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4일 토요일

81. 쿠가미미노 미카사(玖賀耳之御笠)




고사기 스진(崇神)조에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 타니하(旦波) 파견하여 쿠가미미노 미카사(玖賀耳之御笠) 죽였다 (日子坐王者遣旦波國 令殺玖賀耳之御笠) 줄의 기사가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기사가 없다. 밑도 끝도 없이 나오고 마는 이름이 역사상의 누구인지, 이 사건이 언제, 일어 일인지 밝혀진 바 없다.    

다행히 그의 역사적 실상을 추리할 수 있는 약간의 정보가 풍토기(風土記)에 남아 있다. 풍토기의 이 기록이 없었다면 그의 모습은 영영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풍토기(風土記)란 고사기가 편찬되고 1년이 지난 뒤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이 관명으로 각 지방에 편찬을 명한 것으로 이즈모(出雲), 하리마(播磨), 히타찌(常陸), 히젠(肥前), 붕고(豊後)등의 풍토기가 남아 있다. 그 밖의 나라에 관한 것도 일문(逸文, 흩어져 그 일부만 남아 있는 글)의 형태로 타 문헌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 하나가 탄고국(丹後) 풍토기이며 보통 탄고국 풍토기 잔결(丹後風土記)이라 불린다.

중앙정부가 각 지방관청에 지방의 풍토기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명한 것은 고사기가 발행되고 1년이 지난 서기 713년이다. 마을의 이름, 물산, 토지의 비옥상태, 산천원야의 명칭의 유래, 옛부터 전해오는 전승등을 살펴 기록하도록  항목을 명백히 하였다. 옛부터 전해오는 전승등이 황실의 역사가들에게 최대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고사기에 기록된 기사라도 황실의 이데올로기에 배치되는 지방의 전승들은 일본서기 편찬시 용납되지 않도록 하였을 것이다. 탄고국 풍토기 잔결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노인들이 이르기를, 스진천황(崇神天皇) 치세 탄고국 아오바산(葉山) 속에 쿠가미미노 미카사(陸耳御笠)라는 쯔찌구모(土蜘, 황명에 거역하는 토박이 도적)가 있어 인민을 괴롭혔다. 조정은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를 보내 정벌케 하였다. 탄고국(丹後)과 와카사국(狭国)의 경계에 이르자 홀연히 명동(鳴動)하며 빛을 뿜는 바위가 있었다. 그 모습이 투구와 비슷하여 장군의 투구바위(甲岩)라 하였다. 또 그곳을 나리우(鳴生, 현 마이쯔루시 나리우(舞鶴市成生))라 하였다

옛날, 히코이마스왕이 천황의 명을 받아 쯔찌구모를 추격할 때 갖고 있던 검이 바닷물에 닿아 녹 슬고 말았다. 그 때 니호토리(, 논병아리)가 줄을 지어 날아와 검에 부딪쳐 죽어갔다. 그 때문에 녹이 벗겨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곳을 니호(爾保)라 한다

옛날, 히코이마스왕이 관군을 이끌고 쿠가미미노 미카사(陸耳御笠)를 토벌할 때 아오바산에서 그들을 몰아 내 이 곳에 이르렀다. 그들이 크게 자란 농작물 속에 숨어 있었다. 히코이마스왕이 서둘러 말을 몰아 농작물 속에 들어가 죽이려 하자 쿠가미미가 구름을 일으키며 하늘을 날아 남쪽으로 도망쳤다. 히코이마스왕이 농작물을 심하게 어지럽혔으므로 그곳을 시타카(荒蕪)라 한다. 시타카(志託, 京都府舞鶴市西部志高(しだか))는 본래 시타카(荒蕪)라 표기하였다


옛날 히코이마스왕이 쿠가미미(陸耳)와 필녀(히키메(匹女))등을 뒤 쫒아 아리지 마을(蟻道)의 찌하라(血原)에 이르러 먼저 필녀를 죽였다. 그래서 그 곳을 찌하라(血原)라 한다. 그 때 쿠가미미도 항복하려 하였으나 야마토에타마 (日本得玉命)가 강의 하류로 부터 추격해 와서 쿠가미미는 서둘러 강을 넘어 도망쳤다. 그래서 관군들은 방패를 이어 강을 지키며 메뚜기가 튀듯 화살을 퍼부었다. 쿠가미미 군이 화살에 맞아 시체가 물에 떠내려 갔다. 그곳을 가하모리(川守, 京都府福知山市北部 大江町河守(もり))라 한다. 또 관군의 주둔지를 가하모리 타테하라(川守楯原, 福知山市大江町蓼原(たでわら))라 한다. 그 때 배가 한척 강을 내려왔다. 그 배로 도적들을 쫒아 마침내 유라 항(由良)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적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약돌을 주워 점을 쳐 보고 쿠가미미가 요사의 오오야마(大山)에 들어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 곳을 이시우라(石占, 京都府宮津市東部石浦(いし))라 한다. 또 그 배를 타테하라(楯原)에서 제사지내고 후나토신()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인용된 내용이 탄고국 풍토기 잔결의 쯔찌구모 기사이다. 스진천황(崇神天皇) 시대 정벌군 대장으로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이 등장하므로 연대를 상정하는데 충분한 자료이다. 쿠가미미노 미카사는 아오바산(葉山)에 웅거하고 있었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아오바산의 서쪽으로 도주하여 오오에산(大江山)으로 들어갔다. 오오에산은 토요오카시(豊岡市)로 나갈 중간 기착지이다. 아오바산에서 오오에산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30키로미터, 현 마이쯔루시(舞鶴市)의 동쪽에 있는 아오바산에서 마이쯔루시의 서쪽에 있는 오오에산까지 군사를 물린 셈이다. 그 사이에 필녀(匹女)라고 기술된 쿠가미미노 미카사의 왕비가 전사하였다.

그러나 쿠가미미노 미카사의 군대는 패주하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오오에산에 들어 가 은신한다. 오오에산(大江山)은 표고 833미터로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귀신의 전설들을 가지고 있다. 그 귀신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귀신이 지금 거론 중인 쿠가미미노 미카사이다. 관군의 추격은 계속되었으나 도적들은 쫓기면서도 방전()하는 양상이 계속되어 전쟁이 쉽게 결말이 나지 않는다. 고사기는 쿠가미미노 미카사를 죽였다고 하였으나 탄고국(丹後)과 국경을 접한 타지마국(但馬, 兵庫県北部)의 고문서는 쿠가미미노 미카사가 서쪽으로 도주하여 타지마의 요로이우라(鎧浦, 兵庫県香美町香住 鎧周)에서 히코이마스왕에게 토벌되었다고 하였다.

전편 “75. 카미에서 인간으로 (II)”에서 우리는 아메노 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여러 개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사람의 이야기를 이름을 바꾸어 여러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斯岐 阿利叱智 干岐), 우쯔시코오(色許男), 스이닌(垂仁)천황이 한 사람의 호칭이라고 하였다. 거기 더하여 여기서 또 한개의 이름, 쿠가미미노 미카사를 보태야 된다.

쿠가미미노 미카사(玖賀耳之御笠, 陸耳御笠)가 무슨 뜻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고사기는 쿠가미미(玖賀耳), 탄고국 풍토기잔결은 쿠가미미(陸耳)로 한자표기를 달리 하였다. 도적의 이름에 미()라는 존칭이 왜 붙었는지도 의문이다. 고사기의 편찬자들은 역사의 작은 파편들은 위의 여러 이름을 빌어 남기고자 한 셈인데 단편적인 구슬이 꿰어져 전체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바라지 않은 듯하다. 황실의 이데올로기에 배치되는 내용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로 이해되도록 배려한 느낌을 받는다. 아메노 히호코는 스이닌(垂仁)천황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하면서 그의 또 다른 모습은 쿠가미미노 미카사라는 도적으로 남겨 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구슬로 꿰어 전체의 그림을 그려 내고자 한다. 쿠가미미노 미카사가 아메노 히호코라고 주장한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기 268년경 도망친 아내를 뒤쫒아 열도에 들어 온 아메노 히호코는 오오사카 상륙이 불허되자 일본해 측으로 뱃머리를 돌려 타지마국()의 토요오카(豊岡)를 점령하고 이즈시신사(出石神社)를 본거로 삼는다. 서기 272년경 야마토 코세(御所)의 이나키(稻城)에 불을 질러 도망 친 아내 사호히메를 죽이고 타니하의 히바스히메(고사기 氷羽州比, 일본서기 日葉酢媛命)와 혼인하였다. 히바스히메를 고사기는 타니하 미찌누시(丹波道主)의 딸이라 하였는데 그래서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타니하 미찌누시는 서기 300년 대, 히바스히메는 서기 250년 대의 인물이다. 히바스히메는 서기 275년 경 야마토히메(倭姬)를 낳았다.

타니하 지역은 호아카리(天火明命) - 아들 카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 – 아들 타케다세(建田背命) – 아들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의 혈통이 지배해 왔는데 아메노 히호코의 등장 이후 그와 풍운을 다툰 것은 타게모로스미의 시대였다. 아메노 히호코가 30, 타케모로스미가 20대의 나이였을 것이다. 서기 270년 대 초 히바스히메와 아메노히호코의 혼인은 이 두 가문이 한 배에 탄 것을 의미한다. 히바스히메는 타케모로스미와 형제간이며 타케다세의 딸로 본다.    

히바스히메와의 혼인을 통하여 아메노 히호코는 타니하의 전역을 장악하고 현 쿄우토(京都) 지역에 진출한다. 타니하의 맹주 타케모로스미가 그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기 287년 일본서기 스진 10년 추 7월 타케하니야스히코(武埴安彦) 반란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만주에서 부여의 의려(依慮)가 서기 285년 모용외(慕容)에게 패하여 피난길에 오르고 최종적인 기항지가 나니하(難波)였다. 부여의 피난민들이 야마토의 코우안(孝安, 오호모노누시)천황을 몰아내고 야마토의 장군 타케하니야스히코(武埴安彦) 야마시로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타케하니야스히코 아버지는 코우겐(孝元)천황으로 기록된 사호히코, 어머니는 타케쯔누미의 하니야스히메이다. 이는 그의 모계쪽이 타니하의 맹주와 같은 집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전쟁에 아메노 히호코가 방관적일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전쟁에 개입하여 타케하니야스히코 지원하였을 것이다.

전쟁후의 상황을 보면 타케하니야스히코는 몰락하였으나 아메노 히호코는 실리을 챙겨 타케하니야스히코 영지라고 생각되는 야마시로 지방으로 진출하여 야마토의 새로운 지배자 코우레이(孝靈)천황과 대치하였. 훗날 황실은 타케하니야스의 이름을 익명으로 하여 쿄우토 시(京都市)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 보통 카미가모신사(上賀茂神社)로 불린다) 에서 제신으로 모시게 하였다. 황실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역사는 조작하였으나 타케하니야스의 영웅적인 애국심은 길이 추앙받기를 바란 탓이다.

쿄우토 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 쿠미야마쬬(久御山町) 이찌타(市田) 스이닌천황(垂仁天皇)을 모시는 타마키신사 (珠城神社)가 있다. 이찌타는 스이닌천황의 궁성, 타마키궁(珠城宮)이 있던 자리이며 궁성터에 신사를 지었으므로 타마키신사(珠城神社)라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스이닌의 타마키궁이 야마토의 마키무쿠(纏向)에 있었다고 거짓 증언을 하였다. 스이닌 천황은 야마토를 지배한 적이 없다.따라서 그의 무덤이 마키무쿠에 있을 턱이 없다. 

코우레이(孝靈) 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하자  타니하국(丹波國, 현 쿄우토 지역)의 스이닌 천황은 쿄우토 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까지 진출하여 타마키궁(珠城宮)을 짓고 야마토의 턱밑까지 진출하였다. 나라(奈良)분지의 남북에서 코우레이와 스이닌이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 전쟁에 돌입한 기록은 없다. 피차간 서로 상대를 공격할 힘이 없었던 모양으로 서기 300년까지 그러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스이닌의 두번 황후 히바스히메는 타니하국(丹波國, 현 쿄우토 지역) 출신인데 그녀가 사망한 뒤 야마시로(山背)출신의 오토 카리하타토베와 혼인하였다. 이는 서기 290년 대 스이닌(垂仁) 활동반경이 야마시로 지역으로 이동했음을 나타낸다. 야마시로는 후일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 長足, 神功皇后) 근거지이다

서기 297년 만주벌판의 풍운이 해일처럼 열도에 이른다서기 285년 의려(依慮)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부여를 탈출하여 열도에 들어 와 코우레이(孝靈)천황이 되었고 서기 297년 그의 아들 의라(依羅) 또한 모용선비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망망대해의 피난길에 오른다. 서기 297년경 이들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먼저 정착한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으면서 반도를 남하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13 (서기 298) 가을 9월에 한()과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과 맥인(貊人)으로 표현된 이 사람들이 사실은 부여를 탈출한 보우트 피플들이다. 백제의 책계왕이 부여의 피난민과의 교전에서 전사할 정도이니 피난민이라 하나 이들은 부여의 정규군이다.  

이들 일행의 행로에 쯔시마(對馬島)가 있고 일본서기 스진 65년 소나카시찌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스진(崇神) 65년 추 7월 미마나국(任那)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 미마나는 쯔쿠시국(筑紫國)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으로 바다를 끼고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 여기 나온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는 의라(依羅)의 본명이거나 관직명일 가능성이 있다. 스진 65년 소나카시찌가 열도의 스진천황에게 파견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스진 65년이란 가공의 연대이며 소나카시찌 자신이 열도를 장악하고 스진천황이 되었다.

서기 300년 부여의 의라가 또 난민을 이끌고 와 열도를 장악한다. 그는 코우레이 천황의 아들이므로 큰 전쟁을 치르지 않고 열도를 장악했을 것이다. 그가 스진(崇神)천황이다. 스진은 스이닌(垂仁)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서기는 8대 코우겐(孝元)천황의 이름을 오호야마토네코(大日本根子) 히코쿠니쿠루() 하였다. 오호야마토네코는 수식어에 해당하는 미칭이라 하므로 실제 이름은 히코쿠니쿠루인데 사람이 전편에서 나온 사호히코(沙本毘古王, 狭穂彦王)이다. 일본서기는 사람을 코우레이()천황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코우레이는 부여왕 의려(依慮)이며 서기 287 야마토를 장악하였다. 히코쿠니쿠루() 코우쇼우(孝昭, 5대 천황), 신대의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 아들이다.

코우쇼우(孝昭) 이름은 미마쯔 히코 카에시네(松彦香殖)이며 이토쿠()천황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실제로 그는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아들이다. 74. 카미에서 인간으로(I)”에서 그가 백제의 사반왕(沙伴)이라 하였다. 스사노오가 백제의 초고왕이며 오호쿠니누시가 구수왕(仇首王, 貴須王)이다. 그들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일본역사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진무동정에 의하여 오호쿠니누시의 장자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鋤高日子根神)가 몰락하고 코토시로누시의 딸 이스케요리히메(伊須余理比賣)가 진무천황의 정비가 됨으로써 코토시로누시 가문은 이후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이 된다. 그러나 가문의 구성원들이 국난을 당하여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어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겪는다. 형제끼리 적으로 만나 전쟁터에서 죽고 죽이는 운명이 된다.

일본서기는 코우쇼우의 아들을 아마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天足 押人命) 야마토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日本足 押人命) 2명을 기록하고 동생인 야마토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가 코우안(孝安)천황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진무동정의 기사 가운데 에우카시(兄猾) 오토우카시(弟猾) 이야기가 나온다. 8세기의 학자들이 선택한 한자 우카시() 보면 오토우카시를 결코 호의적인 안목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있다. 에우카시와 오토우카시 형제의 이야기는 바로 코오쇼우의 아들 아마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와 야마토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를 의미한다. 형은 큐우슈우의 정벌군과 대치하였고 동생은 큐우슈우 군과 내통하여 형을 밀고하여 죽게 하였다.

젊은 나이에 전사한 아마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天足彦押人命) 히코쿠니오케쯔(日子意祁都命)라는 아들을 남겼다. 그는 와니노 오미(丸邇臣)의 조()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는 그의 후손이라면서 방대한 가문을 열거하였다. 코우안(孝安)천황이 동생의 밀고로 젊은 나이에 죽은 형의 후손이 훗날 어떻게 그렇게 번창하게 되었을까? 세월이 바뀌면서 전란중 억울하게 죽은 형의 후손들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특별한 혜택 받았을 것이다. 스사노오 오호쿠니누시 코토시로누시 오토우카시(孝安) 이어진 카모씨(鴨氏) 후손들 가운데 코우안(孝安)천황이 오토우카시는 가문내에서 결코 명예로운 평가를 받지 하였을 것이다.

진무이후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은 스사노오 오호쿠니누시 코토시로누시 히코쿠니쿠루(孝元天皇) – 그의 딸 일여(壹與) 라인인데 일여의 남편되는 사람이 위에 나온 히코쿠니오케쯔(日子意祁都命)이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아무도 카이카(開化)천황이 여자라고 말 하지 않는다. 히코쿠니오케쯔와 일여사이에 태어 난 것이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으로 탄고국 풍토기 잔결의 토벌군 대장이 바로 사람이다.

코우겐(孝元)천황과 우쯔시코메(고사기 色許, 일본서기 色謎命) 사이에서 오호히코(大彦命)와 일여(壹與)가 태어났다. 스사노오 오호쿠니누시 코토시로누시(孝昭) 아마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 히코쿠니오케쯔 히코이마스는 부계로 가계이다. 일본서기는 카이카(開化)천황을 남자로 만들어 코오쇼오(孝昭) 코오안(孝安) 코오레이(孝靈) 코오겐(孝元) 카이카(開化) 히코이마스(日子坐王) 가계를 바꾸었다. 그러나 카이카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진실은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孝昭) – 히코쿠니쿠루(, 孝元) 카이카(開化) 히코이마스의 라인이 맞다.

서기 270 히코이마스(日子坐王)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280 어머니 카이카 천황이 죽자 할아버지의 형제인 코우안(오토우카시) 권력을 장악하였고 서기 287 부여의 의려가 피난민을 이끌고 왔을 코우안이 야마토의 왕위에 있었다

한편 히코쿠니쿠루(), 사호히코(沙本毘古王, 狭穂彦王)가 서기 245년 경 타케쯔누미(建角見命)의 딸 하니야스히메(埴安姬)와 혼인하고 250년 경 타케하니야스히코(武埴安彦命)를 낳았다. 서기 287년 부여의 의려가 야마토에 상륙했을 때 타케하니야스히코는 주전파였고 오호히코(大彦命)는 항복파였다. 타케하니야스히코와 오호히코는 형제간이다. 부여에서 들어온 의려는 오호히코로 하여금 타케하니야스히코를 치도록 하였다. 그 전쟁의 내용이 일본서기 스진조에 나온 타케하니야스히코의 반란이란 기사이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 추 7월 천황은 사도장군(四道)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사도장군의 한 사람인 오호히코(大彦)의 군세가 와니고개(和珥坂, 天理市和珥)를 넘을 때 일족의 타케하니야스히코 (武埴安彦)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황은 오호히코(大彦)와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를 야마시로(山背)에 파견하여 타케하니야스비코(埴安彦)를 치도록 하였다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혈통이 의심스러운데 우리는 사람이 히코이마스(日子坐王) 동일인이라 본다. 왜냐하면 카이카천황을 남자로 만들어 히코이마스를 카이카의 아들이라 하고 히코쿠니부쿠()히코쿠니오케쯔(日子意祁都命)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히코쿠니오케쯔(日子意祁都命)와 카이카(開化)여왕이 부부 간이며 한 아들을 양쪽에 기록할 때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다. 히코쿠니부쿠() 서기 287년의 전쟁시 숙부이며 외삼촌인 오호히코(大彦命) 부관으로 참전하였다. 나이가 고작 예닐곱 정도일 것이다.

전쟁의 결과 타케하니야스히코 몰락하고 오호히코와 히코이마스는 코우레이의 신하가 되어 관직에 있었다. 야마토 북쪽의 야마시로, 타니하, 아후미(近江), 타지마, 와카사지방을 장악한 아메노 히호코는 야마토 북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나 코우레이 천황의 야마토와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서기 299 의려(依慮) 부여에 남겨두고 아들 의라(依羅) 부여를 버리고 백제를 거쳐 나니하에 들어온다. 그의 이름을 일본서기는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 하였다. 아버지 코우레이 천황을 이어 야마토를 차지한 의라(依羅) 스진(崇神)천황이라 기록된다. 그는 야마토 북쪽에서 거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아메노 히호코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메노 히호코를 정벌하라는 명령이 히코이마스(日子坐王)에게 떨어진다.

그런데 아메노 히호코와 히코이마스는 남남지간이 아니다. 히코이마스의 어머니 카이카의 외삼촌이 아메노 히호코이다. 히코이마스가 30, 아메노 히호코는 60세를 약간 넘은 나이일 것이다. 히코히마스가 지휘하는 야마토 군과 아메노 히호코 군의 전쟁은 서기 302 경의 일이다. 만주 대륙에서 모용외의 군대와 싸워 정벌군은 아메노 히호코의 군사를 압도하였으므로 아메노 히호코 군은 점점 북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편의 머리에 나온 마이쯔루시 동쪽에 있는 아오바산(靑葉山)에서 아메노 히호코 군대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주의해야 하나의 세력이 있으니 바로 타니하의 맹주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이다. 타니하 지역 아마베씨(海部氏)의 본가는 호아카리(天火明命) - 아들 타케쯔누미(建角見命) – 아들 타케다세(建田背命) – 아들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로 이어졌으며 타케모로스미의 시대 아메노 히호코와 이 가문은 손을 잡았다. 서기 270년 대 초 히바스히메와 아메노히호코의 혼인은 이 두 가문이 한 배에 탄 것을 의미한다.

아마베씨(海部氏)의 본가가 이 때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다. 앞 서 인용한 탄고국 풍토기 잔결의 기사중 “옛날 히코이마스왕이 쿠가미미(陸耳)와 필녀(匹女)등을 뒤 쫒아 아리지 마을(蟻道)의 찌하라(血原)에 이르러 먼저 필녀를 죽였다. 그래서 그 곳을 찌하라(血原)라 한다. 그 때 쿠가미미도 항복하려 하였으나 야마토 에타마(日本得玉命)가 강의 하류로 부터 추격해 와서 쿠가미미는 서둘러 강을 넘어 도망쳤다. 그래서 관군들은 방패를 이어 강을 지키며 메뚜기가 튀듯 화살을 퍼부었다. 쿠가미미 군이 화살에 맞아 시체가 물에 떠내려 갔다.”라는 내용이 나왔다.

여기 나온 야마토 에타마(日本得玉命)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 아들이다. 대강 히코히마스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타케모로스미의 아들이니 아메노 히호코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를 보면 아메노 히호코와 야마토 에타마가 적으로 조우한 것처럼 씌여 있다. 이렇게 되었을까? 원래 같은 편이었으나 전쟁의 상황이 불리하므로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의 가문은 정벌군 대장 히코이마스에게 투항하여 가문을 보전하였을 것이다.

히코이마스와 야마토 에타마는 모두 스사노오의 피를 받은 카모씨(鴨氏)이며 둘은 비슷한 나이로 항렬이 같은 형제간이다. 서로 아는 사이일 것이다. 야마토 에타마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고 있다.  

위에 나온 필녀의 존재는 아메노 히호코의 말년의 황후이다. 고사기가 스이닌(垂仁) 말년의 아내로 야마시로노 오호쿠니노 후찌(山代大國之淵) 카리 하타토베(苅羽田刀弁) 동생 오토카리 하타토베(弟苅羽田刀弁) 기록했는데 필녀란 사람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오토카리 하타토베가 낳은 후타지노 이리히메(布多能伊理毘賣) 훗날 야마토 타케루(日本武尊) 혼인하여 쥬아이(仲哀)천황을 낳았다.

아메노 히호코의 아내가 살해될 정도로 전쟁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아메노 히호코의 군대는 도주하면서 싸우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움직였다. 이즈시신사(出石神社) 있는 토요오카시(豊岡市) 아메노 히호코의 최초의 정착지이다. 이들은 토요오카마져 버리고 도주하였다.

아오바산에서 오오에산까지 직선거리 30키로, 오오에산에서 토요오카까지 35키로, 토요오카에서 타지마의 요로이우라(鎧浦, 兵庫県香美町香住鎧周)까지 30키로의 거리인데 산지가 많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 추격전은 장거리에 걸쳐 진행되었을 것이다.

히코이마스는 천황의 명령으로 어머니의 외삼촌을 토벌하고 있지만 쿠가미미노 미카사를 죽일 수 없는 처지이다. 그는
아메노 히호코(天日槍)를 열도에서 추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였다. 아메노 히호코와 히코이마스간에 최후의 담판이 타지마의 요로이우라(鎧浦)에서 이루어지고 스진(崇神) 천황의 결정이 내린다. 열도를 떠나서 쯔시마(對馬島)에 정착하라. 그리고 쯔시마를 미마끼천황의 이름을 따라서 미마나(任那)로 부르도록 하라

말년에 쯔시마(對馬島)로 쫒겨 간 아메노 히호코는 천의 얼굴을 남겼다.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斯岐 阿利叱智 干岐), 우쯔시코오(色許男), 스이닌(垂仁)천황, 그 위에 우리는 또 하나의 이름 쿠가미미노 미카사(玖賀耳之御笠, 陸耳御笠)를 덧붙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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