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45년 경 구야국(狗邪國)에서 야마토에 돌아 온 사호히코(沙本毘古王, 狭穂彦王, 孝元天皇)에게 혼처(婚處)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즈노 현주(葛野県主)가 되어 쿄오토오(京都)지역에 근거를 마련한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의 딸 하니야스히메(波邇夜須毘賣)와 혼인하여 서기 250년 경 타케 하니야스히코(建波邇夜須毘古命, 武埴安彦命)를 낳았다. 고사기는 그녀를 코우찌(河内)의 아오타마(青玉)의 딸이라고 기술하여 하니야스히메가 가모타케쯔누미의 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자 하였다. 또 이카 가시코메(伊賀迦色許賣命, 伊香色謎命)와도 혼인하여 히코 후쯔오시노 마코토 (比古布都押之信命, 彦太忍信命)를 낳았다. 그가 유명한 타케시우찌 (武内宿禰)의 할아버지이다.
일여(壹與)의 어머니, 구야국의 공주 우쯔시코메(고사기 内色許売命, 일본서기 欝色謎命)가 야마토에 자리잡자 구야국과 야마토의 왕래가 많아진다. 우쯔시코메의 어린 동생 우쯔시코오(内色許男)가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구야국 거등왕의 왕자이다. 서기 265 년경 구야국의 우쯔시코오와 코토시로누시의 딸 사호히메(고사기 沙本毘賣命, 일본서기 狭穂姫)가 사랑에 빠져 혼인하였다. 그녀가 스이닌(垂仁)천황 황후로 기록된 사호히메(고사기 沙本毘賣命, 일본서기 狭穂姫)이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에게 우쯔시코오는 어머니 쪽을 따르면 외삼촌, 아버지 쪽을 따지면 고모부가 된다. 우쯔시코오와 사호히메는 구야국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곧 파국을 맞는다. 사호히메가 혼인을 포기하고 몰래 바다를 건너 나니하(難波, 현 오오사카)에 와서 머물렀다. 그녀가 나니하의 히메코소신사(比売碁曾社)에 진좌하고 있는 아카루 히메(阿加流比売神)이다. 여자 측에서 일방적으로 혼인을 파기한 듯 우쯔시코오는 아내를 단념하지 못 하고 그 뒤를 쫓아 열도에 들어온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는 그에게 아나토(穴門, 현 야마구찌현)에 머물 것을 명한다. 이 때 그는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사를 종합하면 이쯔쯔히코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나니하(難波)로 쳐들어 간 것 같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 천황 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는 아내가 도망친 것을 알고 바다를 건너 그녀를 찾아 나니하에 입항하려 하였으나 그 해협의 신(海峡の神)이 가로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타지마국(多遅摩国, 현 효고현 일본해에 면한 지역)에 정박하였다. 이 기사가 오우진 천황편에 기록되어 있으니 오우진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연대는 자의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무시한다. 오우진(應神 )은 서기 362년 이후 야마토의 왕이 되었으며 우리는 지금 260년 대의 역사를 더듬고 있다.
야마토 정부는 그의 나니하(오오사카) 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호히메의 안전을 염려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사가 이어진다.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호코(天日槍)가 배를 타고 하리마국(播磨国, 효고현 남부 현 코베 부근)에 도착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천황은 오호토모누시(大友主)와 나가오찌(長尾市)를 파견하여 사정을 알아 보게 하였다. 천황은 그가 머물 곳을 시사하 마을(宍粟邑)과 아하지섬(淡路島)의 이데사 마을(出浅邑)로 한정하였다.
역시 그의 오오사카 상륙은 허가되지 않았다. 오오사카에는 그에게서 도망쳐 온 아내 사호히메(아카루히메)가 숨어 있다.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를 통하여 오오사카에 들어 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방향을 바꾸어 일본해 측으로 돌아 가 타지마국(多遅摩国)을 점령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타지마국의 왕이 되어 눌러 앉은 것이다.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와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라 표기되었던 그의 이름은 일본해 측에서 다시 바뀌어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또는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于斯岐 阿利叱智 干岐)로 표기된다. 이 신화를 해석하면서 그가 가져 왔다는 8종의 신보(神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평가를 거부한다. 아메노히호코는 신라의 왕자, 쯔누가 아라시토는 대가라국의 왕자라 하였다. 신보를 전하기 위하여 그가 열도에 온 것이 아니다. 신보란 당시 가라국 왕자의 휴대품 정도로 보면 된다.
일본서기 스이닌(垂仁)천황기에 쯔누가 아라시토의 기사가 이어진다. 같은 사람의 기사를 여러 시대에 일어난 별개의 일인 것처럼 풀어 놓았다. 스진(崇神)천황 시대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배에 타고 코시노쿠니(越国)의 케히노우라(笥飯浦)에 왔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나는 카라노쿠니(大加羅国)의 왕자이다. 이름을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또는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于斯岐 阿利叱智 干岐)라 한다. 야마토에 성왕(聖王)이 계신다 하여 찾아왔으나 아나토(穴門)에서 길을 헤메다 북쪽 바다를 따라 이즈모노쿠니(出雲国)를 거쳐 케히까지 오게 되었다.”
그 사이 스진(崇神)은 죽었고 스이닌(垂仁)이 즉위하자 그를 모신지 3 년이 지난 어느 날 천황이 고향에 가고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향 생각이 간절하던 참입니다.” “네가 길을 잃고 헤메지 않고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선제(先帝)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미마키(御間城)천황(崇神)의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
아내를 찾아 온 쯔누가 아라시토가 코시노쿠니의 케히에 온 것은 서기 268년 경이다. 일본서기는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于斯岐 阿利叱智 干岐), 우쯔시코오(内色許男), 스이닌(垂仁)천황을 개별적인 사람으로 묘사하였으나 이는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이다. 또 미마키천황(崇神)은 서기 300 년 아마토에 들어 왔으므로 일본서기의 이 부분의 기술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구야국의 왕자 우쯔시코오(内色許男)는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던지 타지마국(多遅摩国)을 점령하고 거기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살면서도 사호히메에 대한 집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게릴라부대를 양성하여 야마토로 보내 도망친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일본서기 스이닌(垂仁)천황기의 사호히코 왕(狭穂彦王)의 모반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스이닌이 사사로운 증오심에서 부하들을 보내 전처를 살해한 사건이다. 사호히코왕과 사호히메가 부친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거성 이나키(稻城)에 거처하고 있는 것을 정탐한 우쯔시코오의 특수부대는 코세(御所)에 있던 이나키에 불을 질러 그들 자매를 불태워 죽인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의 공권력이 유린되고 그녀의 부친과 고모가 희생되었다. 서기 272 년 경이다. 스이닌은 이 작전의 책임자 야쯔나다(八綱田)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효고현(兵庫県) 토요오카시(豊岡市)에 이즈시신사(出石神社)가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제신(祭神)의 아메노히호코(天日槍命)는 신라의 왕자였으나 8 종의 신보를 가지고 도래하여 타지마국(但馬国)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타지마국(但馬国)을 점령하고 이곳에 궁을 지었다. 그는 점차 세력을 키워 타니하국(丹波國, 현 쿄오토오 지역)을 거쳐 야마시로(山城), 오우미(近江), 와카사(若狭), 에찌젠(越前)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야마토의 왕이 된 적은 없다.야마토의 마키무쿠(纒向)에 도읍하고 타마키궁(珠城宮)에 거주했다는 일본서기 기록은 허구이다.
그가 야마토의 권위를 무시하고 야마토의 북쪽 국경을 위협하고 있던 시절에도 일여는 여전히 야마토의 왕이었다. 서기 270년 대의 그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그가 남긴 후손을 살펴 보는 것이다. 스이닌(垂仁)천황의 첫 황후는 사호히메(狭穂姫命)이다. 그녀는 서기 272년 경 코세(御所)의 이나키(稻城)에서 살해되었다. 고사기는 사호히메가 히코이마스(彦坐王)의 딸이라 하였으나 그것이 오류임을 지적했다. 그녀는 코토시로누시의 딸이다. 코세(御所)는 코토시로누시의 근거지이며 카모쯔바(鴨都波)신사가 있는 곳이다. 스이닌의 두번 째 황후는 타니하국(丹波國)의 히바스히메(日葉酢媛命)로 야마토히메(倭姫命)를 낳았다.
야마토히메는 비교적 역사적인 인물로 이세(伊勢) 땅에 아마테라스(天照大神)를 모신(현 이세신궁) 황녀이며 이것이 제궁(斎宮)의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전해 온다.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공주이며 신녀였다. 스이닌이나 야마토히메에게 아마테라스는 구야국 왕실의 조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야국의 후손인 스이닌이 자기 조상을 위하여 이세신궁을 지은 것이다. 그가 야마시로에 있던 서기 295년 경 야마토 히메를 시켜 아마테라스를 모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현 이세신궁 자리를 골랐다. 야마토 천황가가 천손강림 신화를 만들면서 아마테라스를 천황가의 신으로 둔갑시켰지만 야마토히메가 아마테라스를 모실 터를 고르고 있을 무렵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조상신이었다.
야마토 히메는 야마토 타케루가 서기 320년 대의 정벌전쟁에 올인하고 있을 때 그를 도왔으며 이세신궁에 보관하고 있던 아마노 무라쿠모노 쯔루기(天叢雲剣, 열도 지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신물)를 그에게 내어주었다. 야마토히메는 서기 270년 대 중반의 인물로 야마토 타케루보다 한 세대 앞 선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서기는 야마토 히메를 야마토 타케루(日本武尊)의 숙모라고 기술했다. 이 보검은 지금 나고야의 아쯔타신궁(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으며 스사노오가 이즈모국 (出雲国)에서 퇴치한 야마타노 오로찌(八岐大蛇)의 꼬리에서 나왔다고 하나 이 검의 내력과 관련된 역사적 진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스사노오(백제의 초고왕)가 이 세형동검을 야마타이국의 히미코에게 신표로 주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추측이다. 스사노오는 오시호미미(天忍穂耳尊)의 아버지이므로 아마테라스는 당시의 백제왕 스사노오의 위세를 빌어 오시호미미가 큐우슈우를 지배할 명분을 확보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카라노쿠니(加羅国)의 왕자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는 토요오카시(豊岡市)의 이즈시신사(出石神社)에 군림하면서 서기 272년 게릴라부대를 야마토에 보내 전처 사호히메를 불 태워 죽였다. 그리고 그 무렵 히바스히메와 혼인하였다. 고사기가 기록한 히바스히메의 족보는 히코이마스(日子坐王, 彦坐王) – 미찌누시(丹波道主命) – 히바스히메 (氷羽州比売命, 日葉酢媛命)로 되어있다. 그러나 히비스히메가 서기 250년 대의 인물이고 히코이마스가 270년 대의 인물이니 이 계보는 맞지 않는다.
스이닌(垂仁)을 스진(崇神)의 아들로 만들기 위하여 스이닌 주변 인물들의 족보가 무리하게 편집된 탓이다. 그러나 스이닌은 서기 240년 대, 스진은 서기 270년 대의 사람이다.
스이닌 32년 두번 째 황후 히바스히메(日葉酢媛命)가 죽었다. 스진 34년 야마시로(山背)의 오토 카리하타토베(弟苅羽田刀弁)를 후궁으로 하였다. 그녀가 후타지 이리히메(両道入姫命)를 낳았다. 후타지 이리히메는 야마토 타케루와 혼인하여 쥬우아이(仲哀)천황을 낳았으니 서기 300년 경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히바스히메의 사망은 서기 290년 대 전반으로 보이며 이 무렵이면 스이닌의 나이도 50대에 들어섰을 것이다.
스이닌의 두번 째 황후 히바스히메는 타니하국(丹波國, 현 코오토오 지역)출신인데 그녀가 사망한 뒤 야마시로(山背)출신의 오토 카리하타토베와 혼인하였다. 이는 서기 290년 대 스이닌(垂仁)의 활동반경이 야마시로지역으로 이동했음을 나타낸다. 야마시로는 후일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帯比売命, 気長足姫尊, 神功皇后)의 근거지이다.
쿄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 쿠미야마쬬(久御山町) 이찌타(市田)에 스이닌천황(垂仁天皇)을 모시는 타마키신사 (珠城神社)가 있다. 이찌타는 스이닌천황의 궁성, 타마키궁(珠城宮)이 있던 자리이며 궁성터에 신사를 지었으므로 타마키신사(珠城神社)라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스이닌의 타마키궁이 야마토의 마키무쿠(纏向)에 있었다고 하였다.
서기 290년 대 스이닌천황은 코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에 진출하여 타마키궁(珠城宮)을 지었다. 아마토의 북부지역 대부분이 그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서기 280년 대 초반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진무시대에 출세가도를 달리던 오토우카시(弟猾)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코토시로누시의 아들이다. 다른 이름은 오호모노누시 쿠시미카타마 (大物主櫛甕玉)이다. 일본서기는 그를 코우안(孝安)천황이라 기록하였다.
서기 287년 야마토에 전란이 닥친다. 서기 285년 모용외(慕容廆)의 공격에 의하여 만주 대륙에서 부여의 전군이 격파되고 부여왕 의려(依慮)는 배를 타고 부여를 탈출하여 야마토까지 피난하였다. 야마토는 부여의 피난민을 당하지 못하고 야마토의 왕 오호모노누시와 그의 아들 오호타타네코(大田田根子)는 도망쳤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이 야마시로의 키즈강(木津川)가에서 벌어진다.
일본서기는 이 사건에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의 반란이란 제목을 달았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 추 7월 천황은 사도장군(四道将軍)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사도장군의 한 사람인 오호히코(大彦)의 군세가 와니고개(和珥坂, 天理市和珥)를 넘을 때 일족의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황은 오호히코(大彦)와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를 야마시로(山背)에 파견하여 하니야스비코(埴安彦)를 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와니고개(和珥坂)를 넘어 정예군을 이끌고 나라산(那羅山, 奈良市北部 丘陵)에 올라 싸웠다. 그리고 와카라강(輪韓河, 木津川)까지 진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하니야스비코 (埴安彦) 군과 대치한다. 양군이 키즈강 (木津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하니야스비코(埴安彦)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의 군세를 바라보며 “왜 너는 군세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느냐?”하고 물었다.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너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자(者)다. 너는 제사권(祭祀権)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관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온 것이다. 이는 천황의 명령이다.”라 대답했다. 그래서 신(神)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활을 쏘았는데 맞지 않았다. 다음에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활을 쏘자 가슴에 명중하여 하니야스비코 (埴安彦)가 죽었다. 이것을 본 적군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관군은 강을 건너 북쪽의 적을 쳐부수고 반 이상의 목을 베었다.
하니야스비코(埴安彦)와 오호히코(大彦)는 어머니는 다르지만 사호히코 왕(狭穂彦王)의 아들이다. 히코쿠니부쿠(彦国葺)는 하니야스비코의 조카이다. 오호히코(大彦)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는 부여의 의려(依慮)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였고 하니야스비코(埴安彦)는 외적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국난을 당하여 집안끼리 적이 되어 싸운 것이다. 부여의 난민을 이끌고 온 의려가 야마토의 왕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그를 코우안(孝安)의 아들, 코우레이(孝靈) 천황이라 하였다. 스진 10년이라는 일본서기 기록은 오류이다. 스진은 서기 300년 야마토에 들어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서기 287년이며 타케하니야스는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던 충신이었으나 만세일계라는 황실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일본역사는 그를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이름을 감춘 채 쿄오토오의 카미카모신사에서 제신으로 모신다. 명예는 잃었지만 제삿밥은 얻어먹는 셈이다.
쿄오토오시(京都市)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는 보통 카미가모신사(上賀茂神社)로 불린다. 짝을 이루는 가모미오야신사(賀茂御祖神社)가 있는데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로 불린다. 불행하게도 가모와케 이카즈찌 (賀茂別雷)라는 인물이 역사상의 누구인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시모가모신사는 진무동정시 야마토에 진출한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와 그의 딸을 제신으로 모신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가모와케 이카즈찌(賀茂別雷)라는 익명으로 처리된 사람의 실명을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라고 보는 것이다. 황실과 국가를 동일시하였던 일본은 타케하니야스비코의 역사적 의미 해석에서 혼란을 보일 수 밖에 없다.
타케하니야스비코는 반란을 일으킨 수괴로 만들고 카미가모신사의 제신은 가모와케 이카즈찌라는 가공의 이름으로 처리하였다.
이 부분의 일본 고대사를 해석하는데 가모와케 이키즈찌의 실명이 타케하니야스비코라고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일본 고대사 해석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내용을 포함한다. 이는 학계에서 말하지 않는 역사가 거론되고 있음을 뜻한다.
코우레이(孝靈)천황 시대 야마토 역사의 아이돌은 야마토 토토히 모모소(倭迹迹日百襲姫)이다. 그녀는 코우레이가 축출한 전왕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의 아내이다. 그녀에 관한 기사도 스진(崇神) 천황기에 들어 있다. 이름이 너무 길어 그냥 모모소히메(百襲姫命)라 칭한다.
모모소히메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 해 온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카미는 낮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밤에만 나타났다. 모모소히메가 남편에게 졸랐다. “야밤에만 오시니 얼굴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워요. 아침까지 계시면…?”. “그럼 내일 아침 당신의 머리빗 통 속에 있을테니 놀라지 마오!”
모모소히메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 빗통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 작은 뱀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카미는 다시 사람의 모습이 되어 “네가 나를 수치스럽게 하였으니 나 또한 너를 수치스럽게 하리라.” 하고 말했다. 모모소히메는 미모로산(御諸山, 三輪山)에 올라 하늘을 쳐다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다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져 앉았다. 그때 젖가락에 음부를 찔려 죽고 말았다.
모모소히메는 오호찌(大市, 大和国 城上郡 大市郷, 현 桜井市 北部 마키무쿠(卷向) 유적지)에 매장되었는데 그런 전설 때문에 그녀의 무덤을 하시하카(箸墓, 箸墓古墳)라 부른다. 이 무덤은 낮에는 사람이 만들고, 밤이면 귀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오호사카산(大坂山, 香芝町)의 돌을 날라 만들었는데 산에서 무덤까지 인민들이 열을 지어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했다고 한다.
신화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신화를 너무 현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는 것을 배격한다. 서기 287년 부여의 의려의 공격으로 야마토의 왕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가 패하고 도망쳤다. 그의 아내 모모소히메는 죽음을 면하고 살아 남았다. 늙은 도망자가 밤이 되면 몰래 아내를 찾아 왔다 새벽이 되면 산으로 피신하곤 하였다.
뱀이니 젖가락이니 하는 이야기는 본질이 아니며 패전한 전왕과 왕후의 눈물겨운 해후가 밤 사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뱀은 남 모르게 움직여야 되는 비밀스러움을 나타내고 젖가락은 남녀로 맺어지는 운명적인 연대를 암시한다.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는 지금 나라(奈良)의 미와산 기슭에 있는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의 제신이다. 카모씨에서 갈려 나온 그의 후손들이 미와(三輪)씨로 불린다. 오호모노누시는 스사노오의 증손이다.
모모소히메는 코우레이(孝靈)천황 치세에 살아 남아 스진(崇神)시대까지 살았다. 그녀는 전후 정권은 물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는지 일본 역사상 가장 화려한 매장 의식이 거행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하시하카가 일본 전방후원분의 효시이기 때문이다.
코우레이(孝靈) 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하자 타니하국(丹波國, 현 코오토오 지역)의 스이닌 천황은 쿄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까지 진출하여 타마키궁(珠城宮)을 짓고 아마토의 턱밑까지 진출하였다. 나라(奈良)분지의 남북에서 코우레이와 스이닌이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 전쟁에 돌입한 기록은 없다. 피차간 서로 상대를 공격할 힘이 없었던 모양으로 서기 300년까지 그러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서기 300년 부여의 의라가 또 다시 난민을 이끌고 와 열도를 장악한다. 그가 스진(崇神)이다. 스진은 스이닌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스이닌은 스진에게 패하여 열도를 떠나 쯔시마(對馬)로 쫒겨났다. (69. 부여의 엑소더스 참조).
앞에서 인용된 스이닌기의 기록을 보자. “그 사이 스진(崇神)은 죽었고 스이닌(垂仁)이 즉위하자 그를 모신지 3 년이 지난 어느 날 천황이 고향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향 생각이 간절하던 참입니다.” “네가 길을 잃고 헤메지 않고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선제(先帝)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미마키(御間城)천황(崇神)의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
위의 기사 가운데 앞의 부분은 소설이다. 그러나 “그러니 미마키(御間城) 천황(崇神)의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는 언사는 스진이 스이닌을 쯔시마(對馬)로 추방하며 내린 명령이다. 위의 기사에 의거하여 쯔시마(對馬)를 미마나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마나(任那)라는 지명이 역사상 처음 나타나는 기록이다. 이 지명은 세월이 지나면서 한반도의 가야를 지칭하는 것처럼 의미가 왜곡되어 임나가야로 발전한다.
도망친 아내에 대한 증오로 아내를 뒤쫓아 열도에 들어 온 아메노히호코(天日槍)는 전처 사호히메를 불 태워 죽이고 열도에 수 많은 후손을 남긴 뒤 말년에 쯔시마로 쫓겨갔다. 그는 쯔시마에서 죽어 거기 묻혔을 것이다. 일본서기는 그를 스이닌(垂仁)천황이라 기록하였다.
일본서기 스이닌기의 마지막에 “타지마모리(田道間守)의 순사(殉死)”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아메노히호코 (天日槍)가 타지마국(但馬国)에 와 정착하고 마에쯔미미(前津耳)의 딸 마타노오(麻陀能烏)와 혼인하여 타지마 모로스쿠(但馬諸助)를 낳았다. 그가 키요히코(清彦)의 할아버지이다. 스이닌 90년 봄 2월 천황이 귤을 구해 오라고 타지마모리(田道間守)를 구야국(常世国, 멀고 먼 상상의 나라)에 보냈다. 99년 가을 7월 천황이 죽었다. 향년 140세였다. 다음 해 3월 타지마모리가 귤 열매와 나무를 구해 왔으나 천황이 이미 붕어한 것을 듣고 쓰러져 절규하더니 숨이 끊어졌다.
이 기사는 쯔시마에서 죽음을 맞는 스이닌과 관련된 기사이다. 평안한 죽음은 아닌 듯 그를 모시던 타지마모리가 약을 구하러 구야국에 가야 할 정도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병 치레를 했던 모양이다. 타지마모리는 위에 나온 키요히코와 형제간이다. 고사기는 타지마모리와 키요히코가 아메노히호코의 4대손이라 하였으나 이는 고의적으로 시간을 늘리기 위한 구실이다. 아메노히호코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네 아들이 마치 네 세대였던 처럼 기록하여 연대를 늘리고자 하였다. 먼 곳 (구야국) 에 가서 약을 구해 왔으나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으니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는 이야기이다.
타지마모리와 키요히코의 등장은 훗날 태어 날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帯比売命, 気長足姫尊, 神功皇后)의 신화를 여기 연결하기 위한 배려이다.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의 어머니가 이 가문 출신으로 아메노히호코의 손녀이다.
일본서기는 진무(神武, 초대) - 스이제이(綏靖, 2대) – 안네이(安寧, 3대) – 이토쿠(懿德, 4대) – 코우쇼우(孝昭, 5대) – 코우안 (孝安, 6대) – 코우레이(孝靈, 7대) – 코우겐(孝元, 8대) – 카이카(開化, 9대) – 스진(崇神, 10대) – 스이닌(垂仁, 11대) – 케이코(景行, 12대)로 천황의 순번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해석은 일본서기와 다르다. 우리는 진무(재위 245-256) – 일여(재위 257 – 283) – 코우안 (재위 284-287)– 코우레이(재위 288 – 299) – 스진(재위 300 – 318) – 케이코(재위 319 – 344)의 순이다. 그 밖의 인물들은 야마토의 왕이 된 적이 없다. 이토쿠(懿德)는 신대(神代)의 아지스키 타카히코네 (阿遅鋤 高日子根神)이며 신대의 왕이다. 일본서기는 니기하야히를 안네이(安寧), 코토시로누시를 코우쇼우(孝昭), 사호히코를 코우겐(孝元)으로 이름지어 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일여는 히미코의 종녀라 하였으나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다. 그녀는 역사적으로 절묘한 시기에 태어나 백제와 가야를 평화의 다리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백제와 가야 사이에 핀 한 송이 꽃(開花) 이었다. 꽃(花)은 일본어로 하나이며 하나는 한국어로 일(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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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삭제에 왜국뿐 아니라 백제, 고구려, 선사시대 이야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