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45년 7월 10일 아스카(飛鳥) 이타부키궁(板蓋宮)에서 정변이 발생하여 당대의 실력자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궁중에서 살해되고 코우교쿠(皇極)천황이 실각된 사건을 잇시노헹 (乙巳の變)이라고 부른다. 사카후네이시는 아스카(飛鳥) 오카(岡)마을의 낮으막한 언덕위에 있으며 이타부키궁을 남서쪽으로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다. 서기 1927년 4월 8일 사적(史跡)으로 지정되었다. 아스카무라 아스카 보존재단은 다음과 같은 설명문을 작성하여 현장에 게시하고 있다.
아스카(飛鳥)에는 많은 고대의 석조물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석조물에 관한 기록이 없으므로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인지 밝혀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카후네이시이다. 아스카 보존재단의 설명문에서 거론하지 않은 천문관측설, 천황들의 제사용이라는 설, 점을 치는 도구라는 설 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유물은 사이메이(斉明) 천황 때 제작되고 뭔가 제사가 행해진 유구(遺構)가 아닐까 추정하나 확실한 것은 모른다. 사카후네이시의 바로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이지만 양자의 관련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그럼 사카후네이시는 어디 쓰이는 물건일까? 술을 만드는데 썼다고 전해 와 사카후네이시라고 불려 왔다고 하지만 과연 술 만드는데 쓸 수 있는 물건일까? 길이 5.5미터, 폭 4.0미터, 두께 1미터의 돌덩어리가 술 만드는데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으로 이루어진 석조물을 보고 사람들은 어떤 심오한 뜻이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하므로 오리무중에 빠진다. 지금부터 1400년 전의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아스카의 역사를 연구하는 후타쯔키회(両槻会)가 2007년 11월 10일 제5회 정례회에서 아스카무라 교육위원회 문화재과 주사, 아이하라 요시유키(相原嘉之) 선생을 강사로 초빙하여 사카후네이시 유적에 관한 강연을 들었는데 그 강연 내용이 인터넷에 올라 와 있다. 거기서 아이하라 선생은 사카후네이시의 결손부를 복원하여 완정한 원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는게 너무 많아 지나치게 현학적이 되어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위의 스켓치를 보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매우 단순하고 명백하였다. 1400년 전의 인간들은 소나 말에게 물을 먹일 도구가 필요하였다. 짐승들의 힘으로 움직이지
않을 무게를 가진 도구라야 한다. 어딘가에서 물을 끌어 와 A에서 물을 주입하고 여섯 마리의 짐승이 한꺼번에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 일대에 마굿간이 있고 말을 기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 구릉지 주위로 설치된 마굿간의 경계로 쌓은 돌담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사카후네이시의 용도를 밝히기 못한 역사학계는 이 돌담의 성격을 가지고 또 헤메고 있다. 일본 역사서는 마굿간에서 태어난 한 사람을 특칭하고 있다.
우마야도(厩戸) 황자가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우마야”라고 읽히는“구(廐,厩는 속자)”는 마사(馬舍)를 뜻한다고 하니 우리 말로 마굿간에 해당한다. 그는 31대 요우메이(用明)천황의 둘째 아들로 서기 574년 출생하여 622년 사망하였다. 33대 스이코(推古) 천황시절 섭정으로 정치에 관여하였다고 하며 사후 쇼우토쿠(聖徳) 태자로 추서된 인물이지만 그에 관한 역사기록은 픽션으로 밝혀지고 있다.

2000년 발굴된 아랫 쪽의 거북형 석조물과 소판형 석조물은 사람이 사용하던
우물로 세월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손도 씻고 발도 씻고 음료수로도 쓸 수 있는 시설이다. 그것을 구태여 천황이 제사지낼 때 쓰는 물로
한정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역사는 지배자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