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5일 금요일

17. 장보고 (? – 841)


京都市 북동방 표고 848미터의 Hiei(比叡)산은 예로부터 일본 3대 靈山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나라시대말기 788년 Saicho (767 – 822) 가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 Enryakuji(延曆寺)의 중핵 根本中堂을 히에이산 산정에 건립한다. 861년 10월 根本中堂을 내려다보는 고지대에 천태종 3대좌주 자각대사 Ennin (圓仁, 794 – 864)이 文殊樓를 세우고 문수상을 안치하였다. Ennin사후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엔랴쿠지의 별원으로 적산선원을 건립하고 적산명신을 모셨다. 적산명신이란 장보고를 신격화한 이름이다. 2001년 12월 문수루앞에 높이 4.2미터의 청해진대사장보고비가 건립된다. 根本中堂을 내려다보는 高臺에 세워진 신라해상왕 현창비(顯彰碑)는 완도군에서 11년에 걸친 노력끝에 제작되어 일본으로 가져 온 것이다. 곁에 세워진 설명문에 “두 사람이 쌓아올린 깊은 우정이 금후 한일양국의 국민들에게 알려져 양국의 우호증진에 기여하도록 이 비를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중국 산동반도 榮成市 石島鎭에 赤山 法華院이라는 사찰이 있다. 820년 서주(徐州)의 무령군소장 장보고가 건립한 사찰로 요즘 미국에 있는 한국교회처럼 당 나라때 신라교민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 같다. 산동성은 1989년 유적지를 고증하여 옛 모습데로 복원하였는데 복원과정에서 일본측 협력이 많았던지 일본인들은 9 세기의 일본의 승려 Ennin(圓仁)이 지은 절이라 하여 기념비까지 세웠던 모양이다. 법화사 본전 건너편 장보고 기념관은 중국의 한 기업체의 후원으로 2003년 건립되고 4 미터 높이의 화강석 좌대위에 약 8미터 높이의 청동제 장보고장군 동상도 세웠다. 한국해양경영사연구회가 한국선주협회 후원을 얻어 1990년 4월 적산 법화원장보고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중국 양자강 하구 현재의 Ningbo(寧波)항은 당 나라때 명주(明州)항으로 처음 설치되어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산동반도, 신라, 일본은 물론 대만, 광주, 월남, 인도, 아라비아의 특산품들이 이곳을 통하여 당의 수도 장안으로 수송되었다. 닝보항 동해바다에 舟山群島(Zhoushan Archipelago)가 있다. 이곳은 백제의 해외영토로 장보고의 시대 당나라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은 특수지역이었다. 중국 동해안에 장기간 유지되었던 백제분국 사람들이 백제 멸망후 요즘 미국의 영주권자처럼 중국 동해안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백제가 없어진 뒤에 모두 신라인으로 불렸지만 알고 보면 원래 백제인들이었다. 이들이 舟山群島를 기반으로 아시아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대 일본에서 당에 보낸 조공사를 견당사 (遣唐使)라 하는데 동지나해를 횡단하며 많은 견당사선이 해난사고로 침몰하여 고통을 겪었다. 838년 기록을 보면 600여명이 출발하여 391명이 살아 돌아온다. 이 때 일본기록에 명주에 근거를 두고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신라상인들의 이름이 나온다. 일본의 견당사는 장지신(張支信), 이연효(李延孝), 이인덕(李隣德)등 많은 신라상인들의 도움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 견당사가 타고 온 배는 손상이 너무 심하여 일본까지 항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라상인들 가운데 장지신은 닝보 – 일본간 을 3일만에 주파한 적도 있는 항해의 귀재로 소문 나 있다. 장지신은 장보고와 동시대 사람이며 장보고가 죽은 후에도 그의 활동기록이 전한다. 이 두 사람은 필시 서로 아는 사이였을 수 있으며 어쩌면 같은 집안 사람 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 공작원 김현희사건을 모델로“배후”를 쓴 작가 서현후의 바다이야기에 나오는 시나리오이다.


이 섬들 가운데 면적 12.5평방킬로미터의 조그만 섬, Putuoshan(普陀山)이 있다. 이름은 산이지만 실재는 조그만 섬이다. 한국에서 보통 보타도라고 부른다. 이 섬은 인구 3천명에 그 3분의 1이 불교승려이다. 온 섬이 불교유적이며 중국의 4대 불교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섬에 조음동(潮音洞)이라 불리는 자연동굴이 있는데 완도의 원래이름이 청해진 조음도(助音島)였다. 완도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상황봉이며 보타도는 상왕봉이다. 완도에 법화사가 있고(석도진의 법화원에 주목할것) 보타도에 법화동이 있다. 완도에 관음암이 있었고 보타도에 관음사가 있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백제계 교포상인들이 수호신으로 관음보살을 모시고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지금 보타도에는 높이 33미터의 관음보살 입상이 동지나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장보고는 이 지역에서 태어났고 이 지역에서 자랐으며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이곳을 모델로 청해진 조음도를 설치 운영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청해진 대사라는 관직은 당 나라의 것이다.


서기 828년 청해진 설치 그리고 841년 장보고의 암살까지 청해진의 역사는 13년에 불과하다.(삼국사기에는 장보고 사망 846년으로 되어있다. 당의 대리인을 신라조정에서 암살하였으므로 당과 외교갈등이 생기고 신라사신의 당 입조거부가 5년간이나 이어졌다). 막연하게 그가 청해진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가 청해진을 설치하기 전 이미 해상무역, 항해기술, 조선기술 및 아시아-중국-일본-신라간의 넷트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신라에서 제공받았다는 만명의 인원은 병사가 아니라 일종의 수출선원과 자체경호병력으로 생각된다. 배 한척당 75명정도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보면 100척을 운항하는데 7500명의 해상인원이 필요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기록만으로는 그는 신화속의 인물이나 다름없다. 그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고 어디서 성장했는지 전해진 바 없고 청해진의 성격과 그의 대사라는 직함이 당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는 원래 해양세력이 아니었다. 삼국이 정립하고 있을 때부터 대양을 휘젓고 다닌 것은 백제였다. 따라서 삼국이 통일된 뒤 중국 신라 일본과 아시아를 휘젓고 다닌 것은 당연히 백제계의 유민들이었다. 장보고는 우리역사속에 몇줄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마저도 천민출신에 신라조정의 반역자로 기록되어있다. 우리역사는 결코 그를 영웅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의 힘을 빌어 쿠데타에 성공하여 권력을 잡고서도 그의 출신 때문에 그의 딸을 왕비로 택할수 없다는 논리로 신라조정은 약조를 어긴다. 그의 이름을 기록하기를 弓福(삼국사기), 弓巴(삼국유사), 張保皐(중국기록), 張寶高(일본기록)로 기록자의 평가가 다르다. 장보고 이름에 사용된 글자를 보면 일본이 가장 존경심을 표현한 듯하다.


현재 완도의 장도(將島)가 그의 본거지였음이 확인된 것도 40여년 밖에 되지않는다. 장보고는 중국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이라는 사찰을 건립하였고 신라와 일본에서 온 스님들 뒷바라지를 많이 해 준 것 같다. 그런 인연으로 1200년의 세월이 지나 한 일본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 일기를 통해서 장보고에 관한 많은 정보가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천태종 3대 좌주가 된 圓仁이 쓴 이 일기는 하바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가 영역하여 전 세계학계에 장보고의 이름이 알려졌다. 圓仁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9년간의 순례생활을 마치고 살아서 일본에 돌아 가 평생 그 고마움을 잊지않았고 엔랴쿠지에 적산선원을 세우고 장보고를 적산명신으로 신격화하여 지금도 모시고있다.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조상들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에서 기억되고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2008년 7월 23일 수요일

16. 쇼우와(昭和)시대 고도경제성장의 종언

 
쇼우와(昭和)시대는 서기 1926년(원년)부터 1989년(쇼우와 64년)까지의 62년 14일간이다. 그 기간에 세계경제공황(1929),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제2차 세계대전(1939, 독일의 폴란드 침공), 태평양 전쟁(1941),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1945), 일본의 무조건 항복(1945), 일본국 헌법제정(1946), 한국전쟁(1950), 동경올림픽(1964), , 일본만국박람회(1970)등을 거치며 일본은 1960년대부터 고도경제성장시대를 맞는다.
일본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는 1954 (昭和29年) 12월부터 1973년 (昭和48年) 11월까지의 19년 간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황폐와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경제는 1950년대의 한국전쟁특수라는 호재를 만나 1955년 후반경에는 전전의 수준으로 부흥하고 다시 고도성장기에 돌입하였다. 에너지는 석탄에서 석유로 변화되고 태평양 연안에 콤비나트가 끝 없이 건설되었다. 재벌계 기업들이 다시 재건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한다. 
1960년대 동경 올림픽의 개최와 베트남 전쟁, 1970년에 개최된 오오사카 만국 박람회등에 의한 특수를 겪으며 1968년 국민총생산(GNP)이 자본주의 국가 가운데 제2위에 이른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희귀한 케이스이며 종전직후의 부흥에 이은 일련의 경제성장은 동양의 기적이라 불리었고 이러한 경향은 쇼와(昭和)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이 시대 텔레비 세탁기 냉장고의 3종류의 가전제품은 3종의 신기(三種の神器)로 불렸고 급속히 가정에 보급되었다. 이러한 가전제품의 보급은 생활시간의 배분에도 큰 영향을 키치게 되고 여성의 사회진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의 풍조는 큰 것은 좋은 것이다 (Big is beautiful) 였다. 동양의 기적이란 말이 사용되기 시작할 무렵, 일본 특유의 근면, 개인보다 집단이 중요하다는 등 융화의 문화(和の文化)가 그 요인이라고 칭송되었다.
1973 10 5 이집트의 기습선제공격으로 4 중동 전쟁이 시작됐다. 날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축제일인 욤키푸르(사죄의 ) 이었다. 이집트군의 병력은 75, 무기들은 탱크 32,000, 소련제 미사일(SA-6) 까지 총동원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3분의 1 됐고 무기들도 이집트군의 절반도 됐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 여단이 전멸되었다. 이때 미국이 이스라엘에게 대대적 지원을 해주었다. 욤키푸르 전쟁에선 소련이 35 달러를 아랍국에 그리고 미국은 22 달러를 이스라엘에 쏟아부었다. 또한 미국은 30일 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작전을 펼쳤다. 미국의 지원을 등업은 이스라엘은 반격에 나섰고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집중포격했다. 골란 고원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 탱크 867, 차량 3,000 이상을 파괴했다.  
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므로서 제1차 석유파동이 시작되었다. 그 영향으로 10월16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가맹산유국 가운데 페르시아 만안의 6개국이 원유공시가격을 1 베럴당 3.01달러에서 5.12달러로 70% 인상한다고 발표하였다. 다음 10월 17일에는 아랍 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원유생산의 단계적 삭감을 결정하였다. 또 아랍 석유수출국기구 제국은 10월 20일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스라엘 지지국에의 경제제재(石油禁輸)를 결정하였다. 다시 12월 23일 석유수출국기구에 가맹한 페르시아 만안의 산유 6국이 1974년 1월부터 원유가격을 5.12달러에서 11.65달러로 인상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의 소비자 물가는 1974년 23% 상승하였고 전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1.2%의 저성장의 경험을 하였고 고도경제성장은 여기서 종언을 고한다.

2008년 7월 11일 금요일

15. 신안 보물선


흐르는 물은 그리도 갈 길이 바쁜데 깊은 궁궐 두메 밭은 한가롭기만 하구나 (流水何尤急 深宮岑田閑)


서기 1976년, 수심 23미터, 조류 7 – 9킬로의 흙탕물이 흐르는 전남 신안군 증도 앞 바다의 보물선에서 건져 올린 원 나라 백자 접시에 새겨 진 글이다.

1323년 6월 1일 양자강 남쪽 닝보(寧波)항을 출항하여 큐우슈 하까다항으로 항해하던 가마쿠라 막부 장군가의 선박이 고려 충숙왕 10년 전라도 증도 앞 바다에서 침몰되어 7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양된 선박은 전장 34미터, 폭 11미터, 흘수 2.95미터, 200톤의 쌍돛배로 화물이 만재된 상태였다. 화물표의 목간 280여개를 세척하는 과정에서 “至治3년6월1일”과 “東福寺”라는 글자가 확인되었다. 至治3년은 서기 1323년이다. 東福寺란 쿄오토오의 토후쿠지(Tofukuji-temple)를 말함이니 하주(荷主)였음이 밝혀졌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원 나라 도자기 2만 661점, 쇠 붙이 제품 729점, 돌 제품 43점, 기타 574점등 총 2만 2007점의 유물이 인양되었다. 이 외로 소량의 고려청자와 동전 28톤이 있었다. 서기 14년 만들어진 신(新)나라의 화천(貨泉)으로 부터 1310년 만들어진 원(元) 나라의 至大通寶에 이르기까지 1,300년 동안의 234가지 800만개의 동전이 쏟아져나왔다. 그런데 28톤이나 되는 동전이 왜 실려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인양당시 실재 액면가치가 100억원에 이른다고 신문에 나왔으나 사실인지 알수없다. 화폐로 실렸을까 또는 발라스트용으로 실렸을까? 어느 세미나에서 실제로 발라스트 용이라는 주장이 일본측 대학교수로 부터 나왔다.

이 동전은 東福寺의 불상을 주조할 재료였으나 화물은 영원히 화주(貨主)에게 도착되지 않고 다도해 깊은 바다 궁궐 속에서 한가롭게 700여년을 보냈다. 그래서 모습은 지금 동전으로 남아있지만 사실은 불상의 전생인 셈이다. 인터넷에서 이 절의 사진을 아무리 뒤져도 거대한 청동불상은 보이지않고 아름다운 정원과 법당, 그리고 22미터 높이의 거대한 삼문(三門)이 보인다. 11월 말이면 단풍을 감상하러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무인정권의 출현과 비슷한 시기, 1192년 일본에서도 무인정권 가마쿠라(鎌倉)막부가 탄생하였다. 쿄오토오의 천황을 무력화시키고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 – 1199)가 쇼군(將軍) 이 되어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미나모토 가문이 멸망하고 임자잃은 권력은 요리토모의 미망인 호조 마사꼬(北條 政子 1156 – 1225)의 손에 들어가게되고 결국 그 친정인 호조(北條) 가문이 가마쿠라 막부의 주인이 된다.

미나모토 가문이 망 한 뒤 제 4대 쇼군으로 미나모토의 먼 친척 구조 요리쓰네(九條 賴經 재위 1226 – 1244)가 임명되고 요리쓰네의 아버지 구조 미치이에(九條 道家 Kujo Michiie 1193 – 1252)가 섭정한다. 구조 미치이에는 불심이 두터운 사람으로 선종(禪宗) 임제종(臨濟宗) 총본산으로 토후쿠지(東福寺)를 쿄오토오에 건립하는데 1236년 시작하여 1255년까지 완공하는데 20년이 소요되었다. 나라(奈良)의 최대사원 도다이지(東大寺)나 고후쿠지(興福寺)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에서 두 절의 東과 福을 따서 東福寺라 명명하고 새로운 수도 쿄오토오의 최대의 가람을 조영하였다.

이 무렵 또 하나의 거대한 불사(佛事)가 막부의 심장부 가마쿠라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나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마쿠라의 Kotoku-in (高德院)에 1252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 진 아미타불 청동좌상이 야외에 좌정하고 있다. 원래는 불전(佛殿)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1498년 9월 20일 밀려 온 쓰나미로 인해 사찰건물이 무너지면서 전각이 사라졌다. 높이 13.4 미터, 무게 93 톤이며 속은 비어있고 가마쿠라 다이부쓰(大佛)가 공식명칭이다. 보물선에 실린 28톤의 동전이면 이 불상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1323년 해난사고가 없었다면 28톤 정도의 불상이 토후쿠지에 좌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절 일본기록에 중국에서 일본까지의 항로로 황해를 우회하는 북로(北路), 나가사끼를 경유하는 남도로(南島路)와 제주도 앞 바다를 통과하는 남로(南路)가 있었다. 남로가 가장 일반적인 항로인데 닝보에서 제주도 300 마일, 소흑산도 300 마일, 사고지점 신안군 증도 380마일, 나가사끼 460마일, 후꾸오까 520마일이다. 맑은 날이면 야간에도 별을 보며 대강의 방향은 짐작하면서 항해했겠지만 날씨가 나쁘면 제주도를 육안으로 확인할 때까지 위치를 알 방법이 없었다. 제주에서 일본까지 150마일을 더 가야한다. 그러니 제주도는 그 당시의 항해사들에게 신의 구원만큼이나 확실한 거대한 물표였다. 날씨가 나빠 제주도나 소흑산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현재 위치에 대한 지식없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물표를 찾을 때 까지 항해하는 수 밖에 없다. 가마쿠라 막부 장군가의 선박은 귀중한 재화를 가득 싣고 제주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신안군 증도앞 까지 항로를 이탈해 왔을 것이다.

도후쿠지 삼문 / 도후쿠지 법당 / 도후쿠지 통천교 / 가마쿠라 대불

2008년 7월 4일 금요일

14. 왜의 5왕 (The Five Kings of Wa)


                      
3세기이후 147년간 기록이 없다가 서기 413 중국사서에 일본기록이 나타난다. 조공을 바치고  작위를 받고자 하는 5명의 왕의 이름이 5세기에 나온다. 야마토 등장 후의 왕들의 이름인데 이들이 누구인지 일본역사 학계는 지금까지 확인하지 않고 있다. (), (), (), (), () 기록은 다음과 같다.

1.서기 413 왜왕 (): 사신기록(晉書 안제기)
2.서기 421 왜왕 () : 유송(劉宋) 무제 안동장군왜국왕 제수(宋書)
3.서기 425 왜왕 (): 유송 문제(文帝)에게 사신과 공물(송서)
4.서기 430 왜왕 (): 왜왕 공물(송서)
5.서기 438 왜왕 (): 왜왕 찬이 죽고 동생 () 즉위하여  공물을 바치고  스스로 사지절도독 왜백제신라임나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왜국왕을 칭하다. 왜왕에게 안동장군왜국왕을 제수(송서)

6.서기 443 왜왕 (): 제가 공물을 보내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됨(송서)
7.서기 451 왜왕 (): 제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 제군사 안동장군 제수(송서)
8.서기 460 왜왕 (): 공물기록(송서)
9.서기 462 왜왕  (): 제의 왕자 ()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송서)
10.서기 477 왜왕 (): 왜왕 () 죽고 그의 동생 () 즉위하여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 가라 진한 모한7 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을 자칭(송서)

11.서기 478 왜왕 (): 왜왕 무를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 임명(송서)
12.서기 479 왜왕 (): 왜왕 무를 진동대장군으로 임명(濟書)
13.서기 502 왜왕 (): 왜왕 무를 정동장군으로 추증. 정동대장군의 오기인 (梁書)

백제가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는것은 근초고왕 27(372) 양자강유역에 위치한 동진(東晋) 조공하고 근초고왕이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 임명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후 백제의 동진에 대한 조공은 몇차례나 계속되었고,  침류왕(枕流王) 원년에 동진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왔다.

서기 418년에 동진이 멸망하고 420년에 () 건국되자  백제는 빈번히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관작을 받았으며 각종 서적과 기술의 전수를 요청하였다.  중국사에서 4세기초부터 6세기말까지 정치 세력이 양자강 남쪽과 북쪽지역으로 양분된 많은 왕조가 일어섰다 사라져 가는데 남북조(南北朝)시대라고 부른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백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동안 남조(南朝) 국가들에게만 조공하였을 , 북조(北朝) 국가들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았다.

백제가 북조의 북위(北魏)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은 개로왕 18(472) 일인데, 개로왕은 고구려를 매우 비난하면서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장문의 문서를 보낸다. 그러나 백제의 요청은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북위의 완곡한 거절로 무위에 그쳤을 아니라, 오히려 고구려에게 발각되어 장수왕의 응징을 자초하여 끝내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과 왕비 왕자들이 모두 처형된다.   

 그런데 이러한 조공과 작위요구가 유송(劉宋) 집중되어 있느냐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시자의 성씨를 따라 유송으로 불리우는 나라는 서기 420 년에서 479년까지 기간 존재했던 남조 첫번 왕조이다.  나라가 창건되자 마자 기다렸다는 백제와 왜의 외교력이 집중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