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6일 화요일

6. 난중일기의 발음도(發音島)


정유년 10(1597) 11일 정오에 안편발음도(安便發音島)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육지에 내려 산마루로 올라가서 전선을 숨겨 둘 만한 곳을 찾아보니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으로 뚫렸으며 서쪽에는 비금도(飛禽島)까지 통하여 눈앞이 시원하다.  (東有前島 不能遠望, 北通羅州靈巖月出山, 西通飛禽島眼界通豁)

1597 916일 명량해전에서 왜군의 서해진입을 저지시킨 이순신은 서해의 고군산열도까지 물러난다. 명량에서 이겼지만 아군의 기세가 외롭고 위험하여 조선 수군은  916일 당사도(唐笥島, 신안군 암태면), 17일 어외도(於外島, 현신안군 지도읍의 於義島), 19일 칠산 앞바다(영광군 낙월면),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홍농(영광군 홍농읍), 20일 위도(부안군 위도면)를 거쳐 계속 북상하였다. 21일에는 고군산열도(군산시 선유도)에 도착했다. 103일 고군산열도를 출발해 부안 변산, 영광 법성포, 어외도를 거쳐 10 9일 해남 전라우수영에 돌아왔다.

23일만에 다시 찾은 우수영 성 안팎은 인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사람의 자취도 보이지 않는 적막이었다. 황폐화된 우수영에서 진지를 구축할 수 없었던 이순신은 1011일 신안의 안편발음도를 찾았다. 이순신은 이 섬에 18일간 머물면서 염전을 개발해 질 좋은 소금을 구워 파는 등으로 모자란 수군 군량과 전비를 마련했다. 10 29일 이순신은 목포의 고하도로 이동한다. 그곳에 108일간 머물며 해상진지를 구축하였다.


--> 난중일기에 기록된 발음도가 어디인가를 놓고 장산도와 팔금도라는 두 가지 설이 대립 중이다. 장산도는 해남 우수영에서 10km, 팔금도는 25km 남짓 떨어진 섬이다.  안편발음도(安便發音島)는 난중일기에만 나오는 지명이다. 장산도와 안창도는 16세기 초 이미 보편화된 지명이므로 충무공이 머물렀다면 장산도나 안창도라고 명시했을 것이다.  또 안편도와 발음도가  인접한 두 개의 섬이라면 이순신은 어느 섬에 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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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신안군 
고려사지리지
1451
세종실록지리지
1454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해동지도
1750
동여도
1860
장산도(長山島)
長山縣
長山島
長山島
長山島
長山島
팔금도(八禽島)
팔흠도(八欠島)

팔이도(島)
안좌도(安佐島)


안창도(安昌島)
지좌도(只佐島)
안창도(安昌島)
기좌도(其佐島)
안창도(安昌島)
기좌도(其佐島)
암태도(岩泰島)
암타도(墮島)

암타도(巖墮島)
암태도(岩太島)
암타도(岩墮島)
비금도(飛禽島)
비이도()
피금도(被錦島)
비이도()
비금도(飛禽島)
도초도(都草島)
도사도(道沙島)
도사도(道沙島)
도초도(都草島)
都草島
都草島


백제의 居知山縣은 신라에서 安波縣, 940년 고려의 長山縣으로 이름이 바뀐 뒤 長山이란 이름이 바뀐 적이 없다. 충무공이 언급한 발음도(發音島)는 고려사지리지에 보이는 팔흠도(八欠島)일 것이다. 팔흠도(八欠島) ->팔이도(島) 에서 팔금도(八禽島)로 바뀐 것은 근세의 일이다.

비금도(飛禽島)의 경우는  비이도() ->피금도(被錦島) à비이도() ->비금도(飛禽島) 과정을 거쳤으나 1597년의 난중일기에 이미 飛禽島가 등장하므로 16세기부터 飛禽島가 함께 쓰인 듯 하다.

이름은 시간과 더불어 변해 왔으므로 현재 사용되는 한자의 뜻으로 이름을 풀이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비금도가 나는 새의 형상이라던가 도초도가 당나라 수도와 같은 형태라거나 풀이 많다거나 하는 등의 황당한 이야기가 신안군의 지명유래로 나온다. 비금도는 나는 새의 형상이 아니며 도초도는 당 나라나 풀과 아무 상관도 없다. 비금도가 되었든 도초도가 되었든 현재의 방조제가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름이 있었다. 여러 개의 섬과 바닷물이 들고 나는 갯벌로 이루어진 것이 원래의 모습이었다.

섬 이름은 우리 말로 이미 통용되고 있던 것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우리 말 이름을 표현할 한자음이  없으면 근사한 한자를 빌릴 수 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본래의 우리 말이 대부분 사라졌다신안군에 소구라 불리는 섬이 있었다. 사투리로 소구였으나 사실은 소의 귀라는 뜻이었던지 우이도(牛耳島)가 되었다. 이렇게 단순한 경우는 본래의 우리 말 이름을 찾아낼 수 있지만  팔금도(八禽島)비금도(飛禽島) 경우는 오리무중이다. 팔흠도(八欠島), 발음도(發音島)의 우리 말 이름은 빠끔이섬이었을까비금도는 삐끔이섬이었을까? 빠끔이섬과 삐끔이섬을 여러 분은 한자로 어떻게 표기하시겠습니까

비금도에 그림산(226m)이 있습니다. 온통 암석으로 이루어진 산이라 멀리서도 잘 보입니다. 1597 10 11일 이순신이 바라본 비금도는 사실 이 바위산을 말합니다. 한문으로 바뀌지 않고 우리 말로 남아 있는 희귀한 케이스이지요. 그런데 그림산이라는 명칭은 후세의 오류입니다. 원래는 가름산이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가름산의 의미를 모르게 되어 대충 그림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비금도에 방조제가 생기기 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그림산과 선왕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비금도를 두 토막으로 가로막아 양쪽의 통행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산이 가름산(遮斷山?)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가르마를 연상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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