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沖縄)등 남서제도에서 6개의 뿔이 달린 스이지가이(水字貝)를 불의 재난을 막아주는 부적으로 집의 입구에 걸어 둔다는 풍습을 인용하여 스이지가이를 본 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쿠마모토시(熊本市) 유적발굴속보전 “2010 – 시즈메유적(沈目遺跡)과 신미도우유적(新御堂遺跡)”에서는 파형동기 옆에 스이지가이를 함께 진열하여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암시하였다. 소설가 최인호는 “제4의 제국”에서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스이지가이를 취재하고 스이지가이 설을 인용하여 논리를 전개하였다.
서기 1882년 사미타 타카라즈카 고분(佐味田宝塚古墳, 奈良県北葛城郡河合町)에서 약 36면의 동경(銅鏡)을 비롯하여 14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유물 가운데 신기한 물건이 하나 끼어 있었다. 청동으로 만든 원추형의 중심에 4개의 날개가 달린, 요새 선풍기 프로펠라와 비슷한 물건이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처음 발견된 토모에가타 동기(巴形銅器)이며 한국과 중국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유물이었다. 일본에서 토모에가타 동기(巴形銅器)라 명명했으므로 한국에서도 파형동기라 부르게 되었고 일본에서만 나오는 유물로 알려져 왜계유물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유물에 관한 기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에도(江戸)시대 후기의 텐메이(天明)연간(1781 – 1788) 찌쿠젠국(筑前国) 이토군(怡土郡) 이바라무라(井原村)의 야리미조(鑓溝, 現福岡県前原市井原)라는 곳에서 동경(銅鏡)을 다수 부장한 옹관이 발견되었다. 이곳을 이바라 야리미조 유적(井原鑓溝遺跡)이라 한다. 이 때 발견된 출토품은 현존하지 않고 당시의 스케치가 유원고기약고(柳園古器略考, 柳園은 青柳種信의 호)에 남아 있다. 이 서물은 주로 분세이(文政) 5년(1822) 미쿠모무라(三雲村)에서 발견된 미쿠모 미나미쇼우지유적 (三雲南小路遺跡, 福岡県糸島市) 1호 옹관묘(甕棺墓)의 조사보고서지만 아오야기 타네노부(青柳種信, 1766 – 1836)는 부근에서 1788년 발견된 이바라 야리미조(井原鑓溝)유적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농민이 보관하고 있던 동경조각 27점과 파형동기 2점의 스케치를 남겼다. 1788년 이바라 야리미조 (井原鑓溝)에서 21면의 동경과 파형동기 3점이 출토되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파형동기는 8개의 날개가 달린 것이었다.
서기 1911년 5월 카가와현(香川県) 사누키시(さぬき市) 산가와마찌(寒川町)에서 개간작업을 하던 중 지하 약 30 센티 깊이에서 파형동기 8점이 한꺼번에 발견되었고 이곳을 모리히로유적(香川市森広遺跡)이라 부른다. 파형동기 이외의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형태는 전부 7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으나 정부(頂部)의 지름이 크고 높이가 낮은 것이 3개, 정부의 지름이 작고 높이가 높은 것이 5개였다. 이들은 지금 토우쿄우(東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기 1944년 11월 제2차대전 말기 사가현(佐賀県) 카라쯔시(唐津市) 사쿠라노바바(桜馬場)에서 방공호 공사를 하던 중 지하 1미터 정도의 깊이에서 옹관(甕棺)이 출토되었다. 옹관 속에서 후한경 2면, 동팔찌 26개, 파형동기 3개, 철도(鐵刀) 토막,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桜馬場遺跡). 3개의 파형동기는 날개가 6개이며 중심부에 갈고리가 달린 것이 2개, 없는 것이 1개였다.
서기 1989년과 1992년 사가현(佐賀県) 칸자키군(神埼郡) 요시노가리유적(吉野ヶ里遺跡)에서 14기의 옹관묘(甕棺墓)가 확인되었고 부장품 가운데서 파형동기 주형(鋳型)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발견된 최초의 파형동기 주형으로 날개가 7개였다.
요시노가리유적(吉野ヶ里遺跡)을 발굴하면서 일본 최초의 파형동기 주형이 발견되어 신문들이 대서특필하던 무렵 한국에서 김해 대성동고분을 발굴조사하고 있었다. 부산 경성대학교 박물관이 서기 1990년 6월 12일부터 8월 1일까지 1차 발굴조사, 1990년 9월 3일부터 1991년 4월 14일까지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차 발굴조사중 13호 고분에서 4개의 날개가 달린 파형동기 6점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파형동기가 부착되어 있던 목재의 방패 흔적이 확인되었다. 파형동기는 방패 장식이었던 것이다. 대성동고분 2, 13, 23, 39호분에서 11점의 파형동기가 출토되고 그 후 2012년 7차 발굴조사중 88호분에서 13점이 출토되었다. 13호분은 4세기 2/4분기, 88호분은 4세기 3/4 분기에 축조되었고 모든 파형동기의 날개는 4개였다. 2차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파형동기가 한국에서 처음 출토된 것이며 2013년 현재까지 한국에서의 파형동기 출토는 대성동고분 뿐이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발굴된 파형동기 가운데 대성동고분의 파형동기와 사이즈와 디자인이 가장 가까운 것은 서기 1961년 나라현 텐리시(奈良県天理市檪本町)의 토우다이지야마 고분(東大寺山古墳)에서 출토된 7점의 파형동기이다.
서기 1998년 후쿠오카현(福岡県) 카스가시(春日市) 큐우슈우(九州)대학 쯔쿠지지구(筑紫地区) 지구대기동태(地球大気動態) 시뮬레이션장치 건설현장 (春日市, 大野城市)에서 파형동기 주형이 발견되었다. 7개의 날개가 달린 주형이었다.
서기 2008년 4월 17일 큐우슈우대학 홍보실은 1911년 카가와현 사누키시에서 발견된 파형동기 3점이 1998년 큐우슈우(九州) 대학 쯔쿠지지구(筑紫地区)에서 발견된 파형동기 주형과 일치한다고 발표하였다.
서기 2009년 후쿠오카시 교육위원회(福岡市教委)는 나가유적군(那珂遺跡群, 博多区竹下5丁目)에서 야요이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파형동기 주형(石英長石斑岩製)이 출토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일본에서 출토된 3번 째 주형이다. 주형의 일부가 출토되었으나 전체를 복원하면 8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세로 18.5 센티, 가로 17 센티, 높이 6.5 센티로 추정되는 대형이다.
카토우다 히가시바루 유적(方保田東原遺跡, 熊本縣山鹿市方保田)은 쿠마모토현(熊本縣) 최대급의 집락유적으로 1985년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거기서 7개의 날개가 있는 파형동기 1점이 수습되었다.
신미도우 유적(新御堂遺跡, 熊本市城南町)에서 8개의 날개가 있는 파형동기 1점이 발견되었다.
히로시마시(広島市) 니시야마즈카(西山貝塚)에서 7개의 날개가 있는 파형동기 1점이 발견되어 히로시마대학 고고학 연구실에 보관하고 있는데 직경 10.6 센티, 높이 1.3 센티, 무게 99.7 그램이다.
큐우슈우와 긴끼(近畿)지역에서 주로 발굴되는 파형동기가 이바라기현(茨城県) 이시오카시(石岡市) 미야타이라 유적(宮平遺跡)에서 1점 발굴되었다. 5개의 날개에 전경 5 센티, 무게 14 그램의 소형이었다.
서기 2002년 11월 27일 아이찌현(愛知県) 키요스쬬우(清洲町)의 아사히 유적(朝日遺跡)에서 5개의 날개를 가진 파형동기 1점이 출토되었다. 직경 5.6 센티, 높이 1.1 센티의 소형이었다.
서기 2008년 4월 17일 큐유슈우대학(九州大学) 홍보실은 지금까지 일본 전역에서 총 36점의 파형동기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한국에서는 김해 대성동고분에서만 13점이 출토되었다. 파형동기와 함께 용도를 몰랐던 청동제 유물로 통형동기(筒型銅器)가 있다. 한국에서 통형동기는 김해 대성동고분, 김해 양동리고분, 부산 복천동고분에서만 출토되었다. 일본의 타나카 신사쿠(田中晋作, 池田市立歴史民俗資料館 館長) 씨의 “고고학으로 본 4 – 5 세기의 야마토정권과 가야 (考古学からみた4・5世紀のヤマト政権と伽耶)에 의하면 2012년 현재 한국은 출토지 미상을 포함 72본의 존재가 확인되었고 일본은 출토지 미상 포함 74본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 존재가 확인되었으므로 통형동기 또한 왜계유물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통형동기가 출토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며 창의 손잡이에 끼우는 장식으로 확인되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 순장인골, 오르도스(Ordos)형 청동솥, 호형대구(虎形帶鉤), 마형대구(馬形帶鉤)등 북방계 유물이 출토되어 김수로왕으로부터 시작되는 가야의 500년 역사를 재검토해야 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서기 42년 김수로왕에서 시작되어 서기 532년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될 때까지 동일한 왕계로 내려왔다는 논리는 일본의 역사에서 황실이 만세일계였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로 픽션이다. 만주대륙의 풍운이 변한의 한 귀퉁이에 있던 구야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변수였음을 김해 대성동고분은 증언하였다.
어디 구야국 뿐이겠는가? 만주대륙의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세력들은 자기들의 삶의 근거지를 빼앗기고 살 길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필사적 탈출을 감행하여 비교적 저항이 약한 지역에 발을 붙였을 것이다. 난세의 파도는 구야국 뿐만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까지 소용돌이 속에 몰아 넣지 않았겠는가?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