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 Eta Funayama)고분은 큐유슈우 쿠마모토(熊本)현 타마나(玉名)군 나고미마치(和水町,舊 菊水町)에 있는 세이바루(淸原) 고분군 가운데 최고 최대의 고분으로 75문자를 은상감한 대도가 출토된 것으로 유명한 전방후원분이다. 이 고분은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축조되었다고 보이며 분구길이 62미터, 방패모양의 주호(周濠)가 있다. 1873년 이 고분 내부에서 총수 92점의 호화로운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 전장 90.6센티미터, 날(刃)의 길이 85.3 센티미터의 대도(大刀)가 나오고 이 대도에 은상감의 명문 약 75자가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台(治)天下獲□□□鹵大王世、奉事典曹人名无□(利ヵ)弖、八月中、用大鉄釜 并四尺廷刀、八十練、□(九ヵ)十振、三寸上好□(利ヵ)刀、服此刀者、長寿、子孫洋々、得□恩也、不失其所統、作刀者名伊太□(和)、書者張安也
획(XXX)로 대왕 시대에 무리테(대도의 주인 이름)가 문서를 관리하던 관청에 봉사하였다. 8월에 큰 가마로 정성껏 만들어 낸 대도이다. 이 칼을 지닌 자는 장수하고 자손도 번성하리라. 대도는 伊太和가 만들고, 張安이 명문을 썼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와 “누구”인데 윗글은 의문만 증폭 될 뿐이다. 표현된 문자도 선명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서 처음에 대왕의 이름중 위의 로(鹵)를 치(齒)로 읽게 되었다. 더구나 대왕의 이름 다섯 글자 가운데 처음과 끝의 두자 밖에 알아 볼 수 없었다. 일본천황의 이름가운데 다행히 反正天皇 (380 – 438) 蝮之水齒別命 (타지히 미즈하와케노 미코토)가 있어서 처음에는 이 사람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로부터 95년후 1968년 사이타마(埼玉)현 교다(行田)시 이나리야마(稻荷山, Inariyama)고분에서 전장 73.5센티미터, 중앙의 검의 너비 3.15센티미터인 철검이 발견되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1978년 보존수리 결과 전문 115자의 금상감 명문이 조각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앞면에 57자, 뒷면에 58자가 각인되어 있다.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垝其児多加利足尼其児名弖已加利獲居其児名多加披次獲居其児名多沙鬼獲居其児名半弖比(表)其児名加差披余其児名乎獲居臣世々為杖刀人首奉事来至今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事根原也(裏)
신해년 (보통 서기 471년으로 본다) 7월중 씀. 오와케노오미. 첫 조상의 이름 오호히코. 그의 아들 타카리노 스쿠네 (또는 타카리타루니), 그의 아들 테요카리와케 (또는 테미카리와코), 그의 아들 타카히하와케 (또는 타카히지와코), 그의 아들 타사키와케, 그의 아들 하테히 (전면), 그의 아들 카사히하오 (또는 카사히요), 그의 아들 오와케노 오미, 世世 杖刀人(경호부대)의 우두머리가 되어 봉사하기 오늘에 이른다. 와카타케(키)루(로) 대왕의 寺, 시키(斯鬼)의 궁에 있을 때, 이 백련의 利刀를 만들어 나의 봉사의 근원을 밝힌다. (뒷면)
에다후나야마 고분 출토의 대도에 보이던 2글자를 포함하여 대왕의 이름 다섯자가 선명히 나타나서 獲加多支鹵대왕 임이 확실하다. 큐우슈우의 아리아케 바다(有明海) 안쪽 깊숙한 쿠마모토현 타마나군과 칸토오(關東)지방의 사이타마현 교다시는 거리상으로 그 옛날 도저히 사람의 왕래가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무덤속에서 같은 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철검과 대도가 발견되었다.
칼의 양면에 날이 있는 것을 검(劍)이라 하고 한면만 날이 있는 것을 도(刀)라 한다. 사이타마현에서는 철검, 쿠마모토현에서는 대도가 나왔다. 그런데 검에 보이는 獲加多支鹵대왕이란 이름이 일본서기나 고사기에 나오지 않는 이름이라서 오늘 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이나리야마고분이 발견되므로서 獲加多支鹵大王이란 명칭은 확실해졌지만 와카타케루라 읽을지, 와카타키로로 읽을지 또는 와카다시로로 읽어야 하는지 모른다. 일본은 와카타케루로 읽어 雄略을 뜻한다고 밀고 나간다. 그런데 이름에 鹵를 쓰는 경우가 희귀하므로 이 글자만 봐도 백제 개로왕(蓋鹵王)을 떠 올린다. 우리는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무왕의 상표문”에 나왔던 왜무왕의 477년과 478년의 남송에 보낸 상표문기사를 알고 있다.
<서기 477년 기사> 興、死す。弟、武立つ。(왜흥왕이 죽고 동생 무가 즉위하다)
自ら、使持節、都督倭・百済・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国諸軍事、安東大将軍、倭国王と称する。
<서기 478년 기사> 順帝の昇明二年、使いを遣わして上表して曰、
「封国は偏遠にして、藩を外に作す。昔自り祖禰、みずから甲冑を擐き(つらぬき)、山川を跋渉して、寧所に遑がない 東の毛人五十五国を征し、西の 衆夷六十六国を服し、渡って海北の九十五国を平す. 王道 融泰にして、土を廊きて(ひらきて)、畿を遐にする。累葉朝宗して、歳に愆らず。」
○ 臣、下愚だと雖も、悉く(かたじけなく)先緒を胤ぎ(つぎ)、統べる所を駆率して、天極に帰崇す。道は百済を遥て(へて)、船舫(せんぼう)を装治す。而るに、句麗は、無道にして、図りて見呑を欲する。辺隷を掠抄し、虔劉して已まず。毎に(つねに)稽滞を致し、以て良風を失う。
路(みち)に進むと曰うと雖も、或いは通じ、或いはしからず。
臣の亡考済、実に寇讎の天路を壅塞することを忿る(いかる)。
控弦百万、義声に感激して、方に(まさに)大挙しようと欲するのに、奄に(にわかに)父兄を失い、垂成の功をして、一簣を獲ず。居りて(おりて)諒闇に在って、兵甲を動かさず。是を以て偃息して、未だに捷たず. 今に至りて、甲を練り、兵を治めて、父兄の志を申すと欲する。
○ 義士・虎賁(こほん)、文武、功を效し、白刃を前に交われども、また顧みる所なし。若し、帝の徳の覆載を以て、この強敵を摧き(くだき)、克く(よく)方難を靖めようとすれば、前の功に替わること無し。竊に(ひそかに)自ら開府儀同三司を仮し、其の余りは咸各(みなおのおの)仮授して、以て忠節を勧めた」
詔して武を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国諸軍事・安東大将軍、倭王に除す。
우리는 위의 기사를 왜무왕 = 斯麻王의 상표문으로 보았으며 사마왕의 돌아가신 아버지 濟를 백제 개로왕으로 보았다. 亡考濟는 475년 한성의 위례성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되었다. 478년 기사에 동으로 모인55국을, 西로는 여러 오랑케 나라 66국을 정벌하고 바다건너 북쪽의 95국을 평정하였다고 아버지 濟의 업적을 나열한다. 毛人 55국은 관동지방, 중이66국은 큐유슈우로 본다. 해북 95국이란 광개토대왕 남하시 고구려에 항복한 가야지방의 소국들이다. 사이타마현은 모인국의 하나이며 쿠마모토현은 중이국의 하나이다.
왜의 5왕중 濟는 443년, 451년, 460년 남송에 공물을 보내고 사지절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6국제군사겸 안동장군을 제수 받았다. 이 기간 그는 모인55국, 중이66국, 해북95국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서기 455년부터 475년까지 그는 백제 개로왕이었다. 위의 상표문 가운데 나오는 倭王 興을 우리는 곤지로 보았다. 461년부터 477년까지 그는 淸寧천황이었고 남송에 보낸 상표문에는 倭興王으로 표기하였다.
삼국사기 개로왕 18년(472년) 개로왕은 北魏에 장문의 표(表)를 올려 고구려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며 힘을 합쳐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부추긴다. 현금의 학자들 가운데, 선택된 어휘나 문장구성으로 보아, 개로왕 18년(472년) 북위에 보낸 표문과 위의 왜무왕의 남송에 보낸 상표문(478년)이 동일한 사람의 손으로 씌여졌으리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탁월한 안목이라고 본다. 사실 이 시대 백제와 왜는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이다. 개로왕과 곤지왕은 형제간이며 왜무왕은 그 아들이다. 한학에 밝은 동일인의 신하가 개입할 수 있는 개연성은 충분하다.
삼국사기 문주왕 3년(서기 477년) 4월 왕의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맏 아들 삼근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고 나온다. 이는 야마토에 있던 곤지가 477년 백제에 나왔다는 것을 말 함이다. 곤지는 백제에 들어오기 전 사마왕을 倭武王으로 삼고 야마토의 왕권을 넘겼다. 倭武王이 477년 남송에 상표문을 올린 것이 이때이다. 상표문의 내용은 온통 아버지 濟 즉 개로왕의 업적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개로왕의 왕자들이 모두 사망한 지금 사마왕은 개로왕의 뒤를 이을 맏 아들이 된 것이다.
따라서 477년부터 484년까지 왜무왕이 천황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백제와의 관련을 피하기 위하여 왜무왕은 아예 천황에서 제외되었다. 왜무왕을 계산하면 22대 淸寧, 23대 왜무왕, 24대 飯豊皇女, 25대 顯宗의 순으로 된다.
곤지는 477년 백제에 나가 사마왕이 개로왕의 피를 이어받은 장자이니 태자로 봉 해야 된다고 형 문주에게 요구하였을 것이나 문주는 자기 아들 삼근을 태자로 삼았다. 곤지의 주청은 무위로 그치고 그는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삼국사기는 그가 이때 백제에서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일본에 돌아간 곤지는 그 해가 가기도 전에 형 문주왕의 사망소식을 들었고 2년후인 479년에는 조카 삼근왕의 사망소식이 날아왔다. 백제에서 개로왕과 문주왕의 혈통이 끊어진 것이다. 이때 야마토의 곤지가 飯豊황녀의 동생 億計를 백제 동성왕으로 내 보낸것이 479년의 일본서기 기사이다.
이 무렵의 일본서기는 곤지의 역사는 雄略의 기록으로 감추고, 사마왕의 천황즉위 사실은 철저히 배제한다. 이러한 기반위에서 5세기의 왜의 5왕을 규명하려고 하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진짜 몰라서가 아니라 백제와의 관계는 영원히 미궁에 묻어두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학문의 수준으로 이 정도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의5왕을 규명하는데 백제 개로왕, 곤지왕과 사마왕을 빼 놓고는 규명할 길이 없다. 거기에 더 하여 이제 우리는 獲加多支鹵大王이라는 새로운 이슈가 이들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신해년은 471년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531년일 수도 있고 411년일 수 도 있다. 통설데로 신해년을 471년으로 보면 오와케가 모신 獲加多支鹵大王은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大長谷若建 (오호하쯔세와카타케루)命. 大泊瀨幼武 (오호하쯔세 와카타케루), 즉 雄略天皇에 해당되거나, 혹은 “송서 왜국전”에 보이는 倭王武라고 판단된다는 것이 일본측 견해이다. 獲加多支鹵를 와카타케루로 읽어서 후대의 한자표기로 바꾸면 若建 또는 幼武가 되어 雄略천황의 이름과 일치하게 된다고 해석하고 싶은 것이 일본 학자들의 속내이다. 이것은 일본서기 기록데로 雄略천황 재위기간을 서기 456년에서 479년까지로 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에서 雄略천황 재위기간을 456년에서 458년까지로 보고 있다. 458년 雄略천황은 개로와 곤지에게 제압되어 폐위되었다(24. 제 21대 雄略天皇편 참조). 461년 곤지가 야마토에 들어 온 것은 외국에 온 게 아니라 자기 집 안 마당에 돌아 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위의 獲加多支鹵大王은 과연 누구일까.
서기 432년부터 453년까지 고구려의 아들 允恭천황이 야마토에 군림하고 있던 440년 경부터 백제의 반격이 시작되는데 이 작전의 책임자가 개로왕자, 즉 왜제왕이었다. 그는 야마토의 예봉을 피해서 일본 서해안에 상륙하여 毛人55國을 회유하고 다시 큐우슈우의 중이 66국을 자기편으로 끌여 들인다. 그때 현해탄 건너 가야지역이라고 생각되는 海北95국을 다시 백제편으로 돌려 놓았다고 왜무왕이 남송에 보낸 상표문에 적혀있다.
야마토의 혼란은 453년 允恭사망, 456년 安康사망, 458년 雄略폐위, 461년 곤지 靑寧천황 즉위로 숨가픈 역사의 변전을 기록한다. 亡考濟가 이루어 놓은 모인55국과 중이66국과의 인적 넷트워크는 이후 淸寧천황과 왜무왕시대에도 수월하게 재가동되었으리라. 바로 이런 지역에서 이나리야마 검, 에타 후나야마 대도가 발굴되었다.
獲加多支鹵大王을 모시던 오와케 경호실장이471년 자기의 역사를 劍위에 기록으로 남겨 가보로 삼았다. 이나리야마 고분의 성립연대를 6세기 초로 보면 그 후손의 시대에 이 철검이 사이타마현의 이나리야마고분에 부장 되었다고 본다. 이 무덤이 검의 제작자인 오와케의 무덤인지 어떤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獲加多支鹵大王을 모시던 무리테 비서실장이 대도를 만들어 영광스러운 자기의 역사를 대도에 기록하여 가보로 삼다가 후손의 시대, 6세기초에 쿠마모토현의 에다후나야마고분에 부장품으로 매장되었다. 이 역시 무리테 자신의 무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이 시대에 조성된 묘지로 가장 확실한 기록을 과시하는 백제 무령왕 묘지가 서기 523년 만들어 졌다. 전문가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 무령왕묘, 이나리야마고분, 에다후나야마고분의 순으로 조성된 것으로 본다.
대우의 김우중 씨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가? 우리는 이제 역사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말해야 될 것 같다. 역사란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싯점에서도 씌여지고 있는 것이다. 歷史는 生物이다.
2009년 4월 25일 토요일
2009년 4월 18일 토요일
52. 飯豊皇女 (이이토요노 히메미코)
일본서기 淸寧천황 3년 (서기 482년) 가을7월조에 밑도끝도 없이 29자의 짧은 기사가 나온다. “飯豊皇女、於角刺宮、与夫初交、謂人曰、一知女道、又安可異、終不願交於男”
“이이토요 황녀가 쯔노사시궁에서 남편과 첫날 밤을 지내고 나서, 여자의 길을 한번 알았으니 더 알아 무얼 하랴. 더 이상 남정네와 볼 일 없네 라 하며 평생 남정네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淸寧천황기에 나온 이 기사는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후세에 남기고 싶어서 역사의 행간에 끼어 넣은 에피소드라고 본다. 후세에 남겨두고 싶은 인간세의 아픈 이야기, 이것은 여인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사실은 남정네의 순결한 사랑을 후세에 전 하고자 함이 아닐까.
일본서기는 淸寧천황의 황후를 기록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던 중 淸寧2년 11월 하리마(播磨)국에 숨어 살고 있던 황자 – 億計와 弘計 (양쪽 모두 일본어로는 오케로 발음)황자를 발견하여 카즈라기(葛城)의 오시누미(忍海)에 있는 타카키노 쯔노사시노미야(高城 角刺宮)에서 그들의 누나 飯豊皇女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飯豊皇女(이이토요 히메미코, 440 – 484) 는 이치노헤노 오시하노 미코 (市邊押磐皇子, 414 – 456) 의 딸로 應神천황의 4대손이다. 應神천황 시절 일시 백제가 장악하였던 일본열도는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의 영향 아래 놓이고 광개토대왕의 왕자 高珍이 19대 允恭천황이 되었다. (전편 23. 允恭천황 그 역사기록의 허상 참조). 應神의 아들로 야마토의 천황이었던 닌토쿠(仁德)는 419년 전사하였고 닌토쿠의 아들 리츄(履中)천황 ( ? – 432)도 432년 전사하였다. 일본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고 고구려의 왕자 고진은 야마토의 19대 允恭천황으로 기록된다. 이때 履中천황의 아들,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 (市邊押磐皇子)가 시가(滋賀)현으로 도망가 모습을 감추고 숨어 살았다. 飯豊황녀는 이 사람의 딸이다.
서기 432년 일본을 장악한 윤공천황은 453년 자기 아들에 의해 독살된다. 그 후 安康천황을 거쳐 456년 安康 사후 允恭천황의 아들 雄略이 정권을 장악하고 시가현에 숨어 살던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를 색출하여 처단한다. 서기 458년 雄略은 다시 백제의 개로왕과 昆支王에게 패배하여 연금되고 일본은 백제의 관리로 돌아간다. 458년 飯豊皇女는 8촌 오빠인 개로왕에게 발견되어 백제로 따라간다. 이 때까지 飯豊皇女의 두 남 동생 億計와 弘計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서기 461년 백제의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 개로왕은 동생인 코니키시(軍君)에게 “ 너는 일본에 들어가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행정로장군 좌현왕 餘昆 (= 昆支) 코니키시는 “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읍니다. 다만 국왕의 부인 한 사람을 저와 동행시켜 주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는 임신한 부인을 코니키시에게 맡기며 “ 이 부인은 이미 출산이 가깝다. 혹시 가는 도중 출산하면 어디서든 배에 태워 보내라” 이 부인이 바로 飯豊황녀였다. 우리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연재의 1. 백제 무령왕 참조). 역사기록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飯豊皇女가 먼저 야마토에 가기를 원 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행방불명된 두 명의 남동생, 億計와 弘計를 찾으려는 일념에서.
6월 카스리노키시 말데로 부인은 쯔쿠지(筑紫)의 카카라시마(各羅島, 현 加唐島)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세마키미(嶋君)라 지었다. 코니키시는 모자를 귀국시켰다 (기록은 이러하나 정황상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훗날의 백제무령왕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 (현대어의 임금 섬) 라 부른다. 가을 7월 코니키시(軍君) 는 도읍에 도착하였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이로부터 아마 2년후 億計와 弘計를 찾았고 이들 형제는 누이와 함께 쯔노사시노미야에서 살게 되었다.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는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삽입한 기사이다. 왜냐하면 곤지는 이때 겨우 스무 살 남짓 할 나이이므로 아들을 다섯 씩이나 둘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479년 백제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곤지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마타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 하였다. 그리하여 무기를 주고 쯔쿠지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이 사람이 바로 동성왕이다.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무왕의 상표문 참조). 이 동성왕은 飯豊황녀의 동생 億計이다. 그는 곤지의 아들이 아니라 곤지와 8촌 형제간이다.
이 때는 475년 한성백제 멸망시 왕과 왕자들이 모두 희생 당하여 왕실의 인재 풀이 거의 바닥 난 시점이었다. 461년 코니키시가 일본에 올 때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는 479년 이후에 등극한 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왕실의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5명의 아들을 거론하였다고 본다. 479년 億計를 백제로 내 보낼 때 이미 “곤지의 5명의 아들중의 차남”이라고 이 카드를 쓰고 있다.
또 여기 나온 천황은 곤지 자신이며 일본서기에 淸寧천황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서기는 곤지의 기사를 가능한 한 감추려고 한다. 곤지가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淸寧천황 앞의 雄略천황은 고구려 允恭천황의 아들로 458년 이미 실각되었으므로 그의 집권기간은 겨우 3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雄略이 雄略 23년(479년)까지 황위에 있었던 것 처럼 기록하여 곤지가 역사에 노출되는 것을 막았다. 실재 昆支는 461년 일본에 들어오자 마자 야마토의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그때부터 484년까지 천황이었다. 따라서 雄略紀의 기사 대부분이 실재로는 昆支 즉 淸寧천황의 기록이다.
일본서기는 飯豊황녀의 집권기간을 10개월여로 484년 11월 崩하였다고 표기하였다. 崩이란 천황에게만 사용되는 글자이므로 천황급의 대우를 하고 있으나 記紀에서 천황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세의 사서인 扶桑略記에는 飯豊天皇 24대女帝로 기록하여 천황으로 취급하고 있다.
飯豊황녀를 매장했다고 전해진 미사사기(御陵)가 奈良縣葛城市新庄町의 키타하나우치(北花內)에 있다. 고고학계는 “北花內大塚古墳 (키타하나우치노 오오쯔카 고분)”, 궁내청은 “葛城埴口丘陵 (카쯔라키노 하니쿠치노 오카노 미사사기)”라 부르는 전방후원분이다. 현재의 皇統譜에 飯豊황녀는 천황으로 기록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천황취급을 받고 있지 않다. 그러나 北花內大塚古墳은 천황릉으로서 궁내청의 관할하에 있고, 요배소(遙拜所) 입구에 궁내청이 세운 간판에는 “飯豊天皇 埴口丘陵” 이라 씌여있다.
일본서기는 飯豊皇女가 스스로 忍海飯豊靑尊 (오시누미노 이이토요노 아오노 미코토)로 부르고 忍海角刺宮 (오시누미노 쯔노사시노 미야)에서 정치를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고 전해진 다음과 같은 노래 한 수가 이어진다.
야마토를 통 털어 가장 보고 싶은 것은, 忍海 땅 高城(타카키)에 있는, 아름다운 角刺宮.
서기 479년 億計를 백제 동성왕으로 즉위시킨 뒤 淸寧천황 昆支王와 飯豊황녀의 아들 斯麻王의 행방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무왕의 상표문에서 이미 나왔다. 따라서 479년부터 飯豊황녀가 천황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서기 484년 飯豊황녀가 사망하자 그녀의 동생 顯宗천황 (弘計)이 뒤를 이었다고 되어 있다. 백제 무령왕은 서기 502년 나이 40세(무령왕릉 기록에 462년 출생으로 되어있음) 에 즉위하므로 479년부터 502년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떠나 이 글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왜 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은 이런 엉뚱한 飯豊황녀의 프라이버시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역사서 속에 남겨 놓았을까?
456년 웅략천황의 공격을 받아 아버지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 (市邊押磐皇子)는 살해되었고 그 때 이후 남동생 億計와 弘計는 행방불명이었다. 이때 몸을 숨기고 있던 飯豊황녀는458년 8촌 오빠인 개로왕에게 구조되어 백제에 나왔고 지금 개로왕의 아이를 뱃속에 갖고 있다. 이때 그녀의 나이 스물 하나, 곤지의 나이도 대강 그 부근일 것이다. 461년 산월이 가까운 몸으로 昆支를 따라 일본행을 관철한다. 곤지가 일본에 가라는 명령을 받고 만삭이 된 飯豊황녀를 요구했는데 곤지와 飯豊황녀 사이에 남녀간의 감정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개로왕은 飯豊황녀를 친동생 昆支에게 하사했으므로 飯豊황녀는 이후 곤지의 여자인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 다시는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는 淸寧천황이 아내를 갖지 않았고 자식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은 軍君 昆支라는 사나이는 이 여인만을 평생동안 바라보고 살았다는 의미일까? 일본서기를 기록했던 사람들도 이 일만은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이토요 황녀가 쯔노사시궁에서 남편과 첫날 밤을 지내고 나서, 여자의 길을 한번 알았으니 더 알아 무얼 하랴. 더 이상 남정네와 볼 일 없네 라 하며 평생 남정네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淸寧천황기에 나온 이 기사는 일본서기의 저자들이 후세에 남기고 싶어서 역사의 행간에 끼어 넣은 에피소드라고 본다. 후세에 남겨두고 싶은 인간세의 아픈 이야기, 이것은 여인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사실은 남정네의 순결한 사랑을 후세에 전 하고자 함이 아닐까.
일본서기는 淸寧천황의 황후를 기록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던 중 淸寧2년 11월 하리마(播磨)국에 숨어 살고 있던 황자 – 億計와 弘計 (양쪽 모두 일본어로는 오케로 발음)황자를 발견하여 카즈라기(葛城)의 오시누미(忍海)에 있는 타카키노 쯔노사시노미야(高城 角刺宮)에서 그들의 누나 飯豊皇女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飯豊皇女(이이토요 히메미코, 440 – 484) 는 이치노헤노 오시하노 미코 (市邊押磐皇子, 414 – 456) 의 딸로 應神천황의 4대손이다. 應神천황 시절 일시 백제가 장악하였던 일본열도는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의 영향 아래 놓이고 광개토대왕의 왕자 高珍이 19대 允恭천황이 되었다. (전편 23. 允恭천황 그 역사기록의 허상 참조). 應神의 아들로 야마토의 천황이었던 닌토쿠(仁德)는 419년 전사하였고 닌토쿠의 아들 리츄(履中)천황 ( ? – 432)도 432년 전사하였다. 일본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가고 고구려의 왕자 고진은 야마토의 19대 允恭천황으로 기록된다. 이때 履中천황의 아들,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 (市邊押磐皇子)가 시가(滋賀)현으로 도망가 모습을 감추고 숨어 살았다. 飯豊황녀는 이 사람의 딸이다.
서기 432년 일본을 장악한 윤공천황은 453년 자기 아들에 의해 독살된다. 그 후 安康천황을 거쳐 456년 安康 사후 允恭천황의 아들 雄略이 정권을 장악하고 시가현에 숨어 살던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를 색출하여 처단한다. 서기 458년 雄略은 다시 백제의 개로왕과 昆支王에게 패배하여 연금되고 일본은 백제의 관리로 돌아간다. 458년 飯豊皇女는 8촌 오빠인 개로왕에게 발견되어 백제로 따라간다. 이 때까지 飯豊皇女의 두 남 동생 億計와 弘計는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서기 461년 백제의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 개로왕은 동생인 코니키시(軍君)에게 “ 너는 일본에 들어가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행정로장군 좌현왕 餘昆 (= 昆支) 코니키시는 “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읍니다. 다만 국왕의 부인 한 사람을 저와 동행시켜 주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는 임신한 부인을 코니키시에게 맡기며 “ 이 부인은 이미 출산이 가깝다. 혹시 가는 도중 출산하면 어디서든 배에 태워 보내라” 이 부인이 바로 飯豊황녀였다. 우리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 연재의 1. 백제 무령왕 참조). 역사기록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飯豊皇女가 먼저 야마토에 가기를 원 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행방불명된 두 명의 남동생, 億計와 弘計를 찾으려는 일념에서.
6월 카스리노키시 말데로 부인은 쯔쿠지(筑紫)의 카카라시마(各羅島, 현 加唐島)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세마키미(嶋君)라 지었다. 코니키시는 모자를 귀국시켰다 (기록은 이러하나 정황상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훗날의 백제무령왕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 (현대어의 임금 섬) 라 부른다. 가을 7월 코니키시(軍君) 는 도읍에 도착하였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이로부터 아마 2년후 億計와 弘計를 찾았고 이들 형제는 누이와 함께 쯔노사시노미야에서 살게 되었다.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는 무언가 의도가 있어서 삽입한 기사이다. 왜냐하면 곤지는 이때 겨우 스무 살 남짓 할 나이이므로 아들을 다섯 씩이나 둘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479년 백제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곤지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마타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 하였다. 그리하여 무기를 주고 쯔쿠지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이 사람이 바로 동성왕이다.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무왕의 상표문 참조). 이 동성왕은 飯豊황녀의 동생 億計이다. 그는 곤지의 아들이 아니라 곤지와 8촌 형제간이다.
이 때는 475년 한성백제 멸망시 왕과 왕자들이 모두 희생 당하여 왕실의 인재 풀이 거의 바닥 난 시점이었다. 461년 코니키시가 일본에 올 때 5명의 아들을 데리고 왔다는 기사는 479년 이후에 등극한 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왕실의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5명의 아들을 거론하였다고 본다. 479년 億計를 백제로 내 보낼 때 이미 “곤지의 5명의 아들중의 차남”이라고 이 카드를 쓰고 있다.
또 여기 나온 천황은 곤지 자신이며 일본서기에 淸寧천황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서기는 곤지의 기사를 가능한 한 감추려고 한다. 곤지가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남기지 않았다. 淸寧천황 앞의 雄略천황은 고구려 允恭천황의 아들로 458년 이미 실각되었으므로 그의 집권기간은 겨우 3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雄略이 雄略 23년(479년)까지 황위에 있었던 것 처럼 기록하여 곤지가 역사에 노출되는 것을 막았다. 실재 昆支는 461년 일본에 들어오자 마자 야마토의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그때부터 484년까지 천황이었다. 따라서 雄略紀의 기사 대부분이 실재로는 昆支 즉 淸寧천황의 기록이다.
일본서기는 飯豊황녀의 집권기간을 10개월여로 484년 11월 崩하였다고 표기하였다. 崩이란 천황에게만 사용되는 글자이므로 천황급의 대우를 하고 있으나 記紀에서 천황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세의 사서인 扶桑略記에는 飯豊天皇 24대女帝로 기록하여 천황으로 취급하고 있다.
飯豊황녀를 매장했다고 전해진 미사사기(御陵)가 奈良縣葛城市新庄町의 키타하나우치(北花內)에 있다. 고고학계는 “北花內大塚古墳 (키타하나우치노 오오쯔카 고분)”, 궁내청은 “葛城埴口丘陵 (카쯔라키노 하니쿠치노 오카노 미사사기)”라 부르는 전방후원분이다. 현재의 皇統譜에 飯豊황녀는 천황으로 기록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천황취급을 받고 있지 않다. 그러나 北花內大塚古墳은 천황릉으로서 궁내청의 관할하에 있고, 요배소(遙拜所) 입구에 궁내청이 세운 간판에는 “飯豊天皇 埴口丘陵” 이라 씌여있다.
일본서기는 飯豊皇女가 스스로 忍海飯豊靑尊 (오시누미노 이이토요노 아오노 미코토)로 부르고 忍海角刺宮 (오시누미노 쯔노사시노 미야)에서 정치를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고 전해진 다음과 같은 노래 한 수가 이어진다.
야마토를 통 털어 가장 보고 싶은 것은, 忍海 땅 高城(타카키)에 있는, 아름다운 角刺宮.
서기 479년 億計를 백제 동성왕으로 즉위시킨 뒤 淸寧천황 昆支王와 飯豊황녀의 아들 斯麻王의 행방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25. 백제 24대 동성왕과 왜무왕의 상표문에서 이미 나왔다. 따라서 479년부터 飯豊황녀가 천황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서기 484년 飯豊황녀가 사망하자 그녀의 동생 顯宗천황 (弘計)이 뒤를 이었다고 되어 있다. 백제 무령왕은 서기 502년 나이 40세(무령왕릉 기록에 462년 출생으로 되어있음) 에 즉위하므로 479년부터 502년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떠나 이 글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자. 왜 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은 이런 엉뚱한 飯豊황녀의 프라이버시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역사서 속에 남겨 놓았을까?
456년 웅략천황의 공격을 받아 아버지 이치노헤노 오시하황자 (市邊押磐皇子)는 살해되었고 그 때 이후 남동생 億計와 弘計는 행방불명이었다. 이때 몸을 숨기고 있던 飯豊황녀는458년 8촌 오빠인 개로왕에게 구조되어 백제에 나왔고 지금 개로왕의 아이를 뱃속에 갖고 있다. 이때 그녀의 나이 스물 하나, 곤지의 나이도 대강 그 부근일 것이다. 461년 산월이 가까운 몸으로 昆支를 따라 일본행을 관철한다. 곤지가 일본에 가라는 명령을 받고 만삭이 된 飯豊황녀를 요구했는데 곤지와 飯豊황녀 사이에 남녀간의 감정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개로왕은 飯豊황녀를 친동생 昆支에게 하사했으므로 飯豊황녀는 이후 곤지의 여자인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 다시는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는 淸寧천황이 아내를 갖지 않았고 자식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은 軍君 昆支라는 사나이는 이 여인만을 평생동안 바라보고 살았다는 의미일까? 일본서기를 기록했던 사람들도 이 일만은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주)飯豊皇女(이이토요 히메미코, 440 – 484) 는 이치노헤노 오시하노 미코 (市邊押磐皇子, 414 – 456) 의 딸로 應神천황의 4대손이다. 이 여인의 혈통에 관한 기사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명백하다. 그런데 이이토요
황녀가 전직 천황들과 어떤 관계였는지 기술하지 않고 얼렁뚱땅 세이네이(淸寧) 천황과 켄조우(顯宗) 사이에 나라를 통치하였다고 나온다.
일본서기 유랴쿠기
서기 461년 개로왕의 후비가
곤지와 일본에 가던 중 큐우슈우의 가카라지마(各羅島)에서 시마왕을 출산하니
그가 백제의 시마왕(무령왕)이다.
그럼 시마왕의 모후는
누구인가? 일본 역사서에 이 여인의
이름이 나오는가? 이 의문에 가설을 세운 유일한 사람이 구자일입니다. 전후의 역사서를 깊게 읽어보면 시마왕의 모후가 이이토요 황녀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아무도 모를 때 그 가설을 세운 사람이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구자일 씨를 모릅니다만
그가 세운 많은 가설 가운데 무령왕의 모후가 이이토요 황녀라는 가설을 가장 좋아합니다.
-끝 -
2009년 4월 10일 금요일
51.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
2009년 3월31일 이명박 정부는 서울시 송파구 잠실에 제2롯데월드의
건축을 허가하였다. 정부는 31일 오전 세종로 중앙청사에서 민관합동 행정협의조정위원회 본회의를 열어 제2롯데월드를 건립하더라도 서울공항의 비행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결론내리고 제2롯데월드를 허용키로 최종확정했다. 이로써 15년을 끌어온 제2롯데월드 건축이 마침내 허용됐다.
제2롯데월드의 초고층 빌딩이 空軍의 서울공항 비행안전과 관련된 고도제한 이슈를 돌파하고 당국의 건축허가를 받은 것이다. 2015년 완공예정인 이 건물은 112층 555미터 높이로 당분간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전망이다. 예정지는 현 롯데월드 옆 석촌호수 북쪽이다. 주위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으며 이 장에서 거론하는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이 지척에 있다. 2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백제의 古都에 기념비적인 건물이 세워 지는 것이다.
古代의 首都임을 증명하려면 성곽과 궁전의 유적이 있고 밀도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야 된다. 풍납토성은 수도로서 이러한 요건을 잘 만족시키고 있으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제국의 위광을 사해에 떨치던 시절 거대하게 축조되었을 옛 왕실의 古墳이 주위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한성백제의 고분으로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남아 있는 석촌동고분군과 방이동고분군이 이에 해당되는 유적이다.
이 고분군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한성 백제 시대 중심묘역이다. 사적 243호인 석촌동 고분군은 일제시대만 해도 80기 이상 (석총 66기 포함) 의 고분이 남아 있다고 조사되었다. 이후 1974년 잠실지구 유적조사단에서 발굴하였을 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3.4호분 적석묘와 5호분 봉토분 뿐이었다. 석촌동 고분군은 1983 – 1984년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토광묘 계통과 적석묘 계통, 즙석봉토분, 火葬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백제 한성시대 (493년간)란 제1대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백제를 건국하여 제21대 개로왕의 위례성이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함락된 서기 475년까지를 말한다. 이후 백제의 역사는 웅진(공주)에서 64년간 (475 – 538), 사비(부여)에서 123년 (538 – 660) 존속한다.
서울시 석촌동 일대에 위치한 고분군은 시기적으로 백제초기에서 4세기에 해당하며 형태로는 계단식 돌 무지 무덤 (積石塚) 이다. 석촌동 무덤들은 백제초기 만들어진 무덤으로 일제 때 처음 조사되었다. 1호, 2호 무덤은 주민들이 농사짓는 땅으로 이용해서 내부구조가 크게 훼손되었고 유물역시 대부분 유출되거나 파손된 상태였다. 다만 3호 무덤은 기원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 형식인 계단식 돌 무지 무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974년 서울대학교박물관 고고학과에 의해 일제강점기부터 그 존재가 잘 알려저 왔던 석촌동 3호 및 4호 적석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1983년과 1984년 재조사 결과 3호분은 고구려 적석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제 1단의 크기가 동서 50.8미터, 남북 48.4미터, 높이 4.5미터로서 集安의 최대적석총인 태왕릉 (1변 길이 60미터)보다는 작으나 장수왕릉 (1변 길이 30미터)보다 큰 초대형급 적석총으로서 왕릉임이 분명하다. 이 무덤은 石山에서 깍아 온 막돌로 쌓아 올려 현재 3단까지 남아 있으며 제1단은 바깥면에는 고구려 성벽에서 보는 바와같은 장방형상자형으로 다듬은 돌을 써서 정면하였고 제1단의 땅에 닿는 부분에는 넓고 큰 석판을 한줄 돌려 깔아 북한에서 부르는 기단식적석총의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후대의 교란이 심하여 매장 주체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축조 기반층으로 판단되는 점토 섞인 자갈층에서 東晉代의 청자 반구호 구연부편이 출토되어 근초고왕(346 – 375 재위) 릉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1987년 4호분과 5호분사이의 정비복원지역을 대상으로 조사가 진행되어 석촌동 1, 2호분등의 적석묘와 함께 여러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석촌동 고분군에는 토광묘, 옹관묘, 봉토묘, 기단식적석묘 등 다양한 백제의 묘제가 확인되었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및 1988년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고분군을 관통하던 도로 (백제 고분로)를 지하화 하고 석촌동 3호분, 4호분, 5호분 등을 복원하는 한편 발굴과정에서 새로 발견된 적석총등을 정비하여 공원화하고 사적 제 24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석촌동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결합된 쌍분으로 규모는 22.3 x 12.8 x 1m인데 북분의 경우 상부구조가 완전히 파괴되어 정확한 구조를 밝히기 어렵지만, 방형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를 점토로 채운 형태이다. 남분은 전형적인 고구려 적석묘로 역시 상부가 파괴되어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없지만 잔존 석축 내부에서 석곽 4기가 조사되었다. 석촌동 2호분은 4호분 남쪽에 위치하며 규모는 17.4 x 16.2 x 3.8m이고 석축을 축조하면서 점토로 채운 내부에서는 목관 1개가 조사되었다.
석촌동 3호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적석묘로 제 1단의 규모가 동서 50.8m, 남북 48.4m로 중국 集安의 최대 적석묘인 태왕릉과 거의 비슷한 규모이다. 현재는 3단까지 남아 있는데 원래 높이는 6m였다고 추정된다. 3호분의 남쪽에 위치한 석촌동 4호분은 8.7 x 8.7 x 2m 규모로서 점토 입방체의 사방을 석축이 둘러싼 형태를 보이는데 석축이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다시 2단의 석축을 돌린 3단의 적석묘이다. 4호분 전체의 크기는 17 x 17m이다. 무덤은 내부점토를 4.6 x 4.6m 정도 파 내고 연도가 달린 석실을 설치했다.
고분이 자리잡은 석촌동의 표고 20미텨 정도의 남북방향의 대지위에는 1917년 당시만 해도 60기 이상의 적석총이 남아 있었으나 1970년대 지상에 墳形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여기 지정된 2기 (3호, 4호)뿐이었다. 그러나 1987년 발굴에 의하면 4호분에서 남쪽으로 240미터 위치에 있는 5호분 봉토분과 4호분사이에도 10여기의 돌무지 무덤과 석곽묘등 백제 초기 고분의 잔구가 남아있었다.
이 송파구 석촌동 방이동 일대에는 여러가지 형식의 고분들이 있으나 그 중 적석총과 굴식돌방무덤이 왕족 귀족들의 묘제였다고 생각되며 4세기에는 고구려의 적석총을 짓다가 점차 백제식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형으로 발전하여 갔으며 5세기에 들어가면서 석실분으로 유행이 바뀌게 된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과 유사한 고분이 중국의 지린성 지안의 국내성 환도산성 산성하 고분군에 다수 남아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연재의 글 "48. 倭建命의 東征 " 의 마지막의 언급을 기억하고 있다. “ 能褒野에서 야마토(大和)를 향해 한 마리의 백조가 날아갔다. 이 백조가 최초로 내려 와 앉았다는 전설지의 하나가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코토히키하라 (琴彈原)로 이곳에 白鳥陵이 있다. 내려와 앉았던 백조는 기운을 차려 다시 하늘로 솟아 오르더니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 현 大阪府 羽曳野市)에 머문다. 이 일을 기념하여 이곳에도 시라토리노 미사사기 (白鳥陵)을 만들었다. 그후 백조는 다시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를 떠나 먼 서쪽 하늘로 날아 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그 간 곳을 모른다.”
이 신화의 주인공 야마토 타케루는 백제 근초고왕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야마토를 떠난 백조는 현해탄을 건너 백제 위례성에 모습을 드러낸다. 근초고왕은 51세때 백제왕이 되어 서기 346년부터 375년까지 왕위에 있었고 그의 장남 호무다와케 (應神天皇, 320 - 394)는 야마토를 맡고 있었다. 이 시절 일본서기 神功紀 – 應神紀는 백제인의 대대적인 야마토 이주와 문물의 교류를 기록하고 있다. 근초고왕 부자는 백제인을 대거 야마토로 이주시켜 야마토라는 새로운 나라를 가와치(河內)에 건설하여 일본열도에서 독보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한다. 應神天皇의 무덤이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현 오오사카 하비키노시) 에 남아 있고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천황 능이 오오사카 사카이(堺)에 다이센(大仙) 고분으로 남아있다. 모두 길이 400 미터를 넘는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이다.
건축을 허가하였다. 정부는 31일 오전 세종로 중앙청사에서 민관합동 행정협의조정위원회 본회의를 열어 제2롯데월드를 건립하더라도 서울공항의 비행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결론내리고 제2롯데월드를 허용키로 최종확정했다. 이로써 15년을 끌어온 제2롯데월드 건축이 마침내 허용됐다.
제2롯데월드의 초고층 빌딩이 空軍의 서울공항 비행안전과 관련된 고도제한 이슈를 돌파하고 당국의 건축허가를 받은 것이다. 2015년 완공예정인 이 건물은 112층 555미터 높이로 당분간 수도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전망이다. 예정지는 현 롯데월드 옆 석촌호수 북쪽이다. 주위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으며 이 장에서 거론하는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이 지척에 있다. 2천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백제의 古都에 기념비적인 건물이 세워 지는 것이다.
古代의 首都임을 증명하려면 성곽과 궁전의 유적이 있고 밀도 높은 유물이 출토되어야 된다. 풍납토성은 수도로서 이러한 요건을 잘 만족시키고 있으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제국의 위광을 사해에 떨치던 시절 거대하게 축조되었을 옛 왕실의 古墳이 주위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한성백제의 고분으로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남아 있는 석촌동고분군과 방이동고분군이 이에 해당되는 유적이다.
이 고분군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한성 백제 시대 중심묘역이다. 사적 243호인 석촌동 고분군은 일제시대만 해도 80기 이상 (석총 66기 포함) 의 고분이 남아 있다고 조사되었다. 이후 1974년 잠실지구 유적조사단에서 발굴하였을 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3.4호분 적석묘와 5호분 봉토분 뿐이었다. 석촌동 고분군은 1983 – 1984년에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토광묘 계통과 적석묘 계통, 즙석봉토분, 火葬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백제 한성시대 (493년간)란 제1대 온조왕이 기원전 18년 백제를 건국하여 제21대 개로왕의 위례성이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함락된 서기 475년까지를 말한다. 이후 백제의 역사는 웅진(공주)에서 64년간 (475 – 538), 사비(부여)에서 123년 (538 – 660) 존속한다.
서울시 석촌동 일대에 위치한 고분군은 시기적으로 백제초기에서 4세기에 해당하며 형태로는 계단식 돌 무지 무덤 (積石塚) 이다. 석촌동 무덤들은 백제초기 만들어진 무덤으로 일제 때 처음 조사되었다. 1호, 2호 무덤은 주민들이 농사짓는 땅으로 이용해서 내부구조가 크게 훼손되었고 유물역시 대부분 유출되거나 파손된 상태였다. 다만 3호 무덤은 기원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 형식인 계단식 돌 무지 무덤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974년 서울대학교박물관 고고학과에 의해 일제강점기부터 그 존재가 잘 알려저 왔던 석촌동 3호 및 4호 적석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1983년과 1984년 재조사 결과 3호분은 고구려 적석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제 1단의 크기가 동서 50.8미터, 남북 48.4미터, 높이 4.5미터로서 集安의 최대적석총인 태왕릉 (1변 길이 60미터)보다는 작으나 장수왕릉 (1변 길이 30미터)보다 큰 초대형급 적석총으로서 왕릉임이 분명하다. 이 무덤은 石山에서 깍아 온 막돌로 쌓아 올려 현재 3단까지 남아 있으며 제1단은 바깥면에는 고구려 성벽에서 보는 바와같은 장방형상자형으로 다듬은 돌을 써서 정면하였고 제1단의 땅에 닿는 부분에는 넓고 큰 석판을 한줄 돌려 깔아 북한에서 부르는 기단식적석총의 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후대의 교란이 심하여 매장 주체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축조 기반층으로 판단되는 점토 섞인 자갈층에서 東晉代의 청자 반구호 구연부편이 출토되어 근초고왕(346 – 375 재위) 릉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1987년 4호분과 5호분사이의 정비복원지역을 대상으로 조사가 진행되어 석촌동 1, 2호분등의 적석묘와 함께 여러 유구가 조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석촌동 고분군에는 토광묘, 옹관묘, 봉토묘, 기단식적석묘 등 다양한 백제의 묘제가 확인되었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및 1988년 서울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고분군을 관통하던 도로 (백제 고분로)를 지하화 하고 석촌동 3호분, 4호분, 5호분 등을 복원하는 한편 발굴과정에서 새로 발견된 적석총등을 정비하여 공원화하고 사적 제 243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석촌동 1호분은 남분과 북분이 결합된 쌍분으로 규모는 22.3 x 12.8 x 1m인데 북분의 경우 상부구조가 완전히 파괴되어 정확한 구조를 밝히기 어렵지만, 방형의 석축을 쌓고 그 내부를 점토로 채운 형태이다. 남분은 전형적인 고구려 적석묘로 역시 상부가 파괴되어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없지만 잔존 석축 내부에서 석곽 4기가 조사되었다. 석촌동 2호분은 4호분 남쪽에 위치하며 규모는 17.4 x 16.2 x 3.8m이고 석축을 축조하면서 점토로 채운 내부에서는 목관 1개가 조사되었다.
석촌동 3호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적석묘로 제 1단의 규모가 동서 50.8m, 남북 48.4m로 중국 集安의 최대 적석묘인 태왕릉과 거의 비슷한 규모이다. 현재는 3단까지 남아 있는데 원래 높이는 6m였다고 추정된다. 3호분의 남쪽에 위치한 석촌동 4호분은 8.7 x 8.7 x 2m 규모로서 점토 입방체의 사방을 석축이 둘러싼 형태를 보이는데 석축이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다시 2단의 석축을 돌린 3단의 적석묘이다. 4호분 전체의 크기는 17 x 17m이다. 무덤은 내부점토를 4.6 x 4.6m 정도 파 내고 연도가 달린 석실을 설치했다.
고분이 자리잡은 석촌동의 표고 20미텨 정도의 남북방향의 대지위에는 1917년 당시만 해도 60기 이상의 적석총이 남아 있었으나 1970년대 지상에 墳形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여기 지정된 2기 (3호, 4호)뿐이었다. 그러나 1987년 발굴에 의하면 4호분에서 남쪽으로 240미터 위치에 있는 5호분 봉토분과 4호분사이에도 10여기의 돌무지 무덤과 석곽묘등 백제 초기 고분의 잔구가 남아있었다.
이 송파구 석촌동 방이동 일대에는 여러가지 형식의 고분들이 있으나 그 중 적석총과 굴식돌방무덤이 왕족 귀족들의 묘제였다고 생각되며 4세기에는 고구려의 적석총을 짓다가 점차 백제식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형으로 발전하여 갔으며 5세기에 들어가면서 석실분으로 유행이 바뀌게 된 것이다. 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과 유사한 고분이 중국의 지린성 지안의 국내성 환도산성 산성하 고분군에 다수 남아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연재의 글 "48. 倭建命의 東征 " 의 마지막의 언급을 기억하고 있다. “ 能褒野에서 야마토(大和)를 향해 한 마리의 백조가 날아갔다. 이 백조가 최초로 내려 와 앉았다는 전설지의 하나가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코토히키하라 (琴彈原)로 이곳에 白鳥陵이 있다. 내려와 앉았던 백조는 기운을 차려 다시 하늘로 솟아 오르더니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 현 大阪府 羽曳野市)에 머문다. 이 일을 기념하여 이곳에도 시라토리노 미사사기 (白鳥陵)을 만들었다. 그후 백조는 다시 후루이치무라 (河內古市邑)를 떠나 먼 서쪽 하늘로 날아 갔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그 간 곳을 모른다.”
이 신화의 주인공 야마토 타케루는 백제 근초고왕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이다. 야마토를 떠난 백조는 현해탄을 건너 백제 위례성에 모습을 드러낸다. 근초고왕은 51세때 백제왕이 되어 서기 346년부터 375년까지 왕위에 있었고 그의 장남 호무다와케 (應神天皇, 320 - 394)는 야마토를 맡고 있었다. 이 시절 일본서기 神功紀 – 應神紀는 백제인의 대대적인 야마토 이주와 문물의 교류를 기록하고 있다. 근초고왕 부자는 백제인을 대거 야마토로 이주시켜 야마토라는 새로운 나라를 가와치(河內)에 건설하여 일본열도에서 독보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한다. 應神天皇의 무덤이 가와치 후루이치무라 (현 오오사카 하비키노시) 에 남아 있고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천황 능이 오오사카 사카이(堺)에 다이센(大仙) 고분으로 남아있다. 모두 길이 400 미터를 넘는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이다.
2009년 4월 4일 토요일
50. 영산강 유역의 갈등의 역사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문제의 기사가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기(紀)에 나온다. 진구우(神功) 49년 춘삼월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가와케(鹿我別)를 장군으로 군세를 인솔하여 신라를 공격시켰다. 구테이(久低)등과 함께 토쿠쥰노 쿠니(卓淳國)에 닿자 어떤 사람이 “군사가 적어서는 신라를 이길 수 없다. 사하쿠(沙白)와 카후로(蓋盧)를 보내서 군사를 증원하자”고 말했다. 이 요청을 받아들여 모쿠라콘시(木羅斤資)와 사사나코(沙沙奴跪)에게 원군을 인솔시켜 보냈다. 이 두 사람은 성씨를 알지 못 한다고 한다. 다만 모쿠라콘시(木羅斤資)는 백제의 장군이다. 이리하여 토쿠쥰노 쿠니(卓淳國)에 군세를 집결하고 신라를 쳐부셨다.
그리고 또 히시호(比自火, 창녕), 아리히시노카라(南加羅, 가락국), 토쿠노쿠니(喙国, 김해시 진영읍?), 아라(安羅, 함안), 다라(多羅, 합천), 토쿠쥰(卓淳, 창원), 가라(加羅, 고령)의 7국을 평정하여 세력하에 두었다.
또 백제의 군세는 서방을 돌아 코케이노쯔(古奚津, 강진)에 닿아, 남만(南蠻)의 토무타레(忱弥多禮, 전남 해남?)를 토벌하였다. “?”가 달린 곳은 아직도 그 위치를 비정하는데 논란이 있다는 뜻이다.
또 초고왕(근초고왕을 뜻함)과 귀수왕자( 근구수왕자의 의미)의 군세가 나아가자 히리(比利, 전주), 헤치우(辟中, 김제), 호무키(布弥支, 담양?), 한코(半古, 반남면)의 4촌(四村)이 자연스럽게 복종하였다. 백제왕 부자(父子)는 아라타와케 (荒田別) 모쿠라콘시(木羅斤資)들과 호루스키(意流村) 또는 쯔루스키(州流須祗)라 하는 곳에서 합류하여 전승을 함께 기뻐한 뒤 정중하게 아라타와케(荒田別)를 배웅하였다. 치쿠마노 나가히코(千熊長彦)는 백제왕을 따라 백제국에 동행하였다. 백제왕은 헤키노무레(辟支山, 김제 성산?)나 코사노무레(古沙山, 정읍 은선리 천태산?)에 오르자 바위위에 앉아 “풀은 불에 타고, 나무는 물에 흘러가고 말지. 그래서 돌 위에서 영원의 우호를 맹세한다. 이번에 입은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봄 가을 조공을 올리겠다” 고 말했다. 그런 연후에 도읍지에 가서 환영식을 거행하고 쿠테이(久低)등을 딸려 보냈다. 진구우(神功) 50년 춘2월 아라타와케 (荒田別)가 귀환하였다.
삼국사기 AD 8년 온조왕이 군사를 몰고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고 1년뒤 마침내 마한은 멸망했다고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적혀있다. 그러면 위의 일본서기 기록이 문제가 된다. 서기 8년 백제가 병탄한 지역과 가야까지를 369년 일본이 평정하여 근초고왕에게 주니 영원의 우호를 맹세하고 일년 두번씩 조공을 바치겠다고 언약한다?
진구우(神功) 49년은 서기 369년으로 본다. 이 해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으나 치양전투에서 반격하여 승리한다. 서기 371년 백제의 근구수 왕자가 3만 대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한다. 우리는 근구수 왕자가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오우진 천황(應神天皇, 320 – 394)과 동일 인물이라고 본다. 이 무렵 그는 야마토의 오우진(應神) 천황이었고 야마토에서 군대를 데려 와 남해안의 배후를 경계하거나 평양성 공격에 투입할 수 있었으리라. 이들은 일본에서 차출한 군사라는 뜻이지 당시의 백제로서는 외국의 군대가 아니다. 서기 369년 백제의 근초고왕은 74세의 노령이었고 근구수 왕자는 49세 때 일이다. 아버지는 백제왕, 아들은 야마토의 왕이다.
근구수 왕자와 오우진 천황이 동일인이라면 일본서기는 오우진 천황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 된다. 백제가 이 부분의 역사를 기록했다면 백제 근구수 왕자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백제와 야마토가 같은 나라라면 오우진은 백제왕자이므로 역사의 주체는 백제이다. 따라서 이 기록을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서기 369년의 일본서기 기록은 서기 364년에서 369년 까지의 사이에 근구수 왕자가 가야제국과 협조체제를 구축하였다는 뜻으로 풀면 된다. 그러나 가락국의 명칭을 남가라라 한 점은 의문이 남는다. 김해의 가락국은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몰락하여 소국으로 전락한 뒤 남가라로 불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서기 369년 경이라면 김해의 가락국을 남가라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국력을 총동원하였고 총사령관은 근수수왕자 즉 야마토의 오우진 천황(應神天皇)이다. 그는 야마토에서 일부의 군대를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군대가 우군의 영토인 가야나 백제를 통과하여 평양성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일본서기 기록데로 신라를 쳐부시고 가야를 평정하고 침미다례를 토벌하면서 북상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 기사 때문에 한국 역사학자들은 369년 근초고왕에 의해 가야 및 침미다례가 백제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남북으로 두개의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다. 일본서기는 8세기 초의 일본황실의 이해를 반영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이 무렵의 역사를 읽어야 된다.
일본의 역사기록이 중국사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147년간 (266년 부터 413년까지) 일본에는 전방후원분 (前方後圓墳) 이라는 특이한 묘제(墓制)가 나타난다. 역사는 없고 고분만 남아 고분으로 역사를 추적하는 형편이다. 남아있는 고분들의 규모가 거대하여 길이가 몇 백미터에 이른다. 일본이외에 이러한 묘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일본에서 자생한 특수묘제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1985년 전남 해남 장고봉 고분에서 전방후원분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1990년 전남 함평 신덕고분을 조사한 국립광주박물관은 신덕고분 또한 전방후원분으로 조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 명화동 고분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방후원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이런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 6세기 전반 즉 약 50여년간 나타나다가 사라졌으며 영산강 유역에서만 13기가 확인되었다. 반면 일본에는 7000기 이상 확인되었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 – 6세기 까지이다.
지금 여러 곳에 있는 전방후원분을 찾아 놓고 보니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방후원분이 있는 지역에서는 옛부터 이들을 장고산이라고 불러왔다. 규모가 커서 무덤인 줄 모르고 장고처럼 생긴 산이라고 생각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 연유로 한국에서는 전방후원분 대신 장고형고분이라고도 불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유적정비 차원에서 전남 해남군 삼산면 용두리고분을 발굴조사하여 2008년 11월 현재까지 전방후원분 13기중 7곳이 발굴되었다. 지금까지 확실시 되는 전방후원분은 전북 고창 칠암리 고분, 전남 영광 월산리 월계고분, 담양 고성리 고분(월성산 고분)과 성월리 고분(월전고분), 광주 월계동 1.2호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 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고분군 중 제 1호분, 함평 신덕고분, 광주 명화동 고분, 영암 자라봉 고분, 해남 방산리 고분외에 이번 해남 용두리 고분이 꼽힌다. 전방후원분은 드문 드문 산재해 있고 축조시기는 대강 6세기 중반이며 일본열도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고대 한일관계사 특히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해 두 나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실재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박천수 교수는 2006년 충남대 백제 연구소 기관지인 “백제연구” 43집에 투고한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을 통해 본 5 – 6 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 라는 논문에서 한국측 일부 연구자중에는 임나일본부와 관련을 우려하여 전방후원분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또는 부정하려는 현상조차 보인다고 지적하였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의 군곡리 패총, 1983년 처음 확인되었으며 1986년 목포대 박물관이 광주박물관과 함께 1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패각층이 노출된 범위는 너비 약 200미터, 길이 약 300미터에 이르는 서남해안지역 최대이며 출토유물도 많았다. 유물로 보아 철기시대의 유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 신(新)나라 화폐 화천(貨泉)이 1매 출토되어 당시의 편년을 짐작케 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의 유적으로 삼천포 늑도 패총, 남해 세전리 유적이 있으며 김해패총, 마산패총, 제주 곽지패총등과 비교된다. 한편 복골(卜骨)에 쓰이는 뼈도 사슴과 멧돼지 뼈의 비율이 높았다. 복골은 동물뼈를 이용해 점을 치는 것을 말하는데 군곡리 패총에서 사슴과 돼지의 어깨뼈을 이용한 복골이 발견되었다. 군곡리의 복골은 김해의 부원동 패총의 것과 같으며 일본의 쯔시마, 잇키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1995년 전남대 박물관은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 대한 정비복원 사업을 맡았다, 특히 이 중 3호분은 안동권씨의 선산이었는데 분구가 계속 유실되자 복원계획을 세웠다. 여기서 3미터에 달하는 대형옹관 26기를 비롯해 금동신발과 장식대도등 수 많은 유물이 나왔다. 특히 이 고분은 하나의 봉분에 41기의 무덤을 3층 아파트처럼 조성하였다. 이는 동일집단이 3 – 7세기 사이 400년동안 고분을 가꾸어 왔다는 것으로 영산강지역 무덤의 변천양식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사기등 어떤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 영산강지역의 옹관묘세력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다 언제 사라졌을까? 또 5세기말 – 6세기초 영산강유역에 홀연히 등장했다 50년도 안돼 갑자기 사라진 전방후원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대표적인 독자적 묘제로 3세기 중엽 시작되어 5 – 6 세기 절정에 이르다 7세기에 소멸된다. 그런 전방후원분이 영산강유역에서 지금까지 13기 확인되었다. 이는 일본인이 영산강유역에 진출했다는 의미일까?
전남 나주 영산강 유역의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산재한 30여기의 반남 고분군이 있다. 덕산리 3호분의 남북둘레가 46미터이고 높이 9미터에 달한다. 이 정도 수준의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던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또 신촌리 9호 무덤에서는 다섯개의 옹관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그 가운데 옹관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이 반남고분군은 매장방법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매장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거대한 하나의 봉토내에 수개 혹은 수십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이 합장돼 있는 것이나, 몇몇 고분조사에서 봉분주위에 도랑이 존재했던 점도 특이하다. 옹관규모도 큰 것은 길이 3미터 무게가 0.5톤이나 되는 것도 있다. 그 안에는 금동관및 금동제의 호화로운 장신구와 환두대도 등의 무기류들이 부장돼 있었다.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한 금동관은 일본 구마모토 현의 후나야마(船山)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특이한 점들 때문에 반남고분군은 일제시대 초기 비상한 관심이 됐다.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에 한(韓)과 왜(倭)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천리쯤이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 진한, 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납작머리)이고,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瀆盧國, 거제도)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 (與倭接界).”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竃皆在戸西 其瀆盧國與倭接界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 에서 왜의 위치를 표기하기를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라고 되어 있다. 접해 있다는 의미는 육지로 붙어 있다는 뜻이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삼국지는 서진의 진수(陳壽, 233 – 297) 의 찬(撰)으로 황초(黃初)원년(220) – 태강(太康) 원년(280)간의 위-촉-오의 역사서이며, 후한서는 남조 송 범엽(范曄, 398 – 445)의 찬으로 후한 (25 – 220)의 역사서이다.
그러다가 5세기의 송서 왜국전에 오면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이 바뀐다.
중국대륙이나 만주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뱃길로 왕래하는데 몇 천년 동안 동일한 방법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돛단배를 타고 육안으로 보이는 곳으로 뱃길을 잡았다. 산동반도에서 서해를 건너 충청도 해안을 따라 남하하고 현재의 해남을 돌아 남해안으로, 남해도와 창선도, 늑도을 거쳐 한산도 거제도를 왼쪽으로 보면서 짝섬 (對島, 짝섬이 쯔시마로 변화) 을 향해 간다. 대마도는 두 개의 섬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짝섬을 거쳐 다시 잇키섬을 향해 항해하여 큐유슈우의 하카타에 닿았다. 만주 요동반도에서는 한반도 연안을 따라 내려 와 같은 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전남 해남지방은 이 항로의 요충이며 나중 9세기의 장보고가 확보한 청해진이 바로 해남과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따라서 이 항로에 위치했던 이 시대의 항구에서 유사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서기 1274년 고려와 원나라의 수군도 일본 원정시 지금 거론하고 있는 항로를 따라 큐우슈우에 상륙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에게 그렇게 노출되면서도 한산도, 노량, 명량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수로)을 통과하고자 했던 이유는 대양을 우회할 수 있는 튼튼한 배를 만들 수 없었고 물표 없이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지를 보지 않고는 현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삼국지나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의 전라남도 남서 해안지역에 삼한과는 다른 인종인 왜(倭)가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신비의 147년동안 일본전역은 전방후원분으로 덮히고, 5세기의 중국 사서는 왜의 위치를 일본열도로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왜(倭)란 나라를 의미하기 보다는 인종을 뜻한다. 영산강 유역의 역사는 이렇게 난마처럼 얽혀 역사가에게 갈등의 역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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