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934년 신불출 작사,
문호월 작곡, 박부용의 노래로 노들강변이란 신민요가 발표되었다.
노돌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여나 볼가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미드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여기 등장하는 노돌강변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부근의 한강변을 뜻한다. 노돌의 노(鷺)는 강변에 노니는 백로(白鷺)를 말하고(?) 돌은 돌양(梁)으로 노량이 되었다. 원래는 노돌이었던 것을 노돌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후세 사람들이 노들로 부르게 되어 노들강변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해남군과 진도 사이에 흐르는 명량(鳴梁) 또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의 전승지인데 진도군지(郡誌)는 이 곳을 노돌목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노돌목이라면
노량으로 바꿀 수 있으니 제3의 노량이 출현한 셈이다. 그러면 노량이란
무슨 말일까?

노량의 “노”가 무슨 말인지 알기 위하여
삼국사기 지리지를 뒤져 임진강에서 한강의 노량진과 비슷한 지정학적 조건을 갖는 곳을 찾으니 현재의 임진강 철교 부근에 고구려의 장항현(獐項縣)이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임강현(臨江縣, 경기도 장단군 강상면 임강리 일대)은 본래 고구려 장항현(獐項縣, 古斯也忽次라고도 한다)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臨江縣
本高句麗獐項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獐項縣一云古斯也忽次). 장항현은 한자 표기이며 이를 고구려 말로 쿠시야코치(古斯也忽次)라고도 하였다.

동 지리지에 경기도의 안산시가 다시 쿠시야코치(古斯也忽次)로 나타난다. "장구군(獐口郡, 경기도 안산시
일대)은 본래 고구려 장항구현(獐項口縣) 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안산현(安山縣)이다." (獐口郡 本高句麗獐項口縣 景德王改名 今安山縣 獐項縣一云古斯也忽次).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는 바다를 대규모로 매립하여 고구려 시대와는 딴판인 모습이다. 바다를 매립하기 전 바다로 흘러드는
개울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하여 물을 건너 다닐 필요가 많은 지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안산시에 임진강을 건너는 곳에 붙여진 이름, 쿠시야코치가 있었다고
삼국사기 지리지는 기록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시대가 흐르면서 고구려어의 쿠시야(古斯也)는 사라지고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노루”가 사용되었다. 그러면 장항현(임강현)은 노루목, 안산시의 장구군도 노루목으로 된다.

붙여 (노루목 + 도랑)이 되고 줄여서 노돌이 된 것이다. 노돌을 한자로 쓴 것이 노량이다. 강화도의 손돌목(窄梁)은 좁다는 뜻을 가진 솔다(窄)와 돌(도랑)이 합쳐져 착량(窄梁)이 되었다.
노루목은 노루의 목에 해당하는 지형의 최단거리라는 의미이다. 노루목은 산행에도 많이 등장한다. 지리산에도 있고 설악산에도
있고 어느 곳이든 있을 수 있다. 등정하거나 하산할 때 가로질러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시작되는 곳의 명칭이 노루목이다. 전국 곳곳의 강이나 내를 건너기 좋은 곳은 모두 노루목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왜 제1, 제2, 제3의 노량이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노량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서 물을 건너는 곳이면 어디나 붙일 수 있는 말이다. 노량의 우리말은 “노루목 + 도랑(돌)”이었다. 그것이 놀돌을 거쳐 노돌이 되었다. 백로나 이슬이 낄 틈이 없다.
- 끝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