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4일 일요일

66. 수서왜국전(隋書倭國傳)

수서(隋書)는 서기 618년 수의 멸망이후 7세기 후반 위징(魏徵, 580 – 643)등이 찬(撰)한 역사서이다. 서기 636년 열전 50권이 완성되었다 하므로 일본서기보다 약 80년 먼저 나온 역사서로 권(卷) 81 열전(列傳) 제46 동이전 (東夷傳)에 왜국(倭國)의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기사의 일부는 일본서기에 기록이 없고 또 일부는 일본서기에 나오지만 수서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사서에 나오는데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많이 보아왔다. 3 세기 위지 동이전의 히미코(卑彌呼) 기사와 5세기 송서의 왜5왕 기사가 그러하였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역사 왜곡 가능성이 제기된다.

송서에 기록된 서기 488년 왜무왕의 상표문 이후 나타나지 않던 왜국의 기사가 서기 600년 수서 열전 동이 왜국전에 나오는데 일본서기에는 이 기사가 빠져 있다. 우리는 일본서기가 편집방침과 맞지 않는 역사를 누락하거나 왜곡시킨 사례를 보아 왔다.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확보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가치는 황실의 만세일계, 킨키 야마토 (近畿 大和)의 유일 정통성, 그리고 백제의 부정과 열도의 자생적인 진화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 세 가치와 상충되는 역사는 누락 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서기 600년 수서 동이왜국전의 내용들은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남기고자 하는 일본황실의 역사와 배치되므로 일본서기에서 고의적으로 다루지 않았을 것이다. 히미코(卑彌呼)기사의 역사성은 징구황후(神功皇后)의 신화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릴 것이므로 히미코를 일본서기에서 다루지 않았다. 송서의 왜5왕,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를 제외시키지 않고는 만신창이가 된 황실의 만세일계를 과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기 600년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견수사 기사는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의 유일 정통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사이다.

일본사람들은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라고 믿고 있다. 삼국사기를 삼국(三國)의 사기(史記)라고 하여도 우리는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일본(日本)의 서기(書紀)라고 하기에 웬지 좀 찜찜하다. 왜냐하면 일본서기는 일본황실을 위하여 씌여진 역사이지 일본의 역사로 씌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일본과 일본황실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별로 문제시 하지 않는다. 실로 백제왕실의 후손들은 조상들이 물려 준 일본열도를 완벽하게 관리해 온 셈이다.

수서에서는 다른 역사서에 보이는 왜(倭)라는 명칭 대신 인변(人)에 타(妥)를 쓰는 글자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였으나 대충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대세(大勢)이다. 따라서 콤퓨터 식자가 가능한 왜(倭)를 사용하고 이 글의 주제와 관련된 부분만을 발췌한다.

개황(開皇) 20년 (서기600年) 왜왕 성(姓)은 아메(阿毎), 자(字)는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호(号)는 아베계미(阿輩雞彌), 견사(遣使)하여 왕궁(王宮)에 들어왔다. 황제가 왜국의 풍속을 물었다. 사자(使者)가 대답하기를 “왜왕은 하늘(天)을 형으로, 해(日)를 동생으로 하여, 하늘(天)이 아직 밝지 않았을 때 나와 가부좌하고 정사를 보다가, 해(日)가 뜨면 곧 정무를 멈추고 동생에게 맡깁니다. 고조(高祖)가 말 하기를 “그것은 의리에 어긋나니 고치도록 하라.”고 훈령하였다.

開皇二十年、倭王姓阿毎、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云委我弟。高祖曰:「此太無義理。」於是訓令改之。

왕비를 계미(雞彌)라 하고 후궁으로 여인 6 – 7백 명이 있다. 태자를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라고 한다. 성곽(城郭)은 없다. 12 관위 제도가 있다. 십이등(十二等)의 관제가 있으며, 처음을 대덕(大德)이라 하고, 다음을 소덕(小德), 다음 대인(大仁), 다음 소인(小仁), 다음 대의(大義), 다음 소의(小義), 다음 대례(大禮), 다음 소계(小禮), 다음 대지(大智), 다음 소지(小智), 다음 대신(大信), 다음 소신(小信)이라 한다. 관원의 정원은 없다. 군니(軍尼) 120명이 있고 이는 중국의 목재(牧宰)와 같다. 팔십호(八十戸)에 일 이니익(一伊尼翼)을 둔다. 중국의 현 이장(里長)과 같은 것이다. 십 이니익(十伊尼翼)은 일 군니(一軍尼)에 속한다.

王妻號雞彌、後宮有女六七百人。名太子為利歌彌多弗利。無城郭。内官有十二等:一曰大德、次小德、次大仁、次小仁、次大義、次小義、次大禮、次小禮、次大智、次小智、次大信、次小信、員無定數。有軍尼一百二十人、猶中國牧宰。八十戸置一伊尼翼、如今里長也。十伊尼翼屬一軍尼。

그곳의 풍습으로는 살인, 강도및 간통은 사형, 도둑은 가치를 살펴 재물로 변상시키고, 변상할 재산이 없는 자는 노예로 한다. 그 외는 경중에 따라 유형(流刑), 또는 장형(杖刑)에 처한다. 범죄사건을 취조할 때마다 인정하지 않는 자는 주리를 틀거나 강한 활 줄을 당겨 목을 가격한다. 또는 끓인 물속에 작은 돌멩이를 넣고 쟁송(爭訟)하는 자들로 하여금 돌을 찾도록 한다. 거짓말 하는 자가 화상을 입을 것이라고 한다. 또는 옹기 그릇에 뱀을 넣고 그것을 맨손으로 꺼내도록 한다. 정직하지 않는 자는 손을 물릴 것이라 한다.

其俗殺人強盜及姦皆死、盜者計贓酬物、無財者沒身為奴。自餘輕重、或流或杖。毎訊究獄訟、不承引者、以木壓膝、或張強弓、以弦鋸其項。或置小石於沸湯中、令所競者探之、云理曲者即手爛。或置蛇甕中、令取之、云曲者即螫手矣。

사람들이 매우 순박하여 쟁송은 거의 없고, 도둑질 하는 자도 거의 없다. 악(樂)에 오현(五弦), 금(琴), 적(笛)이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팔, 얼굴 또는 몸에 문신이나 점을 새긴다.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문자는 없다. 다만 나무를 깎아 매듭을 만들어 통신한다. 불법(佛法)을 받들고 백제에서 불경을 구해 와서 처음으로 문자를 갖게 되었다. 점 치는 것을 알고 더욱 박수 무당을 믿는다.

人頗恬靜、罕爭訟、少盜賊。樂有五弦、琴、笛。男女多黥臂點面文身、沒水捕魚。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

매년 정월 1일이 되면 반드시 활쏘기시합을 하고 술을 마신다. 그 외의 절기를 지키는 것은 중국과 거의 동일하다. 장기, 쌍륙(雙六), 윷 놀이를 좋아한다. 기후는 온난하고 초목은 겨울에도 푸르다. 토지는 부드럽고 기름지나 바다가 많고 땅은 적다. 물오리의 목에 줄을 매달아 물속에서 고기를 잡게 하여 하루 백여 마리 잡는다. 풍속에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이나 도마같은 나무판 등을 쓰지 않고 나뭇잎에 음식을 담아 손으로 집어 먹는다. 품성은 곧고 우아하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다. 동성과는 혼인하지 않으며 남녀간에 서로 좋아하면 혼인한다. 신부는 반드시 개를 타고 신랑집에 들어 가 남편과 만난다. 부인은 음행이나 질투하지 않는다.

毎至正月一日 必射戲飲酒 其餘節略與華同 好棋博 握槊 樗蒲之戲 氣候温暖 草木冬青 土地膏腴 水多陸少 以小環挂鸕○項令入水捕魚 日得百餘頭 俗無盤俎 藉以檞葉 食用手餔之 性質直 有雅風 女多男少 婚嫁不取同姓 男女相悅者即為婚 婦入夫家 必先跨犬 乃與夫相見 婦人不淫妒

사람이 죽으면 관곽(棺槨)에 넣는다. 친밀하게 지낸 가까운 손님들이 시신 곁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처자형제는 백포로 상복을 만든다.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3년간 빈소에 안치하나 보통사람들은 날을 받아 매장한다. 장의(葬儀)에 이르면 시신을 선상(船上)에 놓고 육지에서 그것을 끌어 당기거나 조그만 상여를 가지고 행한다.

아소산(阿蘇山)이 있고 그곳의 돌은 왠지 모르지만 불기둥이 되어 높이 치솟아 하늘에 이른다. 사람들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고 기도한다. 여의보주(如意寶珠)가 있는데 그 색은 푸르고 크기는 달걀정도이다. 밤이 되면 빛을 발하여 물고기 눈의 정령이라 한다.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치며 진기한 물건이 많아서 항상 통사가 왕래한다.

死者斂以棺槨、親賓就屍歌舞、妻子兄弟以白布製服。貴人三年殯於外、庶人卜日而瘞。及葬、置屍船上、陸地牽之、或以小輿。有阿蘇山、其石無故火起接天者、俗以為異、因行禱祭。有如意寶珠、其色青、大如雞卵、夜則有光、云魚眼精也。新羅、百濟皆以倭為大國、多珍物、並敬仰之、恒通使往來。

대업(大業) 3년 (서기 607) 그 왕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자가 이르기를 “해서(海西)의 보살천자(菩薩天子) 가 불법을 많이 일으킨다고 듣고 사자를 보내 예를 올리며 사문(沙門) 수십 인이 와서 불법을 배우도록 할 것 입니다”. 그 국서에 이르기를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노라. 건강한지 운운). 황제가 이를 보고 기분이 상하여 홍로경(鴻臚卿)에게 “야만족 오랑케로부터 또 다시 무례한 글이 오면 나 한테까지 가지고 오지 마라.”고 일렀다.

大業三年、其王多利思北孤遣使朝貢。使者曰:「聞海西菩薩天子重興佛法、故遣朝拜、兼沙門數十人來學佛法。」其國書曰「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帝覽之不悅、謂鴻臚卿曰:「蠻夷書有無禮者、勿復以聞。」

다음 해인 대업(大業) 4년 (서기 608) 황제는 문림랑(文林郞) 배청(裴淸)을 사자로 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를 건너 죽도(竹島, 珍島?)에 닿았다. 남으로 ○羅国 (제주도?)을 바라보며 쯔시마국(都斯麻国)을 거쳐 멀리 대해로 나섰다. 다시 동으로 잇키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쯔쿠시국(竹斯國)에 이르고, 또 동으로 진왕국(秦王國)에 닿았다. 그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국을 지나 해안에 닿았다. 쯔쿠시국(竹斯國) 동쪽은 모두 왜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明年、上遣文林郎裴清使於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羅國、經都斯麻國、迥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疑不能明也。又經十餘國、達於海岸。自竹斯國以東、皆附庸於倭。

왜왕이 소덕 아베다이(小德 阿輩臺)에게 수백인을 딸려 보내 의장(儀仗)을 설치하고 고각을 불며 도착을 환영하였다. 십일 후 다시, 대례 가다비(大禮 哥多毗)에게 이백여기를 딸려 보내 교외에서 위로하였다. 이미 그의 서울에 도착하여, 그 나라 왕과 배청(裴淸)이 만나 매우 기뻐하며 “나는 해서(海西)에 있는 대수(大隋)는 예의의 나라라 들었으므로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읍니다. 나는 이인(夷人)으로서 먼 바다 한 구석에 있으므로 예의(禮義)에 관한 가르침을 들을 수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궁벽한 촌 구석에 머물러 뵈올 기회가 없었나이다. 지금 길을 닦고 객관(館)을 꾸며 놓고 대사를 기다렸으니 아무쪼록 대국유신 (大国惟新)의 덕화(德化)에 대해 들려 주시옵소서.”

배청(裴淸)이 대답하기를 “황제의 덕은 이의(二儀)로 서고, 은혜의 연못은 사해로 흐릅니다. 왕을 어여삐 여김으로서 덕화(德化)를 이루고 그런 연유로 사자를 보내 여기에 황제의 뜻을 전 하는 것입니다.”그런 다음 배청은 물러나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그 후 배청이 사람을 보내 왕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명을 이미 전달하였으므로 곧 귀국길에 나서기를 청 합니다. 그래서 배청을 위하여 향연을 베풀고 그의 귀국편에 다시 사자를 딸려 방물을 공헌하였다. 그런 다음 사신의 발길이 끊겼다.

倭王遣小德阿輩臺、從數百人、設儀仗、鳴鼓角來迎。後十日、又遣大禮哥多毗、從二百餘騎郊勞。既至彼都、其王與清相見、大悅、曰:「我聞海西有大隋、禮義之國、故遣朝貢。我夷人、僻在海隅、不聞禮義、是以稽留境内、不即相見。今故清道飾館、以待大使、冀聞大國惟新之化。」清答曰:「皇帝德並二儀、澤流四海、以王慕化、故遣行人來此宣諭。」既而引清就館。其後清遣人謂其王曰:「朝命既達、請即戒塗。」於是設宴享以遣清、復令使者隨清來貢方物。此後遂絶。

서기 600년이면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8년인데 수서에 왜의 여왕에 관한 언급은 전무하다. 수서의 기록은 남왕(男王)을 상정하고 있으며 일본서기을 통 털어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 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만 보더라도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의 스이코(推古) 여왕 이외의 다른 왕이 견수사를 보냈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킨키 천황가 이외의 권력주체를 부정한다.

일본에서는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을 쿠니노 미야스코(國造)와 이나기(稻置)로 해석하고 있으나 정당성을 확보할 권위는 없다. 왜냐하면 군니(軍尼)와 이니익(伊尼翼)은 킨키(近畿) 야마토(大和)가 아닌 구주백제 (九州百濟)의 관제이기 때문이다. 덕(德),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관직에 채용하고 있으니 유교의 가치관은 이미 깊숙히 일본 열도까지 들어와 있다. 주민 80호 당 관리자 이니익(伊尼翼)을 두고 10명의 이니익(伊尼翼)은 1군니(軍尼)에 속한다. 그러니 80호를 1명의 이장(= 伊尼翼)이 관리하고 10개의 리(里)는 1개의 면(= 軍尼)이 되며 전체 120개의 면(面)이 있다고 하였으니 120 x 10 x 80 = 96,000 호의 인구이므로 수서에는 10만호의 인구라고 나와 있다. 호당 7인으로 보면 약 70만의 인구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관리 아래 있었다고 보면 된다.

“아소산(阿蘇山)이 있고 그곳의 돌은 왠지 모르지만 불기둥이 되어 높이 치솟아 하늘에 이른다. 사람들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고 기도한다.” 이 기사는 배청이 몸소 아소산을 방문하고 자기 눈으로 확인한 장면으로 이해한다. 왜(倭)의 수도에서 아소산까지 중국 사신이 왕래 가능한 거리였다는 뜻이다.

“백제를 건너 죽도(竹島, 珍島?)에 닿았다. 남으로 ○羅国 (제주도?)을 바라보며 쯔시마국(都斯麻國)을 거쳐 먼 대해로 나섰다. 다시 동으로 잇키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지쿠지국(竹斯國)에 이르고, 또 동으로 진왕국 (秦王國)에 닿았다. 그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똑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국을 지나 해안에 닿았다. 지쿠지국(竹斯國) 동쪽은 모두 왜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수서의 이 기록을 두고 왜의 서울이 야마토(大和)인지 큐우슈우(九州)인지 확인해 줄 역사가는 없다. 모두 나름데로 추측하고 다툴 뿐이다. 우리는 배청(裴淸)이 방문한 왜의 수도를 현 오오이타현(大分縣) 나카즈시(中津市)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나카즈시(中津市)에서 아소산(阿蘇山)까지는 고귀한 신분의 중국 사신이라도 육로를 통하여 왕래 가능한 거리이다.

왜왕이 배청을 대면하고 듣고자 한 것은 유학의 기본명제인 예(禮)와 의(義)에 관한 것이었다. 왜의 관위제도는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이었고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훗날 백제의 의자왕이 되었을 때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구주백제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아좌태자(阿佐太子, 일본이름 押坂彦人大兄皇子, 570 – 598) 의 장남으로 서기 598년 부친이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서기 598년 백제의 위덕왕과 쿠우슈우(九州)의 아좌태자(押坂彦人大兄皇子) 부자(父子)가 죽자 야마토의 스이코(推古)여왕은 큐우슈우(九州)를 병탄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스이코(推古) 10년 (서기 602)과 11년 (서기 603) 2차례에 걸쳐 큐우슈우(九州) 원정군을 파견한다. 일본서기는 큐우슈우(九州)의 존재를 감추기 위하여 신라 원정군이라고 기록된다. 그러나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큐우슈우군(九州軍)의 역습을 받아 야마토가 항복한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11년 (서기 603) 12월 구주백제의 관위제가 시행되고 서기 604년 4월 헌법 17조가 발표된다. 큐유슈우(九州)의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 에게 패하여 큐우슈우(九州)의 제도를 수용하고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의 명에 의하여 야마토에 사찰건립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 진다.

수서의 기록은 매우 담담하다. 배청이 언제 왜국에 도착하여 언제 떠났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또 왜국의 사자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다. 서면(書面)으로 국서를 보냈다거나 하는 언급은 한 마디도 없다. 그러나 지리, 문화, 풍습등의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다.

그런데 흥미진진한 일은 일본서기가 배세청(裴世淸)의 왜국방문을 야마토(大和)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앞에 인용한 수서의 내용보다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두개의 친서를 공개하면서 국서에 집착한다. 이를 증거로 야마토(大和)의 위상을 증거하려고 애 쓴다. 심지어 국서를 백제에 강탈 당하였다는 해괴한 내용도 있다. 그 시대 중국황제의 국서를 어떻게 감히 백제인이 강탈 할 수 있겠는가? 백제는 자기의 남쪽 바다를 지나간 중국의 사신 배청 기록을 자기 역사에 기록할 정도로 대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있다.

개황(開皇) 20年(서기 600)은 스이코(推古) 8年에 해당하나 이 때의 수서기록은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는 스이코(推古) 15년 (서기 607) 7월 대례(大禮) 오노노 오미 이모코 (小野臣妹子)를 대사로 쿠라쯔쿠리노 후쿠리 (鞍作福利)를 통역으로 하여 대당(大唐)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나온다.

스이코(推古) 16년 (서기 608) 4월 오노노 오미 이모코(小野臣妹子)가 대당(大唐)에서 돌아왔다. 당나라는 그를 소인고(蘇因高)라고 불렀다. 대당대사 배세청과 12명의 수행원이 오노 이모코(小野妹子)와 함께 쯔쿠지(筑紫)에 도착했다. 나니와노 키시 오나리 (難波吉士雄成)를 파견하여 대당객 배세청등 당나라의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이들을 위하여 나니와(難波) 고구려 Guest House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동년 6월 15일 당의 손님들이 나니와즈(難波津)에 정박하였다. 그날 30척의 배를 장식하여 강구에서 그들을 환영하고 새로 지은 외국인 Guest House 로 안내하였다.

거기서 이모코노 오미(妹子臣)가 “소신이 귀국할 때 당나라 황제 (실제로는 수의 양제)가 서간을 제게 주었는데 백제국을 통과할 때 백제인이 훔쳐 갔읍니다. 그래서 서간을 제출할 수 없게 되었나이다.” 라고 스이코(推古) 여왕에게 보고하였다. 군신들이 상의한 뒤 “외교관이란 생명을 걸고 임무를 수행해야 되거늘 태만하게도 대국의 서간을 잃어 버렸다니 말이 되는가?”라 하며 유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왕이 “이모코(妹子)는 서간을 잃어버린 죄가 있으나 가볍게 단죄해서는 안 된다. 방문중인 대국의 사신들이 이를 들으면 언짢아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라며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도 배청(裵淸)의 왜국 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무왕 9년(608) 봄 3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수나라 문림랑(文林郞) 배청(裵淸)이 왜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우리 나라 남쪽 길을 지나갔다.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奉使倭國 經我國南路)

동년 8월 3일 당의 손님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 날 여왕은 75마리의 말을 장식하여 쯔바키시(海石榴市)에서 손님을 환영하였다. 누카타베노 무라지 히라후 (額田部連-比羅夫)가 환영사를 하였다.

8월 12일 당의 객이 조정에 들어 와 사자의 취지를 아뢰었다. 그리고 대당(大唐)의 진물(進物)을 정원에 진열하고 사주배세청(使主裴世清)은 황제의 서간을 소지하고 두번 재배하고 일어서 사자의 취지를 아뢰었다. 그 글에 “황제는 여기서 왜황(倭皇)의 안부를 묻는다. 사자 장사대례 소인고 (使者 長史大禮 蘇因高) 일행이 와서 왜황 (倭皇) 의 뜻을 자세히 전 하였다. 나는 삼가 하늘의 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였다. 덕을 널리 펴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미치게 하려고 한다. 자애롭게 백성을 기르는 마음에 멀고 가까움이 있겠느냐?. 왜황(倭皇)은 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는 태평하며, 사람들의 풍습도 화목하고, 심지가 깊고 지성의 마음이 있어, 멀리까지 조공하러 온 것을 알고 있다. 그 아름다운 충성심을 기쁘게 생각한다. 점점 날씨도 풀리고 짐은 전과 같이 편안하다. 그리하여 홍로사장객배세청 (鴻臚寺掌客裴世清)등을 보내 방문의 뜻을 전하고 겸하여 따로 물건들을 보내노라.”그 때 아헤노 오미 (阿倍臣)가 나가 이 글을 받아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囓連)가 나가 이 글을 받아 대문 앞에 있는 책상위에 놓고 여왕에게 주상한 뒤 물러났다. 이 때 황자(皇子) 제왕(諸王) 제신(諸臣)들은 금으로 만든 머리장식을 꽂고 의복은 모두 금자수직(錦紫繡織) 및 오색(五色)의 능라(綾羅)로 만든 것이었다.

其書曰:「皇帝問倭皇 使人長吏大禮- 蘇因高等至具懷朕欽承寶命 臨養區宇 思弘德化 覃被含靈 愛育之情 無隔遐邇 知皇介居海表 撫寧民庶 境內安樂 風俗融合 深氣至誠 遠脩朝貢 丹款之美 朕有嘉焉 稍暄 比如常也 故遣鴻臚寺掌客 裴世清等 旨宣往意 并送物如別」

8월 16일 조정에서 당객들에게 향연을 베풀다.
9월 5일 나니와(難波)에서 객등에게 향연을 베풀다.

9월 11일 당의 배세청이 귀국했다. 다시 오노 이모코(小野妹子)를 대사로, 키시노 오나리(吉士雄成)을 부사로, 후쿠리(福利)를 통역으로 당객에 딸려 파견하였다. 거기서 여왕이 당제(唐帝, 실제로는 수양제)에게 인사를 표하는 글을 보냈다.“동방의 천황이 서방의 황제에게 삼가 올리옵니다. 사인홍로사장객배세청 (使人 鴻臚寺掌客 裴世清) 일행이 와서 오랜 꿈이 이루어 졌나이다. 가을에 접어들어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때 안녕하신지요? 이번 대례 소인고 (大禮 蘇因高), 대례 오나리( 大禮 乎那利)등을 보냅니다. 간략하나마 삼가 인사 올리나이다.”

이 때 4명의 학생과 4명의 학문승 도합 8명을 당국(唐國, 실제로 隋나라) 에 파견하였다.

是時遣於唐國 學生, 倭漢直-福因, 奈羅譯語-惠明, 高向漢人-玄理, 新漢人-大國, 學問僧, 新漢人-日文, 南淵漢人-請安, 志賀漢人-慧隱, 新漢人-廣濟等 并八人也.

스이코(推古) 17년 (서기 609) 9월 오노노 오미 이모코(小野臣妹子)등이 대당에서 돌아왔다. 다만 통역 후쿠리(福利)는 오지 않았다.

스이코(推古) 22년 (서기 614) 6월 13일 이누카미노 키미 미타스키 (犬上君御田鍬), 야타베노 미야쯔코(矢田部造)를 대당에 파견하였다.

스이코(推古) 23년 (서기 615) 犬上君御田鍬, 矢田部造가 대당에서 돌아왔다.

이상이 스이코조(推古朝)에 나오는 견수사 기록의 전부이다. 서기 618년 수가 멸망하므로 그 다음에 대당기사가 나와야 되나 일본서기는 견수사를 모두 견당사라고 처리하였다. 일본서기는 배세청(裴世淸), 수서는 당 시대에 편찬되었으므로 배청(裴淸)으로 기록된다. 그것은 당태종의 이름이 세민(世民)이었으므로 “世”자를 피한 것이다.

배세청의 관직을 수서와 삼국사기는 문림랑(文林郞)이라 했으나 일본서기는 홍로사장객(鴻臚寺掌客)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노 이모코(小野妹子)의 국서분실사건은 일본서기에 나오나 수서에 나오지 않으며 수서에는 오노 이모코 (小野妹子)의 이름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수서에 지쿠지국(竹斯國)과 진왕국(秦王國)의 국명이 나오지만 야마토(大和)의 국(國)에 해당되는 국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야마타이에 서울이 있다 (都於邪靡堆)고 나오므로 서울은 야마타이(邪靡堆)에 있었다고 추측되나 그곳이 어디인지 아직 정설이 없다.

배세청이 도착하고 그의 환영식을 지휘한 소덕 아베다이(小德 阿輩臺)와 대례 가다비(大禮 哥多毗)의 이름이 수서에 나오지만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 고위관리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스이코(推古) 여왕을 적어도 3회 접견하였는데 귀국하여 왜왕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은 납득할 수 없다. 또 배세청이 왜국을 방문하고 환영받은 의전의 내용이 수서와 일본서기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쪽은 사실이 아닐 터이다.

일본의 후루타 타케히코(古田武彦)는 큐우슈우(九州)에 야마토(大和)와 다른 왕조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역사학자이다. 이를 큐우슈우 왕조설 (九州王朝說)이라 부르며 일본학계에서는 치열한 논전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착각하기 쉬운 점은 큐우슈우 왕조설 (九州王朝說)을 인정하는 사람은 큐우슈우 왕조 (九州王朝)라는 실체를 상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큐우슈우 왕조라는 실체가 존재하고 야마토 왕조라는 실체가 또 따로 존재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느 쪽도 왕조의 실체 같은 것은 없었고 세월속에 인간의 이합집산이 있었을 뿐이다.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동일한 인물이 한 곳에 붙박이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큐우슈우의 왕, 야마토의 왕, 또는 백제의 왕을 돌아가며 맡는 것이 백제의 제도였다. 우리는 보통 아버지가 왕이면 왕자는 부왕이 죽을 때까지 그냥 할 일 없이 기다릴 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백제 왕실은 왕자들을 큐우슈우와 야마토에 보내 어렸을 때부터 그들로 하여금 나라을 관리하도록 훈련시켰다.

큐우슈우 왕조의 왕이 야마토의 왕이 되면 열도는 통일 상태이며 야마토의 왕이 큐우슈우를 관리할 힘과 권위를 잃으면 어느 때고 큐우슈우 왕조가 존재하게 된다. 서기 629년 구주백제왕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야마토를 장악하고 조메이천황(敍明天皇)이 되었을 때는 야마토와 큐우슈우가 통일상태이며 서기 641년 그가 백제 의자왕이 됨으로써, 코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가 야마토와 구주를 따로 관리할 때는 큐우슈우 왕조가 존재한 것이다. 큐우슈우의 왕 카루황자(輕皇子)가 쿠데타를 일으켜 야마토를 장악하고 야마토의 코토쿠천황(孝德天皇)이 되면 큐우슈우 왕조는 사라진다. (을사의 변 직후의 상황). 이렇게 큐우슈우 왕조는 시대의 풍운에 따라 존재와 비존재를 반복하였고, 야마토 왕조 또한 이와 유사한 변화속의 존재로 파악된다.

영원하지 않는 존재를 영원하게 만들고자 하거나, 만세일계가 아닌 것을 만세일계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고자 하는 행위이다. 수서와 일본서기 기록의 불합치는 이러한 작위의 결과일 것이다.

스이코(推古) 16년 (서기 608) 배세청이 나니와(難波, 현 오오사카)에 도착하고 스이코(推古)여왕과 대면하고 국서를 낭독하였다는 일본서기 기사를 신용하기 어렵다. 서기 608년 왜국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배세청이 남긴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되었을 수서 왜인전 내용에서 야마토 방문의 단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년 9월 배세청의 귀국편에 4명의 학생과 4명의 승려을 파견하는데 이는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파견한 것이다.

대업(大業) 3년 (서기 607) 그 왕 다리시북고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자가 이르기를 “해서의 보살천자 (菩薩天子) 가 불법을 많이 일으킨다고 듣고 사자를 보내 예를 올리며 사문(沙門) 수십 인이 와서 불법을 배우도록 할 것 입니다.”하였는데 그 연장선에서 서기 608년 8명의 학생이 파견된다. 공교롭게도 高向漢人-玄理, 新漢人-日文, 南淵漢人-請安이 귀국하였을 때 다리시북고는 야마토(大和)의 왕이 되어 있었고 일본서기는 그 이름을 조메이천황(敍明天皇)이라 적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초대 중국유학생 출신들이 조메이천황(敍明天皇, 593 – 660) 주위에 머무르게 된다.

견수사의 주체가 야마토(大和)인지 구주왕조인지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오직 누가 그것을 결정하였나가 중요할 뿐이다. 견수사가 되었건 견당사가 되었던 모두 다리시북고 = 조메이천황 = 백제 의자왕의 작품이다. 그가 야마토 사람인지 구주사람인지 따질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다.

“간고지 가람연기와 유기자재장(元興寺伽藍縁起并流記資財帳)”이란 문서가 전 해 오는데 이 문서의 성립은 텐뵤(天平) 19년 (서기 745)으로 일본서기의 성립(서기720)보다 25년 이후의 일이다. 이 문서는 간고지 가람연기 (元興寺伽藍縁起), 탑로반명(塔露盤銘), 장륙광명(丈六光銘), 그리고 자재장(資財帳)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로반명(塔露盤銘)과 장륙광명(丈六光銘)은 간고지(元興寺)의 탑(塔)의 노반(露盤, 지붕의 정점의 보주(宝珠))과 장륙불(丈六佛)의 광배판(光背板)에 조각된 문서이다. 본래 금석문(金石文)이지만 유실되었고 이 서사문(書寫文)만 전해 온다. 이 가운데 장륙광명 (丈六光銘)의 기록이 문제가 된다. 현 아스카데라 (飛鳥寺) 아스카대불 (飛鳥大佛) 의 광배판(光背板)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스이코(推古) 14년 (서기 608) 대수국 사주 홍로사장객 배세청, 부사 상서사부 주사 편광고등이 와서 예배하다.

歳次戊辰、大隨國 使主 鴻艫寺掌客 裴世清、使副 尚書祠部 主事 遍光高等 來奉之

일본서기에도 없고 수서에도 나오지 않는 편광고(遍光高)라는 사람이 나오는 유일한 사료이다. 우리는 배세청이 야마토에 오지 않았다고 추측하였는데 야마토에 와서 건설중인 호코지(法興寺)의 대불을 보고 예배를 드렸다는 내용이다. 앞의 35. 백제 왕흥사와 일본의 호코지(法興寺)에서 거론 한 바 있는 바로 그 호코지(法興寺)이다. 호코지(法興寺)의 본존 장륙부처님이 제작중일 때 대수의 배세청과 편광고가 와서 예배드렸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의 반전에 대답해야 된다.

2009년 9월 4일 금요일

65. 한인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

한일 고대사는 4세기 초에서 7세기 말까지의 약 400여년 동안 세 차례의 격변기를 겪었다. 격변기에는 백제와의 교류가 더욱 심화되므로 이를 감추기 위하여 작위적으로 역사가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첫째 4 세기 초 만주대륙 부여(扶餘)출신의 스진천황(崇神天皇, Emperor Sujin))을 타도하고 백제세력이 열도를 장악해 간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열도의 倭建命과 應神天皇) 의 시대, 징구황후(神功皇后) 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역사를 신화로 만들었다. 둘째 5 세기 고구려의 열도정복과 백제의 재탈환 부분도 그러하다. 인교천황(允恭天皇), 곤지(昆支, 淸寧천황) 의 등장과 왜무왕(倭武王 = 백제 무령왕) 치세를 포함한다. 셋째 7세기 모국 백제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백제의 뱃속에 들어 있던 일본열도가 스스로의 운명을 열어가는 코우교쿠(皇極), 코우토쿠(孝德),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 시대의 기록 또한 애매모호하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시작된 정변은 킨키(近畿)의 천황가(天皇家)를 탈취하고 백제의 계획과 의지를 벗어나 일본열도는 자주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백제 본국의 국력은 한성백제 이후 정체상태에 빠져 있었던 반면 일본열도는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여 7세기 중순경에는 인구나 경제력에서 모국과 엇비슷한 상황이 되었다고 본다. 백제가 멸망한 서기 660년 백제는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호(萬戶)가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전한다. 한편 이 무렵 일본열도의 인구는 약 500만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38. 일본인-일본문화의 뿌리 참조). 끊임없는 전란과 원칙없는 이민정책으로 백제는 점차 일본열도를 관리할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백제의 의자왕이 부임하고 1년이 지난 서기 642년 구주백제에서 괴이한 변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은 의미의 단락이 심하여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해하는데 많은 상상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일본서기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월 29일 백제에 갔던 사인(使人) 다이닌(大仁)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히라후 (阿曇山背連 比羅夫) 가 역마를 타고 달려 와 “백제국은 천황이 죽었다고 듣고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쯔쿠지(筑紫)까지 우리와 함께 왔는데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혼자 오는 길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금 혼란속에 빠져 있다.”

百済使人大仁阿曇連比羅夫。従筑紫国乗騨馬来言。百済国聞天皇崩、奉遣弔使。臣随弔使。共到筑紫。而臣望仕於葬。故先独来也。然其国者今大乱矣。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일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히라후 (阿曇山背連比羅夫), 쿠사카베노 키시 이와카네 (草壁吉士磐金), 야마토노 아야노 후미노 아타히 아가타 (倭漢書直県)를 백제의 조사(弔使)에게 보내, 그 나라의 근황을 물었다. 조사(弔使)는 “백제국왕은 나에게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 귀국하는 사신에 딸려 귀국시켜 달라고 하거든 천황은 허락하지 말라』고 말했다” 고 한다. 백제의 조사(弔使)의 종자( 従者)들은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 (大佐平 智積)이 죽었다. 또 백제의 사인이 곤륜(昆倫)의 사자를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금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누이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들 40여명이 섬에 버려졌다.』고 한다.

二月,丁亥朔戊子,遣阿曇山背連-比羅夫、草壁吉士-磐金、倭漢書直-縣,遣百濟弔使所 問彼消息 弔使報言 「百濟國主謂臣言 『塞上恒作惡之 請付還使 天朝不許』」 百濟弔使傔人等言 「去年十一月, 大佐平智積卒 又百濟使人擲崑倫使於海裏 今年正月 國主母薨 又弟王子兒翹岐及其母妹女子四人 內佐平岐味 有高名之人四十余 被放於島」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1일 대신들을 나나와(難波)에 보내 고구려 사신이 가져 온 공물을 검사했다. 고구려에서는 작년 6월 제왕자(弟王子)가 죽고, 9월 대신(大臣) 연개소문(伊梨柯須彌)이 대왕을 죽이고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등 180여명을 살해한 뒤 왕의 동생을 왕으로, 동성(同姓)의 도스류김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았다 한다.

壬辰 高麗使人泊難波津 丁未 遣諸大夫於郡,檢高麗國所貢金銀等並其獻物 使人貢獻既訖 而諮云 「去年六月 弟王子薨 秋九月 大臣-伊梨柯須彌殺大王 并殺伊梨渠世斯等百八十余人 仍以弟王子兒為王 以同姓都須流金流為大臣」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4일 천황은 교기(翹岐)를 불러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4월 8일 태사 교기 (太使翹岐)가 수행원들을 데리고 천황을 알현하였다 (太使翹岐将其従者拝朝).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4월 10일 소가노 오호오미(蘇我大臣)가 우네비(畝傍)에 있는 자택으로 백제의 교기등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좋은 말 한필과 20정의 쇠붙이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蘇我大臣 於畝傍家 喚百済翹岐等 親対語話 仍賜良馬一疋 鉄二十[金+廷]唯不喚塞上)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5일 교기일행을 불러 카와치국에 있는 요사미의 미야케앞에서 말을 달리며 하는 활쏘기를 관람시켰다. (於河内国依網屯倉前 召翹岐等 令観射猟)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翹岐従者一人死去).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翹岐児死去).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5월 24일 교기와 그의 처가 쿠다라의 오오이(大井)에 있는 집으로 옮기고 사람을 시켜 이시카와에 그의 아이를 매장하였다. (翹岐将其妻子 移於百済大井家 乃遣人葬児於石川).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7월 22일 조정에서 백제의 사인 대좌평 지적(智積)등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어떤 책에는 “백제사인이란 대좌평 지적 및 그 아들 달솔 (이름은 모름) 그리고 은솔 군선(軍善)”이라 한다. 교기앞에서 스모를 공연하였다. 향연이 끝나고 지적등이 교기를 배웅하였다. ( 饗百済使人 大佐平智積等 於朝 或本云 百済使人 大佐平智積 及児達率 闕名 恩率軍善乃命健児相撲於翹岐前 智積等宴畢 而退 拝翹岐門).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8월 13일 백제의 인질 달솔 장복(長福)에게 소덕(小徳)의 벼슬을 내리고 중객이하 (中客以下)에게 위일급(位一級)을 내리고 직책에 따라 상을 내렸다. (以小徳授百済質 達率長福 中客以下 授位一級 賜物各有差).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4월 21일 백제국주의 아들 교기 제왕자가 사자들과 함께 왔다고 쯔쿠지에서 급보가 있었다. (筑紫大宰 馳驛奏曰 百濟國主兒-翹岐弟王子 共調使來).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7월 3일 나나와에 와 있는 백제의 조공이 평소에 미치지 못 하였다. 이유를 따져 묻자 대사 달솔 자사(自斯), 부사 은솔 군선(軍善)이 곧 바로 시정하겠다고 하였다. 자사(自斯)는 인질 달솔 무자(武子)의 아들이다.

秋七月 已酉朔辛亥 遣數大夫 於難波郡 檢百濟國調與獻物 於是 大夫問調使曰 「所進國調 欠少前例 送大臣物 不改去年所還之色 送群卿物 亦不全將來 背違前例 其狀何也?」大使-達率自斯 副使-恩率軍善 俱答諮曰「即今可備.」自斯 質-達率武子之子.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1일 키비노 시마 황조모가 죽었다 (吉備嶋皇祖母命薨).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7일 하지노 사바노 무라지 이테 (土師娑婆連猪手)에게 황조모의 장의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황조모의 병 수발을 드느라 천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조모의 곁을 지켰다. (詔土師娑婆連猪手視皇祖母命喪 天皇自皇祖母命臥病 及至発喪 不避床側 視養無倦).

코우교쿠(皇極) 2년 (서기 643) 9월 19일 황조모를 마유미노 오카 (檀弓岡)에 장사지냈다 (葬皇祖母命于檀弓岡).

이상의 퍼즐 게임같은 기사가 나열되고 나서 서기 645년 6월 12일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지축을 흔드는 을사의 변(乙巳의 變)이 일어나므로 위의 기사의 정합성을 살려 역사를 복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에서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예언적 성격일까? 이 무렵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서기 642년 10월 영류왕(榮留王)과 대당(對唐) 온건파 신하들을 참살하고 영류왕의 동생인 고대양(高大陽)의 아들 보장(寶藏)을 옹립하고 대막리지가 되었다. 앞에 나온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1일의 기사는 이를 말한다.

퍼즐게임과 같은 일본서기 기사를 정합성을 살려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으나 시비를 가릴 방법이 없다. 우리는 앞에서 백제본국, 구주백제 및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세개의 권력이 존재하였음을 말 하였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九州百濟)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두 백제본국의 사건으로 기술하므로 혼란이 가중된다. 백제본국, 구주백제 및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의 세개의 주체를 전제로, 위의 기록 상호간에 모순되는 사건들을 정합성 위주로 정리하자.

서기 642년 1월 백제국왕모가 사망하였다. 백제국왕모란 구주백제의 국왕모를 뜻하며 병상에서부터 천황이 극진히 간호하였다. 국왕모(國王母)는 기비노 시마 황조모 (吉備嶋皇祖母命)이며 사이메이(齊明)의 모후(母后) 기비히메왕(吉備姬王)을 말한다. 기비히메왕(吉備姬王)은 사이메이(齊明)과 카루황자(輕皇子)(을사의 변 이후의 코오토쿠(孝德)천황)의 어머니이며 서기 642년 큐우슈우에서 사망하였을 것이다. 킨키 천황가 (近畿天皇家)와 다른 큐우슈우(九州) 왕조가 있었고 죠메이(敍明)천황이 킨키(近畿)로 나간 서기 629년부터 사이메이(齊明)가 큐우슈우왕(九州王)이었다. 킨키(近畿)에서는 큐우슈우(九州)왕조를 백제본국과 구별하지 않고 쿠다라(百濟)라 부르기도 하였고 큐우슈우 사람을 카라히토(韓人)라 불렀다. 큐우슈우는 백제본국과의 교류가 많아 야마토(大和)보다는 백제본국에 가까운 아이덴티티를 가진 나라였다.

서기 641년 11월 백제의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이 죽었다고 사자가 말했다고 하나 실제 그는 죽지 않았고 소문만 났던 모양이다. 서기 642년 7 월 22일 지적을 위하여 야마토의 코우교쿠(皇極) 천황이 연회를 베풀고 있다.

1948년 부여읍에서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 가 발견되었다. 여기 나오는 대좌평 지적과 동일인으로 본다. 654년 세운 석비로 “ 갑인년 정월 9일 내기성의 사택지적은 해가 쉬이 가는 것을 슬퍼하고 달은 어렵게 돌아오는 것이 서러워서 금을 캐어 진귀한 집을 짓고 옥을 파 내어 보배로운 탑을 세우니 그 높고 자애스런 모습은 신령으런 빛을 토하여 구름을 보는 듯하고 그 우뚝 솟은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어…..” 라는 내용이 해독 가능하다 .

서기 2009년 1월 20일 익산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봉안기가 해독되었다. 서기 639년 백제 무왕의 황후,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 돈을 내어 가람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은 무왕 시절 요직에 있었고, 의자왕이 부임한 뒤 관직을 물러났으나 , 야망을 품은 지식인일 것이다. 지적(智積)과 무왕의 황후가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만 양쪽 다 사택(沙宅)씨라는 것은 확실하다.

서기 642년 백제에서 조문객들이 와 있는 가운데 사이메이(齊明)의 동생 카루황자(輕皇子)가 쿠데타를 일으켜 큐우슈우왕(九州王)이 되어 교기와 사이메이(齊明), 하시히토황녀(間人皇女)를 위시한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그리고 고명한 인사들 40여인을 시마나가시(嶋流)시켜 쫒아낸다.

서기 642년 2월 24일 천황은 교기를 불러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阿曇山背連)의 집에 살게 해 주었다. 4월 8일 교기가 종자를 데리고 천황을 배알하였다. 4월 10일 소가노 에미시 (蘇我蝦夷)는 우네비(畝傍)에 있는 집으로 교기를 초대하여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5월 5일 교기등을 불러 기사(騎射)를 구경시켰다. 5월 21일 교기의 종자 1명이 죽었다. 5월 22일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5월 24일 교기는 처자를 데리고 쿠다라(百濟, 奈良의 地名)의 오호이(大井)의 집으로 옮겼다. 7월 22일 대좌평 지적등에게 조정에서 향연을 베풀었다. 교기앞에서 스모(相撲)를 하도록 하였다. 지적등은 연회가 끝나고 가는 길에 교기의 집까지 배웅하고 문전에서 예배하였다.

위의 기록을 보면 교기가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취급되며 야마토의 조정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호칭이 꽤 복잡하여 제왕자의 아들 교기 (弟王子兒翹岐), 태사 교기 (太使翹岐), 백제의 교기 (百済翹岐), 백제국주의 아들 교기제왕자 (百濟國主兒-翹岐弟王子)등으로 아이덴티티가 다양하게 표현된다. 우리는 이 사람을 사이메이(齊明)가 왜왕 다리시북고 (倭王 多利思北孤)에게 시집 올 때 데려 온 아들, 아야황자(漢皇子)로 보며, 그는 나카노 오호에황자 (中大兄皇子)란 이름으로 을사의 변을 일으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7월 22일 야마토의 조정에서 향연을 베풀어 대접한 대좌평 지적등은 구주왕이 된 카루황자(輕皇子, 을사의 변 이후의 코우토쿠(孝德)천황)의 사인(使人)이며 카루황자(輕皇子)와 교기(翹岐)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 결국 을사의 변은 큐우슈우왕 카루황자(輕皇子)와 야마토에 몸을 의탁한 Boat People인 교기(翹岐)사이를 조정하면서 지적(智積)이 구상한 정변이었을 것이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 645) 6월 8일 나카노오호에(中大兄)가 쿠라야마다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와 은밀하게 합의한다.“삼한(三韓)에서 조공을 바치는 날, 당신이 상표문을 낭독하게 될 것이다. 낭독이 끝나는 시점에 이루카(入鹿)를 살해하겠다.”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란 이름이 일본서기에 처음 나오는데 앞서 기술된 인물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언급하지 않아, 후대 사람들은 제 각각 추측할 뿐이다. 우리는 교기(翹岐)와 나카노 오호에(中大兄)가 같은 사람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6월 12일 코우교쿠(皇極) 천황은 대극전(大極殿)에 좌정하고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가 곁에 시립하였다.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는 소가노 이루카노 오미 (蘇我入鹿臣)가 의심많은 성격이라 밤이고 낮이고 검을 차고 있는 것을 알고 무장해제 한 다음에 입실시켰다. 쿠라야마타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가 앞으로 나가 삼한(三韓)의 상표문(上表文)을 읽어 나가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는 12개의 출입문을 폐쇄토록 한다. 그런 연후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 자신이 장창을 들고 어전곁에 숨는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노 무라지 (中臣鎌子連) 등은 활과 화살을 들고 그를 엄호할 수 있는 자리에 위치한다. 아마노 이누카이노 무라지 카쯔마로 (海犬養連勝麻呂)가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 (佐伯連子麻呂)와 카쯔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아미다 (葛城稚犬養連網田) 에게 검을 나누어 주고 행동개시를 명한다. 코마로(子麻呂)등은 밥을 물에 말아 먹다가 공포에 질린 나머지 먹었던 것을 토하자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가 이들을 진정시킨다.

쿠라야마타노 마로노 오미 (倉山田麻呂臣) 는 낭독이 거의 끝나 가는데 코마로(子麻呂)등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땀을 뻘뻘 흘리며, 목소리는 떨리고 양손이 사시나무 떨듯 하였다. 쿠라쯔쿠리노 오미(鞍作臣)가 괴이하게 여겨 “왜 그렇게 떨고 있느냐?” 물었다. 야마타노 마로 (山田麻呂)는 “천황을 가까이 뵈오니 나도 모르게 그만…”라고 얼버무렸다. 코마로(子麻呂)등이 이루카(入鹿)의 위세에 눌려 무서워 하는 것을 보고 당장 헤치우라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이 일갈한다. 그 때서야 코마로(子麻呂)등이 함께 뛰어나가 이루카(入鹿)의 머리와 어깨를 가격한다. 이루카(入鹿)가 놀라 일어서려 하자 코마로(子麻呂)가 검을 휘둘러 이루카(入鹿)의 다리를 절단한다. 이루카(入鹿) 가 넘어져 천황쪽으로 기어가며 고개를 숙이고 “황실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 황위를 이어야 됩니다. 저는 죄가 없읍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천황이 대경실색하여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에게 고함친다.“나는 모르는 일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이 바닥에 엎드려 아뢴다.“쿠라쯔쿠리(鞍作)는 황실을 빼앗고자 하였읍니다. 천손(天孫)의 자리를 감히 쿠라쯔쿠리(鞍作)가 넘보게 해서 되겠읍니까?”. 소가노오미 이루카 (蘇我臣入鹿) 의 이름이 쿠라쯔쿠리 (鞍作)이다. 천황이 일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 (佐伯連子麻呂)와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이미타 (稚犬養連網田)가 이루카노 오미(入鹿臣)를 죽였다. 그 날은 장대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황궁의 정원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깔린 융단과 병풍등으로 쿠라쯔쿠리(鞍作)의 시체를 덮었다.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가 이를 보고 사저로 도망가면서 사람들에게 외쳤다.“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 (鞍作臣) 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벌어졌다.”그는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는 즉시 호코지(法興寺)로 옮겨 그곳을 요새화하고 다음 단계의 준비에 들어간다. 모든 황자(凡諸皇子), 모든 왕들(諸王), 모든 공경대부(諸卿大夫), 오미(臣), 무라지(連), 토모노 미야쯔코(伴造), 쿠니노 미야쯔코(国造) 를 호코지(法興寺)로 소집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쿠라쯔쿠리노 오미(鞍作臣)의 시신을 그의 부친 오호오미 에미시(大臣蝦夷)에게 보냈다. 아야노 아타히(漢直)등이 권속을 모아 무장하고 오호오미(大臣) 편에 서서 싸우려고 군진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나카노 오호에(中大兄)가 장군 코세노 토쿠다노 오미 (巨勢徳陀臣)를 시켜 천지개벽(天地開闢)이래 군신(君臣)의 구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적당(賊党)을 설득하였다. 타카무카노 오미 쿠니오시 (高向臣国押) 가 아야노 아타히(漢直)등에게 말한다.“우리들은 타이로우 사마 (君大郎 = 入鹿) 때문에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오호오미(大臣(蝦夷)) 또한 오늘이나 내일 중 주살되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헛 된 싸움을 하여 권속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고 하느냐?”말을 마치자 검을 풀어 놓고 활을 내 던지고 가 버렸다. 적도(賊徒) 역시 이를 따라 도망쳤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645) 6월 13일 소가노 오미 에미시(蘇我臣蝦夷)등은 죽음이 임박해 오자 천황기(天皇記), 국기(国記), 진보(珍宝)를 모두 불 태웠다. 후네노 후비토 에사카(船史恵尺)가 잽싸게 불에 타려하는 국기(国記)를 집어내 나카노 오호에(中大兄)에게 바쳤다. 그날 소가노 오미 에미시 (蘇我臣蝦夷)와 쿠라쯔쿠리(鞍作)의 시신을 묘(墓)에 장사지내고 곡읍(哭泣)도 인정한다는 허가가 내렸다.

코우교쿠(皇極) 4년 (서기 645) 6월 14일 카루황자(軽皇子)에게 황위를 넘기고 나카노 오호에(中大兄)를 황태자로 세웠다.

을사의 변으로 불리는 서기 645년 6월 12일 이타부키노미야(板蓋宮)에서 벌어진 정변은 계획데로 진행되어 소가씨 종가(宗家)를 멸망시키고, 반대세력을 진압한 뒤 코우교쿠(皇極)천황을 퇴위시킨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1월 16일 천황이 니이나메노 마쯔리(新嘗祭)를 지냈는데 황태자와 오호오미 (大臣)가 참석하였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2월 13일 오키나가 타라시히 히로누카 천황 (息長足日広額天皇, 敍明)의 장례가 시작되었다. 그날 소덕 코세노 오미 토쿠다 (小徳巨勢臣徳太)가 오호마타황자 (大派皇子, 敏達의 황자)를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 = 弔辭)을 읽고, 다음 소덕 쿠라타노 오미 호소메 (小徳粟田臣細目)가 카루황자(軽皇子 = 孝德천황)를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소덕 오호토모노 무라지 우마카이 (小徳大伴連馬飼)가 오호오미(大臣)을 대신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읽었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12월 14일 오키나가노 야마다노 키미 (息長山田公)가 히쯔기(日嗣 = 황태자)를 위하여 시노비고토(誄)를 읽었다.

여기 나온 황태자 또는 히쯔기(日嗣)란 표현은 코우교쿠(皇極) 원년부터 이미 다음 천황이 될 사람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며 645년 6월 12일 대극전(大極殿)에 좌정한 천황곁에 시립하고 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황자가 히쯔기 (日嗣 = 황태자) 였다.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후계자를 처치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세상이 바뀐 서기 645 년 6월 14일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는 “나는 출가하여 요시노(吉野)에 들어가 불도(佛道)에 정진하겠다”며 스스로 호코지(法興寺)에 들어가 삭발하고 가사을 입은 채 요시노(吉野)의 깊은 산중으로 몸을 피하였다. 그렇게 목숨을 구걸하였지만 같은 해 9월 3일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는 모반죄의 명목으로 처형되니 백제왕실의 의도와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왜냐하면 백제 위덕왕(530 – 598)에서 아좌태자 (彦人大兄와 동일인, 570 - 598), 의자왕 (多利思北孤 = 敍明천황과 동일인, 593 – 660), 후루히토노 오호에 (古人大兄, 615 – 645)로 이어지는 백제왕실의 본류가 역사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시마나가시로 쫒겨난 사람들이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로 흘러 들어왔다. 킨키 천황가는 죠메이(敍明)천황의 명실상부한 황후 코우교쿠(皇極) 천황과 후계자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 (古人大兄皇子) 가 있었고 소가노이루카 (蘇我入鹿)가 후견인으로 버티고 있었다.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는 불행한 난민들을 보살펴 주었으나 그들은 킨키 천황가를 탈취한다. 그 사건이 을사의 변이다. 이 때 “다이카(大化)의 가이신(改新)(Taika Reforms)”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후인들이 미화하여 붙인 타이틀에 불과하다.

혁명주체 세력의 후손들은 조상들의 정변을 미화하여 을사의 변 (乙巳의 變)이 마치 의거(義擧)인냥 기록하였다. 대부분의 일본 교과서는 이 의로운 거사를 통하여 일본은 율령국가로 진입하고 근대국가로 진보해 가는 옳바른 역사발전 단계에 들어선 것처럼 보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의 역사인식과 달리, 코우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가 별개의 인간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을사의 변을 모델로 황실 탈취의 정변이 되풀이 될까 두려워 천황가는 코우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를 동일인으로 만들어 정권탈취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를 조작한다.

백제 의자왕은 서기 593년생으로 큐우슈우(九州)에서 태어났고 수서(隋書)에 나오는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가 이 사람이다. 서기 629년 야마토의 죠메이(敍明)천황으로 즉위했고, 641년 백제의 의자왕이 되면서 야마토를 황후 코우교쿠(皇極)천황이 맡고 큐우슈우왕은 629년부터 사이메이(齊明)가 맡고 있었다. 서기 642년 큐우슈우(九州)에서 카루황자(輕皇子)가 큐우슈우왕인 누나 사이메이(齊明), 교기와 하시히토 황녀(間人皇女)등을 추방하고 큐우슈우 왕이 되었는데, 이 카루황자(輕皇子)와 교기(中大兄)가 다시 연합하여 킨키 천황가(近畿 天皇家)를 장악하고, 구주 백제왕 카루황자(輕皇子)가 킨키(近畿)의 천황이 됨으로서, 저절로 일본열도가 통일된 결과가 된다

실로 거대한 음모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셈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모두가 나카토미노 카마코 (中臣鎌子) 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나카토미 카마코 (中臣鎌子)라는 이름이 여기서 처음 등장하므로 그가 이전에 누구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백제의 사택지적(沙宅智積)을 나카토미 카마코(中臣鎌子)의 전신(前身)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나카토미 카마코(中臣鎌子)는 이름을 나카토미 카마타리(中臣鎌足)로 바꾸었고 죽기 하루 전 텐지(天智)천황으로부터 후지와라(藤原)라는 성을 받아 후지와라 카마타리(藤原鎌足)가 되었다.

소가노 이루카(蘇我入鹿)가 암살된 직후 현장에 있었던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의 “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 (鞍作臣)를 죽였다 (韓人殺鞍作臣).”는 절규는 큐우슈우(九州)에서 온 한인(韓人)들이 쿠라쯔쿠리를 죽였다는 뜻이다. 사이메이(齊明), 교기(翹岐), 카루황자(輕皇子), 하시히토황녀(間人皇女), 대좌평 지적(大佐平 智積) 등이 모두 큐우슈우(九州)의 카라히토(韓人)들인 것이다. 서기 645년 을사의 변을 일으켜 킨키 천황가 (近畿 天皇家)를 탈취한 한인(韓人)들의 후예가 지금도 일본황실의 주인이니 백제는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셈이다.

2009년 8월 3일 월요일

64. 阿佐太子


야마토타케루(倭建命, 295 – 375)와 應神天皇(320 – 394) 父子가 구축한 야마토 왕조는 6세기말 불교를 수용하면서 아스카(飛鳥)시대를 연다. 飛鳥時代란 6세기말부터 8세기초에 걸쳐 아스카(飛鳥)에 궁궐과 도읍을 두던 시대를 말한다. 예전에는 古墳時代와 한데 묶어 大和時代라 하던 때도 있었으나 요새는 古墳時代와 飛鳥時代로 나누어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飛鳥文化, 白鳳文化가 꽃 핀 시대이며, 이 시대에 倭国(倭)에서 日本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古代律令国家의 기초를 닦은 第38代 天智天皇(Emperor Tenji)과 第40代 天武天皇(Emperor Temmu)의 이름은 너무나 유명하다. 天智天皇(619 – 671)은 “大化의 改新”의 시발점이 된 “乙巳의 變”의 中心人物로서, 또 天武天皇(622 – 686)은 “壬申의 亂”의 주역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天智와 天武 兩帝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第34代 舒明天皇 (Emperor Jomei, 593 – 660)은 아들들보다 덜 유명하다. 그럼 天智와 天武의 할아버지는 누구일까? 일본서기에 의하면 第30代 敏達天皇(Emperor Bidatsu, 538 – 585)과 그의 황후 히로히메(広姫) 사이에서 출생한 嫡子 오시사카노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 (押坂彦人大兄皇子, 570 – 598)가 天智와 天武 両帝의 祖父라고 한다.

記紀는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생물년에 관해 아무 기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연령과 관련된 정보는 어머니가 서기 575년 사망했다는 것, 그의 장남 타무라황자(田村皇子, 敍明天皇)가 서기 593년 출생했다는 정도이다. 그와 관련된 역사기록도 극히 제한적이다. 그의 이름은 敏達天皇의 오호에황자(大兄皇子)로 기록되어 있다. 大兄皇子란 제1황자로 황위계승서열에서 최우선권을 가진 신분이다. 大化2년 (서기 646) 3월의 詔에 “皇祖大兄”이라 나오고 거기에 “彦人大兄”를 뜻한다고 주(註)까지 달려있다. 彦人大兄은 皇祖大兄으로도 불렸다는 것이다.

用明2년 (서기 587) 4월, 나카토미노 카쯔미(中臣勝海)가 皇太子의 像과 타케다황자(竹田皇子)의 상을 만들어 그들을 저주하였다. 위의 皇太子란 押坂彦人大兄皇子를 의미하며 用明천황 이후의 천황을 결정하는데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의 권력다툼이 한창일 때이다. 中臣勝海는 物部守屋의 사람이었고 그들은 아나호베황자 (穴穗部皇子)를 밀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던 中臣勝海가 히코히토 (彦人) 황자가 살고 있는 미타마노미야 (水派宮)를 찾아갔다. 中臣는 水派宮에서 나오는 길에 彦人皇子의 부하에게 살해된다.

서기 587년 6월 7일 카시키야히메(炊屋姬, 敏達천황비 후일의 推古천황)의 명을 받들어 蘇我馬子는 穴穗部皇子를 죽이고 8일 야카베황자(宅部皇子, 539 - 587)도 토벌한다. 宅部皇子는 宣化천황의 황자이나 穴穗部皇子(543 – 587)와 가까운 친구였으므로 죽였다 한다. 두 사람 모두 40대의 나이였다.

동년 추 7월 蘇我馬子가 諸皇子와 群臣들을 모아놓고 物部守屋 토벌을 논의한다. 泊瀬部皇子, 竹田皇子, 厩戸皇子, 難波皇子, 春日皇子, 蘇我馬子宿禰大臣, 紀男麻呂宿禰, 巨勢臣比良夫, 카시와데노 오미 카타부 (膳臣賀陀夫), 카쯔라기노 오미 오나라 (葛城臣烏那羅)등이 함께 軍勢를 이끌고 大連를 토벌하였다.

竹田皇子는 敏達과 推古사이의 황자 , 難波皇子와 春日皇子는 동모형제로 敏達의 황자, 우마야도황자(厩戸皇子)는 당시 14살로 聖德태자로 알려진 인물, 하쯔세베황자 (泊瀬部皇子, 530 – 592)는 곧 등장할 崇峻천황이다. 이렇게 당시의 황자들이 총출동하는 物部守屋의 토벌전에 押坂彦人大兄皇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기록을 종합해 보면 彦人大兄皇子 570년 생, 타케다황자(竹田皇子) 573년, 우마야도황자(厩戸皇子, 聖德太子) 574년, 에쿠리황자(殖栗皇子) 578년, 오하리황자(尾張皇子) 580년으로 수 많은 사촌형제들이 있었다.

物部守屋를 토벌하고 동년 8월 2일 하쯔세베황자 (泊瀬部皇子)가 등극하니 그가 崇峻천황이다. 物部守屋라는 장애물이 제거되자 蘇我馬子의 독주가 시작되고 불교의 도입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崇峻4년 (서기 591) 11월 4日,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大将軍에 임명하고 各氏族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副将, 隊長으로 하여 二万余의 軍을 딸려 筑紫에 出兵하였다. 키시노 카네(吉士金)를 新羅에 보내 任那의 건을 물었다.

崇峻 5년 (서기 592) 11월 3일 蘇我馬子는崇峻천황을 살해하고 당일 쿠라하시노 오카노 미사사기 (倉梯岡陵)에 매장하였다. 이 弑逆사건에 대하여 蘇我馬子는 아무 문책도 받지 않았고 계속하여 권좌에 있었다. 이는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의 의지에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다.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란 누구일까?

우리는 일본열도의 역사가 만세일계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거론되고 있는 시대에 세개의 권력주체가 존재하였다. 하나는 백제본국의 위덕왕, 또 하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의 천황, 세번째 주체는 열도의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九州百濟의 존재이다. 이 시대 야마토의 천황은 九州를 지배하지 못 하였다.

서기 591년 崇峻4년의 거병은 任那를 거론하고 있으나 이 시대 삼국사기는 2만의 왜인침입을 전하지 않는다. 구주백제는 백제의 무령왕 이후부터 백제의 직할지로 야마토의 상위에 있는 또 하나의 권력주체였다. 崇峻의 거병은 九州를 통합하고자 하는 목적이며 이는 백제본국에 대한 도전이다. 蘇我馬子가 崇峻천황을 살해하고도 끄떡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야마토의 상위권력이 九州百濟이며 구주백제의 상위권력이 백제본국이다.

이 전쟁은 야마토의 패배로 끝나지만 推古천황은 서기 602년과 603년 2회에 걸쳐 九州침공을 재차 시도하였으나 패배하여 九州백제의 정치제도를 수용한다. 遣隋使, 12관위제, 17조 헌법이니 하는 것들은 九州百濟의 제도였다. 이 정도면 推古 다음의 천황이 누가 될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견수사, 12관위제, 17조 헌법은 天智와 天武 兩帝의 아버지 多利思北孤 (훗날의 敍明天皇, Emperor Jomei)가 九州百濟에서 실시한 정책이었다.“야마토의 만세일계”라고 하는 하나의 권력주체로 역사가 설명되지 않으니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나조(謎,수수께끼)라는 말을 연발한다.

推古천황 10년 (서기 602년) 구메(來目)황자 (用明천황의 아들이며 聖德太子의 친동생)를 擊新羅장군으로 임명하여 2만 5천의 군사를 츠쿠지(筑紫)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구메황자가 6월 병으로 쓰러져 603년 2월 사망한다. 이 해 4월 다기마(當麻)황자 (用明과 히로꼬의 첫 아들)가 다시 征新羅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번에는 종군하고 있던 정벌군 대장의 아내, 도네리히메왕 (舍人姬王, 흠명과 기타시히메의 제 13자)이 아까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정벌은 중지된다.

서기 629년 推古死後 多利思北孤가 敍明天皇으로 즉위한다. 多利思北孤의 아버지 押坂彦人大兄皇子의 가계를 보자.

A. 妃:누카데히메 (糠手姫)皇女( 宝王 , 田村皇女, 敏達天皇의 皇女)
田村王(たむらのみこ、舒明天皇)
中津王(なかつみこ)
多良王(たらのみこ)

B. 妃:오호마타왕 (大俣王, 漢王の妹)
茅渟王(ちぬのみこ、智奴王) 皇極天皇=斉明天皇과 孝徳天皇의 父
桑田王(くわたのみこ、女性)

C. 妃:사쿠라이 유미하리 (桜井弓張)皇女( 桜井玄王, 敏達天皇의 皇女)
山代王(やましろのみこ)
笠縫王(かさぬいのみこ)

D. 妃:오하리타 (小墾田)皇女(敏達天皇의 皇女)

彦人大兄皇子는 4명의 비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3명이 敏達의 황녀이다. 彦人역시 敏達의 大兄皇子로 되어 있으면서 3명의 동부자매와 결혼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彦人는 敏達의 아들이 아니라 敏達의 다른 형제 누구인가의 혈통일 것이다. 敏達에겐 형이 있었다. 欽明과 石姫皇女 (宣化天皇의 皇女)사이에 태어난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 (箭田珠勝大兄)皇子가 敏達의 同母兄이다. 箭田珠勝大兄皇子는 서기 530년경 출생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흠명 13년 (서기 552) 여름 4월 箭田珠勝大兄皇子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그 이유는 일본열도의 箭田珠勝大兄皇子는 죽었지만 백제의 왕자 餘昌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백제의 위덕왕이다. 우리는 위덕왕을 백제 성명왕의 長子로 알고 있다. 일본서기에 聖明王을 넣을 수는 없으니 성명왕의 왕자들은 모두 欽明의 족보에 올랐다. 欽明은 聖明의 동생이다. 그러다 보니 欽明의 자식과 부인이 일본서기에 꽤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왕자 餘昌이 箭田珠勝大兄皇子란 이름으로 欽明의 큰 아들로 일본서기에 올라있다.

이렇게 되면 彦人大兄皇子란 敏達의 황자가 아니라 백제 위덕왕의 왕자의 신분이다. 이제 야마토위에 九州百濟, 구주백제 위에 백제본국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彦人大兄皇子는 백제 본국의 위덕왕 사후 왕위에 오를 사람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위덕왕이 서기 598년 12월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서기 597년 4월 야마토에 들어 온 백제의 아좌태자는 法興寺의 완공을 축하하고, 불법을 일으키는데 더욱 매진하도록 독려 했을 것이다. 서기 598년 12월 백제 위덕왕이 사망하기 직전 아좌태자는 야마토에서 사망했다고 본다. 전도유망한 28세의 젊은이였다. 그런 연유로 위덕왕 사후 위덕왕의 한 물 간 늙은 동생들, 혜왕과 법왕이 자리를 메꾸었다.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다.

위의 彦人의 가계에서 “B. 妃:오호마타왕 (大俣王, 漢王の妹)” 부분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 기록 때문에 彦人大兄皇子의 출생을 서기 556년경으로 본 학자가 많았다. 齊明天皇이 601년생이므로 그 아버지 智奴王은 575년대, 또 智奴王의 아버지라는 彦人大兄은 550년경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舒明天皇이 彦人大兄의 嫡長子라 하였고 그는 서기 593년생이 확실하다. 그러면 彦人大兄皇子는 대강 서기 570년경 출생한 것으로 된다. 570년경 출생한 彦人가 601년에 齊明을 손자로 둘 수는 없다. 첫 아들을 593년에 본 사람이 어떻게 601년에 손녀를 보겠는가? 斉明天皇과 孝徳天皇의 아버지 지누왕 ( 茅渟王 또는 智奴王)은 彦人大兄皇子와 동연배의 백제의 또 다른 최고 권력자로 봐야 된다. 가장 적합한 후보자가 武王이다.

2007년 10월 24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왕흥사적의 목탑기초(심초석)부분에서 서기 577년 (위덕왕 24년) 제작되어 수납된 사리장엄구와 각종의 장식품등을 발굴하였으며, 완전한 모습으로 백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발표하였다. 왕흥사적 목탑은 실재하지 않으나 조사결과 가로 세로 1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었다.

사리용기에 백제왕의 이름이 각인된 명문이 발견되어 당시 역사의 실상을 알게되었다. ”577년 2월 15일 사거한 왕자를 위하여 백제왕 昌 (위덕왕의 이름) 이 절을 건립하였다. 사리 2매를 넣었으나 부처님의 가호로 사리가 3개로 되었다. (丁酉年二月 / 十五日百濟 / 王昌爲亡王 / 子立刹本舍 / 利二枚葬時 / 神化爲三).”

이 명문에 의하여 왕흥사적의 사리장엄구는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이며,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 600년이 아니라 577년 창건되었다는 것, 위덕왕에게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좌태자 이외로 577년 이전 사망한 다른 왕자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서기 推古 5년 (서기 597) 4월 백제왕이 왕자 阿佐를 보내 조공하였다. 일체의 군더더기의 기사도 없이 “百濟王 遣王子 阿佐 朝貢”의 10자의 기사뿐이다. 이 때 아좌태자가 聖德태자를 그렸다고 생각되는 당본어영( 唐本御影)이라고 불리는 “聖德太子와 二王子像”은 일본의 最古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고 法隆寺가 소장하고 있었으나 1878년 호류지 헌납보물의 하나로 황실에 헌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阿佐太子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서기 기록이 있어서 아좌태자의 이름이 역사에 남았다.

“延喜式”諸陵寮에 彦人大兄皇子는 나라이노하카 (成相墓) 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으나 그 묘역의 넓이는 동서 15町, 남북 20町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광대한 면적이다. 敏達천황의 묘역이 동서 3정, 남북 3정이며, 천황으로서 가장 큰 묘역을 자랑하는 天智천황도 동서 14정, 남북 14정에 불과하다. 즉위도 하지 않은 황자에게 왜 그렇게 큰 묘역을 할당하였을까? 나라이노하카(成相墓)가 奈良県 広陵町의 바쿠야고분(牧野古墳)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한다.

바쿠야고분(牧野古墳)은 6세기 말경 축조된 것으로 보며,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고분으로 서기592년 암살된 崇峻천황의 능묘일 가능성이 높은 櫻井市의 天王山古墳, 서기587년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가 카시키야 히메(炊屋姬)의 명을 받아 주살한 아나호베황자(穴穗部皇子, 543 - 587)와 야카베황자(宅部皇子, 539 - 587)를 매장했다는 설이 있는 藤木古墳이 있다.

牧野古墳은 서기 1983년11월부터 1984년 2월까지 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가 発掘調査를 実施했다. 그 결과 직경 38 – 60m, 높이 약 13m의 3단 築成으로 건설된 원분으로 판명되었다. 석실의 규모는 아스카무라 (明日香村)의 이시부타이고분(石舞臺古墳)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石舞臺古墳은 蘇我馬子의 묘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할 근거는 없으며 牧野古墳을 蘇我馬子의 묘로 보는 견해도 있다.

후지노키고분 (藤ノ木古墳) 은 奈良県 이코마군(生駒郡) 이카루가쬬( 斑鳩町) 法隆寺西2丁目에 있다. 直径約48m 높이 約9m의 円墳으로 서기 1985년 第1次와 1988년 第2-3次, 3回의 発掘調査를 実施하였다. 法隆寺 西院伽藍에서 서쪽으로 약 350미터 떨어진 곳이다. 축조연대는 고분시대 후기, 6세기 말 (서기 576 – 600), 발굴조사 결과 직경 48m, 높이 약 9m의 원분으로 판명되었다.

석실과 석관이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횡혈식석실이며 가형석관(家形石棺)에 성인2명이 합장되어 있었다. 석관은 석실 안쪽에 있었고 석재는 아스카마을 서쪽의 니죠산(二上山)의 백색응회암으로 만들었다. 남과 북에 남은 유골을 보면 北人 신장 165센티 혈액형 B형의 남자가 확실하며 연령 17 – 25세 쯤, 南人은 유골의 보존상태가 나빠 남녀의 구분이 어렵다. 혈액형은 역시 B형, 연령 20 – 40세 정도, 뼈을 보면 남자처럼 보이나 발목에 발찌를 끼고 있어서 여자로 봐야 된다는 견해도 있다.

석관에서 유골과 함께 다량의 식물의 꽃가루가 발견되었다. 꽃가루를 분석하여 베니바나(紅花)의 花粉임을 알았다. 베니바나의 화분은 옛부터 염료로 씌였다 하며 방부제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꽃은 6월에서 7월에 걸쳐 피고 처음에는 선명한 노란색을 띄나 서서히 붉은 색으로 변한다.

石室内에서 갑옷(鎧) 철촉(鉄鏃)등의 武器, 武具, 金銅装의 馬具, 하지키(土師器) 스에키(須恵器)등의 土器類가 出土되었다. 그 가운데 装飾性 이 뛰어난 馬具類는 말안장(鞍金具)에 팔메트(Palmette), 鳳凰, 코키리(象), 鬼面등을 透彫한 類例없는 예술품이다. 石棺内의 副葬品도 豊富하여, 各種의 金属製의 玉類와 1万数千点을 넘는 유리구슬(玉) 등의 装身具, 冠, 신발(履) 허리띠(大帯)등의 金属製品, 四面의 銅鏡, 타마마키대도(玉纏大刀), 검(剣)등이 있다.

후지노키고분은 法隆寺 가까이 축조되어 오랫동안 法隆寺의 寺領으로 관리 유지되었다. 中世에는 미사사기야마 (陵山)로 불렸고, 江戸時代에는 法隆寺가 崇峻天皇陵으로 보았던 것 같고, 옛부터 천황릉으로 취급되어 도굴을 면하고 원래의 모습데로 남게 되었다.

이 시대의 역사를 부연하자면 서기 592년 11월 3일 崇峻천황 암살, 동년 12월 推古천황 豊浦宮에서 즉위, 593년 4월 나이 20세의 우마야토 토요토미미황자 (厩戸豊聡耳皇子) 를 皇太子및 섭정으로 지정, 596년 11 월 法興寺(飛鳥寺) 완공, 597년 4월 백제왕이 왕자 아좌를 보내 조공 ( 百済王遣王子阿佐朝貢), 599년 4월 심한 지진으로 건물이 파괴되어 신에게 제사 (地動 舎屋悉破 則令四方 俾祭地震神), 601년 2월 皇太子 이카루가궁(斑鳩宮) 건설착수, 605년 10월 皇太子 4년 8개월만에 斑鳩宮 완공. 607년 法隆寺 착공등으로 이어진다.

서기 598년 아좌태자가 이곳에서 사망했다면 당시의 섭정 聖德태자의 나이 25세이다. 아좌태자는 聖德과 사촌형제간이며 동년배의 가까운 사이일 것이다. 아좌태자의 장의행사는 聖德의 주관하에 진행되었을 것이며 후지노키고분은 聖德태자가 건축하게 되는 이카루가궁(斑鳩宮)과 같은 장소이다. 이는 聖德태자가 자기 땅에 아좌태자의 묘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天智天皇(619 – 671)과 天武天皇(622 – 686)이 일본황실의 주인이 된 이래 자기들의 할아버지의 무덤을 어떤 식으로든 관리되도록 조치하였을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사연이 있어 후지노키고분은 도굴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었던 게 아닐까.

일본에서는 후지노키고분의 피장자가 서기 587년 6월 처형된 아나호베황자(穴穗部皇子, 543 – 587)와 야카베황자 (宅部皇子, 539 - 587)로 추정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당시 두 사람은 40대의 나이였다.

2009년 7월 19일 일요일

63. 유우랴쿠(雄略) 시대의 진상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5년 추 7월 대지진이 있었다. 지진의 기록이 일본역사에 처음 등장하는데 인교우(允恭) 5년이 서기 몇 년인지 확인할 기준(Reference)이 없다. 일본은 인교우(允恭) 5년을 서기 416년으로 치고 있다. 인교우(允恭)의 재위를 고진(高珍)이 쯔쿠시(筑紫)의 쿠루메시(久留米市)에 들어 온 서기 410년부터 헤아릴지, 야마토를 정복하고 아스카에서 즉위한 432년부터 헤아릴지 고민해야 된다. 일본은 서기 412년을 인교우(允恭) 원년으로 친다.그러나 일본서기의 연대는 자의적으로 기록되어 역사의 연대를 헤아리는 기준(Reference)으로 쓸 수 없다. 일본서기의 윤공 5년이 서기 몇 년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뜻이다.

서기 438년 송서(宋書)에 왜왕 찬()이 죽고 동생 진()이 왕이 되었다. 왜왕 진(),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서기 443년 송서에 왜왕 제(),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았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42 (서기 453) 춘정월 천황이 사망했다. 헌데 신라의 왕이 천황의 붕어소식을 듣고 놀라, 조공선 80척의 선단에 악단원을 태워 파견하였다. 이들이 쯔시마( 對馬)에 정박하여 호읍하고 쯔쿠시(筑紫)에 도착하자 또 호곡하였다. 나니와(難波)에 닿자 하얀 마포 옷을 입고 많은 헌상품을 나르고, 여러가지 악기를 안은 채 나니와(難波)에서 서울까지 울며 연주하며 행진하여 빈소에 참례하였다. 겨울 10월 천황을 장사지내고 11월 신라의 조문단이 귀국하였다.

아나호 천황(穴穗天皇, 安康)은 윤공천황의 두째 아들이다. 서기 453년 겨울 10월 장의가 끝났다.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는 여성문제로 신망을 잃었다. 호족들도 태자를 따르지 않고 모두 아나호 황자의 즉위를 바랐다. 이런 사실을 알고 태자가 선수를 쳐서 아나호 황자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아나호 황자도 군대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이 권력투쟁에서 아나호가 승리하여 키나시노 카루 (木梨輕) 태자가 자살하였다. 그 해 12월 아나호 황자가 나라현(奈良県) 텐리시( 天理市)의 아나호 궁()에서 즉위하니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인교우(允恭) 4 (서기 433년 무렵으로 본다) 천황은 “옛적에는 어떤 씨족도 자신의 지반을 지켜, 카바네()가 잘못 됨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즉위하고 나서 호족이 서로 상하를 다투고 치세도 안정되지 않는다. 그동안 실적이 없어 원래의 카바네()를 잃은 자도 있고 남을 속이고 고위의 씨족 이름을 자칭하는 자도 있다. 치세가 안정되지 않는 것은 이런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리라. 나는 박식하지는 못하지만 그러한 잘못은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호족들은 각자 옳바른 씨성을 보고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모든 씨족들은 쿠카타치(盟神探湯)를 통하여 본래의 신분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쿠카타치(盟神探湯)란 가마솟에 진흙을 물에 섞어 끓인 다음 각자 손을 그 속에 담가 진실을 말 한 사람은 무사하고 가짜는 화상을 입는다고 믿어 사람을 재판하는 고대의 재판 방식이다. 거기 담가서 확인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재판에 질테니 무조건 따를 수 밖에 없는 재판이다. 고대 일본에서 사람의 시비, 정사를 판단하기 위한 주술적인 재판을 말한다. 나라현(奈良県) 아스카 무라(明日香村)에 있는 아마카시노 오카(味橿丘) 에서 모든 고위급 관료들이 이러한 신명재판(神明裁判)에 의하여 새로운 신분을 부여 받았다. 백제출신 호족들을 견제하고 고구려계의 득세를 노린 권력개편인 셈이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카와치의 찌누(茅渟, 大阪市남서부)에 감추어 두고 총애하던 후비, 소토호시노 이라쯔메(衣通郞姬)와 인교우(允恭)의 장자  키나시노 카루(木梨輕)태자의 스캔들을 일본서기는 약간 각색하여 동모형제간의 근친상간으로 바꾸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넘보는 것이 형제간의 치정보다 더 금기시 된다는 의미이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사태를 깨닫게 되자 태자가 선수를 쳐서 아버지를 독살한다. 인교우(允恭) 24년의 독살기사에 이어 18년을 건너 뛴 다음 42년 천황의 사망기사가 나온다. 서기 453 1월 인교우 사망, 12 14일 아나호 (穴穗)황자가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를 제압하고 천황으로 즉위한다.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마치 신라가 야마토 천황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 사람들은 이 기록 그대로를 믿는다. 쯔쿠시(筑紫)의 안라라국(安羅羅國 = 穴穗國)왕 김무(金武)는 인교우(允恭)천황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사람이다. 신라의 의사를 불러 와 인교우(允恭)의 병을 고쳐 준 인연으로 인교우(允恭)는 김무(金武)를 아들처럼 대 하였다. 인교우(允恭)천황이 사망하자 쯔쿠시(筑紫) 주둔군 사령관, 신라의 장군 김무(金武)가 야마토에 문상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무는 천황 사망의 배후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김무는 문상객으로 위장한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토오쯔 아스카궁 (遠飛鳥宮)에 도착한다. 품 속에 무기를 감추고 구슬픈 장송곡을 연주하면서 상복을 차려 입은 신라의 군사들은 유유히 궁궐에 들어 온 것이다. 이들이 갑자기 군사로 돌변하여 천황 살해범 키나시노 카루(木梨輕) 태자를 응징하고 야마토를 장악한 뒤 인교우(允恭)의 후계자임을 선언한다. 나중 등장하는 유우랴쿠(雄略)가 이때 35세의 팔팔한 나이였으나 도덕성에서 김무에게 압도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인교우(允恭)가 야마토를 장악하자 인교우(允恭)를 닌토쿠(仁德)의 아들로 기록하듯, 김무도 인교우(允恭)의 아들 아나호(穴穗)황자로 기록되어 야마토의 황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만세일계를 자랑한다. 그로부터 3년 후 서기 456 8월 안코우(安康)가 살해되고 11 13일 유우랴쿠(雄略)가 하쯔세노 아사쿠라궁(泊瀨 朝倉宮)에서 즉위한다. 유랴쿠(雄略)는 인교우(允恭)의 친 아들이니 일본이 다시 고구려 세력이 된 것이다.

인교우 치세 서기 440년경부터 백제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의 책임자가 개로왕자였고 그는 당시 왜왕 제()로 행세하였다. 동정모인 55, 서복중이 66, 도평해북 95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송서의 기사가 이 때의 이야기이다. 일본열도의 변두리에서부터 백제의 탈환작전이 전개되고 열도에 두 명의 왕이 존재하게 된다. 서기 443년 왜왕 제()가 송에 견사,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받는다. 서기 451년 송은 다시 왜왕 제()에게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안동장군 왜국왕을 제수한다.

서기 453년 인교우(允恭)사망, 456년 안코우(安康)사망, 그리고 유우랴쿠(雄略)의 시대가 시작된다. 일본에서는 유우랴쿠(雄略)의 시대를 서기 457년 유우랴쿠(雄略) 원년, 서기 479년 유우랴쿠(雄略) 23년으로 기록한 일본서기를 믿고 있다. 일본서기는 유우랴쿠(雄略) 23년 간 왕위에 있었다고 조작하여 그 동안에 일어난 역사를 그의 치세에 일어 난 일처럼 만든 것이다.  

서기 455년 백제의 개로왕자는 백제 21대 개로왕으로 즉위한다. 일본서기 유우랴쿠 2년 추 7월 백제가 천황을 위하여 이케쯔히메 (池津媛)라는 여성을 보냈으나 이 여성이 천황을 싫어하고 이시카하노 타테(石川楯)라는 자와 눈이 맞아 천황이 격노하여 그 남녀를 불에 태워 죽였다.

백제신찬 (新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해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은 아레나코(阿禮奴跪)를 파견하여 여자를 구 하였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 챠쿠케이 에하시토(適稽女)을 착식(着飾)하여 제출(提出)하였다. 유우랴쿠(雄略)는 백제의 개로왕이 보낸 여자를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한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대동하고 일본 쿄우토(京都) 북부해안 미야즈 (宮津)에 상륙하여 질풍노도처럼 나라분지의 카쯔라기산 (葛城山)까지 밀고 들어 와 유우랴쿠(雄略)와 대치한다. 그는 일본의 방방곡곡의 지리에 밝은 사람이다. 서기 458년 일어난 일이다.

고사기 유우랴쿠 시대의 기록을 보자.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거대한 맷돼지가 나타났다. 천황이 활을 쏘자 맷돼지가 성을 내고 굉음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천황은 겁에 질려 개암나무 위로 뺑소니쳤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4년 추 8월 천황은 요시노미야 (吉野宮)에 가서 그 부근에서 사냥을 하려고 활을 준비하고 있는데 아부( = 등에)가 천황의 팔을 물었다. 그러자 아키즈(蜻蛉 = 잠자리)가 나타나 아부(등에)를 잡아 먹어 버렸다. 벌레마져도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이니 아키즈(蜻蛉)의 공적을 기려 야마토()란 이름을 아키즈 시마(蜻蛉嶋)로 바꾸노라. (多古牟良爾 阿牟加岐都岐 曾能阿牟袁 阿岐豆波夜具比 加久能碁登 那爾於波牟登 蘇良美都 夜麻登能久爾袁 阿岐豆志麻登布) 라는 시를 실었다.

위의 신화에서 아부는 유우랴쿠(雄略)의 이름, 유무(幼武)에 대응하고 아키즈로 표현된  세이네이(蜻蛉)는 세이네이(淸寧)와 동일한 발음으로 세이네이천황 (淸寧天皇) 즉 백제의 곤지를 의미한다. 서기 458년 유우랴쿠(雄略)는 곤지를 당하지 못하고 사로 잡힌다. 이리하여 곤지가 일본의 주인이 된다. 야마토의 이름이 아키즈시마 (蜻蛉嶋), 즉 곤지의 섬으로 바뀐다.

또 어느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모든 수행원들이 빨간 허리띠를 메고 파란 옷을 입었다. 그 때 건너 산에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복이나 모양이나 사람들이 천황의 행렬과 꼭 같았다. 거기서 천황이 “야마토에 나 말고 왕이 없는데 거기 가고 있는 것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는 모양도 천황과 똑 같았다. 그래서 천황은 크게 노하여 모두 활을 겨누자 저 쪽에서도 똑 같이 활을 겨누었다.

거기서 천황이 “이름을 대라. 이름이나 알고 싸우자”하니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알려주마. 나는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한 마디로 분별하여 말하는 카쯔라기(葛城)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 이다” 라 하니 천황이 겁에 질려 “알아 모시겠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신령님께서 현세(現世)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읍니다.”라 하며 대어도(大御刀)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 그러자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는 손을 치며 모든 물건을 받았다.

위의 구절을 서기 458년 유우랴쿠(雄略)가 백제의 개로왕과 곤지에게 제압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대어도(大御刀)는 천황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유우랴쿠(雄略)는 이후 퇴위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된다. 유우랴쿠(雄略)의 재위가 23년간이라고 기록되는 것은 역사의 표면에 백제가 드러나는 것을 덮기 위하여 고안된 장치이다. 신화와 역사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강은 넓고도 깊다.

서기 461년 백제의 카스리노키시 (加須利君) 개로왕은 동생인 코니키시(軍君)에게 “ 너는 일본에 들어가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 하였다.  곤지(昆支)는 “ 국왕의 명령을 따르겠읍니다. 다만 국왕의 부인 한 사람을 저와 동행시켜 주십시요”라고 대답하였다. 카스리노키시(加須利君)는 임신한 부인을 코니키시에게 맡기며 “ 이 부인은 이미 출산이 가깝다. 혹시 가는 도중 출산하면  어디서든 배에 태워 보내라” 이 부인이 바로 이히토요(飯豊)황녀였다 (구자일 설). 6월 카스리노키시 말데로 부인은 쯔쿠시(筑紫)의 카카라시마(各羅島, 현 加唐島)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세마키미(嶋君)라 지었다. 코니키시(軍君)는 가을 7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한다.

서기 461년 곤지의 야마토 입성을 가로막는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호토모노 무로야노 오호무라지 (大伴室屋大連)가 코니키시(軍君)를 맞아 들인다. 세이네이(淸寧)천황이 탄생하고 야마토는 다시 백제의 손에 들어 온 것이다.

같은 달 키비노카미쯔 미찌노 오미 (吉備上道臣)가 야마토의 내란의 소식을 듣고 호시카하 황자에게 가세하기 위하여 40척의 선단을 출발시켰으나 상황이 이미 끝난 것을 알고 철군하였다. 전편의 “62. 고구려산성 코우라산 코우고이시 (高良山神籠石)” 에서 키노죠우 (鬼の城, 오니노키라고도 읽는다)가 거론된 바 있는데 키비노 카미쯔 미찌노 오미 (吉備上道臣)는 오니노키(鬼の城)를 근거로 하는 세력이며 고구려에 충성스런 사람들이니 일본을 탈환하고 있는 백제세력과 전쟁이 불가피하다.

세이네이(淸寧)원년 춘정월 이하레(磐余, 奈良県井市・橿原市)의 미카쿠리궁 (甕栗宮)에서 즉위했다. 공로를 인정하여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를 오호무라지(大連),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眞鳥)를 오호오미(大臣)로 하여 군신들의 역직을 정하였다.
   
일본에서는 세이네이(淸寧) 원년을 서기 480년으로 친다. 왜냐하면 유우랴쿠가 서기 457 -  479년까지 23년간 재위한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우랴쿠의 시대를 457 458년의 2년 간으로 본다. 서기 461년 곤지가 야마토에 들어 와 세이네이(淸寧) 천황이 되었으며 세이네이(淸寧) 원년은 서기 461년이다. 따라서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기에 들어 있는 이후의 모든 역사적 사실은 세이네이(淸寧) 천황 시대에 생긴 일이 된다.

서기 462년 송서에 왜왕 제() 죽고 세자 흥( = 곤지 = 세이네이)을 세우다. ()이 송에 견사하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칭호를 받는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7년 추 7월 천황은 미모로노 오카 (三諸岳)의 귀신이 보고 싶으니 잡아 오라고 명한다. 신하가 미모로노 오카(三諸岳)에 올라가 큰 뱀을 잡아왔다. 그러나 천황이 몸을 청결하게 씻지 않았으므로 큰 뱀이 굉음을 지르며 눈을 번득였다. 천황은 눈을 마주 바라볼 수도 없어 안으로 피하고 뱀은 산으로 돌려 보냈다.

유우랴쿠(雄略) 7년이면 서기 463년으로 대강 알맞는 타이밍이다. 서기 458년 체포된 유우랴쿠(雄略)는 미에(三重)현 이가시(伊賀市)에 연금되었다. 서기 463년 야마토의 왕 곤지가 유우랴쿠(雄略)를 불러 근황을 물었다. 고구려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협조해 줄 수 있는지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우랴쿠(雄略)는“이 놈아! 날 죽여라” 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대화는 끊기고 유우랴쿠(雄略)는 다시 돌려 보내져 서기 479년까지 유배 상태로 있었다. 서기 479년 곤지와 시마왕이 일본을 떠날 때 그를 살해했을 것이다.

미모로노 오카의 귀신에 이어 유우랴쿠(雄略) 7 8월 키비노오미(吉備臣)의 모반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키비(吉備)의 오니노키(鬼の城)에 웅거하던 고구려 세력의 토벌작전이 전개되고 70인의 모반세력을 살해한다. 유우랴쿠(雄略)기에 기록된 키비노오미(吉備臣)의 모반이나 고구려와 신라와의 전란등의 기사는 모두 일본 내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잔당을 소탕하는 곤지의 전쟁기사이다. 신라출병 기사가 있고 여러 명의 야마토 장군들이 전쟁중 사망한다. 큐우슈우(九州)의 쯔쿠시(筑紫)와 쿠루메시 코우라산(久留米市 高良山)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고구려와 신라군이 소탕된다.

일본서기에 세이네이(淸寧)천황의 사적(事蹟)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것 또한 작위라고 보며, 실제로 그는 인교우(允恭), 안코우(安康), 유우랴쿠(雄略)시대를 청산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소탕작전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고분과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에서 출토된  와카타케루 대왕검 (獲加多支鹵大王劍)의 신해(辛亥)년이 서기 471년이라면 당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소탕작전을 전개한 천황은 세이네이(淸寧)였다.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多加利足尼其已加利獲居其名多加披次獲居其名多沙鬼獲居其名半比(表)其名加差披余其名乎獲居臣世々為杖刀人首奉事至今獲加多支鹵大王寺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事根原也(裏)

일본서기는 백제의 영향이 없었던 것처럼 기록하므로 많은 영향을 남긴 사람일 수록 사적을 감추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이네이(淸寧)야말로 야마토를 재건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0 (서기 475)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 와  7일간 밤 낮으로 왕성을 공격했다. 왕성은 함락되고 본거를 잃었다. 국왕과 황후, 황자들은 적에게 살해되었다.

야마토에 있던 곤지가 서기 477년 백제에 나왔다. 삼국사기 문주왕 3(서기 477) 4월 왕의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맏 아들 삼근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고 나온다. 곤지는 백제에 들어오기 전 시마왕을 왜무왕(倭武王)으로 삼고 야마토의 왕권을 넘겼다.

왜무왕(倭武王)이 서기477년 남송에 상표문을 올린 것이 이 때이다. 상표문의 내용은 온통 아버지 제() 즉 개로왕의 업적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다. 개로왕의 왕자들이 모두 사망한 지금 시마왕은 개로왕의 뒤를 이을 맏 아들이  된 것이다.

따라서 477년부터 왜무왕이 천황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백제와의 관련을 피하기 위하여 왜무왕은 아예 천황에서 제외되었다. 왜무왕을 계산하면 22대 세이네이(淸寧), 23대 왜무왕, 24대 이히토요황녀(飯豊皇女), 25대 켄조우(顯宗) 의 순으로 된다.

송서 순제 승명 (宋書 順帝 昇明) 1 (서기 477) 왜에서 사신이 와서 흥()이 죽고 동생 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는 스스로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을 칭하였다. 전사한 개로왕의 장자가 백제를 포함한 7국제군사를 자칭하는 것이니 별로 모순되는 요구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송서 순제 승명2(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거기서 백제에 대한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송 황제는 그를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6국제군사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六國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일본서기 유우랴쿠(雄略) 23 (서기 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하고 있던 곤지왕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말다왕(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쯔쿠시국(筑紫國)의 병사 5백 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24대 동성왕이다. 유우랴쿠(雄略) 23년이라 하나 세이네이(淸寧)천황 치세이며 그에게는 이 때가 가장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될 시기였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동년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백제도 전쟁물자를 보내 왔을 것이다. 거기서  쯔쿠시국(筑紫國)의 아찌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이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는 유일한 관련기록 이다. 서기 479년 세이네이(淸寧) 천황과 왜무왕이 위의 선단과 함께 열도에서 사라진다. 유우랴쿠를 죽이고 떠났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서 무었을 하였는지 모른다. 야마토는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유랴쿠(雄略) 22년 추 7월 타니하노 쿠니(丹波, 京都府北部・中部)의 요사노코호리(余社郡, 宮津市) 쯔쯔카하(管川)에 살던 미즈노에노 우라노 시마코 (瑞江浦嶋子)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중 거대한 거북을 낚았는데 거북이 여자로 변하였다.  우라노 시마코 (浦嶋子)는 그 여자가 맘에 들어 아내로 삼았다. 그리하여 함께 저편의 봉래산()을 찾아 선경(仙境)을 헤멨다.

위와 같은 몇 줄의 신화가 왜 유우랴쿠(雄略)기 마지막에 끼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기사를 작성했던 사람들은 분명히 뭔가 멧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신화를 남겼을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가  시마왕(斯麻王)이 서기 479년 고구려를 응징한다면서 아무 성과를 내지 못 한 것을 야유하는 기사라 읽는다. 우라노 시마코 (浦嶋子)라는 이름은 시마왕(斯麻王)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서기 479년 송에 보낸 상표문을 보면 뭔가 큰 일을 낼 것처럼 요란하였는데 아무 성과를 내지 못 한 것을 역사가들이 꼬집은 것이 아닐까.   -

) 이 글은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을 참조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 내용을 해석한 것입니다.

2009년 7월 3일 금요일

62. 高句麗山城 高良山神籠石


서기 1898 찌쿠고국(筑後) 코우라산 코우고이시(高良山神) 학계에 소개되면서 코우고이시()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코우라산(高良山)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 치쿠고강(筑後川) 남안 동서 방향으로 돌출한 미노우산지(耳納山地) 서단부 있다. 코우라산(高良山) 남측 1500미터에 걸쳐 1300개의 열석() 확인되었다. 북측에도 열석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확인된 없다. 高良山神 알려진 북부 큐우슈우에서 10개소, 세토나이(瀨戶內) 연안 6개소에 걸쳐 존재가 확인되었고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神籠石란 표고 200 – 400미터의 산 허리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한변이 대략 70 cm 정도의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배열한 것을 말한다. 골짜기에는 성벽을 쌓고 수문을 설치하였다. 高良山神籠石가 발견되고 나서 처음에는 신성한 영역(靈域)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후 발굴성과가 쌓여 가면서 산성(山城)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神籠石의 축조주체와 건설의 경위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주장이다.

대략 70 cm x 70 cm x 100 cm 규격으로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표고 200 – 400 미터의 산허리을 감싸, 山頂쪽으로 板築된 土壘를 설치하고 이 列石 바깥에 목책을 두른 것이 이 산성의 본래 모습이었다고 본다. 전쟁이 터지면 민간인과 군인이 모두 산 정상에 피신하여 적과 대치할 수 있도록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텐찌(天智)천황 때 산성(山城)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나와 있다. 백제 멸망 후 큐우슈우(九州)를 비롯한 여러 곳에 조선식산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神籠石에 관해서는 역사 기록이 없다. 神籠石가 조선식산성보다 시대적으로 앞 선다고 보나 누가, 언제, 왜 축조하였는지 모른다. 역사가들이 이러한 성을 쌓을 필요가 있을 만한 시대를 찾기 위하여 아무리 역사책을 더듬어 보아도 서기 527년의 이와이(磐井)의 난 이외에 九州에서 역사적 이벤트를 발견 할 수 없다. 역사에서 찾아지는 것이 없으니 이와이(磐井)에게서 설명을 구하려 하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현실이다.

九州의 이곳 저곳에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 10개소의 神籠石가 확인되는데 왜 일본의 역사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이 없을까? 이런 기록이 없는 것은 일본서기나 고사기가 객관성이 결여된 역사서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황실의 만세일계라는 신화를 위하여 역사서에 작위가 가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일본 고대사의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았다는 기록은 반 쯤 거짓이다. 천황가의 만세일계는 천황가에서 만든 신화일 뿐 인간세의 역사의 격류는 고대사의 천황만을 피해 가지 않는다. 천황의 재위기간도 작위가 많다. 일본서기의 단편적 기사는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 있으나 위의 천황의 혈통과 재위기간은 믿을 게 못 된다.

그 옛날 0.7 x 0.7 x 1 미터의 석재를 가공하여 표고 200 – 400미터의 산 허리까지 운반하여 산성을 쌓으려면 수 많은 인력과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대규모의 전쟁 행위가 역사에 빠져있다. 일본황실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이 기원전 660년부터 현재까지 만세일계로 내려 왔으니 아무도 황실에 도전하면 안 된다는 신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일본 역사서는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황실이 정복되었던 역사적 사실은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였다. 


코우라야마(高良山)는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에 있고 서쪽으로 뻗은 미노우산(耳納山)의 서쪽 끝 부분이다. 미노우 연산(耳納連山)의 서단에 위치한 코우라산(高良山)은 표고 312미터로 시내 어디서도 바라보이는 쿠루메시 (久留米市)의 심벌이며, 옛날에는 타카무레야마 (高牟禮山)라고 불렸다.


미노우 산지(耳納山地) 쯔쿠시평야(筑紫平野) 가운데에 위치하며 아리아케해(有明海)에서 치쿠고강(筑後川) 따라 북상하면 평야가 목처럼 좁아지는 부분에 반도상으로 돌출해 있다. 高良山神籠石 묻혀져 있는 선단부 부근, 히젠(肥前), 히고(肥後), 찌쿠젠(筑前), 후젠(豊前) 방면등 큐우슈우 각지 빠지는 교통로 근방을 통과해야 되는 전략적 요충이다. 거기에 찌쿠고강(筑後川) 끼고 있으니 하천 매개 하는 수상교통으로 보더라도 전략거점에 다름 아니다.



高良山 중턱에 高良大社 자리잡고 있고, 高良大社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高良玉垂命) 불리는 카미사마(神樣) 모신다. 高良大社 닌토쿠(仁德)천황 55 (서기 367) 또는78 (서기390) 진좌(鎭座), 리쮸우(履中)천황 원년 (서기400)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高良玉垂命神社” 기재되었고, 명신대사(名神大社) 지정된 찌쿠고국(筑後國) 1 ()이다. 제신(祭神)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高良玉垂命) 국내최고 신명장(神名帳)으로 알려진 “筑後國神名帳” 의하면 조정으로 부터 정일위(正一位) 수여되었다고 한다.


닌토쿠(仁德)천황은 313년부터 399년까지 8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초대천황 진무(神武)의 즉위를 기원전 660년으로 올리기 위하여 인교우(允恭)이전의 천황연대를 고무줄처럼 늘려 잡은 탓이다. 실제 닌토쿠(仁德)천황은 서기 397년 즉위하여 419년 전사할 때까지 22년간 왕위에 있었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사망 서기 394년은 정확한 기록이며 공위(空位)의 3년을 계산에 넣으면 닌토쿠 원년은 서기397년이 된다. 따라서 닌토쿠(仁德) 55년이나 78년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고 역사를 다루어야 되는 역사가들이 딱할 뿐이다. 그러므로 상기의 高良大社 유서내용(由緖內容) 가운데 닌토쿠(仁德)천황 또는 리쮸우(履中)천황의 시대는 취하나 서력에 해당되는 연도는 고구려, 백제, 유송의 기록과 일본서기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정한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란 역사상의 누구일까? 위의 高良大社 유서내용(由緖內容) 가운데 닌토쿠(仁德) 또는 리쮸우(履中) 천황의 시대가 인정된다면 5세기 초의 어느 때의 일이 된다. “玉垂”의 원래 일본어는 우즈(ウズ)이며 진귀하다는 뜻의 고어(古語)이다. 어느 특정인물의 이름 “珍”을 일본어로 우즈(ウズ)라 읽고, 우즈(ウズ)를 다시 한자로 玉垂라고 쓰고, 玉垂를 또 훈독하여 타마타레로 읽게 된 것이다. 서기 438년 송서(宋書)에 나오는 “倭王 珍”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서기 438년 倭王 珍은 야마토의 주인이 되어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의 遠飛鳥宮에 군림하게 되나 지금 우리는 九州 福岡縣 久留米市 高良山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서기 410년 경의 역사를 더듬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을 따라가 보자. 서기 400년 영락10년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비병… 농성 왜구.. 성을 쳐부시고 ….안라인 수비병……….…쳐부시고……안라인 수비병.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서기 404년 영락14년,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서기 407년 영락17년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佳城,○○○○○○, 나○성 등을 다시 깨트렸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가장 요긴한 대목에서 해독불가한 글자가 너무 많아 안타깝다. 서기 400 기사를 보면 고구려군은 임나가라국 종발성까지 쫒아 가는데 종발성이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대강 현재의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이 있는 지역 또는 김해시의 가락국 왕궁이 있던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

  
서기 404 야마토의 仁德천황은 야마토의 군대를 파견하여 아신왕의 백제군과 연합작전으로 대방땅을 공격한다. 仁德천황과 아신왕은 근구수(應神王) 아들로 형제간이다. 서기 407 고구려의 응징이 따르는데 서기 400 정벌한  한반도를 넘어 큐유슈유(九州)로 작전지역이 확대된다. 고구려는 대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일거에 장악하는 작전을 쓰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왕자 한 사람을 파견하여 열도를 점차적으로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 임무를 받고 큐우슈우에 들어 온 왕자가 진()이었고 쿠루메시(久留米市) 코우라산(高良山) 중턱에 고구려의 전초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곳에 지금 코우라 대사 (高良大社) 자리잡고 있다.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였고 코우라야마(高良山)는 고구려군의 비상시를 대비한 산성이 된다. 야마토를 정복 할 때까지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이다. 광개토대왕의 왕자 高珍은 서기 410년경 久留米市 高良山에 들어 왔을 것이다. 실제 仁德 14년인 셈이나 일본서기의 셈법으로 헤아리면 反正5년으로 표기된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가 高良山의 高良大社에 鎭座한 것이 바로 서기 410년, 仁德 14년이었다.

서기 412년 영락 22년 10월 광개토대왕이 나이 39세로 사망한다. 서기 414년 9월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진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는 이때 고구려에 들어가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417년 경 쿠루메시(久留米市)에 돌아왔다.

일본서기 仁德 12년 (서기 417) 7월 고구려가 철로 만든 방패와 표적을 보내왔다. 8 월 고구려의 사자를 환대했다. 오하쯔세노 미야쯔코(小泊瀨造)의 祖先의 스쿠네노오미(宿禰臣)를 천황은 사카노코리노 오미(賢遺臣)라 불렀다. 무심하게 기록된 이 부분을 주의깊게 살펴야 된다. 인교우(允恭) 천황의 시호가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으로 宿禰天皇이기 때문이다. 고진(高珍)이란 이름의 고구려군 사령관이 직접 야마토의 닌코쿠(仁德)천황을 찾아와 고구려의 무기를 과시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14 (서기 419) 천황이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사냥하였다. 사슴, 원숭이, 멧돼지가 여기저기 흘러 넘치도록 많이 있는데도 파리처럼 잽싸게 도망가며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점을 보니 섬을 지키는 귀신의 심술 때문임을 알았다. 아카시(赤石, 兵庫縣明石市) 바닷속에 진주가 있는데 진주를 갖다 바치면 짐승을 잡을 있도록 하겠다는 신탁을 얻었다. 여기저기서 아마(海人) 모아 赤石 해저로 내려 보냈으나 수심이 깊어 아무도 바닥까지 잠수하지 하였다. 그러자 아하노쿠니(阿波国) 나가노무라(長邑) 사는 오사시(男狭磯) 아마(海人) 허리에 줄을 감고 잠수하였다. 한참만에 나온 그는해저에 커다란 전복이 있는데 뭔가 빛을 발하고 있다 보고했다. 오사시(男狭磯) 다시 잠수하여 전복을 안고 나왔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전복을 쪼개자 뱃속에서 복숭아씨와 같은 커다란 진주가 나와, 진주를 신에게 바치고 많은 짐승을 사냥하였다. 또한 오사시(男狭磯) 희생을 슬퍼하여 묘를 만들어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묘는 지금도 있다고 전한다. 사카이() 거대한 仁德천황릉을 연상하면 된다.

위의 기사를 우리는 仁德천황의 사망기사로 이해한다. 仁德천황의 이름은 오호사자키(大鷦鷯)인데 윗 기사는 오사시 (男狭磯)의 사망을 전한다.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호사자키(大鷦鷯)가 전사하고 야마토는 패배하였으나 고구려군은 야마토로 진격하지 못 하고 九州로 퇴각한다. 이번 전쟁에서 사카노코리노 오미(賢遺臣)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고 본다.

고구려의 왕자 高珍은 이때부터 병석에 누워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이 때 高珍이 머문 곳이 현 高良大社이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가 高良山의 高良大社에 진좌하여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군은 쿠루메(久留米)로 퇴각하여 사령관이 완치될 때까지 공격에서 수비로 작전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백제와 킨키(近畿)의 야마토로부터 언제 반격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고구려군은 만주에서부터 자기들의 장기(長技)인 산성축성에 들어간다.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랴오닝성 본계시 환런의 오녀산성(五女山城) 사진을 보면 고구려인들이 九州에서 무슨 대비를 할 지 감이 잡힌다. 고구려가 개국초기 자기보다 강한 적을 예상할 때 그들은 산 정상에 피난처를 마련하였다. 九州에 집중되어 있고 세토나이 (瀨戶內)의 전략적 요충에 고구려의 산성이 건설된다.


일본서기 인교우기(允恭紀)를 인용한다. 오아사즈 마와쿠고노 스쿠네 (雄朝津間稚子宿禰) 천(第19代允恭天皇)은 한제이 천황 (反正天皇)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천황은 어려서부터 소극적이었다. 어른이 된 뒤에 큰 병을 앓았던 일도 있어 별로 활동적이지 못 했다. 한제이(反正) 5년 봄 1월 한제이(反正)천황이 사망했다.


돌연 붕어 호족들이 당황하여, 닌토쿠(仁徳)천황의 아들, 오아사즈마 (雄朝津間) 황자 오호쿠사카 (大草香) 황자 사람가운데 조용한 성격의 雄朝津間 皇子 나으리라고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길일을 골라 그에게 나아가 즉위를 구하였으나 雄朝津間 皇子 사양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중병을 앓아 걸어 다니는 마저 들어. 누구에게도 처참한 치료도 보았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그것이 부왕 (仁徳天皇)에게 알려져, 치료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의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해서야 설사 오래 산다 하더라도 중책을 맡기겠느냐?하고 질책받은 일도 있다. 천황 형님 두분도 내게 아무 대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내막은 호족들도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호족들이 다시 엎드려천황 없어서는 인민 다스려 지지 않읍니다.하며 간원했으나 雄朝津間 황자 다시병인(病人)에게는 무리라며 고사했다.


원년(元年) 겨울 12월 비() 오시사카 오호 나카쯔 히메 (忍坂大中姫, 백제 아신왕의 )가 호족들의 곤혹스러워 함을 알고, 물이 그릇을 황자에게 당신이 즉위하지 않으니, 들이 당황해 하고 있읍니다.라고 말을 붙여 보았으나 황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돌아 보지도 않았다. 大中姫命 난처한 나머지, 잠시동안 그냥 있었다. 겨울이라 거센 바람에, 들고 있던 용기의 물이 넘쳐, 정도의 추위속에서 大中姫命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황자 놀라서 일으켜 세우며즉위 중대사이므로 지금까지 거절했으나 족들의 바램이 진지하니 이상 사양하지 않겠다 하였다. 大中姫命 기뻐하며 호족들에게 궁에 모이도록 전했다. 이렇게 하여 雄朝津間 황자는서기 432 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3 춘정월 사자를 신라에 파견하여 의사를 구하였다. 가을 8 신라에서 의사가 천황을 진찰하였다. 병이 나아 천황은 의사를 후하게 사례하여 귀국시켰다고 나오는 것이 允恭천황의 병과 관련된 내용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동맹국이므로 자국의 군대를 九州 파견하고 있었다.


후쿠오카시(福岡市) 사와라구(早良區) 있다. 무로미강 (室見川) 이라는 실개천의 동안(東岸)이다. 실개천 무로미강 (室見川) 따라 올라가면 카나타케시(金武市) 나오고 근처에 요시타케 타카키(吉武高木)유적이 있다. 천손강림의 전설의 고개 히무쿠토우케 (日向峙) 부근이다. 사와라(早良) 신라(新羅)에서 말이며 카나타케(金武) 김무(金武) 신라군의 사령관의 이름이다. 고구려군의 동맹군으로 九州 상륙하여 카나타케시(金武市) 주둔하였다.


서기 419 부상으로 쓰러진 고구려군 총사령관 高珍 병상에서 여러 해를 보낸다. 고구려 최고의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신의 가호를 빌었으나 사령관은 완쾌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에 급히 고구려식 산성이 축조된다. 산성의 흔적을 지금 코우고이시()라고 부르고 있다. 처음 발견될 영역설(域說) 연상하였던 학자들이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코우고이시 () 카미사마 (神樣) 강림하여 앉을 있도록 마련된 이와쿠라(磐座)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소위 () 들어 박힌 돌이다.


서기 428년경 신라군의 김무(金武) 신라에서 명의를 사람 데려 온다.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신라에서 의사가 오고나서 고진(高珍) 병이 나은 같다. 金武 이후 高珍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金武城 安羅羅國王으로 진다. 福岡市 전체가 金武 安羅羅國이다. 安羅羅國 이때 고구려의 가장 가까운 맹방인 것이다. 신라군의 金武 允恭 다음에 등장하는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즉위를 둘러 ()치레 이야기의 진상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다. 당시의 진실과 일본서기 기록의 의미에는 지대한 편차가 존재한다.


일본서기에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천황이 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리쮸우(履中)天皇, 한제이(反正)天皇, 인교우(允恭)天皇 3명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 났다고 되어 있다. 리쮸우(履中) 닌토쿠(仁德) 아들이 맞고, 한제이(反正)는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 아들이다. 인교우(允恭)天皇 고구려의 왕자 高珍으로 야마토를 정복한 적장(敵將)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만들어 만세일계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高珍이 야마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전쟁행위가 모두 역사기록에서 제외된다. 천황가의 만세일계 그리고 영원한 군림만이 천황가의 목표였고 이를 위한 심모원려가 일본서기였다. 이런 역사서를 기본으로 고대사를 연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학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천황가의 역사조작은 치밀하고 완벽하여 지금까지 아무도 일본열도의 神籠石가 고구려의 유물이라고 생각 해 보지 않았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28 (서기 429)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상표문에고구려의 , 야마토국를 지도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 격노하여 고구려의 사자를 야단치고 상표문을 찢어 버렸다고 나온다. 우리는 기사가 서기 429 高珍 건강을 회복하고 야마토에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으로 본다. 당시 야마토의 천황이란 한제이(反正) 말한다. 태자 兎道稚郞子 이미 고인이었고 反正천황은 兎道稚郞子 아들이니 일본서기 저자가 착각한 같다.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한 反正천황은 미야즈로 도망간다. 서기 432 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高珍 19 인교우(允恭)천황으로 즉위한다. 일본서기는 그가 닌토쿠(仁德)천황의 셋째 아들이라 기록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神籠石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코우라산 (高良山): 福岡県久留米市 高良山 南側의 約1500미터에 걸쳐 約1300個의 列石이 確認되었다. 北側에도 돌이 있었다고 推定하나 確認된 바 없다. 이 부분은 日本書紀에도 기록된 天武7年12月(서기 679)筑紫의 大地震으로 崩壊되었다고 생각된다.

2. 조야마 (女山): 福岡県미야마市瀬高町女山에 있다. 가까운 高田町의 竹飯의 山에서 1미터 内外의 長方形의 石을, 잘라내서, 山위로 날라 총 3킬로 가까이 整然하게 나열하였다.

3. 오쯔보산 (おつぼ山): 佐賀県武雄市橘町에 있다. 昭和39年調査에서 列石의背後에 版築에 의하여 축조된 土塁가 存在하며, 또 列石의 全面에 3 미터 間隔으로 堀立柱의 痕跡이 발견되어 山城임이 確定的으로 되었다.

4. 라이잔 (雷山): 福岡県前原市의 雷山(標高955m)의 北中腹, 標高400 – 480 미터의 山中에 축조된 고대산성이다. 城의 範囲는 東西300m, 南北700m정도로 생각된다. 여기서 糸島地方은 물론 博多湾이나 玄界灘까지 일망무제로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5. 고쇼가타니 (御所ヶ谷): 福岡県行橋市西南部와 京都郡勝山町, 犀川町가 境界를 接하는 山塊에 位置하며, 그 대부분이 유쿠하시시 (行橋市) 側의 南斜面에 있다. 列石東端部에 있는 標高 247m의 호토기산(ホトギ山)을 最高所로 하여, 그 延長은 約3km에 달한다. 土塁는 높이 約5m、幅 約7m로 質이 다른 흙을 版築工法에 의하여 쌓아 올렸다.

6. 카케노우마 (鹿毛馬): 福岡県嘉穂郡頴田町에 있다. 서기 1997년까지의 調査 結果, 水門部(西側谷部分)에2개의 暗渠와 版築에 의한 土塁의 모양이 알려졌다. 이번 調査에서 土塁中에 直径45cm의 기둥(柱)이 발견되고, 약 3m 間隔으로 8本을 나열한 것이 確認되었다. 以前부터 確認된 바 있는 約3m 間隔으로 列石前에 설치된 直径 約30cm의 기둥과 今回 発見된 土塁中의 기둥을 組合하여, 다시 板材를 써서, 列石을 基礎로 설치된 土塁를 축조했다고 생각된다. 土塁中의 柱列의 存在는, 古代의 版築이라는 土木技術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暗渠는 모두 全長約 18m 規模로, 土塁幅 約9m, 柱의 間隔3m를 단위로 하는 工事의 規格性이 엿 보인다.

7. 하키 (杷木): 福岡県朝倉市杷木地区에 있다. 神籠石은 長尾城과 우노기죠우 (鵜木城)를 둘러 쌓듯 약 2km에 걸쳐 縦横70 cm정도의 큰 돌을 이어놓고 土塁를 쌓았다. 2 곳에 水門이 보이고, 옛날의 土木工事가 나무랄 데 없었음을 보여준다.

8. 이와키산 (石城山): 山口県熊毛郡大和町에 있다. 서기 1909년 秋 発見되었다. 당시까지 九州이외에는 存在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던 神籠石의 遺跡이 本州에서도 発見되었으므로, 考古学界의 注目을 받았다. 列石線은 南側鶴ヶ峰부근標高342m를 정점으로 下向하여, 石城五峰(高日ヶ峰・星ヶ峰・鶴ヶ峰・築ヶ峰・大峰)을 둘러 싸고, 下部는 北水門의 標高 約268m까지 내려온다. 列石線의 総延長은 2533m에 이르는 大規模의 것이다. 列石線이 골짜기를 건너지른 곳에는 높은 돌담 벽을 쌓고, 그 중앙부에 수문을 설치하였다.

9. 키노죠우 (鬼の城, 오니노키라고도 읽는다): 岡山県 소우샤 (総社) 市에 있다. 壁은 要所에 높은 돌담을 쌓아 연결하기도 하며 強固한 土塁를2 .8 Km정도 둘러 쌓았다. 城壁은 幅 約7m, 높이 約6m, 外・内側에 평평한 돌이 1.5 m幅으로 깔려있다. 城壁이 골짜기 부분에 水門이 설치되어 있다. 現在6개소 確認되었고, 모두 하반부는 돌담, 상부는 土塁의 構造이다. 이 水門은 城内의 물을 管理하기 위한 排水口이다.

城門은 東西南北의 4 개소에 있고, 모두 通路部分에 바닥돌이 깔려있다. 西門 南門은 거의 같은 規模의 門으로, 12本의 기둥으로 지지된 楼門으로 생각된다. 西門부근에는 角楼라 불리는 防御施設이 있다. 城内는30 ha에 달하는 넓이이며, 城庫로 보이는 礎石建物跡도 6 -7棟 発見되었다. 여러 神籠石遺跡 가운데서도 중요도가 높은 城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오부쿠마 (帯隈): 佐賀市 北部山麓에 있는 오부쿠마야마 (帯隈山) 에 축조된 古代山城의 흔적이다. 서기 1941년 発見되고, 1964년 発掘調査되었다. 切石을 연결한 列石線은 北側山頂部에서 내려와 南側山 기슰을 돌아, 말굽쇠 형상을 하고 있다. 돌은 花崗岩으로, 높이 60센티 정도의 直方体로 절단하여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