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사노오(고사기 須佐之男, 일본서기 素戔嗚尊 )는 우두천왕(牛頭天王) 으로 불리며 지금도 민 중의 열열한 추앙을 받는다. 우두천왕(牛頭天王)은 불교에서 기원정사(祇園精舎)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스사노오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야사카(八坂) 신사는 쿄우토(京都) 굴지의 사당이다. 쿄우토 히가시야마 구(東山區)의 기온(祈園)거리를 끼고 있으며 서기 656년 사이메이(齊明) 천황 때 건립되어 일제 이전에는 기온샤로 불렸다. 쿄우토에서 가장 오래 된 신사이며 전국에 8만 여의 지역신사를 거느리고 있다. 매년 7월 열리는 기온마쯔리 (祈園祭)는 일본 최대의 축제이며 스사노오의 신주를 받드는 행사이다.
시마네(島根)현 마쯔에(松江)시에 야에가키(八重垣)신사가 있는데 스사노오와 그의 아내 쿠시나다 히메(櫛名田比売)를 모신다. 와카야마현 쿠마노혼구우 대사 (熊野本宮大社) 또한 스사노오를 제사지내며 3000여 개의 지역신사를 거느리고있다.
스사노오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대기(神代記)에 나오는 남성신으로 일본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 사람으로 부터 황실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검토하면 그의 행적은 이즈모(出雲)에서 시작하여 오오사카, 와카야마 그리고 이세지역에 이른다. 열도에서는 그를 須佐之男命 또는 素盞鳴尊으로 기록하였고 백제는 소고(素古), 초고(肖古), 속고(速古) 등으로 기록하였다. 백제 5대 초고왕 ( 재위기간 서기 166 –
214) 으로 왕자시절 한반도 동해안의 소시모리라는 곳에서 이즈모로 온 것으로 추측하나 소시모리(소의 머리)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일본서기 권제1 신대상 제8단 1서(4)는 스사노오의 이즈모 등장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스사노오(素戔嗚尊)의 악행을 어찌 할 수가 없어 타카마노하라(天神原, 하늘나라)의 제신(諸神)들은 일일이 죄를 물어 그를 추방하였다. 이 때 스사노오는 아들 이타케루(五十猛神)을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 와 소시모리(曾尸茂梨)라 하는 곳에 닿았다. 그리고 “이 곳은 있고 싶은 곳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붉은 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이즈모국(出雲國)의 히노카하(簸川, 현 이즈모시 히카와쬬우(斐川町) )의 상류에 있는 토리카미노 타케(鳥上之峯, 현 시마네현 오쿠이즈모에 있는 센쯔우잔(船通山, 표고 1,142 미터)에 도착했다.
시마네(島根)현 마츠에(松江)시에 있는 야에가키(八重垣) 신사에 스사노오와 그의 아내 쿠시나다히메(櫛名田比売)의 초상화가 남아있다. 스사노오의 아들 이름이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인데 백제의 기록으로는 구수(仇首) 또는 귀수(貴須)로 불린다. 이즈모 타이샤 (出雲大社)가 그와 그의 아버지 스사노오를 모시는 사당이며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 을 모시는 이세신궁과 더불어 일본에서 가장 오래 된 신사이다.
백제의 5대 왕이 된 초고는 왕자 시절 이즈모에 들어와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그 곳을 근거로 하여 야마토 지역(현 나라현) 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984년 시마네 현 히카와쵸 도로공사중 358개의 청동검이 무더기로 발견된다. 코우진다니 유적(荒神谷遺跡)은 시마네현(島根県) 이즈모시(出雲市) 히카와쬬(斐川町) 칸바사이다니 (神庭西谷)의 조그만 골짜기에 있는 국가지정의 사적이다. 그 때까지 일본전역에서 발견 된 청동검이 도합 300여개 뿐이었고 대부분 큐우슈에서 나왔다. 전설로만 간주되던 이즈모의 스사노오 이야기가 역사가 된 순간이었다. 1985년 첫 발굴지에서 7미터 떨어진 곳에서 6개의 동탁(銅鐸) 과 16개의 넓은 창날(銅矛)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비파형 세형동검은 중국대륙에서는 나오지 않고 만주와 한반도에서만 발견되는 고조선 계열의 유물이다. 일본황실의 보물로 현재 나고야(名古屋)의 아쯔타 신궁(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쿠사나기노 쯔루기(天叢雲剣 또는 草薙剣) 또한 세형동검이다. 쿠사나기노 쯔루기는 스사노오가 이즈모에 들어 와 퇴치한 뱀, 야마타노 오로찌(八岐大蛇)의 꼬리에서 나왔다고 전해 온다.
1996년 코우진타니 유적에서 3.5 킬로 쯤 떨어진 곳에서 39개의 동탁이 발견되었다. 시마네 현(島根県) 운난시(雲南市) 카모쬬우(加茂町) 이와쿠라(岩倉)에 있는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의 이 유적을 카모이와쿠라 유적(加茂岩倉遺跡)이라 한다. 당시까지 시가(滋賀)현 야즈시(野洲市) 오오이와야마(大岩山) 산록에서 24개의 동탁이 발굴된 것이 일본 기록이었다.
스사노오는 오오사카 호츠마 국(秀眞國) 을 점령하고 천조대신의 12신녀 가운데 8명을 수습하여 시마네현 이즈모의 야에가키 궁(八重垣宮)에 데려 와 자신의 후비로 삼는다. 이들을 두고 백제 왕으로 떠나는 사나이의 감상이었을까? 스사노오가 지었다고 하는 야쿠모타츠(八雲立)라는 노래 한 수가 전해온다.
“겹겹이 쌓인 구름으로 정든 님을 두른다. 이즈모(出雲)에 구중심처의 울타리를…..”
이들의 몸에서 5명의 왕자와 3명의 공주가 태어났다. 이 8명의 신녀 가운데 한명이 세오리츠히메(細織津姬)이다. 세오리쯔 히메는 나중 히미코(卑彌呼)란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고 일본서기의 저자들은 신화 속에서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 (天照大御神)라는 이름을 추서하였다. 스사노오와 세오리쯔 히메 사이에서 아메노 오시호미미(天忍穗耳命)가 태어났다.
스사노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로부터 비로소 열도가 부족사회에서 나라(國)로 변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스사노오는 야마토(현 나라현)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그의 아들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시대(서기 220년 경) 이즈모를 버리고 나라분지의 사쿠라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서기 244년 오시호미미(忍穗耳)의 손자 진무천황(神武天皇)에게 정복되어 일본서기의 신대(神代)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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