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倭)의 최초 역사기록이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것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이다. 한반도의 한강 이남에 마한, 변한, 진한이 있으며 총 78국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위지동이전 한전(韓傳)과 같은 서물이다.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9 – 297)가 3세기 말 저술하였으며 한반도와
왜의 관련기록은 대강 3세기 중엽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면 된다. 야마다이국
(邪馬台国)의 여왕 히미꼬 (卑彌呼)가 서기 238년 사신을 보내 위(魏) 명제(明帝) 조예(曹叡, 205 – 239, 조조의 손자)를 배알하였다는 내용이다. 일본측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히미꼬의 기록이
없다. 다만 일본서기는 왜 여왕이 239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냈고 그들이
240년 돌아 왔다는 기록은 남겼다. 일본서기의 저자가 중국측 기록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위나라와 시작된 이러한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의 외교관계는 다음의 진(晉)으로 이어지다가 266년 사신을 보낸 것을 끝으로
이후 147년간 중국역사에 왜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가들은 서기 266년부터 413년까지의 147년 간 일본열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히미꼬의 야마다이국은 부족연맹 수준의 작은 나라였는데 147년 간의 역사가
없는 신비한 세월이 흐른 뒤 ( 이 기간 일본은 역사는 없고 신화만 무성하다) 갑자기 왜(倭)의 왕들이 유송(劉宋)에
사자를 보내 관직을 받는다.
서기 413년 동진(東晉)에 왜의 사신이 등장한 이래 유송에
5명의 왜국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그러나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왜왕들의 이름은
일본의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떠한 연관성도 암시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8세기의 역사가들이 역사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일본서기를 쓴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 된다. 역사를 남기고자 하였다면 중국측 기록과 일치하는 인명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역사서는
의도적으로 중국사서에 나오는 이름을 피했다.
그런데 고고학상 일본역사 발전단계의 한 획을 긋는 거대한 분묘가
이 무렵 나라 – 오오사카 지역에서 생기기 시작하더니 차차 일본전역으로 퍼져나간다. 그 분묘의 규모가 거대해서 길이
420미터를 넘는 것도 있으며 이를 만들려면 이집트 피라밋 건립과 맞 먹는 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대략 서기 250년부터 552년 불교공인이후 매장문화가
변화할 때까지의 기간을 일본에서 고분시기(古墳時期)라고 한다.
이 새로운 문화가 일본내의 자생적인 문화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일본인이 인정하지만 어디서 누가
왜 일본에 왔나?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인된 결론이 없다. 역사를 밝히기 위해서 이 무렵의 천황묘의 발굴을 역사학계에서 주장하지만 황실은 고인의 권위와 평안을 지켜야 한다면서
반대한다.
그런 연유로 일본 고대사는 사실상 미지의 황무지에 묻혀 있다. 일본서기는 이 시대의 역사를 모두 신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뜻이
아니라 신의 뜻에 따라 하늘에서 강림한 천손을 대대손손 왕으로 받들어야 된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그런
전통 때문에 열도에는 지금도 현재의 합리화를 위하여 역사를 재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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