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6일 화요일

93. 崇峻天皇の弑



日本書紀は西紀592年崇峻天皇が弑害されたと記錄した. 弑害したのは天皇の大臣蘇我馬子である. 天皇を弑害した蘇我馬子はその後もなにもなかったように大臣として政局を主導した. 天皇家を天孫族として崇仰する日本書紀のスタイルとしては珍しい歷史の展開である. 臣下により天皇が弑害された唯一の例で死亡した当日に葬ったことと陵地陵戸がない ことは 他に例が 無い.

日本書紀巻二十一用明崇峻紀 治世5年 (592) 冬10月4日、猪を奉る者があった。天皇は猪を指さして言った。
天皇> いつの日かこの猪の頸を斬るように、自分が憎いと思う奴を斬りたいものだ。
朝廷で武器を集めることが、いつもと少し違っている事があった。
10日、蘇我馬子宿禰は天皇が言ったという言葉を聞いて、自分を嫌っていることを警戒した。一族の者を招集して、天皇を弑することを謀った。
11月3日、馬子宿禰は群臣を騙して言った。
蘇我馬子> 今日、東の国から調を奉って来る。
そして東漢直駒(やまとのあやのあたいこま)を使って、天皇を弑したてまつった。この日天皇を倉梯岡陵(奈良県桜井市倉橋)に葬った。

日本書紀は上のように事件の成行きをコメントしているがこれは書紀の創作にすぎない. この位いの事由で臣下が天皇を殺すなんてありえない. 蘇我馬子が崇峻天皇を弑害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もっと深刻な理由があったはずである. 法的責任からの免除をも包めて.

崇峻天皇はなぜ臣下により弑害されたのか?

用明治世元年(586) 穴穂部皇子が炊屋姫皇后を犯そうとし皇后が天皇の殯宮にいたところを押し入った. しかし先の天皇の寵臣であった三輪君逆(みわのきみさかう)が 兵衛を呼んで宮門をかため防いで入れなかった.

この記事から始まった政変(587)は穴穂部皇子, 宅部皇子, そして物部守屋討伐につづく.  この政変に関する日本書紀の說明は勿論造り話で炊屋姫皇后を犯そうとしたとか佛敎導入に見解差があったとかは日本書紀の論理に過ぎない.

この政変で勝った蘇我馬子,  炊屋姫らが泊瀬部尊(崇峻天皇)に勧めて即位の礼を行ったのは588年でその後大和國が本音を明かにするのは591年だった. 587年の政敵討伐は591年戦爭開始の前哨戦である。

崇峻治世4年 (591) 夏 秋8月1日、天皇は群臣に訪ね言った。
天皇> 自分は新羅によって滅ぼされた任那を再建したいと思うが、卿等はどう思うか。
群臣は相談し代表して馬子宿禰が答えて言った。
蘇我馬子> 任那の官家を復興すべきであります。みな陛下の思召しと同じです。
冬11月4日、紀男麻呂宿禰、巨勢猿臣、大伴嚙連、葛城烏奈良臣を大将軍に任じ、各氏族の臣や連を副将、隊長として二万余の軍を従えて筑紫に出兵した。

任那の官家を復興すべきとは見慣れた日本書紀の建前である. 591年11月4日筑紫に出兵, 592年11月3日崇峻弑害, そして11月5日 早馬を筑紫の将軍達のところに遣わして「国内の乱れによって 外事を怠ってはならぬ」と伝えたというのが日本書紀の內容である.

591年11月4日筑紫に出兵したのは 討伐しなければならない統治權力が當時九州に存在した證據である. 日本書紀が話したくない九州の統治權力はその年, 法興年號を宣布し國の上下が一致團結して大和の侵略軍と戦う. 1年餘りの戦爭は大和の敗北でおわった. 日本書紀が話したくない九州の統治權力が敗戦國大和に要求したのが崇峻天皇處刑, 大和に寺の建立, そして大和の制度改革であった. 蘇我馬子は九州の統治權力の要求にしたかって崇峻天皇を處刑し大和國は九州に服從 を誓って戦爭は 終った. 炊屋姫の卽位も勿論九州の承認の下での出來事である.

釈日本紀が引用した古書「伊予風土記」逸文の”法興6年(596)10月 我が法王大王が慧慈法師及び葛城臣とともに…”での法王大王こそ當時豊国の大王で慧慈法師は彼の佛法興隆を支援する任務をしていた. 大和に法興寺が建られる前に九州には幾つかの寺刹が建られていた. 當時九州はすでに佛敎を受容していたと思われる.

隋書倭國傳は開皇二十年(600年)倭王、姓は阿毎、字は多利思比孤、号は阿輩雞彌、遣使を王宮に詣でさせるとした.

日本書紀は話したくない歷史は躊躇(ためら)わなく歪曲または隱す. 九州の歷史を隱すから隋書倭國傳に出る多利思比孤という名の九州王 が日本書紀に出て來ない. もし記錄する必要がある場合多利思比孤という名は使わない. ばれないように変名を使う. だから日本書紀の歷史は謎に包まれている. 多利思比孤は息長足日広額天皇 (敍明天皇)の名の中の足日広に當るか? と推測するのが 精一杯であるからだ.

するとどうして九州に大和より上位の統治權力があったのか?

日本書紀が話したくないこの疑問に答えるためには安閑宣化時代に戾らなければならない.

532年卽位した安閑天皇は関東から九州まで屯倉を全國的規模に設置, 難波の大隈と 媛嶋松原に牛を大量放牧すると同時に櫻井田部連, 縣犬養連, 難波吉士等に屯倉の税を司(つかさど)らせた.

536年卽位した宣化天皇は 元年(536) 夏5月1日 詔して言った.

“食は天下の根幹である。黄金が万貫あっても 飢えを癒すことはできない。真珠が千箱あっても寒冷から人を救うことができない. そもそも筑紫の国は遠近の国々が朝貢してくる所で行き来の関門となっている. 海外の国は海の様子や天候の状況をうかがってこの地に到来する. そのため応神天皇の時代から私の代まで稲穀を収蔵してきた. 凶作に備え賓客を接待する際に用いてきた。国の安泰のためにこれ以上のものは ありえないだろう.

よって朕は阿蘇仍君を派遣して 加えて河内国の茨田郡の屯倉の殻を運ばせよう。蘇我大臣稲目宿禰は尾張連を派遣して尾張国の屯倉の殻を運ばせよう。物部大連麁鹿火は新家連を派遣して新家屯倉の殻を運ばせよう。阿倍臣は伊賀臣を派遣して、伊賀国の屯倉の殻を運ばせよう。官家を那津之口(ナノツノホトリ)に作り立てろ。また 筑紫, 肥, 豐の三つの国の屯倉は散り散りになって遠く隔絶したところにある。運輸するには遥かに隔たっている。もし必要となって用いようとするならばすぐには備えるのは難しいだろう。諸々の郡に課して分けて移して那津之口に集めて立てて非常時に備えて長く民の命とするべきだ。早く郡県に下して朕の心を知らしめよ”

日本書紀巻第十八安閑宣化紀に注目する學者は稀であるが短い記事の中に深刻な事實が含まれている. 安閑66歲卽位(532) つづいて宣化70歲卽位(536), 二人共 短い4年在位の間ずっと追われたように急ぎ續ける. 安閑は全國的な屯倉の大量設置, 難波の大隈と 媛嶋松原に牛の放牧, そして屯倉の徵税を督勵する. 宣化は全國的な物流システムを整備, 全國の屯倉からの殻を 筑紫の那津之口に集める.

凶作に備え賓客を接待する際に用いてきたと詔は言っているが大和でもない難波でもない那津之口とは可笑しい.

日本書紀巻十七継体紀 治世23年 (529) 春3月 百済王は下哆唎国守穂積押山臣に語って言った。
百済王> 日本への朝貢の使者がいつも海中の岬を離れるとき風波に苦しみ船荷を濡らしひどく損壊します. そこで加羅の多沙津を我が国の朝貢の航路として頂きたく思います.
押山臣はこれを伝え奏上した. この月物部伊勢連父根 吉沙老らを遣わして多沙津を百済王に賜った.

那津之口の向うは百済の加羅の多沙津である. 継体紀529年の記事と安閑宣化紀の記事は密かに繫がる. 百濟は聖明王16年(538)熊津から泗沘(所夫里)に遷都した. 百濟の泗沘(所夫里)遷都と安閑宣化時代の全國的な屯倉設置は同時に推進 された百濟の緊急な懸案である. 百濟は日本列島の殻を筑紫の那津に集めて船荷を加羅の多沙津まで送る責任者を九州に常駐させた. 日本書紀, 古事記が言及したことのないこの官職をここで便宜上, 百済の九州王と呼ぶ. 九州王は 百濟の財政をバクアプする重要なポジシヨンであったにちがいない. 大和の抵抗にも拘らず安閑から皇極まで凡そ 100年の間九州王は全國の屯倉からの殻を筑紫の那津之口に集めて加羅の多沙津に送ったはずである.

百濟は九州王歷任者を大和王に轉任するようにしたと思われる. 宣化, 欽明, 敏達, 用明もそうだった. だから587年穴穂部皇子は自分が用明以後大和王に卽位するのは當前と考えていたにちがいない. 物部守屋は元の如し九州の決定に從う べきと考えただけである. 穴穂部皇子が炊屋姫皇后を犯そうとしたとはあるまい. 穴穂部皇子, 宅部皇子, 物部守屋を討伐した大和の蘇我馬子,  炊屋姫, 泊瀬部尊(崇峻天皇)らは百濟に反逆したことになる.

なぜ大和を長く管理して來た百濟王家の後裔たちは母國百濟と九州に背いたのか?

日本書紀は大陸の影響なしで倭の天皇家が存續してきたと宣布しているが大和國はガラパゴス諸島(Galápagos Islands) のような孤島ではない. 今まで崇峻天皇の弑の本質がクリアに理解できなかったのは當時の歷史をガラパゴス島內の政変として見たからである.

1620年メイフラワー号(Mayflower) に乘った102名の乗客がイギリス南西部プリマスから アメリカの マサチューセッツ 州 プリマスに渡って來た. そこで定着した移民者たちは1世代の人間は自分をイギリス人と思う. しかしあそこで生れた 世代はアメリカ人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持つようになる. 人間だれでも自分が慣ているところを國と思うのは自然である.

蘇我馬子(551– 626)は百濟人3世で大和國生れである(88. 磐井の乱のコペルニクス的転回 參照).  587年物部守屋討伐に動員された 泊瀬部皇子(29歲), 竹田皇子(15)、厩戸皇子(14)、難波皇子(19)、春日皇子(17)らは2世で大和國生れである.

磐井の乱から60年位い立つと大和國の空氣も大きく変わる. 大和國は 532年以來全國的な屯倉の殻を九州に奪われて自分たちの暮しが辛くなったとの不滿が廣がっていた. そして自ら大和王を選んで母國百濟と九州からの独立を追求した. しかし九州征討戦爭で九州に負けたのが崇峻天皇の弑の顚末である.

これが信じられなかったら推古時代の歷史を見るがいい. 九州に本の少しの隙さえ見えたら推古時代の大和國は九州征討 に出る. 日本書紀はその度任那の官家を復興すべきという見慣れた建前を流す. かわいそうに大和國の試圖は每度挫折 され大和は終に九州に合倂されてしまう. 629年九州王自ら征服君主として大和王に卽位したのが敍明天皇である.

推古時代現れる大和國の寺の建立と制度改革は九州の要求を受容した結果である. 大和國を正統として書れた日本書紀は九州に繫がる歷史を徹底に排除し大和國をガラパゴス島の國のように作り上げた. いつか調べ考える勇氣ある者が現われ明らかにするだろう.                                              
                                                                                                   - 終 –
 

2016년 1월 1일 금요일

92. 벽골제(碧骨堤)는 어떤 모습이었나?


김제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의 학예연구사 정윤숙이 쓴 “김제 벽골제의 문화적 생산력과 규모” 가 2009년 11월 한국농업사학회가 발행하는 “농업사연구”에 실렸다. 정윤숙은 서기 1415년 중수된 벽골제는 저수시설이며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까지의 약 3 km의 제방이 원평천과 두월천 유역을 수몰시켜 거대한 저수지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벽골제를 포함한 광역단위의 항공사진과 표고점, 등고선, 수계 등의 지리정보와 1975년 벽골제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실측 제방고 등의 자료를 지리정보시스템(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으로 분석하여 제방의 수심에 따른 수몰지역을 모니터링하고 저수지의 총둘레와 총면적을 추정하였다. 

1975년 발굴시 장생거(長生渠)의 제방고는 4.3m로 실측되었다. 제방의 지면은 대략 해발 4 m 정도이며 제내(堤內)의 최대수심을 3m (해발 7m) 로 볼 때 저수지의 수몰 총둘레는 68.6 km, 총면적 34.5 km2 로 결론지었다. 이 정도라면 저수량이 약 1억톤이다.

정윤숙이 내린 결론은 역사서에 씌여져 있다고 일반인들이 믿고 있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서의 기록 또는 해석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벽골제를 방조제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믿고 싶은대로 역사를 우상화하기보다 과거와 현재의 사실관계을 밝히려는 노력이 바람직하다.    

벽골제의 실제 모습을 탐구하려면 지난 날 사람들이 겪어온 자연환경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당시의 인력과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궁리해야 된다. 이를 위하여 몇 가지 의문에 대하여 검토한다. 

첫째 벽골제가 처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4세기 벽골제 부근은 육지였나, 바다였나? 바다였다면 김제평야는 만조시 어디까지 해수에 잠겼나?

두째 저수량 1억톤의 물을 필요로 하는 농경지가 그 시대 김제, 만경, 정읍, 부안 지역에 있었나?  

셋째 옛 사람들이 간척한 농경지에 설치한 배수 및 방조(防潮)시설은 어떤 모습일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은3세기 이곳에 벽비리국(辟卑離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백제 때 벽골군(碧骨郡)이 되었고 삼국사기는 서기 330년 벽골제를 축조했다고 하였다. 벽골제는 그후 신라, 고려, 조선대에 걸쳐 몇 차례의 중수를 하였으나 서기 1420년 제방이 붕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서기 663년 백강(白江)의 전투의 현장, 현 동진강 하구는 조석간만의 차가 최대 7.4m, 최소 4.0m이다. 조선말1872년 발행된 김제군 지도는 동진강 하구 남안이 만조시 수심1장(3m), 간조시 연륙(連陸) 된다고 기록했다. 부안 쪽으로 가면 만조시 수심 3장(9m), 간조시 연륙된다. 신평천 하구 북안은 만조시 1장, 간조시 연륙, 만경강 하구 북안 만조시 3장, 간조시 연륙된다. 연륙(連陸) 된다는 말은 간조시 갯벌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지금은 김제만경평야의 일부를 이루는 동진강 하구, 원평천 하구, 신평천 하구 , 만경강 하구가 1872년까지도 바다였다.

이 지역의 동진강, 고부천, 원평천, 두월천, 신평천은 감조하천(感潮河川)이다. 1920년대 이후 강의 하구에 제수문(制水門)이 설치되어 해수의 유입을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제수문이 설치되기 전까지 동진강의 해수는 태인까지, 원평천은 봉남면 신응리 - 종덕리까지, 신평천은 백산면 석교리까지 들어왔으므로 강물을 농업용수로 쓸 수 없었다. 

이 말은 3 - 4 세기 김제평야의 대부분이 간석지(干潟地) 즉 갯벌이었다는 뜻이다. 동진강, 원평천, 신평천은 강이 아니라 바다의 갯골(갯고랑) 이었다. 이 갯골의 상류까지 만조시 바닷물이 들어 왔다고 상상하면 된다. 자연 속의 김제는 온통 바다의 뻘벌(辟卑離)이었고 표고 4 – 5미터에 불과한 뻘벌(갯벌)은 만조시 물에 잠기고 간조시 드러났다. 








1872년 지도에 동진강 하구 남안이 만조시 1장이라 하였으므로 하구 북안 즉 벽골제 측 갯벌도 만조시 수심 3m의 바다였다.  그러면 정윤숙 학예연구사가 예측한 벽골제 제내수위 3m의 수몰지는 정확히 만조시 수몰지역과 일치한다. 제내수위 3m시 수몰되었다고 전해 온다면서 인용된 지명(김제시 봉남면 대송리, 김제시 황산면 강정마을, 정읍시 감곡면 오주리) 은 만조시 해수로 수몰된 지역의 와전이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은 백제의 개화현(皆火縣)이다. 개화(皆火)란 갯벌이란 우리말의 한자표기이다. 계화도(界火島)의 계화(界火)도 같은 말이다. 벽골군(碧骨郡)의 벽골이란 뻘골(뻘고랑)에서, 벽비리국(辟卑離國)의 벽(辟)은 뻘(펄)에서 온 말이 아닐까 ? 왜냐하면 김제 만경 부안 고부 태인지역은 온통 갯벌(뻘,펄) 투성이의 지형이었으니까. 일본서기의 헤치우(辟中, 김제) 란 “뻘 가운데” 라는 의미가 아닌가?




지금까지의 추리를 뒷바침할 수 있는 국가기록원의 사진이 있다. 1964년의 제2방조제공사 중인 동진강의 모습은 간석지의 갯골이다. 옛 원평천과 벽골제 주변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벽골제가 축조된 330년에서 1600여년이 지난 1964년까지도 동진강 하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1960년대 동진강 종합개발 수리간척사업이 시행되었다. 전북 임실군 섬진강 상류에 다목적댐을 건설하고 산를 관통하는 도수터널을 통하여 옥정호의 물을 김제, 만경, 정읍, 부안으로 끌어오는 대공사였다. 더불어 부안에 4000 ha의 계화도 간척지를 만들고 동진강제방이 건설되었다. 

간척지를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농업용수 부족으로 목마른 김제, 만경, 정읍, 부안지역의 용수문제는 1960년대 동진강유역 종합개발사업을 통하여 비로소 해결될 수 있었다. 옥정호의 저수용량은 4억 3천만톤이다.

벽골제가 마지막으로 중수된 서기 1415년대 저수량 1억톤의 물을 필요로 하는 농경지가 김제, 만경, 정읍, 부안 지역에 있었을까? 위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벼를 심는 김제평야, 만경평야, 고부평야, 정읍평야가 모두 바다였다면 이 지역에 1억톤의 물을 필요로 하는 농경지가 있었을 리 없다. 더우기 물이 흘러갈 수로가 필요한데 지금 거미줄처럼 설치된 수로는 모두 20세기의 작품이며 김제만경평야가 지평선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말도 20세기에야 가능한 말이다. 김제만경평야의 대단원을 장식한 방조제가 완성된 싯점은 다음과 같다.


방조제 이름위치방조제 길이 km개발면적 ha완공연도
광활방조제김제시광활면9.519651924
진봉방조제김제시진봉면7.610761927
화포방조제김제시만경읍5.73921927
대창방조제김제시죽산면3.74101927
서포방조제김제시죽산면5.37461929
도선장방조제부안군동진면6.55031932
계화도방조제부안군계화면12.839681979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50년 대 김제군의 인구 2,065명, 간전(墾田)이 7,281결이었다. 지금 지평선이 보인다는 만경현은 그 때 인구 727명, 전답 3,508결(結)이었다.  1750년 경의 해동지도는 김제군 인구 24,679명, 전답 10,473결, 만경현 인구 14,217명, 전답 4,143결이라고 하였다. 김제군의 전답이 300년 동안에 3,192결 증가하였음에 주목한다. 

결(結)은 면적의 단위가 아니라 소출을 기준으로 하는 면적 (100짐을 생산하는 토지가 1결) 이므로 토지의 등급에 따라 시대에 따라 결(結)에 해당하는 면적은 가변적이다.  대충 결(結),  ha (100m x 100m),  정보(町步 = 3,000평) 가 비슷한 면적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르다. 

벽골제가 저수지였다면 면적이 약 3,450 ha 이다. 현 여의도 면적의 12배이다. 이 곳을 간척하여 농사짓는 것이 시급한 삼국 – 고려 –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할 곳도 없는1 억톤의 저수지를 먼저 만든다는 것은 모순이다. 지금 바라보이는 김제만경평야가 그 시대에도 존재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거대한 착각이다.  

벽골제 바깥 쪽은 바다, 안 쪽은 저수지라면 원평천을 물막이하고 김제시 신덕동 수월마을까지 제방으로 연결해야 된다. 이때 벽골제 제방 3.3km는 김제에서 태인으로 가는 유일한 도로가 된다. 그러면 원평천을 건너 다니는 갯다리(浦橋)가 필요없게 되지만 조선시대 발행된 모든 지도에 갯다리가 표기되어 있다는 것은 원평천을 물막이 한 제방은 없었다는 뜻이다. 1억톤의 물을 필요로 하는 농경지도 없었고 원평천을 가로막은 제방도 없었다. 

저수지의 제방도 홍수시 방류할 수문이 필요하다. 이 수문은 범람을 막기 위한 비상용이기 때문에 단시간에 엄청난 양의 물을 방류해야 된다. 존재가 기록된 폭 4미터의 수문 5개로는 1억톤 용량 저수지의 범람을 단시간에 처리할 수 없다. 이 수문 5개는 관개용 용수로의 수문이라고 한다면 저수지의 범람에 대비한 거대한 방류시설의 흔적이 어딘가에 있아야 되는데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저수지가 없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1892년 만들어진 정읍시의 만석보(萬石洑)의 예를 보면 하천의 물막이 공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동진강과 정읍천이 합류하는 곳에 만석보를 쌓고 농민들에게 농업용수의 세금을 부과하였다. 19세기 말 경이 되어서야 인력과 기술수준이 정읍시 이평면(梨坪面)에서 동진강 최상류의 물막이 공사를 할 만큼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보다 477년 전인 1415년 중수된 벽골제가 원평천을 막아 물막이 공사를 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면 역사에 기록된 벽골제는 실제 어떤 모습이었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벽비리국(辟卑離國), 삼국사기의 백제 벽골군(碧骨郡), 일본서기의 헤치우(辟中)는 전국에서 가장 넓은 간석지(干潟地)가 펼쳐진 곳이다. 갯벌은 넓고 경사는 완만하여 옛부터 간척사업이 많았을 것이다. 서기 851년 신라의 문성왕은 청해진을 폐지하고 그 곳의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간척초기에는 소수의 인력으로 표고가 높고 제방축조가 용이한 곳을 골라 소규모의 제방을 만든다. 원평천이나 두월천의 상류에서는 제방을 2m 정도만 쌓더라도 바닷물을 막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점점 수심이 깊은 곳으로 간척범위가 넓어진다. 현 김제시 봉남면에서 원평천의 북안을 제방으로 막을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약 1,200 ha의 간척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자연은 강을 만들고 인간은 뚝(제방)을 만든다. 벽골제 주변을 간척하려면 신털미산에서 엄지산까지 제방을 쌓고 원평천의 뚝을 만들면 된다. 원평천을 물막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현 벽골제의 약 3km를 제방으로 막고 원평천의 남안을 따라 뚝을 만들어 김제시 봉남면에 이르면 약 15 km2 (1,500 ha) 의 간척지가 확보된다. 이것이 서기 1415년 중수했다는 벽골제의 모습일 것이다. 

김제평야에 제방이 벽골제 하나 뿐이었다면 1420년 중수한 벽골제 제방이 붕괴되었을 때 원평천과 두월천 주변 경작지 전체가 해수로 수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추리가 맞다면 원평천과 두월천 주변의 간척지는 상류로부터 시차를 두고 축조되었으므로 독립적인 제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1415년 축조한 제방이 붕괴되더라도 제방 내의 토지만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1420년 전라도 관찰사는 큰 풍우로 벽골제가 터져서 둑 아래에 있는 전답 2,098결이 피해를 입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피해을 입은 전답 2,098결은 벽골제 북단에서 원평천 남안을 따라 봉남면까지 쌓은 제방의 제내면적인 듯 하다 

엄지산(嚴之山)에서 벽골제가 시작된 것은 제방길이를 최소로 하기 위한 선택이다. 벽골제 부근에서는 제방을 쌓을 돌을 구할 수 없으므로 흙으로 제방을 쌓을 수 밖에 없다. 소요되는 흙은 현장에서 조달된다. 벽골제의 제방이 하면 20m, 상면 10m, 높이 4m라면 (20+10)/2 x 4 x 3000 = 180,000m3의 흙을 제방 안쪽에서 파내게 되고 제방 안쪽에 18만톤의 저수지가  생긴다. 

원평천 남안의 뚝을 같은 규모로 쌓고 봉남면까지 길이를 10km로 가정하면 (20+10)/2 x 4 x 10,000 = 600,000m3 의 저수지가 제방 안쪽에 생긴다. 원평천 제방 안쪽에 60만톤 규모의 저수기가 생긴 셈이다.

조선시대 지도에 벽골제와 더불어 용보, 용추, 용연 (龍洑, 龍湫, 龍淵) 등으로 표기된 것이 이렇게 생긴 제내 저수지이다. 

 


간척지의 농경지도 배수시설이 필수적이다. 홍수시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또 가을철 농사가 끝나면 물을 빼내야 되기 때문이다. 벽골제 내부 농경지의 배수는 원평천으로 할 수 밖에 없다. 원평천에는 해수가 드나들기 때문에 수문이 필요하다. 수문은 해수의 유입을 막기 위해 항상 닫혀 있다. 배수가 필요할 경우 간조시에만 개방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5개의 수문이 바로 이 방조배수문이며 언젠가 다른 장소로 옮겨졌을 것이다.

배수시설은 제내에 배수용저류지를 필요로 한다.  만조시 수문을 누설해 들어오는 해수가 있으므로 해수가 농업용수와 섞이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서다. 

참고로 일본에서 서기 1710년 설치했다는 농업용수용 수문을 보면 벽골제 수문의 모습과 흡사하다. 쿠마모토(熊本)현 쿠마(球磨)군 타라기(多良木)마을의 햐쿠타로우(百太郎) 용수로 수문으로 최근까지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관광용으로 전시되고 있다.  

역사를 정직하게 보자면 서기 330년의 벽골제 축조, 790년의 중수, 1143년의 중수, 1415년 중수했다고 나오는 기록은 반드시 동일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서기330년 원평천의 상류에서 간척사업을 시작하였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하류로 확대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리이다.  현 벽골제지(碧骨堤址)는 1415년 중수했다는 벽골제를 말하지만 그 이전의 벽골제는 상류의 간척사업일 가능성이 크다.  

                                                                                                                                                                  - 끝 -










2015년 2월 28일 토요일

91. 神功摂政の眞相



古事記は仲哀天皇が息長帯比売命を娶って生んだ御子は品夜和気命, 次に大鞆和気(オホトモワケ)命, またの名は品陀和気(ホムダワケ)命であるとした. この太子の御名に大鞆和気命と負わせた理由は初め生まれた時, 鞆(とも)のような形の肉が腕にあった。そこで, その御名に付けた. 仲哀天皇の御年は五十二歳, 壬戌年六月十一日に亡くなった.

息長帯比売命は後で神功皇后と追贈された神話的人物で歷史的實相はよくわからない. 古事記と日本書紀の神功皇后記述の中で歷史的眞實を窺って見るのがこの書の目的である.

上の古事記の記述の中で 仲哀天皇が壬戌年亡くなったというのを受容してこれを西紀362年と決める. 仲哀天皇が362年亡くなったかどうかは分からないが, 362年というのは神功皇后が1年後出産する太子の生年になるから重要である. そんなふうに古事記は神功の太子が363年生れた情報を暗號のように殘したのである.

生まれた太子の腕に鞆(とも)のような形の肉があったから大鞆和気命と御名に付けたというのは日本書紀神功五十二年七枝刀の記事と繫がる裝置である.

神功五十二年 久低たちが千熊長彦とともにやって来た。そして七枝刀七子鏡等様々な宝物を献上し「我が国の西に流れる川は七日以上も遡ったところに水源があります. この水を飲み, この水源である谷那の鉄山の鉄を採掘して, 永続して献上しましょう」との言葉を伝えた. そしてまた, 王は孫の枕流(トムル)王に「私が交流を続けている東方の日本国は、我が国の勢力拡大に協力してくれ, それによって地盤を安定させることができた. おまえも友好を重視し, 貢物を絶やさないようにすれば、私の死後も安泰だろう」と語った.

百済の肖古王と王の孫の枕流(トムル)王が登場するこの場面は日本書紀がわざと殘したと思われる. 枕流(トムル)王は大鞆和気命(オホトモワケ)であり神功皇后の太子であるとの暗示である. すると神功皇后は百濟貴須王 (第14代近仇首王, 在位375年~384年)の妃になるのが眞相である. 仲哀天皇が息長帯比売命を娶ったというのは噓になる.

“古事記は仲哀天皇が息長帯比売命を娶って生んだ御子は品夜和気命, 次に大鞆和気(オホトモワケ)命, またの名は品陀和気(ホムダワケ)命である.” とした. ここで “またの名は品陀和気(ホムダワケ)命である.” の添加記錄が問題になる. 品陀和気命は應神天皇の御名であるから神功皇后の子が應神天皇であると主張するためこんなふうに史料を歪曲したんじゃないかと思われる.

大鞆和気命と品陀和気命は別人で品陀和気命の子が大鞆和気命である. 古事記の5)気比大神という項で “私の名を御子の御名と換えたいと思う”とある. 神功皇后の子の名前が 換えられたとの證言である.

日本書紀應神紀の系譜は神功紀となんの繫がりも見せない. 應神紀には應神以後の王權承繼について應神の苦惱が窺える. 皇后所生の大山守命と中后の大雀命より15から10歲ほど年下で又3歲しかなっていない宇遅能和紀郎子を選擇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が 應神の苦惱である. あそこに王母の權力鬪爭が挾まれている. 丸邇の比布礼能意富美の娘, 宮主矢河枝比売は宇遅能和紀郎子の母后で優れた政治感覺の持ち主であったに違いない. 應神天皇は宮主矢河枝比売に屈服し宇遅能和紀郎子を落点する.

この決定は後に長い間王室に暗影を垂らす. 大山守命はこの決定に從わない. 品陀天皇(應神)は甲午年に亡くなった. 甲午年は西紀394年である. その喪中まで大山守命は父王の決定を拒否して政變を起したから宇遅能和紀郎子が大山守命を殺害してしまった.

日本書紀神功紀は新羅遠征から歸った皇后は十二月筑紫で誉田(ホムタ)天皇を生んだとした. 西紀363年のことである. しかし太子の名は大鞆和気命で誉田別命でない. 誉田別命は大鞆和気命の父王である.

遠征翌年(364) 鹿坂王と忍熊王の内乱を平定した豪族たちは皇后を皇太后(天皇の母)と呼ぶことにした. これを摂政の元年とする。

摂政三年(366)の春正月。誉田別皇子を皇太子(後継ぎ)とした。ここも大鞆和気皇子を皇太子(後継ぎ)としたとするべきである. そして磐余(奈良県桜井市)を都とした。若桜宮というらしい。

大鞆和気皇子は西紀366年3歲で旣に皇太子になった. そのとき大山守命は20歲位いである. 應神紀の妃の中で高木之入日売(大山守命の母),  中日売(大雀命の母), 弟日売は同母の姉妹同士で天皇と同一家門出身であるのにもかかわらず3歲の大鞆和気皇子が皇太子になったから家門の激しい反對に直面したに違いない. 大鞆和気皇子と宇遅能和紀郎子は同一人である.

西紀366年から宮主矢河枝比売は百濟の慰禮城を訪門, 百済の肖古王に泣訴する. そして家門の反對を百濟王の權威で突破しようとして七支刀を造ってもらい家門の人達ちの目の前に百濟王の璽書を傳示した.

七支刀の(表)は祖父として家門の後孫に世子奇生を認めよと賴んで, 又 (裏)は百濟王として世子奇生を倭王に命するとの 璽書である. 世子奇生とは大鞆和気皇子の百濟式名前らしい. 世子奇生は百濟の世子であり倭王でもある. 彼が百濟の 枕流(トムル)王になったのは384年である. 百兵とは家門の激しい反對派, 主に大山守命をさすようである. 今の兩國國民 としては 受容し難い史實である. 歷史學者さえも似た傾向を見せて七支刀の銘文を自分の好きなままに歪曲している. 七支刀の銘文の璽書を聖音と讀んだら意味の通じない文章になってしまう.

(表)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 暢德興福祖
(裏)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 世子奇生璽書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ここまで來てしまうと, そうしたら宇遅能和紀郎子の父, 應神天皇は今何處に在るのかという疑問が出て來る. 彼は百濟 の北の國境で高句麗と對峙しているから倭で摂政の話しが出て來るのである. 應神は主に百濟本國で父王を補佐した. 應神は百濟の肖古王の子で貴須王と同一人である.

彼は384年枕流王に百濟を任せて倭に歸った. もしかすると宮主矢河枝比売の身の上になんか問題があったんじゃないだろうか? 384年宮主矢河枝比売 (息長帯比売命)も旣に50近くの歲である. 363年大鞆和気命を生んだとき25歲としたら彼女は338年生れとなる. 應神天皇は320年頃の生れで神功より18年位い年上であるから神功の子だとは無理な設定である.

                                                                 - 終り -


2015년 1월 23일 금요일

90. 神武東征 前後の歷史のジグソーパズル




日本古代史を記錄した古事記と日本書紀は兩方とも神の時代を先にして後に人の時代に繫がる構造になっている. 神の時代というから時間槪念がなく現象界の因果律が適用されない話が多い. 歷史というより神話の方が正しい表現で ある.  たからといって古事記と日本書紀の記錄に歷史的真実は全然ないという訳ではない.  真実と不純物の塊まりの中から真実たけを選び出す爲には何時も注目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そんなところが古事記と日本書紀を勉强する楽しみで ある. 

神の時代と人の時代の區切りは神武東征であるが 時間槪念がない古事記と日本書紀は紀元前660年という愕然たる話をするばかりである. いろんな神話的要素を除いて神武東征はいつの出來事であるか調べてみるのがこの書の狙いである. そのため論議をつぎのように單純化する.

A. 先ず歷史的事件又は人物を時代順に並べて現象界の時間槪念で歷史の展開を見る. 神武東征を中心に先後の代表的事件又は人物を並べて 須佐之男命  - 大國主神 - 葦原中國平定 - 神代末倭の要人達 - 神武東征 – 論功行賞 – 大毘毘の登場までの 7項目を決めて須佐之男命との世代差を見て年代を推理する. そうすれば上記の歷史的イベントのある 時点の年代さえ分れば外の年代は自動的に大体の見当がつける.そういう訳で年代が確実な歷史記錄との繫がりを搜すのが重要である.

B. 一世代は凡そ30年を基本とするが場合によって20年足らずも認める.
C. 怪力乱神は語らない. 出來るたけ神話的要素は排除する.
D. 古事記と日本書紀に登場する系圖は参考にしても信じない. 神と人の名前は古事記に從う.

E. 須佐之男命を1世代として彼の後孫達ちの名に世代番號をつける.

須佐之男命(1)
大國主神(2)
大年神(2)
宇迦之御魂神(2)
天忍穗耳命(2)
阿遲志貴高日子根神(3)
事代主神(3)
大國御魂神(3)
奥津日子神(3)
賀茂建角見命(3)
天押帯日子命(4)
大倭帯日子国押人(4)
比賣多多良伊須氣余理比売(4)
大倭根子日子國玖流命(4)
波邇夜須毘賣(4)
AD 130
AD160
AD190
AD220

1.須佐之男命(1)と同時代に神格化すぎ天照大神があるが卑彌呼が歷史的個人の名である.又の名は織津で忍穗耳命
の生母.  須佐之男命は京都八坂神社の祭神, 天照大神は 伊勢神宮の祭神.

2. 須佐之男命(1)の子で重要人物は下記の通り.

大國主神(2)
須佐之男命(1)の長男で後繼者. 出雲大社.
大年神(2)
奈良県御所市 葛木御歳神社, 又の名は三島湟咋
宇迦之御魂神(2)
旦波を根據地としたが賀茂建角見命(3)時代に葛野に進出. 伏見荷大社.
天忍穗耳命(2)
須佐之男命(1)と天照大神の子.

3. 古事記葦原中國平定の登場人物. 葦原中國平定にはAD160から190年代生れの人物が登場する.

大國主神(2)
須佐之男命の子
阿遲志貴高日子根神(3)
大國主神の子, 御所市高鴨神社
高比賣(下照比賣)(3)
阿遲志貴高日子根神の妹
事代主神(3)
大國主神の子
建御名方神(3)
大國主神の子, 諏訪大社
天忍穗耳命(2)
天照大神の子
天菩比神(2)
天照大神を背信し大國主神に奉仕. 三年経っても報告に戻らなかった.
天若日子
天照大神を背信し大國主神の娘の下照比賣を娶りまた八年経っても報告に戻らなかった.
建御雷之男神


4. 古事記 神代末, 倭の要人達

阿遲鋤高日子根神(3)
大國主神の子, 神武以前大和の王, 迦毛大御神. 御所市高鴨神社, 欠史八代の懿德.
事代主神(3)
大國主神の子, 葛城鴨都波神社, 欠史八代の孝昭.
天押帯日子命(4)
事代主神(3)の子, 日本書紀, 古事記とも事績にする記載はない.
大倭帯日子国押人(4)
事代主神(3)の子, 大物主神, 三輪氏の祖, 大神神社, 欠史八代の孝安.
比賣多多良伊須氣余理(4)
事代主神の娘, 神武皇后.
建御名方神(3):
大國主神(2)の子, 諏訪大社
大國御魂神(3)
大年神(2)の子, 速日命, 欠史八代の安寧.
宇痲志痲遲命(4)
速日命(3)の子, 物部氏の祖
勢夜陀多良比賣(3)
大年神の娘, 事代主神の妻, 伊須氣余理(4)の母, 三嶋溝杙姫, 玉櫛媛, 奥津比賣命, 竈神
奥津日子神
大年神(2)の子, 尾張連の祖, 勢夜陀多良比賣(3)の兄, 高倉下 = 劍根, 葛城國造
賀茂建角見命(3)
宇迦之御魂神(2)の子, 賀茂氏の祖. 京都賀茂御祖神社, 八咫烏(3)
天若日子/下照比賣
臍見の長柄丘岬(御所市長柄)の猪祝)

古事記と日本書紀は事代主神(3)と大物主神(4)を別神としたりまたは同一神として扱っているがこの二神は 別神として 區別する. 事代主神(3)の子が大物主神(4).

又 大國御魂神(3)の情報をつぎのようにあからさまにする. 大國御魂神(3)は大年神(2)の子で一名 邇速日命, 神武東征時 “阿遲鋤高日子根神(3) = 兄師木”の臣下であったが 兄師木を背反し侵略者と密通, 神武治下で功臣になった.

大倭帯日子国押人(4) = 弟宇迦斯(4)”も裏切り者で戰後, 神武治下で功名を樂しんだ人物である.

須佐之男命(1)の孫(3)と曾孫(4)の時代に神武東征があったと見える. 當時倭は大國主神直系の阿遲鋤高日子根神(3)が治めた. 神武東征時九州軍と協力して戰後論功行賞を受けた現地人, 弟師木(3) = 黑速, 弟宇迦斯(4), 高倉下(4) = 劍根, 八咫烏(3)は みんな須佐之男命(1)の後裔である. 須佐之男命(1)の家門自ら分裂, 敵と內通して國を破滅させた.

5. 神武東征  登場人物

神武東征 登場人物
備考
()神倭伊波禮毘古命
() 神日本磐余彦天皇
彦火火出見, 神武天皇, 難升米
五瀨命
五瀬命
東征中 死亡
槁根津日子
珍彦, 椎根津彦
倭国造
登美能那賀須泥毘古(登美毘古)
長髄彦
東征中 死亡
高倉下(大年神の子 奥津日子神)
高倉下
葛城国造, 剣根, 神武正妃母の兄
八咫烏
八咫烏
賀茂建角身命, 葛野主殿県主
兄宇迦斯(天押帯日子命)
兄猾
東征中 死亡
弟宇迦斯(大倭帯日子国押人)
弟猾
猛田県主
     


兄師木 (阿遲鋤高日子根神)
兄磯城
東征中 死亡
弟師木(邇芸速日命) 
弟磯城
磯城県主, 黑速

兄倉下
强硬派

弟倉下
强硬派
邇芸速日命
饒速日命
磯城県主, 黑速
登美夜毘賣       
三炊屋媛
宇痲志痲遲命
宇痲志痲遲命
可美真手命
邇芸速日命の子, 物部氏の祖
道臣命
道臣命
大伴連等の祖
大久米命
大久目
久米直等の祖
比賣多多良伊須気余理比賣
媛蹈鞴五十鈴媛命
神武正妃
勢夜陀多良比賣
玉櫛媛
神武正妃母
大物主神
事代主神
神武正妃父
当芸志美美命
手研耳命
神武長子
阿比良比売
吾平津媛
神武本妻


古事記と日本書紀の神日本磐余彦天皇の系譜は信じ難い.  歷史的展開を考慮して須佐之男命(1), 天忍穗耳命(2), 日子番邇邇(3), 彦火火出見命(4)の系譜が正しい.

AD 130
AD 155
AD 174
AD 194
天照大神 (卑彌呼)(1)
天忍穗耳命(2)
日子番邇邇(3)
彦火火出見 (難升米)(4)

神武東征はいつの出來事であるか? 三國志魏志倭人傳難升米の記事がある.

景初二年(238年)
六月 倭の女王が大夫の難升米らを派遣して帯方郡に詣で天子に詣でて朝献することを求めた.
正始四年(243年)
倭王は再び大夫の伊聲耆 掖邪狗ら八人を遣使. 
正始六年(245年)
詔を以て倭の難升米に黄幢を賜り帯方郡に付託して仮授せしめた.

魏志の難升米を難斗米と変換した書紀神功紀の記事は愛嬌だっぷりである. 升の代りに升の十倍の斗を擇んた. 難升米穂穂手見命(4)は同一人であり天照大神卽卑彌呼の曾孫であ. 西紀238年遣使から帰って穂穂手見命(4)は東征を宣言する.  

四十五歳になった時、兄や子を集めて、「我らの一族の神話では、高皇産霊尊と大日霎〔オホヒルメ〕尊(天照大神のこと)が地上世界を平定し、彦火瓊瓊杵尊に授けたことになっている。彦火瓊瓊杵尊は天から雲をかきわけてやって来て、この西の辺境の地を治めた。.. 東の方に美しい土地があるという。青山に囲まれた盆地で、そこには天磐船に乗って降りてきたと伝える一族もいるらしい。…….いっそ移住を考えてみようか」と語った。
                                                                                                                                                                    
西紀239年穂穂手見命(4) 四十五歳になった時とするから穂穂手見西紀194年生れになる.

その後東征で勝天皇は勝利を宣言する.「故郷を離れて六年になったが、振り返ると旅の途中で死んだ者もいた。周辺にはまだ揉めごとも多いが、饒速日命のように親切にしてくれる集団もいるので、もうこの地に定住してもいいだろう。巣や穴に住んでいるような人たちもいるが、せっかくだから高床式の屋敷を作ろう。付近を見てまわったが、畝傍山の東南の橿原の地が最適だろう」と言った。

六年經ったとするから西紀245年神武の時代が始まったことになる. 穂穂手見命(4) 51歲の時である.

ここで魏志倭人傳 正始四年, 正始六年記事を確めて見る必要がある. 西紀243年戰爭中 難升米再び遣使た. 魏は245年倭の難升米に黄幢を賜り帯方郡に付託して仮授せしめた. 243年の倭王とは難升米をさす. 243年伊聲耆 掖邪狗ら難升米征伐戰爭中であるのを魏に知らせたことになる.

穂穂手見命(4)45歲の時, 239年東征に出たとしたら神武東征に參加した人達は西紀190 -220年代生れと見ていい. すると”4.古事記 神代末, 倭の要人達”もその範籌に入る. 須佐之男命の3, 4世の後孫達が古事記神代末, 倭の要人達で あることが分る. 古事記葦原中國平定の登場人物を見ると須佐之男命の2世が3人含まれている. 大國主神(2), 天忍穗耳命(2), 天菩比神(2)3人は須佐之男命の2世である. 2世は160年代, 3世は190年代, そして須佐之男命本人は 130年代の人間と見ることが出來る.

 6. 神武天皇 論功行償

道臣命
築坂邑〔つきさかのむら〕(橿原市鳥屋町付近)に住着き
大久目たち
畝傍山の西の川辺に住み着いた
珍彦  國神
その子孫が倭国造
弟猾  大倭帯日子国押人(孝安天皇)
猛田邑〔たけだのむら〕に移って猛田県主
弟磯城と通称で呼ばれていた黒速〔クロハヤ〕の子孫   邇芸速日命(安寧天皇)
磯城県主
剣根〔ツルギネ〕という者  奥津日子神 =  高倉下
その子孫が葛城国造
八咫烏  賀茂建角身命
葛野主殿県主〔かづののとのもりのあがたぬし〕(山城国葛野郡)

7. 大毘毘の登場

当芸志美美命(5)
当芸志美美命(5): 彦火火出見(4)の長子
神沼河耳命(5)
皇后 伊須氣余理(4)の子, 綏靖天皇は卽位したことないと思われる
大毘毘命(5)
大倭根子日子國玖流命(4)の娘
日子国意祁都命(5)
天押帯日子命(4)の子, 丸邇臣の祖.
建波邇夜須毘古命(5)
日子國玖流命(4)の子. 母は波邇夜須毘賣(4). 現京都 賀茂別雷神社の祭神
日子夫玖命(6)
日子国意祁都命(5)系譜の子
日子坐王(6)
大毘毘命(5)系譜の子で日子夫玖命(6)と同一人

西紀245年神武の時代が始まった時穂穂手見命(4)は51歲, 彼の長子, 当芸志美美命(5)は25位いで皇后伊須氣余理(4)
20歲前後と思われる. 255年頃61歲の穂穂手見命(4)の死亡と同時に倭は混沌狀態になった. 当芸志美美命(5)が王位を繼くとして動き出したのは自然である. 當時35歲位いの当芸志美美命(5)は東征の戰爭は勿論その間國政へ參與したとしたら彼が卽位するのはなにも可笑しくはないが神武の皇后伊須氣余理比賣を含んだ倭の先住勢力は九州人脈の卽位を許さ なかったらしい. 彼は强いて卽位して嫡后の伊須気余理比賣を娶ったと古事記は記錄した. その結果先住勢力の反撥をよび当芸志美美命(5)が殺された. 皇后伊須氣余理(4)の子神沼河耳命(5)246年生れとしたら神武死後10歲程の子供で綏靖天皇になって卽位した可能性なんかないはずである.

神武以後天皇として羅列された欠史八代綏靖, 安寧, 懿德, 孝昭, 孝元天皇は卽位したことのない架空の記錄である.

三國志魏志倭人傳西紀247年記事は”…更新して男の王を立てるが、国中が服さず、更に互いが誅殺しあい、当時は千余人を殺した。再び卑彌呼の宗女「壹與」を立てる。十三歳で王となると、国中が遂に鎮定した.”とある. 247年の記事は時期がなる幾つの記事の破片が混じっている. この時点は大體257年位いで卑彌呼の宗女「壹與」という13歲の少女が合意によって卽位するようになったらしい.  すると古事記の何處に「壹與」に當る記事があるか? 難しい質問である. なぜかすると古事記の編者達はあとでこんな疑問が出ると豫想し, ばれないように工夫したにちがいない. 虛点は殆どないと思われる.

孝昭天皇(3)の御子は天押帯日子命(4), 次に大倭帯日子国押人命(4)である。そして弟の大倭帯日子国押人命(孝安)が天下を治めることとなった。兄の天押帯日子命(4)は、春日臣、大宅臣、粟田臣、小野臣、柿本臣、壱比韋臣、大坂臣、阿那臣、多紀臣、羽栗臣、知多臣、牟邪臣、都怒山臣、伊勢飯高君、壱師君、近淡海国造の祖である。

天押帯日子命(4)には尨大な後孫が羅列されているが事績にする記載はない . 尨大な後孫が羅列されているのにも拘らず彼の子の記錄さえない.

孝元天皇(4)の御子は大毘古命(5), 次に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5)がある. そして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開化)が 天下を治めることとなった. 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開化)が丸邇臣の祖である日子国意祁都命(5)の妹, 意祁都比賣命を娶って生んだ御子は日子坐王(6)である.

日子国意祁都命(5)もなぜか事績に関する記載はない. 丸邇臣の祖であるというのが 全てである. しかし日子国意祁都命(5)は何等かの事情があって Identityが 隱されたと思われる. 開化天皇(5)の妃の中に日子国意祁都命(5)の妹があったという記事に名前が出るばかりの日子国意祁都命(5)は孝昭天皇の長子, 天押帯日子命(4)の子である. 天押帯日子命(4)は神武東征時戰死した兄宇迦斯(4)で弟の弟宇迦斯(4)の謀略で死んた. そんなわけで神武が死んたあと戰歿勇士兄宇迦斯(4)の子, 日子国意祁都命が家門の関心を引くのは当り前ではないだろうか.

日子国意祁都命(5)に子があったと傳われる. 『古事記』では「日子夫玖命」, 『日本書紀』では「彦葺」だが明らかな記述はない. 天押帯日子命(4), 日子国意祁都命(5), 日子夫玖命(6)の三代の記錄が殆とないのはなぜであろうか.
萬世一系の天皇家のイデオロギーを確立するため天皇系譜での次の血統が著しく露出されないように鴨氏-和邇氏系譜さえも捏造された. 天押帯日子命(4)次の血統が倭王家の主流であったのを承知している人は少ない.

鴨氏-和邇氏系譜 (數字は世代番號)
AD 220
AD 245
AD 270
AD 300
AD 330
天押帯日子命(4)
(神武東征中死亡)
日子国意祁都命(5)
丸邇臣の祖
比古由牟須美命(6)
日子坐王(6)
(彦国葺)
倭建命(7)

應神天皇(8)


日子国意祁都命(5)にも妃があるはずだが記錄はない. もし日子国意祁都命(5)の妃が古事記に男性として登載されたら誰の目にも日子国意祁都命(5)の妃は見えない. それが今までの有り樣だった. 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開化)は女である. 開化の子, 日子坐王(6)は日子国意祁都命(5)の子で, 日子坐王(6)日子夫玖命(6)は 同一人である. そこでやっと「壹與」の影が見えはじまる. 開化の実体を隱すため夫の Identityを明らかにしなかった. 古事記の開化の系譜は多分日子国意祁都命(5)の系譜を基にして適當に仕上たものである.

孝昭天皇(3)が春日建国勝戸賣の娘, 名は沙本之大闇見戸賣を娶って生んだ子は沙本毘古王(4)と沙本毘賣命(4). またの名は佐波遅比賣である. この沙本毘古王(4)は孝元天皇の隱された名前であり沙本毘賣命(4)は伊久米天皇(垂仁)の后となった。 開化天皇(5)の父が孝元天皇(4)であるから開化は春日之伊邪河宮において天下を治めた。開化の夫, 日子国意祁都命(5)の領地は丸邇(現天理市)だから奈良市と天理市の相距である. そういう譯で神武以來畝傍山麓から御所を中心とした葛城山麓にあった皇居が開化天皇の時春日之伊邪河まで北上する.

古事記開化天皇(5)日子坐王(6)の系譜は誤謬の塊りである.  すると「壹與」卑彌呼の宗女というのはなぜであるか?

古事記は天照大神の天忍穂耳命(2)が高木神(高御産巣日神)の娘萬幡豊秋津師比賣〔ヨロヅハタトヨアキツシヒメ〕命と結婚して日子番能邇邇藝命(3)をとした. 天照大須佐之男命(1)と同時代人としたから高木神も同時代人と見ていい. 邇邇藝命(3)は天照大と高木神の孫である. 開化天皇(5)孝元天皇内色許賣命を娶って生んだ娘である.

神化的要素を除去したら天照大と高木神は同一家門出身である. 天忍穂耳命(2)も高木神(高御産巣日神)の娘を娶って邇邇藝命(3)を生んだ. もし開化天皇(5)の母, 内色許賣命が 高木神の家門出身だっだら筋が通る話にな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すると開化天皇(5)は須佐之男命(1),天照大, 高木神の血統であるから神武以後諸勢力の合意に依って卽位することが出來たんじゃないだろうか.

三國志魏志倭人傳の記事を顧みてこの書をまとめたい. 

西紀243年東征中難升米は 伊聲耆掖邪狗ら八人を遣使として天子(魏の皇帝)に朝献した. 天子(魏の皇帝)245年詔を以て倭の難升米に黄幢を賜り帯方郡に付託して仮授せしめた. 黄幢とは 天子が認める倭國の指揮旗のような物である. (帯方郡)太守の王頎は 247年 長城守備隊の曹掾史である張政らを倭に派遣し、詔書、黄幢をもたらし、難升米に拝仮させ檄文を為して(戦いを止めるように)これを告諭した. (難升米は東征が丁度終った時点で中國の天子が認める倭國の指揮旗を手に入れたのである.)

247年張政らが倭を訪門した後, 帯方郡太守王頎が 洛陽の官府に到着して報告したとしてなる幾つの記事の破片を羅列しているがこの記事は異なる時点の記事である.

(1)倭の女王「卑彌呼」と狗奴国の男王「卑彌弓呼」は元より不和。倭は載斯、烏越らを派遣して、帯方郡に詣でて攻防戦の状況を説明した。(これは238年以前の出來事である.)
(2)帯方郡は長城守備隊の曹掾史である張政らを派遣し、詔書、黄幢をもたらし、難升米に拝仮させ、檄文を為して、(戦いを止めるように)これを告諭した。(難升米は旣に倭王である.)
(3) 卑彌呼は既に死去しており、大きな墓を作る。直径は百余歩、殉葬する奴婢は百余人。(247年張政らが倭を訪門して把握した情報で卑彌呼が何時死去したか明示されていない.)
(4)更新して男の王を立てるが、国中が服さず、更に互いが誅殺しあい、当時は千余人を殺した。再び卑彌呼の宗女「壹與」を立てる。十三歳で王となると、国中が遂に鎮定した。(247年帯方郡張政らと関係ない後代の出來事)
(5)張政らは檄文を以て壹與を告諭し、 壹與は倭の大夫の率善中郎将「掖邪狗」ら二十人を遣わして張政らを送り届けたによって、臺(皇帝の居場所)に詣でて、男女の奴隷三十人を献上、白珠五千、孔青大句珠二枚、異文雑錦二十匹を貢献した。 (張政らと関係ない後代の出來事)
(6)晉書武帝紀 泰始2(266) 十一月己卯倭人來獻方物

 陳壽(? – 297)の三國誌は魏文帝黃初元年(220)から晉武帝太康元年(280)までの時期をカバする. 西紀265年司馬炎により 魏皇帝曹奐は禅譲を強要され魏は滅びた.司馬炎は新たに西晋を建て280年に呉を征服し三国鼎立の時代を終わらせた。
そんな混亂中の記錄であるから一つ一つの歷史的情報の破片達が充分に檢討されないまま三國誌に記錄された.

(4)は神武死後の倭の狀況である.  (4),(5)は魏が滅びた後のの記錄から陳壽(? – 297)が採錄した情報である. (6)は266晉書倭人來獻方物記事で壹與の時代中國の認證を望んでの遣使だと見える. 

- おわ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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