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타이(繼體, 450 – 531)천황 이후에 왕이 되는 안칸(安閑, 466 – 535), 센카(宣化, 467 – 539), 그리고 킨메이(欽明, 510 – 571) 천황을 일본서기는 케이타이의 아들로 처리하였으나 이들 3명은 무령왕의 특사들이다. 일본서기 스스로 증언하였다. “서기 531년 일본의 천황과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 후일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後勘校者 知之也)." 일본서기의 증언대로라면 살아 남아 왕위를 잇는 자들은 케이타이의 황자가 아니다.
서기 532년 안칸(安閑, 466 – 535)천황이 왕위에 올랐다. 히로쿠니 오시타케 카나히 (広国排武金日)가 그의 이름이다. 그는 또 마가리노 오호에(勾大兄) 황자라 불렸다. 즉위시 66세의 고령이었고 4년 후 사망하였다. 그가 만약 케이타이의 장자이며 전 왕조의 계승자라면 기득권을 가진 구신들의 재산을 막무가내로 몰수하지 못 할 것이다. 안칸은 무령왕의 특사로 서기 505년 열도에 들어 온 시가키시(斯我君)이다. 그는 왕위에 있던 4년 간 미야케(屯倉)를 전국에 대량으로 설치하였다.
미야케(官家)는 사료상 <屯倉, 屯家, 御宅>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 성격을 두고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토지와 노동력을 겸비한 왕실의 직할지를 의미한다. 곡물을 저장할 대형 창고가 필수적이므로 때로는 창고를 의미한다. 미야케는 조정의 경제적 기반이므로 정변이 있으면 새로 등장한 권력자가 전임자들이 소유하던 미야케를 수습하게 된다. 그러나 단 4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안칸천황 시대 미야케 설치는 열도 역사상 전무후무할 만큼 방대한 스케일이며 이는 케이타이 천황과 계통을 달리 하는 정권이 열도를 장악했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서기 서기 534년 4월 카시와데노 오미 오마로 (膳臣大麻呂)가 왕명으로 진주(眞珠)를 구하기 위하여 이키미(伊甚, 現 千葉県 夷隅郡)에 사자를 파견하였다. 이키미노 쿠니노 미야스코(伊甚国造)등이 밤 늦게 상경하였으므로 제 시간에 물품을 바치지 못 하였다. 오마로가 대노(大怒)하여 쿠니노 미야스코들을 포박하고 연유를 물었더니 쿠니노 미야스코 와카코(稚子) 등이 겁에 질려 후궁의 침실로 도망쳐 숨었다. 카스카(春日)황후가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 왔다가 침입자를 보고 경악하였다. 와카코등은 후궁 난입죄까지 더해져 죄가 무거워졌으므로 이키미 미야케(伊甚屯倉)를 황후에게 바치고 용서를 빌었다.
동년 7월 "황후는 비록 몸은 천자(天子)와 같다 하나 그 이름은 곧 잊혀지고 만다. 그러니 황후를 위한 미야케용 토지를 선정하여 정비하면 후대까지 자취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천황의 이 명령은 오우시 카우찌노 아타히(大河内直) 아지하리(味張)에게 하달되었다. “ 키지타(雌雉田)의 비옥한 토지를 넘겨야 될거야!” 왕의 사자가 말했다. 아지하리는 내키지 않아 사자에게 거짓을 고하였다. “이 땅은 가뭄에 물을 대기 어렵고 비가 오면 범람합니다. 일 하는 만큼 소출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자는 돌아가 들은대로 아뢰었다.
동년 10월 천황이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大連金村)에게 명하였다. “짐에게 처가 넷 있지만 후사를 보지 못 했으니 세월이 지나면 짐의 이름도 사라지겠지. 짐에겐 이것이 항상 맘에 걸리는데 그대의 의견을 말 해 보라.” “소신도 그걸 걱정하고 있나이다. 후사가 있던 없던 제왕은 가시적인 것을 이름으로 남기도록 해야 됩니다. 황후와 후비들을 위한 미야케를 설치하여 그 이름이 영원히 남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요.”
“오하리다 미야케(小墾田屯倉)를 경작민과 함께 사테히메(紗手緩)에게, 사쿠라이 미야케(櫻井屯倉)를 경작민과 함께 카카리히메(香香有媛)에게, 나니와 미야케(難波屯倉)를 경작민과 함께 야카히메(宅媛)에게 바치겠나이다.”
동년 윤12월 천황이 미시마(三嶋, 大阪府)를 방문하였다. 오호토모 카나무라가 수행하였다. 천황은 카나무라를 아카타 누시(県主) 이히포(飯粒)에게 보내 좋은 땅을 내놓도록 청하였다. 이히포(飯粒)는 한 없는 존경과 기쁨을 표시하며 타케후(竹村)의 땅 40정(町) - 카미 미노(上御野, 岡山市), 시모 미노(下御野), 카미쿠와하라(上桑原, 奈良県吉野郡), 시모쿠와하라(下桑原) - 을 바쳤다…(이하 생략)
카나무라는 아지하리에게 일렀다. “아지하리(味張)! 왕의 땅 위에 사는 어리석고 우매한 백성아! 너는 왕의 땅을 내 놓는 것을 원망하며 왕명을 저버렸다. 너를 코오리노 미야스코(郡司)에서 파면한다.” 아지하리는 두려움에 떨며 후회하였다. 땅에 엎드린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카나무라에게 애원하였다. “어리석은 농삿군이 지은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바라옵건데 코오리(郡, 마을)마다 봄에 5백, 가을에 5백의 농삿꾼을 천황에게 바치겠읍니다. 저의 자손대대로 이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그는 따로 사이타(狭井田)의 땅 6정을 카나무라에게 뇌물로 바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같은 달 이오키베노 무라지(廬城部連) 키코유(枳莒喻)의 딸 하타히메(幡媛)가 모노노베노 무라지(物部大連) 오코시(尾輿)의 영락(瓔珞, 머리장식)을 훔쳐 카스가(春日)황후에게 선물로 바쳤다. 일이 발각되자 키코유(枳莒喻)는 하타히메를 황후의 시녀로 바치고 아키국(安芸国, 현 히로시마) 아마루베노 이호키베 미야케 (過戸廬城部屯倉)를 헌상하여 딸의 죄를 빌었다. 모노노베노 무라지 (物部大連) 오코시(尾輿)도 이 일에 연관될까 두려워 토오찌베(十市部), 이세국(伊勢国)의 쿠사사(来狭狭), 토이(登伊)의 니에노 하지베(贄土師部) 그리고 쯔쿠시국(筑紫国)의 이사야마베(胆狭山部)를 헌상하였다.
무사시(武藏) 쿠니노 미야스코(國造) 오미(笠原直使主)가 동족의 오키(小杵)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웠는데 몇 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키는 꽉 막히고 대들기 쉬우며 자존심은 강하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는 은밀히 카미쯔케노 키미(上毛野君) 오쿠마(小熊)와 짜고 오미(使主)를 죽이려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오미가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조정이 결단을 내려 오키를 죽이고 오미를 쿠니노 미야스코(國造)로 하였다. 오미는 감사한 나머지 가만 있을 수 없어 요코누(橫渟), 타찌바나(橘花), 오히(多冰), 쿠라스(倉樔)의 미야케를 헌상하였다. 때는 서기 534년이었다.
서기 535년 정월 천황은 마가리노 토네리베(勾舍人部), 마가리노 유케베(勾鞬部)를 설치하였다.
서기 535년 5월 13개 국(國)에 총 26개의 미야케(屯倉)를 다음과 같이 설치하였다.
쯔쿠시국(筑紫国) <호나미(穂波), 카마(鎌)>, 토요쿠니( 豊国) <미사키(御崎), 쿠와하라(桑原), 카토(肝等), 오누쿠(大抜), 아카(我鹿)>, 히노쿠니(火国) <카스가베(春日部)>, 하리마국(播磨国) <코시베(越部), 우시카(牛鹿)>, 빈고국(備後國) <시쯔키(後城), 타네(多彌), 쿠쿠쯔(来履), 하와카(葉稚), 카와토(河音)>, 아나국(婀娜國, 備後国安那郡。現在 広島県東端の海側一帯) <이니에(膽殖), 이토시베(膽年部)>, 아와국(阿波国) <카스가베(春日部)>, 키노쿠니(紀国) <후세(経喘), 카와베(河部)>, 타니와국(丹波国) <소시키(蘇斯岐)>, 오우미국(近江国) <아시우라(葦浦)>, 오와리국(尾張国) <마시키(間敷), 이루카(入鹿)>, 카미쯔케노국(上毛野国) <미도노(緑野)>, 스루가국(駿河国) <와카니에(稚贄)> 미야케.
서기 535년 8월 이누카이베(犬養部)를 전국에 설치하였다. 9월 3일 사쿠라이 타베노 무라지(桜井田部連),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무라지(県犬養連), 나니와노 키시(難波吉士)등에게 미야케(屯倉)의 세금을 철저히 징수하도록 명령하였다. 13일 나니와(難波)의 오오스미 시마(大隅嶋)와 히메시마(媛嶋)의 마쯔하라(松原)에 소(牛)를 방목하여 기르게 하라고 대신에게 따로 명하였다.
서기 535년 12월 천황이 향년 70세로 마가리노 카나하시궁(勾金橋宮)에서 죽었다.
서기 536년 센카(宣化, 467 – 539)천황이 등극한다. 그의 이름은 타케 오히로쿠니 오시타테 (武小広国排盾)이며 안칸의 친 동생이다. 그는 70세의 고령으로 왕위에 올랐다. 전과 같이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를 오호 무라지(大連),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粗鹿火)를 오호 무라지(大連)로 하고,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를 오호오미(大臣)로 임명하였다. 소가(蘇我)씨가 처음으로 오호오미(大臣)의 반열에 이름을 드러낸다.
서기 536년 5월 1일 조칙을 내린다.
먹거리가 천하의 기본이다(食者天下之本), 황금 만 관(貫)이 있어도 배 고픔을 달랠 수 없고 진주 만 상자를 가진들 어찌 추위를 막겠는가? 쯔쿠지국(筑紫国)은 원근의 나라에서 조공하러 오는 곳으로 왕래의 관문이 되는 곳이다. 그래서 해외의 나라들이 조류와 천후를 관측하고 조공을 바치러 온다. 호무다천황(誉田天皇, 応神) 때부터 지금까지 곡식을 수확하여 비축하여 왔다. 흉년에 미리 대비하여 빈객을 환대하고 나라를 평안케 하느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그래서 아소노 키미(阿蘇君)를 보내 카와찌국(河内国) 만다군(茨田郡)의 미야케(屯倉)에 저장된 곡물을 운반토록 할 것이다. 소가노 이나메 대신(蘇我大臣稲目宿禰)은 오와리노 무라지(尾張連)를 보내 오와리국 미야케의 곡물을 가져오라.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大臣麁鹿火)는 니이노미노 무라지(新家連)를 보내 니이노미(新家) 미야케의 곡물을, 아베노 오미(阿部臣)는 이부키노 오미(伊吹臣)를 보내 이가국(伊賀国) 미야케의 곡물을 운반해 오도록 하라.
미야케(官家)를 나노쯔(那津, 博多大津)에 건설하라. 또 쯔쿠시(筑紫), 히노쿠니(肥国), 토요쿠니(豊国)의 3개의 미야케는 서로 멀리 떨어져 필요시 수송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모든 군(諸郡)에 명하여 나누어 운반하여 나노쯔(那津) 한 곳에 모아 비축하여 비상시 인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라. 시급히 군현(郡県)에 나의 명을 하달하라.
「食者天下之本也.黃金万貫,不可療飢;白玉千箱,何能救冷!夫筑紫國者,遐邇之所朝屆,去來之所關門.是以海表之國,侯海水以來賓,望天雲而奉貢.自胎中之帝,洎于朕身,牧藏穀稼,蓄積儲糧.遙設凶年,厚饗良客.安國之方,更無過此!故,朕遺阿蘇仍君,未詳也.加運-河內國茨田郡屯倉之穀;蘇我大臣稻目宿禰,宜遣尾張連,運尾張國屯倉之穀; 物部大連粗鹿火,宜遣新家連, 運新家屯倉之穀;阿倍臣,宜遣伊賀臣,運伊賀國屯倉之穀.修造宮家那津之口.又其筑紫、肥、豐,三國屯倉,散在懸隔,運輸遙阻.儻如須要,難以備率.亦宜課諸郡分移,聚建那津之口,以備非常,永為民命.早下郡縣,令知朕心!」
서기 537년 10월 신라가 미마나(任那)를 공격하였으므로 오호토모 카나무라에게 명을 내려 그의 아들 이하(磐)와 사테히코(狭手彦)를 보내 미마나를 돕게 하였다. 그 때 이하(磐)는 쯔쿠시(筑紫)에 남아 관련된 행정업무를 맡고 사테히코(狭手彦)는 미마나와 백제를 구원하러 갔다.
남가라(南加羅)와 훼기탄(喙己呑)이 서기 532년 까지 신라에게 합병되고 서기 537년 경 탁순(卓淳)이 합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가야제국이 킨메이 천황기에 나오는 미마나(任那) 10국이다.
서기 539년 2월 천황이 향년 73세로 히노쿠마노(檜隈) 이오리노 궁(廬入野宮)에서 죽었다.
1984년 후쿠오카시(福岡市) 하카다구(博多区駅南五丁目) 히에유적(比恵遺跡) 조사에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 시기의 책(柵)에 둘러싸인 다수의 창고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센카시대 건설된 나노쯔의 창고 추정지로 주목되고 있다.
안칸천황 시대 미야케 설치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 우리는 미야케 설치 사실만을 취한다.
예를 들어 "서기 534년 4월 카시와데노 오미 오마로 (膳臣大麻呂)가 왕명으로 진주(眞珠)를 구하기 위하여 이키미(伊甚, 現 千葉県 夷隅郡)에 사자를 파견하였다. 이키미노 쿠니노 미야스코(伊甚国造)등이 밤 늦게 상경하였으므로 제 시간에 물품을 바치지 못 하였다. 오마로가 대노(大怒)하여 쿠니노 미야스코들을 포박하고 연유를 물었더니 쿠니노 미야스코 와카코(稚子) 등이 겁에 질려 후궁의 침실로 도망쳐 숨었다. 카스카(春日)황후가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 왔다가 침입자를 보고 경악하였다. 와카코등은 후궁 난입죄까지 더해져 죄가 무거워졌으므로 이키미 미야케(伊甚屯倉)를 황후에게 바치고 용서를 빌었다.” 는 기사는 “와카코가 이키미 미야케(伊甚屯倉)를 헌상하였다” 는 내용만 취한다. 도입부는 일본서기 저자들의 절차상의 기록일 뿐이다. 와카코는 아마 카스카 황후의 친척일 것이다. 재산을 빼앗기게 되자 가까운 친척 카스카 황후의 거실까지 찾아 가 하소연하였지만 혁명 주체세력에게 황후의 빽도 통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안칸천황은 나라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신들이 소유하던 토지를 빼앗아 미야케를 전국적인 스케일로 설치하고 세무서를 독려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에서 소를 대량으로 방목하고자 한다. 66세에 왕위에 올라 70세에 사망한 그가 무엇 때문에 기득권층의 저항을 무릅쓰면서 쫒기듯이 그와 같은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을까?
센카천황은 전국에 산재한 미야케에서 곡물을 수송하여 쯔쿠시(筑紫)의 나노쯔(那津)로 집결시키고 있다. 천황은 요즘의 언어로 돌관작업을 주문하고 있다. 일본열도의 미야케에서 생산된 곡물을 큐우슈우의 하카다 항에 집결시키는 것은 이 곡물들이 향할 목적지가 바다 건너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본열도에 사용될 곡물을 큐우슈우 후쿠오카시(福岡市) 하카타구(博多區)로 집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전편 <78. 무령왕의 승리 – 열도 재장악>에 나온 다음 기사를 주목한다.
<서기 529년 3월 백제왕이 일본에 가는 사자가 바다 한 가운데 곶(海中岬)을 떠날 때 풍파에 시달리고 화물은 물에 젖어 손상이 심하니 가라(加羅)의 다사진(多沙津, 하동군 고전면)을 조공용 항로로 달라 하여 그렇게 하였다.>
큐우슈우의 후쿠오카에 집결된 곡물의 목적지는 <가라 다사진>이다. 백제의 사비천도는 서기 529년 이미 계획되어 있었고 열도에서 수송된 화물을 처리할 1차 목적지로 가라 다사진이 선정되어 있었다. 물에 젖을까 염려하던 화물은 열도에서 반도로 들어 올 곡물이었던 것이다. 가라 다사진의 곡물은 다른 선박에 옮겨 져 남해안을 돌아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 소부리(所夫里)의 구드레 포구(大王浦)에서 하역될 것이다.
일본인들은 국내에서 무언가 천재지변이 있었거나 외국을 지원하지 않았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열도 내의 천재지변에 황실이 곡물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황실로서는 생색을 낼 일이지 감출 이유가 없으며 외국을 돕기 위한 것이라면 지나치다. 외국을 돕기 위하여 자기 신하들의 토지를 빼앗아 전국적으로 미야케를 설치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는가?
서기 531년 케이타이 천황이 죽고 서기 540년 킨메이 천황이 즉위하는 9년 간 일본서기는 미야케의 설치와 곡물의 긴급수송 기사만으로 안칸과 센카의 시대를 매우고 있다.
서기 504년 부터 무령왕은 특사들을 열도에 보내 열도를 내 놓으라고 카나무라를 압박하였다. 카나무라는 27년을 더 버티고 서기 531년 열도의 조정을 안칸천황에게 양도하였다. 서기 531년 일본열도가 다시 백제의 수중에 들어 온 것이다.
성왕 16년 ( 538년) 백제는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 所夫里)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가 충청도까지 진출하고 신라는 국력이 신장되어 한강까지 밀고 올라가는 상황에서 전란이 계속되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백제는 도읍을 보다 안전한 남쪽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전란의 와중에 막대한 물자와 인력이 소요되는 수도이전 비용을 안칸과 센카가 열도에서 마련하기 위하여 전력투구 하고 있는 모습을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사비천도와 관련된 사업이라는 언질은 어디에도 없다.
공주 송산리 고분에서 무령왕릉이 출토되고 그 후 연구 결과 무령왕의 시신을 담은 관재가 일본에서 생산되는 금송(金松)이라고 밝혀지자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 하였다. 옛날 먼 외국의 나무를 백제까지 가져 왔다는 것에 모두 놀랐다. 그 시대 일본에 질이 좋은 목재가 있다는 것을 한반도의 인간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필요한 나무를 일본에서 한반도까지 가져 올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란 사람이며 한 때 일본의 왕이었다면 놀랄 일이 아니다.
전편 < 77.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 에서 나온 <2) 하얀 바둑이 헌상, 3) 미와강의 소녀, 4)요시노강의 소녀, 6)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 의 4장은 왜왕무와 관련된 기사이다. 고사기의 저자는 유랴쿠(雄略)기에 왜왕무의 기록을 그런 식으로 감추어 둔 것이다. 고사기의 저자는 연대기록을 하지 않았고 관련성이 의문시되는 설화로 유랴쿠기를 작성하여 황실의 검열을 통과하였으므로 일본서기 저자들에 비해 역사가로서의 정직성은 지킨 셈이다. 그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일본서기는 유랴쿠가 서기 457년 부터 479년 까지 천황위에 있었던 것 처럼 기록을 날조하였다. 일본서기는 위에 나온 4개의 왜왕무(시마왕)의 설화는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일본은 백제의 외국이 아니라 백제 그 자체였다. 열도의 통치권을 서기 485년부터 531년까지 행사할 수 없게 된 세월이 있었지만 서기 531년 열도는 다시 백제의 품안에 들어 왔다. 이히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의 아들 시마왕(斯麻王)이 현 일본 천황가와 연결되는 일계(一系)의 선조이다. 무령왕의 특사들은 일본열도를 되 찾아 백제의 사비 천도의 재원을 마련하였다. 안칸과 센카 두 사람이 필사적으로 백제 성왕의 사비천도를 지원한 것이다. 혈연적으로 안칸과 센카는 백제 성왕의 숙부이며 나중 등장하는 킨메이(欽明, 510 – 571)는 성명(聖明, ? – 554)의 동생이다.
센카시대의 하카타 항의 창고건설과 일본 전국에 걸친 운송 시스템의 확립은 안칸의 미야케 설치와 병행하여 동시에 추진되었을 것이다. 곡물의 수송과 적절한 관리를 위하여 큐우슈우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이 때부터 백제는 큐우슈우에 백제왕을 두었다. 그 후 구주백제왕이 대부분 야마토의 천황으로 옮겨 갔다. 따라서 안칸에서 코오교쿠(皇極)까지의 100년 동안 선왕의 장자가 왕위를 잇는 전통은 열도에 없었다. 센카와 킨메이도 야마토의 왕위에 오르기 전 구주백제왕이었으며 이 시스템은 서기 645년의 을사의 변(乙巳之變)까지 약 1 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열도의 미야케에서 생산된 곡물은 백제왕실 소유이므로 서기 645년 까지 후쿠오카에서 열도의 곡물이 가라의 다사진으로 운송되었을 것이다.
열도에서 서기 645년 을사의 변(乙巳之變)이 발생하고 이후 열도의 미야케는 나카노오호에(中大兄)황자가 장악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백제의 의자왕은 열도의 주도권을 자기 아들에게 빼앗겨 백제 본국의 재정은 급속히 악화되었을 것이다.
의자왕(593 – 660)은 아좌태자(570 - 598)의 아들이다. 무왕의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오류이다. 을사의 변을 일으킨 나카노오호에 (中大兄)황자는 의자왕의 아들이다. 백제 의자왕과 야마토의 죠메이(舒明) 그리고 큐우슈우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동일인이다. 사이메이(齊明)는 서기 618년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에게 시집왔고 다음 해 아야(漢)황자를 낳았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아야(漢)황자, 교기(翹岐), 그리고 나카노오호에 (中大兄, 619 – 671) 황자는 동일인의 이름이다. 교기(翹岐)에 관한 기사는 <65. 한인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 71. 일본국의 출현>에서 나왔다. 얽히고 설킨 백제와 열도 관계사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바꾸면서 타자화(他者化)되었다.
계백(階伯, ? – 660)이란 이름의 MBC TV 드라마가 서기 2011년 7월 25일 부터 방영되었다. 계백은 일본측 역사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교기(翹岐)는 일본서기에 나올 뿐 한국 측 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삼국사기 열전 한 구석에 몇 줄 나온 계백의 기사는 가족을 먼저 죽이고 출전하여 5천의 군사와 함께 전사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계백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자식이 누구인지 역사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작가가 만들어 낸 픽션일 뿐이다. 그러나 스토리를 작가가 쓰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나 사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계보를 자의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의자왕과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교기가 어떤 관계였을까? 역사라는 시간의 틀을 빌리는 한, 인간의 계보는 하나 밖에 없다.
백제와 열도의 관계는 다수의 열도 원주민을 소수의 백제인들이 지배했을 거라고 믿기 쉬우나 백제인들이 열도의 존재와 가치를 알고 그 경영을 시작했을 때 열도의 인구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건국될 무렵 열도의 총 인구가 60만 정도였다. 일본서기가 씌여 지던 서기 700년 경의 인구는 540만이었다. 그 가운데 70 - 80%가 도래인(渡來人) 이라고 통계는 말한다. 백제인이 현해탄을 건너 만든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백제 땅이다.
현재는 인골(특히 두개골과 치형)과 DNA의 해석, 체내의 바이러스의 조사등으로 인종의 차이를 엄밀히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성과에 의하면 현재 일본인중 원주민과 도래인의 비율의 평균치는 “3 대 7”정도라 한다. ( “2 대 8”이라는 설도 있다.) (38. 일본인 일본문화의 뿌리 2).
일본열도의 인구변화를 보면 약 8천년전, 20,100명으로 추정되는 인구가 6천년 전, 105,500명으로 급증하고, 4천 3백년 전 261,300명으로 피크를 맞는다. 그후 감소하여, 웬지 3천년 전에 들어서는 최고치의 3분의 1이하에 해당하는 7만 5천인 대까지 떨어진다. 이것이 3천 년 전 일본열도의 원주민의 숫자이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이다. 야요이(彌生)시대 (2천년전) 에는 8배 가까운 59만인 대로 격증하고있다. 그로부터 700년이 경과한 나라(奈良) (5,399,800명)시대가 되자 열 배 가까이 불어난다. (쿠마모토 히로히코(隈元浩彦, 1961 - ) “우리들은 어디서 왔는가” 매일신문사 P.139) (38. 일본인 일본문화의 뿌리 2).
그런데 천황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혈통이 3천 년 전의 원주민 (7만 5천인)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일본 최초의 역사서가 그렇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역사가들은 천황가에 유리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도록 역사를 조작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그 역사를 믿고 세뇌된 열도인들에게 70 – 80%의 도래인(渡來人)은 보이지 않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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