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都市 북동방 표고 848미터의 Hiei(比叡)산은 예로부터 일본 3대 靈山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나라시대말기 788년 Saicho (767 – 822) 가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 Enryakuji(延曆寺)의 중핵 根本中堂을 히에이산 산정에 건립한다. 861년 10월 根本中堂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천태종 3대좌주 자각대사 Ennin (圓仁, 794 – 864)이 文殊樓를 세우고 문수상을 안치하였다. Ennin사후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엔랴쿠지의 별원으로 적산선원을 건립하고 적산명신을 모셨다. 적산명신이란 장보고를 신격화한 이름이다. 2001년 12월 문수루앞에 높이 4.2미터의 청해진대사장보고비가 건립된다. 根本中堂을 내려다보는 高臺에 세워진 신라해상왕 현창비(顯彰碑)는 완도군에서 11년에 걸친 노력끝에 제작되어 일본으로 가져 온 것이다. 곁에 세워진 설명문에 “두 사람이 쌓아올린 깊은 우정이 금후 한일양국의 국민들에게 알려져 양국의 우호증진에 기여하도록 이 비를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중국 산동반도 榮成市 石島鎭에 赤山 法華院이라는 사찰이 있다. 820년 서주(徐州)의 무령군소장 장보고가 건립한 사찰로 요즘 미국에 있는 한국교회처럼 당 나라때 신라교민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 같다. 산동성은 1989년 유적지를 고증하여 옛 모습데로 복원하였는데 복원과정에서 일본측 협력이 많았던지 일본인들은 9 세기의 일본의 승려 Ennin(圓仁)이 지은 절이라 하여 기념비까지 세웠던 모양이다. 법화사 본전 건너편 장보고 기념관은 중국의 한 기업체의 후원으로 2003년 건립되고 4 미터 높이의 화강석 좌대위에 약 8미터 높이의 청동제 장보고장군 동상도 세웠다. 한국해양경영사연구회가 한국선주협회 후원을 얻어 1990년 4월 적산 법화원장보고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중국 양자강 하구 현재의 Ningbo(寧波)항은 당 나라때 명주(明州)항으로 처음 설치되어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산동반도, 신라, 일본은 물론 대만, 광주, 월남, 인도, 아라비아의 특산품들이 이곳을 통하여 당의 수도 장안으로 수송되었다. 닝보항 동해바다에 舟山群島(Zhoushan Archipelago)가 있다. 이곳은 백제의 해외영토로 장보고의 시대 당나라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특수지역이었다. 중국 동해안에 장기간 유지되었던 백제분국 사람들이 백제 멸망후 요즘 미국의 영주권자처럼 중국 동해안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백제가 없어진 뒤에 모두 신라인으로 불렸지만 알고 보면 원래 백제인들이었다. 이들이 舟山群島를 기반으로 아시아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대 일본에서 당에 보낸 조공사를 견당사 (遣唐使)라 하는데 동지나해를 횡단하며 많은 견당사선이 해난사고로 침몰하여 고통을 겪었다. 838년 기록을 보면 600여명이 출발하여 391명이 살아 돌아온다. 이 때 일본기록에 명주에 근거를 두고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신라상인들의 이름이 나온다. 일본의 견당사는 장지신(張支信), 이연효(李延孝), 이인덕(李隣德)등 많은 신라상인들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 견당사가 타고 온 배는 손상이 너무 심하여 일본까지 항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상인들 가운데 장지신은 닝보 – 일본간 을 3일만에 주파한 적도 있는 항해의 귀재로 소문 나 있다. 장지신은 장보고와 동시대 사람이며 장보고가 죽은 후에도 그의 활동기록이 전한다. 이 두 사람은 필시 서로 아는 사이였을 수 있으며 어쩌면 같은 집안 사람 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사건을 모델로“배후”를 쓴 작가 서현후의 바다이야기에 나오는 시나리오이다.
이 섬들 가운데 면적 12.5평방킬로미터의 조그만 섬, Putuoshan(普陀山)이 있다. 이름은 산이지만 실재는 조그만 섬이다. 한국에서 보통 보타도라고 부른다. 이 섬은 인구 3천명에 그 3분의 1이 불교승려이다. 온 섬이 불교유적이며 중국의 4대 불교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섬에 조음동(潮音洞)이라 불리는 자연동굴이 있는데 완도의 원래이름이 청해진 조음도(助音島)였다. 완도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상황봉이며 보타도는 상왕봉이다. 완도에 법화사가 있고(석도진의 법화원에 주목할것) 보타도에 법화동이 있다. 완도에 관음암이 있었고 보타도에 관음사가 있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백제계 교포상인들이 수호신으로 관음보살을 모시고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지금 보타도에는 높이 33미터의 관음보살 입상이 동지나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장보고는 이 지역에서 태어났고 이 지역에서 자랐으며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곳을 모델로 청해진 조음도를 설치 운영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청해진 대사라는 관직은 당 나라의 것이다.
서기 828년 청해진 설치 그리고 841년 장보고의 암살까지 청해진의 역사는 13년에 불과하다.(삼국사기에는 장보고 사망 846년으로 되어있다. 당의 대리인을 신라조정에서 암살하였으므로 당과 외교갈등이 생기고 신라사신의 당 입조거부가 5년간이나 이어졌다). 막연하게 그가 청해진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전 이미 해상무역, 항해기술, 조선기술 및 아시아-중국-일본-신라간의 넷트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신라에서 제공받았다는 만명의 인원은 병사가 아니라 일종의 수출선원과 자체경호병력으로 생각된다. 배 한척당 75명정도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보면 100척을 운항하는데 7500명의 해상인원이 필요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기록만으로는 그는 신화속의 인물이나 다름없다. 그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고 어디서 성장했는지 전해진 바 없고 청해진의 성격과 그의 대사라는 직함이 당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는 원래 해양세력이 아니었다. 삼국이 정립하고 있을 때부터 대양을 휘젓고 다닌 것은 백제였다. 따라서 삼국이 통일된 뒤 중국 신라 일본과 아시아를 휘젓고 다닌 것은 당연히 백제계의 유민들이었다. 장보고는 우리역사속에 몇줄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마저도 천민출신에 신라조정의 반역자로 기록되어있다. 우리역사는 결코 그를 영웅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의 힘을 빌어 쿠데타에 성공하여 권력을 잡고서도 그의 출신 때문에 그의 딸을 왕비로 택할수 없다는 논리로 신라조정은 약조를 어긴다. 그의 이름을 기록하기를 弓福(삼국사기), 弓巴(삼국유사), 張保皐(중국기록), 張寶高(일본기록)로 기록자의 평가가 다르다. 장보고 이름에 사용된 글자를 보면 일본이 가장 존경심을 표현한 듯하다.
현재 완도의 장도(將島)가 그의 본거지였음이 확인된 것도 40여년 밖에 되지않는다. 장보고는 중국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이라는 사찰을 건립하였고 신라와 일본에서 온 스님들 뒷바라지를 많이 해 준 것 같다. 그런 인연으로 1200년의 세월이 지나 한 일본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 일기를 통해서 장보고에 관한 많은 정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천태종 3대 좌주가 된 圓仁이 쓴 이 일기는 하바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가 영역하여 전 세계학계에 장보고의 이름이 알려졌다. 圓仁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9년간의 순례생활을 마치고 살아서 일본에 돌아 가 평생 그 고마움을 잊지않았고 엔랴쿠지에 적산선원을 세우고 장보고를 적산명신으로 신격화하여 지금도 모시고있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조상들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서 기억되고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