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1일 금요일

70. 발해의 길 일본도(日本道)

발해군왕의 사자(使者), 수령(首領) 고제덕(高斉徳)등 8인이 데와노쿠니(出羽国), 현 아키다현(秋田県)북부에 도착한 것은 서기 727년 9월 21일의 일이다. 이 소식을 접한 쇼우무천황(聖武天皇, 701 - 756)은 사자를 파견하여 의복을 제공하고 정중히 먼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 해 12월 29일 사신을 보내 고제덕등에게 의복, 관과 신발을 내렸다. 발해군이란 옛 고구려국을 말한다. 서기 668년 10월 당장(唐將)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쳐서 멸하고 그후 조공이 끊어졌는데 지금 발해군왕이 요원장군 고인의(高仁義)등 24인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러나 에미시(蝦夷) 경계에서 인의(仁義)이하 16인이 모두 살해되고 수령 제덕(斉徳)등 8인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왔다. 서기 728년 정월 3일 천황은 타이코쿠텐(大極殿)에서 왕신(王臣) 백료(百寮)및 발해사등의 조하를 받았다.(속일본기)

열도 역사상 최초로 외국의 사신이 조하에 참석한 장면이다. 동년 정월 17일 고제덕등이 천황에게 발해국 국서와 방물을 바쳤다. 발해국의 대무예(大武藝)왕이 보낸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武藝啓。山河異域、國土不同。延聽風猷、但増傾仰。伏惟大王天朝受命、日本開基、奕葉重光、本枝百世。武藝忝當列國濫惣諸蕃、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但以天涯路阻、海漢悠悠、音耗未通、吉凶絶問、親仁結援。庶叶前經、通使聘隣、始乎今日。謹遣寧遠將軍郎將高仁義・游將軍果毅都尉將徳周・別將舍那婁等廿四人、賚状、并附貂皮三百張、奉送。土宜雖賤用表獻芹之誠、皮幣非珍、還慚掩口之誚、主理有限、披膳未期。時嗣音徽、永敦隣好。

무예 아뢰옵니다. 산하가 다르고 국토 또한 같지 않사오나 귀국의 소문을 근근히 들으며 오직 우러러 볼 따름입니다. 대왕의 천조, 하늘의 명을 받아 일본의 개국을 열었으니 본가(本家)와 분가(分家)가 다 같이 영원히 번영토록 삼가 엎드려 기원하나이다. 무예는 황공하옵게도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여 많은 번국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를 되 찾아 부여의 습속을 지키고 있읍니다. 그러나 머나 먼 하늘 끝에 있어 길은 멀고 바다는 광활하기 그지없으니 소식을 듣기 힘들고 길흉을 묻는 것도 끊어진 바 되었나이다. 인(仁)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서로 돕기를 약속하며 원하옵건데 전경(前經)의 가르침에 따라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는 일을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삼가 영원장군낭장 고인의(高仁義), 유장군과의도위 장덕주(將徳周), 별장 사나루(舍那婁)등 24인을 보내 국서와 함께 담비가죽 300장을 보냅니다. (후략)

천황은 고제덕등 8인에게 정6위상(正六位上)의 벼슬을 내리고 연회를 열어 아악(雅楽)을 연주하고 활쏘기 대회를 열어 발해 사신들을 극진히 환대하였다.

위의 국서가운데 키워드는 본지백세(本枝百世)라는 단어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지십(文王之什) 문왕편에 본지백세 (本支百世)로 나오는 말이다. 무왕이 주 나라를 세운 뒤 무왕의 아버지 문왕을 우상화시킨 노래이다. 주나라 황실이여 영원하라는 의미로 본지백세가 등장하는데 문왕의 본가는 물론 곁가지들도 영원하라는 뜻이다.

만주대륙에 위치한 발해국의 대무예(大武藝)는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대무예는 서기 727년 발해가 처한 대당 대신라등의 국제 정치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본을 우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전 예고없이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국서에 기록된 본지백세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국서에서 대무예왕은 발해와 일본을 형제의 나라로 보았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계승한다고 선언하면서 일본은 발해의 형제의 나라라고 암시한다. 이 말은 일본황실 또한 부여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인들은 이 표현을 그냥 외교상의 수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금 진지한 사람들은 “69. 부여의 엑소더스”에서 거론되었듯 제 10대 스진천황(崇神天皇)이 부여왕 의라(依羅)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현 천황가는 모두 백제왕실의 후손으로 본다. 그러면 부여 – 백제 – 일본의 계통과 부여 – 고구려 – 발해의 계통으로 나뉘고 발해와 일본이 본지(本枝)의 관계라는 것이 대무예의 견해이다.

서기 2001년 12월 18일 일본의 헤이세이(平成)천황이 황거 이시바시노마(石橋間)에서 기자회견중 “저 자신으로서는 칸무(桓武)천황 (737 – 806)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씌여있으므로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읍니다. 무령왕 (461 – 523)은 일본과 관계가 깊고 그 때 이래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청되게 되었읍니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칸무천황의 생모란 타카노(高野)황후 (? – 790) 로 코오닌(光仁) 천황후이며 이름이 니이가사(新笠), 본성은 야마토우지(和氏), 오토쯔구(乙繼)의 딸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야마토우지(和氏)의 조선(祖先)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純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일본서기는 서기 513년 백제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는 기사를 싣고있다.

서기 2002년 세계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일본천황이 백제와의 인연을 겨우 타카노 니이카사 황후가 백제 순타태자의 후손인데서 찾고 있을 뿐으로 천황의 남계가 바로 무령왕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사실데로 거기까지 말 했다면 일본국민들은 패닉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백제 도래인인 황후의 피 한 방울이 섞인 게 아니라 현 천황가의 조상이 백제 무령왕이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60. 케이타이 천황” 편 참조)

발해국은 현재의 북한, 중국, 러시아의 영토를 망라하므로 발해국의 역사를 둘러싸고 관련국이 많으며 또 그들의 입장이 다르다. 발해국을 건국한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 발해국민의 주류가 고구려인지 말갈인지를 두고 나라마다 자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말한다. 중국의 변방에 위치하고 당으로 부터 발해군왕의 책봉을 받은 대조영의 발해는 당연히 중국의 일부이며 발해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와 신당서도 발해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애매한 기술을 남겼다. 구당서는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며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풍속은 고구려 걸안과 같다 (風俗與高麗及 契丹同) 고 하여 고구려에서 갈려나온 종족으로 치고 있다. 구당서보다 후대에 씌여진 신당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 (粟末靺鞨)이나, 고구려에 붙었고 성은 대씨(大氏)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라 하여 고구려와의 종족적 관계를 애매하게 하고 있다.

한국과 북한은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이며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는 당연히 한(韓)민족의 나라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와 일본은 중국과 한국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중국사서에 기록된 것을 제외하고 발해인 또는 고려인의 기록으로 남은 발해의 역사기록은 전무하다. 따라서 발해에 대하여 알려진 역사는 극히 단편적이다.

발해는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현 중국의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리룽쟝(黒龍江)의 삼성(三省), 북한, 러시아의 연해주에 걸쳐 영토를 갖고 있던 나라로 5경(五京), 15부(十五府), 62주(六二州)의 지방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구국(旧国)은 지린성 돈화현(吉林省 敦化県)의 육정산 (六頂山), 영승유적(永勝遺跡), 성산자산성일대 (城山子山城一帯)이며, 문왕(文王)대에 천도한 중경현덕부 (中京顕徳府)는 현재의 지린성허룽현 (吉林省和龍県) 서고성자(西古城子)로 추정된다. 또 상경용천부 (上京龍泉府)는 헤이룽쟝성 영안현 (黒龍江省寧安県) 동경성진(東京城鎮)에 위치한 유적, 그리고 동경용원부 (東京龍原府)는 지린성 훈춘현 (吉林省琿春県) 팔련성(八連城)의 유적, 서경압록부 (西京鴨緑府) 는 지린성 통화(通化)부근의 임강(臨江), 남경남해부 (南京南海府) 는 함경북도 북청(北青)이 유력시 된다.

발해가 수도를 옮긴 순서는 동모산(東牟山), 중경현덕부, 상경용천부, 동경용원부, 상경용천부의 순이다.

당서에는 “용원의 동남에 바다에 면하여 일본도(日本道)가 있다”라고 씌여있다. 용원이란 동경용원부 (東京龍原府)를 말하며 현 지린성 훈춘시 (吉林省琿春市)로 밝혀졌다. 훈춘시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엔벤조선족 자치주 동단에 위치한 현급시(県級市)로 인구의 40% 이상이 조선족이다. 남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나선특급시(羅先特級市)가 있으며, 동은 러시아의 연해지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동해바다까지 15키로미터 떨어진 곳이며 러시아의 포시에트(Posyet)항과 화물철도로 연결된다.

훈춘에 팔련성(八連城)의 유적이 남아있고 이곳이 동경용원부이다. 이곳에서 장령자(長嶺子)라는 산을 넘으면 러시아 영토이며 크라스키노(Kraskino)란 국경마을이 되고 이곳의 항구 이름이 포시에트 항(Port of Posyet)이다. 해안에 가까운 곳에 평성(平城)의 거대한 유적이 있는데 이를 크라스키노 토성(土城)이라 부른다. 이 유적은 블라지보스토크 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가 서기 1998년부터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해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반영하여 한국과 북한, 일본의 학자들도 발굴조사에 참여하였다. 발굴조사후 이 유적이 발해의 항만이었을 가능성이 커졌고 이곳에서 출발한 선박이 동해를 횡단하여 일본열도의 서해안에 닿았다고 생각된다. 발해국은 처음 사자를 보낸 서기 727년부터 서기 919년 까지 34회에 걸쳐 이 길을 통하여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발해의 선박이 일본에 올 때 항상 같은 곳에 도착하지 못 하고, 북으로 혹카이도, 서(西)로는 야마쿠치 현에서 쯔시마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에 걸쳐 제 멋데로 들어왔다. 이는 당시의 항해가 주로 자연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노도(能登)에 발해선이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노도반도(能登半島)가 100 킬로미터 정도 동해(=일본해)로 돌출된 관계로 발해선이 표류중 육지에 걸린 것으로 생각된다. 표류하면서 이곳에 걸리지 못하면 아키다현이나 혹카이도까지 밀려 갈 수 밖에 없다. 서기 727년 처음 온 발해선이 아키다현에 닿아 고인의 (高仁義)등 16명이 에미시에게 살해되었다.

8세기와 9세기에 발해선의 일본 도착지가 확연히 구분되는데 8세기 중에는 모든 발해선이 이시카와현 (石川縣) 카나자와(金澤) 이북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9세기 이후 모든 발해선박이 서일본 쪽에 입항하였다. 이는 인위적으로도 선박의 도착지를 콘트롤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100 프로 자연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일본 후쿠이현의 자료에 의하면 발해사는 주로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일본에 도착했으나 약간의 예외를 빼고 일본도착 시기를 크게 나누면 서기 814년을 경계로 전반은 음력 10월 중순에서 11월 중순, 후반은 12월 중순에서 3월 상순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포시에트를 출항하여 어떤 항로를 따라 일본에 왔고 또 어떤 항로를 따라 모항으로 귀항하였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적국이었으므로 신라의 연안을 따라 동해를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발해사의 항로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나 오호쯔크 해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남하하는 리만한류와 쯔시마에서 일본열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쯔시마난류 그리고 겨울철의 북서 계절풍이 발해선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조건일 것이다.

그러면 발해에서 일본에 올 때 신라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리만한류를 타고 동해를 남하하고 일본에서 돌아 갈 때는 일본열도를 따라 북상하여 사하린을 거친뒤 대륙으로 방향을 바꿔 리만해류를 따라 블라지보스토크 경유 포시에트로 돌아간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일본의 학계는 대체로 이 설을 받아들인다. 포시에트는 겨울에 항구가 얼어 함경남도 신창항(新昌港)을 대체항으로 이용한 경우가 있었다.

서기 776년 겨울 발해국사 사도몽(史都蒙)등 187명은 코오닌천황(光仁天皇) 즉위의 축하및 발해국왕(文王欽茂)의 왕비의 상(喪)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발해의 남해부 토호포(南海府吐号浦)를 출항하였다. 남해부는 발해의 오경의 하나인 남경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北靑郡 荷湖里)로 확인되었다. 서기 773년 일본정부는 발해사도 큐우슈우의 다자이후(大宰府)에 내항(来航)하도록 의무화시켰으므로 이번 발해사는 쯔시마의 다케무로노즈 (竹室之津)를 목표로 항해하였으나 도중의 악천후로 항로를 잃고 에찌젠국(越前国)의 연안에 이르러 착안(着岸)하려 하였으나 돛대가 부러져 표류하여 12월 22일 가가군(加賀郡)에 표착하였다. 이 조난에 의하여 생존자 46명은 가가군에 거치되어 보호를 받았다. 해가 바뀌어 서기 777년 2월 20일 대사 사도몽등 30명의 입경이 허락되었으나 사도몽의 요구에 의하여 46명 전원의 입경으로 변경되었다. 이 때 141명의 발해인이 해난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익사하여 표착한 발해사인 30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에찌젠국에 매장하였다고 하나 그 위치가 어딘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위의 기록에 의해 발해사의 출발지가 남경남해부 토호포임을 알게 되었으며 토호포는 현 함경남도 신창항(新昌港) 으로 밝혀졌다.

서기 841년 내항한 발해사의 구성인원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행은 총 105명으로 사두(使頭) 1명, 부사 1명, 판관 2명, 녹사(録事) 3명, 역어 2명, 사생(史生) 2명, 천문생(天文生) 1명, 대수령(大首領) 65명, 초공(梢工) 28명으로 구성되었다. 발해사의 초기에는 23 - 24명의 소규모였으나 나중 300명을 넘는 일행이 내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코우닌(弘仁) 연간(서기 810 – 824)에 들어와 100명에서 105명으로 정착되었다. 천문생 1명은 천문의 지식을 가지고 항로을 파악하고 기상예측을 담당한 직책이었고 대수령이란 교역을 목적으로 온 말갈 제 부족의 수장으로 자기 부족의 생산품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사람이다. 초공이란 순수한 선원이다.

서기 2009년 12월 18일 조선일보에 유석재의 신역사속의 Why라는 역사 칼럼으로 “당나라 벌벌 떨게 한 발해수군 장문휴”라는 여기 꼭 필요한 기사가 있었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서기 732년 9월 당(唐)나라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은 갑작스런 급보에 혼비백산했다. 산동(山東) 반도 북단 현 봉래(蓬萊)시에 치소가 있던 등주는 지금의 연대(煙臺)와 위해(威海)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해상 교통과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등주를 급습한 병력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발해의 장군 장문휴(張文休)가 이끄는 해군은 순식간에 상륙하여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자사 위준을 죽였다.

武藝遣其將張文休率海賊攻登州刺史韋俊。詔遣門藝往幽州徴兵以討之,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屬山阻塞凍,雪深丈餘,兵士死者過半,竟無功而還。武藝懷怨不已,密遣使至東都,假刺客刺門藝於天津橋南,門藝格之,不死。詔河南府捕獲其賊,盡殺之 (구당서 관련기록)

북한 학계에선 장문휴가 인근 내주(萊州)까지 산동반도 전역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에서 이 소식을 들은 황제 현종(玄宗)은 기겁했다. 황제는 좌령장군 개복순(蓋福順)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발해군을 치도록 했다. 이것은 이미 산동 일대의 당나라 주둔군이 장문휴 군대에 의해 거의 궤멸된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등주에 도착한 개복순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문휴 군대가 이미 모두 철수해 버렸던 것이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기동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육지 쪽에서 또다시 급보가 전해졌다. 발해군이 요하를 건너 만리장성 아래까지 진격한 것이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수륙(水陸) 양 방면의 전격전이었다. "대문예(大門藝)를 내놓아라!" 발해와 당이 전쟁을 벌이게 된 경위는 발해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죽고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 으로 즉위한 7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왕은 인안(仁安)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옛 고구려 영역 수복에도 힘썼다. 이를 곱게 볼 리 없던 당은 북쪽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자칫 협공당할 수 있는 형국에서 무왕은 726년 동생 대문예를 장군으로 삼아 흑수말갈 정복전을 벌였다. 그러나 친당파였던 대문예는 도중에 군사를 버리고 당나라로 망명했다. 현종은 대문예에게 벼슬을 내리고 보호했는데 무왕은 거듭 사신을 보내 대문예 송환을 요청했다. 서기 727년 일본에 보낸 최초의 발해사는 이런 국제정세하에서 일본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려는 포석이었다.

732년 7 월 현종은 발해에 칙서를 보냈다. 도망자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형제애에 흠이 갈까 우려하는 것이라고 변명한 뒤 은근한 협박까지 했다. 이 칙서를 쓴 공으로 승진한 사람이 저 유명한 시인 장구령(張九齡)이었다.

무왕은 당과의 전면전을 택했다. 칙서 두 달 만에 등주를 공격한 것은 이미 훨씬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장문휴의 해군은 압록강 - 요동반도 남단 -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거쳐 등주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당이 미처 손을 써볼 틈이 없이 초토화됐던 전격전이었다.

거의 동시에 무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당의 영토로 진격해 요서(遼西)의 마도산(馬都山·지금의 승덕 부근)에까지 이르렀다. 신당서가 400리에 걸쳐 큰 돌을 쌓아 방어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군세였다.

당은 유주(幽州·지금의 하북성) 일대에서 군대를 징발했는데 그 해 세금을 감면해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위기를 느낀 당은 신라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733 년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金允中) 등이 신라군을 이끌고 발해로 진군했지만 때마침 폭설이 내려 군사의 반을 잃고 돌아섰다. 이제 발해는 당과 신라 모두에 새로운 강국(强國)으로 떠올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서기 733) 가을 7월에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쳐들어 갔으므로, 당나라 현종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왕에게 관작을 더해 주어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한 길 남짓 되었으므로 산길이 막히고 군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 없이 돌아왔다.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遣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南鄙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功而還

서기 1998년은 발해건국 1300년이 되는 해로 일본에서는 발해국 교류연구센터가 설립되고 토오쿄오에서 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9월, 한국에서 9월, 북한에서 10월 심포지움이 열렸다. 이러한 각국의 발해에 대한 관심에 앞 서 서기 1997년 12월 31일 오후 2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한 뗏목 탐사선이 있었다.

탐사대장 장철수(1960 – 1998), 선장 이덕영(1949년생), 사진담당 이용호(1963년생), 통신담당 임현규(1971년생) 의 4명이 승선한 이 뗏목 탐사선은 발해1300호로 명명되었고 1300년전 발해인들의 항해를 재현하고자 제주도 성산포를 목표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하였다. 탐사대의 발해항로 학술대탐사 항해계획서와 항해일기를 “balhae1300ho.org” 홈페이지에서 발췌한다. 이 홈페이지는 고인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뜻을 이어 발해 1300호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1. 발해 그 감동의 역사를 찾아서 (도입부 생략)

1998년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발해가 건국된지 1300 년이 되었다. 우리는 그 역사를 밝혀야 할 엄숙한 싯점에 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바다를 통하여 국가경영을 이룩한 해양국가의 모습이었다.

학문연구에 있어 지나친 확대해석이나 추측을 배제하고 사실과 근거에 입각하여 연구하여야 한다면, 육지에는 유적이나 고고학적 유물을 통하여 그 자료들을 구할 수도 있지만, 바다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단지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화를 통하여 어느 곳으로 이동했을 거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우리가 하려는 발해의 뱃길항로탐사는 발해인들이 어떤 항로를 따라 일본열도에 왕래하며 해상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밝혀 발해사를 복원하는데 조그만 기여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의 현실은 우리의 탐사시도의 장애 요인이었고 불필요한 오해를 받는 수도 있었다. (이하 생략)

2. 발해 항로 학술탐사개요 (생략)

2-1. 가상의 이동경로 (생략)
2-2. 선박의 구조 (생략)
2-3. 항해거리와 항해속력

가. 항해거리 : 러시아 크라스키노 – 제주도 성산포간 672 해리 (1245 킬로미터)
나. 항속 : 북서풍의 속도 감안 3 - 7노트 (평균 3.5노트) 로 추정
다. 항해기간
- 1일 3.5노트 ×24 = 84해리
- 672해리 ÷84해리 = 8일
- 편차 3 ∼ 7일

2-4. 항해방법과 항해장비: 돛 2개, 노 4개, 키(예비) 1개, 물돛 1개

2-7. 뗏목의 제원

가. 길이 11 x 폭 5 미터
나. 돛대 10 미터와 8 미터 길이로 2개 설치
다. 돛폭 1) 5 ×4 ×7 M (예비1개), 2) 5 ×4 ×6 M (예비1개)
라. 노

3. 항해개요

3-1. 대상지: 러시아 크라스키노 - 울릉도 중간 기착 - 제주도 성산포 (총 672해리)

다음은 장철수 대장의 항해일기와 육상 지원팀의 지원기록을 짜집기 하여 순차적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서기 1998년 1월 8일(9일째) 탐사팀은 제주 성산포로 가려던 처음 계획을 이날 부산으로 변경한다. 중간 기착지인 독도 울릉도는 예정대로 들르기로 하였다. 자연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가혹하여 뗏목의 돛과 키의 손상이 심하고 해수의 범람때문에 생리를 처리하는데 곤욕을 치른다. 바닷물의 비말이 얼음이 되어 뗏목은 온통 얼음으로 덮인다. 1월 11일 (12일째) 38 선을 지나다. 1월 12 일 (13일째) 울릉도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1월 13 일 대원들이 지쳐있다. 나의 지도력도 이제 힘을 잃어 가는 것 같다. 22 시 동쪽해류가 강해진다.

뗏목이 울릉도 근처에 도착한 것은 14일 오후 2시쯤. 이 곳의 한 해군기지 레이더에 몇 분동안 뗏목이 포착됐다. 이에 앞서 12시쯤 탐사팀은 울릉도 지원팀과 교신을 통해 저동항에 입항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교신하는 그 시간에 동해 전 해상에 또 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려졌다. 해경경비정도 출항하지 못 할 만큼 기상상태가 나빴다. 뗏목도 끝내 접안에 실패했다.

1월 16 일 (17일째) 이 날 폭풍주의보가 해제됐다. 뗏목은 육지쪽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경에 문의한 결과 그대로 순항하면 17 – 18일께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답변을 들었다. 이에 맞춰 부산의 지원팀과 해양대에서는 인양선을 준비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뗏목은 무풍지대에서 맴돌았다. 18 일 낮까지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1월 17 일 (18일째) 빵이 상했다. 소시지도 상했다. 여전히 무풍지대다. 1월 18 일 새벽 2시 지원팀이 해경경비정을 동원하여 경북 후포앞 41마일 지점에서 식량과 편지를 전하고 돌아갔다. 이날 밤 8시 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리고 만 하루가 지나서 해제되었다. 그러나 쯔시마해류의 영향을 받은 뗏목은 동쪽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1월 19 일 (20일째)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 지고 뗏목은 걷잡을 수 없이 동쪽으로 밀린다. 이제는 한국방송이 아닌 일본 방송만 들린다. 뗏목은 계속 동쪽으로 밀려 독도주변을 지나게 된다. 탐사대는 1월 20일 부터 부산입항을 포기하고 독도접안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21일 아침 울릉도 독도 해상에 다시 폭풍주의보가 발효되어 이 시도마져 무산되었다.

1월 20 일 (21일째) 바다는 참 마음데로 안 된다. 일본의 오키(隱岐)섬 쪽으로 동쪽으로 밀려간다. 1 월 21 일 좌표는 점점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다. 1월 22 일 오전 8시 햇빛이 너무 좋다. 육지의 실루엣이 보인다. 22시 20 분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바람도 해류도 따라 주지 않는다.

1월 23 일 오전 7시 장비고장과 소모가 많다. 눈 앞에 등대가 보이고 항로는 오키(隱岐)섬으로 들어서고 있다. 10 시 뗏목이 종횡무진이다. 16 시 바다가 거칠어지고 있다. 배가 섬으로 밀려가고 있다. 우선 섬으로 피신을 했으면 한다. 16 시 16분 도와달라. 도고(島後)섬 8 km 전방이다. 이대로 가면 섬에 충돌할 것 같다. 20 시 08분 도고섬과의 거리가 2 km 남았다. 20 시56분 일본순시선이 왔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한국해경으로 부터 뗏목구조를 요청하는 팩스를 받은 것은 오후 6시 30분, 해안보안청은 즉시 뗏목 위치 파악에 나서 오키섬 앞 5마일 지점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높은 파도로 사고를 염려한 해상보안청은 일본 도고(島後)섬의 사이고(西鄕)로 예인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해상보안청의 브리핑에 의하면 밤 8시 30분쯤 순시선은 통신교신이 가능할 만큼 뗏목 가까히 접근했다. 순시선의 레이더에 잡힌 뗏목은 점점 섬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시선 사령탑은 대원들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닻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당시 뗏목과 섬과의 거리는 1백50여 미터에 불과했다. 구조에 나선 일본 순시선이 뗏목의 불빛을 발견한 시각은 밤 9시쯤, 순시선에서는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파도속에 묻혀 요동치는 뗏목의 위치는 좀체 확인되지 않았다. 해상보안청에서는 해상자위대에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헬기는 24일 새벽 1시쯤 현지에 도착했다.

1월 24 일 (25일째) 출동한 헬기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현장을 수색했지만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위치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첫번째 두번째 헬기는 연료부족으로 회항하고 말았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시선 레이더에는 뗏목이 포착됐고 쌍안경으로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때 뗏목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부터 헬기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아침 6시쯤 도고(島後)섬 서북쪽 후쿠우라(福浦)항 남쪽 반도 해변에 좌초해 있는 뗏목을 발견했다. 육지에서 1백 미터 떨어진 바다 위에는 2명의 대원이 엎드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또 한명은 뗏목에 몸을 묶은 채 파도를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헬기에서 내려간 다이버는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2명 가운데 이용호 대원을 먼저 구조했지만 숨져 있었다. 그 사이에 또 한명은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육지로 부터 불과 수십미터 거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바로 임현규 대원이었다. 뗏목에 묶여있던 사람은 이덕영 선장, 그러나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흔들리는 뗏목에는 돛대에 묶인 그의 발목만 남아 있었다. 발해항로 재현의 꿈은 이렇게 파도속에 묻히고 말았다.

서기 776년 12월 22일 발해사 187명 가운데 141명이 조난 당해 사망한 바다에서 서기 1998년 1월 24일 4명의 발해탐사대원이 희생되었다. 추진력이 없는 뗏목에 타고 있던 4명의 탐사대원은 겨울의 밤 바다의 험한 파도와 해류 그리고 바닷가의 암초에 노출되어 구조를 기다렸다. 그러나 20세기의 무선통신, 인터넷, 육상자위대 헤리콥터,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가지고도 그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 한 겨울의 추위와 칠흑같은 밤, 거친 바람과 파도 그리고 쯔시마해류는 오늘도 거기에 있다. 옛 발해인들은 그 추위와 파도 그리고 해류를 넘어 일본도를 왕래하였다.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69. 부여의 엑소더스

후한 말, 중평(中平) 6년 (서기 189) 공손도 (公孫度, ? – 204)가 동탁(董卓, ? – 192)에게 발탁되어 요동태수가 되었다. 공손도는 요동에서 주변지방을 평정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고구려, 부여, 선비와 대치한다. 이 때 고구려와 선비의 사이에 끼어 생존을 모색하던 부여가 공손도와 손 잡는다. 공손도는 부여왕 위구태에게 딸을 주어 결혼동맹을 맺는다.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公孫康, 172 – 221)이 위(魏)의 태조 조조(曹操, 155 – 220)에 의하여 양평후(襄平侯)로 봉해진 것이 건안(建安) 12년 (서기 207)의 일이다. 후한이 멸망한 것은 건안 25년, 위 문제의 시대, 황초(黃初) 원년 (서기 220)이다. 3대 째의 공손연 (公孫淵, ? – 238)은 위의 명제(明帝)로 부터 태화(太和) 2년(서기 228)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오(吳)의 손권(孫權, 182 – 252)과도 영합하는 등 위나라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며, 경초(景初) 원년(서기 237) 자립하여 연왕(燕王)을 참칭하였다.

위(魏)의 명제는 경초 원년(서기 237)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 ? – 255)을 시켜 공손연을 토벌코자 하였으나 관구검이 패하고 돌아왔다. 경초 2년(서기 238) 봄, 태위 사마선왕(司馬懿, 179 – 251)을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한다. 6월 위군이 요동에 도착하여 양평(襄平, 현 요양시)을 공격하고 8월 연(淵)의 부자가 참수되어 공손 3대는 50년의 막을 내린다.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귀속되어 있었다. 한나라 말년, 공손도(公孫度)가 바다 동쪽 지방에 세력을 넓혀 바깥 오랑캐들을 위엄으로 복종시켰을 때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다시 요동군에 귀속되었다.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공손도는 두 오랑캐 틈에 끼어 있는 부여왕 위구태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왕위에 섰다. 그러나 위거에게는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 마여만이 있었다. 위거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함께 마여를 세워 왕을 삼았다 (후략)… 마여가 죽자 그 아들 의려는 나이 겨우 6세였다. 이 의려를 세워서 왕을 삼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부여전)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 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 尉仇台死 簡位居立 無嫡子 有孽子麻余 位居死 諸加共立麻余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歳 立以爲王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는 북사와 수서를 인용한다.“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 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未知孰是

건안년 중(서기 196 – 219)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이라 하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서 유민들을 수집해서 군사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를 치니 옛날 살던 백성들도 차츰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후로는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소속되었다.

경초년중(서기 237 – 239)에 명제가 비밀리에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바다 건너보내 이군(二郡)을 장악하게 하였다. 여러 한국(韓国)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그 아래에는 읍장(邑長)의 인수를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옷과 두건을 갖춘 정장(正裝)차림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래 백성들까지도 관청에 나갈 때 정장을 빌려 입고 나간다. 이제는 명제가 하사한 옷을 입고 두건을 쓴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韓)의 나라(國)들을 통치했었으므로 진한 8국을 떼어 낙랑군으로 하겠다고 하니 통역이 잘못되어 한의 신지들이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 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군은 드디어 한을 멸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한전)

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餘有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서기 204년 공손강은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거친 땅을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이라 하였다. 이곳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방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구태(仇台)는 백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사람의 하나로 그의 실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요동의 공손씨와 연합하여 부여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만주의 부여인들이 서기 204년 대거 대방으로 이동하였다. 새로운 땅에 이주한 이들은 강력한 세력이 되어 온조왕 이래의 백제의 왕권을 탈취하여 백제왕이 되었다. 그가 8대왕으로 기록된 고이왕(古爾王, 234 – 286)이다. 그는 즉위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강화에 주력하여 백제가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시대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고이왕 3년(서기236)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고이왕 5년(서기238) 봄 정월에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북과 피리를 사용하였다.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5년(서기 169)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고 나오는데 여기 나온 부산(富山)과 백제본기 고이왕 5년(서기 238)의 부산(釜山)의 기사는 동일한 장소의 지명으로 본다. 이 부산은 요동의 부여를 가리키며 순수한 부여어 “불달”을 부산(不山), 부산(釜山), 부산(富山)으로 적었다.

공손도와 결혼동맹을 맺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부여의 위구태와 대방고지의 대방을 근거로 백제왕이 된 고이왕이 어떤 관계인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학자도 있으나 활동했던 시대를 계산하면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의 연령 차이를 고려해야 된다.

공손연을 괴멸시킨 위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발빠르게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을 손에 넣는다. 공손연 토벌시 고구려는 군사를 파견하여 위를 도왔으나 동천왕 16년(서기242)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서안평은 현 단둥시 근방으로 요동에서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이다. 이 사건은 서기 244년의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의 원인이 된다.

정시(正始)년간 (서기 240 – 249)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칠 때 현도태수의 왕기(王頎)를 부여에 파견하자 위거는 대가를 교외에 보내 군량을 제공하고 왕기를 환영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부여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에서 서기 246년 관구검이 1회 침공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중국사서를 보면 서기 244년과 245년 2회에 걸쳐 침공하였음이 확인된다.

서기244년 8월 관구검은 보기 1만의 군사로 현도성에서 출진하여 비류수(압록강)로 진격한다. 고구려는 관구검 군을 막기 위해 동천왕이 직접 보기 2만을 거느리고 출전한다. 양군은 양맥곡(梁貊谷)에서 충돌했다. 초전에서 작은 승리를 거둔 동천왕은 관구검을 얕보고 철기 5천으로 관구검 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관구검은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이번에는 고구려 군의 대패였다. 고구려 2만 병력은 이 한번의 싸움에서 1만 8천 명을 잃고 말았다. 동천왕은 기병 1천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서기 244년 10월 관구검은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환도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수천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관구검은 전쟁포로를 현도군에 넘긴 뒤 서기 245년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때 위나라의 작전은 고구려의 남북에서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현도 태수 왕기가 관구검과 같이 고구려 공격전에 참가하였고,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이 동원되어 고구려 남쪽에서 작전을 전개한다. 낙랑과 대방 군은 고구려의 속국인 동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동천왕은 수도의 함락, 남부의 동예 함락으로 옥저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관구검은 현도 태수 왕기에게 동천왕의 추격을 명했다. 왕기는 옥저를 지나 북쪽 길로 올라가 읍루와의 경계지역까지 수색하였지만 동천왕은 남옥저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왕기는 8천여 명의 포로를 잡는 등 전공은 세웠지만 동천왕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동천왕은 추격해온 위나라 장수를 암살하고 소수의 추격군을 무찌른 뒤 겨우 사직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쑥밭이 된 환도성에 다시 도읍할 수 없었던 동천왕은 평양성을 쌓고 그곳으로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정시(正始) 6년 (서기 245)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예(嶺東濊)가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다. 불내후(不耐侯) 등이 온 고을을 들어 여기에 항복했다. 정시 8년 (서기 247) 이들이 궁에 들어와 공물을 바치자 다시 조서를 내려 불내예왕으로 봉하였다.(삼국지 위지 동이예전). 불내(不耐)는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였으며 현재 강원도 안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서기 246) 가을 8월에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궁준(弓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

서기 238년 이후 공손연이 토벌된 뒤, 위구태가 죽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부여를 위하여 간위거를 즉위시켜 왕통을 잇게 하는데 백제의 고이왕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이왕 5년(서기238)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는 기사가 이와 관련되지 않을까? 고이왕 계열의 부여인들은 서기 204년경 조국을 떠나 왔으므로 이 시대까지 부여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보다 훨신 후대인 서기 286년 책계왕 시대에도 백제가 대방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 (서기 286) 책계왕이 왕위에 올랐다.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하였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품이 웅장하고 뛰어났다. 고이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부여는 진(晉) 무제(武帝)때 자주 와서 조공하였으나 태강(太康) 6년 (서기 285) 모용외(慕容廆)에 의하여 부여의 전군이 격파되고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자제(子弟)들은 옥저(沃沮)지역에 몸을 숨겼다. 황제가 조를 내려 “부여왕은 대대로 충효를 지켰는데 오랑캐에게 망한 것은 심히 유감이다. 혹시 남은 백성을 모아 나라를 부흥하려 하거든 좋은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 주라”고 명하였다. 호동이교위 (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의 구원에 나서지 않고 기략의 호기를 놓쳐 그리 되었으므로 그를 파면하고 하감(何龕)을 임명하였다.

다음 해, 부여왕을 계승한 의라(依羅)가 하감(何龕)에게 사자를 보내 나라를 수복하기 위하여 귀국하고자 하니 도와 달라고 하였다. 감(龕)이 군대를 소집하고 독호(督護) 고심(賈沈)으로 병을 인솔하여 의라를 호송하였는데 모용외 (慕容廆)가 그 길목을 지켜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외(廆)가 퇴각하고 의라는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모용외(慕容廆)는 매번 부여인을 납치하여 중국에 팔았다. 황제는 이를 측은히 여겨 또 조칙을 내려 국가예산으로 부여인을 사서 돌려 보내고, 하사(下司), 기(冀)의 두 주(州)에서 부여인 노예거래를 금지시켰다. (진서 동이부여전)

武帝時、頻來朝貢、至太康六年、為慕容廆所襲破、其王依慮自殺、子弟走保沃沮。帝為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為惡虜所滅、甚愍念之。若其遺類足以復國者、當為之方計、使得存立。」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失於機略。詔免嬰、以何龕代之。明年、夫餘後王依羅遣詣龕、求率見人還復舊國、仍請援。龕上列、遣督護賈沈以兵送之。廆又要之於路、沈與戰、大敗之、廆衆退、羅得復國。爾後毎為廆掠其種人、賣於中國。帝愍之、又發詔以官物贖還、下司、冀二州、禁市夫餘之口。

한(漢), 위(魏)이래 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맺어 국가안보를 도모하던 부여는 서기 265년 사마염의 진(晉)이 건국되자 진에 의지하게 된다. 서기 285년 선비족의 모용외가 강성하여 부여를 공격하였는데 진의 호동이교위 (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부여가 정복된다.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남은 자제(子弟)들은 옥저(沃沮)지역에 몸을 숨겼다. 다음 해, 서기 286년 부여왕을 계승한 의라(依羅)가 진의 도움을 받아 부여를 재건하였다. 나라를 재건하였지만 모용선비는 부여인을 제 멋데로 붙잡아서 중국에 노예로 내다 팔았다는 것이 진서 부여전의 내용이다.

진서는 의려(依慮)는 자살했고 의라(依羅)가 나라를 수복했으나 백성을 지킬 힘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구세주를 갈망할 말세중의 말세였다. 의라(依羅)가 나라를 수복한 곳은 현 철령현(鐵嶺縣) 서남 60리에 있는 의로(懿路)라고 본다. 신당서에서 읍루고지(挹婁故地)라로 불렸던 이 곳이 지금 철령현 남쪽의 의로성(懿路城) 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상식적인 역사를 넘어 논리를 비약(?)시켜야 된다. 서기 285년 의려(依慮)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부여를 탈출하였고 서기 297년경 의라(依羅) 또한 모용선비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망망대해의 피난길에 오른다. 이들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먼저 정착한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으면서 반도를 남하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13년(서기 298) 가을 9월에 한(漢)과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한(漢)과 맥인(貊人)으로 표현된 이 사람들이 사실은 부여를 탈출한 보우트 피플들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외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불현듯 생각하니“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뒤를 맡기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넜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三神)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에게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북옥저로 도망쳐 몸을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였으나, 이 때부터 모용외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었다.'라고.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正州依慮國所都。爲鮮卑慕溶廆所敗、憂迫欲自裁忽念、我魂尚未泯、則何往不成乎。密囑于子扶羅、踰白狼山夜渡海口。從者數千、遂渡定倭人爲王。自以爲應三神符命、使羣臣獻賀儀。或云、依慮王爲鮮卑所敗、逃入海而不還。子弟走保北沃沮。明年子依羅立。自後、慕溶廆又復侵掠國人。依羅率數千、越海、遂定倭人爲王。

부여 왕계는 구태 – 간위거 – 마여 – 의려 – 의라 – 현(玄)으로 이어진다. 모용선비는 더욱 강성해져 전연이 되었고 서기 342년 고구려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346년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현을 포함 주민 5만여구를 이주시켜, 부여의 존재가 만주에서 사라진다. 위의 대진국본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건너 왜인을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부분만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려 또한 바다건너 왜를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이중의 기사로 읽는다.

의려가 탈출하면서 거쳐간 백랑산의 위치는 당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건창현(建昌縣)의 백랑산(白狼山)은 높이 1140 미터로 요서에서 두번 째로 높은 산이며 발해만으로의 접근성이 좋다. 당시 부여의 수도 의로는 현재의 심양시와 철령시 사이에 있었다. 이 당시의 부여는 지금 역사가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후한시대의 요동개척은 해안지역에 한정되었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중국의 힘이 미치지 못 하였다. 당시 부여왕이 이 경로를 따라 탈출하였다면 의로에서 백랑산까지 300 킬로미터, 백랑산에서 발해만까지 80 킬로미터의 거리를 주파한 셈이다.

부여를 탈출하려면 요동의 발해만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야 된다. 백제해안을 전전하면서 남해안, 가라해의 가락국을 거친 뒤 다시 쯔시마, 잇키, 쯔쿠시에 상륙하게 된다. 많은 인원이 먹을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하여 자주 상륙하게 되고 가는 곳마다 토착민과 갈등이 생긴다. 백제정도의 큰 나라와는 전쟁양상의 갈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지방에서는 부여 이주민의 규모가 오히려 토착세력을 능가하여 필요한 것을 약탈하는 일도 있었으리라. 이 대규모의 민족이동은 중간 기착지에 부여의 무덤이나 무기등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선진의 농업과 공업기술등의 소프트웨어를 남기게 된다.

이들의 경유지 가운데 쯔시마는 매우 중요하다. 부여의 민족이동의 규모만으로 쯔시마는 쉽게 장악할 수 있을테니까 오랫만에 외부에 적의 위협이 없는 쯔시마에서 이들은 느긋하게 앞 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미마나(任那)라는 단어가 일본서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스진(崇神) 65년 추 7월 미마나국(任那国)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 미마나는 쯔쿠시국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으로 바다를 끼고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라는 기사이다.

崇神 六十五年秋七月 任那國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미마나의 나(那)는 라(羅)와 마찬가지로 벌판을 뜻하므로 미마나에서 중요한 부분은 미마이다. 미마를 “任”으로 표기하여 마마나(任那)가 되었으나 스진왕의 일본식 시호는 미마키 이리비코 이니에 (御間城入彦五十瓊殖)로 미마를 “御間”로 표기하였다. 고사기는 미마키 이리히코 이니에 (御眞木入日子印惠)로 “御眞”로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는 임나(任那)라는 단어가 열전 강수전에 딱 한번 임나가라(任那加良)라고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미마나(任那)는 219회 나온다고 일본의 야지 잇슌(矢治一俊)씨는 지적한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리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서기 401)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대왕)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任那者本在對馬島西北界。北阻海有治曰國尾城。東西各有墟落、或貢或叛。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故自是任那乃對馬全稱也。自古、仇州對馬乃三韓分治之地也、本非倭人世居地。任那又分爲三加羅。所謂加羅者首邑之稱也。自是三汗相爭、歳久不解、佐護加羅屬新羅、仁位加羅屬高句麗、鷄知加羅屬百濟是也。永樂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轄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

쯔시마가 사고(佐護), 니이(仁位), 케찌(鷄知)의 3 개의 가라(加羅 = 韓)로 나뉘어 있었다는 말은 오직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만 나오는 기사이다. 한단고기의 위서논쟁이 뜨겁지만 이 부분의 기사는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일본서기에도 나오지 않는 사고(佐護), 니이(仁位), 케찌(鷄知)라는 지명은 지금 쯔시마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카미아가타 마찌 사고(上縣町 佐護), 토요타마 마찌 니이(豊玉町 仁位), 미쯔시마 마찌 케찌(美津島町 鷄知)가 그것이다.

우리는 위의 인위(仁位)가 스진(崇神)천황의 시호, 미마키 이리비코 이니에 (御間城入彦五十瓊殖)의 이니에(五十瓊殖)와 대응함에 주목한다. 그러면 미마키는 임나(任那)와 이니에는 인위(仁位)에 대응하여 스진천황의 시호는 임나(任那)와 인위(仁位)를 내포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스진 65년 미마나국(任那國)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는 기사는 의라의 역사기록이다. 서기 299년경 부여왕 의라(依羅)는 인위가라를 근거로 쯔시마 전역을 장악하고 일본열도 공략에 들어간다. 쯔시마가 미마나(任那)로 불린 것은 이 때 부터이며 그가 야마토를 장악하고 스진천황으로 기록된 것은 서기 300년경의 일이다.

오오사카(大阪)시 스미요시(住吉)구에 오오요사미(大依羅)신사가 있다. 주변에 있었던 고대의 인공(人工)저수지 요사미노이케(依網池)는 일본서기 기록을 따르면 스진 62년 12월 만든 것으로 나온다. 스진천황 시절 식량증산을 위하여 부여의 선진기술로 일본열도에 처음 만들어진 대규모의 인공저수지이다. 서기 1704년 야마토강(大和川)의 유로(流路)를 바꾸면서 야마토강이 요사미노이케(依網池)를 관류하게 되었고 일부는 매립되어 현재 사카난(阪南) 고등학교 운동장이 되었다. 의망지(依網池)는 의라지(依羅池)이며 망(網)과 라(羅)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일본어로 양쪽 다 요사미로 읽는다. 오오요사미(大依羅) 신사가 사카난(阪南) 고등학교 운동장 한켠에 남아있다.

의려와 의라 부자(父子)는 부여를 탈출한 뒤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의 장악에 성공하여 일본의 천황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황실의 만세일계의 논리는 이들을 진무(神武)이래의 황계속의 족보에 끼어 맞춘다. 의라는 9대 카이카 (開化)천황의 두째 아들로 족보가 만들어져 10대 천황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열도에 뿌리가 없는 스진(의라)천황은 백제계와 가야계의 호족들을 회유하여 그들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가야의 아마테라스 오호미 카미 (天照大御神)와 백제의 오호모노누시노 카미 (大物主神 = 三輪山神)를 성대하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또 백제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오호모노누시의 황후였으며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야마토 토토히 모모소 (倭迹迹日百襲姫, 235 – 318)를 극진히 예우한다. 현 나라(奈良)현 사쿠라이(桜井)시 북부의 마키무쿠(纒向)에 그녀의 무덤이 남아 하시하카(箸墓)라 불린다. 그녀의 남편 코우안(孝安 = 大物主神)천황은 부여에서 온 의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은둔하였다.

스진천황을 비롯한 정복세력은 물론 백성들도 패망한 전 왕조의 황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바쳤던 것 같다. 역사는 그녀와 관련하여 해괴한 신화를 기록하였지만 “하시하카(箸墓)는 낮이면 사람이 만들고 밤이면 귀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온다”라고 하였다. 낮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무덤을 축조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밤이면 그녀를 기리는 민초들이 돌과 흙을 날라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고사기는 스진천황이 나이 168세로 무인(戊寅)년 12월 죽었다고 기록했다. 무인(戊寅)년은 서기 318년으로 보나 역사를 보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전후로 60년씩 출입이 가능하다.

의라가 열도를 장악한 뒤 열도에 먼저 와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백제왕실의 탈환작전이 전개된다. 이 탈환작전 에서 다음 세대의 리더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 야마토타케루 즉 훗날의 백제 근초고왕(295 – 375)이다. 의라는 스진(崇神, ? - 318) 천황으로 역사에 남았으며 서기 318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열도의 주도권은 다시 백제로 넘어간다.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68.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1)

금년 1월 17일부터 2월 27일까지 일본의 독쿄(獨協)의과대학교 독일어 문법교수, 테라카도 신(寺門 伸)교수가 쓴 “조선반도에서 일본을 바라본다 –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2)회에서 (5)회까지의 4회분이 연재되었다. 논문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1)회분의 존재에 대하여 문의 해 온 독자가 많아 선후가 바뀌었지만 이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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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서기 2002년)은 일한공동 주최로 월드 컵 축구가 예정되어 있는 관계도 있어 일본과 한국간에 여러 레벨의 교류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또 최근은 한국식(韓國食) 붐으로, 일본인의 한국관은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느껴지나 일반의 일본인의 지식과 의식으로부터 생각할 때 한국은 변함없이 “가깝고도 먼 나라”인 것처럼 생각된다.

일한관계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상대방의 나라에 관한 이해에 갭이 있다는 점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흥미를 갖고 의외로 일본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데 반해 일본인은 한국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또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의 수에 비해 한국어를 공부하거나 말 하는 일본인은 별로 없지 않을 까.

일본인이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탐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본인이란 무얼까?”를 생각할 때 옆의 나라인 한국(과 북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아는 것이 필요 불가결하다고 생각되므로 현재와 같은 상태는 매우 유감스럽다고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교과서 문제나 야쓰쿠니 신사 (靖国神社) 참배문제로 한국과 중국으로 부터 일본의 역사인식을 문제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경우 역사인식이란 전쟁책임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되나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쟁책임과 관련하여, 원래 일본이란 나라의 성립에 관하여, 우리들은 그릇된 관념을 심어오지 않았나라고 생각된다.

먼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 실마리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나의 전문분야는 독일어학(독어문법)이며 “언어의 구조”에 관심이 있다. 처음에는 영어나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등을 공부하다가 중국어와 한국어도 손 대게 되었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뭐야! 일본어와 똑 같지 않은가!” 하고 놀라고 말았다.

문장의 조립방식 (구문)과 단어 배열방식 (어순), 그리고 발상의 패턴이 일본어와 한국어는 동일하다. 예를 들면 “나는 내일 토오쿄오에 간다 .( 私-は-明日-東京-へ-行く)라는 문장이 있으면 “와타쿠시(私)”를 거기에 상당하는 한국어 “나”와 바꿔넣고 “와(は)는 “는”으로 버꿔넣는 식으로 축어역조(逐語訳調)로 마지막까지 한 단어 한 단어를 바꿔넣으면 그것만으로 훌륭한 한국어가 된다. “나-는-내일-토오쿄오-에-간다”.

놀랍게도 일본어의 조사, “와(は)” (“은” 또는 “는”)와 “가(が)” (“이” 또는 “가”)의 쓰임새가 다른 점도 똑 같이 한국어에 적용된다. 결국 “저 사람은 선생이다 ( あの人は先生です)”와 “저 사람이 선생이다 (あの人が先生です)”라는 문장은 영어나 독일어로는 이 차이를 표현할 수 없으나 한국어로는 정확히 표현된다. 그리하여 이 2개의 조사의 사용방식은 – 약간 다른 점도 있지만 – 기본적으로 일본어와 동일하다.

이 밖에도 “테러-와-의-전쟁(テロ・と・の・戦い)”이나 나고야-까지-는-신칸센-으로-갈수있다 (名古屋・まで・は・新幹線で行ける)” 의 “と・の”나 “まで・は”를 한국어에서도 2개의 조사를 겹쳐 표현하는 (“と・の”는 “와-의”, “まで・は”는 “까지-는”으로) 것이나, “해 보다 (やってみる)나 열어 두다 (開けておく)”의 “みる”와 “おく”는 한국어에서도 그대로 “보다 (=見る)와 두다 (=置く)라는 동사를 써서 표현하는 것, 또 체계적인 경어(敬語)가 존재하는 것등, 하여튼 이 2개의 언어의 문법의 골격은 쏙 빼 닮았다 해도 무리가 없다.

“이웃 나라에서 생각한 것 (隣の国で考えたこと)” 라는 책에서 저자인 오카자키 히사히코 (岡崎久彦, 1930 - ) 는 일본어와 한국어는 “기분 나쁠 정도 닮아 있다”, “이 닮은 방식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이다”등의 감상을 말 하고 있으나 나도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똑 같은 감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일한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의 시대 양국의 밀접한 교류및 20세기전반의 병합시대의 영향을 받아 일한 양국간에는,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에 없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그것을 전부 배제하고 더욱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그래도 기분 나쁠 정도로 닮은 점이 있다. (p. 104 – 105).

문법이 닮았다고 한 마디로 말 하지만, 이것은 대단한 의미를 갖는다. 일한양어의 친근성을 논할 때, “문법은 확실히 많이 닮아 있으나” 라고 한 마디로 자르고, “그러나 발음과 어휘는 닮은 점이 거의 없다”라는 말을 하게 되므로 그런 책을 읽어 온 사람들은 문법의 중요성을 인식할 짬도 없으나, 조금이라도 한국어를 공부한 사람은 누구나 이 닮은 방식이 예삿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자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20년 이상 외국을 돌아 다니고 와서, 처음으로 외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p. 108)

이렇게 되면, 일본어와 한국어는 방언관계일까, 아니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무언가의 유연관계(類緣關係)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나 자신은 양자간에 비교적 가까운 친족관계가 있다고 추정한다), 그것이 그리 간단히 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언어학에서 2개의 언어사이에 친족관계가 성립한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상호간의 기본언어간의 동일성, 유사성, 구체적으로는 음운의 대응 (=평행관계)이 있음을 밝혀야 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음운의 대응이란, 예를 들면, 영어의 “t”를 포함하는 단어가, 거기 대응하는 독일어의 단어에는 “s”로 되어 있다 (영어의 water /독일어의 wasser, better / besser 등) 는 등으로 복수의 기본단어에 관하여 특정의 자음들의 대응관계가 보인다는 따위이다. (독일어와 영어의 친족관계는 증명되었다).

신택스(syntax, 문장의 구조)면에서 보아, 일본어와 한국어간에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명백하지만 숫자나 친족명칭, 신체를 표현하는 명사등의 기본어휘가 두 언어에서 많이 다르다. 이것은 실로 불가사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어의 계통 (日本語の系統) (岩波文庫)속에서 언어학자 핫토리 시로우 (服部四郎, 1908 – 1995) 氏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언어의 가장 확실한 비교연구는 어휘의 전반적 비교로부터 음운의 대응을 밝히고, 음운법칙을 귀납하여, 그에 기초하여 문법적 제 요소의 대응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형태소(形態素)의 대응을 배후에 가진, 음운의 대응과 형태의 대응이 언어간의 친족관계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 (p. 29)

현재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 일본어와 타 언어간의 친족관계는 유구어(琉球語)가 유일하며 그 이외의 어떤 언어도 친족관계가 증명된 것은 없다. (유구어가 일본어와 동계라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러나 일본어와 동계일 개연성이 가장 높은 것이 조선어 – 알타이 제 언어일 것이다”. (p. 34)

라고 하며, 다시 동서(同書)의 다른 부분에서, 언어연대학이라는 방법에 기초하여, 일본어와 한국어 (핫토리씨는 조선어라고 썼으나 같은 말이다) 2개 언어간의 거리를 검토한 다음 “일본어와 조선어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분열연대는 지금부터 4000년 이내로는 볼 수 없다 (p. 364) 고 결론 짓는다.

2개의 언어간에 친족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들 언어를 따라 올라가면, 드디어 공통의 조어(祖語)와 만난다고 보통 생각하므로, 그 두 언어가 언제 분화되었는가는 언어의 근친성을 재는 척도가 된다. 거기서 일본어와 한국어간에 친족관계가 있다고 가정하여, 언어연대학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 두 개의 언어는 혹 공통의 한 언어에서 분기하였다 하더라도 그 분기점은 기원 전 2000년 이후는 될 수 없다. 결국 일본어와 한국어는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 관계는 미미하다라는 결론이 나왔다라고 핫토리(服部) 씨는 말 한다.

이 결론은 우리들의 실감을 도저히 납득시키지 못 한다. 까마득한 4000년 전에 분기한 언어가 어떻게 이 정도로 닮아 있는가. 이것은 기본단어의 동일성, 유사성만을 언어비교의 기준으로 보는 현재의 비교언어학의 방법은 완전하지 않고 결함이 있으며, 인도 – 유러피안 제 언어이외의 언어에는 별도의 기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케이스도 존재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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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백제와 일본열도가 같은 나라였다고 보아 왔다. 데라카도 신 교수의 윗 글과 관련하여 우리는 당연히 당시 사람들이 언어문제를 어떻게 소화 해 갔을지 생각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인들이 열도에 들어 갔을 때 현지인들이 원시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백제인들은 현지인의 언어를 백제어와 함께 사용하므로서 의사소통의 질을 높여 나갔을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한 단어 한 단어를 뜯어 놓고 보면 완전히 다른 언어인 것 처럼 보인다. 사람의 신체의 명칭이나 인간의 삶 속에 필요한 가장 원초적인 단어들이 공통점이 없다. 예를 들면, 눈, 코, 입, 얼굴, 손, 발, 밥, 물, 불, 집, 강, 산 따위의 기본어휘들이 어떤 공통점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문장의 어순은 동일하다. 백제인은 현지인의 단어를 빌어 백제어의 문장을 만들어 현지인과 대화의 장을 열었을 것이다.

2009년 11월 1일 일요일

67. 간고지 가람연기의 암시

불교가 백제에서 일본에 전해진 내력을 기록한 문서로 간고지 가람연기와 유기자재장 (元興寺伽藍縁起并 流記資財帳) 이 전해온다. 서기 710년 아스카 후지와라쿄 (飛鳥藤原京) 에서 헤이죠쿄(平城京)로 천도할 때 아스카의 호코지(法興寺)를 새로운 수도 헤이죠교(平城京)로 옮겨 간고지(元興寺)라 하였다 하며 현재 나라시 쥬엔쵸 (奈良市中院町)에 이 사찰의 일부가 남아, 간고지 극락보 (元興寺極楽坊)등이 국사적(国史跡)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람연기는 텐뵤(天平) 19년 (서기745년) 성립되었으며 간고지 가람연기 (元興寺伽藍縁起), 탑로반명 (塔露盤銘), 장륙광명 (丈六光銘), 그리고 자재장 (資財帳)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로반명과 장륙광명은 본래 금석문이었으나 현물은 없고 이 서사문(書写文)만 전 해 온다.

간고지 가람연기는 불교공전(仏教公伝) 이래의 불교보급의 역사를 전한다. 그러나 백제멸망후 야마토(大和) 정권에 의한 율령국가 성립 이후 성립한 문서이므로 야마토 황실의 역사관의 영향을 받아 씌여졌다. 황실의 역사관이란 황실의 만세일계, 킨키 야마토 (近畿 大和)의 유일 정통성, 그리고 백제의 부정과 열도의 자생적인 진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역사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뿐 아니라 독립적인 문서인 간고지 가람연기까지도 황실의 역사관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문서는 야마토에 선행하여 큐우슈우에서 진행된 불교 초전의 역사를 마치 야마토의 일처럼 기록한다. 초기 예배를 드리던 사찰의 이름과 지명, 거기 관련된 황실 구성원의 이름등이 중복모순되어 전체적으로 애매모호하다. 이 내용을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여태까지 보아 왔듯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려고 하니까 난해한 내용이 된다. 야마토의 유일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구주백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구주백제에서 생긴 일을 야마토에서 있었던 일로 기록하려 하니 시대기록을 애매하게 하거나 사찰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바꾸었다고 주장하게 된다.

가장 먼저 문제되는 부분이 불교공전의 연대가 일본서기와 다른 점이다. 일본서기의 불교초전 기사는 킨메이(欽明) 13년 (서기 552) 10월 성명왕(聖明王)은 서부희씨 (西部姫氏) 달솔 누리시치케이 (達率怒唎斯致契) 등을 보내, 석가불의 금동상 일체(金銅像一体) 와 하타키누가사 (幡蓋) 약간, 경론(経論) 약간권(若干巻)을 바치고 따로 상표하여 부처를 널리 예배하는 공덕을 기록하였다고 되어 있다.

한편 간고지 가람연기는 불교초전 기사를 이렇게 기술한다. 야마토(大倭)의 불법은 시키시마궁 (斯帰嶋宮)에서 천하를 다스린 아메쿠니 오시 하루키 히로니와 천황 (天国案春岐広庭天皇(欽明天皇)) 시대, 소가노 오호오미 이나메노 쓰쿠네 (蘇我大臣稲目宿禰) 가 봉사하던 킨메이(欽明) 7년 무오(戊午) 12월 바다 건너 온 것으로 시작된다. 백제국의 성명왕 시대에 태자상(太子像)과 관불의 용기 일식(灌仏器之一式) 및 불기를 쓴 서적 한 상자 (説佛起書卷一筐)를 보내서 말 하였다.“듣기에, 불법이 세상 최고의 법이니 귀국(貴國) 또한 수행하기 바랍니다.”

大倭國佛法 創自斯歸嶋宮治天下天國案春岐廣庭天皇御世 蘇我大臣稻目宿禰仕奉時 治天下七年歳次戊午十二月度來 百濟國聖明王時 (悉達)太子像并灌佛之器一具 及説佛起書卷一筐度而言 當聞 佛法既是世間無上之法 其國亦應修行也

시작부터 헷갈리는게 킨메이(欽明) 7년 무오(戊午)년이라는 불교초전 싯점이다. 킨메이(欽明) 7년은 서기 546년 이나 야마토의 킨메이(欽明) 시대에 무오(戊午)년은 없다. 킨메이(欽明) 7년과 무오(戊午)년이 모순되는 것이다. 무오년은 서기 538년이며 야마토의 宣化천황 시대이다.

킨메이(欽明)는 서기 539년부터 571년까지 야마토의 왕이었고 그의 출생을 일본은 서기 510년으로 보나 우리는 513년으로 본다.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 7년 8월 26일 백제의 태자 순타 (百済太子淳陀)가 죽었다는 기사를 킨메이(欽明)의 미래와 연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백제에서 무령왕의 왕자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그가 일생을 야마토에서 보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일본서기 저자들의 상투적인 버릇이다. 케이타이(繼體) 7년은 서기 513년이며 킨메이(欽明)왕의 백제에서의 이름이 순타(淳陀)였다고 본다.

간고지 가람연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카이이 토유라궁 (楷井等由羅宮)에서 천하를 다스리던 토요미케 카시키야 히메노 미코토 (等與彌氣賀斯岐夜比賣命)가 100 세가 된 계유(癸酉) 정월 9일, 우마야토노 토요토미미노 미코 (馬屋戸豐聰耳皇子, 성덕태자)가 왕명에 의하여 간고지등의 본연(元興寺等之本縁) 및 토요미케 카시키야 히메노 미코토 (等與彌氣賀斯岐夜比賣命) 의 발원과 제신(諸臣)등의 발원을 기록하였다.

楷井等由羅宮治天下等與彌氣賀斯岐夜比賣命生年一百 歳次癸酉正月九日 馬屋戸豐聰耳皇子受勅 記元興寺等之本縁及 等與彌氣命之發願 并諸臣等發願也

토요미케 카시키야 히메노 미코토 (等與彌氣賀斯岐夜比賣命)란 스이코(推古)여왕의 일본식 시호(和風諡號)이며 계유(癸酉)년은 서기 613년이다. 서기 554년생인 스이코여왕은 계유년 59세였으나 위에서는 100세라고 하고 있다. 이렇게 명백한 모순이 부지기수로 발견되는 것이 이 기사이다. 우리는 스이코왕이 100세라는 이야기는 스이코가 아니라 위에 나온 킨메이(欽明)왕의 생탄 100년이 되는 해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카이이 토유라궁 (楷井等由羅宮)도 문제가 된다. 야마토에는 카이이(楷井)는 없고 사쿠라이(櫻井)가 있어서 카이이(楷井)를 사쿠라이(櫻井)라고 일본은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믿도록 야마토의 역사가들이 만든 함정이다. 카이이(楷井)는 큐우슈우의 불교초전과 관계되는 지명이다. 우리는 “26. 구주백제의 성립”에서 백제의 무령왕이 일본열도를 다시 백제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하여 큐우슈우를 먼저 정복하고 백제의 직할령으로 하였으며 구주백제왕으로 하여금 야마토를 관리하였다고 보았다. 야마토는 백제 무령왕의 동생 안칸(安閑)왕이 접수한 서기 531년부터 백제의 관리아래 돌아왔다. 안칸(安閑), 센카(宣化), 킨메이(欽明), 비다쯔(敏達), 요메이(用明)가 모두 구주백제왕을 지낸 다음 야마토의 왕이 되었다.

서기 538년 킨메이(欽明)는 구주백제왕이었고 그 때 불교초전은 큐우슈우를 말한다. 그리고 서기 552년 킨메이(欽明) 는 야마토의 왕이었고 서기 552년 야마토의 불교초전은 일본서기 기록데로이다. 큐우슈우든 야마토든 킨메이 시대에 불교가 들어 온 것은 확실하다. 이러한 내막을 감추고 역사의 파편들이 야마토 황실의 의지에 따라 가공되어 여기저기 모순이 드러난다. 간고지 가람연기를 잘 들여다 보면 큐우슈우 역시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많은 갈등을 겪었으나 서기 580년대 후반 국민총화를 이루어 불국정토를 구현하려는 기운이 충만한 시대를 맞는다.

서기 587년 4월 2일 요메이(用明)왕이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놓고 불법승 (仏法僧)의 삼보(三宝)에 귀의(帰依)하겠다고 선언한다. 천연두가 창궐하던 시대였던 것 같다. 천연두에 걸린 왕이 절에 들어가 부처님께 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데리고 왕이 누워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토요국(豊国)의 법사는 고승대덕의 이름 높은 승려일 터이다. 토요국(豊国)은 현 큐우슈우의 오이타 현(大分縣) 이며, 이 때 토요국(豊国) 수도, 우사시 (宇佐市)는 불교흥륭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고 본다.

서기 587년 4월 야마토의 요메이(用明)왕이 불문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6월 카시키야 히메 (炊屋姫尊, 후일의 스이코 여왕) 의 명에 의하여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와 야카베황자 (宅部皇子)가 토벌된다. ( 64. 아좌태자 참조). 그 해 7월 요메이(用明)왕이 죽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가 토벌되고, 8월 스슌(崇峻, 530 – 592)이 등극한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을 일본서기는 불교도입을 둘러 싸고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일으킨 전란쯤으로 기술하였으나 간고지 가람연기에는 이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다. 이는 이 사건이 불교와 관계없는 순수한 정치적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서기는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카시키야 히메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린 것으로 기록하여 주살된 것 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아나호베황자는 당시 구주백제왕이었고 요메이(用明)왕이 불문에 들어가면 야마토왕이 될 사람이었다.

당시 야마토는 비다쯔(敏達)의 비(妃) 카시키야 히메 (炊屋姫尊, 후의 스이코여왕),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 스슌(崇峻)등을 중심으로 야마토의 자결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가 지금까지의 관례데로 백제와 큐우슈우가 지정한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를 제거한 것이 서기 587년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이었다고 본다. 불교도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라는 일본서기 설명은 큐우슈우의 존재를 감추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때 주살된 아나호베황자가 킨메이(欽明)왕과 그의 비 소가노 오아네(蘇我小姉) 사이에서 태어 난 아나호베황자(穴穂部皇子)로 본다. 그러나 구주백제왕 아나호베황자 (? – 587)는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요메이(用明)왕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나호베황자 (? – 587)와 관련된 일본서기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아나호베황자의 주살은 백제와 구주백제에 대한 야마토의 반역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백제의 의지에 없던 스슌(崇峻)이 출현한다. 일본서기는 요메이(用明) 왕이 587년 7월 9일 죽었다고 기록했으나 그는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따라 우사시 (宇佐市)의 불문에 귀의했을 것이다.

서기 587년의 야마토의 반란은 591년 큐우슈우 정벌로 이어진다. 스슌(崇峻) 4년 (서기 591) 11월 4日,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각 씨족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부장(副将), 대장( 隊長)으로 하여 2만여의 군사를 딸려 쯔쿠지(筑紫)에 출병하였다

서기 591년 야마토의 큐우슈우 정벌의 결과를 알리는 기사는 없지만 591년 큐우슈우의 법흥년호(法興年號) 선포, 592년 야마토의 스슌(崇峻) 암살은 큐우슈우 세력이 그 후의 사태를 주도하였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관심은 당시 큐우슈우의 왕이 누구일까 하는 점이다. 이 글은 그 사람의 그림자나마 밝혀 보고자 하는 의도로 씌여진다.

난해한 간고지 가람연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한참 읽어 내려가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는데 이부분을 따라가 보자.

또, 오호키미천황 (大大王天皇, 스이코 여왕으로 봄)이 천하를 다스릴 때, 천황생탄 100년이 되는 계유(癸酉)년 (서기 613), 춘정월 원단, 하례의 말씀이 있었고 토요토미미노 미코 (聰耳皇子, 성덕태자)가 말 하기를 “지금, 우리가 천조(天朝)의 생년을 헤아리니 100년이 되고 도속의 법 (道俗の法)을 펴 세간에서 건흥 건통 (建興建通)의 연간(年間)이라 칭하니 이 어찌 우리 조상 (킨메이왕을 말함) 의 덕이 아니라 하겠는가?

불법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후궁을 파괴하지 않고, 카이이(楷井)로 옮겨 도량(道場)을 마련했다. 그 때 3명의 여인이 출가하였다. 그 때 크게 기뻐하여 그 도량(道場)에 살게 하여 불법의 싻이 텃다. 그래서 간고지(元興寺)라 불렀다. 그 세명의 여승등은 경(經)에 나온 “비구의 몸으로 득도하고자 하는 것은 비구의 몸을 드러 내 설법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말 함이다.

지금 다시 불법을 일으켜 세상에 널리 펴 간고지(元興寺) 를 세웠다. 그래서 본래의 이름을 따라 켄코지(建興寺)라 칭한다. 그 뒤, 법사사(法師寺)는 고구려 백제에서 법사들이 줄지어 들어 와 불법을 밝히고 절을 지어 켄쯔우지 (建通寺)라 칭하였다. 황후제(皇后帝, 스이코 여왕을 뜻한다고 봄)의 시대, 도속의 법(道俗の法)을 펴 켄코 켄쯔우 (建興 建通)의 시대를 여니 성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안다. 경(經)에 이르기를 “왕의 후궁에서 여인의 몸으로 변하여 설법을 한다”함은 이를 말 함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이 나라의 현실에 부합되었음을 알리라. 이 덕의(德義)에 따라 이름을 법흥황(法興皇)이라 칭한다. 켄코 켄쯔우 법흥황(建興 建通 法興皇)의 세개의 이름을 영원히 유포하여 받들어 모실 것을 제신(諸臣)들과 약속한다.”고 한 뒤, 발원하여 말 하기를 “원 하옵건데,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황제폐하, 하늘과 땅, 사해가 함께 평안하며 정법(正法)이 구현되고 불법의 영향을 받아 성스러운 세계가 끝 없이 펼쳐지기를…”라고 기원하였다.

이 때 천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하늘을 우러러 공손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며 “ 우리의 부모육친권속은 우치(愚癡, 어리석다는 의미의 불교용어)와 사견(邪見)에 빠진 사람의 말에 따라 삼보(三寳)를 파괴하고 불 태웠으며 사찰의 물건들을 도리어 들어내어 없애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토유라(等由良) 의 후궁을 아마데라(尼寺)로 쓰고, 산림, 원전(園田), 연못(池), 봉호(封戸), 노비등을 다시 거두어 부처님을 받든다.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법사사(法師寺)를 짓고 전원, 봉호, 노비등을 거두어 부처님을 받든다. 또 공경하는 마음으로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를 만들고, 또한 그 밖의 여러 선근(善根)을 닦았다. 이런 공덕으로 우리 부모육친권속등의 불법을 불태워 없앤 죄및 사찰의 물건을 도리어 들어내어 없앤 죄를 모두 용서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미륵과 마주하여 정법을 듣고, 무생인(無生忍)을 깨닫고, 정각(正覺)을 속히 이루어, 십방(十方) 의 제불(諸佛)및 사천(四天)등에, 지성의 마음으로 서원하는 것은, 만들어 바친 이사(二寺)및 이구(二軀)의 장륙을 다시 부수지 않고, 흘려 보내지 않고, 칼로 자르지 않고, 불 태우지 않고, 이사(二寺)에 봉납된 모든 물건들을 다시는 취하지 않고, 멸하지 않고, 범하지 않고, 함부로 다루지 않기 위함이다.

가장 평이한 언어로 번역한 것이 위와 같다. 그런데 갑자기 카이이 도량 (楷井道場), 토유라(等由良)의 후궁, 간고지(元興寺), 켄코지(建興寺), 켄쯔우지 (建通寺), 아마데라(尼寺), 법사사(法師寺),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가 나와 이들의 흐름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데라(尼寺)는 비구니의 사찰, 법사사(法師寺)는 비구의 사찰로 이 둘이 있어야 계율을 내릴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간고지(元興寺)라고 하던 것을 켄코지(建興寺)라 칭했다는 것은 무슨 소린지 아리송하다.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는 토요국 우사(豊國 宇佐)에서 이 시대 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가 아스카 호코지(飛鳥 法興寺)의 불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거기에 더하여 스이코(推古)여왕과 토요토미미 황자(성덕태자)의 이름으로 내용이 전개되어 야마토의 역사적 사실처럼 씌여져 있다.(우리는 “37. 성덕태자” 편에서 성덕태자는 픽션이었다고 알고 있다). 거기에 하나의 단서, 법흥황(法興皇)이란 말이 나온다. 당시 불법을 일으켜 켄코지(建興寺), 켄쯔우지 (建通寺)를 세우고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를 만들어 공양한 당사자가 이 법흥황(法興皇)으로 기록된 사람일 것이다.

야마토의 역사가들은 토요토미미 황자(성덕태자)가 이 법흥황(法興皇)에 해당되는 것처럼 역사를 처리하였다. 그러나 법흥황은 큐우슈우에서 나타난 왕(천황)이며 불교흥륭의 시대를 연 것이다. 건흥 건통 (建興建通)의 연간(年間)이란 켄코지(建興寺), 켄쯔우지(建通寺)를 건립하여 불교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 간고지(元興寺)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서기 606년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606년 (推古 14년 4월 8일) 동수장륙불상 (銅繍丈六仏像) 제작이 완료되어 간고지 금당 (元興寺 金堂)에 모시었다고 나온다. 호코지(法興寺)의 이름이 어느 사이엔가 간고지(元興寺)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간고지 가람연기와 유기자재장에 포함된 장륙광명이란 바로 위의 장륙불상의 광배명을 말한다. 서기 596년 호코지(法興寺)건설을 완료하였으나 그로부터 10년 후, 서기 606년 장륙불상을 만들어 모시었고, 그 때는 절의 이름이 간고지(元興寺)로 개명되어 있었다는 것이 일본서기 기록이다.

동일한 장륙불상을 일본서기는 서기 606년 제작, 간고지 가람연기의 장륙광명은 서기 609년 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학자들은 호코지(法興寺)건설이 서기 596년인데 10년후에야 본존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서기 710년 아스카 후지와라쿄 (飛鳥藤原京) 에서 헤이죠쿄 (平城京)로 천도할 때 아스카의 호코지 (法興寺)를 새로운 수도 헤이죠쿄(平城京)로 옮겨 간고지(元興寺)라 하였다고 하는데 이미 서기 606년 국가의 상징적인 사찰의 이름이 바뀌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애매하게 기록된 위의 기록을 가지고 역사의 실체에 접근할 방법은 없다. 단지 위에 기록된 법흥황과 관련된다고 여겨지는 법흥(法興)이란 연호(年號)를 따라가 보자. 야마토 조정 (大和朝廷)의 공식적인 연호는 서기 701년 몬무(文武) 5년의 타이호(大寶)가 처음이다. 그러나 야마토 조정 (大和朝廷)이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전에 사용된 연호가 발견된다. 연호는 모두 큐우슈우에서 선행하여 사용되었다고 밝혀지고 있으며, 불교초전의 역사와 함께 야마토 황실의 역사관과 맞 물려 있는 이슈들이다. 연호 가운데 법흥(法興)이란 연호(年號)가 있는데 서기 591년이 법흥(法興) 원년이 된다. 바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점에 큐우슈우에서 누군가가 법흥이란 연호를 선포하였다.

법흥(法興)이란 연호가 기록된 대표적 문서가 이요노 유노오카 비문 (伊予湯岡碑文)과 호류지 석가삼존상 광배명 (法隆寺 釈迦三尊像 光背銘)이다. 이요노 유노오카 비 (伊予湯岡碑)는 망실되었고 그 내용이 석일본기(釈日本紀) 권14 소인(所引)의 이요풍토기(伊予風土記) 일문(逸文)에 남아있다. 그 내용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법흥 6년 10월, 서기 596년, 우리의 법왕대왕(法王大王)이 혜자법사(慧慈法師)와 카즈라기노 오미(葛城臣)와 더불어 이요국(伊予國)을 소요하며 이 신비한 온천을 보고 영묘한 효험이 있음을 찬미하며 온천의 현창(顯彰)을 글로 남기고자 하시어 이 비문 일편을 짓게 되었다.(본문 생략)

法興六年十月,歲在丙辰,我法王大王與惠慈法師及葛城臣,逍遙夷與村,正觀神井,歎世妙驗,欲敘意,聊作碑文一首.

서기 596년 우리의 법왕대왕이 고구려의 승려 혜자법사(慧慈法師)와 함께 현 시코쿠(四國) 에히메현(愛媛縣) 마쯔야마시 (松山市) 도고(道後)온천을 방문했다. 혜자법사(慧慈法師)는 일본서기에도 나온다.

스이코(推古) 3년 (서기 595) 고구려 승 혜자(慧慈) 귀화하여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스이코(推古) 4년 (서기 596) 혜자(恵慈) 혜총(恵聡)의 두 스님이 호코지(法興寺)에 입주.
스이코(推古) 23년 (서기 615) 11월 15일 고구려 승 혜자(慧慈) 귀국.

서기 587년 4월 2일 요메이(用明)왕이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놓고 불법승 (仏法僧)의 삼보(三宝)에 귀의(帰依)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데리고 왕이 누워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이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가 다름 아닌 혜자법사(慧慈法師)일 것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605년 (스이코 13년) 동수장륙불상 (銅繍丈六仏像)을 제작할 때 고구려의 26대 대흥왕 (영양왕)이 일본국 천황에게 황금 3백냥을 헌상했다고 기록하였다. 이 모든 것이 혜자(慧慈)와 관련될 것이다. 혜자(慧慈)는 승려였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이 큰사람으로 고구려의 돈을 열도에 끌어 들여 장륙불상을 건립하는데 간여하였다.

또 스이코(推古) 18년 (서기 610) 3월 고구려왕이 승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보냈다. 담징은 오경(五経)에 통달할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물감과 종이, 묵(墨)을 잘 만들고,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물레방아를 만든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高麗王貢上僧曇徴 法定 曇徴知五経 且能作彩色及紙墨 并造碾磑 蓋造碾磑 始于是時歟)

이 때 담징이 호류지(法隆寺) 금당벽화를 그렸다고 하나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이 때 담징을 일본에 데려 와 사찰건립을 돕게 한 것 또한 혜자(慧慈)가 수배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혜자법사(慧慈法師)가 야마토의 사람이 아니라 법왕대왕의 사람이라고 믿는다. 서기 615년 그의 귀국은 법왕대왕이 타계한 후의 일일 것이다.

일본은 법왕대왕(法王大王)을 아예 토요토미미 황자(성덕태자)라고 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법왕대왕(法王大王)은 간고지 가람연기에서 나온 법흥황(法興皇)과 동일인이며 큐우슈우에서 건흥 건통 (建興 建通)의 연간(年間)을 열어 불교의 꽃을 피운 사람이라고 본다. 법흥(法興)이란 연호는 그와 관련된 연호일 것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595년 혜자(慧慈)가 귀화하여 황태자(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서기 596년 10월 시코쿠 도고온천에 성덕태자가 혜자(慧慈)와 함께 가서 글을 남겼다면 성덕의 나이 23세 때이다. 나이 23세의 젊은이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을 스승 앞에서 감히 한 수 남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 우리는 법왕대왕(法王大王)의 모습을 기상천외한 곳에서 발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서기 598년 혜왕이 왕위에 올랐다. 혜왕(惠王)은 이름이 계(季)이고 명왕(明王)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昌王)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서기 599년 혜왕이 죽었다. 시호를 혜(惠)라고 하였다.

서기 599년 법왕이 왕위에 올랐다. 법왕(法王)은 이름이 선(宣) 혹은 효순(孝順)이라고도 하였다. 혜왕의 맏 아들이다. 혜왕이 죽자 아들 선이 왕위를 이었다. 수서(隋書)에는 선을 창왕(昌王)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겨울 12월에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게 하였으며,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였다.

서기 600년 봄 정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 크게 가물자 왕은 칠악사(漆岳寺)에 행차하여 비를 빌었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올려 법(法)이라 하였다.

시호란 사망한 뒤에 추증한 이름을 말하는데 시호를 올려 법(法)이라 하였다고 하나 백제의 법왕이 되기 전부터 그는 법흥황이었으며 법왕대왕이었다. 백제 왕위에 있었던 2년간의 행적 또한 제왕이 아니라 승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백제의 29대 법왕은 서기 599년 왕위에 오른다. 서기 2006년 SBS TV 연속극의 서동요(薯童謠)에서 부여선 (扶餘宣)은 악인으로 그려졌는데 실제의 모습은 법왕대왕이었고 서동(薯童)의 아버지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몇 살이며 이전에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기록이 없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이 시대 백제와 일본이 21세기의 요새처럼 여권이 필요한 타국이었다고 믿으므로 법왕대왕 (法王大王)을 열도 안에서만 찾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대의 백제와 일본열도는 동일한 나라였다고 보고 있다. 야마토의 오호기미(大王)는 백제왕을 칭한다. 백제왕실 커넥션이 없는 야마토의 어느 누구도 명시적으로 오호기미(大王)를 칭한 적이 없다. 백제의 멸망 이후에야 열도에서 스스로 천황 또는 오호기미를 자기들 마음데로 칭하게 된다.

삼국사기는 혜왕을 성명왕의 아들이라 하면서 법왕은 혜왕의 아들이라 하였다. 수서는 법왕이 창왕(위덕)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혜왕과 법왕이 모두 위덕왕과 형제간으로 성명왕의 아들이라고 본다. 그들의 형제순으로 위덕(530 – 598), 비다쯔(538 – 585), 요메이(540 – 587), 아나호베(? – 587), 법(흥)왕으로 될 것이다. 모두가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는 킨메이(欽明)의 아들로 기록한다.

간고지 가람연기 (元興寺伽藍縁起)의 내용 가운데 특별한 용어가 하나 등장한다. 관(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오늘 날의 당국(當局, Authority)으로 새겨진다. 아마토의 천황과 성덕태자 이외의 관(官)이 야마토에 주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이 당국(當局, Authority)을 백제나 큐우슈우의 불교진흥과 관련된 관청이라고 본다. 어쩌면 초기 불교 사원 건설을 백제와 큐우슈우가 전담했을 수 있다.

불교에 입문한 3명의 비구니가 수계(受戒)와 관련하여 관(官)에게 말 하였다.“듣자 하니, 출가하는 자는 계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엔 계사(戒師)가 없읍니다. 따라서 백제에 가서 계를 받고 싶읍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서기 587년 백제에서 손님이 왔다. 그래서 관(官)이 물었다. “이 3명의 비구니가 백제에 나가 계를 받고 싶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읍니까?”

백제의 사자가 대답하기를 “비구니가 계를 받으려면, 먼저 아마데라(尼寺, 비구니의 절)에서 10명의 비구니승에게 부탁하여 본계를 받고, 법사사에 가서 먼저 비구니승 10명과 합쳐 20명의 스님으로부터 본계를 받읍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아마데라 밖에 없으므로 법사사도 스님도 없읍니다. 비구니들이 법에 따르려면 법사사를 먼저 짓고 백제국의 스님과 비구니를 모셔와 계를 받아야 됩니다.”고 하였다. (이하 생략)

그 때 3인의 비구니가 관(官)에게 어쭈었다. “단 6명의 스님이 오셨을 뿐으로 수계를 위해서는 20명의 법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백제에 나가 계를 받고 싶읍니다.” 이 말을 듣고 관(官)이 법사들에게 물었다. “이 3명의 비구니들이 백제에 나가 계를 받고 싶어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하생략)

그리하여 관(官)은 파견을 승인했다. 그 때 토요토미미황자 (聡耳皇子)가 대후 오호기미 (大后大大王, 스이코 여왕으로 봄)의 어전에서 아뢰었다. “불법을 펴는 것을 관(官)이 허락했읍니다.”(이하 생략)

법흥왕은 서기 545년 경 출생했을 것이다. 아나호베황자가 야마토에 가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주살된 서기 587년 43세 때 그는 큐우슈우왕이 되었으며, 서기 596년 도고온천을 방문했을 때 52세였다. 큐우슈우는 그를 중심으로 켄코지(建興寺), 켄쯔우지 (建通寺)를 세우고 장륙(丈六)의 불상 이구(二軀)를 만들어 불법을 흥륭시켰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를 법흥황(法興皇)이라 불렀다. 아스카의 호코지(法興寺)도 그의 손으로 건설되지 않았을까? 큐우슈우와 야마토를 왕래하며 불법을 일으키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던 그는 서기 599년 백제왕이 되었다.

이와같은 상황은 서기 598년 위덕왕의 왕자 아좌태자 (일본명 히코히토노 오호에황자)의 요절과 연관되어 혜왕과 법왕이 즉위하였다. 역사는 법왕이 서기 600년 붕어하여 그의 아들 서동 (마동)이 뒤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무왕이다.

2009년 10월 4일 일요일

66. 수서왜국전(隋書倭國傳)

수서(隋書)는 서기 618년 수의 멸망이후 7세기 후반 위징(魏徵, 580 – 643)등이 찬(撰)한 역사서이다. 서기 636년 열전 50권이 완성되었다 하므로 일본서기보다 약 80년 먼저 나온 역사서로 권(卷) 81 열전(列傳) 제46 동이전 (東夷傳)에 왜국(倭國)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기사의 일부는 일본서기에 기록이 없고 또 일부는 일본서기에 나오지만 수서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사서에 나오는데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많이 보아왔다. 3 세기 위지 동이전의 히미코(卑彌呼) 기사와 5세기 송서의 왜5왕 기사가 그러하였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역사 왜곡 가능성이 제기된다.

송서에 기록된 서기 488년 왜무왕의 상표문 이후 나타나지 않던 왜국의 기사가 서기 600년 수서 열전 동이 왜국전에 나오는데 일본서기에는 이 기사가 빠져 있다. 우리는 일본서기가 편집방침과 맞지 않는 역사를 누락하거나 왜곡시킨 사례를 보아 왔다.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확보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가치는 황실의 만세일계, 킨키 야마토 (近畿 大和)의 유일 정통성, 그리고 백제의 부정과 열도의 자생적인 진화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세 가치와 상충되는 역사는 누락 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기 600년 수서 동이왜국전의 내용들은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남기고자 하는 일본황실의 역사와 배치되므로 일본서기에서 고의적으로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히미코(卑彌呼)기사의 역사성은 징구황후(神功皇后)의 신화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릴 것이므로 히미코를 일본서기에서 다루지 않았다. 송서의 왜5왕,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를 제외시키지 않고는 만신창이가 된 황실의 만세일계를 과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기 600년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견수사 기사는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의 유일 정통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사이다.

일본사람들은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라고 믿고 있다. 삼국사기를 삼국(三國)의 사기(史記)라고 하여도 우리는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日本)의 서기(書紀)라고 하기에 웬지 좀 찜찜하다. 왜냐하면 일본서기는 일본황실을 위하여 씌여진 역사이지 일본의 역사로 씌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일본과 일본황실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별로 문제시 하지 않는다. 실로 백제왕실의 후손들은 조상들이 물려 준 일본열도를 완벽하게 관리해 온 셈이다.

수서에서는 다른 역사서에 보이는 왜(倭)라는 명칭 대신 인변(人)에 타(妥)를 쓰는 글자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였으나 대충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대세(大勢)이다. 따라서 콤퓨터 식자가 가능한 왜(倭)를 사용하고 이 글의 주제와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한다.

개황(開皇) 20년 (서기600年) 왜왕 성(姓)은 아메(阿毎), 자(字)는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호(号)는 아베계미(阿輩雞彌), 견사(遣使)하여 왕궁(王宮)에 들어왔다. 황제가 왜국의 풍속을 물었다. 사자(使者)가 대답하기를 “왜왕은 하늘(天)을 형으로, 해(日)를 동생으로 하여, 하늘(天)이 아직 밝지 않았을 때 나와 가부좌하고 정사를 보다가, 해(日)가 뜨면 곧 정무를 멈추고 동생에게 맡깁니다. 고조(高祖)가 말 하기를 “그것은 의리에 어긋나니 고치도록 하라.”고 훈령하였다.

開皇二十年、倭王姓阿毎、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云委我弟。高祖曰:「此太無義理。」於是訓令改之。

왕비를 계미(雞彌)라 하고 후궁으로 여인 6 – 7백 명이 있다. 태자를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라고 한다. 성곽(城郭)은 없다. 12 관위 제도가 있다. 십이등(十二等)의 관제가 있으며, 처음을 대덕(大德)이라 하고, 다음을 소덕(小德), 다음 대인(大仁), 다음 소인(小仁), 다음 대의(大義), 다음 소의(小義), 다음 대례(大禮), 다음 소계(小禮), 다음 대지(大智), 다음 소지(小智), 다음 대신(大信), 다음 소신(小信)이라 한다. 관원의 정원은 없다. 군니(軍尼) 120명이 있고 이는 중국의 목재(牧宰)와 같다. 팔십호(八十戸)에 일 이니익(一伊尼翼)을 둔다. 중국의 현 이장(里長)과 같은 것이다. 십 이니익(十伊尼翼)은 일 군니(一軍尼)에 속한다.

王妻號雞彌、後宮有女六七百人。名太子為利歌彌多弗利。無城郭。内官有十二等:一曰大德、次小德、次大仁、次小仁、次大義、次小義、次大禮、次小禮、次大智、次小智、次大信、次小信、員無定數。有軍尼一百二十人、猶中國牧宰。八十戸置一伊尼翼、如今里長也。十伊尼翼屬一軍尼。

그곳의 풍습으로는 살인, 강도및 간통은 사형, 도둑은 가치를 살펴 재물로 변상시키고, 변상할 재산이 없는 자는 노예로 한다. 그 외는 경중에 따라 유형(流刑), 또는 장형(杖刑)에 처한다. 범죄사건을 취조할 때마다 인정하지 않는 자는 주리를 틀거나 강한 활 줄을 당겨 목을 가격한다. 또는 끓인 물속에 작은 돌멩이를 넣고 쟁송(爭訟)하는 자들로 하여금 돌을 찾도록 한다. 거짓말 하는 자가 화상을 입을 것이라고 한다. 또는 옹기 그릇에 뱀을 넣고 그것을 맨손으로 꺼내도록 한다. 정직하지 않는 자는 손을 물릴 것이라 한다.

其俗殺人強盜及姦皆死、盜者計贓酬物、無財者沒身為奴。自餘輕重、或流或杖。毎訊究獄訟、不承引者、以木壓膝、或張強弓、以弦鋸其項。或置小石於沸湯中、令所競者探之、云理曲者即手爛。或置蛇甕中、令取之、云曲者即螫手矣。

사람들이 매우 순박하여 쟁송은 거의 없고, 도둑질 하는 자도 거의 없다. 악(樂)에 오현(五弦), 금(琴), 적(笛)이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팔, 얼굴 또는 몸에 문신이나 점을 새긴다.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문자는 없다. 다만 나무를 깎아 매듭을 만들어 통신한다. 불법(佛法)을 받들고 백제에서 불경을 구해 와서 처음으로 문자를 갖게 되었다. 점 치는 것을 알고 더욱 박수 무당을 믿는다.

人頗恬靜、罕爭訟、少盜賊。樂有五弦、琴、笛。男女多黥臂點面文身、沒水捕魚。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매년 정월 1일이 되면 반드시 활쏘기시합을 하고 술을 마신다. 그 외의 절기를 지키는 것은 중국과 거의 동일하다. 장기, 쌍륙(雙六), 윷 놀이를 좋아한다. 기후는 온난하고 초목은 겨울에도 푸르다. 토지는 부드럽고 기름지나 바다가 많고 땅은 적다. 물오리의 목에 줄을 매달아 물속에서 고기를 잡게 하여 하루 백여 마리 잡는다. 풍속에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이나 도마같은 나무판 등을 쓰지 않고 나뭇잎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집어 먹는다. 품성은 곧고 우아하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다. 동성과는 혼인하지 않으며 남녀간에 서로 좋아하면 혼인한다. 신부는 반드시 개를 타고 신랑집에 들어 가 남편과 만난다. 부인은 음행이나 질투하지 않는다.

毎至正月一日 必射戲飲酒 其餘節略與華同 好棋博 握槊 樗蒲之戲 氣候温暖 草木冬青 土地膏腴 水多陸少 以小環挂鸕○項令入水捕魚 日得百餘頭 俗無盤俎 藉以檞葉 食用手餔之 性質直 有雅風 女多男少 婚嫁不取同姓 男女相悅者即為婚 婦入夫家 必先跨犬 乃與夫相見 婦人不淫妒

사람이 죽으면 관곽(棺槨)에 넣는다. 친밀하게 지낸 가까운 손님들이 시신 곁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처자형제는 백포로 상복을 만든다.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3년간 빈소에 안치하나 보통사람들은 날을 받아 매장한다. 장의(葬儀)에 이르면 시신을 선상(船上)에 놓고 육지에서 그것을 끌어 당기거나 조그만 상여를 가지고 행한다.

아소산(阿蘇山)이 있고 그곳의 돌은 왠지 모르지만 불기둥이 되어 높이 치솟아 하늘에 이른다. 사람들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고 기도한다. 여의보주(如意寶珠)가 있는데 그 색은 푸르고 크기는 달걀정도이다. 밤이 되면 빛을 발하여 물고기 눈의 정령이라 한다.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치며 진기한 물건이 많아서 항상 통사가 왕래한다.

死者斂以棺槨、親賓就屍歌舞、妻子兄弟以白布製服。貴人三年殯於外、庶人卜日而瘞。及葬、置屍船上、陸地牽之、或以小輿。有阿蘇山、其石無故火起接天者、俗以為異、因行禱祭。有如意寶珠、其色青、大如雞卵、夜則有光、云魚眼精也。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대업(大業) 3년 (서기 607) 그 왕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자가 이르기를 “해서(海西)의 보살천자(菩薩天子) 가 불법을 많이 일으킨다고 듣고 사자를 보내 예를 올리며 사문(沙門) 수십 인이 와서 불법을 배우도록 할 것 입니다”. 그 국서에 이르기를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노라. 건강한지 운운). 황제가 이를 보고 기분이 상하여 홍로경(鴻臚卿)에게 “야만족 오랑케로부터 또 다시 무례한 글이 오면 나 한테까지 가지고 오지 마라.”고 일렀다.

大業三年、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勿復以聞。」

다음 해인 대업(大業) 4년 (서기 608) 황제는 문림랑(文林郞) 배청(裴淸)을 사자로 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를 건너 죽도(竹島, 珍島?)에 닿았다. 남으로 ○羅国 (제주도?)을 바라보며 쯔시마국(都斯麻国)을 거쳐 멀리 대해로 나섰다. 다시 동으로 잇키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쯔쿠시국(竹斯國)에 이르고, 또 동으로 진왕국(秦王國)에 닿았다. 그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국을 지나 해안에 닿았다. 쯔쿠시국(竹斯國) 동쪽은 모두 왜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明年、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疑不能明也。又經十餘國、達於海岸。自竹斯國以東、皆附庸於倭。

왜왕이 소덕 아베다이(小德 阿輩臺)에게 수백인을 딸려 보내 의장(儀仗)을 설치하고 고각을 불며 도착을 환영하였다. 십일 후 다시, 대례 가다비(大禮 哥多毗)에게 이백여기를 딸려 보내 교외에서 위로하였다. 이미 그의 서울에 도착하여, 그 나라 왕과 배청(裴淸)이 만나 매우 기뻐하며 “나는 해서(海西)에 있는 대수(大隋)는 예의의 나라라 들었으므로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읍니다. 나는 이인(夷人)으로서 먼 바다 한 구석에 있으므로 예의(禮義)에 관한 가르침을 들을 수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궁벽한 촌 구석에 머물러 뵈올 기회가 없었나이다. 지금 길을 닦고 객관(館)을 꾸며 놓고 대사를 기다렸으니 아무쪼록 대국유신 (大国惟新)의 덕화(德化)에 대해 들려 주시옵소서.”

배청(裴淸)이 대답하기를 “황제의 덕은 이의(二儀)로 서고, 은혜의 연못은 사해로 흐릅니다. 왕을 어여삐 여김으로서 덕화(德化)를 이루고 그런 연유로 사자를 보내 여기에 황제의 뜻을 전 하는 것입니다.”그런 다음 배청은 물러나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그 후 배청이 사람을 보내 왕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명을 이미 전달하였으므로 곧 귀국길에 나서기를 청 합니다. 그래서 배청을 위하여 향연을 베풀고 그의 귀국편에 다시 사자를 딸려 방물을 공헌하였다. 그런 다음 사신의 발길이 끊겼다.

倭王遣小德阿輩臺、從數百人、設儀仗、鳴鼓角來迎。後十日、又遣大禮哥多毗、從二百餘騎郊勞。既至彼都、其王與清相見、大悅、曰:「我聞海西有大隋、禮義之國、故遣朝貢。我夷人、僻在海隅、不聞禮義、是以稽留境内、不即相見。今故清道飾館、以待大使、冀聞大國惟新之化。」清答曰:「皇帝德並二儀、澤流四海、以王慕化、故遣行人來此宣諭。」既而引清就館。其後清遣人謂其王曰:「朝命既達、請即戒塗。」於是設宴享以遣清、復令使者隨清來貢方物。此後遂絶。

서기 600년이면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8년인데 수서에 왜의 여왕에 관한 언급은 전무하다. 수서의 기록은 남왕(男王)을 상정하고 있으며 일본서기을 통 털어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만 보더라도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의 스이코(推古) 여왕 이외의 다른 왕이 견수사를 보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킨키 천황가 이외의 권력주체를 부정한다.

일본에서는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을 쿠니노 미야스코(國造)와 이나기(稻置)로 해석하고 있으나 정당성을 확보할 권위는 없다. 왜냐하면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은 킨키(近畿) 야마토(大和)가 아닌 구주백제 (九州百濟)의 관제이기 때문이다. 덕(德),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관직에 채용하고 있으니 유교의 가치관은 이미 깊숙히 일본 열도까지 들어와 있다. 주민 80호 당 관리자 이니익(伊尼翼)을 두고 10명의 이니익(伊尼翼)은 1군니(軍尼)에 속한다. 그러니 80호를 1명의 이장(= 伊尼翼)이 관리하고 10개의 리(里)는 1개의 면(= 軍尼)이 되며 전체 120개의 면(面)이 있다고 하였으니 120 x 10 x 80 = 96,000 호의 인구이므로 수서에는 10만호의 인구라고 나와 있다. 호당 7인으로 보면 약 70만의 인구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관리 아래 있었다고 보면 된다.

“아소산(阿蘇山)이 있고 그곳의 돌은 왠지 모르지만 불기둥이 되어 높이 치솟아 하늘에 이른다. 사람들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고 기도한다.” 이 기사는 배청이 몸소 아소산을 방문하고 자기 눈으로 확인한 장면으로 이해한다. 왜(倭)의 수도에서 아소산까지 중국 사신이 왕래 가능한 거리였다는 뜻이다.

“백제를 건너 죽도(竹島, 珍島?)에 닿았다. 남으로 ○羅国 (제주도?)을 바라보며 쯔시마국(都斯麻國)을 거쳐 먼 대해로 나섰다. 다시 동으로 잇키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지쿠지국(竹斯國)에 이르고, 또 동으로 진왕국 (秦王國)에 닿았다. 그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똑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국을 지나 해안에 닿았다. 지쿠지국(竹斯國) 동쪽은 모두 왜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수서의 이 기록을 두고 왜의 서울이 야마토(大和)인지 큐우슈우(九州)인지 확인해 줄 역사가는 없다. 모두 나름데로 추측하고 다툴 뿐이다. 우리는 배청(裴淸)이 방문한 왜의 수도를 현 오오이타현(大分縣) 나카즈시(中津市)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나카즈시(中津市)에서 아소산(阿蘇山)까지는 고귀한 신분의 중국 사신이라도 육로를 통하여 왕래 가능한 거리이다.

왜왕이 배청을 대면하고 듣고자 한 것은 유학의 기본명제인 예(禮)와 의(義)에 관한 것이었다. 왜의 관위제도는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이었고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훗날 백제의 의자왕이 되었을 때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구주백제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아좌태자(阿佐太子, 일본이름 押坂彦人大兄皇子, 570 – 598) 의 장남으로 서기 598년 부친이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서기 598년 백제의 위덕왕과 쿠우슈우(九州)의 아좌태자(押坂彦人大兄皇子) 부자(父子)가 죽자 야마토의 스이코(推古)여왕은 큐우슈우(九州)를 병탄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스이코(推古) 10년 (서기 602)과 11년 (서기 603) 2차례에 걸쳐 큐우슈우(九州) 원정군을 파견한다. 일본서기는 큐우슈우(九州)의 존재를 감추기 위하여 신라 원정군이라고 기록된다. 그러나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큐우슈우군(九州軍)의 역습을 받아 야마토가 항복한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11년 (서기 603) 12월 구주백제의 관위제가 시행되고 서기 604년 4월 헌법 17조가 발표된다. 큐유슈우(九州)의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 에게 패하여 큐우슈우(九州)의 제도를 수용하고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명에 의하여 야마토에 사찰건립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 진다.

수서의 기록은 매우 담담하다. 배청이 언제 왜국에 도착하여 언제 떠났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또 왜국의 사자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다. 서면(書面)으로 국서를 보냈다거나 하는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그러나 지리, 문화, 풍습등의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런데 흥미진진한 일은 일본서기가 배세청(裴世淸)의 왜국방문을 야마토(大和)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앞에 인용한 수서의 내용보다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두개의 친서를 공개하면서 국서에 집착한다. 이를 증거로 야마토(大和)의 위상을 증거하려고 애 쓴다. 심지어 국서를 백제에 강탈 당하였다는 해괴한 내용도 있다. 그 시대 중국황제의 국서를 어떻게 감히 백제인이 강탈 할 수 있겠는가? 백제는 자기의 남쪽 바다를 지나간 중국의 사신 배청 기록을 자기 역사에 기록할 정도로 대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다.

개황(開皇) 20年(서기 600)은 스이코(推古) 8年에 해당하나 이 때의 수서기록은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는 스이코(推古) 15년 (서기 607) 7월 대례(大禮) 오노노 오미 이모코 (小野臣妹子)를 대사로 쿠라쯔쿠리노 후쿠리 (鞍作福利)를 통역으로 하여 대당(大唐)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나온다.

스이코(推古) 16년 (서기 608) 4월 오노노 오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대당(大唐)에서 돌아왔다. 당나라는 그를 소인고(蘇因高)라고 불렀다. 대당대사 배세청과 12명의 수행원이 오노 이모코(小野妹子)와 함께 쯔쿠지(筑紫)에 도착했다. 나니와노 키시 오나리 (難波吉士雄成)를 파견하여 대당객 배세청등 당나라의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이들을 위하여 나니와(難波) 고구려 Guest House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동년 6월 15일 당의 손님들이 나니와즈(難波津)에 정박하였다. 그날 30척의 배를 장식하여 강구에서 그들을 환영하고 새로 지은 외국인 Guest House 로 안내하였다.

거기서 이모코노 오미(妹子臣)가 “소신이 귀국할 때 당나라 황제 (실제로는 수의 양제)가 서간을 제게 주었는데 백제국을 통과할 때 백제인이 훔쳐 갔읍니다. 그래서 서간을 제출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라고 스이코(推古) 여왕에게 보고하였다. 군신들이 상의한 뒤 “외교관이란 생명을 걸고 임무를 수행해야 되거늘 태만하게도 대국의 서간을 잃어 버렸다니 말이 되는가?”라 하며 유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왕이 “이모코(妹子)는 서간을 잃어버린 죄가 있으나 가볍게 단죄해서는 안 된다. 방문중인 대국의 사신들이 이를 들으면 언짢아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라며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배청(裵淸)의 왜국 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무왕 9년(608) 봄 3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문림랑(文林郞) 배청(裵淸)이 왜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우리 나라 남쪽 길을 지나갔다.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奉使倭國 經我國南路)

동년 8월 3일 당의 손님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 날 여왕은 75마리의 말을 장식하여 쯔바키시(海石榴市)에서 손님을 환영하였다. 누카타베노 무라지 히라후 (額田部連-比羅夫)가 환영사를 하였다.

8월 12일 당의 객이 조정에 들어 와 사자의 취지를 아뢰었다. 그리고 대당(大唐)의 진물(進物)을 정원에 진열하고 사주배세청(使主裴世清)은 황제의 서간을 소지하고 두번 재배하고 일어서 사자의 취지를 아뢰었다. 그 글에 “황제는 여기서 왜황(倭皇)의 안부를 묻는다. 사자 장사대례 소인고 (使者 長史大禮 蘇因高) 일행이 와서 왜황 (倭皇) 의 뜻을 자세히 전 하였다. 나는 삼가 하늘의 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였다. 덕을 널리 펴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미치게 하려고 한다. 자애롭게 백성을 기르는 마음에 멀고 가까움이 있겠느냐?. 왜황(倭皇)은 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는 태평하며, 사람들의 풍습도 화목하고, 심지가 깊고 지성의 마음이 있어, 멀리까지 조공하러 온 것을 알고 있다. 그 아름다운 충성심을 기쁘게 생각한다. 점점 날씨도 풀리고 짐은 전과 같이 편안하다. 그리하여 홍로사장객배세청 (鴻臚寺掌客裴世清)등을 보내 방문의 뜻을 전하고 겸하여 따로 물건들을 보내노라.”그 때 아헤노 오미 (阿倍臣)가 나가 이 글을 받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囓連)가 나가 이 글을 받아 대문 앞에 있는 책상위에 놓고 여왕에게 주상한 뒤 물러났다. 이 때 황자(皇子) 제왕(諸王) 제신(諸臣)들은 금으로 만든 머리장식을 꽂고 의복은 모두 금자수직(錦紫繡織) 및 오색(五色)의 능라(綾羅)로 만든 것이었다.

其書曰:「皇帝問倭皇 使人長吏大禮- 蘇因高等至具懷朕欽承寶命 臨養區宇 思弘德化 覃被含靈 愛育之情 無隔遐邇 知皇介居海表 撫寧民庶 境內安樂 風俗融合 深氣至誠 遠脩朝貢 丹款之美 朕有嘉焉 稍暄 比如常也 故遣鴻臚寺掌客 裴世清等 旨宣往意 并送物如別」

8월 16일 조정에서 당객들에게 향연을 베풀다.
9월 5일 나니와(難波)에서 객등에게 향연을 베풀다.

9월 11일 당의 배세청이 귀국했다. 다시 오노 이모코(小野妹子)를 대사로, 키시노 오나리(吉士雄成)을 부사로, 후쿠리(福利)를 통역으로 당객에 딸려 파견하였다. 거기서 여왕이 당제(唐帝, 실제로는 수양제)에게 인사를 표하는 글을 보냈다.“동방의 천황이 서방의 황제에게 삼가 올리옵니다. 사인홍로사장객배세청 (使人 鴻臚寺掌客 裴世清) 일행이 와서 오랜 꿈이 이루어 졌나이다. 가을에 접어들어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때 안녕하신지요? 이번 대례 소인고 (大禮 蘇因高), 대례 오나리( 大禮 乎那利)등을 보냅니다. 간략하나마 삼가 인사 올리나이다.”

이 때 4명의 학생과 4명의 학문승 도합 8명을 당국(唐國, 실제로 隋나라) 에 파견하였다.

是時遣於唐國 學生, 倭漢直-福因, 奈羅譯語-惠明, 高向漢人-玄理, 新漢人-大國, 學問僧, 新漢人-日文, 南淵漢人-請安, 志賀漢人-慧隱, 新漢人-廣濟等 并八人也.

스이코(推古) 17년 (서기 609) 9월 오노노 오미 이모코(小野臣妹子)등이 대당에서 돌아왔다. 다만 통역 후쿠리(福利)는 오지 않았다.

스이코(推古) 22년 (서기 614) 6월 13일 이누카미노 키미 미타스키 (犬上君御田鍬), 야타베노 미야쯔코(矢田部造)를 대당에 파견하였다.

스이코(推古) 23년 (서기 615) 犬上君御田鍬, 矢田部造가 대당에서 돌아왔다.

이상이 스이코조(推古朝)에 나오는 견수사 기록의 전부이다. 서기 618년 수가 멸망하므로 그 다음에 대당기사가 나와야 되나 일본서기는 견수사를 모두 견당사라고 처리하였다. 일본서기는 배세청(裴世淸), 수서는 당 시대에 편찬되었으므로 배청(裴淸)으로 기록된다. 그것은 당태종의 이름이 세민(世民)이었으므로 “世”자를 피한 것이다.

배세청의 관직을 수서와 삼국사기는 문림랑(文林郞)이라 했으나 일본서기는 홍로사장객(鴻臚寺掌客)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노 이모코(小野妹子)의 국서분실사건은 일본서기에 나오나 수서에 나오지 않으며 수서에는 오노 이모코 (小野妹子)의 이름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수서에 지쿠지국(竹斯國)과 진왕국(秦王國)의 국명이 나오지만 야마토(大和)의 국(國)에 해당되는 국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마타이에 서울이 있다 (都於邪靡堆)고 나오므로 서울은 야마타이(邪靡堆)에 있었다고 추측되나 그곳이 어디인지 아직 정설이 없다.

배세청이 도착하고 그의 환영식을 지휘한 소덕 아베다이(小德 阿輩臺)와 대례 가다비(大禮 哥多毗)의 이름이 수서에 나오지만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 고위관리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스이코(推古) 여왕을 적어도 3회 접견하였는데 귀국하여 왜왕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은 납득할 수 없다. 또 배세청이 왜국을 방문하고 환영받은 의전의 내용이 수서와 일본서기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쪽은 사실이 아닐 터이다.

일본의 후루타 타케히코(古田武彦)는 큐우슈우(九州)에 야마토(大和)와 다른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역사학자이다. 이를 큐우슈우 왕조설 (九州王朝說)이라 부르며 일본학계에서는 치열한 논전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착각하기 쉬운 점은 큐우슈우 왕조설 (九州王朝說)을 인정하는 사람은 큐우슈우 왕조 (九州王朝)라는 실체를 상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큐우슈우 왕조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야마토 왕조라는 실체가 또 따로 존재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쪽도 왕조의 실체 같은 것은 없었고 세월속에 인간의 이합집산이 있었을 뿐이다.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동일한 인물이 한 곳에 붙박이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큐우슈우의 왕, 야마토의 왕, 또는 백제의 왕을 돌아가며 맡는 것이 백제의 제도였다. 우리는 보통 아버지가 왕이면 왕자는 부왕이 죽을 때까지 그냥 할 일 없이 기다릴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백제 왕실은 왕자들을 큐우슈우와 야마토에 보내 어렸을 때부터 그들로 하여금 나라을 관리하도록 훈련시켰다.

큐우슈우 왕조의 왕이 야마토의 왕이 되면 열도는 통일 상태이며 야마토의 왕이 큐우슈우를 관리할 힘과 권위를 잃으면 어느 때고 큐우슈우 왕조가 존재하게 된다. 서기 629년 구주백제왕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야마토를 장악하고 조메이천황(敍明天皇)이 되었을 때는 야마토와 큐우슈우가 통일상태이며 서기 641년 그가 백제 의자왕이 됨으로써, 코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가 야마토와 구주를 따로 관리할 때는 큐우슈우 왕조가 존재한 것이다. 큐우슈우의 왕 카루황자(輕皇子)가 쿠데타를 일으켜 야마토를 장악하고 야마토의 코토쿠천황(孝德天皇)이 되면 큐우슈우 왕조는 사라진다. (을사의 변 직후의 상황). 이렇게 큐우슈우 왕조는 시대의 풍운에 따라 존재와 비존재를 반복하였고, 야마토 왕조 또한 이와 유사한 변화속의 존재로 파악된다.

영원하지 않는 존재를 영원하게 만들고자 하거나, 만세일계가 아닌 것을 만세일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고자 하는 행위이다. 수서와 일본서기 기록의 불합치는 이러한 작위의 결과일 것이다.

스이코(推古) 16년 (서기 608) 배세청이 나니와(難波, 현 오오사카)에 도착하고 스이코(推古)여왕과 대면하고 국서를 낭독하였다는 일본서기 기사를 신용하기 어렵다. 서기 608년 왜국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배세청이 남긴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되었을 수서 왜인전 내용에서 야마토 방문의 단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년 9월 배세청의 귀국편에 4명의 학생과 4명의 승려을 파견하는데 이는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파견한 것이다.

대업(大業) 3년 (서기 607) 그 왕 다리시북고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자가 이르기를 “해서의 보살천자 (菩薩天子) 가 불법을 많이 일으킨다고 듣고 사자를 보내 예를 올리며 사문(沙門) 수십 인이 와서 불법을 배우도록 할 것 입니다.”하였는데 그 연장선에서 서기 608년 8명의 학생이 파견된다. 공교롭게도 高向漢人-玄理, 新漢人-日文, 南淵漢人-請安이 귀국하였을 때 다리시북고는 야마토(大和)의 왕이 되어 있었고 일본서기는 그 이름을 조메이천황(敍明天皇)이라 적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초대 중국유학생 출신들이 조메이천황(敍明天皇, 593 – 660) 주위에 머무르게 된다.

견수사의 주체가 야마토(大和)인지 구주왕조인지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직 누가 그것을 결정하였나가 중요할 뿐이다. 견수사가 되었건 견당사가 되었던 모두 다리시북고 = 조메이천황 = 백제 의자왕의 작품이다. 그가 야마토 사람인지 구주사람인지 따질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

“간고지 가람연기와 유기자재장(元興寺伽藍縁起并流記資財帳)”이란 문서가 전 해 오는데 이 문서의 성립은 텐뵤(天平) 19년 (서기 745)으로 일본서기의 성립(서기720)보다 25년 이후의 일이다. 이 문서는 간고지 가람연기 (元興寺伽藍縁起), 탑로반명(塔露盤銘), 장륙광명(丈六光銘), 그리고 자재장(資財帳)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로반명(塔露盤銘)과 장륙광명(丈六光銘)은 간고지(元興寺)의 탑(塔)의 노반(露盤, 지붕의 정점의 보주(宝珠))과 장륙불(丈六佛)의 광배판(光背板)에 조각된 문서이다. 본래 금석문(金石文)이지만 유실되었고 이 서사문(書寫文)만 전해 온다. 이 가운데 장륙광명 (丈六光銘)의 기록이 문제가 된다. 현 아스카데라 (飛鳥寺) 아스카대불 (飛鳥大佛) 의 광배판(光背板)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스이코(推古) 14년 (서기 608) 대수국 사주 홍로사장객 배세청, 부사 상서사부 주사 편광고등이 와서 예배하다.

歳次戊辰、大隨國 使主 鴻艫寺掌客 裴世清、使副 尚書祠部 主事 遍光高等 來奉之

일본서기에도 없고 수서에도 나오지 않는 편광고(遍光高)라는 사람이 나오는 유일한 사료이다. 우리는 배세청이 야마토에 오지 않았다고 추측하였는데 야마토에 와서 건설중인 호코지(法興寺)의 대불을 보고 예배를 드렸다는 내용이다. 앞의 35. 백제 왕흥사와 일본의 호코지(法興寺)에서 거론 한 바 있는 바로 그 호코지(法興寺)이다. 호코지(法興寺)의 본존 장륙부처님이 제작중일 때 대수의 배세청과 편광고가 와서 예배드렸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의 반전에 대답해야 된다.

2009년 9월 4일 금요일

65. 한인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

한일 고대사는 4세기 초에서 7세기 말까지의 약 400여년 동안 세 차례의 격변기를 겪었다. 격변기에는 백제와의 교류가 더욱 심화되므로 이를 감추기 위하여 작위적으로 역사가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첫째 4 세기 초 만주대륙 부여(扶餘)출신의 스진천황(崇神天皇, Emperor Sujin))을 타도하고 백제세력이 열도를 장악해 간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열도의 倭建命과 應神天皇) 의 시대, 징구황후(神功皇后) 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역사를 신화로 만들었다. 둘째 5 세기 고구려의 열도정복과 백제의 재탈환 부분도 그러하다. 인교천황(允恭天皇), 곤지(昆支, 淸寧천황) 의 등장과 왜무왕(倭武王 = 백제 무령왕) 치세를 포함한다. 셋째 7세기 모국 백제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백제의 뱃속에 들어 있던 일본열도가 스스로의 운명을 열어가는 코우교쿠(皇極), 코우토쿠(孝德),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 시대의 기록 또한 애매모호하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시작된 정변은 킨키(近畿)의 천황가(天皇家)를 탈취하고 백제의 계획과 의지를 벗어나 일본열도는 자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백제 본국의 국력은 한성백제 이후 정체상태에 빠져 있었던 반면 일본열도는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여 7세기 중순경에는 인구나 경제력에서 모국과 엇비슷한 상황이 되었다고 본다. 백제가 멸망한 서기 660년 백제는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호(萬戶)가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한편 이 무렵 일본열도의 인구는 약 500만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38.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참조). 끊임없는 전란과 원칙없는 이민정책으로 백제는 점차 일본열도를 관리할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이 부임하고 1년이 지난 서기 642년 구주백제에서 괴이한 변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은 의미의 단락이 심하여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해하는데 많은 상상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일본서기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월 29일 백제에 갔던 사인(使人) 다이닌(大仁)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히라후 (阿曇山背連 比羅夫) 가 역마를 타고 달려 와 “백제국은 천황이 죽었다고 듣고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쯔쿠지(筑紫)까지 우리와 함께 왔는데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혼자 오는 길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금 혼란속에 빠져 있다.”

百済使人大仁阿曇連比羅夫。従筑紫国乗騨馬来言。百済国聞天皇崩、奉遣弔使。臣随弔使。共到筑紫。而臣望仕於葬。故先独来也。然其国者今大乱矣。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일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히라후 (阿曇山背連比羅夫), 쿠사카베노 키시 이와카네 (草壁吉士磐金), 야마토노 아야노 후미노 아타히 아가타 (倭漢書直県)를 백제의 조사(弔使)에게 보내, 그 나라의 근황을 물었다. 조사(弔使)는 “백제국왕은 나에게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 귀국하는 사신에 딸려 귀국시켜 달라고 하거든 천황은 허락하지 말라』고 말했다” 고 한다. 백제의 조사(弔使)의 종자( 従者)들은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 (大佐平 智積)이 죽었다. 또 백제의 사인이 곤륜(昆倫)의 사자를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금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누이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들 40여명이 섬에 버려졌다.』고 한다.

二月,丁亥朔戊子,遣阿曇山背連-比羅夫、草壁吉士-磐金、倭漢書直-縣,遣百濟弔使所 問彼消息 弔使報言 「百濟國主謂臣言 『塞上恒作惡之 請付還使 天朝不許』」 百濟弔使傔人等言 「去年十一月, 大佐平智積卒 又百濟使人擲崑倫使於海裏 今年正月 國主母薨 又弟王子兒翹岐及其母妹女子四人 內佐平岐味 有高名之人四十余 被放於島」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1일 대신들을 나나와(難波)에 보내 고구려 사신이 가져 온 공물을 검사했다. 고구려에서는 작년 6월 제왕자(弟王子)가 죽고, 9월 대신(大臣) 연개소문(伊梨柯須彌)이 대왕을 죽이고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등 180여명을 살해한 뒤 왕의 동생을 왕으로, 동성(同姓)의 도스류김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았다 한다.

壬辰 高麗使人泊難波津 丁未 遣諸大夫於郡,檢高麗國所貢金銀等並其獻物 使人貢獻既訖 而諮云 「去年六月 弟王子薨 秋九月 大臣-伊梨柯須彌殺大王 并殺伊梨渠世斯等百八十余人 仍以弟王子兒為王 以同姓都須流金流為大臣」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4일 천황은 교기(翹岐)를 불러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4월 8일 태사 교기 (太使翹岐)가 수행원들을 데리고 천황을 알현하였다 (太使翹岐将其従者拝朝).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4월 10일 소가노 오호오미(蘇我大臣)가 우네비(畝傍)에 있는 자택으로 백제의 교기등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좋은 말 한필과 20정의 쇠붙이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蘇我大臣 於畝傍家 喚百済翹岐等 親対語話 仍賜良馬一疋 鉄二十[金+廷]唯不喚塞上)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5일 교기일행을 불러 카와치국에 있는 요사미의 미야케앞에서 말을 달리며 하는 활쏘기를 관람시켰다. (於河内国依網屯倉前 召翹岐等 令観射猟)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翹岐従者一人死去).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翹岐児死去).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4일 교기와 그의 처가 쿠다라의 오오이(大井)에 있는 집으로 옮기고 사람을 시켜 이시카와에 그의 아이를 매장하였다. (翹岐将其妻子 移於百済大井家 乃遣人葬児於石川).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7월 22일 조정에서 백제의 사인 대좌평 지적(智積)등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어떤 책에는 “백제사인이란 대좌평 지적 및 그 아들 달솔 (이름은 모름) 그리고 은솔 군선(軍善)”이라 한다. 교기앞에서 스모를 공연하였다. 향연이 끝나고 지적등이 교기를 배웅하였다. ( 饗百済使人 大佐平智積等 於朝 或本云 百済使人 大佐平智積 及児達率 闕名 恩率軍善乃命健児相撲於翹岐前 智積等宴畢 而退 拝翹岐門).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8월 13일 백제의 인질 달솔 장복(長福)에게 소덕(小徳)의 벼슬을 내리고 중객이하 (中客以下)에게 위일급(位一級)을 내리고 직책에 따라 상을 내렸다. (以小徳授百済質 達率長福 中客以下 授位一級 賜物各有差).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4월 21일 백제국주의 아들 교기 제왕자가 사자들과 함께 왔다고 쯔쿠지에서 급보가 있었다. (筑紫大宰 馳驛奏曰 百濟國主兒-翹岐弟王子 共調使來).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7월 3일 나나와에 와 있는 백제의 조공이 평소에 미치지 못 하였다. 이유를 따져 묻자 대사 달솔 자사(自斯), 부사 은솔 군선(軍善)이 곧 바로 시정하겠다고 하였다. 자사(自斯)는 인질 달솔 무자(武子)의 아들이다.

秋七月 已酉朔辛亥 遣數大夫 於難波郡 檢百濟國調與獻物 於是 大夫問調使曰 「所進國調 欠少前例 送大臣物 不改去年所還之色 送群卿物 亦不全將來 背違前例 其狀何也?」大使-達率自斯 副使-恩率軍善 俱答諮曰「即今可備.」自斯 質-達率武子之子.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1일 키비노 시마 황조모가 죽었다 (吉備嶋皇祖母命薨).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7일 하지노 사바노 무라지 이테 (土師娑婆連猪手)에게 황조모의 장의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황조모의 병 수발을 드느라 천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조모의 곁을 지켰다. (詔土師娑婆連猪手視皇祖母命喪 天皇自皇祖母命臥病 及至発喪 不避床側 視養無倦).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9일 황조모를 마유미노 오카 (檀弓岡)에 장사지냈다 (葬皇祖母命于檀弓岡).

이상의 퍼즐 게임같은 기사가 나열되고 나서 서기 645년 6월 12일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지축을 흔드는 을사의 변(乙巳의 變)이 일어나므로 위의 기사의 정합성을 살려 역사를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서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예언적 성격일까? 이 무렵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서기 642년 10월 영류왕(榮留王)과 대당(對唐) 온건파 신하들을 참살하고 영류왕의 동생인 고대양(高大陽)의 아들 보장(寶藏)을 옹립하고 대막리지가 되었다. 앞에 나온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1일의 기사는 이를 말한다.

퍼즐게임과 같은 일본서기 기사를 정합성을 살려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으나 시비를 가릴 방법이 없다. 우리는 앞에서 백제본국, 구주백제 및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세개의 권력이 존재하였음을 말 하였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九州百濟)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두 백제본국의 사건으로 기술하므로 혼란이 가중된다. 백제본국, 구주백제 및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세개의 주체를 전제로, 위의 기록 상호간에 모순되는 사건들을 정합성 위주로 정리하자.

서기 642년 1월 백제국왕모가 사망하였다. 백제국왕모란 구주백제의 국왕모를 뜻하며 병상에서부터 천황이 극진히 간호하였다. 국왕모(國王母)는 기비노 시마 황조모 (吉備嶋皇祖母命)이며 사이메이(齊明)의 모후(母后) 기비히메왕(吉備姬王)을 말한다. 기비히메왕(吉備姬王)은 사이메이(齊明)과 카루황자(輕皇子)(을사의 변 이후의 코오토쿠(孝德)천황)의 어머니이며 서기 642년 큐우슈우에서 사망하였을 것이다. 킨키 천황가 (近畿天皇家)와 다른 큐우슈우(九州) 왕조가 있었고 죠메이(敍明)천황이 킨키(近畿)로 나간 서기 629년부터 사이메이(齊明)가 큐우슈우왕(九州王)이었다. 킨키(近畿)에서는 큐우슈우(九州)왕조를 백제본국과 구별하지 않고 쿠다라(百濟)라 부르기도 하였고 큐우슈우 사람을 카라히토(韓人)라 불렀다. 큐우슈우는 백제본국과의 교류가 많아 야마토(大和)보다는 백제본국에 가까운 아이덴티티를 가진 나라였다.

서기 641년 11월 백제의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죽었다고 사자가 말했다고 하나 실제 그는 죽지 않았고 소문만 났던 모양이다. 서기 642년 7 월 22일 지적을 위하여 야마토의 코우교쿠(皇極) 천황이 연회를 베풀고 있다.

1948년 부여읍에서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 가 발견되었다. 여기 나오는 대좌평 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654년 세운 석비로 “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게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옥을 파 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그 높고 자애스런 모습은 신령으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라는 내용이 해독 가능하다 .

서기 2009년 1월 20일 익산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봉안기가 해독되었다. 서기 639년 백제 무왕의 황후,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 돈을 내어 가람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은 무왕 시절 요직에 있었고, 의자왕이 부임한 뒤 관직을 물러났으나 , 야망을 품은 지식인일 것이다. 지적(智積)과 무왕의 황후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만 양쪽 다 사택(沙宅)씨라는 것은 확실하다.

서기 642년 백제에서 조문객들이 와 있는 가운데 사이메이(齊明)의 동생 카루황자(輕皇子)가 쿠데타를 일으켜 큐우슈우왕(九州王)이 되어 교기와 사이메이(齊明), 하시히토황녀(間人皇女)를 위시한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그리고 고명한 인사들 40여인을 시마나가시(嶋流)시켜 쫒아낸다.

서기 642년 2월 24일 천황은 교기를 불러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阿曇山背連)의 집에 살게 해 주었다. 4월 8일 교기가 종자를 데리고 천황을 배알하였다. 4월 10일 소가노 에미시 (蘇我蝦夷)는 우네비(畝傍)에 있는 집으로 교기를 초대하여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5월 5일 교기등을 불러 기사(騎射)를 구경시켰다.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5월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5월 24일 교기는 처자를 데리고 쿠다라(百濟, 奈良의 地名)의 오호이(大井)의 집으로 옮겼다. 7월 22일 대좌평 지적등에게 조정에서 향연을 베풀었다. 교기앞에서 스모(相撲)를 하도록 하였다. 지적등은 연회가 끝나고 가는 길에 교기의 집까지 배웅하고 문전에서 예배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교기가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취급되며 야마토의 조정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호칭이 꽤 복잡하여 제왕자의 아들 교기 (弟王子兒翹岐), 태사 교기 (太使翹岐), 백제의 교기 (百済翹岐), 백제국주의 아들 교기제왕자 (百濟國主兒-翹岐弟王子)등으로 아이덴티티가 다양하게 표현된다. 우리는 이 사람을 사이메이(齊明)가 왜왕 다리시북고 (倭王 多利思北孤)에게 시집 올 때 데려 온 아들, 아야황자(漢皇子)로 보며, 그는 나카노 오호에황자 (中大兄皇子)란 이름으로 을사의 변을 일으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7월 22일 야마토의 조정에서 향연을 베풀어 대접한 대좌평 지적등은 구주왕이 된 카루황자(輕皇子, 을사의 변 이후의 코우토쿠(孝德)천황)의 사인(使人)이며 카루황자(輕皇子)와 교기(翹岐)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결국 을사의 변은 큐우슈우왕 카루황자(輕皇子)와 야마토에 몸을 의탁한 Boat People인 교기(翹岐)사이를 조정하면서 지적(智積)이 구상한 정변이었을 것이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 645) 6월 8일 나카노오호에(中大兄)가 쿠라야마다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와 은밀하게 합의한다.“삼한(三韓)에서 조공을 바치는 날, 당신이 상표문을 낭독하게 될 것이다. 낭독이 끝나는 시점에 이루카(入鹿)를 살해하겠다.”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란 이름이 일본서기에 처음 나오는데 앞서 기술된 인물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언급하지 않아, 후대 사람들은 제 각각 추측할 뿐이다. 우리는 교기(翹岐)와 나카노 오호에(中大兄)가 같은 사람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6월 12일 코우교쿠(皇極) 천황은 대극전(大極殿)에 좌정하고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가 곁에 시립하였다.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는 소가노 이루카노 오미 (蘇我入鹿臣)가 의심많은 성격이라 밤이고 낮이고 검을 차고 있는 것을 알고 무장해제 한 다음에 입실시켰다. 쿠라야마타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가 앞으로 나가 삼한(三韓)의 상표문(上表文)을 읽어 나가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는 12개의 출입문을 폐쇄토록 한다. 그런 연후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 자신이 장창을 들고 어전곁에 숨는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노 무라지 (中臣鎌子連) 등은 활과 화살을 들고 그를 엄호할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한다. 아마노 이누카이노 무라지 카쯔마로 (海犬養連勝麻呂)가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 (佐伯連子麻呂)와 카쯔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아미다 (葛城稚犬養連網田) 에게 검을 나누어 주고 행동개시를 명한다. 코마로(子麻呂)등은 밥을 물에 말아 먹다가 공포에 질린 나머지 먹었던 것을 토하자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가 이들을 진정시킨다.

쿠라야마타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 는 낭독이 거의 끝나 가는데 코마로(子麻呂)등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땀을 뻘뻘 흘리며, 목소리는 떨리고 양손이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쿠라쯔쿠리노 오미(鞍作臣)가 괴이하게 여겨 “왜 그렇게 떨고 있느냐?” 물었다. 야마타노 마로 (山田麻呂)는 “천황을 가까이 뵈오니 나도 모르게 그만…”라고 얼버무렸다. 코마로(子麻呂)등이 이루카(入鹿)의 위세에 눌려 무서워 하는 것을 보고 당장 헤치우라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이 일갈한다. 그 때서야 코마로(子麻呂)등이 함께 뛰어나가 이루카(入鹿)의 머리와 어깨를 가격한다. 이루카(入鹿)가 놀라 일어서려 하자 코마로(子麻呂)가 검을 휘둘러 이루카(入鹿)의 다리를 절단한다. 이루카(入鹿) 가 넘어져 천황쪽으로 기어가며 고개를 숙이고 “황실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 황위를 이어야 됩니다. 저는 죄가 없읍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천황이 대경실색하여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에게 고함친다.“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이 바닥에 엎드려 아뢴다.“쿠라쯔쿠리(鞍作)는 황실을 빼앗고자 하였읍니다. 천손(天孫)의 자리를 감히 쿠라쯔쿠리(鞍作)가 넘보게 해서 되겠읍니까?”. 소가노오미 이루카 (蘇我臣入鹿) 의 이름이 쿠라쯔쿠리 (鞍作)이다. 천황이 일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 (佐伯連子麻呂)와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이미타 (稚犬養連網田)가 이루카노 오미(入鹿臣)를 죽였다. 그 날은 장대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황궁의 정원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깔린 융단과 병풍등으로 쿠라쯔쿠리(鞍作)의 시체를 덮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가 이를 보고 사저로 도망가면서 사람들에게 외쳤다.“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 (鞍作臣) 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그는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는 즉시 호코지(法興寺)로 옮겨 그곳을 요새화하고 다음 단계의 준비에 들어간다. 모든 황자(凡諸皇子), 모든 왕들(諸王), 모든 공경대부(諸卿大夫), 오미(臣), 무라지(連), 토모노 미야쯔코(伴造), 쿠니노 미야쯔코(国造) 를 호코지(法興寺)로 소집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쿠라쯔쿠리노 오미(鞍作臣)의 시신을 그의 부친 오호오미 에미시(大臣蝦夷)에게 보냈다. 아야노 아타히(漢直)등이 권속을 모아 무장하고 오호오미(大臣) 편에 서서 싸우려고 군진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가 장군 코세노 토쿠다노 오미 (巨勢徳陀臣)를 시켜 천지개벽(天地開闢)이래 군신(君臣)의 구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적당(賊党)을 설득하였다. 타카무카노 오미 쿠니오시 (高向臣国押) 가 아야노 아타히(漢直)등에게 말한다.“우리들은 타이로우 사마 (君大郎 = 入鹿) 때문에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오호오미(大臣(蝦夷)) 또한 오늘이나 내일 중 주살되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헛 된 싸움을 하여 권속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고 하느냐?”말을 마치자 검을 풀어 놓고 활을 내 던지고 가 버렸다. 적도(賊徒) 역시 이를 따라 도망쳤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645) 6월 13일 소가노 오미 에미시(蘇我臣蝦夷)등은 죽음이 임박해 오자 천황기(天皇記), 국기(国記), 진보(珍宝)를 모두 불 태웠다. 후네노 후비토 에사카(船史恵尺)가 잽싸게 불에 타려하는 국기(国記)를 집어내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에게 바쳤다. 그날 소가노 오미 에미시 (蘇我臣蝦夷)와 쿠라쯔쿠리(鞍作)의 시신을 묘(墓)에 장사지내고 곡읍(哭泣)도 인정한다는 허가가 내렸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 645) 6월 14일 카루황자(軽皇子)에게 황위를 넘기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를 황태자로 세웠다.

을사의 변으로 불리는 서기 645년 6월 12일 이타부키노미야(板蓋宮)에서 벌어진 정변은 계획데로 진행되어 소가씨 종가(宗家)를 멸망시키고, 반대세력을 진압한 뒤 코우교쿠(皇極)천황을 퇴위시킨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1월 16일 천황이 니이나메노 마쯔리(新嘗祭)를 지냈는데 황태자와 오호오미 (大臣)가 참석하였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2월 13일 오키나가 타라시히 히로누카 천황 (息長足日広額天皇, 敍明)의 장례가 시작되었다. 그날 소덕 코세노 오미 토쿠다 (小徳巨勢臣徳太)가 오호마타황자 (大派皇子, 敏達의 황자)를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 = 弔辭)을 읽고, 다음 소덕 쿠라타노 오미 호소메 (小徳粟田臣細目)가 카루황자(軽皇子 = 孝德천황)를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소덕 오호토모노 무라지 우마카이 (小徳大伴連馬飼)가 오호오미(大臣)을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읽었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2월 14일 오키나가노 야마다노 키미 (息長山田公)가 히쯔기(日嗣 = 황태자)를 위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읽었다.

여기 나온 황태자 또는 히쯔기(日嗣)란 표현은 코우교쿠(皇極) 원년부터 이미 다음 천황이 될 사람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며 645년 6월 12일 대극전(大極殿)에 좌정한 천황곁에 시립하고 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황자가 히쯔기 (日嗣 = 황태자) 였다.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후계자를 처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세상이 바뀐 서기 645 년 6월 14일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는 “나는 출가하여 요시노(吉野)에 들어가 불도(佛道)에 정진하겠다”며 스스로 호코지(法興寺)에 들어가 삭발하고 가사을 입은 채 요시노(吉野)의 깊은 산중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였지만 같은 해 9월 3일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는 모반죄의 명목으로 처형되니 백제왕실의 의도와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왜냐하면 백제 위덕왕(530 – 598)에서 아좌태자 (彦人大兄와 동일인, 570 - 598), 의자왕 (多利思北孤 = 敍明천황과 동일인, 593 – 660),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615 – 645)로 이어지는 백제왕실의 본류가 역사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시마나가시로 쫒겨난 사람들이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로 흘러 들어왔다. 킨키 천황가는 죠메이(敍明)천황의 명실상부한 황후 코우교쿠(皇極) 천황과 후계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 가 있었고 소가노이루카 (蘇我入鹿)가 후견인으로 버티고 있었다.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는 불행한 난민들을 보살펴 주었으나 그들은 킨키 천황가를 탈취한다. 그 사건이 을사의 변이다. 이 때 “다이카(大化)의 가이신(改新)(Taika Reforms)”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후인들이 미화하여 붙인 타이틀에 불과하다.

혁명주체 세력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정변을 미화하여 을사의 변 (乙巳의 變)이 마치 의거(義擧)인냥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는 이 의로운 거사를 통하여 일본은 율령국가로 진입하고 근대국가로 진보해 가는 옳바른 역사발전 단계에 들어선 것처럼 보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역사인식과 달리, 코우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가 별개의 인간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을사의 변을 모델로 황실 탈취의 정변이 되풀이 될까 두려워 천황가는 코우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를 동일인으로 만들어 정권탈취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를 조작한다.

백제 의자왕은 서기 593년생으로 큐우슈우(九州)에서 태어났고 수서(隋書)에 나오는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가 이 사람이다. 서기 629년 야마토의 죠메이(敍明)천황으로 즉위했고, 641년 백제의 의자왕이 되면서 야마토를 황후 코우교쿠(皇極)천황이 맡고 큐우슈우왕은 629년부터 사이메이(齊明)가 맡고 있었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카루황자(輕皇子)가 큐우슈우왕인 누나 사이메이(齊明), 교기와 하시히토 황녀(間人皇女)등을 추방하고 큐우슈우 왕이 되었는데, 이 카루황자(輕皇子)와 교기(中大兄)가 다시 연합하여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를 장악하고, 구주 백제왕 카루황자(輕皇子)가 킨키(近畿)의 천황이 됨으로서, 저절로 일본열도가 통일된 결과가 된다

실로 거대한 음모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셈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모두가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 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나카토미 카마코 (中臣鎌子)라는 이름이 여기서 처음 등장하므로 그가 이전에 누구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백제의 사택지적(沙宅智積)을 나카토미 카마코(中臣鎌子)의 전신(前身)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나카토미 카마코(中臣鎌子)는 이름을 나카토미 카마타리(中臣鎌足)로 바꾸었고 죽기 하루 전 텐지(天智)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받아 후지와라 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되었다.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암살된 직후 현장에 있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의 “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 (鞍作臣)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는 절규는 큐우슈우(九州)에서 온 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를 죽였다는 뜻이다. 사이메이(齊明), 교기(翹岐), 카루황자(輕皇子), 하시히토황녀(間人皇女), 대좌평 지적(大佐平 智積) 등이 모두 큐우슈우(九州)의 카라히토(韓人)들인 것이다. 서기 645년 을사의 변을 일으켜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를 탈취한 한인(韓人)들의 후예가 지금도 일본황실의 주인이니 백제는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셈이다.

2009년 8월 3일 월요일

64. 阿佐太子


야마토타케루(倭建命, 295 – 375)와 應神天皇(320 – 394) 父子가 구축한 야마토 왕조는 6세기말 불교를 수용하면서 아스카(飛鳥)시대를 연다. 飛鳥時代란 6세기말부터 8세기초에 걸쳐 아스카(飛鳥)에 궁궐과 도읍을 두던 시대를 말한다. 예전에는 古墳時代와 한데 묶어 大和時代라 하던 때도 있었으나 요새는 古墳時代와 飛鳥時代로 나누어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飛鳥文化, 白鳳文化가 꽃 핀 시대이며, 이 시대에 倭国(倭)에서 日本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古代律令国家의 기초를 닦은 第38代 天智天皇(Emperor Tenji)과 第40代 天武天皇(Emperor Temmu)의 이름은 너무나 유명하다. 天智天皇(619 – 671)은 “大化의 改新”의 시발점이 된 “乙巳의 變”의 中心人物로서, 또 天武天皇(622 – 686)은 “壬申의 亂”의 주역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天智와 天武 兩帝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第34代 舒明天皇 (Emperor Jomei, 593 – 660)은 아들들보다 덜 유명하다. 그럼 天智와 天武의 할아버지는 누구일까? 일본서기에 의하면 第30代 敏達天皇(Emperor Bidatsu, 538 – 585)과 그의 황후 히로히메(広姫) 사이에서 출생한 嫡子 오시사카노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 (押坂彦人大兄皇子, 570 – 598)가 天智와 天武 両帝의 祖父라고 한다.

記紀는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생물년에 관해 아무 기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연령과 관련된 정보는 어머니가 서기 575년 사망했다는 것, 그의 장남 타무라황자(田村皇子, 敍明天皇)가 서기 593년 출생했다는 정도이다. 그와 관련된 역사기록도 극히 제한적이다. 그의 이름은 敏達天皇의 오호에황자(大兄皇子)로 기록되어 있다. 大兄皇子란 제1황자로 황위계승서열에서 최우선권을 가진 신분이다. 大化2년 (서기 646) 3월의 詔에 “皇祖大兄”이라 나오고 거기에 “彦人大兄”를 뜻한다고 주(註)까지 달려있다. 彦人大兄은 皇祖大兄으로도 불렸다는 것이다.

用明2년 (서기 587) 4월, 나카토미노 카쯔미(中臣勝海)가 皇太子의 像과 타케다황자(竹田皇子)의 상을 만들어 그들을 저주하였다. 위의 皇太子란 押坂彦人大兄皇子를 의미하며 用明천황 이후의 천황을 결정하는데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의 권력다툼이 한창일 때이다. 中臣勝海는 物部守屋의 사람이었고 그들은 아나호베황자 (穴穗部皇子)를 밀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던 中臣勝海가 히코히토 (彦人) 황자가 살고 있는 미타마노미야 (水派宮)를 찾아갔다. 中臣는 水派宮에서 나오는 길에 彦人皇子의 부하에게 살해된다.

서기 587년 6월 7일 카시키야히메(炊屋姬, 敏達천황비 후일의 推古천황)의 명을 받들어 蘇我馬子는 穴穗部皇子를 죽이고 8일 야카베황자(宅部皇子, 539 - 587)도 토벌한다. 宅部皇子는 宣化천황의 황자이나 穴穗部皇子(543 – 587)와 가까운 친구였으므로 죽였다 한다. 두 사람 모두 40대의 나이였다.

동년 추 7월 蘇我馬子가 諸皇子와 群臣들을 모아놓고 物部守屋 토벌을 논의한다. 泊瀬部皇子, 竹田皇子, 厩戸皇子, 難波皇子, 春日皇子, 蘇我馬子宿禰大臣, 紀男麻呂宿禰, 巨勢臣比良夫, 카시와데노 오미 카타부 (膳臣賀陀夫), 카쯔라기노 오미 오나라 (葛城臣烏那羅)등이 함께 軍勢를 이끌고 大連를 토벌하였다.

竹田皇子는 敏達과 推古사이의 황자 , 難波皇子와 春日皇子는 동모형제로 敏達의 황자, 우마야도황자(厩戸皇子)는 당시 14살로 聖德태자로 알려진 인물, 하쯔세베황자 (泊瀬部皇子, 530 – 592)는 곧 등장할 崇峻천황이다. 이렇게 당시의 황자들이 총출동하는 物部守屋의 토벌전에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彦人大兄皇子 570년 생, 타케다황자(竹田皇子) 573년, 우마야도황자(厩戸皇子, 聖德太子) 574년, 에쿠리황자(殖栗皇子) 578년, 오하리황자(尾張皇子) 580년으로 수 많은 사촌형제들이 있었다.

物部守屋를 토벌하고 동년 8월 2일 하쯔세베황자 (泊瀬部皇子)가 등극하니 그가 崇峻천황이다. 物部守屋라는 장애물이 제거되자 蘇我馬子의 독주가 시작되고 불교의 도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崇峻4년 (서기 591) 11월 4日,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大将軍에 임명하고 各氏族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副将, 隊長으로 하여 二万余의 軍을 딸려 筑紫에 出兵하였다. 키시노 카네(吉士金)를 新羅에 보내 任那의 건을 물었다.

崇峻 5년 (서기 592) 11월 3일 蘇我馬子는崇峻천황을 살해하고 당일 쿠라하시노 오카노 미사사기 (倉梯岡陵)에 매장하였다. 이 弑逆사건에 대하여 蘇我馬子는 아무 문책도 받지 않았고 계속하여 권좌에 있었다. 이는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의 의지에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다.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란 누구일까?

우리는 일본열도의 역사가 만세일계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거론되고 있는 시대에 세개의 권력주체가 존재하였다. 하나는 백제본국의 위덕왕, 또 하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의 천황, 세번째 주체는 열도의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九州百濟의 존재이다. 이 시대 야마토의 천황은 九州를 지배하지 못 하였다.

서기 591년 崇峻4년의 거병은 任那를 거론하고 있으나 이 시대 삼국사기는 2만의 왜인침입을 전하지 않는다. 구주백제는 백제의 무령왕 이후부터 백제의 직할지로 야마토의 상위에 있는 또 하나의 권력주체였다. 崇峻의 거병은 九州를 통합하고자 하는 목적이며 이는 백제본국에 대한 도전이다. 蘇我馬子가 崇峻천황을 살해하고도 끄떡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야마토의 상위권력이 九州百濟이며 구주백제의 상위권력이 백제본국이다.

이 전쟁은 야마토의 패배로 끝나지만 推古천황은 서기 602년과 603년 2회에 걸쳐 九州침공을 재차 시도하였으나 패배하여 九州백제의 정치제도를 수용한다. 遣隋使, 12관위제, 17조 헌법이니 하는 것들은 九州百濟의 제도였다. 이 정도면 推古 다음의 천황이 누가 될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견수사, 12관위제, 17조 헌법은 天智와 天武 兩帝의 아버지 多利思北孤 (훗날의 敍明天皇, Emperor Jomei)가 九州百濟에서 실시한 정책이었다.“야마토의 만세일계”라고 하는 하나의 권력주체로 역사가 설명되지 않으니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나조(謎,수수께끼)라는 말을 연발한다.

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聖德太子의 친동생)를 擊新羅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츠쿠지(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과 히로꼬의 첫 아들)가 다시 征新羅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히메왕 (舍人姬王, 흠명과 기타시히메의 제 13자)이 아까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서기 629년 推古死後 多利思北孤가 敍明天皇으로 즉위한다. 多利思北孤의 아버지 押坂彦人大兄皇子의 가계를 보자.

A. 妃:누카데히메 (糠手姫)皇女( 宝王 , 田村皇女, 敏達天皇의 皇女)
田村王(たむらのみこ、舒明天皇)
中津王(なかつみこ)
多良王(たらのみこ)

B. 妃:오호마타왕 (大俣王, 漢王の妹)
茅渟王(ちぬのみこ、智奴王) 皇極天皇=斉明天皇과 孝徳天皇의 父
桑田王(くわたのみこ、女性)

C. 妃:사쿠라이 유미하리 (桜井弓張)皇女( 桜井玄王, 敏達天皇의 皇女)
山代王(やましろのみこ)
笠縫王(かさぬいのみこ)

D. 妃:오하리타 (小墾田)皇女(敏達天皇의 皇女)

彦人大兄皇子는 4명의 비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3명이 敏達의 황녀이다. 彦人역시 敏達의 大兄皇子로 되어 있으면서 3명의 동부자매와 결혼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彦人는 敏達의 아들이 아니라 敏達의 다른 형제 누구인가의 혈통일 것이다. 敏達에겐 형이 있었다. 欽明과 石姫皇女 (宣化天皇의 皇女)사이에 태어난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 (箭田珠勝大兄)皇子가 敏達의 同母兄이다. 箭田珠勝大兄皇子는 서기 530년경 출생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흠명 13년 (서기 552) 여름 4월 箭田珠勝大兄皇子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 이유는 일본열도의 箭田珠勝大兄皇子는 죽었지만 백제의 왕자 餘昌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백제의 위덕왕이다. 우리는 위덕왕을 백제 성명왕의 長子로 알고 있다. 일본서기에 聖明王을 넣을 수는 없으니 성명왕의 왕자들은 모두 欽明의 족보에 올랐다. 欽明은 聖明의 동생이다. 그러다 보니 欽明의 자식과 부인이 일본서기에 꽤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왕자 餘昌이 箭田珠勝大兄皇子란 이름으로 欽明의 큰 아들로 일본서기에 올라있다.

이렇게 되면 彦人大兄皇子란 敏達의 황자가 아니라 백제 위덕왕의 왕자의 신분이다. 이제 야마토위에 九州百濟, 구주백제 위에 백제본국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彦人大兄皇子는 백제 본국의 위덕왕 사후 왕위에 오를 사람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위덕왕이 서기 598년 12월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서기 597년 4월 야마토에 들어 온 백제의 아좌태자는 法興寺의 완공을 축하하고, 불법을 일으키는데 더욱 매진하도록 독려 했을 것이다. 서기 598년 12월 백제 위덕왕이 사망하기 직전 아좌태자는 야마토에서 사망했다고 본다. 전도유망한 28세의 젊은이였다. 그런 연유로 위덕왕 사후 위덕왕의 한 물 간 늙은 동생들, 혜왕과 법왕이 자리를 메꾸었다.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다.

위의 彦人의 가계에서 “B. 妃:오호마타왕 (大俣王, 漢王の妹)” 부분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 기록 때문에 彦人大兄皇子의 출생을 서기 556년경으로 본 학자가 많았다. 齊明天皇이 601년생이므로 그 아버지 智奴王은 575년대, 또 智奴王의 아버지라는 彦人大兄은 550년경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舒明天皇이 彦人大兄의 嫡長子라 하였고 그는 서기 593년생이 확실하다. 그러면 彦人大兄皇子는 대강 서기 570년경 출생한 것으로 된다. 570년경 출생한 彦人가 601년에 齊明을 손자로 둘 수는 없다. 첫 아들을 593년에 본 사람이 어떻게 601년에 손녀를 보겠는가? 斉明天皇과 孝徳天皇의 아버지 지누왕 ( 茅渟王 또는 智奴王)은 彦人大兄皇子와 동연배의 백제의 또 다른 최고 권력자로 봐야 된다. 가장 적합한 후보자가 武王이다.

2007년 10월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왕흥사적의 목탑기초(심초석)부분에서 서기 577년 (위덕왕 24년) 제작되어 수납된 사리장엄구와 각종의 장식품등을 발굴하였으며, 완전한 모습으로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발표하였다. 왕흥사적 목탑은 실재하지 않으나 조사결과 가로 세로 1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었다.

사리용기에 백제왕의 이름이 각인된 명문이 발견되어 당시 역사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577년 2월 15일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 (위덕왕의 이름) 이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

이 명문에 의하여 왕흥사적의 사리장엄구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 창건되었다는 것,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년 이전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서기 推古 5년 (서기 597) 4월 백제왕이 왕자 阿佐를 보내 조공하였다. 일체의 군더더기의 기사도 없이 “百濟王 遣王子 阿佐 朝貢”의 10자의 기사뿐이다. 이 때 아좌태자가 聖德태자를 그렸다고 생각되는 당본어영( 唐本御影)이라고 불리는 “聖德太子와 二王子像”은 일본의 最古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고 法隆寺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1878년 호류지 헌납보물의 하나로 황실에 헌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阿佐太子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 기록이 있어서 아좌태자의 이름이 역사에 남았다.

“延喜式”諸陵寮에 彦人大兄皇子는 나라이노하카 (成相墓) 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으나 그 묘역의 넓이는 동서 15町, 남북 20町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광대한 면적이다. 敏達천황의 묘역이 동서 3정, 남북 3정이며, 천황으로서 가장 큰 묘역을 자랑하는 天智천황도 동서 14정, 남북 14정에 불과하다. 즉위도 하지 않은 황자에게 왜 그렇게 큰 묘역을 할당하였을까? 나라이노하카(成相墓)가 奈良県 広陵町의 바쿠야고분(牧野古墳)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한다.

바쿠야고분(牧野古墳)은 6세기 말경 축조된 것으로 보며,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고분으로 서기592년 암살된 崇峻천황의 능묘일 가능성이 높은 櫻井市의 天王山古墳, 서기587년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가 카시키야 히메(炊屋姬)의 명을 받아 주살한 아나호베황자(穴穗部皇子, 543 - 587)와 야카베황자(宅部皇子, 539 - 587)를 매장했다는 설이 있는 藤木古墳이 있다.

牧野古墳은 서기 1983년11월부터 1984년 2월까지 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가 発掘調査를 実施했다. 그 결과 직경 38 – 60m, 높이 약 13m의 3단 築成으로 건설된 원분으로 판명되었다. 석실의 규모는 아스카무라 (明日香村)의 이시부타이고분(石舞臺古墳)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石舞臺古墳은 蘇我馬子의 묘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할 근거는 없으며 牧野古墳을 蘇我馬子의 묘로 보는 견해도 있다.

후지노키고분 (藤ノ木古墳) 은 奈良県 이코마군(生駒郡) 이카루가쬬( 斑鳩町) 法隆寺西2丁目에 있다. 直径約48m 높이 約9m의 円墳으로 서기 1985년 第1次와 1988년 第2-3次, 3回의 発掘調査를 実施하였다. 法隆寺 西院伽藍에서 서쪽으로 약 350미터 떨어진 곳이다. 축조연대는 고분시대 후기, 6세기 말 (서기 576 – 600), 발굴조사 결과 직경 48m, 높이 약 9m의 원분으로 판명되었다.

석실과 석관이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횡혈식석실이며 가형석관(家形石棺)에 성인2명이 합장되어 있었다. 석관은 석실 안쪽에 있었고 석재는 아스카마을 서쪽의 니죠산(二上山)의 백색응회암으로 만들었다. 남과 북에 남은 유골을 보면 北人 신장 165센티 혈액형 B형의 남자가 확실하며 연령 17 – 25세 쯤, 南人은 유골의 보존상태가 나빠 남녀의 구분이 어렵다. 혈액형은 역시 B형, 연령 20 – 40세 정도, 뼈을 보면 남자처럼 보이나 발목에 발찌를 끼고 있어서 여자로 봐야 된다는 견해도 있다.

석관에서 유골과 함께 다량의 식물의 꽃가루가 발견되었다. 꽃가루를 분석하여 베니바나(紅花)의 花粉임을 알았다. 베니바나의 화분은 옛부터 염료로 씌였다 하며 방부제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꽃은 6월에서 7월에 걸쳐 피고 처음에는 선명한 노란색을 띄나 서서히 붉은 색으로 변한다.

石室内에서 갑옷(鎧) 철촉(鉄鏃)등의 武器, 武具, 金銅装의 馬具, 하지키(土師器) 스에키(須恵器)등의 土器類가 出土되었다. 그 가운데 装飾性 이 뛰어난 馬具類는 말안장(鞍金具)에 팔메트(Palmette), 鳳凰, 코키리(象), 鬼面등을 透彫한 類例없는 예술품이다. 石棺内의 副葬品도 豊富하여, 各種의 金属製의 玉類와 1万数千点을 넘는 유리구슬(玉) 등의 装身具, 冠, 신발(履) 허리띠(大帯)등의 金属製品, 四面의 銅鏡, 타마마키대도(玉纏大刀), 검(剣)등이 있다.

후지노키고분은 法隆寺 가까이 축조되어 오랫동안 法隆寺의 寺領으로 관리 유지되었다. 中世에는 미사사기야마 (陵山)로 불렸고, 江戸時代에는 法隆寺가 崇峻天皇陵으로 보았던 것 같고, 옛부터 천황릉으로 취급되어 도굴을 면하고 원래의 모습데로 남게 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를 부연하자면 서기 592년 11월 3일 崇峻천황 암살, 동년 12월 推古천황 豊浦宮에서 즉위, 593년 4월 나이 20세의 우마야토 토요토미미황자 (厩戸豊聡耳皇子) 를 皇太子및 섭정으로 지정, 596년 11 월 法興寺(飛鳥寺) 완공, 597년 4월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 ( 百済王遣王子阿佐朝貢), 599년 4월 심한 지진으로 건물이 파괴되어 신에게 제사 (地動 舎屋悉破 則令四方 俾祭地震神), 601년 2월 皇太子 이카루가궁(斑鳩宮) 건설착수, 605년 10월 皇太子 4년 8개월만에 斑鳩宮 완공. 607년 法隆寺 착공등으로 이어진다.

서기 598년 아좌태자가 이곳에서 사망했다면 당시의 섭정 聖德태자의 나이 25세이다. 아좌태자는 聖德과 사촌형제간이며 동년배의 가까운 사이일 것이다. 아좌태자의 장의행사는 聖德의 주관하에 진행되었을 것이며 후지노키고분은 聖德태자가 건축하게 되는 이카루가궁(斑鳩宮)과 같은 장소이다. 이는 聖德태자가 자기 땅에 아좌태자의 묘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天智天皇(619 – 671)과 天武天皇(622 – 686)이 일본황실의 주인이 된 이래 자기들의 할아버지의 무덤을 어떤 식으로든 관리되도록 조치하였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사연이 있어 후지노키고분은 도굴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일본에서는 후지노키고분의 피장자가 서기 587년 6월 처형된 아나호베황자(穴穗部皇子, 543 – 587)와 야카베황자 (宅部皇子, 539 - 587)로 추정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당시 두 사람은 40대의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