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11일 금요일

15. 신안 보물선


흐르는 물은 그리도 갈 길이 바쁜데 깊은 궁궐 두메 밭은 한가롭기만 하구나 (流水何尤急 深宮岑田閑)


서기 1976년, 수심 23미터, 조류 7 – 9킬로의 흙탕물이 흐르는 전남 신안군 증도 앞 바다의 보물선에서 건져 올린 원 나라 백자 접시에 새겨 진 글이다.

1323년 6월 1일 양자강 남쪽 닝보(寧波)항을 출항하여 큐우슈 하까다항으로 항해하던 가마쿠라 막부 장군가의 선박이 고려 충숙왕 10년 전라도 증도 앞 바다에서 침몰되어 7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양된 선박은 전장 34미터, 폭 11미터, 흘수 2.95미터, 200톤의 쌍돛배로 화물이 만재된 상태였다. 화물표의 목간 280여개를 세척하는 과정에서 “至治3년6월1일”과 “東福寺”라는 글자가 확인되었다. 至治3년은 서기 1323년이다. 東福寺란 쿄오토오의 토후쿠지(Tofukuji-temple)를 말함이니 하주(荷主)였음이 밝혀졌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원 나라 도자기 2만 661점, 쇠 붙이 제품 729점, 돌 제품 43점, 기타 574점등 총 2만 2007점의 유물이 인양되었다. 이 외로 소량의 고려청자와 동전 28톤이 있었다. 서기 14년 만들어진 신(新)나라의 화천(貨泉)으로 부터 1310년 만들어진 원(元) 나라의 至大通寶에 이르기까지 1,300년 동안의 234가지 800만개의 동전이 쏟아져나왔다. 그런데 28톤이나 되는 동전이 왜 실려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인양당시 실재 액면가치가 100억원에 이른다고 신문에 나왔으나 사실인지 알수없다. 화폐로 실렸을까 또는 발라스트용으로 실렸을까? 어느 세미나에서 실제로 발라스트 용이라는 주장이 일본측 대학교수로 부터 나왔다.

이 동전은 東福寺의 불상을 주조할 재료였으나 화물은 영원히 화주(貨主)에게 도착되지 않고 다도해 깊은 바다 궁궐 속에서 한가롭게 700여년을 보냈다. 그래서 모습은 지금 동전으로 남아있지만 사실은 불상의 전생인 셈이다. 인터넷에서 이 절의 사진을 아무리 뒤져도 거대한 청동불상은 보이지않고 아름다운 정원과 법당, 그리고 22미터 높이의 거대한 삼문(三門)이 보인다. 11월 말이면 단풍을 감상하러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무인정권의 출현과 비슷한 시기, 1192년 일본에서도 무인정권 가마쿠라(鎌倉)막부가 탄생하였다. 쿄오토오의 천황을 무력화시키고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 – 1199)가 쇼군(將軍) 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미나모토 가문이 멸망하고 임자잃은 권력은 요리토모의 미망인 호조 마사꼬(北條 政子 1156 – 1225)의 손에 들어가게되고 결국 그 친정인 호조(北條) 가문이 가마쿠라 막부의 주인이 된다.

미나모토 가문이 망 한 뒤 제 4대 쇼군으로 미나모토의 먼 친척 구조 요리쓰네(九條 賴經 재위 1226 – 1244)가 임명되고 요리쓰네의 아버지 구조 미치이에(九條 道家 Kujo Michiie 1193 – 1252)가 섭정한다. 구조 미치이에는 불심이 두터운 사람으로 선종(禪宗) 임제종(臨濟宗) 총본산으로 토후쿠지(東福寺)를 쿄오토오에 건립하는데 1236년 시작하여 1255년까지 완공하는데 20년이 소요되었다. 나라(奈良)의 최대사원 도다이지(東大寺)나 고후쿠지(興福寺)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에서 두 절의 東과 福을 따서 東福寺라 명명하고 새로운 수도 쿄오토오의 최대의 가람을 조영하였다.

이 무렵 또 하나의 거대한 불사(佛事)가 막부의 심장부 가마쿠라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나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마쿠라의 Kotoku-in (高德院)에 1252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 진 아미타불 청동좌상이 야외에 좌정하고 있다. 원래는 불전(佛殿)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1498년 9월 20일 밀려 온 쓰나미로 인해 사찰건물이 무너지면서 전각이 사라졌다. 높이 13.4 미터, 무게 93 톤이며 속은 비어있고 가마쿠라 다이부쓰(大佛)가 공식명칭이다. 보물선에 실린 28톤의 동전이면 이 불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1323년 해난사고가 없었다면 28톤 정도의 불상이 토후쿠지에 좌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일본기록에 중국에서 일본까지의 항로로 황해를 우회하는 북로(北路), 나가사끼를 경유하는 남도로(南島路)와 제주도 앞 바다를 통과하는 남로(南路)가 있었다. 남로가 가장 일반적인 항로인데 닝보에서 제주도 300 마일, 소흑산도 300 마일, 사고지점 신안군 증도 380마일, 나가사끼 460마일, 후꾸오까 520마일이다. 맑은 날이면 야간에도 별을 보며 대강의 방향은 짐작하면서 항해했겠지만 날씨가 나쁘면 제주도를 육안으로 확인할 때까지 위치를 알 방법이 없었다. 제주에서 일본까지 150마일을 더 가야한다. 그러니 제주도는 그 당시의 항해사들에게 신의 구원만큼이나 확실한 거대한 물표였다. 날씨가 나빠 제주도나 소흑산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현재 위치에 대한 지식없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물표를 찾을 때 까지 항해하는 수 밖에 없다. 가마쿠라 막부 장군가의 선박은 귀중한 재화를 가득 싣고 제주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신안군 증도앞 까지 항로를 이탈해 왔을 것이다.

도후쿠지 삼문 / 도후쿠지 법당 / 도후쿠지 통천교 / 가마쿠라 대불

댓글 3개:

꼬비에뚜 :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꼬비에뚜 :
작성자가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꼬비에뚜 :

사이트 링크가 안되서 계속 수정합니다만 혹시 아래 주소의 불상이 동복사의 그것이 아닌가 합니다.
http://picasaweb.google.com/steve46814/JapanKyotoSShrinesAndTemples#5084173286736388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