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3일 금요일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왕무의 상표문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63년(475) 9월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문주왕 3년(477) 봄 2월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였다. 여름 4월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송서 순제 승명(昇明) 1(477) ()에서 사신이 와서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는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였다. 

송서 순제 승명(昇明) 2(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그는 고구려의 무도함을 규탄하고 부형의 시절부터 고구려를 응징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와 형님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나 이제 자신이 그 뜻을 실현코자 한다고 하며 송 황제의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황제는 그를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백제는 진사왕과 아신왕 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략을 받아 국력신장의 기세가 꺾이고 가야와 왜국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그로부터 반 세기가 지난 서기 455년 개로왕이 즉위하고 역내의 영향력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송서 순제 승명 2(478) ()에서 무()가 사신을 보내 장문의 상표문을 올렸다고 하였다. 표문은 무()의 아버지 제()가 동()으로 모인 55, (西)로 중이 66, 바다 건너 해북 95국을 평정하였다고 하였다.

모인 55국은 열도의 일본해 연안에 위치한 이즈모(出雲), 이나바(因幡), 타지마(但馬) 와카사(若狹), 후쿠이(福井) 지역을 말하며 이 곳에서 쿄우토(京都)를 거쳐 야마토()로 진입할 수 있다. 중이 66국은 큐우슈우의 오오스미(大隅), 사쯔마(薩摩), 히고(肥後), 히젠(肥前) 지역이다. 야마토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전에 확보해야 되는 땅이다. 바다 건너 해북 95국은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에 있는 가야제국을 말하며 고구려의 공격으로 피폐해져 백제와의 결속력이 떨어진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백제는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한성 백제가 멸망하는 변을 당한다. 개로왕과 왕족들은 살해되었고 신라에 구원병을 얻기 위해 떠났던 여기(餘紀)가 살아 남은 사람들을 수습하여 웅진(熊津)으로 피난하였다. 여기(餘紀) 웅진에서 백제의 명맥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서기 477년 야마토()를 장악하고 있던 곤지(昆支)가 웅진에 나온 기록이 백제본기에 보인다. 곤지(昆支)는 송서에 좌현왕 여곤(餘昆)으로 기록되어 있고 경(慶, 개로왕), 기(紀, 문주왕), 곤(昆, 야마토의 세이네이 천황)은 형제간이다.

삼국사기, 일본서기 그리고 송서의 기록을 종합하여 판단하면 곤지가 백제에 나오던 서기 477년 무(武)가 야마토(倭)의 왕이 되었고 그가 송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된다.(구자일 설). 그러면 그는 누구일까? 일본서기는 당연히 유우랴쿠(雄略)라고 말 할 것이다. 서기 477년이면 461년 출생한 시마왕(斯麻王)이 16세가 되었고 그는 백제 개로왕의 장자이다. 나중 그는 백제의 무령왕이 되지만 무(武)라는 이름은 477년 그가 이미 쓰고 있었다고 본다. 송서에 보이는 왜왕무(倭王武)는 그 때까지 견사(遣使)한 다른 왜왕보다 강력한 것을 요구하였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고 고구려의 장수왕과 같은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요구하였다. 이는 백제와 왜의 정통성이 자기에게 있다는 자존심의 발로이다.

남제서 왜국전은 건원(建元) 원년(479) 왜왕무를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에서 진급하여 6국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양(梁) 천감(天監) 1(502) 왕조 수립과 함께 왜왕무를 정동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 남제(南齊)와 양()은 나라를 개국하자마자 왜왕무(倭王武)를 진동대장군, 정동대장군으로 깍듯하게 모시는 것은 왜왕무(倭王武)가 백제 개로왕의 장자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3 4(479) 백제 23대 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일본에 체류 중인 곤지의 다섯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쯔쿠지국(筑紫國)의 병사 500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내니 24대 동성왕이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동년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거기서  쯔쿠시국(筑紫國)의 아찌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서기 479년 곤지(昆支)와 왜왕무(倭王武)가 위의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진다. 야마토(倭)는 왜왕무의 어머니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10 (488) ()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서기 488년 뜬금없이 중국 대륙의 북위가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백제가 승리하였다는 기사가 동성왕 10년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편이 갈려 있다. 이 기사는 자치통감에서 인용되었다고 보이는데 자치통감 권 136 제기2 세조 무황제 상지하 영명 6(488) 12월 조를 보면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가 패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건강실록이라는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북위에게 패전한 때는 484년이었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백제와 북위는 484, 488, 490년 세번에 걸쳐 전쟁을 하여 484년에는 북위가 승전했으나 그 후 488, 490년 두 번의 전쟁에서는 백제가 대승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위 자치통감의 기록은 영명 2(484)의 사실을 영명 6(488)으로 그 연대를 착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송서 백제전도 백제국은 본래 고려(高驪)의 무리로,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다. 후에 고려가 요동을 다스리자, 백제가 요서를 다스렸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고 일컫는다라고 기록했다.

남제서는 양 나라의 소자현(簫子顯)이 편찬한 남제(479-502년)의 정사이다. 이 남제서에 의하면, 백제의 동성왕은 490년 남제 조정에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이번에 파견한 행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長史) 고달(高達)과, 조선태수 겸 사마 양무(楊茂)와, 행 선위장군 겸 참군 회매(會邁) 등 3인은 말과 행동이 맑고 밝아서 충성된 마음이 일찍부터 나타나서 지난 태시(泰始) 연간(465-471년), 함께 송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간 일도 있사옵고 이제는 신의 사신을 맡아 먼 바닷길 험한 데를 가서 그 지극한 효험을 나타냈아오니 마땅히 작위를 올려주어 삼가 먼저 예에 의하여 각각 행직을 주시기 바랍니다.  

달(達)은 변경을 잘 다스린 효험이 일찍부터 나타났고 공무에 부지런하고 수고로왔으니 이제 행용양장군 대방태수를 시키시옵시고 무(茂)는 뜻과 행동이 맑고 한결같으며 공무를 조금도 폐하지 않았으니 이제 행건위장군 광릉태수를 시키시옵시고 매(邁)는 뜻을 주밀히 갖고 여러 번 부지런한 효험을 나타냈사오니 이제 행광무장군 청하태수를 시키시옵소서라고 말하니, 남제 조정은 이를 모두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리면서, 각각 장군 등의 호(號)를 하사해 주고, 태수 등의 관직을 제수하며 또 사지절도독 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삼았다.

또 사신이며 배알자인 복사 손부(僕射孫副)로 하여금 모대(牟大)에게 명하여 그의 죽은 조부 모도(牟都)를 이어서 백제 왕을 삼도록 했다. 또 조서를 내려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牟大)로 하니 이제 (大)는 죽은 조부 모도를 계승하여 백제왕을 삼는다. “라고 하였다.

이 해(490)에 위노(魏虜)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牟大)가 장수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幹那)를 보내어 노군(虜軍)을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건무(建武) 2(495)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예로부터 책봉을 받고 대대로 조정의 영예를 입으며, 분에 넘치게도 부절과 부월을 받아 들고 오랑캐들을 물리쳤습니다. 지난번 저근(姐瑾)등이 나란히 관작을 제수받는 은총을 입은 것으로 신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였읍니다. 지난 경오(庚午)(490)에 험윤()이 회개하지 않고 병력을 일으켜 깊숙히 핍박하여 들어 왔읍니다. 신이 사법명(沙法名)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매 밤중에 불시에 공격하여 번개처럼 들이치니 오랑캐들이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 같았읍니다. 적이 패주하는 기회를 타고 추격하여 수급을 베니 들판은 엎어진 주검으로 붉게 물들었읍니다. 이로 인해서 그 예기가 꺾여 고래같이 사납던 것이 흉한 모습을 감추어 이제는 나라 안이 조용해 졌읍니다.

그러하오니 그들의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법명((沙法名)으로 행정로장군 매라왕(邁羅王)을 삼고 찬수류(贊首流)로 행안국장군 벽중왕(辟中王)을 삼고 해례곤(解禮昆)으로 행무위장군 불중후(弗中侯)를 삼고 목간나(木幹那)는 전에 군공이 있었으니 이를 올려 행광위장군 면중후(面中侯)를 삼으시옵소서.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제수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 모견(慕遺), 행정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 왕무(王茂),참군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張塞)과 행양무장군 진명(陳明)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 쓰며 국가가 위급한 것을 보면 명령을 받들어 행하며 어려운 일을 행해서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읍니다. 이제 신의 사신의 책임을 맡겼사온 바 바다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가서 그 지극한 정성을 다 했사오니 실상 마땅히 작호를 올려 주어 각각 칭호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성조에서는 특별히 제수해 주시옵소서” 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모두 각각 군호를 주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북위와 백제간의 전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학자가 많다. 북위가 한반도 서해안의 백제를 침략했다는 것이 지정학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가 대륙에도 진출해 있었다면 전혀 무리없는 기록이 된다. 그럼 과연 이 시대 중국대륙에 영토를 확보하여 운영할 만한 국력을 백제가 가지고 있었을까?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백제는 동성왕 대에도 자국의 영토 밖에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국력을 회복하지 못 하였다.

무령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 20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서기 479년 곤지(昆支)와 왜왕무(倭王武)가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은 열도에도 없었고 백제에도 없었다. 이 때부터 서기 501년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장할 때까지 그의 흔적이 모호하다.

상대적으로 5세기의 신라는 백제의 몰락을 즐기며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3 년 (481) 봄 2월 비열성(比列城)에 거동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솜을 넣어 만든 군복을 내려주었다. 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쫓아가 이하(尼河)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천여 명을 목베었다.

소지왕 8 년(486) 봄 정월 이찬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았다. 일선군 땅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굴산성(屈山城) 두 성을 고쳐 쌓았다. 2월 내숙(乃宿)을 이벌찬으로 삼아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게 했다. 여름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가을 8월 낭산(狼山) 남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이 무렵 신라의 국력은 소백산맥의 추풍령을 넘어 중원을 넘보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 때 쌓은 삼년산성과 굴산성은 서기 554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이 전사하는 곳이며 이 곳에서 대전지역을 돌파하면 바로 백제의 수도 부여를 칠 수 있는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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