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2일 금요일

21. The Battle of Baekgang (AD 663)

백제 의자왕의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중국에 끌려간 것은 660년이지만 백제 부흥군이 활동한 것은 663년까지이다. 의자왕 다음에 그의 왕자 부여풍장이 풍장왕으로 663년까지 부흥전쟁을 이끌었으며 백강의 전투를 끝으로 백제는 완전히 저항력을 상실하였다. 백강의 전투란 당 – 신라의 연합군과 백제 – 왜의 연합군이 백제의 마지막 명운을 걸고 맞 붙은 국제적인 전쟁이었다.

젊은 시절 해동의 증자라는 칭호를 듣던 의자왕도 그의 말년엔 범용한 군주가 되어 사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 했고 적국의 정보에 어두웠던것 같다. 당의 13만 대군과 신라의 5만 대군이 코 앞에 나타날 때까지 백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의문이며 마지막에 죽기를 각오한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의자왕이 가진 것의 전부였다. 계백장군은 전쟁터에 가기 전 아내와 자식들을 자기의 손으로 죽인다. 적에게 사로잡혀 수모를 당하느니 나라와 함께 모두 죽어야 할 때가 왔다고 믿었다.

야마토의 Jomei (舒明, 593 - 660) 천황이 629년 즉위하여 640년 사망했다고 일본기록에 씌여있는데 백제 의자왕은 641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다. 舒明천황은 야마토의 히꼬히토(日子人)태자의 아들이고 의자왕은 아좌태자의 아들이다. 우리기록은 의자왕이 무왕의 왕자로 되어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위덕왕의 장자 아좌태자는 부왕보다 먼저 사망했으므로 역사에 별로 기록이 없다. 여기서 히꼬히토 태자와 아좌태자가 동일인인가 아닌가에 관심이 모아진다. 일본측은 역사적으로 백제와의 연결고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황실에서 개인소장의 역사기록까지 죄다 압수하여 없애버렸다. 분서란 진시황의 독점물이 아니다.

660년 7월 9일 계백이 이끄는 5천의 백제군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5만의 신라군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백제군은 계백을 포함 전멸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서해를 건너 사비성에 이른지 3일만인 7월 13일 왕성이 함락되고 왕과 대신들이 당의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다. 당나라에 끌려 간 의자왕은 얼마 안 되어 사망했고 낙양성에서 10리 떨어진 북망산에 묻혔다. 곧 이어 백제의 대신이었던 귀실 복신이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항전의지를 고취하니 도침, 흑치상지등이 합류하여 백제부흥군을 결성하고 계속된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해 한때 사비와 웅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을 회복하였다.

660년 10월 야마토의 사이메이(齊明)여왕(603 –661)은 조서를 발표하고 백제를 구원하기위해 거국적인 노력을 경주한다.

詔曰「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絕, 著自恒典。 百濟國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枕戈嘗膽, 必存拯救。 』遠來表啟,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雲會雷動, 聚集沙彔, 翳其鯨鯢, 紓彼倒懸。 宜有司具為與之, 以禮發遣。 」云云。 送王子豐璋及妻子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立豐璋為王, 立塞上為輔, 而以禮發遣焉。

“옛적에도 백제가 우리에게 군사적지원을 요청한 경우가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단절된 왕조를 복원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언제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다. 백제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우리의 지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처한 우리의 결단은 확고하다. 나는 우리 장수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갈래로 진군하도록 명 할 것이다.”

661년 1월 여왕이 몸소 노쇄한 몸을 이끌고 지원군을 진두지휘하기 위하여 큐우슈우를 향해 서쪽으로 항진한다. 이 해 쯔쿠지의 아사쿠라에 임시행궁을 설치하고 구원작전을 지휘하다가 7월 24일 여왕이 사망한다.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장(622 – 686)이 지원군을 이끌고 661년 백제부흥군과 합류하여 풍장왕이 되어 부흥군을 지휘한다. 한편 웅진도독 유인원은 본국 당나라에 추가병력을 요청한다. 고구려 정복전쟁에 바쁜 와중에도 당은 7천의 추가병력을 보내 2차 나당 연합군이 결성된다. 663년 8월, 2년 5개월동안 준비를 끝낸 야마토의 지원군 2만 7천이 800척의 배에 타고 백제부흥군의 거점 백강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제 해전사에서도 유명한 백강의 전투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백제부흥군의 본거지는 주류성,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이 성은 지금 우금산성이라 불린다. 백제부흥군은 이 주류성에서 사비성 탈환을 위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주류성을 포위하고 있다. 야마토 지원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 나당 연합군의 목표였다. 아마토의 지원군은 목이 좁은 동진강 (역사에 백강, 백강구 또는 백촌강으로 기록됨)으로 들어와 강변에 상륙하여 성안의 부흥군과 합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의 7천 군사가 170척의 함선으로 동진강 입구를 차단했다. 야마토의 대군이 한꺼번에 동진강으로 들어올 수 없는 지형이었고 일본군은 이 곳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다는 지식이 없었다. 663년 8월 27일 부터 28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야마토의 지원군은 처절한 패배에 직면한다. 400척의 함선이 파괴되고 10,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부흥군의 부여풍장은 몸을 빼어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9월 7일 주류성이 함락되고 백제의 부흥시도는 좌절되었다. 백제왕족과 대신가족들은 주유성을 빠져나와 나흘동안에 광주를 거쳐 보성군 득량면까지 200리 피난길을 강행군으로 돌파한다. 피난민들은 보성군 득량면에서 야마토 수송선을 타고 보성만을 탈출하여 큐우슈우에 상륙, 야마토의 백성이 된다. 6.25때 흥남부두에서 미군 수송선을 타고 남으로 피난하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이들은 백제의 관직에 따라 일본에서 직책이 부여되고 정착지를 배정받았다. 백제의 지식층이 대거 일본에 유입된 것이다. 이 후에도 통일신라에서 배척받게 된 백제시절의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은 이 전쟁에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개입하였을까? 일본영토에 위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반도에 국한될 전쟁에 일본이 왜 국력을 총 집결하면서 사이메이 천황이 여자의 몸으로 노구를 이끌고 큐우슈우까지 나와 전쟁을 독려하였을까?

역사학자들이 지금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백제와 일본이 서로 다른 나라였다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 온 독자들은 백제와 일본이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고있다. 의자왕은 629년 – 640년까지 야마토의 Jomei (舒明)천황이었고 641년 백제왕으로 부임했다. 그때 그는 이미 49세였고 660년 당에 끌려 갈 때 68세였다. Saimei 천황은 백제 무왕의 딸로 의자왕의 후비이며 부여풍장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 난 아들이다. 백강전투에서 패배한 부여풍장은 역사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일본으로 돌아가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추고 살았다. 형님이며 천황인 天智에게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승려가 되어 입산까지 해야 했다. 671년 12월 3일 권력의 화신 天智천황이 사망하고 672년 부여풍장은 왕위에 있던 어린 조카를 무찌르고(임신의 난) 673년 2월27일 왕위에 오르니 그가 天武천황이다. 이때부터 처음으로 살아있는 현직의 왕이 천황으로 호칭된다.

681년 3월 17일, 덴무천황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 야마토 왕국을 위한 역사를 편찬하라고 명한다. 백제와의 단절을 통하여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을 예방하고 일본열도의 토착세력임을 내세워 국내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려는 천황가의 심모원려였다. 古事記는 덴무천황이 옛 상고역사에 대해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뿌리를 부정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이후로 일본에서는 역사란 국익에 부합해야 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명치유신이후 현재까지도 일본인은 역사란 국가가 편찬한 국사를 뜻한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 역사가 기술되므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역사기술이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일본이다. 중국에서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의 사기이래 형성된 정사(正史)라는 개념은 일본에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중국적 스칼라 슆의 기준으로 보면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역사가 아니라 옛날 이야기(物語 – 모노가타리)에 불과하다. 중학교 교과서 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본조야의 시각은 1300년전의 텐무의 시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역사란 현재의 관심을 표현한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모든 사가들이 백강을 금강으로 비정하였으나 백강과 주류성의 실재위치는 1997년 원광대학교 전영래 교수에 의해 비로소 확인되었다. 주류성은 현 전북 변산반도에 있었으며 백강은 동진강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세만금 간척지 남측 제방이 변산반도에서 시작되어 군산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동진강은 세만금 간척지 내부의 땅이 되었다.

2008년 8월 15일 금요일

20. 보타산 (普陀山, Putuoshan)


전남 곡성군 오산면에 관음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순천 조계산 송광사의 성보박물관에 이 절의 역사를 기록한 관음사 사적이 보존되어있다. 사적에 의하면 관음사는 서기 300년께 창건된 유서깊은 절이다. 사적에 기록된 창건설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심청전의 근원설화를 담고있다. 충청도 대흥현에 원량이라는 장님이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한 홍장이라는 외동딸과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날 공덕을 쌓으면 눈을 뜰 수 있다는 흥법사 성공스님의 말을 듣고 외동딸 홍장을 절에 시주하였다.


2007년 1월 16일 중국 浙江省 舟山市 普陀山의 沈家門鎭에서 沈家門 沈院 개원식이 열렸다. 이는 효녀심청공원이며 순 한국식 전통 건축양식으로 건축되었다. 곡성군수이하 23명의 곡성 축하사절이 참가하여 우리 농악놀이가 울려퍼졌다.

중국 보타도에는 효녀 심청의 본명이 원홍장이고 심봉사로 알려진 원량의 딸이었으며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부처님께 바쳤다가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 상인인 심국공에게 팔려갔고 결국 그의 부인이 되면서 심청으로 개명했다는 설화가 전해 와 이곳 보타도가 심청의 무대임을 보여준다. 홍장은 서기 301년 지금의 완도군 소량포에서 배를 타고 보타도에 왔고 312년 고향에 관음상을 보낸다. 이 관음상이 곡성군성덕산 기슭에 안치되고 관음사가 창건된다.

주산군도의 보타도라면 지금도 쉽게 갈 수없는 머나 먼 땅 같지만 옛날 옛적 사람들이 왕래했던 흔적이 나타나서 놀라게 된다. 보타도는 고려 충숙왕(1294 – 1339), 문장을 날렸던 이제현(1287 – 1367) 그리고 나옹화상(1320 – 1376)이 다녀 간 여행자의 순례코스였다. 普陀山志에 의하면 863년 일본승려 Huie(惠萼)가 오대산에서 모셔 온 목조 관음상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탔던 배가 닝보를 떠나 보타도에 와서 신라초에 좌초했다. Huie는 조음동(潮音洞)에서 상륙하여 자죽림(紫竹林) 한 가운데 장씨댁 (張氏宅)에 관음상을 안치했다. 이 곳이 후에 Bukenqu 관음원(不肯去觀音院, Reluctant to go guanyin yuan)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보타산에 동진시대(317 – 420) 이미 관음암이 있었다고 한다. 고기잡이와 장사로 척박한 삶을 살았던 이 지역사람들은 일찍부터 관음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관음신앙이 산동반도의 법화원으로 그리고 완도의 관음암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장씨댁에 관음상을 안치했다는 대목에 주의한다. 이상하게 이 무렵 장보고의 장씨가, 장영(적산포 장보고의 휘하로 장보고 사후 청해진 대사가 된 인물), 장지신(장보고 시대 명주와 보타도에 근거를 둔 신라상인이며 쾌속항해가), 장춘(818년 일본에 4마리의 노새를 헌상), 장종언, 장공청, 장각제(819년 형제가 야마가타 현에 표류)등,일본과 중국기록에 많이 나온다. 혹시 보타도에 근거를 두었던 장씨의 집성촌이 있지 않았을까. 장보고의 아이덴티티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Bukenqu Guanyin Yuan(不肯去觀音院)을 검색하면 일본승려 Huie의 이야기가 나오고 Bukenku관음원이 아예 일본승려가 지은 사찰이라고도 나온다. 산동반도 적산 법화원을 일본승려가 지었다고 주장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일본 관광객들은 긍지를 가지고 조상들의 자취를 찾아서 이곳에 몰려든다. 역사에 그럴싸한 기록을 한 글자만 발견해도 일본인은 침소봉대하여 자랑스런 조상의 기록으로 만든다. 이 고래심줄보다 끈질기고 주도면밀한 일본인의 집념과 아집앞에 독도가 아무리 우리 땅이라고 고함을 질러도 저 사람들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확실한 학술적인 반론이 없는 한, 잊을만 하면 자기 땅이라고 들고나올 것이다. 저들은 이미 한국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들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 잊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예상하고 휴가를 떠났다.

보타산은 관음신앙의 거점으로 2006년 한해 320만의 관광객이 찾았고 외지의 방문자는 무조건 25달라의 입장료를 내야된다. 보타산 조음동(潮音洞)은 높이 10미터 깊이 30미터의 자연동굴로 파돗소리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신라의 상인들은 明州(현 닝보)를 왕래하면서 보타도에 들렀는데 항로에 암초가 있어 이를 신라초라 부른다. 2003년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舟山市와 협력하여 신라초기념비를 세웠다. 고려시대에도 상인과 승려의 왕래가 빈번하여 고려도두(高麗道頭)라 불리는 해변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선박이 정박하던 해변이다.

우리는 자연과학이라는 신앙에 빠진 나머지 옛날 사람들은 행동반경이 극히 좁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옛 사람들도 대양을 무대로 당당하게 살았던 것 같다. 위에서 거론된 장지신이란 사람은 847년 6월 22일 37명의 선원과 함께 닝보를 출항하여 6월 24일 현 나가사끼현 五島列島의 和平島에 도착하였는데 이 기록이 중일간 범선 최고 항속 기록으로 알려진다.

2008년 8월 8일 금요일

19. 모래시계 OST – 백학의 노래(Zhurav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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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는 SBS가 서기 1995 1 10일부터 1995 2 16일까지 방송한 24부작 드라마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세명의 주인공을 통하여 묘사하였다. 최민수 고현정 박상원이 나왔다. 모래시계의 사운드 트랙으로 사용된 것이 러시아의 백학의 노래(Zhuravli)였다.

러시아의 다께스탄(Dagestan) 출신의 시인 라술 감자토프(Rasul Gamzatov, 1923 – 2003)가 일본의 히로시마 방문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과 사사키 사다코(佐々木 禎子, 1943 – 1955)의 동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사다코는 1945 8 6일 두살 때 히로시마 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하여 폭심지에서 1.7 킬로 떨어진 자택에서 피폭되었다. 당시 함께 피폭된 어머니는 몸의 이상을 호소하였으나 사다코는 이상 없이 건강하게 성장하였다.  1954 8월의 검진에서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5 1월 목 주위에 응어리가 생기고 2월 백혈병 진단을 받고 길어야 1년 살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왔다. 그녀는 히로시마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1955 8월 나고야의 고교생들이 병 문안차 종이학을 접어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사다코를 포함한 입원환자들이 종이학을 접기 시작하였다. 병원에서 종이로 센바즈루(千羽鶴, 종이로 접은 1000개의 학)를 접으면 병을 나을 수 있다고 믿고 쉬지 않고 종이학을 접었다. 8월 하순에 종이학은 1000개를 넘었으나 10 25일 아급성 림파성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녀가 접은 하얀 종이학은 그녀의 시신과 함께 매장되었다고 한다.

시인 라술 감자토프(Rasul Gamzatov)가 히로시마에서 이 일화를 듣고 크게 감동하여 귀국하자 마자 쓴 시가 백학(Zhuravli)이다. 일본의 병원에서 환자들의 비원을 담은 센바즈루(千羽鶴)는 러시아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2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였으나 신원이 파악되지 못하여 유해가 모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구천의 하늘을 떠도는 수 많은 전몰장병의 영령을 위로하는 이미지로 바꾸어 진다. 병사들은 죽어 백학이 되었읍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곁을 떠돌고 있읍니다. 백학의 대열 속에 빈 자리는 나의 자리일 것입니다. 나는 죽어 그 빈 자리에서 새들의 언어로 그대들을 부를 것입니다.

서기 1968년 이 시를 Yan Frenkel(1920 – 1989)이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전세계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백학은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이미지와 겹쳐져 전몰용사들을 위한 노래로 불리게 되었다.

백학의 노래(Zhuravli)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은
이국땅에서 전사하여
학이 되었읍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들은 하늘을 날으며 우리들에게 애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슬픈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 보며 침묵에 빠지는 것입니다.

피곤에 지친 깃털이 쉬지않고 하늘을 납니다.
하루가 지나고 안개 속을 뚫고 날아갑니다.
날아가는 대열 속에 조그만 자리가 있습니다.
아마 나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나는 그들과 함께
하늘을 날게 것입니다.
하늘에서 새들의 언어로
땅에 남아있는 그대들을 부를 것입니다.

                                                                  - 끝 -





2008년 8월 2일 토요일

18. 慈覺大師 圓仁 (794 – 864)

9세기 동지나해의 항해와 관련된 기록이 圓仁의 여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 나온다. 그의 여행기 가운데 항해관련기록과 그가 중국여행중 동행하거나 만난 신라인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더듬어본다. 8세기이후 일본의 견당사선은 척당 135 – 150명의 인원이 승선하고 4척 총 550 - 60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반 정도가 선원이고 나머지는 외교사절단, 의사, 통역, 사수(경비원), 유학생, 유학승, 세공사등이다.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는 하까다를 출발하여 잇끼, 쓰시마를 경유 한반도 남해안,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고구려령을 피하여 황해를 횡단, 산동반도에 상륙했다. 백제가 없어진 뒤에는 한반도 항로를 택할 수 없어 일본에서 바로 동지나해를 횡단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후로 견당사선의 난파사고가 급증한다.

Ennin의 견당사선은 4척으로 구성되었는데 837년 출발하다가 4척중 제3선이 파선되고 제2선은 책임외교관이 꾀병을 부려 도망하는 바람에 1선과 4선의 두척의 배가 838년 6월 13일 하까다에서 승선, 3일간 바람을 기다리다 18일 志賀島까지 가서 또 5일간 바람을 기다린다. 22일 五島列島의 宇久島에 닿고 다음 날 오후 6시 중국으로 출항한다. 두 배는 모닥불을 피워 신호를 하면서 첫 밤을 보내고 6월 24일 항행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 밤 사이에 두 배는 서로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27일 선체의 목제를 잇는 철재이음매들이 선체요동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탈락된다. 28일 출항 5일 만에 대륙연안에 도달한듯 바닷물이 황톳빛이다. 사람을 육지에 보내 알아보니 장강하구의 양주 해능현이라 한다.



이때 단기유학승으로 당에 온 Ennin의 나이 45세였다. 7월 2일 상륙허가가 나오고 함께 일본을 출항했던 4선은 산동반도 북방의 발해에 표착했다고 들었다. 839년 2월 12일 Ennin일행의 천태산유학이 거부되고 일본에 귀환하라는 조칙이 내린다. 견당사가 일본에 돌아갈 신라선 9척을 사들이고 해로에 익숙한 신라인 60여명을 고용하여 각선에 나누었다. 이때부터 Ennin은 불법체류를 무릅쓰고 중국에 남을 궁리를 한다. Ennin과 두명의 승려가 신라인 통역 김정남과 짜고 출항하는 견당사선에서 도망하여 천태산으로 향하던 중 당의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해주아문으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4월 10일 다른 견당사선 편으로 강제송환되어 일본으로 출항했는데 몇차례나 조난을 당하여 표류에 표류를 거듭하다 6월 23일 산동반도의 적산포에 표박한다. 그러다 7월 16일 Ennin을 비롯한 승려 3명을 불법체류자로 남기고 이 배는 출항한다. 이런 연유로 적산포에 있던 법화원에 이들이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장보고의 법화원은 이들에게 최대의 편의를 제공한다.

Ennin이 장보고를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법화원을 담당하고 있던 신라사람들, 압아 장영, 욱정, 왕훈등의 도움으로 여행허가를 받아 순례에 나서기 전인 840 년 2월 17일 Ennin은 장보고 앞으로 편지를 쓴다. “求法의 여행이 끝나면 적산으로 돌아왔다가 청해진을 경유하여 일본에 돌아가고 싶읍니다. 돌아가는 것은 대강 841년 가을쯤이 되리라고 추정됩니다. 혹시 청해진 방면에 사람이나 배의 왕래가 있을 때 소승 일행이 묻어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고맙겠읍니다. 소승일행이 일본에 돌아갈 수 있으냐 없느냐는 오로지 각하의 손에 달려있읍니다.”

840년 4월 1일 여행허가를 받아 오대산으로 떠난다. 5월 1일 오대산 도착, 8월 22일 장안도착, 841년 1월 당 무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회창이라 함. 이 해 11월 청해진의 장보고가 신라 조정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된다. 842년 10월9일 회창폐불이 시작되어 승려의 환속, 재산몰수, 승려의 외출금지, 외국승려의 추방등의 정책이 추진된다. 845년 5월15일 추방령에 따라 장안출발, 6월 양주, 7월 초주, 해주를 거쳐 밀주, 8월 채주경유 등주도착, 그리고 적산포 법화원에 초최한 모습으로 돌아와 장영의 따뜻한 환대를 받는다.

그들은 다시 3년간 적산포 법화원의 신세를 지면서 일본에 갈 배를 기다린다. 드디어 847년 9월 2일 정오 신라사람 김진의 배를 얻어타고 적산포 출항하여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9월 4일 날이 밝을 무렵 동쪽에 산이 보이기 시작하다. 충청남도 해안에 도착한것이다. 그날 밤 10시경 전라남도 진도서쪽의 高移島(김대중 대통령 출생지 하의도)에 정박하다. 9월 6일 오전 6시 무주(광주)의 남방영역 黃茅島(丘草島라고도 함, 진도군 거차도)의 泥浦도착하여 정박하다. 9월 9일 전라남도 여수 근처 안도(雁島)에서 휴식하고 남동으로 나아가자 9월 10일 날이 샐 무렵 동쪽 저 멀리 대마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오부터 일본의 산하가 보이고 오후 8시경 히쩬국 마츠우라 북부의 시카시마에 도착 정박하다.

이렇게 圓仁의 일기는 838년부터 847년까지의 기간을 기록하고있다. 그간의 우여곡절은 헤아릴 길이 없고 감개무량 했을 법하지만 일기는 담담하게 특별한 감상도 없이 끝맺는다. 그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인(백제때 진출했던 백제교민을 지칭)들의 도움으로 밀입국, 불법체류, 체포, 강제송환, 조난, 표류, 회창법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장보고에 대한 최상의 존경과 예의를 갖춰 그의 일기를 기록하고있다. 엔랴쿠지에서 적산명신(赤山明神)을 모시는 것은 장보고를 추모하는 圓仁 자각대사의 유언에 따라 이루어 진 것이다. 이 일기에 의거하여 9세기의 선박이 어떻게 대양을 횡단하였는지, 얼마나 많은 인원이 승선하였는지는 물론 당시 장보고의 활동무대와 신라교민에 관한 많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 기록의 도움으로 장보고는 비로소 역사의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nnin은 그런 식으로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장보고에게 진 신세를 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