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21일 토요일

12. 눈물젖은 역사를 가르치라

서울에서는 촛불집회가 한창이다.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세상을 끌고 가고있다. 신문과 방송은 시류에 영합하여 덩달아 소란만 떨고 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사람을 이성의 동물이라 했는가? 사람이란 결코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아집과 이기심과 무지의 덩어리일 뿐이다.

세상은 변한다. 사람의 욕구와 가치도 시대의 산물이다. 변화 자체가 무엇인가의 결과라면 변화를 나무랄 수는 없다. 5년전 발표된 조선일보 논설이지만 지금 이 싯점에서 시사하는 바 있어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

눈물 젖은 역사를 가르치라

통곡으로 대신한 애국가... 역사 비트는 비국민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 순간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 목멘소리로 변해갔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다. 대통령 부부, 300 여명의 우리 광부와 50여명의 우리 간호사 모두가 고개를 박고 어깨를 들먹였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가지 못 했다. 이 구석 저 구석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연설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사여러분, 가족이나 고향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비록 우리생전에는 이룩하지 못 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광부들에게 파고다담배 500갑을 선물로 나눠주고 돌아갈 차에 올랐다. 차 속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박정희를 보고, 곁에 앉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이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정희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1964년 12월 10일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과 40년 전의 이 '사건'을 지금 이 나라에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쥐고 흔드는 단병호 민노총 위원장이 그때 열네 살, 이남순 한국노총위원장은 열한 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배우 문성근과 명계남이 각각 열 살, 열한 살 무렵이다. 그러니 386들이야 이 '눈물 젖은 역사'를 알 턱이 없다. 역사를 모르니, 그 역사를 숨 쉬던 사람의 모습이 보일 리도 없다.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던 광부들도 사실은 100대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된 사람들이다. 63년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명이 몰려들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 당시 남한 인구 2400만명에 정부공식 통계에 나타난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명이 넘었다. 이런시절이니 매월 600마르크 (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000m와 3000m 사이 막장에서 1m 파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66년 12월,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광부 제1진이 귀국했을 때 거의 전원이 1회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사망자도 있었고, 실명한 사람도 있었다. 간호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66년 1월 128명이 독일로 떠날 때의 고용조건은 월 보수 440마르크 (110달러)였다.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콜 묻힌 거즈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닦는 작업이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르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000명이 넘었다. 66년~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만 30명, 광부들은 63~78년까지 7800여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라로 한때 GNP의 2%대에 달했다.

단병호, 이남순, 문성근, 명계남씨는 이 '숨가쁜 역사'와 '눈물 젖은 빵'을 모를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라를 벼랑으로 떠밀고 공영방송을 통한 현대사 비틀기를 계속한다면, 옛시절 용어로 '비국민'이라 불려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요즘 일요일이면 수백명의 필리핀 근로자들이 혜화동 성당 부근에 모여든다. 이국생활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 광부가 서독으로 떠날 무렵 필리핀의 1인당 GNP는 257달러, 한국은 79달러였다.

60년대 한국은 지금 안산공단 부근에서 곧장 마주치는 근로자들의 모국 파키스탄으로 제철소 건설과 운영의 노하우를 물으러 시찰단을 보냈던 나라다. 올라가는 역사만 기억하고 내려갔던 역사는 잊고사는 국가가 있다. 그런 국가는 잊고 싶은 역사의 바로 그 대목을 되풀이하게 돼 있다. 그것이 제멋대로의 선택적 망각에 대해 역사가 내리는 벌이다. 애국가 마지막 구절을 통곡으로 대신 할 수밖에 없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설움을 까맣게 잊고 사는 오늘의 한국이 두렵고 걱정스러운것도 이 때문이다.

2003년 조선일보 강천석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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