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20일 금요일

76. 우금암(禹金巖)을 아시나요




우금암은 전북 부안군 상서면(上西面)의 우금산(331 미터) 정상에 있다. 산 꼭데기의 거대한 바위가 현저하게 눈에 띄어 바위의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바위의 이름을 따라 산의 이름이 우금산이 되었으며 이 봉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백제시대 산성도 우금산성이라 불린다

전라북도 문화관광사이트는 다음과 같은 우금산성 정보를 제공한다

우금 산성은 1974 9 27일 전북기념물 제 20호로 지정된 산성으로 주류(周留), 위금암(位金岩 )산성 혹은 울금바위 산성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성곽은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주변 산봉우리와 함께 아래의 산골짜기를 감싸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3,960m에 달하며 높이는 3m 내외로써 인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성곽이다. 성곽의 북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북장대(北將臺)가 있고, 남쪽에는 남장대(南將臺)가 있다. 성의 내부에는 묘암사(妙岩寺) 터와 함께 많은 건물지들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에 가 있던 부여풍(扶余豊)을 받들어 백제 부흥군이 663년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우금암(禹金巖)은 위금암(位金巖), 우진암(禹陣巖), 우금암(遇金巖), 울금바위 등으로도 불린다. 왜 그렇게 불리는지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으나 한결같이 근거없는 낭설일 뿐이다. 신라 장군 위금이 이 바위에 와서 석성을 쌓고 적을 막아서 위금암이라 부른다거나 삼한시대 우, 진 두 장군이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므로 우진암이라 한다던지 당의 소정방이 김유신을 이 곳에서 만났으므로 우금암(遇金巖)이라 한다는 둥 무의미한  정보가 카피되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조시대 그려진 이 바위의 그림이 미국에서 발견되었다. 서기 1770년 그려진 그림에 우금암(禹金巖)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이 바위는 이조시대에도 우금암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의 울금바위 그림 찾았다.   
 
 18세기 조선 화단의 총수(總帥)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이 서기  1770 2월 전북 부안 변산반도 일대를 스케치한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가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에서 발견됐다. 길이 268.4, 높이 25.6, 닥종이에 먹으로 그린 두루마리 그림으로 스케치 6점과 여행기로 구성됐다.

표암은 아들 완() 1770년 부안현감으로 발령난 것을 계기로 지인(知人)이었던 정읍현감과 함께 부안 지역 경승지를 여행했다. 표암은 우금암(현재 울금바위로 불림)과 용추(龍湫·현재 직소폭포), 월명암 낙조대(落照臺), 지금은 없어진 실상사와 극락암 등을 방문했고, 이를 화폭에 담았다.”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가 취재한 2005 3 14일 기사)

이 바위에 복신굴(福信窟)이라 불리는 굴이 조성되어 있다. 200여명의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굴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서기 662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용삭 2(662) 7월에 인원과 인궤 등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과 대산책(大山柵)·사정책(沙井柵) 등의 목책을 함락시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이하 생략)

이때 복신이 이미 군권을 독점하면서 부여풍(扶餘豊)과 점차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풍이 이것을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는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

위의 기사 중 우리의 관심은 복신이 병을 핑계로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장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는 부분이다. 복신이 당시 굴 속에 기거하고 있었다고 하며 우금암에 복신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현존한다. 그리하여 우금산성이 백제의 최후의 항전 중 수뇌부들이 있었던 곳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우금암을 포함한 능선 양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동쪽이 묘암(妙巖), 서쪽이 개암(開巖)골이다. 개암골에 개암사가 있다. 묘암골에 백제 부흥군이 옹립한 풍장왕의 거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 폐허로 남아있다.

일본서기 텐찌(天智) 원년 서기 662 5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텐찌천황은 백제의 왕자 풍장등에게 원군을 인솔하여 백제에 파견하였다. 백제 부흥군은 산악지의 요새, 주유성(일본서기 州柔城, 삼국사기 周留城)에 농성하면서 나당 연합군과 대치가 계속되었다. 그해 12월 주유성의 장군들이 모인 가운데 풍장이 제안을 내 놓았다. 그것은 주유성을 버리고 피성(避城, 현 전북 김제)으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주유성은 식량 생산지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매말라서 인민들이 기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두 조용히 듣고만 있는 가운데 에찌노 타쿠쯔(朴市田來津)간언하였다. 주유성이 식량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힘 든 장소라는 잇점이 있다. 거기다 피성은 적의 근거지에서 하룻밤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적이 지금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유성이 공격하기 힘 들어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유성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 닥치지도 않은 걱정을 하는가. 이 곳을 떠나 우리에게 살 길이 있다고 믿는가. 주유성을 버리는 것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의 간언은 받아 들여지지 않고 피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타쿠쯔가 예상했던데로 두 달후 다시 주유성으로 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 663 3월 전장군 카미쯔케노노 키미 와카코(上毛野君稚子), 하시히토노 무라지 오호후타(間人連大蓋), 중장군 코세노 카무사키노 오미 오사(巨勢神前臣), 미와노 키미 네마로(三輪君根麻呂), 후장군 아헤노 히케타노 오미 히라부(阿部引田臣比邏夫), 오호야케노 오미 카마쯔카(大宅臣鎌柄)를 보내 2 7천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서기 663 6월 백제왕 풍장은 복신에게 모반의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신하들에게 물은 다음 복신을 참수하였다. 그 해 8 13일 신라는 백제왕이 우수한 장수를 참수한 것을 듣고 백제에 들어 와 주유성을 취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신라의 의도를 간파하고 제장들에게 지금 대일본국의 구장() 이호하라(廬原君臣)가 만여명의 건아들을 인솔하고 바다를 건너 오고 있다. 제장들은 백촌강에 나가 그들을 맞으라.” 고 하였다.

17일 적이 주유성에 이르러 그 왕성을 포위하였다. 대당(大唐)의 군장들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27일 일본의 선두 선단이 도착하여 대당의 선단과 교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불리하여 물러나고 대당은 진지를 견고하게 지켰다.( 戊戌, 賊將至於州柔,繞其王城. 大唐軍將率戰船一百七十艘,陣列於白村江. 戊申, 日本船師初至者與大唐船師合戰. 日本不利而退, 大唐堅陣而守)

28일 일본제장과 백제왕은 기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 우리가 앞 설테니 너희는 뒤 따르라고 서로 주장하였다. 거기다 일본의 중군은 대오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대당의 견고한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대당은 좌우에서 협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군의 패배가 이어지고 물에 빠져 익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배의 방향을 돌릴 수도 없었다. (현해탄을 건너 온 대군이 흘린 피로 백촌강이 핏빛으로 물든 가운데) 타쿠쯔는 하늘을 우러러 죽기를 맹세하고 이를 갈며 수십명의 적을 도륙한 뒤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은 몇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己酉,日本諸將與百濟王,不觀氣象而相謂之曰「我等爭先,彼應自退.」更率日本亂伍中軍之卒,進打大唐堅陣之軍.大唐便自左右夾船繞戰.須臾之際,官軍敗績.赴水逆死者眾.艫舳不得迴旋.朴市田來津仰天而誓,切齒而嗔,殺數十人,於焉戰死. 是時,百濟王-豐璋與數人乘船逃去高麗)
 
9 7일 백제의 주유성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 나라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주유가 떨어졌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백제라는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다시 올 수 있겠는가! 테레성(弖禮城)에 가서 일본의 군장들과 앞 일을 의논하자. (九月,辛亥朔丁巳,百濟州柔城,始降於唐.是時,國人相謂之曰:「州柔降矣,事無奈何.百濟之名,絕于今日.丘墓之所,豈能復往.但可往於禮城,會日本軍將等,相謀事機所要.」)

드디어 침복기성(枕服岐城)에 수용되어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고 알렸다. 11일 무테(牟弖)에 도착. 13일 테레(弖禮)에 도착하다. 24일 일본의 선사(船師)와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首), 억례복류(憶禮福留)와 국민들이 테레성(弖禮城)에 도착하였다. 25일 일본을 향하여 출항하였다.
(遂,教本在枕服岐城之妻子等,令知去國之心. 辛酉,發途於牟. 癸亥,至禮. 甲戌,日本船師及佐平余-自信、達率木素貴子、谷那晉首、憶禮-福留并國民等至於禮城. 明日,發船始向日本)

서기 1997년 전영래(全榮來) 원광대학교 교수는 삼국사기, 신구당서, 일본서기가 기록한 백촌강과 주유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비정하였다. 우선 기벌포(伎伐浦)와 백강(白江)을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의 개화(皆火), 흔량매(欣良買)로 보았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강 하구 유역이다. 당의 13만 대군을 끌어들인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불의에 도성을 함락당한 백제유민은 임존(任存), 주류(周留)의 두 성에 의지하여 웅진의 당군을 곤경에 빠뜨린다.

신라는 이를 구원한다는 명분아래 출병하였으나 실은 이를 틈타서 독자적으로 두량이성(豆良伊城)을 탈취하려 꾀하였다. 이 두량이성을 일본서기는 쯔누성(州留城), 삼국사기는 주류성(周留城)이라 하였다. 서기 661 3 12일 신라군은 고사비성(古沙比城)에 주둔하여 백제의 두량이성과 8 – 9 킬로미터 떨어져 서로 대치하였으나 4 19일 헛되이 퇴각한다. 신라장군 품일은 고부의 고사비성에 머물며 두량이성(사산산성) 36일 간이나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고사비성은 정읍시 고부면의 금사동산성(金寺洞山城)이다.

일본서기가 기록한 지명 무테(牟弖)는 옛 미동부리(未冬夫里) 즉 현재 전남의 남평(南平) 광주지방이다. 후일 무등산 혹은 무진악(武珍岳)으로 불리는 이름이다. 테레(弖禮)는 백제의 동노현(冬老縣) 지금의 보성군 조성(鳥城), 득량(得粮)면 일대이다.

주유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난민들은 9 7일 부안의 주유성을 떠나 11 200리 떨어진 광주(무테)에 도착하였고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여 13일 광주에서 135리 떨어진 보성의 득량에 이르렀다. 피난의 행렬은 하루 약 45리 꼴로 걸은 셈이다. 24일 침복기성의 가족들도 득량에 도착하였고 이들은 9 25일 일본으로 출항하였다.

이 장면의 역사기록은 설명이 필요하다. 백제의 최후를 몸소 체험한 지배층이 향하고 있는 일본이란 백제사람들에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사람들이 현재 갖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정서로 이 시점의 역사를 이해하면 안 된다. 이해의 시작은 일본이란 국명이 서기 670년 무렵에야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기 663년 백제부흥전쟁이 무위로 끝난 시점에 일본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왜()로 표현된 열도의 집단은 백제의 일부였다. 일본서기가 이 무렵의 기사에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제인들은 9 25일 보성군 득량만을 떠나 타국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열도에 있는 자기 나라 땅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풍장의 어머니가 전쟁중 사망한 사이메이(齊明)천황이며 풍장의  또 다른 이름이 오호아마황자 (大海人皇子, 훗날의 天武天皇, 622 – 686)이다.  그는 고구려고 간게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전쟁터를 빠져나온 풍장을 태운 선박이  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은 일본이다. 그가 가장 안전한 곳을 버리고 왜 고구려로 가겠는가? 부여풍장과 오호아마황자와 관련된 기사는 지금까지 "21. The Battle of Baekgang, 32. 죠메이(舒明)천황, 34. 부여풍장은 누구인가, 41. 선광사 연기, 71. 일본국의 출현"에서 나왔다.

삼국사기 지리지가 기록한 백제의 개화(皆火)는 지금 계화(界火)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계화도 간척사업이 있었던 곳이 바로 백제의 개화(皆火)현이다. 한자로 개화라 하였지만 우리 말은 갯벌이었을 것이다. 그냥 갯벌. 개는 발음되는 그대로 개, 벌은 불 화()가 된 것이다. 갯벌의 또 다른 표현이 기벌(伎伐)이다. 그리하여 개화(皆火)든 기벌(伎伐)이든 모두 갯벌인 것이다.


그러면 흔량매(欣良買)의 원래 우리말은 무엇이었을까? 흔량매는 희얀() ()였을 것이다. 백강 또는 백촌강이란 이름이 바로 흔량내에서 유래한다. 흔량내를 지금 동진강이라 부른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내륙의 땅처럼 보이지만 현 동진강 하류는 대부분 갯벌을 통과하여 서해로 흘러 들었고 그 곁에 백산(白山)이 자리잡고 있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백산성이 있다. 백산성에서 동진강이 내려다 보인다. 백제의 흔량매현을 통일신라는 희안(喜安)현으로 고쳤다. 우리 말 희얀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동진강 하구의 백산은 높이 47미터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주위가 온통 갯벌인 평지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이며 옛부터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항구로 사용되었다.  

개암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서기 634(무왕 35) 백제의 왕사(王師)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라고 전해 온다. 사찰의 이름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배경은 뒷산 정상의 웅장한 우금바위(또는 우금암)의 전설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이 개암사 창건에 대한 역사기록도 조선후기에 편찬된 사적기(寺蹟記)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적기는 1658년 금파당(金波堂) 여여(如如)스님이 엮은 개암사중건사적기(開巖寺重建寺蹟記) 1640년 월파자(月坡子) 최경(崔勁)이 지은 법당중창기문(法堂重創記文), 1941년 주봉당(舟峰堂) 상의(尙毅) 스님이 편찬한 개암사중건연혁기 (開巖寺重建沿革記) 등이 있으나(www.simjeon.kr/xe 사찰순례) 그냥 전해오는 내용을 적은 것으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개암사 뒷 산 꼭데기에 있는 우금암에 복신굴이 있다고 하였다.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는데 서쪽 바위에 복신굴이 있고 인접한 동쪽 바위에 또 다른 굴이 조성되어 있다. 복신굴처럼 지상에 조성된 게 아니라 지상에서 약 20 미터 높이에 위치하므로 사다리가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다. 이 굴의 이름이 원효방 또는 원효굴이라 불린다. 서기 676년 신라의 원효가 개암사에 와서 수도했으므로 원효방이라 한다고 전 해 온다. 그러나 서기 676년 원효(617 - 686)는 변산반도에 와서 한가로이  수도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인격이었다.

고려시대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 원효방(元曉房)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이규보는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 兼 掌書記)라는 첫 벼슬을 받아 전주로 부임, 의욕적으로 각 고을을 돌아 다니며 보고 들은 바를 수필 형식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남행월일기이다.

서기 1200(庚申) 8 20 부령(扶寧 지금의 부안) 현령(縣令) 이군(李君) 다른 손님 6 - 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뜨락과 창과 문이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이후생략)

원효방은 겨우 8 되는데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헤어진 누비옷에 도를 닦는 모습이 고고하였다.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초상화가 있고 외실에는 () 하나 켤레 찻잔(茶병) 불경놓은 책상만이 있을뿐 때는 도구도 없고 시자(侍者)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蘇來寺, 현 내소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 : 불공)에 참예할 뿐이라 한다.

개암사 뒷 산에 있는 우금암에서 고부쪽을 바라보면 우금산 코 앞에 삿갓 모양의 작은 산이 있다. 해발 107미터에 불과한 작은 산이며 입산(笠山) 또는 사산(蓑山)이라 불린다. 백제 시대 이 산의 우리 말 이름이 도롱이(蓑 또는 笠)뫼이다. 도롱이란 풀을 엮어 비 올 때 뒤집어 쓰던 우비(雨備)이다. 도롱이뫼가 한자로 두량이산(豆良伊山)이며 이 곳에 구축된 성이 두량이성이다. 따라서 주유성이란 의미상으로 이 곳을 말하나 근거리에 있던 본성 우금산성도 지금 주유성이라 불리고 있다


우금산성을 정면에서 수호하는 전초성은 두량이성과 바로 옆에 위치한 주산(舟山, 231))의 소산리 산성이다. 주산(舟山)은 원래 배뫼였으며 백제시대에는 이 곳까지 선박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배를 맨다는 의미로 배맷산이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배뫼의 뫼는 산()을 뜻하며 배뫼가 주산의 원래 이름이었다고 본다.   

우금암을 울금바위라고 한다는 전승은 14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진실에 근접한다. 개암사 뒷 산의 거대한 바위의 순수한 우리말 이름은 울근바위였을 것이다. 지금은 울퉁불퉁, 울쑥불쑥, 울근불근으로 남아 있는 우리 말이다. 설악산의 울산바위는 울산에 있던 바위가 금강산으로 옮겨 가다가 힘이 빠져 설악산에 주저 앉게 되었다고 하나 이 바위 또한 울근바위였을 것이다. 주위보다 불쑥 튀어 나온 바위라는 의미의 보통명사가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울금바위가 되었고 그것을 한자로 적다 보니 우금암이 된 것이다.

백제의 갯벌현은 현대인들의 눈에도 갯벌로 인식되고 있다. 서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식량증산을 목표로 간척사업이 시작된 백제의 개화현은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새만금 방조제 건설 공약으로 또 다시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이 된다. 그리고 백제인들이 바라보던 갯벌은 모두 육지가 되었다. 그 땅 속 어딘가에 서기 663 8 27일 백강의 전투중 전사한 1만 여명의 백제인들이 잠 들어 있다.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은 막대한 양의 골재를 필요로 하였다. 변산반도의 산악지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골재를 채취할 수 없다. 국립공원을 제외하고 주변의 야산에서 골재를 채취해야 되는데 백제가 갯벌현이라 불렀을 정도로 평탄한 땅에 야산이 별로 없다.  

위에서 거론한 부안군 주산면의 주산(배뫼산)은 소산리 산성이 있는 곳이다. 주산은 지금 새만금 방조제 공사용 골재 채취장이 되었다. 주산의 허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

우금암에서 고부평야를 바라보면 고부면의 두승산 (444미터)이 보이고 두승산 전면으로 영원면 은선리에 천태산(195)과 응봉산(229)이 있다.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백제시대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으로 비정되는 금사동토성(金寺洞土城)이 이 곳에 있다. 이 성은 장문리(長文里)와 은선리(隱仙里)의 경계를 이루는 응봉산(鷹峯山, 229미터)의 북쪽 계곡을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石築山城) 이다. 성의 이름은 골짜기의 이름 금사동을 따서 삼았다. 성의 둘레는 2,365m인데 북쪽 골짜기에 문터(門址)와 수구(水口)가 있다. 산의 정상쪽으로는 봉우리가 있으면서 내성(內城)을 이루었고, 남문터와 내성 북쪽으로는 우물터 세곳과 수구터 세곳이 있다. 이와같이 내외이중(內外二重)의 성터는 옛 백제지역(百濟地域)의 중요한 성터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의 것으로서 주목되며, 따라서 이 성은 백제(百濟) 후기(後期) 5방성(五方城) 가운데 중방(中方)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의 터로 추정된다

은선리 삼층석탑 동쪽으로 보이는 천태산도 새만금 방조제 골재 채취장이 되었다. 백제 부흥전쟁의 최후의 항전지의 양측 유적, 부안 주산면의 주산과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천태산이 동시에 새만금 방조제 공사용 골재를 제공하면서 산 허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현지의 개발반대 기사를 전라도닷컴(www.jeonlado.com)에서 발췌한다.

“문화유적의 보고 배메산 훼손 중단하라! (http://jeonlado.com/v3/print_paper.php?number=8244)
주산 주민들, 배메산 문화유적 문화재 지정 촉구 (20060308)

지난 2 7일 오전 10, 부안 주산에서 새벽에 집을 나서 눈길을 달려온 주산 주민들과 문화연대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 위원회 위원장, 문화재 전문위원)는 서울 창덕궁 앞에 위치한 문화연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유적의 보고 배메산 훼손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배메산은 오는 3월 하순께 새만금방조제 최종 2.7km 구간의 전진공사와 끝물막이 공사를 앞두고 토석 채취 작업이 한창이다. 공사를 맡고 있는 현대건설 관계자에 따르면 “들어가는 돌은 160만㎥ 가량인데 90% 정도 확보했고 대석 36만㎥ 외부에서 들여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16만여㎥는 이미 확보했고 앞으로 20만여㎥ 가량의 물량이 더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토석을 채취하기 위해 방조제 인근 야산에 석산개발 허가가 나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고 있는 중이며, 주산면 배메산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배메산의 주산쪽 개발업체의 허가 물량만 해도 약 47만㎥이며 방조제를 다 막은 후에도 내부개발을 위한 138km의 방수제를 쌓으려면 토석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배메산의 토석채취 허가는 더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지점에 해발 231m의 배메산(주산)이 있다. 옛날에는 이 산 바로 앞에까지 조수가 드나들어 배를 메어두었다 하여 ‘배메산’이라 불렀다 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에서부터 조선시대 유물까지 출토되고 있다.

이미 1975년 전주시립박물관장 전영래씨에 의해 볍씨 토기가 발견되었다.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 소산(배메산)성터에서 발견된 토기편은 사질민무늬토기로서 홍도(紅陶), 흑도(黑陶), 마제석검편(磨製石劍片), 석촉(石鏃), 삼각형돌칼, 홈자귀 등과 함께 발견된 것인데, 그 아랫면에 찍힌 볍씨자국은 길이 6.5mm, 3.8mm로서 장폭비(長幅比) 1.71이다. 소로리 볍씨 발견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유물로 당시 일본이 주장했던 벼농사 일본 전래설을 뒤집는 발견이었다.

서기 2000년 문화재 지정신청이 되었으나 전라북도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부안군은 이 일대에 대한 채석허가를 내주기 시작했다. 2003 8월부터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으나 특별한 유물이 없다고 하여 채석을 해도 무방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기 전에 이미 채석 허가가 난 상태이다. 문화재보호법상 3만 제곱미터 이상의 개발에서는 지표조사를 해야 한다는 효력은 1999년부터 이지만 이곳의 채석은 3만 제곱미터를 초과했는지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이나 부안군은 답변이나 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다.

1984년 문화재 지표조사와 2004년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에서 유물산포지도를 작성했다. 당시 유물산포조사는 이 일대의 문화유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2003년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문화재지표조사에 심각한 허점이 있는 것이 발견된다. 문화재청과 전라북도와 부안군은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지표조사에 대해 정밀 확인을 하지 않고 채석 허가를 해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배메산의 채석 상황은 유물산포지역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마치 유물산포지역을 섬 처럼 만들어 놓고 채석을 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잘못된 지표조사와 잘못된 채석허가로 인해 고대 백제의 주요 문화유적지가 흔적을 알 수 없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배메산은 고대 백제의 역사문화경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눈에 보이는 유물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해 문화유적의 진정성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유적은 당해 문화유적이 내포하는 진정성과 역사문화경관 차원에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한다.”

개발과 보존사이에서 어디 쯤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위의 기사는 2006 3 8일 나왔지만 공사는 계속되어 서기 2011년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는 완료되었고 주산과 천태산은 처절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간척사업으로 확보한 내륙의 광활한 토지를 앞으로 어떤 용도로 쓸지 알 수 없다.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는 땅을 만들고자 간척사업을 해 온 것이 된다. 지금은 농경용 토지가 필요한 시대는 지났다. 남한은 생산되는 쌀이 남아돌아 걱정인 시대가 되었다. 새만금 사업은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이지만 사업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즉흥적인 선거공약 때문에 타당성이 의문시되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인 것이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쓴 책 이름이다. 그는 하바드 대학교 정치철학 교수이다. 이 책이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1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한국사람 50명 가운데 1명이 이 책을 구매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라는 물음에 목 말라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개발과 보존사이에서 현명한 판단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75. 카미(神)에서 인간으로 (II)


서기 245년 경 구야국(狗邪國)에서 야마토에 돌아 온 사호히코(沙本毘古王, 狭穂彦王, 孝元天皇)에게 혼처(婚處)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즈노 현주(葛野県主)가 되어 쿄오토오(京都)지역에 근거를 마련한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의 딸 하니야스히메(波邇夜須毘賣)와 혼인하여 서기 250년 경 타케 하니야스히코(建波邇夜須毘古命, 武埴安彦命)를 낳았다. 고사기는 그녀를 코우찌()의 아오타마()의 딸이라고 기술하여 하니야스히메가 가모타케쯔누미의 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자 하였다. 또 이카 가시코메(伊賀迦色許賣命, 伊香色謎命)와도 혼인하여 히코 후쯔오시노 마코토 (比古布都押之信命, 彦太忍信命)를 낳았다. 그가 유명한 타케시우찌 (宿禰)의 할아버지이다.

일여(壹與)의 어머니, 구야국의 공주 우쯔시코메(고사기 色許, 일본서기 色謎命)가 야마토에 자리잡자 구야국과 야마토의 왕래가 많아진다. 우쯔시코메의 어린 동생 우쯔시코오(色許男)가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구야국 거등왕의 왕자이다. 서기 265 년경 구야국의 우쯔시코오와 코토시로누시의 딸 사호히메(고사기 沙本毘賣命, 일본서기 狭穂姫)가 사랑에 빠져 혼인하였다. 그녀가 스이닌(垂仁)천황 황후로 기록된 사호히메(고사기 沙本毘賣命, 일본서기 狭穂姫)이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에게 우쯔시코오는 어머니 쪽을 따르면 외삼촌, 아버지 쪽을 따지면 고모부가 된다. 우쯔시코오와 사호히메는 구야국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곧 파국을 맞는다. 사호히메가 혼인을 포기하고 몰래 바다를 건너 나니하(難波, 오오사카)에 와서 머물렀다. 그녀가 나니하의 히메코소신사(碁曾社)에 진좌하고 있는 아카루 히메(阿加流比)이다. 여자 측에서 일방적으로 혼인을 파기한 듯 우쯔시코오는 아내를 단념하지 못 하고 그 뒤를 쫓아 열도에 들어온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는 그에게 아나토(穴門, 야마구찌현) 머물 것을 명한다. 그는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사를 종합하면 이쯔쯔히코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나니하(難波) 쳐들어 같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 천황 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는 아내가 도망친 것을 알고 바다를 건너 그녀를 찾아 나니하에 입항하려 하였으나 그 해협의 신(の神)이 가로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타지마국(, 현 효고현 일본해에 면한 지역)에 정박하였다. 이 기사가 오우진 천황편에 기록되어 있으니 오우진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연대는 자의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무시한다. 오우진(應神 )은 서기 362년 이후 야마토의 왕이 되었으며 우리는 지금 260년 대의 역사를 더듬고 있다.     

야마토 정부는 그의 나니하(오오사카) 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호히메의 안전을 염려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사가 이어진다.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호코(天日槍) 배를 타고 하리마국(播磨, 효고현 남부 코베 부근) 도착하였다. 소식을 듣고 천황은 오호토모누시(大友主) 나가오찌(長尾市) 파견하여 사정을 알아 보게 하였다. 천황은 그가 머물 곳을 시사하 마을(粟邑) 아하지섬(淡路島) 이데사 마을() 한정하였다.

역시 그의 오오사카 상륙은 허가되지 않았다. 오오사카에는 그에게서 도망쳐 아내 사호히메(아카루히메) 숨어 있다.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 통하여 오오사카에 들어 없게 되자 그는 방향을 바꾸어 일본해 측으로 돌아 타지마국()을 점령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타지마국의 왕이 되어 눌러 앉은 것이다.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와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표기되었던 그의 이름은 일본해 측에서 다시 바뀌어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또는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斯岐 阿利叱智 干岐) 표기된다. 신화를 해석하면서 그가 가져 왔다는 8종의 신보(神寶)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평가를 거부한다. 아메노히호코는 신라의 왕자, 쯔누가 아라시토는 대가라국의 왕자라 하였다. 신보를 전하기 위하여 그가 열도에 온 것이 아니다. 신보란  당시 가라국 왕자의 휴대품 정도로 보면 된다.  

일본서기 스이닌(垂仁)천황기에 쯔누가 아라시토의 기사가 이어진다. 같은 사람의 기사를 여러 시대에 일어난 별개의 일인 것처럼 풀어 놓았다. 스진(崇神)천황 시대에 이마에 뿔이 사람이 배에 타고 코시노쿠니() 케히노우라(笥飯浦) 왔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나는 카라노쿠니(大加羅) 왕자이다. 이름을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또는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斯岐 阿利叱智 干岐) 한다. 야마토에 성왕(聖王) 계신다 하여 찾아왔으나 아나토(穴門)에서 길을 헤메다 북쪽 바다를 따라 이즈모노쿠니(出雲) 거쳐 케히까지 오게 되었다.

사이 스진(崇神) 죽었고 스이닌(垂仁) 즉위하자 그를 모신지 3 년이 지난 어느 천황이 고향에 가고싶지 않느냐고 물었다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향 생각이 간절하던 참입니다.” “네가 길을 잃고 헤메지 않고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선제(先帝)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미마키(御間城)천황(崇神)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

아내를 찾아 쯔누가 아라시토가 코시노쿠니의 케히에 것은 서기 268년 경이다. 일본서기는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斯岐 阿利叱智 干岐), 우쯔시코오(色許男), 스이닌(垂仁)천황을 개별적인 사람으로 묘사하였으나 이는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이다. 또 미마키천황(崇神)은 서기 300 년 아마토에 들어 왔으므로 일본서기의 이 부분의 기술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구야국의 왕자 우쯔시코오(色許男)는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던지 타지마국()점령하고 거기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살면서도 사호히메에 대한 집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게릴라부대를 양성하여 야마토로 보내 도망친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일본서기 스이닌(垂仁)천황기의 사호히코 (狭穂彦王)의 모반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스이닌이 사사로운 증오심에서 부하들을 보내 전처를 살해한 사건이다. 사호히코왕과 사호히메가 부친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거성 이나키(稻城)에 거처하고 있는 것을 정탐한 우쯔시코오의 특수부대는 코세(御所)에 있던 이나키에 불을 질러 그들 자매를 불태워 죽인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의 공권력이 유린되고 그녀의 부친과 고모가 희생되었다. 서기 272 년 경이다. 스이닌은 작전의 책임자 야쯔나다(八綱田) 공로를 치하하였다.

효고현(兵庫県) 토요오카시(豊岡市) 이즈시신사(出石神社)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제신(祭神) 아메노히호코(天日槍命) 신라의 왕자였으나 8 종의 신보를 가지고 도래하여 타지마국(但馬)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타지마국(但馬)을 점령하고 이곳에 궁을 지었다. 그는 점차 세력을 키워 타니하국(丹波國, 현 쿄오토오 지역)을 거쳐  야마시로(山城), 오우미(近江), 와카사(), 에찌젠(越前)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야마토의 왕이 적은 없다.야마토의 마키무쿠() 도읍하고 타마키궁(珠城宮) 거주했다는 일본서기 기록은 허구이다

그가 야마토의 권위를 무시하야마토의 북쪽 국경을 위협하고 있던 시절에도 일여는 여전히 야마토의 왕이었다. 서기 270 대의 그의 흔적을 추적할 있는 단서는 그가 남긴 후손을 살펴 보는 것이다. 스이닌(垂仁)천황 황후는 사호히메(狭穂姫)이다. 그녀는 서기 272 코세(御所) 이나키(稻城)에서 살해되었. 고사기는 사호히메가 히코이마스(彦坐王) 딸이라 하였으나 그것이 오류임을 지적했다. 그녀는 코토시로누시의 딸이다. 코세(御所)는 코토시로누시의 근거지이며 카모쯔바(鴨都波)신사가 있는 곳이다. 스이닌의 두번 황후는 타니하국(丹波國)히바스히메(日葉酢媛命) 야마토히메() 낳았다

야마토히메는 비교적 역사적인 인물로 이세(伊勢) 땅에 아마테라스(天照大神) 모신( 이세신궁) 황녀이며 이것이 제궁()의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전해 온다.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공주이며 신녀였다. 스이닌이나 야마토히메에게 아마테라스는 구야국 왕실의 조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야국의 후손인 스이닌이 자기 조상을 위하여 이세신궁을 지은 것이다. 그가 야마시로에 있던 서기 295년 경 야마토 히메를 시켜 아마테라스를 모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현 이세신궁 자리를 골랐다. 야마토 천황가가 천손강림 신화를 만들면서 아마테라스를 천황가의 신으로 둔갑시켰지만 야마토히메가 아마테라스를 모실 터를 고르고 있을 무렵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조상신이었다.  

야마토 히메는 야마토 타케루가 서기 320 대의 정벌전쟁에 올인하고 있을 그를 도왔으며 이세신궁에 보관하고 있던 아마노 무라쿠모노 쯔루기(天叢雲, 열도 지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신물)그에게 내어주었다. 야마토히메는 서기 270 반의 인물로 야마토 타케루보다 세대 선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서기는 야마토 히메를 야마토 타케루(日本武尊) 숙모라고 기술했다. 이 보검은 지금 나고야의 아쯔타신궁(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으며 스사노오가 이즈모국 (出雲)에서 퇴치한 야마타노 오로찌(八岐大蛇)의 꼬리에서 나왔다고 하나 이 검의 내력과 관련된 역사적 진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스사노오(백제의 초고왕)가 이 세형동검을 야마타이국의 히미코에게 신표로 주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추측이다. 스사노오는 오시호미미(天忍耳尊)의 아버지이므로 아마테라스는 당시의 백제왕 스사노오의 위세를 빌어 오시호미미가 큐우슈우를 지배할 명분을 확보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카라노쿠니(加羅) 왕자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토요오카시(豊岡市) 이즈시신사(出石神社) 군림하면서 서기 272 게릴라부대를 야마토에 보내 전처 사호히메를 태워 죽였다. 그리고 무렵 히바스히메와 혼인하였다. 고사기가 기록한 히바스히메의 족보는 히코이마스(日子坐王, 彦坐王) 미찌누시(丹波道主命) 히바스히메 (氷羽州比, 日葉酢媛命) 되어있다. 그러나 히비스히메가 서기 250 대의 인물이고 히코이마스가 270 대의 인물이니 계보는 맞지 않는다.

스이닌(垂仁) 스진(崇神) 아들로 만들기 위하여 스이닌 주변 인물들의 족보가 무리하게 편집된 탓이다. 그러나 스이닌은 서기 240 , 스진은 서기 270 대의 사람이다.

스이닌 32 두번 황후 히바스히메(日葉酢媛命) 죽었다. 스진 34 야마시로(山背) 오토 카리하타토베(弟苅羽田刀弁) 후궁으로 하였다. 그녀가 후타지 이리히메(道入) 낳았다. 후타지 이리히메는 야마토 타케루와 혼인하여 쥬우아이(仲哀)천황을 낳았으니 서기 300 경의 인물로 추정할 있다. 히바스히메의 사망은 서기 290 대 전반으로 보이며 무렵이면 스이닌의 나이도 50대에 들어섰을 것이다

스이닌의 두번 황후 히바스히메는 타니하국(丹波國, 현 코오토오 지역)출신인데 그녀가 사망한 뒤 야마시로(山背)출신의 오토 카리하타토베와 혼인하였다. 이는 서기 290년 대 스이닌(垂仁) 활동반경이 야마시로지역으로 이동했음을 나타낸다. 야마시로는 후일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 長足, 神功皇后) 근거지이다.  

쿄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 쿠미야마쬬(久御山町) 이찌타(市田) 스이닌천황(垂仁天皇)을 모시는 타마키신사 (珠城神社)가 있다. 이찌타는 스이닌천황의 궁성, 타마키궁(珠城宮)이 있던 자리이며 궁성터에 신사를 지었으므로 타마키신사(珠城神社)라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스이닌의 타마키궁이 야마토의 마키무쿠(纏向)에 있었다고 하였다.

서기 290년 대 스이닌천황은 코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에 진출하여 타마키궁(珠城宮)을 지었다. 아마토의 북부지역 대부분이 그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서기 280년 대 초반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진무시대에 출세가도를 달리던 오토우카시(弟猾)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코토시로누시의 아들이다. 다른 이름은 오호모노누시 쿠시미카타마 (大物主櫛甕玉)이다. 일본서기는 그를 코우안(孝安)천황이라 기록하였다.

서기 287년 야마토에 전란이 닥친다. 서기 285모용외(慕容)의 공격에 의하여 만주 대륙에서 부여의 전군이 격파되고 부여왕 의려(依慮)는 배를 타고 부여를 탈출하여 야마토까지 피난하였다. 야마토는 부여의 피난민을 당하지 못하고 야마토의 왕 오호모노누시와 그의 아들 오호타타네코(大田田根子)는 도망쳤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이 야마시로의 키즈강(木津川)가에서 벌어진다.

일본서기는 이 사건에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의 반란이란 제목을 달았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 추 7월 천황은 사도장군(四道)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사도장군의 한 사람인 오호히코(大彦)의 군세가 와니고개(和珥坂, 天理市和珥)를 넘을 때 일족의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황은 오호히코(大彦)와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를 야마시로(山背)에 파견하여 하니야스비코(埴安彦)를 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와니고개(和珥坂)를 넘어 정예군을 이끌고 나라산(那羅山, 奈良市北部 丘陵)에 올라 싸웠다. 그리고  와카라강(輪韓河, 木津川)까지 진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하니야스비코 (埴安彦) 군과 대치한다. 양군이 키즈강 (木津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하니야스비코(埴安彦)가 히코쿠니부쿠 ()의 군세를 바라보며 “왜 너는 군세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느냐?”하고 물었다. 히코쿠니부쿠 ()가 “너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자(). 너는 제사권(祭祀)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관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온 것이다. 이는 천황의 명령이다.”라 대답했다. 그래서 신()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활을 쏘았는데 맞지 않았다. 다음에 히코쿠니부쿠 ()가 활을 쏘자 가슴에 명중하여 하니야스비코 (埴安彦)가 죽었다. 이것을 본 적군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관군은 강을 건너 북쪽의 적을 쳐부수고 반 이상의 목을 베었다.

하니야스비코(埴安彦)와 오호히코(大彦)는 어머니는 다르지만 사호히코 (狭穂彦王)의 아들이다. 히코쿠니부쿠()는 하니야스비코의 조카이다. 오호히코(大彦)와 히코쿠니부쿠 ()는 부여의 의려(依慮)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였고  하니야스비코(埴安彦)는 외적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국난을 당하여 집안끼리 적이 되어 싸운 것이다. 부여의 난민을 이끌고 온 의려가 야마토의 왕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그를 코우안(孝安)의 아들, 코우레이(孝靈) 천황이라 하였다. 스진 10년이라는 일본서기 기록은 오류이다. 스진은 서기 300년 야마토에 들어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서기 287년이며 타케하니야스는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던 충신이었으나 만세일계라는 황실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일본역사는 그를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이름을 감춘 채 쿄오토오의 카미카모신사에서 제신으로 모신다. 명예는 잃었지만 제삿밥은 얻어먹는 셈이다.

쿄오토오시(京都市)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는 보통 카미가모신사(上賀茂神社)로 불린다. 짝을 이루는 가모미오야신사(賀茂御祖神社)가 있는데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로 불린다. 불행하게도 가모와케 이카즈찌 (賀茂別雷)라는 인물이 역사상의 누구인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시모가모신사는 진무동정시 야마토에 진출한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와 그의 딸을 제신으로 모신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가모와케 이카즈찌(賀茂別雷)라는 익명으로 처리된 사람의 실명을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라고 보는 것이다. 황실과 국가를 동일시하였던 일본은 타케하니야스비코의 역사적 의미 해석에서 혼란을 보일 수 밖에 없다.
타케하니야스비코는 반란을 일으킨 수괴로 만들고 카미가모신사의 제신은 가모와케 이카즈찌라는 가공의 이름으로 처리하였다.

이 부분의 일본 고대사를 해석하는데 가모와케 이키즈찌의 실명이 타케하니야스비코라고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일본 고대사 해석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내용을 포함한다. 이는 학계에서 말하지 않는 역사가 거론되고 있음을 뜻한다

코우레이(孝靈)천황 시대 야마토 역사의 아이돌은 야마토 토토히 모모소(倭迹迹日百襲)이다. 그녀는 코우레이가 축출한 전왕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의 아내이다. 그녀에 관한 기사도 스진(崇神) 천황기에 들어 있다. 이름이 너무 길어  그냥 모모소히메(百襲)라 칭한다.

모모소히메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 해 온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카미는 낮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밤에만 나타났다. 모모소히메가 남편에게 졸랐다. “야밤에만 오시니 얼굴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워요. 아침까지 계시면…?“그럼 내일 아침 당신의 머리빗 통 속에 있을테니 놀라지 마오! 

모모소히메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 빗통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 작은 뱀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카미는 다시 사람의 모습이 되어 “네가 나를 수치스럽게 하였으니 나 또한 너를 수치스럽게 하리라.” 하고 말했다. 모모소히메는 미모로산(御諸山, 三輪山)에 올라 하늘을 쳐다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다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져 앉았다. 그때 젖가락에 음부를 찔려 죽고 말았다.

모모소히메는 오호찌(大市, 大和 城上郡 大市, 井市 北部 마키무쿠() 유적지)에 매장되었는데 그런 전설 때문에 그녀의 무덤을 하시하카(箸墓, 箸墓古墳)라 부른다. 이 무덤은 낮에는 사람이 만들고, 밤이면 귀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오호사카산(大坂山, 香芝町)의 돌을 날라 만들었는데 산에서 무덤까지 인민들이 열을 지어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했다고 한다.

신화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신화를 너무 현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는 것을 배격한다. 서기 287년 부여의 의려의 공격으로 야마토의 왕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가 패하고 도망쳤다. 그의 아내 모모소히메는 죽음을 면하고 살아 남았다. 늙은 도망자가 밤이 되면 몰래 아내를 찾아 왔다 새벽이 되면 산으로 피신하곤 하였다.

뱀이니 젖가락이니 하는 이야기는 본질이 아니며 패전한 전왕과 왕후의 눈물겨운 해후가 밤 사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뱀은 남 모르게 움직여야 되는 비밀스러움을 나타내고 젖가락은 남녀로 맺어지는 운명적인 연대를 암시한다.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는 지금 나라(奈良)미와산 기슭에 있는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의 제신이다. 카모씨에서 갈려 나온 그의 후손들이 미와(三輪)씨로 불린다. 오호모노누시는 스사노오의 증손이다.

모모소히메는 코우레이(孝靈)천황 치세에 살아 남아 스진(崇神)시대까지 살았다. 그녀는 전후 정권은 물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는지 일본 역사상 가장 화려한 매장 의식이 거행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하시하카가 일본 전방후원분의 효시이기 때문이다 

코우레이(孝靈) 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하자  타니하국(丹波國, 현 코오토오 지역)의 스이닌 천황은 쿄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까지 진출하여 타마키궁(珠城宮)을 짓고 아마토의 턱밑까지 진출하였다. 나라(奈良)분지의 남북에서 코우레이와 스이닌이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 전쟁에 돌입한 기록은 없다. 피차간 서로 상대를 공격할 힘이 없었던 모양으로 서기 300년까지 그러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서기 300년 부여의 의라가 또 다시 난민을 이끌고 와 열도를 장악한다. 그가 스진(崇神)이다. 스진은 스이닌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스이닌은 스진에게 패하여 열도를 떠나 쯔시마(對馬)로 쫒겨났다. (69. 부여의 엑소더스 참조).

앞에서 인용된 스이닌기의 기록을 보자. 사이 스진(崇神) 죽었고 스이닌(垂仁) 즉위하자 그를 모신지 3 년이 지난 어느 천황이 고향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향 생각이 간절하던 참입니다.” “네가 길을 잃고 헤메지 않고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선제(先帝)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미마키(御間城)천황(崇神)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 

위의 기사 가운데  앞의 부분은 소설이다. 그러나  “그러니 미마키(御間城) 천황(崇神)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는 언사는 스진이 이닌을 쯔시마(對馬)추방하며 내린 명령이다위의 기사에 의거하여 쯔시마(對馬) 미마나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마나(任那)라는 지명이 역사상 처음 나타나는 기록이다. 이 지명은 세월이 지나면서 한반도의 가야를 지칭하는 것처럼 의미가 왜곡되어 임나가야로 발전한다.


도망친 아내에 대한 증오로 아내를 뒤쫓아 열도에 들어 온 아메노히호코(天日槍)는 전처 사호히메를 불 태워 죽이고 열도에 수 많은 후손을 남긴 뒤 말년에 쯔시마로 쫓겨갔다. 그는 쯔시마에서 죽어 거기 묻혔을 것이다. 일본서기는 그를 스이닌(垂仁)천황이라 기록하였다.

일본서기 스이닌기의 마지막에 “타지마모리(田道間守)의 순사(殉死)”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아메노히호코 (天日槍)가 타지마국(但馬)에 와 정착하고 마에쯔미미(前津耳)의 딸 마타노오(麻陀能烏)와 혼인하여 타지마 모로스쿠(但馬諸助)를 낳았다. 그가 키요히코()의 할아버지이다. 스이닌 90년 봄 2월 천황이 귤을 구해 오라고 타지마모리(田道間守)를 구야국(常世, 멀고 먼 상상의 나라)에 보냈다. 99년 가을 7월 천황이 죽었다. 향년 140세였다. 다음 해 3월 타지마모리가 귤 열매와 나무를 구해 왔으나 천황이 이미 붕어한 것을 듣고 쓰러져 절규하더니 숨이 끊어졌다.

이 기사는 쯔시마에서 죽음을 맞는 스이닌과 관련된 기사이다. 평안한 죽음은 아닌 듯 그를 모시던 타지마모리가 약을 구하러 구야국에 가야 할 정도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병 치레를 했던 모양이다. 타지마모리는 위에 나온 키요히코와 형제간이다. 고사기는 타지마모리와 키요히코가 아메노히호코의 4대손이라 하였으나 이는 고의적으로 시간을 늘리기 위한 구실이다. 아메노히호코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네 아들이 마치 네 세대였던 처럼 기록하여 연대를 늘리고자 하였다. 먼 곳 (구야국) 에 가서 약을 구해 왔으나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으니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는 이야기이다.

타지마모리와 키요히코의 등장은 훗날 태어 날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 長足, 神功皇后)의 신화를 여기 연결하기 위한 배려이다.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의 어머니가 이 가문 출신으로 아메노히호코의 손녀이다

일본서기는 진무(神武, 초대) -  스이제이(綏靖, 2) – 안네이(安寧, 3) – 이토쿠(懿德, 4) – 코우쇼우(孝昭, 5) – 코우안 (孝安, 6) – 코우레이(孝靈, 7) – 코우겐(孝元, 8) – 카이카(開化, 9) – 스진(崇神, 10) – 스이닌(垂仁, 11) – 케이코(景行, 12)로 천황의 순번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해석은 일본서기와 다르다. 우리는 진무(재위 245-256) – 일여(재위 257 283) – 코우안 (재위 284-287)– 코우레이(재위 288 299) – 스진(재위 300 318) – 케이코(재위 319 344)의 순이다. 그 밖의 인물들은 야마토의 왕이 된 적이 없다. 이토쿠(懿德)는 신대(神代)아지스키 타카히코네 ( 高日子根神)이며 신대의 왕이다. 일본서기는 니기하야히를 안네이(安寧), 코토시로누시를 코우쇼우(孝昭), 사호히코를 코우겐(孝元)으로 이름지어 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일여는 히미코의 종녀라 하였으나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다. 그녀는 역사적으로 절묘한 시기에 태어나 백제와 가야를 평화의 다리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백제와 가야 사이에 핀 한 송이 꽃(開花) 이었다()은 일본어로 하나이며 하나는 한국어로 일()이다.   

                                                                        – 끝 -

--> ) 이 글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를 역사로 이해하기 위하여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를 참조하여 씌여진 것입니다. 이 웹사이트는 열도의 고대사를 한글로 해설한 가장 방대하고 탁월한 역작입니다. 특히 열도의 천황계보와 백제왕실과의 관련, 그리고 천황들의 인적상황에 관한 가설은 독창적이고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읍니다. 열도의 고대사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과 조우했을 때 그의 해석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곤 하였읍니다.  열도의 고대사에 관심있으신 분은 반드시 읽어야 될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