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2일 토요일
98. 가야의 지명 生比良面
경상남도 산청군에 生比良面 이라는 낯 선 이름이 있다. 통일신라 이래로 인명이든 지명이든 한자 두 자로 표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왔는데 가야시대의 지명이 용케 살아 남은 케이스이다. 적어도 신라가 가야를 합병하기 전인 4 - 5세기부터 있었던 이름이 아닐까? 당시 사람들은 자기의 글은 없었지만 말은 하고 살았을 터이니 한자로 표현된 生比良이전에 순수한 가야의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 가야 사람들은 이 지명을 어떻게 발음했을까? 生比良이란 한자어는 그들의 발음을 기록하기 위해 차용된 글자에 불과하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신고리 원전 5 – 6호기가 건설되고 있는 서생면(西生面)은 원래 신라의 生西良郡이었는데 서기 757년 경덕왕이 東安郡으로 바꾸었다. 生比良과 生西良은 가운데 한 글자만 다르다.
서기 450년 눌지왕 34년 고구려 변경의 장수가 悉直(현재의 삼척)의 들에서 사냥을 할 때 하슬라(何瑟羅, 현재의 강릉) 성주 三直이 그를 죽였다고 하였으므로 강릉(何瑟羅)은 신라의 영토였다. 그런데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멸망시키고 남하하여 영동지역의 강릉 삼척지역을 취하였다. 고구려는 신라의 何瑟羅를 河西良로 표기하였다. 고구려 표기 河西良와 生西良의 “西良” 는 “스라” 로 발음하는 듯 하다. 신라의 하슬라를 고구려는 하스라로 쓴 것이다. 그러면 신라의 生西良郡의 “生” 은 어떻게 읽을까? 경덕왕은 生西良郡을 東安郡으로 바꾸었다. 여기서 “東” 은 우리 말 “새” 를 표기할 때 사용하였던 글자이다. 그러면 “生西良” 을 “새스라”로 읽게 된다.
生西良을 새스라로 읽는다면 生比良은 새비라로 발음될 것이다. 생비량면 웹사이트는 생비량면 마을지명 유래에서 “사대마을은 사타동(沙陀洞) 또는 사태골, 사아동이라고도 하였는데 모두 불교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옛날 비량대사가 절을 짓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글을 마을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전하며, 지금도 마을앞 들을 생비리들이라 부르고 있고, 예전에는 이들 토지중 사찰답이 많았으며 비량도승이 죽은 이후 마을에 서당이 생겨 여러 선비가 난 곳이라 하여 사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 한다. 생비량면은 그릇된 설화에 기초한 생비량 유래비를 양천강가에 세웠다.
사대마을이 불교에서 유래되었다거나, 있지도 않았던 비량대사(?)를 등장시켜 생비량의 유래를 밝히고 있는 생비량면 문화관광과의 지명유래는 근거없는 설화이다. 생비량이란 지명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있었던 지명이기 때문이다. 지명유래 가운데 사대마을 앞 들을 지금도 생비리들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팩트이며 生比良의 기원이 이곳의 들녘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00년 전 가야인들은 길고 좁은 이 들녘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으며 새비라라고 불렀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가야의 말은 사라지고 기록된 한자음만 남아 生比良이 되었다. 사대마을은 새비라마을이었으나 원래의 이름이 풍화되어 화석처럼 남아 전해진 것이 사대, 사타, 사태골, 사아동, 사대동 등이다.
생비량면 서쪽에 신안면(新安面)이 인접하고 있는데 이는 생비량면 (生比良面)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신라 경덕왕이 生西良郡을 東安郡으로 바꾼 것과 동일한 패턴이 아닌가? “新”과 ”東”은 모두 우리 말 “새”를 나타내는 훈음차자이며 “스라”와 “비라”는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는 땅으로 집을 짓고 살기에 알맞는 곳을 이르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산 기슭이나 벌판을 상상하면 된다. “스라” 는 일본어의 아스카(飛鳥, 安宿), “비라”는 하라(原)와 같은 말이다.
지금 단성교 자리에 신안나루(新安津)가 있었으며 적벽산(赤壁山)과 백마성 주변의 경호강을 신안강(新安江)이라 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조시대에도 生比良과의 관련성은 모른 채 新安이란 지명이 사용된 듯 하다.
2017년 6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가야역사연구 복원사업” 의 정책추진을 지시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지만 역사를 연구 복원한다는 것은 우리 말 지명의 근원을 밝히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역사복원이란 고분을 파헤쳐 쇠붙이나 도기를 발굴하여 관광객에게 진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대마을에서 양천강(梁川江)을 따라 내려오면 남강과 합류지점에 산청군 단성면(丹城面)이 있다. 일본서기는 가야시대 이 곳에 걸손국(乞飡國)이란 나라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는 경덕왕 때 원래의 궐지군(闕支郡)을 궐성군(闕城郡)으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일본서기의 걸손과 삼국사기의 궐지는 현재의 산청군 단성면에 있던 가야시대의 나라 이름이다. 일본서기의 걸손국이 오리지날에 가깝게 오는 발음이라고 생각된다. 첫 음절이 걸 또는 궐이었던 모양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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