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0일 월요일

74. 카미(神)에서 인간으로 ( I )


 

서기 239년 일본서기의 카미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로 전환된다. 모든 카미들이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인간으로 등장한다. 이름이 뒤죽박죽이 되어 카미와 인간의 동일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이 다르고 씨성의 계보도 어느 게 진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씨성의 계보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에 의지하여 자기 가문을 미화하고자 하므로 과장이 더 심하다. 진무천황 즉위년을 서력 기원 전 660 년이라는 가설아래 계보들이 제작되어 부분적인 진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로서는 가공의 세대가 삽입되어 불합리하다.      

혼란의 정점에 니기하야히(고사기 邇藝速日命, 일본서기 饒速日命)가 있다. 일본서기는 니기하야히도 큐우슈우의 니니기(瓊瓊杵)처럼 하늘에서 내려 와, 야마토를 다스리는 천신의 아들로 기록했다. 천신의 아들이면서 니기하야히는 큐우슈우의 정벌군에게 항복하여 이와레비코 (伊波礼毘古 = 火火出見 =神武天皇)의 신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우마시마지 (宇摩志麻遅命, 可美真手命 )는 모노노베노 무라지 (物部連)의 선조가 되었다. 

카미의 역사에서 스사노오의 아들 가운데 오호토시(大年神)가 있었다. 오호토시의 큰 아들이 오호쿠니미타마 (大國御魂)이며 다른 이름은 쿠시타마 니기하야히 (櫛玉饒速日尊)이다.  

따라서 스사노오 – 오호토시 – 니기하야히 – 우마시마지 라인이 모노노베 씨의 계보이다. 서기 239년 진무동정시 니기하야히는 마흔을 갖 넘은 나이였다.  스사노오 – 오호토시 – 니기하야히는 가모씨(鴨氏)이다.    

스사노오의 후계자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의 큰 아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는 야마토의 왕이었다. 진무동정시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와 나가스네히코(那賀須泥毘古, 長髓彦)는 큐유슈우의 정벌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니기하야히의 측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니기하야히는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의 신하였다.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아지스키 타카히코네 라인이 가모씨(鴨氏)의 본류이다.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는 니기하야히의 이름을“天照國照彦天火明 櫛玉饒速日尊”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이름의 전반부의 아메노 호아카리(天火明)와 뒷 부분의 니기하야히(饒速日尊)가 다른 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런 식으로 천지개벽 전후의 아이덴티티는 난맥상을 연출한다. 따라서 천지개벽 전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카미와 인간의 족보를 약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호아카리(고사기 天火明命, 일본서기 火明命)와 니기하야히(饒速日尊)는 동일인이 아니다. 전편의 카미의 역사에서 스사노오의 아들 가운데 오호쿠니누시, 오호토시 그리고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가 나왔다. 카미의 역사의 우카노 미타마가 인간의 역사의 호아카리이다. 그의 흔적은 타니하(丹波)지역에 많이 남아 있으며 진무이후 그의 아들 카모타케쯔누미 (賀茂建角見命)는 카즈노현주(葛野県主, 山城国葛野郡)가 되어 쿄오토(京都)로 진출하였다. 

모노노베씨(物部氏)와 오와리씨(尾張氏)는 니기하야히에서 갈려 나왔는데 옛 기록의 오류 때문에 호아카리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니기하야히를 야마토의 왕인 것처럼 등장시켜 이와레비코에게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야마토는 큐우슈우의 정벌군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하였다. 저항의 선봉에 에시키(兄磯城)와 나가스네히코(고사기 那賀須泥毘古, 일본서기 長髄彦)가 있었다. 따라서 니기하야히는 당시 야마토의 권력중추의 인물이 아니라 이와레비코와 내통하여 가문을 파멸로 이끈 배신자였다. 그의 아들 타카쿠라지(高倉下, 宇摩志麻遅)는 쿠마노(熊野)에서 난관에 처한 이와레비코를 구출하였다. 

인간의 역사의 에시키는 카미의 역사의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였다. 에시키와 니기하야히는 사촌간이다. 정벌군에게 저항한 나가스네히코(長髄彦)는 신대(神代)의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이다. 그는 오호쿠니누시의 아들로 타카히코네와 배 다른 형제이다.  카미의 역사에서 그는 이즈모(出雲)를 천손에게 양도하는데 반대하여 천손측의 타케미카즈찌(고사기 建御雷神, 일본서기 武甕槌)와 힘을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이는 그가 인간의 역사에서 천손측에 항거하는 선봉장임을 암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편에 나왔던 스사노오, 오호쿠니누시와 오호토시의 계보를 다시 삽입한다.

고사기에 스사노오의 계보(系譜)가 나와 있다.
1)     쿠시나다 히메(櫛名田比賣)가 야지마지누미(八嶋士奴美神)를 낳았다.
2)     카무오호이찌 히메(神大市比賣)가 오호토시(大年神)와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를 낳았다.

오호쿠니누시 (야지마지누미)의 계보중 역사상 중요한 인물만 고르면 다음과 같다.
1)     타키리비메 (多紀理毘賣)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와 타카히메(高比賣) 다른 이름은 시타테루히메 (下光比賣命)를 낳았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지금 카모대어신(迦毛大御神)으로 불린다.
2)     카무야타테히메 (神屋楯比賣)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을 낳았다.
3)     어머니가 분명하지 않은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

오호토시(오호쿠니누시의 배 다른 동생)의 계보는 많은 인물이 열거되어 있지만 우리가 거론하게 될 사람은 오호쿠니 미타마 (大國御魂神)와 오호야마쿠히(大山咋神) 다른 이름은 야마스에노 오호누시(山末之大主神)이다. 오호야마쿠히는 히에이산(日枝山)과 카즈노(葛野)의 마쯔오 (松尾)에서 제신으로 모신다. 

코노하나노 사쿠야히메(고사기 木花之佐久夜毘売、일본서기 木花開耶姫)도 혼돈의 원천이다. 그녀는 오호야마쯔미 (大山津見 )의 딸로 오호쿠니누시와 혼인하여 호데리(火照命)를 낳았다. 훗날 니니기를 만나 하룻 밤을 자고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들은 니니기는 “내 아이일 리 없어, 쿠니쯔 카미(國津神)의 자식일거야.”  (佐久夜毘賣 一宿哉妊 此胎必非我子 而為國津神之子) 라며 코노하나 사쿠야히메를 의심한다. 이는 코노하나 사쿠야히메의 첫 남편이 쿠니쯔 카미(國津神) 이었음을 암시한다. 쿠니쯔 카미란 오호쿠니누시를 말한다. 고사기는 그녀가 불속에서 호데리(火照命), 호스세리 (火須勢理命), 호오리 (火遠理命)의 3명을 한꺼번에 낳은 것처럼 기록했다. 마지막의 호오리가 호호데미(고사기 穂穂手見, 일본서기 火火出見)이며 진무천황이다. 

천손가는 아마테라스(天照大神), 오시호미미(忍穗耳命), 니니기(瓊瓊杵命), 호호데미 (火火出見命)로 혈통이 이어졌으며 그 이외의 곁가지들은 신화의 첨가물이다. 고사기는 오시호미미가 아메노 호아카리(天火明命)와 니니기(瓊瓊杵)를 낳았다고 하였고 진무천황을 호호데미의 손자로 묘사하였으니 고사기를 편찬한 역사가들까지도 혼돈의 시대의 실상을 헷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호데리(火照命)의 계보 역시 난맥상을 보인다. 그는 오호쿠니누시 (大國主神)와 코노하나 사쿠야히메 사이에 태어 난 아들이며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되었으나 큐우슈우의 쿠마소(熊襲)를 탐하여 대마도(對馬島)를 호호데미에게 주고 쿠마소를 취하였다. 호데리가 우미사치(海幸彦)였으며 호호데미가 야마사치(山幸彦)였다. 

스사노오의 아들 야지마지누미(八嶋士奴美神)가 오호야마쯔미(大山津見)의 딸 코노하나찌루 히메(木花知流比賣)와 혼인하여 후하노모지 쿠누스누 (布波能母遅 久奴須奴)를 낳았다. 

야지마지누미가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이며 코노하나 찌루히메가 코노하나 사쿠야히메이다. 후하노모지 쿠누스누가 바로 호데리(火照命)이며 쿠마소로 진출한 뒤 아다노 하야토(阿多隼人)씨의 시조가 되었다. 

야마토 정벌을 완료한 진무천황(神武天皇)은 서기 245년 1월 1일 카시하라궁(橿原宮)에서 즉위한 뒤 승전의 전공에 따라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미찌노오미(道臣命)에게 택지와 집을 내리고 오호쿠메(大來目)를 우네비산 서편 강가에 살게 하였다, 또 시이네쯔히코 (椎根津彦)를 야마토노 쿠니노 미야스코 (倭国造), 오토우카시(弟猾)를 타케다무라(猛田邑) 현주(県主)로, 오토시키(弟磯城, 黑速 )를 시키(磯城)현주로, 쯔루기네(剣根, 高倉下)를 카쯔라기노 쿠니노 미야스코(葛城国造)로 임명하였다. 또 야타가라스(八咫烏) 에게 상을 내렸다. 그의 자손이 카즈노(葛野) 현주(県主) 이다 (山城国葛野郡).  

 새로운 정권에서 요직을 맡아 출세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권이 바뀌면서 몰락하는 구정권의 실세들이 있다. 소호노 아가타(層富県) 하다(波多)의 오카사키(丘岬)에 니이키도베(新城戸畔)라는 여두목이 있었다. 또 와니(和珥 - 天理市) 고개 밑에 코세노 하후리(居勢祝) 라는 자가 있었다. 호소미의 나가라(臍見の長柄) 오카사키에 이노하후리(猪祝) 란 자가 있었다. 이하레비코(磐余彦尊 – 진무천황의 다른 이름)는 군사를 보내 이들을 모두 죽였다. 또 타카오와리 마을(高尾張邑)에 쯔찌쿠모(土蜘蛛 – 항거하는 토착민)가 있었다. 그들은 키가 작고 손발이 길었다. 이하레비코의 군사들은 이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새로운 정권의 실세로 등장한 미찌노오미와 오호쿠메 그리고 시이네쯔히코는 큐우슈우에서부터 호호데미와 동행하였으므로 정권의 실세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오토우카시, 오토시키, 쯔루기네 그리고 야타가라스가 누구인가이다.

오토우카시(弟猾)는 침략자에게 항거하던 자기 형을 적에게 고발하여 죽게하고 전쟁이 끝나자 타케타(猛田) 현주가 되었다.  그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아들로 진무치하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는 여러 개의 이름을 남겼다. 카모누시(鴨主命), 아메노히카타 쿠시히카타 (天日方奇日方), 쿠시미카타마(櫛甕玉), 쿠시미카타 (櫛御方), 오호모노누시 쿠시미카타마 (大物主櫛甕玉)등이다. 그는 진무의 황후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気余理比賣)와 동기간이니 진무천황의 처남이 된다. 

진무이후의 인간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고사기 大倭帯日子国押人命 (オホヤマトタラシヒコクニオシヒト), 일본서기 日本足彦国押人 (ヤマトタラシヒコクニオシヒト) 天皇(第6代孝安)으로 나타난다. 

오토시키(弟磯城, 黑速)는 침략자에 대항하던 형 에시키(兄磯城)를 등 지고 적과 내통하여 전쟁이 끝난 뒤 시키(磯城)현주가 되었다.  그가 바로 니기하야히이다.  니기하야히는 호호데미에게 항복하여 시키(磯城)현주가 되고 그의 아들 우마시마지(宇摩志麻遅, 高倉下, 劍根)는 카쯔라기노 쿠니노 미야스코(葛城国造)가 되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니기하야히는 고사기 師木津日子玉手見命 (シキツヒコタマデミ), 일본서기 磯城津彦玉手看 (シキツヒコタマテミ)天皇(第3代安寧)으로 기록된다. 

 야타가라스(八咫烏)는 의문의 인물로 전쟁의 논공행상으로 카즈노 현주 (葛野県主)가 되어 쿄오토(京都)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는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의 아들, 카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이며 쿄오토의 시모가모신사의 제신이다.  스사노오 – 우카노미타마 – 카모타케쯔누미 라인 역시 가모씨(鴨氏)이다.

그런 인연으로 쿄오토시(京都市)  후시미 이나리대사(伏見稲荷大社)에서 우카노미타마를 제신으로 모신다. 후시미 이나리대사는 전국 약 4만개의 이나리신사(稲荷神社)의 총본궁이다. 일본사람들은 이나리신(稲荷神)이 농업의 신이며 오곡풍양, 상업번성, 교통안전을 가져온다고 한다.


진무는 야마토를 점령하고 현지의 여인을 취하여 정비로 하였다.  그의 나이 51세 때이니 혼인할 나이는 아니지만 정치에는 정치의 논리가 있다. 야마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현지의 실력자의 딸과 혼인하여 피 지배층의 협조를 얻고자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선택된 여인을 고사기는 미시마노 미조쿠히(三島湟咋) 의 딸 세야다타라히메 (勢夜陀多良比賣)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사이에 태어 난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気余理比賣), 일본서기는 미시마노 미조쿠히미미 (三嶋溝杙耳)의 딸 타마쿠시히메(玉櫛媛)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사이에서 태어 난 히메타타라 이스즈히메 (媛蹈鞴五十鈴媛)라고 했다.

카미의 역사의 오호토시(大年神)가 인간의 역사에 기록된 미시마노 미조쿠히(三島湟咋 )이다. 진무천황의 새로운 황후 이스즈히메의 아버지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 어머니는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이다. 

이스즈히메 (五十鈴媛)는 당시 스무 살 정도의 나이일 것이다. 그러면 정복자가 파트너로 선택한 야마토 현지의 실력자 코토시로누시 (事代主神)란 어떤 인물일까?  그는 오호쿠니누시와 카무야타테히메 (神屋楯比賣)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당시의 야마토의 왕,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의 배 다른 동생이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살해되고 그 동생 코토시로누시의 딸이 진무천황의 황후가 됨으로써 코토시로누시 가문은 전쟁의 피해를 면하고 이후의 야마토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 라인 역시 가모씨(鴨氏)이지만 그의 후대에서 미와(三輪),  와니(和珥, 和邇, 丸邇)를 위시한 수 많은 씨성으로 분리된다. 


 
카쯔라기(葛城)에 있는 3개의 카모(鴨)신사 가운데 고세시(御所市)의 타카카모신사 (高鴨神社)는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를 모시며 카모쯔바(鴨都波神社, 下鴨社) 신사는 코토시로누시를 모신다. 카쯔라기 미토시(葛木御歳神社)신사는 오호토시(大年神)를 모시며 나카가모(中鴨)신사라 불린다. 이들은 모두 스사노오의 후손으로 야마토를 건설한 장본인들이다.


전편 “73. 신대의 역사”에서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의 야마토 진출과 관련된 기사가 나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호쿠니누시가 물으니 “너는 나의 사키미타마(幸魂)  쿠시미타마(奇魂)다.”라 하였다.
“과연. 당신이 나의 사키미타마 쿠시미타마였군. 지금부터 어디서 살 생각입니까?” 하였더니 “나는 야마토노쿠니 (日本國)의 미모로산(三諸山)에 살고자 한다.” 그래서 그 땅에 궁전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것이 오호미와노 카미 (大三輪之神)이다.



미모로산(三諸山)은 지금 미와산(三輪山)으로 불리는 높이 467 미터의 산이다. 미와산 기슭에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가 있고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를 제신으로 모신다. 일본서기나 고사기의 오호모노누시란 명칭은 일관성이 없다. 어떤 곳에서는 오호쿠니누시, 또 다른 곳에서는 코토시로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오호모노누시를 코토시로누시의 두째 아들로 고정하여 사용한다.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 – 오호모노누시 라인이   미와씨(三輪氏)를 이룬다. 코토시로누시는 인간의 역사에서 고사기 御真津日子訶恵志泥命 (ミマツヒコカヱシネ), 일본서기 観松彦香殖稲,  (ミマツヒコカヱシネ, 孝昭)로, 오호모노누시는 고사기 大倭帯日子国押人命 (オホヤマトタラシ ヒコクニオシヒト), 일본서기 日本足彦国押人 (ヤマトタラシ ヒコクニオシヒト, 孝安) 으로 표기되었다.

이스케요리히메와 오토우카시(弟猾)의 아버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아내를 고사기는 미시마노 미조쿠히(三島湟咋)의 딸 세야다타라히메 (勢夜陀多良比賣), 일본서기는 미시마노 미조쿠히미미(三嶋溝杙耳)의 딸 타마쿠시히메(玉櫛媛) 라 하여 단 한 명의 아내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왕조가 파트너로 선택할 정도의 실력자에게 아내가 하나 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호호데미의 동정이전 야마토의 왕이었던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기록은 없으나 그에게는 많은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코토시로누시와 혼인한 딸도 있었을 것이다. 진무동정시 처형된 소호노 아가타(層富県) 하다(波多)의 오카사키(丘岬)에 니이키도베(新城戸畔)라는 여두목이 있었다. 우리는 이 니이키도베를 타카히코네의 딸이며 코토시로누시와 혼인한 여인으로 본다. 물론 니이키도베는 익명이다.

스이닌(垂仁)천황 황후로 사호히메(고사기 沙本毘賣命, 일본서기 狭穂姫), 다른 이름은 사하지히메 (佐波遅比賣)가  등장한다. 그녀에게 사호히코(고사기 沙本毘古王, 일본서기 狭穂彦王)라는 오빠가 있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이들의 족보를 엉뚱한 곳에 붙여 놓았다. 어머니를 사호노 오호쿠라미토메 (沙本之大闇見戸売)라 하였는데 위에서 처형된 니이키도베(新城戸畔)와 동일인으로 본다. 그녀는 타카히코네의 딸이며 아버지와 운명을 함께 하였을 터이다.

사호(沙本)라는 말은 나라시(奈良市) 중심부를 흐르는 사호천(佐保川)에서 연유하는데 모계(母系)의 근거지가 사호천 주변일 것이다. 그래서 아들과 딸이 사호히코 사호히메라 불렸다. 이렇게 등장하는 사호히코는 코토시로누시의 아들이다. 고사기는 이들의 아버지를 히코이마스(日子坐)라 하여 엉뚱한 곳에 붙였다. 그러나 히코이마스는 서기 270년 경의 인물이며 사호히코(狭穂彦王)는 서기 220년 대의 사람이다. 혈통으로 따지면 코토시로누시 - 사호히코 – 일여 – 히코이마스로 된 것인데 역사는 히코이마스가 사호히코의 아버지라고 기록한 것이다.

진무동정중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호히코는 야마토를 떠나 구야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구야국에서 그 나라 공주와 혼인이 이루어졌다. 공주의 이름을 우쯔시코메(고사기 内色許売命, 일본서기 欝色謎命)라 하였으며 일여(壹與)를 낳았다.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서 일여를 히미코의 종녀(宗女)라고 한 것은 일여의 어머니가 구야국의 공주이므로 히미코와 같은 집안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여가 히미코의 종녀라는 것은 구야국 왕실의 계보에 따른 것이다.


진무치하 야마토에서 코토시로누시의 안전이 보장되므로써 구야국에 피신해 있던 사호히코도 신변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고 야마토로 돌아 왔다. 일여(壹與)는 구야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사호히코와 우쯔시코메가 오호히코(大彦)와 일여(壹與)를 안고 야마토에 돌아간 것은 서기 245년 경의 일이다. 

서기 245년 나이 51세에 야마토의 천황이 된 진무는 서기 256년 경 사망하였다. 그가 큐우슈우에서 낳은 첫 아들 타기시미미 (고사기 当芸志美美命, 일본서기 手研耳命)는 서기 215년 경 출생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이스케요리 히메보다 연상의 나이일 것이다. 그는 진무동정시 24세의 청년이었다.  

서기 256년 진무천황 사망시 타기시미미의 나이 41세, 진무와 이스즈요리히메 사이에 태어 난 아들이 10세 쯤이다. 타기시미미는 그 동안 정치에 참여하였고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를 위치에 있었다. 진무 사망후 그의 권력승계는 이스즈히메 황후측의 반대로 좌절되고 야마토는 내전상태에 빠진다. 야마토의 기존 세력들이 큐우슈우 세력의 왕위승계를 반대한 것이다. 큐우슈우와 야마토 세력간에 내전이 격화되고 그 와중에서 타기시미미가 살해된다.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 정시중(正始中, 240-249) 히미코가 죽고 다시 남자 왕을 세웠으나 나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고 서로 싸워 히미코의 종녀 일여(壹與)를 왕으로 세웠다. (正始中 卑彌呼死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復立卑彌呼宗女 壹與年十三為王 國中遂定). 

큐우슈우의 히미코는 서기 247년 이전 어느 땐가 사망하였다. 위의 기록은 서기 256년 진무 사망 후 야마토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진무가 죽자 큐우슈우에서 온 정복자 그룹과 야마토의 가모씨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양쪽의 혈통을 가진 일여(壹與)를 왕으로 추대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 진다. 일여(壹與)는 사호히코와 우쯔시코메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서기 257년 나이 13세의 소녀 일여(壹與)가 야마토의 왕이 되자 평화가 찾아왔다.  일여(壹與)는 고사기에서 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ワカヤマトネコヒコオホビビ), 일본서기 稚日本根子彦大日日 (ワカヤマトネコヒコオホヒヒ, 第9代 開化)로 표기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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