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5일 금요일

23. 인교우(允恭) 관련 역사기록의 허상


 
고사기는 19 인교우(允恭) 천황이 지배계급을 개혁하는 정치를 펼쳤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즉위가 정해져 있던 태자  키나시노 카루왕 (木梨之輕王) 동모매(同母妹) 카루노 오호이라츠메 (輕大郞女)와의 스캔들이 발각되어 세상 인심이 동생인 아나호(穴穗命, 훗날의 20  安康天皇) 에게 기울었다. 카루왕은 군세를 모아 신하의 집으로 도망쳤으나 체포되어 이요(伊豫)국으로 유배되었다. 카루노 오호이라츠메는 카루왕을 따라가 유배지에서 함께 자결하였다.  

오아사즈 마와쿠 스쿠네(男淺津間若子宿禰, 允恭天皇) 백제 아신왕의 딸 오시사카노 오호나카쯔 히메 (忍坂大中津比賣) 결혼하여 첫째 키나시노 카루왕(木梨之輕王), 두째 …, 세째…, 네째 아나호노 미코토(穴穗命, 安康天皇) 낳았다.  다음으로 카루노 오호이라츠메, 다른 이름은 소토호시노 이라츠메(衣通郞女), ….  오호하츠세(大長谷, 훗날의 雄略天皇) 5 4녀를 낳았다.

이상은 고사기의 기사이며 일본서기는 소토호시노 이라츠메(衣通郞女) 카루노 오호이라츠메 (輕大郞女)  다른 인물로 기록하고 그녀는  인교우(允恭) 딸이 아니라  후비로 기록하고 있다.  소토호시노 이라츠메(衣通郞女) 백제 아신왕의 딸로 인교우의 황후 오시사카노 오호나카쯔 히메의 막내 동생이다. 키나시노 카루황자는 아버지의 여자인 소토호시노 이라츠메 (衣通郞女) 사랑에 빠진다. 아버지의 후궁과 사랑에 빠진 왕자가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위에 오르고자 하였는데  일본 역사서는 부왕의 애첩이 아닌 형제간의 스켄들로 바꿔 기록했다.   

일본서기는 인교우(允恭)천황이 18 한제이천황 (反正天皇) 동생으로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천황은 어려서부터 소극적인 성격이었고 어른이 후에도 병을 앓아서 건강하지 못하였다. 한제이(反正) 천황이 갑자기 사망하자 호족들이 하도 졸라서 마지 못하여 즉위하였다. 3년의 정월 사자를 신라에 보내 의사를 구하였다. 8 의사가 찾아와  병이 완쾌되었다. 인교우(允恭) 14 9 오사시(男狹磯)라는 사내가 아카시(赤石) 해저에서 커다란 진주를 전복을 건져올리고 죽었다.

고사기의 16  닌토쿠(仁德)편에 이런 기록이 있다. 천황이 어느 히메시마 (日女嶋) 갔을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 어느 도노키강 서편에 하나의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나무의 그림자가 아침엔 아와지(淡路) 넘고 저녁이면 타카야스야마(高安山, 奈良의 生駒山 옆의 ) 넘었다.

일본서기 닌토쿠(仁德) 12 고구려가 철재 방패와 과녁을 보내고, 고구려의 활솜씨를 자랑하며 무력시위를 하였다. 일본서기 오진(應神) 28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무례한 상표문을 올렸으므로 우지노 와키 이라츠코 태자가 격노했다.

기록은 위와 같이 일부는 자체가 허위이며 일부는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허위는 밝히고 상징은 해석되어야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된다. 위의 내용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4세기 시작된 광개토대왕의 백제-가야-왜의 정벌은 한반도에 국한된 전쟁이 아니었다. 전선은 열도까지 확대되었고 고구려는 먼저 큐우슈우를 장악하였다. 서기 412 광개토대왕이 사망하자 전쟁은 당분간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광개토대왕의 장례가 끝나자 고구려는 왕자 고진 (高珍, 393 – 453, 훗날의 인교우 천황)을 큐우슈우에 보내 열도 정벌을 계속하였다. 고진은 큐우슈우에 부임하여 후쿠오카현 쿠루메시(久留米市) 코우라(高良)산에 고구려의 본거지를 설치하였다. 지금 루메시 코우라대사(高良大社)에서 모시는 (),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 바로 사람이다.(구자일 설)

닌코쿠 12(417 ) 고구려에서 돌아 왕자 고진은 고구려의 철재 방패와 과녁을 보내 고구려의 신무기를 과시하며 항복을 권유한다.  야마토의 닌토쿠는 항복교섭에 응하지 않고 전쟁에 돌입한다.

서기 419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벌어진 야마토와 고구려의 결전에서 오사시(男狹磯) 사망한다. 오사시는 이름이 오호사자키(大雀) 닌토쿠(仁德)천황을 뜻하며 진주를 전복이란 왕의 옥새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쟁후 고구려 군은 일인지 야마토로 진공하지 않고 큐우슈우로 퇴각한다. 고구려의 고진(高珍)이 전쟁 중 중상을 입었던 같다. 고진은 코우라산에 돌아가 장기간 병상에서 일어날 없었다. 인교우(允恭) 천황기에 그가 병약했다는 기록은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서기 428년경  신라에서 모셔온 의원의 힘으로 병을 치료하고 서기 429 (일본서기 應神 28년으로 되어 있으나 닌토쿠 치세)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상표문에 고구려의 왕이 야마토를 지도한다 씌여 있어 태자 우지노 와키 이라츠코(菟道稚) 격노했다고 나온다. 이는 고진이 건강을 회복하고 야마토에 다시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신라의 의원을 데려 오는데는 당시의 신라 주둔군의 김무(金武)가 개입한다.

고사기 인교우 기사는 김무(金武)의 등장을 다른 식으로 기록했다. “이 때 신라의 왕이 81 척의 배에 실은 공물을 헌상하였다. 이 공물을 갖고 온 대사(大使)의 이름을 파진찬 김무(金波鎮漢紀武)라 한다. 이 사람은 약의 처방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황제의 병을 치료하였다.

431 야마토의 본거지 카와치(河內)  아스카(飛鳥) 정복하여 19 인교우(允恭)천황이 되었다.  일을 기록한 것이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는 닌토쿠 천황기의 기사이다. 기러기는 한자로 기러기 () 쓴다. 광개토대왕의 이름은 고안(高安)으로 ()대신 ()으로 광개토대왕을 상징하니 기러기의 알이란 광개토대왕의 아들 고진왕자를 뜻하게 된다. 인교(允恭) 천황의 이름, 마와쿠코(間若子) 역시 安의 숨은 변화를 거치며 기러기의 어린새끼라는 의미를 감추고 있다.  

나라(奈良) 타카야스야마(高安山) 이코마산(生駒山)  고구려와 관련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역사에서는 황실의 만세일계를 주장하므로 인교우(允恭)천황이 고구려의 피를 가진 정복자로 기록할 없다. 그는 16 닌토쿠 천황의 아들이며 18 한제이(反正)천황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인들은 이를 믿는다.

서기 436 지배계급을 재편성하는 개혁을 추진하고 438 왜왕 (倭王珍) 송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5 기사로 남아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의 젊고 섹시한 후궁 이야기를 해야된다.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로 고진의 25년에 걸쳐 이룩한 사업이 순간에 물거품이 된다. 고진은 백제 아신왕의 오시사카노 오호나카쯔 히메를 황후로 키나시노 카루태자(木梨輕) 낳았다. 그후 오시사카 오호나카쯔히메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우미국(近江國) 사카타(坂田)에 살고 있던 막내 처제(妻弟), 소토호시노 이라쯔메(衣通郞姬)를 서울로 불러들여 궁에 가까운 후지하라(藤原)에 거처를 마련하여 살게 하였다.

소토호시노 이라츠메(衣通郎姬)  살이 비치는 옷을 입었다는 의미이니 늙은 인교우(允恭)천황의 넋을 빼고도 남았다. 그런데 인교우천황 뿐만 아니라 카루태자의 넋까지 빼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조카와 이모간의 불장난은 왕국을 걷잡을 없이 사르고 만다. 불륜이 발각되자 선수를 쳐서, 태자는 서기 453  부왕을 독살한다. 

일본서기 인교우 24년 여름 6월 왕에게 올린 국물이 굳어 있었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이유를 점치자 집안에 문란한 일이 생겼어. 아마 근친상간이 있는 것 같애.”라는 결과가 나왔다. 일본서기는 이 기사를 올렸을 뿐으로 독살이니 뭐니 하는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다.

후쿠오카시 사와라구(早良區) 카나다케(金武)라는 지명이 있다. 그 곳이 김무의 신라군이 주둔하던 카나타케 (金武城)성이다. 일본서기의 기사가 이어진다. “ 이어 신라에서 대규모의 문상행렬이 80척의 선단으로 장엄하게 도착했다. 신라의 장군 김무(金武) 행렬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마도에서부터 곡을 하였고 나니와(難波) 도착해서는 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런데 신라에서 조문단이 예사 조문단이 아니었다. 신라는 이미 서기 450 고구려와 동맹관계에서 적대관계로 대외정책이 변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숨기고 들어와 카루왕자를 죽이고 왕국을 빼앗아 김무가 천황이 되니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안강(安康) 신라의 수도 경주 북쪽의 지방 이름이다. 일본역사는 예외없이 안코우(安康) 인교우(允恭) 아들,  아나호(穴穗命)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3년 후 더욱 황당한 일이 발생한다. 황실에 근거가 부족한 천황은 권력의 배경을 가진 황후를 필요로 한다.
때문이었는지 16 닌토쿠 천황의 왕자였던 오호쿠사가(大草香) 살해하고 그의 아내 나카시히메 ( 17 履中천황의 ) 빼앗아 황후로 들였다. 나카시히메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궁에서 함께 살았는데 일곱살 어린 아들 마요와노 키미(眉輪王) 사정을 알고 낮잠자던 천황을 칼로 찔렀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역사는 다시 21 유랴쿠(雄略)천황 (允恭의 아들) 시대를 맞게 된다.        -

 ) 이 글은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을 참조하여 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해당기사를 해석한 것입니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