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1일 수요일

72. 미야누시야카히메 (宮主宅媛)

중국의 사서에 일본열도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 신비의 4 세기에 열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다건너 백제에서 서기 346년 즉위한 근초고왕은 백제역사상 최초로 중국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왕이다. 서기 372년 백제가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동진(東晋)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동진은 백제왕 여구(근초고왕)를 진동장군영낙랑태수로 제수한다는 기사가 진서 간문제기(晉書 簡文帝紀)에 나온다. (咸安二年 春正月 百濟 林邑王 各遣使貢方物 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 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 ). 그후 백제의 동진에 대한 조공은 몇 차례나 계속되었고 침류왕(枕流王) 원년에 동진에서 불교가 들어왔다. 서기 1984년 서울대 박물관의 석촌동 3호분 발굴조사에서 중국동진(中國東晉)시대의 청자 반구호 구연부편(盤口壺口緣部片)이 출토되어 석촌동 3호분이 근초고왕(346 – 375 재위) 의 무덤으로 비정되기도 하였다.

4세기의 백제는 비류왕 (서기 304 – 344 재위), 계왕 (344 – 346), 근초고왕 (346 – 375), 근구수왕(375 – 384), 침류왕(384 – 385), 진사왕(385 – 392), 아신왕(392 – 405), 전지왕(405 – 420)의 순서로 왕위를 잇는다. 이 기간 일본열도는 스진(崇神) – 케이코(景行) – 세이무(成務) – 쥬아이(仲哀) – 진구우(神功) – 오우진(應神) – 닌토쿠(仁德)의 순이다. 일본서기는 스이닌(垂仁)을 스진(崇神) 다음 세대로 배치하였으나 스이닌은 스진보다 앞 선 세대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기년(紀年)의 개념이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주변국과의 외교기사를 보고 단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밖에 없다.
이 무렵 케이코(景行) – 세이무(成務) – 쥬아이(仲哀) – 진구우(神功) – 오우진(應神) – 닌토쿠(仁德)의 6대의 천황을 모신 것으로 기록된 타케시우찌노 스쿠네(武内宿禰)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서기 케이코(景行) 3년조에 그의 탄생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고 마지막 기사가 닌토쿠(仁德) 50년에 나온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케이코(景行) 3년과 닌토쿠(仁德) 50년이 서력으로 몇년에 해당하는지 보증할 권위를 갖는자료가 부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정사(正史)라고 믿고 있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현 주소이다.

일본서기는 각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에 의거하여 타케시우찌(武内)의 수명을 계산하면 287년이 된다. 닌토쿠(仁德) 50년의 기사는 “야마토에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는데 집안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대 생각은 어떤가?” 하고 천황이 묻는 내용이므로 타케시우치는 그 보다 더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타케시우찌는 287년 이상 살았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타케시우찌는 가공된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시간을 재는 기년(紀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타케시우찌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무렵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합산하면 스진(崇神) 68년, 케이코(景行) 60년, 세이무(成務) 60년, 쥬아이(仲哀) 9년, 진구우(神功) 69년, 오우진(應神) 41년, 닌토쿠(仁德) 87년 등으로 총394년이 된다. 1 세기 정도의 시간이 4 배로 부풀려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69. 부여의 엑소더스” 편에서 부여의 의라왕(依羅王)이 일본열도을 장악하고 스진(崇神) 천황으로 기록된 것을 서기 300년, 그가 다시 케이코(景行)에게 패하여 사망한 것을 서기 318년(무인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케이코(景行) 원년을 서기 319년으로 친다.

일본서기는 타케시우찌를 코우겐(孝元)천황의 증손으로 고사기는 손자로 기술하여 1 세대의 편차를 보인다. 타케시우찌는 세이무(成務)와 같은 날 태어나서 세이무와 특별한 관계였다 하니 세이무와 동갑내기라고 볼 수 있다. 타케시우찌의 4명의 아들들은 서기 392년 야마토의 장군의 반열에 올라 백제의 아신왕을 즉위시키고 진사왕을 야마토로 압송하였다. 4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을 이 때 45세 정도로 보면 서기 347년 경 출생한 셈이 된다. 타케시우찌가 장남을 20세에 보았다면 타케시우치의 출생은 서기 327년 경이다. 세이무(成務)천황 또한 이 무렵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고사기는 세이무(成務)와 쥬아이(仲哀)가 사망한 간지를 각각 을묘와 임술년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서기 355년과 362년에 해당하며 사실과 부합되는 정보로 보인다. 다만 붕어년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우리는 그들이 권좌에서 물러난 해로 이해한다.

진무(神武)에서 겐쇼(元正)천황까지 일본천황의 한풍시호는 일본서기가 완성된 이후에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 – 785)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슬픈 이름을 받은 쥬아이(仲哀)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 대부분의 천황에게 60여년의 넉넉한 재위기간을 할해한 일본서기가 그에게 부여한 재위기간은 겨우 9년이다. 또 모든 천황들의 궁이 야마토나 카와치(河內)에 있었는데 쥬아이는 재위 9년 가운데 6년을 야마쿠치현(山口縣) 아나토(穴門)의 토유라(豊浦)궁에서 보냈다. 일본서기는 왜 그가 서울을 떠나 궁벽한 한촌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 시대 열도의 명실상부한 주역은 일본서기가 기록한 야마토 타케루노 미코토 (日本武尊)와 오우진(應神)천황 그리고 그의 비(妃)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이며 백제의 주역은 근초고왕과 귀수(貴須 또는 貴首)왕자였다. 우리는 근초고왕의 생몰년을 서기 295 – 374년으로 귀수왕자를 서기 320 – 394년으로 본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이 시대의 인물로 세이무(成務), 쥬아이(仲哀), 진구우(神功)황후가 등장한다. 일본열도의 세이무(成務), 쥬아이(仲哀), 진구우(神功)가 근초고왕과 귀수왕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세이무는 케이코천황의 아들이며 쥬아이는 야마토 타케루의 아들이다. 세이무와 쥬아이는 동년배의 비슷한 나이이며 진구우로 그려진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氣長足姬)는 이들보다 10여 년 젊은 나이일 것이다.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는 쥬아이(仲哀)의 황후이며 오우진(應神)의 어머니라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녀는 서기 363년 12월 쯔쿠지(筑紫)의 우미신궁(宇美 神宮)에서 오우진(應神)천황을 출산하였다. 그 때 그녀의 나이를 26세 정도로 보면 그녀는 서기 337년 출생한 셈이다. 이 기사를 근거로 오우진(應神)천황의 즉위연대를 4세기 말로 비정하는 역사가들이 많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사는 황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가공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오우진(應神)천황의 비(妃)가운데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가 있다. 고사기는 와니(丸邇)의 히후레노 오호미 (比布礼能意富美)의 딸 미야누시 야카하에히메 (宮主矢河枝比売)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宇遅能和紀郎子)를 낳았다고 했다. 일본서기는 와니노오미(和珥臣)의 조선(祖先),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의 딸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 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황자를 낳았다고 기록했다. 고사기는 오우진(應神)천황이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어느 때 천황이 찌카쯔 아후미노 쿠니 (近淡海国)에 넘어 가려고 우지노(宇遅野) 주변에 서서 카즈노(葛野)를 바라보며 “카즈노를 바라보니 넉넉하게 사는 민가의 정원이 보이네. 풍요로운 나라의 모습이 보이네.”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코하타노 무라 (木幡村)에 왔을 때 십자로에서 빼어난 미모의 처자와 마주쳤다. 천황이 처자에게 누구의 딸이냐고 물으니 “와니(丸邇)의 히후레노 오호미 (比布礼能意富美)의 딸로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하에 히메 (宮主矢河枝比売)라 하나이다.” 라 하였다. 천황이 “내일 돌아 오는 길에 너의 집에 들리겠다.”하고 길을 떠났다. 야카하에 히메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전하자 “천황에 틀림없다. 받들어 모셔야 한다.”하며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고 기다리니 이튿 날 천황이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큰 잔치가 벌어지고 야카하에히메의 큰 술잔을 받은 천황이 흥에 겨워 노래하였다.

“이 이쁜 게(蟹)야! 어디서 온 게(蟹)냐? 머나 먼 쯔누가(角鹿)에서 온게(蟹)다. 옆으로 기어서 어디로 가느냐? 이찌지시마 (伊知遅島)나 미시마(美島)에 닿는다. 거기 사는 물새가 잠수하거나 밖에 나와 숨을 쉬듯 기복이 있는 사사나미(佐佐那美) 의 길을 가다 코하타(木幡)의 길에서 마주친 처자여. 뒷 모습은 방패와 같이 날렵하고 치열은 잣나무 씨알처럼 고르고 희구나. 이찌히이(櫟井)의 와니사(丸邇坂)의 흙을, 표면의 흙은 너무 연하고 깊은 곳의 흙은 너무 진하여 가운데 흙을 골라 불에 직접 닿지않게 만든 물감으로 이마를 그리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비너스같은 여인이여! 이렇게 하고 싶다 또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여인을 마주하고 있다. 가까이 하고 있다.”

오우진(應神)천황이 소년처럼 즐겨워 하던 때는 서기 362년 경이며 오우진(應神)이 42세, 야카하에히메 26세 정도였다고 본다. 이렇게 혼인하여 생긴 황자(御子) 우지노 와키 이라쯔코(宇遅能和紀郎子)가 서기 363년 12월 쯔쿠지(筑紫)의 우미신궁 (宇美 神宮)에서 태어났다.

신비의 4세기에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오우진(應神)천황을 기쁘게 한 미모의 후궁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의 아버지를 와니(和珥)씨의 조(祖),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라 기록했다. 히후레노 오미는 이 기록뿐이며 모계에 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사기의 쥬아이(仲哀)조에 카고사카왕 (香坂王)과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역을 진압하는 기사가 있다. 거기서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息長帯日売)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 장군이 와니노 오미(丸邇臣)의 조(祖)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이다. 타케후루쿠마 (建振熊)장군과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는 동일인물이다.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는 장군의 딸이었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 추 7월 천황은 사도장군(四道将軍)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사도장군의 한 사람인 오호히코(大彦)의 군세가 와니고개(和珥坂, 天理市和珥)를 넘을 때 일족의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황은 오호히코(大彦)와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를 야마시로(山背)에 파견하여 하니야스비코(埴安彦)를 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와니고개(和珥坂)를 넘어 정예군을 이끌고 나라산(那羅山, 奈良市北部 丘陵)에 올라 싸웠다. 그리고 와카라강(輪韓河, 木津川)까지 진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하니야스비코 (埴安彦) 군과 대치한다. 양군이 키즈강 (木津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하니야스비코(埴安彦)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의 군세를 바라보며 “왜 너는 군세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느냐?”하고 물었다.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너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자(者)다. 너는 제사권(祭祀権)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관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온 것이다. 이는 천황의 명령이다.”라 대답했다. 그래서 신(神)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활을 쏘았는데 맞지 않았다. 다음에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활을 쏘자 가슴에 명중하여 하니야스비코 (埴安彦)가 죽었다. 이것을 본 적군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관군은 강을 건너 북쪽의 적을 쳐부수고 반 이상의 목을 베었다.

여기 등장하는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는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의 할아버지이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의 윗 기사는 사실은 스진시대의 일이 아니라 스진의 아버지 부여의 의려왕(依慮王)이 열도에 들어 와 기존의 왕조와 싸우는 전쟁이다. 의려(依慮)의 공격을 받은 기존왕조는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쪽과 항복하자는 쪽으로 갈라져 형제간의 골육상쟁에 돌입한다. 서기 287년 의려(依慮)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야마토의 코우레이 (孝靈) 천황이 되었다.

하니야스비코(埴安彦)와 오호히코(大彦)는 둘 다 코오겐(孝元)천황의 아들이다. 오호히코(大彦)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는 부여의 의려왕(依慮王)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였고 하니야스비코(埴安彦)는 외적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서기 354년경 쥬아이(仲哀)조의 카고사카왕 (香坂王)과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역을 진압하는 전쟁터와 서기 287년 타케하니야스비코의 반역을 토벌하는 전쟁터가 와니고개, 야마시로(山背), 키즈강(木津川), 우지노(宇遅野) 등으로 현재의 야마시로(山城, 京都府 南部)지역에 해당된다. 서기 287년 전쟁은 할아버지가, 쥬아이조의 반역을 평정하는 전쟁은 그 손자가 맡았다. 여기 등장하는 우지(宇遅)지역은 야카히메의 조상들이 웅거하고 있던 땅이며 오우진과 야카히메사이에서 태어난 우지노 와키 이라쯔코(宇遅能和紀郎子)의 이름에 붙은 우지(宇遅)가 바로 이곳이다.

일본서기 케이코(景行) 58년 봄 2월 천황이 아후미노 쿠니(近江國, 현 滋賀縣)에 가서 아나호(穴穗, 현 오오즈(大津)시 아노오 (穴太))의 저택에 잠시 머물렀다. 그로부터 2년 후 케이코천황은 그 저택에서 사망했고 이어서 그의 아들 세이무(成務)가 아후미(近江)의 타카아나호노 미야(高穴穗宮)에서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建內宿禰)를 대신(大臣)으로 하고 크고 작은 나라의 경계와 쿠니노 미야스코(國造)을 정하고, 지방의 현(縣)과 현주(縣主)도 정하였다.

고사기는 케이코(景行)천황이 기록에 남은 아들만 해도 21명, 기록되지 않은 아들이 59명 도합 8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했다. 스진천황에게 빼앗긴 열도를 탈환하기 위하여 백제에서 파견된 왕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의 말년 일본열도에 그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분할하여 후세들에게 나누어 통치하도록 한 것 같다. 소위 분봉정책이다. 그 자신의 후계자인 세이무(成務)는 아후미노 쿠니(近江國) 즉 현 시가현 (滋賀縣)을 맡고 야마토 타케루의 아들 쥬아이(仲哀)는 야마토를 분봉받았다. 그런데 야마토 타케루가 역사기록과 달리 케이코(景行) 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당시 백제 비류왕의 아들이다. 케이코(景行) 말년 쥬아이(仲哀)가 야마토를 맡았다는 것은 야마토 타케루의 영향력이 케이코천황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서기 344년 케이코(景行)천황이 사망한다. 세이무(成務)와 쥬아이(仲哀)는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경쟁관계이다. 세이무는 오호미의 왕, 쥬아이는 야마토의 왕이다. 야마시로(山城)라는 땅은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낀 땅이다.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氣長足姬)의 조상들의 근거지가 이 지방이며 아후미(近江)의 타카아나호노 미야 (高穴穗宮)에서 멀지 않는 곳이다. 역사는 그녀를 쥬아이(仲哀)의 황후라고 기록했으나 우리는 그녀가 세이무 (成務)의 아내였다고 믿는다. 역사를 기록할 때 진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세이무와 쥬아이를 바꿔 기록했다고 본다. 가장 강력한 근거가 이들의 무덤의 위치이다. 진구우와 세이무는 지하에 나란히 누워 있다. 여러 번 결혼한 여인이 죽으면 첫 남자의 무덤 옆에 묻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

그러면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란 무었이었을까? 그만큼 은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의 진구우 – 오우진 시대에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왕래는 눈 부신 데가 있다. 우리는 그 눈 부신 교류의 기록을 일관된 권력의지의 산물로 이해한다. 권력의지의 주체는 백제의 귀수왕자와 열도의 미야누시 야카히메이다. 귀수왕자의 또 다른 얼굴이 오우진(應神)이며 그는 쥬아이의 형이다. 일본서기가 그토록 감추고자 한 것이 그의 진면목인 것이다. 열도의 야마토 타케루는 서기 34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되었고 귀수왕자는 바로 그의 아들이다.
 
경쟁관계인 세이무와 쥬아이간의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 일본서기 쥬아이조에 적혀있다. 코시노쿠니(越國, 현 후쿠이현)에서 쥬아이에게 헌상하는 백조(白鳥)가 야마시로(山城) 우지강(菟道河)에 왔을 때 훼방꾼이 나타나 헌상품인 백조를 훼손한다. 쥬아이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쥬아이는 군사를 보내 범인을 찾아 처형한다. 자기의 영토에서 벌어진 쥬아이의 군사행동에 대해서 세이무가 항의한다. 이렇게 시작되어 서기 354년경 전면전으로 발전한다. 이 전쟁을 지휘했던 장군이 다름아닌 와니노 오미(丸邇臣)의 조(祖)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이며 그가 이 장의 주인공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부친이다.

일본서기 진구우 섭정 1년 3월 쥬아이의 왕자 카고사카왕(鹿坂王)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란기사가 이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 전쟁이 바로 야마시로(山城)의 우지강(菟道河)에서 벌어지고 반란의 주모자 오시쿠마왕 (忍熊王)은 아후미(淡海)의 세타목(瀬田済)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수일 후 그의 시체가 우지강( 菟道河)에서 발견되었다.

쥬아이의 주력부대를 야마시로에서 궤멸시킨 뒤 세이무의 군대는 야마토를 접수한다. 서기 355년 쥬아이는 오오사카를 버리고 야마쿠치현의 토유라즈(豊浦津)로 도망간다. 거기서 그는 아나토노 토유라궁 (穴門豊浦宮)을 짓고 6년을 보낸다. 이것이 쥬아이천황이 아나토(穴門, 현 시모노세키 근방)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낸 이유이다.

고사기가 세이무와 쥬아이의 사망연대를 서기 355년과 362년으로 기록하였다. 서기 355년(을묘) 쥬아이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을 세이무가 사망한 것으로 또 세이무가 서기 362년(임술) 권좌에서 물러난 것을 쥬아이가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더 나아가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의 남편 또한 세이무에서 쥬아이로 바꿔버렸다.

쥬아이가 시모노세키를 피난처로 선택한 것은 백제의 도움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백제로 탈출하기 쉽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제왕이 누구인가? 바로 쥬아이의 아버지가 아닌가? 쥬아이는 아나토의 피난처에서 세이무에게 저항하였으므로 세이무는 그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움직인 것이 서기 360년경이다. 이 전쟁에 세이무와 동행한 것이 그의 비(妃)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였다. 그녀는 당시의 전쟁영웅 타케후루쿠마 (建振熊)의 딸이다.

일본서기 쥬아이 2년 7월 5일 오키나가 타라시히메가 토유라즈(豊浦津)에 도착했다. 그날 두 사람은 해안을 산보하다 황후가 여의주(如意珠)를 손에 넣었다. 이 문장을 삽입하여 오키나가 타라시히메가 장차 고귀한 운명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일본서기 저자들은 암시한다. (仲哀天皇二年 秋七月辛亥朔乙卯 皇后泊豊浦津 是日 皇后得如意珠於海中)

쥬아이가 6년간 기거하던 아나토노 토유라궁 (穴門豊浦宮)를 버리고 쯔쿠지(筑紫)의 나가아가타(儺県, 博多湾岸)로 도망가서 카시이궁(橿日宮, 福岡市 香椎)에 머물렀다. 세이무의 추격이 계속되고 큐우슈우 전체가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큐우슈우의 각 나라들도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쥬아이 8년 9월 천황은 카시이궁에서 신하들과 쿠마소(熊襲) 토벌에 관해 협의 한다. 그 때 황후가 귀신에 씌어 “쿠마소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그보다 신라(新羅)라는 보물로 가득 찬 땅이 있지 않느냐? 그 곳을 쳐라. 그러면 쿠마소는 저절로 복종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쿠마소 정벌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5일 천황은 신의 저주로 급사했다.

위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쥬아이의 기사로 취급되고 있지만 세이무에 관한 기사로 읽어야 된다. 이 무렵의 역사기록에 신(神)과 신탁(神託)의 출현이 빈번해 진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대의 주인공들의 시호에 신(神)이라는 글자가 붙여진다. 오우진(應神)과 진구우(神功)가 그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귀신을 의미할까? 아니면 지금 일본열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가진 인간 누군가를 의미할까? 서기 360년 귀수 왕자 40세, 세이무 33세, 쥬아이 33세,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24세 무렵으로 본다.

쿠마소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는 신탁은 백제의 귀수왕자가 세이무에게 보내는 경고이다. 열도에서 집안 사람들 끼리 싸울 힘이 있거든 그 힘을 차라리 신라를 치는데 써라. 그러나 세이무는 귀수왕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귀수왕자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귀수는 백제의 군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열도내의 쿠니노미야스코 (國造)들을 동원하여 세이무를 제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귀수왕자를 도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3년 등장하는 모로가타노 키미(諸県君) 우시모로이(牛諸井)이다. 그는 히무카노 쿠니(日向国, 九州南部 현 미야자키현)의 대호족으로 그의 딸 카미나가히메 (髪長媛)가 닌토쿠(仁德)의 비가 되었다. 일설에는 히무카(日向)의 모로가타노 키미(諸県君)는 노령으로 조정에 출사할 수 없게 되어 귀국하였고 대신 카미나가히메 (髪長媛)를 봉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그는 당시 야마토의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의 귀신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과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이다. 귀수(貴須)를 뒤집으면 수귀(須貴)가 되고 이것을 다시 주길(住吉)로 기록하여 귀수왕자를 의미한다. 스미요시 삼신은 소코쯔쯔노오 (底筒男命), 나카쯔쯔노오 (中筒男命), 우와쯔쯔노오 (表筒男命)의 총칭이며 스미요시의 신들은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스미요시대사 신대기 (住吉大社神代記)는 옛부터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에 전래해 온 유래를 기술한 고전적(古典籍)인 데 신대기(神代記)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전승은 진구우황후 (神功皇后)와 관련된 것으로 진구우황후(神功皇后)가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과 밀사(密事)가 있었고, 속된 표현으로 부부관계였다고 적혀있다.

우리는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을 백제에서 귀수와 동행한 용맹한 3명의 장군들로 본다. 귀수왕자는 일거에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야마토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세이무는 서기 362년 항복하였고 귀수왕자(스미요시대신)는 세이무를 비롯한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타케시우찌노 스쿠네등의 거취를 결정하였다. 이 때 귀수왕자는 소문으로만 듣던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를 처음 면담하였다. 고사기는 그녀를 직접 면담한 그가 어떤 결정을 하였는지 자세히 기록하였다. 타케시우찌는 세이무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였으므로 새로운 정권에서 등용하기 거북한 사람이었다. 타케시우찌가 새로운 정권에 충성할 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9년의 타케시우찌의 위기라는 기사는 타케시우찌가 새로운 정부의 검증을 무사히 통과하여 스미요시 대신의 신임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서기 362년 세이무를 퇴위시키고 일본열도는 귀수왕자의 통치 아래 들어가며 이 때부터 그는 오우진(應神)천황으로 기록된다. 이 무렵 전쟁 포로로 잡혀있던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를 방면하여 자기의 비(妃)로 만들고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히메로 바꾸었다. 이 여인을 얻고 기뻐 하는 모습을 고사기가 문학적으로 묘사한 것을 위에서 보았다. 스미요시대사 신대기 (住吉大社神代記)의 기록은 그리하여 역사적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진구우황후 (神功皇后)가 오우진(應神)의 어머니라는 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집자들의 최대의 승부수였다. 이것을 뒤 집을 역사적 자료가 혹시 오우진(應神)이나 진구우황후 (神功皇后)의 무덤 속에서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 황실은 영혼의 평안을 헤치면 안 된다면서 결사적으로 천황들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다.
 
서기 363년 오우진(應神)천황은 최고의 전리품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데리고 백제의 수도 (漢山 또는 漢田)를 방문하여 근초고왕에게 새 며느리를 인사시켰을 것이다. 백제의 수도 한전(漢田)에서 오우진의 또 다른 이름 호무다(譽田)가 나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이 해 12월 백제에서 돌아오던 길에 쯔쿠지(筑紫)의 우미(宇美) 신궁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 아들이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363 – 422)이다. 일본서기는 이 아들이 오우진(應神)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감추고 혈통을 바꾸며 소설을 쓰면서 감추고자 하였던 귀신은 귀수(貴須)였고 오우진(應神)이었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6년부터 백제와의 통교(通交)가 시작되는 외교기사가 모여있다. 가장 먼저 백제의 3명의 장군들의 이름이 나온다. 46년 춘3월 시마노 스쿠네 (斯摩宿禰)를 토쿠준노 쿠니(卓淳国)에 파견했다. 시마노 스쿠네(斯摩宿禰)는 어느 씨족의 사람인지 모른다고 한다. 토쿠쥰(卓淳)의 왕 마키무칸키(末錦旱岐)가 시마노 스쿠네에게 “ 2년 전의 7월 백제의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이 방문하였을 때 동방의 야마토에 강대한 국가가 새로 생겼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고 바다를 건너야 되므로 통교를 요구할 수 없었다.” 이를 들은 시마노 스쿠네는 종자의 니하야(爾波移)와 토쿠준(卓淳)의 와코(過去)의 2인을 백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이를 환영하며 니하야에게 비단과 화살, 40매의 철연(鉄延)을 주며 “이후로 교류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백제의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은 귀수왕자의 휘하장군으로 보이며 이들은 서기 369년부터 시작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서기 360년경 이들은 귀수왕자와 함께 열도의 내란을 평정하고 역사에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으로 신격화되어 기록되었을 것이다. 스미요시 삼신이란 귀수의 3 장군이란 뜻이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7 년 백제의 왕이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을 파견하여 조공했다. 이 때 신라의 사신도 쿠테이(久低)등과 동행했다. 황태후(皇太后)와 호무타와케(誉田別) 황자가 크게 기뻐하며 “쥬아이(仲哀) 천황이 살아 계셨다면 크게 기뻐하셨을 텐데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호족들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헌데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해 보니 신라의 공물이 많고 진기한 반면 백제의 것은 양도 적고 보잘 것 없었다. 쿠테이(久低) 등에게 이유를 묻자 “저희들이 사히노 시라기 (沙比新羅)에 도착했을 때 신라인들은 우리를 체포하고 3개월 간 감금하였읍니다. 저주를 입에 담았으므로 죽이지는 않았으나 우리들의 공물을 몰수하고 신라의 보잘 것 없는 공물과 바꿔치기 하였읍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를 발설하면 귀환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였읍니다.”하고 대답했다.

황태후와 호무타와케 (誉田別)황자는 신라의 사자를 꾸짖고 진위를 판단하기 위하여 천신(天神)에게 점궤를 물었다. 그리하여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内宿禰)와 협의하여 찌쿠마노나가히코 (千熊長彦)를 사자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신라가 백제의 공물을 탈취하였음이 사실로 밝혀져 이를 꾸짖었다.

위의 기사에서 또 다시 천신(天神)에게 점궤를 물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제는 누구의 눈에도 이 천신(天神)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확실하다. 황태후란 진구우(神功)황후, 호무타와케(誉田別) 황자란 오우진(應神)이라고 일본서기는 주장하나 우리는 황태후란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 황자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천신(天神)이란 귀수왕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부분의 역사를 해석한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9년 춘 3월의 기사를 우리는 “50. 영산강 유역의 갈등의 역사”에서 다루었다. 서기 369년 진구우 황후의 군사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백제에 주었다는 내용이다. 그 기사에 이어서 칠지도(七枝刀)가 나온다.

여름 5월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가 쿠테이(久低)들과 함께 백제에서 귀환했다. 황태후가 기뻐하며 “바다 건너의 지반도 안정되어 야마토(日本国)에 볼 일도 별로 없을 터인데 어찌 오셨는가?” 라고 묻자 쿠테이(久低)들이 “저희들의 왕은 야마토의 협력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우호를 더욱 깊게 하고자 왔읍니다.”하고 대답했다. 황태후는 “잘 말 해 주었다. 이 쪽도 원 하던 바다.” 라 하며 야마토측의 세력하에 들어 온 타사성(多沙城)을 주어 왕래의 거점으로 삼도록 하였다.

진구우(神功) 51년 춘 3월 백제의 왕이 다시 쿠테이(久低)를 보내 조공했다. 황태후는 태자와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内宿禰)에게 “백제와의 친교는 기쁜 일이다. 진기한 공물을 차례로 보내주어 나도 잘 쓰고 있다. 내가 죽더라도 우호를 지켜 나가도록…” 하고 말했다. 동년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를 백제국에 파견하여 쿠테이(久低)들을 보냄과 동시 영원의 친교의 뜻을 전했다. 백제의 왕과 왕자는 황송하여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맹세하였다.

진구우(神功) 52년의 가을 9월 쿠테이(久低)들이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와 함께 왔다. 그리고 칠지도(七枝刀), 칠자경 (七子鏡)등 여러가지 보물을 헌상하고 “우리나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일 주일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수원이 나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수원이 있는 코쿠나(谷那)의 철산(鉄山)의 철을 채굴하여 영원히 헌상할 것입니다.” 라는 왕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또 왕은 손자인 토무루왕(枕流王)에게 “내가 교류를 계속해 온 동방의 야마토 (日本国)는 우리나라의 세력확대에 협력하였고 그에 의거하여 지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너도 우호를 중시하고 공물이 끊기지 않도록 하면 내가 죽은 뒤에도 나라는 평안하리라.”라 하였다 한다. 그 뒤로 매년 조공이 이어졌다.

진구우(神功) 55년 백제의 초고왕(肖古王, 근초고, 재위346 –375)이 죽었다.

진구우(神功) 56년 백제의 왕자 귀수(貴須, 近仇首, 재위 375 – 384)가 즉위하였다.

진구우(神功) 64년 백제의 귀수왕이 죽었다. 왕자의 토무루왕(枕流王, 재위 384 – 385)이 즉위하였다.

진구우(神功) 65년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이 죽었다. 왕자의 아화(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의 진사(辰斯, 재위 385 – 392)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고사기의 오진(應神)조에 주목할 만한 기사들이 모여 있다. 이 시대 아마베(海部), 야마베(山部), 야마모리베(山守部), 이세베(伊勢部)를 정했다. 또 쯔루기노 이케(剣池)를 만들었다. 또 신라 사람들이 건너 왔다. 그래서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建内宿禰)가 이들을 인솔하고 쯔쯔미노 이케(堤池)에 사역하여 쿠다라노 이케(百済池)를 만들었다. 또 백제의 국왕 초고왕 (照古王, 근초고)이 암수 한쌍의 말을 아찌키시(阿知吉師)에 딸려 헌상했다. 이 아찌키시(阿知吉師)는 아찌키노 후비토 (阿直史)등의 조(祖), 또 타찌(横刀)와 대경(大鏡)을 헌상했다.

또 백제국에 “ 학문이 높은 분이 있으면 보내라” 하였더니 와니키시(和邇吉師)라는 사람이 백제국에서 왔다. 그가 논어 10권, 천자문 1 권, 총 11권을 가져왔다. 이 와니키시(和爾吉師)는 후미노 오비토(文首)등의 조(祖), 또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 이름은 타쿠소(卓素)와 쿠레하토리(呉服)의 사이소(西素)의 두 사람을 보내왔다.

또 하타노 미야스코(秦造)의 조(祖), 아야노 아타히(漢直)의 조(祖)와 술(酒)을 빚는 전문가(専門の人), 이름이 니호(仁番) 또 다른 이름은 스스코리(須須許理)등이 바다 건너 왔다. 이 스스코리(須須許理)가 오호미키(大御酒)를 빚어 헌상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천황은 즐거워 하였다.

고사기는 기사만을 나열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서기는 몇년 몇월 며칠의 시간개념을 도입하고 있지만 진실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 연기(年紀)나 선후가 제 멋데로 바뀌어 있으므로 해석은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는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4년 춘 2월 백제의 왕이 하타오리(機織)의 마케쯔(真毛津)를 보내왔다. 현 쿠메노 키누누히 (久目衣縫)의 시조이다.

동년 유즈키노 키미(弓月君, 하타(秦)씨의 시조)가 백제에서 건너와, “ 내가 다스리는 120현(百二十県)의 인민을 데려 오고자 하나 신라의 방해로 가라국(加羅国)에 머물러 있읍니다” 라 하였다. 그래서 카쯔라기노 소쯔히코 (葛城襲津彦)를 파견하여 유즈키(弓月)의 인민을 가라(加羅)에 대기시켰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소쯔히코(襲津彦)가 귀환하지 않았다.

오우진(應神) 15년의 추 8월 백제의 왕이 아찌키(阿直岐)를 파견하여 양마 2필(良馬二匹)을 헌상했다. 그래서 아찌키 (阿直岐)로 하여금 카루노사카(軽坂, 橿原市大軽町)의 마굿간에서 사육시키고 그 곳을 우마야사카(厩坂)라 하였다. 아찌키(阿直岐)는 또 문헌에 밝았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의 스승으로 하였다. 천황이 “백제에 그대와 같은 후미요미히토(博士, 글을 아는 자)가 있는가?” 묻자 아찌키가 와니(王仁)라는 자(者)를 추천했다. 그래서 카미쯔케노노 키미(上毛野君)의 조선(祖先)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무나키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 와니(王仁)를 데려 오기로 하였다. 아찌키(阿直岐)는 아찌키노 후비토(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년 춘 2월 와니(王仁)가 왔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의 스승(師匠)으로 하였다. 여러 문헌을 학습하고 다방면의 지식을 공부했다. 와니(王仁)는 후미노 오비토(書首)등의 시조이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조에 오우진이 오호토모와케 (大鞆和気)라고 불린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천황이 태어나기 전 천신지지 (天神地祇)의 보호를 받아 신라원정에 성공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출생했을 때부터 팔의 근육이 토모(鞆)의 형상으로 솟아 있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오호토모와케(大鞆和気)로 불리게 되었다. 토모(鞆)란 일본에서 만든 글자((國字)이며 활을 쏘는 사람의 왼 팔을 보호하도록 가죽으로 만들어 끼는 보호대라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52년과 64년의 기사에 토무루왕(枕流王)이 나온다. 그는 근구수 다음의 15대 침류왕을 뜻하는데 왜 일본서기가 침류(枕流)를 토무루로 읽었는지 설명이 없다. 우리는 이 토무루라는 말이 위의 토모(鞆)에서 온 말이라고 보며 오토모와케란 오우진이 아니라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의 별명이었다고 본다. 서기 384년 근구수왕이 죽고 385년 토무루왕(枕流王)이 즉위했는데 이 토무루왕이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였다.

미야누시 야카히메(宮主宅媛)는 장군의 딸이라 하였다. 그녀 또한 활을 들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여 토모(鞆)를 팔뚝에 끼고 사는 일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왼 팔뚝에 굳은 살이 박히고 그것이 전설이 되어 그녀가 낳은 아들의 팔에 태어 날 때부터 토모(鞆)처럼 굳은 살이 박혀 있어서 오호토모와케로 불렸다 한다. 와니노 오미(和珥臣)의 조선(祖先)의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의 딸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를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서기 384년 침류왕 즉위 기사에서 아이부인 (阿尒夫人)이라 기록했다. 와니부인(和珥夫人, 또는 丸邇夫人)이란 뜻이리라.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6년부터 52년까지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귀수와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잇는 최 측근 참모들이다. 서기 365년부터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백제 출입이 잦아졌을 것이다. 시아버지 근초고왕은 백제의 최고 권력자이다. 오우진(應神)천황에게는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보다 나이 많은 아들들이 즐비하다. 손 위의 형제들을 젖히고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다. 가장 중요한 거점이 근초고왕이었다. 할아버지의 인증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을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모를 리 없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40년 춘정월 천황은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를 불러, “너희들도 자식 이쁜 줄 알게다”라고 말 하니 둘이 함께 대답했다. “예. 알고 있읍니다”. 그러자 천황은 “다 큰 자식과 어린 자식이 있으면 어느 쪽이 더 귀여우냐?” 하고 물었다. 오호야마모리 (大山守)는 “나이 많은 쪽입니다.”하고 답 하였다. 오호사자키 (훗날의 仁德천황)는 천황의 안색을 보고 그 마음 속을 헤아려, “다 큰 자식에게 불안이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러나 어린 자식에게는 여러가지로 신경쓰게 되므로 애정도 더 깊을 것입니다.”라 하니, 천황이 매우 기뻐하며 “그 말이 맞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를 태자로 세우고 싶어서 나이 많은 아들들의 의향을 물어 본 것이다. 같은 달,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를 태자로 정하고, 오호야마모리 (大山守命)에게 산천임야등 국토관리를 맡겼다. 오호사자키(大鷦鷯尊)는 태자의 보좌역을 맡겼다.

할아버지의 인증이 지금 역사의 유물로 남아있다. 서기 368년 우지노와키 이라쯔코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 근초고왕으로부터 왜왕(倭王)의 칭호를 받았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칠지도이다. 칠지도의 명문 “百濟王世子 奇生璽書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은 근초고왕이 다섯 살 된 손자 기생(奇生, 우지노와키의 백제 이름)을 왜왕으로 명한다는 뜻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서기 368년 근초고왕이 31세의 며느리 미야누시 야카히메에게 준 선물이었다. 칠지도가 열도의 미야누시 야카히메에게 전달된 것은 서기 37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서기 368년 이미 왜왕의 공인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우진(應神) 15년의 추 8월 백제의 왕이 아찌키(阿直岐)를 파견하여 양마 2필(良馬二匹)을 헌상했다는 기사는 서기 368년 근초고왕이 손자 왜왕에게 말을 선물로 보낸 것으로 이해한다. 칠지도는 제작하는데 시간이 걸리므로 뭔가 당장 눈에 띄는 표지가 필요하여 말을 골랐을 것이다. 헌데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말을 가지고 온 아찌키가 글을 읽을 수 있는 것 을 알고 아들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아들을 제왕으로 키우기 위하여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기록한 아찌키(阿直岐)와 와니(王仁)의 기사는 아들을 제왕으로 길러 내고자 하는 어머니의 심모원려에 다름 아니다. 그 시대에 백제 최고의 학자를 야마토로 불러 들여 아들의 스승으로 모신다. 아마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는 당대의 권력자들 가운데 최고의 학문을 수학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서기 368년 왜왕으로 임명된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는 열도의 왕이 된 것이며 이 때부터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섭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무렵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시작되면서 백제의 북쪽 국경에 전운이 감돌고 귀수왕자는 백제를 비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우진(應神)천황은 말만 야마토의 왕이지 아버지를 대신하여 백제 방어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근초고왕 73세, 귀수왕자 48세, 미야누시 야카히메 31세, 왜기왕 5세였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조의 기록 가운데 눈에 띄는 기록이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 이름은 타쿠소(卓素)와 쿠레하토리 (呉服)의 사이소(西素)의 두 사람을 보내왔다. 또 술(酒)을 빚는 전문가(専門の人), 이름이 니호(仁番) 또 다른 이름은 스스코리 (須須許理)등이 바다 건너 왔다. 이 스스코리(須須許理)가 오호미키(大御酒)를 빚어 헌상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천황은 즐거워 하였다.” 이다.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는 쇠를 잘 다루는 사람이며 쿠레하토리 (呉服)는 의상의 전문가이다. 또 이들은 양조(釀造) 전문가도 필요로 한 모양이다.  

쇠를 다루는 사람은 무기의 제작과 관련이 있겠지만 당시 일본열도는 이상할 정도로 동경(銅鏡)에의 집착을 보인다. 중국의 한경(漢鏡)은 손에 넣기 힘 들고 값이 너무 비싸 열도에서 동경(銅鏡)의 제작을 시도했을 것이다. 서기 383년 제작된 스다 하찌만 신사의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은 여기 등장하는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의상(衣裳)은 상식적으로 체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상이란 역사적으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분을 구분하기 위하여 발전하였다. 백제에서 의상 전문가를 데려 올 필요를 느낀 열도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차별화할 의상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4년 춘 2월 백제의 왕이 하타오리(機織)의 마케쯔(真毛津)를 보내왔다. 현 쿠메노 키누누히 (久目衣縫)의 시조이다. 하타오리(機織)란 방직(紡織) 기술자이다.

동경(銅鏡), 의상(衣裳), 방직(紡織), 양조(釀造)등의 문화적 취향에 관심을 가졌던 권력자로 우리는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얼굴을 떠 올린다.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서기 368년부터 일본열도의 섭정이었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구수왕자는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필요로 하는 기술자들을 지체없이 보내 주었을 것이다.
서기 375년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이 백제의 귀수왕이 된다. 그리하여 이와레(磐余)의 와카사쿠라노미야 (若櫻宮) 에서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媛) 12세의 왜왕(倭王)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섭정으로서 정사(政事) 돌본다. 오우진(應神)천황이 정무를 보던 가시하라(橿原) 아키라노 미야 (輕嶋之明宮), 이와레(磐余) 와카사쿠라노 미야 (若櫻宮), 왜왕(倭王)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거처 옷사카(忍坂)궁이 모두 현재의 사쿠라이 (櫻井)시와 카시하라(橿原)시로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13 2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內宿禰)에게 명하여 태자를 쯔누가 (角鹿, 福井縣 쯔루가 (敦賀)) 케히대신(笥飯大神)에게 참배시켰다. 같은 , 태자가 돌아왔다. 황태후는 연회를 베풀어 태자에게 술을 따라 주며 한다. “ 술은 내가 빚은 아니라 술을 전문으로 빚는 스쿠나 미카미 (少御神) 머나 곳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빚어 보낸 술이니라. 들거라옆에 있던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內宿禰) 태자를 대신하여 술을 빚은 분은 절구(臼)대신 (鼓) 둥둥 치면서 빚었을 겁니다. 술의 풍부한 맛을 보면 압니다. ! 드십시요.” 하고 거들고 나섰다.

위의 기사를 일본에서는 오우진(應神)천황의 성인의례(成人儀禮) 때의 일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우진(應神)천황은 백제의 근구수왕이었으며 왜기왕의 성인식에 축하의 술을 보낸 것이다. “스쿠나 미카미 (須久那御神)” 스쿠나란 귀수왕의 수귀(須貴) 뜻하며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 스미요시(住吉) 같은 의미로 썼다. 우리는 위의 기사가 서기 379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16세가 되어 성인식을 치른 일로 본다. 위의 진구우(神功)황후의 언급은 백제 땅에서 아버지가 너의 성인식을 축하해서 보내주신 술이니 들고 기뻐 하여라라는 의미가 된다. (구자일 설). 이 타케시우찌노 스쿠네의 나이 52, 귀수왕 59, 미야누시 야카히메 42, 왜기왕 16세였다.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밑으로 딸을 낳았는데 ( 가운데 야타노 이라쯔메가 훗날 닌토쿠의 황후가 되었다.) 서기 365 이후 귀수왕자는 주욱 백제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백제 나들이가 빈번하였을 것으로 상정할 있다. 쯔쿠시(筑紫)지역에 전해오는 진구우 황후의 많은 전승은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잦은 백제 나들이의 파편들일 것이다.

서기 384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다. 백제의 귀수왕이 죽고 다음 침류왕이 즉위하였다. 우리는 왜왕이 21세가 되자 백제와 야마토를 부자간에 바꾸었다고 본다. 그와 관련된 역사를 해석한 것이 “56.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 이다. 오우진(應神) 64, 미아누시 야카히메 47, 토무루왕 21세였다.

백제에서 돌아 오우진(應神)천황은 일단 수도를 카시하라(橿原)에서 카와치(河內) 옮긴다. 카시하라(橿原) 가루시마노 아키라노 미야 (輕嶋之明宮) 들어 가지 않고 나니와의 오호스미노미야(大隅宮, 大阪市)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진구우(神功) 65 (서기 385)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 죽었다. 왕자의 아화(阿花) 연소하여 숙부의 진사(辰斯, 재위 385 – 392)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숙부 진사(辰斯) 실제 모습이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이다. 오우진 (應神)천황이 서기 368년 후계자로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지명할 때부터 염려하던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보다 16 – 17 나이많은 형이다.

서기 385 중국대륙은 2 전의 비수대전(淝水大戰))으로 전진(前秦) 부견(符堅) 몰락하고 군웅할거의 혼란속에 빠져든다. 침류왕의 중국파병과 관련된 역사적 자료는 알려진게 없다. 아마 근초고왕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동진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파병은 시급하게 이루어졌던 모양으로 당시 14세였던 동생 아화(阿花, 아신왕) 왕으로 남기고 부랴부랴 대륙에 건너 갔다.

대륙에 건너 간 백제인들은 100년이 지난 백제의 동성왕 시절 본국과 협력하여 대륙에 백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서기 488 화북지역의 패자 북위는 대륙의 백제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자치통감은 백제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화북 지역의 패자(覇者)였던 북위(北魏) 침략을 물리친 전쟁을북위(北魏)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배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西), 진평(晉平) 2 (郡) 차지하고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권력의 진공상태를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탈취하여 진사왕(辰斯王) 되었는데 역사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진사왕(辰斯王) “57.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의 왕자의 에서 이미 다루었다.

진구우(神功) 69 (서기 389) 4 황태후가 와카사쿠라노 미야(稚桜宮)에서 죽었다. 서기 389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사망기사는 역사적 진실로 보인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3 (서기 385) 백제의 진사왕(辰斯王) 즉위했다. 서기 392 카시코키쿠니(貴国) 천황(貴須) 에게 실례(失禮) 범했으므로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 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하노 스쿠네(石川宿禰), 쯔쿠노 스쿠네(木菟宿禰) 파견하여 외교자세를 탓하자 백제의 국인(国人)들이 진사왕(辰斯王)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들은 아화왕(阿花王, 17 아신왕, 재위 392 - 405) 즉위시키고 귀환하였다.

서기 392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은 391) 진사왕이 고구려에 패배하자 야마토의 오우진(應神)천황은 야마토의 장군들을 백제에 보내 아들 진사왕(大山守命) 야마토로 귀환시키고 원래데로 아신왕을 복위시킨다. 그로부터 2 서기 394 오우진 천황도 나이 74세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역사의 주역들의 퇴장과 함께 신비의 4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주) 이 글은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을 참조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 내용을 해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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