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25일 목요일

24. 유우랴쿠(雄略) 천황

  
만요우슈우(万葉集)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후반 경에 걸쳐 편찬된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노래모음이다. 천황, 귀족에서 하급관리, 사키모리(防人, 변경방위병) 등의 여러가지 신분의 인간들이 부른 4500수를 넘는 노래로 서기 759년(天平字3年) 이후 성립되었다고 여겨진다. 만요우슈우는 전권 20권으로 되어 있는데 유랴쿠(雄略)천황의 오호미우타(御製歌)가 권일(卷一)의 첫번 째 노래로 등장한다. (Wikipedia)

(원전) (毛與 美母乳 布久思毛與 美夫君志持 此岳 菜採須兒 家告閑 名告紗根 見津 山跡乃國者 押奈手 吾許居 師吉名倍手 吾己座 我許背齒 告目 家呼毛名雄母) (11番)
    
(번역) 바구니, 이쁜 바구니를 안고, 호미, 조그만 호미를 쥐고, 언덕에서 나물 캐는 아가씨여, 집이 어딘지,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다오, 이 야마토 국은 모두 내가 다스려요, 이것이 나를 대는 거야, 이름을, 집을,

유우랴쿠(雄略)천황은 서기 420년 대의 인물로 보인다. 아마 백제의 곤지(昆支)보다 20년 정도 연상일 것이다. 인교우(允恭)의 아들이다. 유우랴쿠의 맏 형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황자가 아버지를 독살한 453년 유우랴쿠는 이미 30을 넘은 나이였다. 그러나 부왕을 살해한 카루황자의 범죄를 단죄한 것은 신라의 파진찬 김무(金波漢紀武)였고 김무는 그 길로 야마토의 권력을 장악하고 안코우(安康)천황이 되었다.

오오하쯔세 와카타케(大泊幼武, 유우랴쿠의 이름)는 부왕의 시해사건에 대하여 정의가 실현되는 동안 아무공헌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서기 456년 김무(金武, 안코우 천황의 신라 이름)가 살해되자 유우랴쿠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왕위 계승권자들을 하나 하나 살해하였다. 친 형 두명을 죽이고 이찌노헤노 오시하황자 (市押磐皇子)를 오우미까지 찾아가 살해했다.

서기 432년 인교우(允恭)가 야마토의 왕이 되었을 때 전왕 리쮸우(履中)의 아들, 이찌노헤노 오시하황자 (市押磐皇子)는 오우미(近江)의 카야노(蚊屋野, 현 滋賀県蒲生郡)로 도망쳐 숨어 살았다. 고구려의 피를 이은 유라쿠는 서기 456년 10월 오시하황자의 거처를 찾아 살해하였다. 백제계 왕위 계승권자를 제거한 것이다.

이 때 제거된 오시하 황자의 어린 자식들이 고난에 찬 도피생활을 헤치고 백제의 개로와 곤지에 의하여 역사에 모습을 드러 내게 된다. 무령왕의 어머니 이히토요 황녀(飯豊皇女)와 두 남 동생 닌켄(仁賢)과 켄조우(宗)천황이다. 

일본서기는 21대 유우랴쿠(雄略) 천황이 서기 457년 즉위하여 479년 사망했다고 하였으며 재위시의 역사를 정교하게 기록하였다. 백제의 개로왕과 겹치는 그의 재위기간 중 서기 461년 백제의 곤지가 열도에 들어왔고 시마왕(후일의 백제 무령왕)의 탄생기사가 있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대사건이 그의 임기 중에 일어 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사기의 유랴쿠 천황 기록은 놀랄 만큼 간단하다. 그의 기록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가족사항
2) 하얀 바둑이 헌상
3) 미와강의 소녀
4) 요시노강의 소녀
5) 카즈라기산의 신(神)
6)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

고사기는 가족사항에서 유우랴쿠 천황에게 2명의 자식을 기록하였다. 자식의 숫자가 적다는 것은 그의 재위기간이 의외로 짧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그의 재위기간에 방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고사기의 기사 가운데 역사 기록은 전무하다. 애매한 설화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도 사춘기의 천황이 소녀를 만나는 이야기가 네 편이나 실려 있다. 712년 편찬된 고사기에 없는 유우랴쿠의 역사기록이 왜 720년 나온 일본서기에는 정교하고 방대하게 기록되어 있을까? 

5세기 중반 열도에서 이질적인 왕권이었던 인교우, 안코우, 유우랴쿠 시대가 사라지고 475년의 한성백제 멸망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질적인 인교우, 안코우, 유우랴쿠 시대를 청산하는 것이 서기 461년 열도에 들어 온 곤지(昆支)의 사명이었다. 서기 456년 정권을 장악한 유우랴쿠가 권좌에 있었던 것은 단기간에 불과하다. 겨우 1 – 2년일 것이다.

곤지(昆支)는 유우랴쿠 이후 479년까지 실제로 열도를 통치한 왕이었다. 열도 전역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약 30년에 걸친 통치의 잔재를 소탕하였다. 일본서기는 곤지의 통치기간에 벌어진 일을 모두 유우랴쿠 치세의 일로 기록하고 유우랴쿠가 479년까지 왕위에 있었다고 하였다. 백제가 역사에 너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큐유슈우 쿠마모토(熊本)현 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 고분의 대도와 사이타마(埼玉)현 교다(行田)시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에서 나온 철검에 쓰인 와카다케루 대왕(獲加多支鹵大王)이란 이 시대의 곤지(昆支)를 말한다.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多加利足尼其已加利獲居其名多加披次獲居其名多沙鬼獲居其名半比(表)其名加差披余其名乎獲居臣世々為杖刀人首奉事至今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事根原也(裏)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에서 나온 철검에는 신해년(서기 471년)이란 확실한 명문이 확인되었다. 큐우슈우의 아리아케 해(有明海) 안쪽 깊숙한 쿠마모토현 타마나(玉名)군과 칸토오(關東)지방의 사이타마(埼玉)현 교다(行田)시는 거리상으로 옛날 사람의 왕래가 없을 것 같은데,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무덤 속에서 같은 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철검과 대도가 발견되었다. 곤지(昆支)의 발걸음이 열도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세이네이(淸寧, 곤지의 왕명) 천황기에 그의 역사 기록은 전무하다.

고사기의 설화 가운데 하얀 바둑이 헌상, 미와강의 소녀, 요시노강의 소녀,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의 4개의 기사는 모두 사춘기 젊은이들의 연정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사춘기의 천황(?)이 미모의 소녀를 보고 풋풋한 사랑을 전하는 내용인데 그 가운데 미와강의 소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또 어느 때 천황이 놀러 나가 미와강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빨래하던 소녀를 만났다. 소녀의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다. “이름을 아카이코(赤猪子)라 하나이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그리고 천황은 궁에 돌아왔다. 그러나 아카이코가 천황의 명령을 받들어 기다리는 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마르고 늙어 젊은 날의 미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생 동안 기다렸다는 내 마음은 전하고 죽어야  해. 그녀는 천황에게서 받은 정표를 챙겨 천황을 찾아갔다. 천황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는 어디서 온 할멈이냐?” 하고 물었다. “모년 모월 천황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받들어 오늘에 이르렀나이다.  늙어 볼 품 없는 모습이 되었으나 제 마음만은 전해 드리고자 오게 되었나이다.” “잊고 있었다. 헌데 너는 명령을 기다리며 좋은 시절을 다 보내 버리고 말았구나.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 놀라고 미안하여 마음 속으로 이제라도 받아 들여 혼인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늙은 모습에 주저하였다.

미와강의 소녀라는 이 설화와 만요우슈우 1권에 1번으로 기록된 유우랴쿠 천황의 오호미우타(御製歌)는 너무 비슷하다. 두 노래 모두 유우랴쿠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모순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우랴쿠는 사춘기였을 때 천황이라 불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우연이 왕위가 빈 사이 왕위를 차지 하였다. 따라서 노래 속의 사춘기의 천황은 유우랴쿠가 아닌 다른 인물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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