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왕국 백제의 역사를 모색하다 보면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대해(大海)에 이르게 된다. 일본서기란 8세기에 쓰여진 일본의 역사서이다. 백제사의 방대한 자료가 일본서기에 고스란히 잠 들어 있다. 백제의 역사가 왜 일본의 역사서 속에?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본서기의 신화의 강을 건너야 된다.
처음부터 갈 곳을 작정하고 길을 나선 것은 아니었는데 길을 가다 보니, 백제와 일본은 한 나라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글은 2세기부터 7세기까지 백제가 일본열도를 경영하기 위하여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고, 서기 660년 백제본국이 멸망하자, 백제왕실이 일본열도에서 영구히 군림할 수 있는 길을 어떻게 열어 나갔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저자가 유념하고 있는 점은 다음과 같다.
자의적인 역사 해석이나 자신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접근은 피한다. 가능하면 저자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역사 기록을 채록하여 역사의 논리가 스스로 밝혀지도록 한다. 한일 양국간 논쟁 중인 이슈는 논쟁의 내용만을 밝히고 독자들 스스로의 판단의 자료로 남긴다. 인터넷에서 검색 가능한 용어의 선택에 유의하며 외국어는 현지의 발음만을 존중한다. 일본어의 혼다, 本田, Honda는 가능한 표현이지만 본전으로 표기하는 것은 불가하다. 가능하면 객관적인 연대를 기록하여 후인들이 참고 할 수 있도록 한다.
淺學非才는 이제와서 어쩔 수 없으나 曲學阿世의 徒가 되지 않기 만을 바랄 뿐이다.
첫 번째로 선택된 소재가 백제 무령왕이 된 것은 생몰연대가 가장 확실하고 그의 인생역정이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그는 백제 21대 개로왕의 아들이며 삼촌인 좌현왕 여곤(餘昆, 곤지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됨 ) 에게 입적되어 여곤을 아버지라 부르며 오오사카 카와찌성에서 자랐다.
무령왕의 무덤은 서기1971년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을 발굴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도굴꾼들의 피해를 입지않고 완벽한 모습을 드러냈다. 무덤속에서 지석 이 함께 나왔는데 이름, 출생 사망연대등이 기록되어있어 신분이 파악되었다. 이리하여 백제 무령왕은 생몰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고대의 왕이 되었다.
이후 일본 후쿠오카 북쪽 카카라지마 (加唐島) 주민들이 공주에와서 백제 무령왕릉에 참배하고 서기461년 그곳에서 태어 난 무령왕의 탄생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서기 461년 백제의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 개로왕은 동생인 코니키시(軍君)에게 “ 너는 일본에 들어가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곤지(昆支)는 “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읍니다. 다만 국왕의 부인 한 사람을 저와 동행시켜 주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는 임신한 부인을 코니키시에게 맡기며 “ 이 부인은 이미 출산이 가깝다. 혹시 가는 도중 출산하면 어디서든 배에 태워 보내라” 하였다. 6월 카스리노키시 말데로 부인은 쯔쿠시(筑紫)의 카카라시마(各羅島, 현 加唐島)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세마키미(嶋君)라 지었다. 코니키시(軍君)는 가을 7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서기 461년 곤지의 야마토 입성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었다. 지난 3년간 임시로 맡겨 둔 궁궐을 기비 (吉備) 출신의 와카히메 (稚媛)가 어린 호시카하 (星川)황자를 내세워 곤지의 입성을 막았다. 그 때 오호토모노 무로야노 오호무라지 (大伴室屋大連)가 코니키시(軍君)를 도와 백제측에 서서 호시카하 황자를 죽이고 곤지를 맞아 들여 세이네이(淸寧) 천황이 탄생하고 야마토가 다시 백제의 수중에 돌아 왔다.
일본에서는 곤지에 대하여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경우가 없고 반드시 뒤에 군이나 왕을 붙여 호칭한다. 일본서기 (곤지왕), 백제신찬 (곤지군). 일본 오오사카 하비키노시(羽曳野市)에 있는 아스카베신사(飛鳥部神社)가 곤지왕을 모시는 신사이며 곤지왕 시대에는 이 곳이 곤지왕의 거성 가와치성이었다.
서기475년 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백제 하남 위례성이 점령되어 폐허로 변 하고 이때 개로왕 (429-475, 재위 455-475 21년간) 은 아리수(한강의 옛 이름 )를 건너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처형된다. 이 때 폐허가 된 하남 위례성은 1,500년 동안 4미터 깊이의 토사속에 묻히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하나 일본서기는 아들이 아니고 동생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으로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다. 개로, 문주, 곤지는 형제간이다.
서기477년 야마토의 곤지가 야마토를 떠나 면서 시마왕을 왜무왕으로 봉한 뒤 백제에 나왔던 기록이 있다. 어찌 된일인지 삼국사기는 이 때 곤지가 사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요즘 역사학자들의 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나 일본측 기록에는 곤지의 사망연도가 서기 484년으로 되어있다. 왜무왕은 478년 송 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475년에 있었던 개로왕과 왕자들의 죽음을 부형(父兄)의 죽음이라고 묘사하였다. 따라서 무령왕은 백제왕이 되기 전 477년부터 왜무왕 이었고 그가 백제 무령왕이 된것은 서기 501년 나이 40세때이다.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23년 (서기 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하고 있던 곤지왕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쯔쿠시국(筑紫國)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24대 동성왕이다.
동성왕 사후 501년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무령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긴 지리적 요충지인 한강유역을 회복코자 재위기간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그의 아들 성왕때 이 목표는 거의 이루어질 듯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훗날 동맹국 신라의 배신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2008년 4월 12일 토요일
1. 백제 무령왕 (461 -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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