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인교우(允恭) 5년 추 7월 대지진이 있었다. 지진의 기록이 일본역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인교우(允恭) 5년이 서기 몇 년인지 확인할 기준(Reference)이 없다. 일본은 인교우(允恭) 5년을 서기 416년으로 치고 있다. 인교우(允恭)의 재위를 고진(高珍)이 쯔쿠시(筑紫)의 쿠루메시(久留米市)에 들어 온 서기 410년부터 헤아릴지,
야마토를 정복하고 아스카에서 즉위한 432년부터 헤아릴지 고민해야 된다.
일본은 서기 412년을 인교우(允恭)
원년으로 친다.그러나 일본서기의 연대는 자의적으로 기록되어 역사의 연대를 헤아리는
기준(Reference)으로 쓸 수 없다. 일본서기의 윤공
5년이 서기 몇 년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뜻이다.
서기 438년 송서(宋書)에 왜왕 찬(讚)이 죽고 동생 진(珍)이 왕이 되었다. 왜왕 진(珍),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서기 443년 송서에 왜왕 제(濟),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42년 (서기 453) 춘정월 천황이 사망했다. 헌데 신라의 왕이
천황의 붕어소식을 듣고 놀라, 조공선 80척의 선단에 악단원을 태워
파견하였다. 이들이 쯔시마( 對馬)에 정박하여 호읍하고 쯔쿠시(筑紫)에 도착하자 또 호곡하였다.
나니와(難波)에 닿자 하얀 마포 옷을 입고
많은 헌상품을 나르고, 여러가지 악기를 안은 채 나니와(難波)에서 서울까지 울며 연주하며 행진하여 빈소에 참례하였다. 겨울 10월 천황을 장사지내고 11월 신라의 조문단이 귀국하였다.
아나호 천황(穴穗天皇, 安康)은 윤공천황의 두째 아들이다. 서기 453년 겨울
10월 장의가 끝났다.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는 여성문제로 신망을 잃었다.
호족들도 태자를 따르지 않고 모두 아나호 황자의 즉위를 바랐다. 이런 사실을 알고
태자가 선수를 쳐서 아나호 황자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아나호 황자도 군대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이 권력투쟁에서
아나호가 승리하여 키나시노 카루 (木梨輕) 태자가 자살하였다.
그 해 12월 아나호 황자가 나라현(奈良県)
텐리시( 天理市)의 아나호 궁(穴穂宮)에서 즉위하니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인교우(允恭) 4년 (서기 433년 무렵으로 본다) 천황은 “옛적에는 어떤
씨족도 자신의 지반을 지켜, 카바네(姓)가 잘못 됨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즉위하고 나서 호족이 서로 상하를 다투고 치세도 안정되지
않는다. 그동안 실적이 없어 원래의 카바네(姓)를 잃은 자도 있고 남을 속이고 고위의 씨족 이름을 자칭하는 자도 있다. 치세가 안정되지 않는
것은 이런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리라. 나는 박식하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잘못은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호족들은
각자 옳바른 씨성을 보고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모든 씨족들은 쿠카타치(盟神探湯)를 통하여 본래의 신분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쿠카타치(盟神探湯)란 가마솟에 진흙을 물에 섞어
끓인 다음 각자 손을 그 속에 담가 진실을 말 한 사람은 무사하고 가짜는 화상을 입는다고 믿어 사람을 재판하는 고대의 재판 방식이다.
거기 담가서 확인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재판에 질테니 무조건 따를 수 밖에 없는 재판이다. 고대 일본에서 사람의 시비, 정사를 판단하기 위한 주술적인 재판을 말한다. 나라현(奈良県) 아스카 무라(明日香村)에 있는 아마카시노 오카(味橿丘)
에서 모든 고위급 관료들이 이러한 신명재판(神明裁判)에 의하여 새로운 신분을 부여 받았다. 백제출신 호족들을 견제하고 고구려계의 득세를 노린 권력개편인
셈이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카와치의 찌누(茅渟, 大阪市남서부)에 감추어 두고 총애하던 후비,
소토호시노 이라쯔메(衣通郞姬)와 인교우(允恭)의 장자 키나시노 카루(木梨輕)태자의 스캔들을 일본서기는 약간 각색하여 동모형제간의 근친상간으로 바꾸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것이 형제간의 치정보다 더 금기시 된다는 의미이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사태를 깨닫게 되자 태자가 선수를 쳐서 아버지를 독살한다. 인교우(允恭) 24년의 독살기사에 이어
18년을 건너 뛴 다음 42년 천황의 사망기사가 나온다. 서기 453년 1월 인교우 사망, 12월 14일 아나호 (穴穗)황자가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를 제압하고 천황으로
즉위한다.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마치 신라가 야마토 천황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 사람들은 이 기록 그대로를 믿는다. 쯔쿠시(筑紫)의 안라라국(安羅羅國 = 穴穗國)왕 김무(金武)는 인교우(允恭)천황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사람이다. 신라의 의사를
불러 와 인교우(允恭)의 병을 고쳐 준 인연으로 인교우(允恭)는 김무(金武)를 아들처럼 대 하였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사망하자 쯔쿠시(筑紫) 주둔군 사령관,
신라의 장군 김무(金武)가 야마토에 문상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무는 천황 사망의 배후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김무는 문상객으로 위장한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토오쯔 아스카궁 (遠飛鳥宮)에 도착한다.
품 속에 무기를 감추고 구슬픈 장송곡을 연주하면서 상복을 차려 입은 신라의 군사들은 유유히 궁궐에 들어 온 것이다.
이들이 갑자기 군사로 돌변하여 천황 살해범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를 응징하고 야마토를 장악한 뒤 인교우(允恭)의 후계자임을
선언한다. 나중 등장하는 유우랴쿠(雄略)가 이때 35세의 팔팔한 나이였으나 도덕성에서 김무에게 압도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인교우(允恭)가 야마토를 장악하자 인교우(允恭)를 닌토쿠(仁德)의 아들로 기록하듯, 김무도 인교우(允恭)의 아들 아나호(穴穗)황자로 기록되어 야마토의 황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만세일계를 자랑한다. 그로부터 3년 후 서기
456년 8월 안코우(安康)가 살해되고 11월 13일 유우랴쿠(雄略)가 하쯔세노 아사쿠라궁(泊瀨 朝倉宮)에서 즉위한다. 유랴쿠(雄略)는 인교우(允恭)의 친 아들이니 일본이 다시 고구려 세력이
된 것이다.
인교우 치세 서기 440년경부터 백제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의 책임자가 개로왕자였고 그는 당시 왜왕 제(濟)로 행세하였다. 동정모인 55국, 서복중이 66국, 도평해북 95국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송서의 기사가 이 때의 이야기이다. 일본열도의 변두리에서부터 백제의 탈환작전이 전개되고 열도에 두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된다. 서기
443년 왜왕 제(濟)가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받는다. 서기 451년
송은 다시 왜왕 제(濟)에게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한다.
서기 453년 인교우(允恭)사망, 456년 안코우(安康)사망, 그리고 유우랴쿠(雄略)의 시대가 시작된다. 일본에서는 유우랴쿠(雄略)의 시대를 서기 457년 유우랴쿠(雄略)
원년, 서기 479년 유우랴쿠(雄略) 23년으로 기록한 일본서기를 믿고 있다. 일본서기는
유우랴쿠(雄略)가 23년 간 왕위에
있었다고 조작하여 그 동안에 일어난 역사를 그의 치세에 일어 난 일처럼 만든 것이다.
서기 455년 백제의 개로왕자는 백제 21대
개로왕으로 즉위한다. 일본서기 유우랴쿠 2년 추 7월 백제가 천황을 위하여 이케쯔히메 (池津媛)라는 여성을
보냈으나 이 여성이 천황을 싫어하고 이시카하노 타테(石川楯)라는 자와
눈이 맞아 천황이 격노하여 그 남녀를 불에 태워 죽였다.
백제신찬 (百済新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해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은 아레나코(阿禮奴跪)를 파견하여 여자를 구 하였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 챠쿠케이 에하시토(適稽女郎)을 착식(着飾)하여 제출(提出)하였다. 유우랴쿠(雄略)는 백제의 개로왕이 보낸 여자를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한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대동하고
일본 쿄우토(京都) 북부해안 미야즈 (宮津)에 상륙하여 질풍노도처럼 나라분지의 카쯔라기산 (葛城山)까지 밀고 들어 와 유우랴쿠(雄略)와 대치한다. 그는 일본의 방방곡곡의 지리에 밝은 사람이다. 서기 458년 일어난 일이다.
고사기 유우랴쿠 시대의 기록을 보자.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거대한 맷돼지가 나타났다. 천황이
활을 쏘자 맷돼지가 성을 내고 굉음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천황은 겁에 질려 개암나무 위로 뺑소니쳤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4년 추 8월 천황은 요시노미야 (吉野宮)에 가서 그 부근에서 사냥을
하려고 활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부(虻 = 등에)가 천황의 팔을 물었다. 그러자 아키즈(蜻蛉
= 잠자리)가 나타나 아부(등에)를 잡아 먹어 버렸다. 벌레마져도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이니 아키즈(蜻蛉)의 공적을 기려 야마토(倭)란 이름을 아키즈 시마(蜻蛉嶋)로 바꾸노라.
(多古牟良爾 阿牟加岐都岐 曾能阿牟袁 阿岐豆波夜具比 加久能碁登 那爾於波牟登 蘇良美都 夜麻登能久爾袁 阿岐豆志麻登布)
라는 시를 실었다.
위의 신화에서 아부는 유우랴쿠(雄略)의 이름, 유무(幼武)에 대응하고 아키즈로 표현된 세이네이(蜻蛉)는 세이네이(淸寧)와 동일한 발음으로 세이네이천황 (淸寧天皇)
즉 백제의 곤지를 의미한다. 서기 458년
유우랴쿠(雄略)는 곤지를 당하지 못하고 사로 잡힌다. 이리하여 곤지가 일본의 주인이 된다. 야마토의 이름이 아키즈시마 (蜻蛉嶋), 즉 곤지의 섬으로 바뀐다.
또 어느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모든 수행원들이 빨간 허리띠를 메고 파란 옷을 입었다. 그 때 건너 산에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복이나 모양이나 사람들이 천황의 행렬과 꼭 같았다. 거기서 천황이 “야마토에 나 말고 왕이 없는데 거기 가고 있는 것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는
모양도 천황과 똑 같았다. 그래서 천황은 크게 노하여 모두 활을 겨누자 저 쪽에서도 똑 같이 활을 겨누었다.
거기서 천황이 “이름을 대라. 이름이나 알고 싸우자”하니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알려주마. 나는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한 마디로 분별하여 말하는 카쯔라기(葛城)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 이다” 라 하니 천황이 겁에 질려 “알아 모시겠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신령님께서 현세(現世)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읍니다.”라 하며 대어도(大御刀)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 그러자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는 손을 치며 모든 물건을 받았다.
위의 구절을 서기 458년 유우랴쿠(雄略)가 백제의 개로왕과 곤지에게 제압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대어도(大御刀)는 천황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유우랴쿠(雄略)는 이후 퇴위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된다. 유우랴쿠(雄略)의 재위가 23년간이라고 기록되는 것은 역사의 표면에
백제가 드러나는 것을 덮기 위하여 고안된 장치이다. 신화와 역사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강은 넓고도 깊다.
서기 461년 백제의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
개로왕은 동생인 코니키시(軍君)에게 “ 너는
일본에 들어가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곤지(昆支)는 “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읍니다. 다만 국왕의 부인 한 사람을 저와 동행시켜 주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카스리노키시(加須利君)는 임신한 부인을 코니키시에게 맡기며
“ 이 부인은 이미 출산이 가깝다. 혹시 가는 도중 출산하면 어디서든 배에 태워 보내라” 이 부인이 바로 이히토요(飯豊)황녀였다 (구자일 설). 6월 카스리노키시 말데로 부인은 쯔쿠시(筑紫)의 카카라시마(各羅島, 현 加唐島)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세마키미(嶋君)라 지었다.
코니키시(軍君)는 가을 7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서기 461년 곤지의 야마토 입성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호토모노 무로야노 오호무라지 (大伴室屋大連)가
코니키시(軍君)를 맞아 들인다. 세이네이(淸寧)천황이 탄생하고 야마토는 다시 백제의 손에
들어 온 것이다.
같은 달 키비노카미쯔 미찌노 오미 (吉備上道臣)가 야마토의 내란의 소식을 듣고 호시카하 황자에게 가세하기 위하여 40척의 선단을 출발시켰으나
상황이 이미 끝난 것을 알고 철군하였다. 전편의 “62. 고구려산성
코우라산 코우고이시 (高良山神籠石)” 에서 키노죠우 (鬼の城, 오니노키라고도 읽는다)가 거론된 바 있는데 키비노
카미쯔 미찌노 오미 (吉備上道臣)는 오니노키(鬼の城)를 근거로 하는 세력이며 고구려에 충성스런 사람들이니 일본을 탈환하고 있는 백제세력과
전쟁이 불가피하다.
세이네이(淸寧)원년 춘정월 이하레(磐余, 奈良県桜井市・橿原市)의 미카쿠리궁 (甕栗宮)에서 즉위했다. 공로를 인정하여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를 오호무라지(大連)로,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眞鳥)를 오호오미(大臣)로 하여 군신들의 역직을 정하였다.
일본에서는 세이네이(淸寧) 원년을 서기 480년으로 친다. 왜냐하면 유우랴쿠가 서기
457 - 479년까지
23년간 재위한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우랴쿠의
시대를 457 – 458년의 2년 간으로 본다. 서기 461년 곤지가 야마토에 들어
와 세이네이(淸寧) 천황이 되었으며 세이네이(淸寧) 원년은 서기 461년이다. 따라서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기에 들어 있는 이후의
모든 역사적 사실은 세이네이(淸寧) 천황 시대에 생긴 일이 된다.
서기 462년 송서에 왜왕 제(濟)
죽고 세자 흥(興 = 곤지 =
세이네이)을 세우다. 흥(興)이 송에 견사하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는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7년 추 7월 천황은 미모로노 오카 (三諸岳)의 귀신이 보고 싶으니
잡아 오라고 명한다. 신하가 미모로노 오카(三諸岳)에 올라가 큰 뱀을 잡아왔다. 그러나 천황이 몸을 청결하게 씻지 않았으므로 큰 뱀이 굉음을
지르며 눈을 번득였다. 천황은 눈을 마주 바라볼 수도 없어 안으로 피하고 뱀은 산으로 돌려 보냈다.
유우랴쿠(雄略) 7년이면 서기
463년으로 대강 알맞는 타이밍이다. 서기 458년 체포된 유우랴쿠(雄略)는 미에(三重)현 이가시(伊賀市)에 연금되었다. 서기 463년 야마토의 왕 곤지가 유우랴쿠(雄略)를 불러 근황을 물었다. 고구려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협조해 줄 수 있는지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우랴쿠(雄略)는“이 놈아! 날 죽여라” 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대화는 끊기고 유우랴쿠(雄略)는 다시 돌려 보내져 서기
479년까지 유배 상태로 있었다. 서기 479년 곤지와 시마왕이 일본을 떠날 때 그를 살해했을 것이다.
미모로노 오카의 귀신에 이어 유우랴쿠(雄略) 7년 8월 키비노오미(吉備臣)의 모반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키비(吉備)의 오니노키(鬼の城)에 웅거하던 고구려 세력의 토벌작전이
전개되고 70인의 모반세력을 살해한다. 유우랴쿠(雄略)기에 기록된 키비노오미(吉備臣)의 모반이나 고구려와 신라와의 전란등의 기사는 모두 일본 내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잔당을 소탕하는 곤지의 전쟁기사이다.
신라출병 기사가 있고 여러 명의 야마토 장군들이 전쟁중 사망한다. 큐우슈우(九州)의 쯔쿠시(筑紫)와 쿠루메시 코우라산(久留米市 高良山)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고구려와 신라군이 소탕된다.
일본서기에 세이네이(淸寧)천황의 사적(事蹟)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것 또한 작위라고 보며, 실제로 그는 인교우(允恭), 안코우(安康), 유우랴쿠(雄略)시대를 청산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고분과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에서 출토된 와카타케루 대왕검 (獲加多支鹵大王劍)의 신해(辛亥)년이 서기 471년이라면 당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소탕작전을 전개한 천황은 세이네이(淸寧)였다.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垝其児多加利足尼其児名弖已加利獲居其児名多加披次獲居其児名多沙鬼獲居其児名半弖比(表)其児名加差披余其児名乎獲居臣世々為杖刀人首奉事来至今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事根原也(裏)
일본서기는 백제의 영향이 없었던 것처럼 기록하므로 많은 영향을 남긴 사람일 수록 사적을 감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이네이(淸寧)야말로 야마토를 재건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0년 (서기 475)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 와 7일간 밤 낮으로 왕성을 공격했다.
왕성은 함락되고 본거를 잃었다. 국왕과 황후, 황자들은 적에게 살해되었다.
야마토에 있던 곤지가 서기 477년 백제에 나왔다. 삼국사기 문주왕 3년(서기 477년) 4월 왕의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맏 아들 삼근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고 나온다. 곤지는 백제에 들어오기 전 시마왕을 왜무왕(倭武王)으로
삼고 야마토의 왕권을 넘겼다.
왜무왕(倭武王)이 서기477년 남송에 상표문을 올린 것이 이 때이다. 상표문의 내용은 온통 아버지 제(濟) 즉 개로왕의 업적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개로왕의 왕자들이 모두 사망한 지금 시마왕은 개로왕의 뒤를 이을 맏 아들이 된 것이다.
따라서 477년부터 왜무왕이 천황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백제와의 관련을 피하기 위하여
왜무왕은 아예 천황에서 제외되었다. 왜무왕을 계산하면 22대 세이네이(淸寧), 23대 왜무왕, 24대 이히토요황녀(飯豊皇女), 25대 켄조우(顯宗) 의 순으로 된다.
송서 순제 승명 (宋書 順帝 昇明) 1년
(서기 477) 왜에서 사신이 와서 흥(興)이 죽고 동생 무(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무(武)는 스스로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을 칭하였다. 전사한 개로왕의 장자가 백제를 포함한 7국제군사를 자칭하는 것이니 별로 모순되는 요구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송서 순제 승명2년(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거기서 백제에 대한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송 황제는 그를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3년 (서기 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하고 있던 곤지왕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쯔쿠시국(筑紫國)의 병사 5백 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24대 동성왕이다.
유우랴쿠(雄略) 23년이라 하나 세이네이(淸寧)천황 치세이며 그에게는 이 때가 가장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될 시기였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동년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백제도 전쟁물자를 보내 왔을 것이다. 거기서 쯔쿠시국(筑紫國)의 아찌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이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는 유일한 관련기록 이다. 서기
479년 세이네이(淸寧) 천황과 왜무왕이 위의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진다. 유우랴쿠를 죽이고 떠났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서 무었을 하였는지 모른다. 야마토는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유랴쿠(雄略) 22년 추 7월 타니하노 쿠니(丹波国, 京都府北部・中部)의 요사노코호리(余社郡, 宮津市) 쯔쯔카하(管川)에 살던 미즈노에노 우라노 시마코 (瑞江浦嶋子)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중 거대한 거북을 낚았는데 거북이 여자로 변하였다. 우라노 시마코 (浦嶋子)는 그 여자가 맘에 들어 아내로 삼았다. 그리하여
함께 저편의 봉래산(蓬莱山)을 찾아 선경(仙境)을 헤멨다.
위와 같은 몇 줄의 신화가 왜 유우랴쿠(雄略)기 마지막에 끼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기사를 작성했던 사람들은 분명히 뭔가 멧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신화를 남겼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가 시마왕(斯麻王)이 서기 479년 고구려를 응징한다면서 아무 성과를 내지 못 한 것을 야유하는 기사라 읽는다.
우라노 시마코 (浦嶋子)라는 이름은 시마왕(斯麻王)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서기
479년 송에 보낸 상표문을 보면 뭔가 큰 일을 낼 것처럼 요란하였는데 아무 성과를 내지 못 한 것을 역사가들이 꼬집은
것이 아닐까. – 끝 -
주) 이 글은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을 참조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 내용을 해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