. 이 두 사람의 피를 이어받은 호호데미가 東征의 크라이맥스에서 니기하야히와 확인했던 증표란 아마노하하야 (天羽羽矢)라는 화살이었다고 한다. 무기를 증표로서 확인해보니 같은 天降神의 자손임을 피차 인정하였다고 씌여있는데 내용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일본에 가장 먼저 건너온 세력은 1세기의 가야세력이다. 가야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가야에서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라는 남녀가 일본에 들어와 일본신화의 정점을 이룬다. 이들은 祭政일치시대의 제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가야에서 쓰시마가 육안으로 보이고, 쓰시마에서 잇끼섬이 보인다. 잇끼섬에서는 큐우슈우가 보이므로 육안으로 보이는 섬을 징검다리처럼 왕래했던 것은 옛적에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보다 약 100년후 백제의 초고왕자가 강원도의 소시모리로부터 일본의 이즈모(出雲)에 들어왔고 이들은 무력을 앞세운 명백한 정복세력이었다. 초고(肖古, 素古, 速古)왕자는 일본신화에서 스사노오( 須佐之男, 素盞鳴) 라고 기록되었고 무력으로 일본의 제사, 점복(占卜), 예언을 담당했던 무녀그룹을 이즈모의 야에가키궁에 가두고 후비로 삼는다. 그 가운데 리더급의 여인이 아마테루히메 (天照姬) 이며 훗날의 히미코이다. 히미코는 가야의 지배계급 출신으로 김수로왕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보인다.
가야인 히미코와 백제의 초고왕자 (일본신화의 스사노오)사이에서 오시호미(忍穗耳)가 태어나니 구야한국(가락국)에 보내 김수로왕의 사위가 된다. 거기서 174년 니니기(瓊瓊杵)가 태어난다. 이 니니기를 쓰쿠지의 히무쿠(日向)로 데려오는 내용이 천손강림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로 기록되어있다. 물론 현재의 김해에서 배를 타고 왔다. 천손강림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는 니니기의 아들이 초대천황이 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에 조상들의 위상이 신격화된 것이다. 高皇産靈尊, 天照大神, 瓊瓊杵 모두 神武天皇의 조상들이며 가야인들이다. 히미코의 남편, 스사노오는 神武의 증조 할아버지이지만 백제인이므로 신화 속에서 방계의 신으로 취급된다. 그러면 저쪽 긴끼(近畿)의 奈良盆地에 있던 니기하야히(饒速日)는 누구일까.
우미사치(海幸) 호데리노미고토(火照命, 187 – 241)가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미 나왔다. 서기 160년경 이즈모(出雲)에 들어와 세력을 넓히던 백제의 초고왕 (Susanoo)은 큐우슈우와 쓰시마를 손에 넣고, 나라(奈良)와 가와치(河內), 기이(紀伊)와 구마노(熊野)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가 초고왕으로 백제로 돌아간 뒤 그의 장자 오호쿠니누시가 일본을 다스렸다 (13. 귀수왕 참조). 오호쿠니누시는 현재의 오오사카에 있었다. 서기 214년 오호쿠니누시가 백제의 구수왕으로 나간 뒤 오오사카와 나라(奈良)는 그의 아들들이 다스렸다. 나가스네히코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懿德천황)는 오호쿠니누시의 아들로 그의 후계자 이다.
神武東征에서 항복한 니기하야히(饒速日, 222 – 270)는 일본서기에 3대 安寧天皇-시키즈히코다마데미 (師木津日子玉手見) 로 기록되고 백제 초고왕의 손자이며 오호토시노가미 (大年神)의 아들이다. 나가스네히코(長髓彦)는 大國主神(백제 구수왕)의 아들이며 4대 懿德천황(180 – 244) –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大倭日子鋤友)로 기록되고 구수왕이 백제로 나간 뒤 오오사카를 맡고 있다가 神武천황 동정시 서기 244년 전사하였고 니기하야히 (安寧天皇)는 이와레비코에게 항복하고 신하가 되었다.
따라서 천손의 증표를 화살을 보고 확인했다는 것은 별 의미없는 이야기이며 백제와 가야의 왕실간의 일이므로 神武나 懿德 또는 安寧은 피차 서로 피를 나눈 사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결국 백제 초고왕의 손자 (니기하야히 및 나가스네히코)와 증손자 (이와레히코) 사이의 싸움이니 양쪽 다 천강손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전사한 나가스네히코 (오호야마토히코스키토모) 는 지금도 쿄오토오의 가미가모신사 (上鴨神社)의 제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후일 백제세력이 다시 일본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추모한 것이다.
神武천황은 군중의 분위기를 관리하는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전쟁이 끝난 뒤 가야에서 빌려 온 구매군(久米軍)의 군가를 모아서 편집하고 궁중행사 때 구매마이(久米舞)의 춤과 함께 공연토록 하였다. 이 전통은 현재도 지켜지고 있다. 일본서기에 구매노우타(久米歌) 6首가 기록되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나가스네히코와 결전을 치르러 가면서 이와레비코가 불렀다고 한다. 번역은 최인호의 ”제4의 제국”에 나온 것을 약간 고친 것이다.
厳々し 久米の子らが 粟生(あはふ)には 香韮一本(かみらひともと) 其(そ)ねが本(もと) 其ね芽認(つな)ぎて 撃ちてし止まむ
(용감무쌍한 구매의 건아 앞에 마늘 한 포기. 마늘의 뿌리에서 싻까지 이어서 뽑아내 듯, 적의 군세를 섬멸하자, 섬멸하자.)
厳々し 久米の子らが 垣本に 植ゑし山椒(はじかみ) 口痒(くちひひ)く 吾は忘れじ 撃ちてし止まむ
(용감무쌍한 구매의 건아에게 담 앞에 심은 산초는 입안에 넣으면 얼얼하지만 그와 같은 적의 공격의 아픔 또한 잊지 않는다. 반드시 쳐 부수자, 쳐 부수자.)
이렇게 하여 “제4의 제국”은 서기 245년 일본을 통일하여 일본역사의 정점에 서게 된다. 여기서부터 神의 역사(神代)에서 사람의 역사(人代)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가야의 건국을 서기 42년으로 치므로 실로 가야건국 200년만의 경사인 셈이다. 초고왕의 후손, 백제의 7대 사반왕은 서기 234년 백제를 고이왕에게 빼앗기고 일본으로 도피하여 神武동정시 일본에 있었다. 神武天皇이 가시하라노미야에서 즉위하며 세운 正妃, 이스즈히메노미고토는 사반왕의 딸이다. “잃어버린 왕국” 백제와 “제4의 제국” 가야는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神武天皇은 곧 바로 백제계의 반격에 직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