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77년 송서는 왜(倭)에서 사신이 와서 흥(興)이 죽고 동생 무(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무(武)는 스스로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칭하였다.
서기 478년 왜왕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61. 송서의 왜무왕 상표문 참조). 여기서 그는 고구려의 무도함을 규탄하고 부형의 시절부터 고구려를 응징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와 형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제 자신이 그 뜻을 실현코자 한다며 송 황제의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황제는 그를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서기 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죽었다…. 동년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거기서 쯔쿠시국(筑紫國)의 아찌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 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일본서기의 이 기록과 함께 곤지(淸寧천황)와 왜왕무가 열도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들이 어디서 무었을 하였는지 알려진 바 없다. 야마토는 왜왕무의 어머니 이히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이 두 사람이 일본을 비운 사이 켄조우(顯宗), 부레쯔(武烈)천황을 옹립하면서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가 권력을 장악하고 반백제, 친고구려 정책을 편 이야기는 “77.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에서 나왔다.
송서에 나오는 왜왕무의 정체는 모른다는 것이 일본에서 불문률로 되어 있다. 유랴쿠 천황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모른다는 것이 일본 학계의 현재 입장이고 앞으로도 이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연결고리 하나가 밝혀지면 천황이 백제왕실의 혈통이 되고 만다. 일본서기 유랴쿠의 재위기간 기록이 날조된 것은 곤지와 왜왕무의 존재를 감춰 황실의 연결고리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일본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왜왕무를 베일에 싸인 인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서기 501년 백제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된 개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히토요 황녀 (飯豊皇女)가 무령왕을 임신하고 일본으로 떠났기 때문에 무령왕은 475년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서기 477년 열도의 왕 곤지가 문주왕의 공주천도를 돕기 위하여 백제에 나왔다. 그때 시마왕을 왜왕으로 세웠다. 시마왕이 남송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왜를 포함한 7국제군사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그가 왜왕무이다.
왜왕무가 열도를 떠나 있는 사이 이히토요 황녀도 죽고 왜왕무의 숙부 켄조우가 황위에 올랐으나 그는 백제를 배신하고 친 고구려 정책을 폈다. 이 때부터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는 고구려와 협력하여 열도에 친 고구려 정권을 세우려 하였다. 카나무라는 서기 475년 한성백제 멸망 이후 백제가 다시 열도를 위협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서기 487년 니리무(爾林)에서 백제 장군을 살해하거나 서기 493년 고구려에 아라키(麁寸)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사는 카나무라의 인식을 반영한다. 열도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서기 548년의 아라왜신관(安羅倭臣館, 김태식 교수가 사용한 용어) 스파이 사건까지 이어진다. 아라왜신관이 고구려와 밀통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백제의 마진성(馬津城, 충남 예산)을 공격하도록 한 사건이다.
서기 479년까지 왜왕무의 나라였던 열도는 서기 501년 고구려의 혈통을 이은 부레쯔(武烈)를 전면에 세운 카나무라가 장악하고 있었다. 무령왕이 열도에 특사를 보내 열도를 내 놓으라고 경고하는 것을 암시하는 기사가 서기 504년부터 나타난다.
서기 504년 10월 백제국이 마나키시(麻那君)를 파견하여 공납하였다. 서기 505년 백제의 왕이 시가키시(斯我君)를 파견하여 공납하였다. 특별한 문서를 첨부하여 “이전 파견한 마나키시(麻那君)는 백제의 왕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새로 시가키시(斯我君)를 파견하여 삼가 봉사하도록 하겠읍니다.”라고 제안하였다. 그 후 호우시키시(法師君)가 태어났는데 그가 야마토노 키미(倭君)의 조선이다.
마나키시(麻那君)와 시가키시(斯我君)는 무령왕의 특사이다. 특사들은 열도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무령왕의 의지를 전하고 당시 열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를 압박하였다. 특사들은 원래의 주인에게 열도를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서기 505년 기사는 당시의 특사들이 열도에 눌러 앉아 훗 날 야마토의 왕(倭君)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케이타이 이후 야마토 정권을 접수하였다. 호우시키시(法師君)란 킨메이(欽明) 천황의 이름이며 시가키시(斯我君)란 안칸(安閑)천황의 이름이다.
카나무라(大伴金村)는 케이타이(繼體)를 등장시켜 무령왕에게 대항하였다. 왜냐하면 케이타이도 개로왕의 아들(서자)이기 때문에 열도의 주인으로 손색이 없다는 논리이다. 그리하여 부레쯔(武烈) 천황을 폐위시키고 서기 507년 후쿠이현 (福井縣)의 시골에 살던 58세의 노인을 끌어 내 야마토의 왕위에 앉히니 그가 케이타이(繼體) 천황이다.
케이타이(繼體) 천황이 왕위에 있었던 서기 507년 부터 531년까지의 24년 간 백제관련 기사가 일본서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당시 백제와 가야제국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5세기의 100년 간 고구려는 백제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2대에 걸친 남진으로 백제는 몸도 가누기 힘든 병자와 같은 상태가 되었고 신라는 어부지리를 얻어 날개를 단 형국이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가 사경을 헤메던 한 세기 동안 고령의 대가야가 소백산맥의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함양에서 남원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임실과 장수, 진안을 손에 넣고 섬진강을 따라 남하한다. 구례 곡성을 거쳐 섬진강 하구의 하동, 광양, 순천, 여수, 돌산지역까지 대가야의 손길이 뻗친다. 그리고 서기 479년 대가야왕은 남제에 사신을 보낸다.
남제서(南齊書)는 「가야는 삼한(三韓)의 일종인데 건원(建元) 원년에 국왕 하지(荷知)의 사신이 와서 조공을 바쳤다. 이에 남제의 고제(高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가야왕 하지(伽耶王荷知)는 관문과 바다 밖에서도 동쪽 먼 곳에서 폐백을 바치는구나!' 라고 하며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한다」고 했다. 이 하지왕은 대가야의 가실왕 (嘉悉王)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기 512년 호쯔미노 오미 오시야마(穂積臣押山)를 백제에 보내 쯔쿠시국(筑紫国)의 말 40필을 하사 하였다. 그 해 12월 백제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문서를 바쳐 임나의 오코시 타리(上哆唎), 아로시 타리(下哆唎), 사다(娑陀), 무로(牟婁)의 4현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일본서기는 대신들의 협의를 거쳐 오호토모 카나무라가 이를 수용하고 4현을 백제에 할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지명들이 한반도에 있는지 일본에 있는지 이름만 가지고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한국어 같기도 하고 일본어 같기도 하다. 그 결과 4현의 위치비정은 사람에 따라 엄청난 편차를 보였다. 근래 한국의 역사학계는 오코시 타리를 여수, 아로시 타리 돌산, 사다 순천, 무로 광양으로 비정하는데 거의 의견이 일치한다. 광양은 옛날 마로(馬老), 모루(牟婁), 물혜(勿慧), 만해(滿奚), 마련(麻連)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서기 513년 6월 백제는 다시 "하헤국 (伴跛国, 伴路國의 오기)은 우리나라의 코몬(己汶)의 땅을 빼앗았읍니다. 천황의 은혜를 입어 돌려 받을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주청하였다.
그 해 8월 26일 백제의 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
11월 5일 백제의 사미몬쿠이(姐弥文貴)장군이 신라의 몬토쿠찌(汶得至), 아라(安羅)의 신이케이(辛己奚)와 혼하와사(賁巴委佐), 하헤(伴跛)의 코덴케이(既殿奚), 찌쿠몬찌(竹汶至)들을 데려 와 조칙을 받아 코몬(己汶)과 타사(滞沙)를 백제에 주었다. 그 달 하헤국(伴跛国)이 시우키(戢支)를 보내 값 진 보물을 헌상하고 코몬(己汶)의 땅을 애걸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2월 8일 마가리노 오호에(勾大兄)황자를 후계자로 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서기 512년 임나의 오코시 타리(上哆唎), 아로시 타리(下哆唎), 사다(娑陀), 무로(牟婁)의 4현을 점령한 백제는 513년 다시 전북의 남원(己汶)과 섬진강의 하동(滞沙)을 확보한다. 일본서기는 이 땅을 열도의 천황이 백제에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백제는 전쟁을 통하여 대가야로부터 백년 전의 옛 땅을 되 찾았을 것이다.
서기 514년 3월 하헤(伴跛)는 시톤(子呑, 진주)과 타사(帯沙, 하동)에 성을 쌓아 만케이(満奚, 광양)와 연결하고 봉수대와 무기고를 설치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또 니레히(爾列比, 의령군 부림면)와 마스히(麻須比, 창녕군 영산면)에 성을 쌓아 마쇼우케이(麻且奚, 삼랑진), 스이후(推封, 밀양)와 연결하였다. (継体天皇八年 三月 伴跛築城於子呑 帯沙 而連満奚 置烽候 邸閣 以備日本 得築城於爾列比 麻須比 而連麻且奚 推封)
백제에게 전남의 남동부 오코시 타리(上哆唎), 아로시 타리(下哆唎), 사다(娑陀), 무로(牟婁)의 4현, 전북의 남원(己汶)과 섬진강의 하동(滞沙)을 빼앗긴 대가야(伴跛)가 전선을 후퇴하여 섬진강과 낙동강 사이로 밀려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서기 515년 2월 4일 백제의 사자 몬쿠이(文貴)장군 등이 귀국을 원하여 모노노베노 무라지(物部連)를 데려 가도록 배려하였다. 이 달 사토섬(沙都嶋, 현 위치 미상)에 이르러 소문을 들으니 하헤(伴跛, 대가야) 사람들이 일본을 원망하며 좋지 않은 일을 꾸미고 힘에 의지하여 무도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서 모노노베노 무라지는 수군 5백을 인솔하여 타사강(帯沙江, 섬진강)으로 가고 몬쿠이(文貴)장군은 신라에서 백제로 들어갔다.
4월 모노노베노 무라지가 타사강(帯沙江, 섬진강)에 머문지 6일째 되는 날 하헤(伴跛)의 군사가 공격해 왔다. 입고 있던 의복을 벗기고 소지품을 빼앗고 모든 장막을 불 태웠다. 모노노베노 무라지는 겁에 질린 채 목숨만 겨우 건져 몬모라 (汶慕羅, 섬의 이름, 현 위치 미상)까지 도망쳤다.
서기 516년 5월 백제는 전부(前部) 모쿠라후마 코우하이 (木刕不麻甲背)를 보내 모노노베노 무라지등을 코몬(己汶)에서 맞아들여 그들을 호위하여 백제로 들어 갔다.
서기 523년 5월 백제의 무령왕이 죽었다.
서기 524년 1월 백제의 태자 명(明)이 즉위하여 성명왕(聖明王)이 되었다.
서기 529년 3월 백제왕이 일본에 가는 사자가 바다 한 가운데 곶(海中岬)을 떠날 때 풍파에 시달리고 화물은 물에 젖어 손상이 심하니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津, 하동군 고전면)을 조공용 항로로 달라 하여 그렇게 하였다.
무령왕이 전라남북도의 대가야를 몰아낸 뒤 성왕이 즉위하였다. 서기 529년 성왕이 요구한 것은 섬진강을 건너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津)이다. 하동군 고전면을 한다사현(韓多沙縣), 악양면을 소다사현(小多沙縣)이라 하였으므로 그냥 다사진이 아니라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津)”이라 해야 맞다.
서기 529년의 이 기사는 백제군이 경남으로 진출하여 사천시 곤양면을 지나 진주(子呑)를 노리고 있음을 뜻한다. 진주가 백제 수중에 들어 가면 바로 아라국(安羅國, 현 함안군)이 백제에 노출된다. 섬진강과 낙동강 사이에 있던 가야제국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된다. 백제와 신라가 동과 서에서 이들을 노리고 거리를 좁혀 오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9년 (522) 3월 가야국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이때 신라에 청혼한 대가야왕은 이뇌왕(異惱王)으로 신라 이찬(伊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와 혼인하여 그 사이에 월광태자(月光太子)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 결혼의 성립으로 일단 대가야와 신라 사이에는 동맹관계가 체결된다.
서기 529년 백제의 서부 경남 진출에 위협을 느낀 대가야 왕이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대비한 듯 한데 삼국사기는 522년이라고 하여 학계에서 미제로 남아 있는 사안이다.
일본서기의 혼인관련 기사는 보다 구체적이다. 가라왕은 신라왕의 딸과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다. 신라는 처음에 시집보낼 때 100명의 수행원을 함께 보냈다. 이것을 각 나라에 분산시켜 배치하였는데 이들은 신라의 의관을 착용하였다. 가라(加羅)의 아리시토(阿利斬等)는 자기 나라의 복제(服制)를 무시하였다고 노한 나머지 사자를 보내 여인들을 돌려보냈다. 신라는 면목을 잃고 왕녀를 돌려 보내라고 나왔다.
신라의 법흥왕은 왕녀 한명을 시집보내며 100명의 스파이(?)를 딸려 보냈다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거래란 애초부터 중소기업에게 불리하다. 그래도 모두 참고 있었는데 탁순국의 아리시토(阿利斬等)라는 사람은 정의감에 불타는 대쪽같은 심성을 가진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대기업이라 하나 하는 짓이 아니꼬와서 신라여인들을 추방해 버렸다. 법흥왕이 아이까지 낳은 왕녀를 소환하겠다고 협박하자 가라의 코호리찌카(己富利知迦, 대가야 왕)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 어떻게 왕녀를 돌려 보내겠느냐고 항의한다. “그럼 넌 잠자코 있어. 아리시토는 내가 짓밟아 버릴테니까.” 법흥왕은 그 때를 이용하여 탁순국을 없앨 수순을 밟는다.
드디어 신라는 토카(刀伽), 코헤(古跛), 후나무라(布那牟羅)의 세 성(城)을 취하고 또 북쪽 국경에 있는 다섯 개의 성을 빼앗았다. 위의 지명이 어디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신라의 법흥왕은 탁순국의 아킬레스건을 위협하였을 것이다. 낙동강 북쪽의 창녕군 남지읍의 가야진을 건너 광로천을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면 호계(虎溪)에 이른다. 거기서 마재고개를 넘으면 마산, 이리현(伊里峴, 신당고개)을 지나면 함안 가는 길이다. 호계, 마재고개, 이리현이 막히면 탁순은 섬과 같이 고립되어 외부와의 교통이 차단된다.
이 달 오우미(近江)의 케누노 오미(毛野臣)를 사자로 아라(安羅, 함안군)에 보내 아리히시노 가라(南加羅)와 토쿠코톤 (喙己呑)을 재건하는 문제를 신라와 협의하도록 조칙을 내렸다.
토쿠코톤의 한글표기는 훼(喙), 녹(㖨)과 탁(啄)이 혼동되어 제 멋대로 훼기탄, 녹기탄, 탁기탄으로 학자들의 논문에 나타난다. 한자의 혼란은 일본어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은 어떤 한자를 쓰더라도 반드시 토쿠코톤으로 읽는다. “喙己呑”은 한글로 달기탄으로 읽어야 된다. 서기 524년 법흥왕 때 세운 울진 봉평비의 사달(沙喙)과 같은 식이다.
백제는 장군 인쿠이(尹貴), 마나코우하이(麻那甲背), 마로(麻鹵)등을 보내 아라(安羅)에서 조칙을 듣도록 하였다. 신라는 옆 나라의 미야케(官家)를 쳐 부순 것이 두려워 높은 사람을 보내지 않고 부찌나마레(夫智那麻礼), 케나마레(奚那麻礼)등 하급자를 보내 아라에서 조칙을 들었다.
아라(安羅)는 새로이 컨벤션 센터(高堂)를 짓고 칙사를 오르게 한 뒤 국주(国主)가 따라 올랐다. 국내의 대신이라도 함께 고당(高堂)에 오른 것은 한 두 사람 뿐으로 백제측 장군들도 밑에 있었다. 몇 달에 걸쳐 전상의 모의(殿上謀議)가 행해졌으나 장군들은 항상 마당에 있어야 되는 것을 원망하였다.
신라는 다시 대신(大臣)의 상신(上臣) 이시부레찌 칸키 (伊叱夫礼智干岐, 이사부)에게 군사 삼천을 인솔해 보냈다. 케누노 오미(毛野臣)는 무비를 갖춘 삼천의 군사를 보고 놀라 쿠마나레(熊川)에서 임나의 코시코리(己叱己利)성으로 들어갔다.
중소기업들은 이해 당사자들을 모아서 회합을 통해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나 대기업 신라의 기세를 잠재울 수 없었다. 아라의 컨벤션 센터에서의 전상의 모의는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고 끝났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전략가 이사부가 삼천의 신라군을 이끌고 타타라 벌(多々羅原)에 와서 3개월 동안 무력 시위에 들어간다. 이사부는 킨칸(金官) 헤다쯔(背伐) 아타(安多) 와다(委陀)의 4개의 마을을 약탈하고 거기 살던 백성들을 신라로 끌고 갔다. 4개의 마을을 타타라(多々羅) 스나라(須那羅) 와다(和多) 호찌(費智)라 하는 설도 있다.
탁순국의 아리시토(阿利斯等)는 열도에서 중재자로 나선 케누노오미(毛野臣)가 임나 부흥의 약속을 실행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의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아리시토는 케누노오미의 실상을 알고나서 이반의 마음을 품었다. 쿠레시코모(久礼斯己母)를 신라에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또 누스쿠리(奴須久利)를 백제에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케누노오미는 백제군이 오는 것을 헤코오리(背群)에서 맞아 싸웠다. 상처입고 죽은 자가 반(半)에 달했다. 백제는 누스쿠리를 포로로 하여 손과 발을 묶고 목에 쇠사슬을 매달고 와서 신라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였다. “케누노오미를 내 놓아라” 라 외치며 아리시토를 압박하였다.
케누노오미(毛野臣)는 성에 의지하여 방비를 강화하였으므로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두 나라는 한 달 동안이나 발이 묶였다. 그 동안 두나라는 쿠레무라성(久礼牟羅城)을 쌓고 돌아갔다. 가는 길에 토리키무라(騰利枳牟羅), 후나무라(布那牟羅), 후시키무라(牟雌枳牟羅), 아부라(阿夫羅), 쿠찌하타키(久知波多枳)의 다섯 개의 성을 탈취하였다.
백제와 신라 두 나라가 이 때 쌓았다는 쿠레무라성(久礼牟羅城)은 구례산(久礼山)으로 서기 544년의 킨메이(欽明)기에 또 나온다. 쿠레무라성은 현 함안군 칠원면 무릉리의 산성마을로 비정되고 있다. 돌아가는 길에 근처에 있던 다섯 개의 성을 취하였다는 것은 백제가 돌아가는 길에 아라국의 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본다. 신라는 이미 탁순국을 공략할 3성과 북쪽 국경에 있는 5성을 확보하였다.
이런 식으로 가야의 소국들은 백제와 신라에게 야금야금 잠식된다.
서기 531년 2월 천황의 병이 무거워졌다. 7일 천황은 이하레(磐余)의 타마호(玉穂)궁에서 82세로 붕어하였다. 원문에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어 있다. 어떤 책에 의하면 천황은 치세 28년에 붕어했다 한다. 그것을 치세 25년 붕어로 한 것은 백제본기에 의거하여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거기에 “치세 25년 3월 진군하여 아라(安羅)에 이르러 걸둔성(乞屯城)을 쌓았다. 이 달 고구려의 왕, 안(安)이 시해되었다.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일본의 천황 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신해년(辛亥年, 531년)은 치세 25년에 해당한다. 훗날 따져 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或本云。天皇、二十八年歳次甲寅崩。而此云。二十五年歳次辛亥崩者。取百済本記為文。其文云。太歳辛亥三月。師進至于安羅営乞屯城。是月。高麗弑其王安。又聞。日本天皇及太子・皇子、倶崩薨。由此而言。辛亥之歳当二十五年矣。後勘校者、知之也。
서기 531년 백제군은 진주를 돌파하고 아라국(함안)에 진출하여 걸둔성(乞屯城)을 쌓고 아라국의 궁성이 있던 현 함안군 가야읍을 위협한다. 걸둔성의 위치는 아직 확인된 바 없으나 함안군 방어산(532m)이 유력한 후보지이다. 방어산이 시작되는 남강가에 가덕마을이 있다. 백제군이 가야읍으로 진군하는 길목이다.
일본서기는 케이타이(繼體)기에서 백제가 임나 4현에서 시작하여 기문, 타사 그리고 가라의 다사진으로 진출하는 것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마지막 기록이 531년 3월 아라의 걸둔성으로 진출하여 성을 쌓았다 (大歳辛亥三月。師進至于安羅営乞屯城), 그리고 일본의 천황 황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는 기사이다. 후세에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는 수수께끼같은 언사와 함께.
곧이 곧대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오호토모 카나무라는 열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케이타이 천황은 실권이 없었다. 백제는 열도를 다시 서기 479년 이전의 왜왕무의 나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고 카나무라는 믿었다. 무령왕의 특사들이 504년 부터 야마토에 들어 와 열도를 왜왕무에게 돌려 달라고 압박하지만 케이타이를 황위에 세우고 버틴 것은 백제가 열도를 위협할 수준의 국력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임나 4현을 회복하고 기문과 타사를 빼앗고 가라의 다사진으로 진출하였다. 드디어 아라의 걸둔성에서 아라를 위협하는 싯점까지 중계방송하듯 백제의 진출을 기록하던 일본서기는 서기 531년 천황 황태자 황자가 모두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시대가 바뀐다. 새로 등장하는 안칸, 센카 그리고 킨메이천황은 케이타이의 아들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따져 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서기 531년 오호토모 카나무라는 백제의 힘을 확인하고 백제의 특사들에게 굴복하였다. 무령왕이 보낸 특사들이 열도의 권력을 승계한다. 그리고 열도에 혁명적인 변혁의 바람이 분다. 그 동안 백제의 허락없이 취득한 모든 재산이 몰수된다. 안칸과 센카는 8년 간 과도기의 일본열도를 통치하면서 열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산몰수를 단행하였다.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몰락한 남가라는 서기 532년 신라의 무력시위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법흥왕 19년 (532년)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비(妃) 및 세 아들 즉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무덕(武德), 세째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은 이들을 예로 대하고 상등(上等)의 위(位)로 주고 본국으로 식음을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武力)은 벼슬이 각간(角干)에까지 이르렀다. 신라는 이들을 즉시 타지로 옮겨 살게하고 김해지역을 직접 관리하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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