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3일 금요일

62. 高句麗山城 高良山神籠石


서기 1898 찌쿠고국(筑後) 코우라산 코우고이시(高良山神) 학계에 소개되면서 코우고이시() 존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코우라산(高良山)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 치쿠고강(筑後川) 남안 동서 방향으로 돌출한 미노우산지(耳納山地) 서단부 있다. 코우라산(高良山) 남측 1500미터에 걸쳐 1300개의 열석() 확인되었다. 북측에도 열석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확인된 없다. 高良山神 알려진 북부 큐우슈우에서 10개소, 세토나이(瀨戶內) 연안 6개소에 걸쳐 존재가 확인되었고 앞으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神籠石란 표고 200 – 400미터의 산 허리에 수 킬로미터에 걸쳐 한변이 대략 70 cm 정도의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배열한 것을 말한다. 골짜기에는 성벽을 쌓고 수문을 설치하였다. 高良山神籠石가 발견되고 나서 처음에는 신성한 영역(靈域)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았으나 그후 발굴성과가 쌓여 가면서 산성(山城)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神籠石의 축조주체와 건설의 경위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주장이다.

대략 70 cm x 70 cm x 100 cm 규격으로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표고 200 – 400 미터의 산허리을 감싸, 山頂쪽으로 板築된 土壘를 설치하고 이 列石 바깥에 목책을 두른 것이 이 산성의 본래 모습이었다고 본다. 전쟁이 터지면 민간인과 군인이 모두 산 정상에 피신하여 적과 대치할 수 있도록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텐찌(天智)천황 때 산성(山城)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나와 있다. 백제 멸망 후 큐우슈우(九州)를 비롯한 여러 곳에 조선식산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神籠石에 관해서는 역사 기록이 없다. 神籠石가 조선식산성보다 시대적으로 앞 선다고 보나 누가, 언제, 왜 축조하였는지 모른다. 역사가들이 이러한 성을 쌓을 필요가 있을 만한 시대를 찾기 위하여 아무리 역사책을 더듬어 보아도 서기 527년의 이와이(磐井)의 난 이외에 九州에서 역사적 이벤트를 발견 할 수 없다. 역사에서 찾아지는 것이 없으니 이와이(磐井)에게서 설명을 구하려 하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현실이다.

九州의 이곳 저곳에 현재까지 발견된 것만 10개소의 神籠石가 확인되는데 왜 일본의 역사에는 그와 관련된 기록이 없을까? 이런 기록이 없는 것은 일본서기나 고사기가 객관성이 결여된 역사서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황실의 만세일계라는 신화를 위하여 역사서에 작위가 가해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일본 고대사의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았다는 기록은 반 쯤 거짓이다. 천황가의 만세일계는 천황가에서 만든 신화일 뿐 인간세의 역사의 격류는 고대사의 천황만을 피해 가지 않는다. 천황의 재위기간도 작위가 많다. 일본서기의 단편적 기사는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 있으나 위의 천황의 혈통과 재위기간은 믿을 게 못 된다.

그 옛날 0.7 x 0.7 x 1 미터의 석재를 가공하여 표고 200 – 400미터의 산 허리까지 운반하여 산성을 쌓으려면 수 많은 인력과 물자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대규모의 전쟁 행위가 역사에 빠져있다. 일본황실은 한번도 바뀐 적이 없이 기원전 660년부터 현재까지 만세일계로 내려 왔으니 아무도 황실에 도전하면 안 된다는 신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일본 역사서는 A가 B를 낳고 B가 C를 낳고 C가 D를 낳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황실이 정복되었던 역사적 사실은 없었던 것처럼 무시하였다. 


코우라야마(高良山)는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에 있고 서쪽으로 뻗은 미노우산(耳納山)의 서쪽 끝 부분이다. 미노우 연산(耳納連山)의 서단에 위치한 코우라산(高良山)은 표고 312미터로 시내 어디서도 바라보이는 쿠루메시 (久留米市)의 심벌이며, 옛날에는 타카무레야마 (高牟禮山)라고 불렸다.


미노우 산지(耳納山地) 쯔쿠시평야(筑紫平野) 가운데에 위치하며 아리아케해(有明海)에서 치쿠고강(筑後川) 따라 북상하면 평야가 목처럼 좁아지는 부분에 반도상으로 돌출해 있다. 高良山神籠石 묻혀져 있는 선단부 부근, 히젠(肥前), 히고(肥後), 찌쿠젠(筑前), 후젠(豊前) 방면등 큐우슈우 각지 빠지는 교통로 근방을 통과해야 되는 전략적 요충이다. 거기에 찌쿠고강(筑後川) 끼고 있으니 하천 매개 하는 수상교통으로 보더라도 전략거점에 다름 아니다.



高良山 중턱에 高良大社 자리잡고 있고, 高良大社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高良玉垂命) 불리는 카미사마(神樣) 모신다. 高良大社 닌토쿠(仁德)천황 55 (서기 367) 또는78 (서기390) 진좌(鎭座), 리쮸우(履中)천황 원년 (서기400)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연희식신명장(延喜式神名帳)에는 “高良玉垂命神社” 기재되었고, 명신대사(名神大社) 지정된 찌쿠고국(筑後國) 1 ()이다. 제신(祭神)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高良玉垂命) 국내최고 신명장(神名帳)으로 알려진 “筑後國神名帳” 의하면 조정으로 부터 정일위(正一位) 수여되었다고 한다.


닌토쿠(仁德)천황은 313년부터 399년까지 8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초대천황 진무(神武)의 즉위를 기원전 660년으로 올리기 위하여 인교우(允恭)이전의 천황연대를 고무줄처럼 늘려 잡은 탓이다. 실제 닌토쿠(仁德)천황은 서기 397년 즉위하여 419년 전사할 때까지 22년간 왕위에 있었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사망 서기 394년은 정확한 기록이며 공위(空位)의 3년을 계산에 넣으면 닌토쿠 원년은 서기397년이 된다. 따라서 닌토쿠(仁德) 55년이나 78년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고 역사를 다루어야 되는 역사가들이 딱할 뿐이다. 그러므로 상기의 高良大社 유서내용(由緖內容) 가운데 닌토쿠(仁德)천황 또는 리쮸우(履中)천황의 시대는 취하나 서력에 해당되는 연도는 고구려, 백제, 유송의 기록과 일본서기 기록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정한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란 역사상의 누구일까? 위의 高良大社 유서내용(由緖內容) 가운데 닌토쿠(仁德) 또는 리쮸우(履中) 천황의 시대가 인정된다면 5세기 초의 어느 때의 일이 된다. “玉垂”의 원래 일본어는 우즈(ウズ)이며 진귀하다는 뜻의 고어(古語)이다. 어느 특정인물의 이름 “珍”을 일본어로 우즈(ウズ)라 읽고, 우즈(ウズ)를 다시 한자로 玉垂라고 쓰고, 玉垂를 또 훈독하여 타마타레로 읽게 된 것이다. 서기 438년 송서(宋書)에 나오는 “倭王 珍”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서기 438년 倭王 珍은 야마토의 주인이 되어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의 遠飛鳥宮에 군림하게 되나 지금 우리는 九州 福岡縣 久留米市 高良山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서기 410년 경의 역사를 더듬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을 따라가 보자. 서기 400년 영락10년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국의 종발성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비병… 농성 왜구.. 성을 쳐부시고 ….안라인 수비병……….…쳐부시고……안라인 수비병.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서기 404년 영락14년,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 ○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서기 407년 영락17년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佳城,○○○○○○, 나○성 등을 다시 깨트렸다.

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가장 요긴한 대목에서 해독불가한 글자가 너무 많아 안타깝다. 서기 400 기사를 보면 고구려군은 임나가라국 종발성까지 쫒아 가는데 종발성이 현재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대강 현재의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이 있는 지역 또는 김해시의 가락국 왕궁이 있던 지역일 가능성이 많다.

  
서기 404 야마토의 仁德천황은 야마토의 군대를 파견하여 아신왕의 백제군과 연합작전으로 대방땅을 공격한다. 仁德천황과 아신왕은 근구수(應神王) 아들로 형제간이다. 서기 407 고구려의 응징이 따르는데 서기 400 정벌한  한반도를 넘어 큐유슈유(九州)로 작전지역이 확대된다. 고구려는 대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일거에 장악하는 작전을 쓰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왕자 한 사람을 파견하여 열도를 점차적으로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 임무를 받고 큐우슈우에 들어 온 왕자가 진()이었고 쿠루메시(久留米市) 코우라산(高良山) 중턱에 고구려의 전초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곳에 지금 코우라 대사 (高良大社) 자리잡고 있다.

후쿠오카현(福岡縣) 쿠루메시(久留米市)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였고 코우라야마(高良山)는 고구려군의 비상시를 대비한 산성이 된다. 야마토를 정복 할 때까지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이다. 광개토대왕의 왕자 高珍은 서기 410년경 久留米市 高良山에 들어 왔을 것이다. 실제 仁德 14년인 셈이나 일본서기의 셈법으로 헤아리면 反正5년으로 표기된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가 高良山의 高良大社에 鎭座한 것이 바로 서기 410년, 仁德 14년이었다.

서기 412년 영락 22년 10월 광개토대왕이 나이 39세로 사망한다. 서기 414년 9월 광개토대왕비가 세워진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는 이때 고구려에 들어가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417년 경 쿠루메시(久留米市)에 돌아왔다.

일본서기 仁德 12년 (서기 417) 7월 고구려가 철로 만든 방패와 표적을 보내왔다. 8 월 고구려의 사자를 환대했다. 오하쯔세노 미야쯔코(小泊瀨造)의 祖先의 스쿠네노오미(宿禰臣)를 천황은 사카노코리노 오미(賢遺臣)라 불렀다. 무심하게 기록된 이 부분을 주의깊게 살펴야 된다. 인교우(允恭) 천황의 시호가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으로 宿禰天皇이기 때문이다. 고진(高珍)이란 이름의 고구려군 사령관이 직접 야마토의 닌코쿠(仁德)천황을 찾아와 고구려의 무기를 과시하면서 항복할 것을 권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14 (서기 419) 천황이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사냥하였다. 사슴, 원숭이, 멧돼지가 여기저기 흘러 넘치도록 많이 있는데도 파리처럼 잽싸게 도망가며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점을 보니 섬을 지키는 귀신의 심술 때문임을 알았다. 아카시(赤石, 兵庫縣明石市) 바닷속에 진주가 있는데 진주를 갖다 바치면 짐승을 잡을 있도록 하겠다는 신탁을 얻었다. 여기저기서 아마(海人) 모아 赤石 해저로 내려 보냈으나 수심이 깊어 아무도 바닥까지 잠수하지 하였다. 그러자 아하노쿠니(阿波国) 나가노무라(長邑) 사는 오사시(男狭磯) 아마(海人) 허리에 줄을 감고 잠수하였다. 한참만에 나온 그는해저에 커다란 전복이 있는데 뭔가 빛을 발하고 있다 보고했다. 오사시(男狭磯) 다시 잠수하여 전복을 안고 나왔으나 그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전복을 쪼개자 뱃속에서 복숭아씨와 같은 커다란 진주가 나와, 진주를 신에게 바치고 많은 짐승을 사냥하였다. 또한 오사시(男狭磯) 희생을 슬퍼하여 묘를 만들어 정중하게 매장하였다. 묘는 지금도 있다고 전한다. 사카이() 거대한 仁德천황릉을 연상하면 된다.

위의 기사를 우리는 仁德천황의 사망기사로 이해한다. 仁德천황의 이름은 오호사자키(大鷦鷯)인데 윗 기사는 오사시 (男狭磯)의 사망을 전한다. 아와지시마(淡路嶋)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오호사자키(大鷦鷯)가 전사하고 야마토는 패배하였으나 고구려군은 야마토로 진격하지 못 하고 九州로 퇴각한다. 이번 전쟁에서 사카노코리노 오미(賢遺臣)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고 본다.

고구려의 왕자 高珍은 이때부터 병석에 누워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이 때 高珍이 머문 곳이 현 高良大社이다.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가 高良山의 高良大社에 진좌하여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군은 쿠루메(久留米)로 퇴각하여 사령관이 완치될 때까지 공격에서 수비로 작전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백제와 킨키(近畿)의 야마토로부터 언제 반격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고구려군은 만주에서부터 자기들의 장기(長技)인 산성축성에 들어간다.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랴오닝성 본계시 환런의 오녀산성(五女山城) 사진을 보면 고구려인들이 九州에서 무슨 대비를 할 지 감이 잡힌다. 고구려가 개국초기 자기보다 강한 적을 예상할 때 그들은 산 정상에 피난처를 마련하였다. 九州에 집중되어 있고 세토나이 (瀨戶內)의 전략적 요충에 고구려의 산성이 건설된다.


일본서기 인교우기(允恭紀)를 인용한다. 오아사즈 마와쿠고노 스쿠네 (雄朝津間稚子宿禰) 천(第19代允恭天皇)은 한제이 천황 (反正天皇)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천황은 어려서부터 소극적이었다. 어른이 된 뒤에 큰 병을 앓았던 일도 있어 별로 활동적이지 못 했다. 한제이(反正) 5년 봄 1월 한제이(反正)천황이 사망했다.


돌연 붕어 호족들이 당황하여, 닌토쿠(仁徳)천황의 아들, 오아사즈마 (雄朝津間) 황자 오호쿠사카 (大草香) 황자 사람가운데 조용한 성격의 雄朝津間 皇子 나으리라고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길일을 골라 그에게 나아가 즉위를 구하였으나 雄朝津間 皇子 사양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중병을 앓아 걸어 다니는 마저 들어. 누구에게도 처참한 치료도 보았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그것이 부왕 (仁徳天皇)에게 알려져, 치료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자기의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해서야 설사 오래 산다 하더라도 중책을 맡기겠느냐?하고 질책받은 일도 있다. 천황 형님 두분도 내게 아무 대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내막은 호족들도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호족들이 다시 엎드려천황 없어서는 인민 다스려 지지 않읍니다.하며 간원했으나 雄朝津間 황자 다시병인(病人)에게는 무리라며 고사했다.


원년(元年) 겨울 12월 비() 오시사카 오호 나카쯔 히메 (忍坂大中姫, 백제 아신왕의 )가 호족들의 곤혹스러워 함을 알고, 물이 그릇을 황자에게 당신이 즉위하지 않으니, 들이 당황해 하고 있읍니다.라고 말을 붙여 보았으나 황자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돌아 보지도 않았다. 大中姫命 난처한 나머지, 잠시동안 그냥 있었다. 겨울이라 거센 바람에, 들고 있던 용기의 물이 넘쳐, 정도의 추위속에서 大中姫命 결국 실신하고 말았다.


황자 놀라서 일으켜 세우며즉위 중대사이므로 지금까지 거절했으나 족들의 바램이 진지하니 이상 사양하지 않겠다 하였다. 大中姫命 기뻐하며 호족들에게 궁에 모이도록 전했다. 이렇게 하여 雄朝津間 황자는서기 432 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 3 춘정월 사자를 신라에 파견하여 의사를 구하였다. 가을 8 신라에서 의사가 천황을 진찰하였다. 병이 나아 천황은 의사를 후하게 사례하여 귀국시켰다고 나오는 것이 允恭천황의 병과 관련된 내용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동맹국이므로 자국의 군대를 九州 파견하고 있었다.


후쿠오카시(福岡市) 사와라구(早良區) 있다. 무로미강 (室見川) 이라는 실개천의 동안(東岸)이다. 실개천 무로미강 (室見川) 따라 올라가면 카나타케시(金武市) 나오고 근처에 요시타케 타카키(吉武高木)유적이 있다. 천손강림의 전설의 고개 히무쿠토우케 (日向峙) 부근이다. 사와라(早良) 신라(新羅)에서 말이며 카나타케(金武) 김무(金武) 신라군의 사령관의 이름이다. 고구려군의 동맹군으로 九州 상륙하여 카나타케시(金武市) 주둔하였다.


서기 419 부상으로 쓰러진 고구려군 총사령관 高珍 병상에서 여러 해를 보낸다. 고구려 최고의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신의 가호를 빌었으나 사령관은 완쾌되지 않았다.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에 급히 고구려식 산성이 축조된다. 산성의 흔적을 지금 코우고이시()라고 부르고 있다. 처음 발견될 영역설(域說) 연상하였던 학자들이 엉뚱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코우고이시 () 카미사마 (神樣) 강림하여 앉을 있도록 마련된 이와쿠라(磐座)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하다. 소위 () 들어 박힌 돌이다.


서기 428년경 신라군의 김무(金武) 신라에서 명의를 사람 데려 온다. 일본서기의 기록대로라면 신라에서 의사가 오고나서 고진(高珍) 병이 나은 같다. 金武 이후 高珍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金武城 安羅羅國王으로 진다. 福岡市 전체가 金武 安羅羅國이다. 安羅羅國 이때 고구려의 가장 가까운 맹방인 것이다. 신라군의 金武 允恭 다음에 등장하는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일본서기 인교우(允恭)즉위를 둘러 ()치레 이야기의 진상은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다. 당시의 진실과 일본서기 기록의 의미에는 지대한 편차가 존재한다.


일본서기에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천황이 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리쮸우(履中)天皇, 한제이(反正)天皇, 인교우(允恭)天皇 3명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 났다고 되어 있다. 리쮸우(履中) 닌토쿠(仁德) 아들이 맞고, 한제이(反正)는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 아들이다. 인교우(允恭)天皇 고구려의 왕자 高珍으로 야마토를 정복한 적장(敵將)이었으나 일본서기는 그를 닌토쿠(仁德)천황의 아들로 만들어 만세일계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高珍이 야마토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전쟁행위가 모두 역사기록에서 제외된다. 천황가의 만세일계 그리고 영원한 군림만이 천황가의 목표였고 이를 위한 심모원려가 일본서기였다. 이런 역사서를 기본으로 고대사를 연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학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천황가의 역사조작은 치밀하고 완벽하여 지금까지 아무도 일본열도의 神籠石가 고구려의 유물이라고 생각 해 보지 않았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28 (서기 429)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상표문에고구려의 , 야마토국를 지도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兎道稚郞子) 격노하여 고구려의 사자를 야단치고 상표문을 찢어 버렸다고 나온다. 우리는 기사가 서기 429 高珍 건강을 회복하고 야마토에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으로 본다. 당시 야마토의 천황이란 한제이(反正) 말한다. 태자 兎道稚郞子 이미 고인이었고 反正천황은 兎道稚郞子 아들이니 일본서기 저자가 착각한 같다. 최후의 결전에서 패배한 反正천황은 미야즈로 도망간다. 서기 432 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高珍 19 인교우(允恭)천황으로 즉위한다. 일본서기는 그가 닌토쿠(仁德)천황의 셋째 아들이라 기록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神籠石의 존재가 발견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코우라산 (高良山): 福岡県久留米市 高良山 南側의 約1500미터에 걸쳐 約1300個의 列石이 確認되었다. 北側에도 돌이 있었다고 推定하나 確認된 바 없다. 이 부분은 日本書紀에도 기록된 天武7年12月(서기 679)筑紫의 大地震으로 崩壊되었다고 생각된다.

2. 조야마 (女山): 福岡県미야마市瀬高町女山에 있다. 가까운 高田町의 竹飯의 山에서 1미터 内外의 長方形의 石을, 잘라내서, 山위로 날라 총 3킬로 가까이 整然하게 나열하였다.

3. 오쯔보산 (おつぼ山): 佐賀県武雄市橘町에 있다. 昭和39年調査에서 列石의背後에 版築에 의하여 축조된 土塁가 存在하며, 또 列石의 全面에 3 미터 間隔으로 堀立柱의 痕跡이 발견되어 山城임이 確定的으로 되었다.

4. 라이잔 (雷山): 福岡県前原市의 雷山(標高955m)의 北中腹, 標高400 – 480 미터의 山中에 축조된 고대산성이다. 城의 範囲는 東西300m, 南北700m정도로 생각된다. 여기서 糸島地方은 물론 博多湾이나 玄界灘까지 일망무제로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5. 고쇼가타니 (御所ヶ谷): 福岡県行橋市西南部와 京都郡勝山町, 犀川町가 境界를 接하는 山塊에 位置하며, 그 대부분이 유쿠하시시 (行橋市) 側의 南斜面에 있다. 列石東端部에 있는 標高 247m의 호토기산(ホトギ山)을 最高所로 하여, 그 延長은 約3km에 달한다. 土塁는 높이 約5m、幅 約7m로 質이 다른 흙을 版築工法에 의하여 쌓아 올렸다.

6. 카케노우마 (鹿毛馬): 福岡県嘉穂郡頴田町에 있다. 서기 1997년까지의 調査 結果, 水門部(西側谷部分)에2개의 暗渠와 版築에 의한 土塁의 모양이 알려졌다. 이번 調査에서 土塁中에 直径45cm의 기둥(柱)이 발견되고, 약 3m 間隔으로 8本을 나열한 것이 確認되었다. 以前부터 確認된 바 있는 約3m 間隔으로 列石前에 설치된 直径 約30cm의 기둥과 今回 発見된 土塁中의 기둥을 組合하여, 다시 板材를 써서, 列石을 基礎로 설치된 土塁를 축조했다고 생각된다. 土塁中의 柱列의 存在는, 古代의 版築이라는 土木技術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暗渠는 모두 全長約 18m 規模로, 土塁幅 約9m, 柱의 間隔3m를 단위로 하는 工事의 規格性이 엿 보인다.

7. 하키 (杷木): 福岡県朝倉市杷木地区에 있다. 神籠石은 長尾城과 우노기죠우 (鵜木城)를 둘러 쌓듯 약 2km에 걸쳐 縦横70 cm정도의 큰 돌을 이어놓고 土塁를 쌓았다. 2 곳에 水門이 보이고, 옛날의 土木工事가 나무랄 데 없었음을 보여준다.

8. 이와키산 (石城山): 山口県熊毛郡大和町에 있다. 서기 1909년 秋 発見되었다. 당시까지 九州이외에는 存在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던 神籠石의 遺跡이 本州에서도 発見되었으므로, 考古学界의 注目을 받았다. 列石線은 南側鶴ヶ峰부근標高342m를 정점으로 下向하여, 石城五峰(高日ヶ峰・星ヶ峰・鶴ヶ峰・築ヶ峰・大峰)을 둘러 싸고, 下部는 北水門의 標高 約268m까지 내려온다. 列石線의 総延長은 2533m에 이르는 大規模의 것이다. 列石線이 골짜기를 건너지른 곳에는 높은 돌담 벽을 쌓고, 그 중앙부에 수문을 설치하였다.

9. 키노죠우 (鬼の城, 오니노키라고도 읽는다): 岡山県 소우샤 (総社) 市에 있다. 壁은 要所에 높은 돌담을 쌓아 연결하기도 하며 強固한 土塁를2 .8 Km정도 둘러 쌓았다. 城壁은 幅 約7m, 높이 約6m, 外・内側에 평평한 돌이 1.5 m幅으로 깔려있다. 城壁이 골짜기 부분에 水門이 설치되어 있다. 現在6개소 確認되었고, 모두 하반부는 돌담, 상부는 土塁의 構造이다. 이 水門은 城内의 물을 管理하기 위한 排水口이다.

城門은 東西南北의 4 개소에 있고, 모두 通路部分에 바닥돌이 깔려있다. 西門 南門은 거의 같은 規模의 門으로, 12本의 기둥으로 지지된 楼門으로 생각된다. 西門부근에는 角楼라 불리는 防御施設이 있다. 城内는30 ha에 달하는 넓이이며, 城庫로 보이는 礎石建物跡도 6 -7棟 発見되었다. 여러 神籠石遺跡 가운데서도 중요도가 높은 城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오부쿠마 (帯隈): 佐賀市 北部山麓에 있는 오부쿠마야마 (帯隈山) 에 축조된 古代山城의 흔적이다. 서기 1941년 発見되고, 1964년 発掘調査되었다. 切石을 연결한 列石線은 北側山頂部에서 내려와 南側山 기슰을 돌아, 말굽쇠 형상을 하고 있다. 돌은 花崗岩으로, 높이 60센티 정도의 直方体로 절단하여 이어 나갔다.

2009년 6월 20일 토요일

61. 宋書의 왜무왕 상표문

宋書 順帝 昇明1년 (서기 477) 倭에서 사신이 와서 興이 죽고 동생 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武는 스스로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을 칭하였다.

송서 순제 승명2년(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여기서 그는 고구려의 무도함을 규탄하고 부형의 시절부터 고구려를 응징하려 하였으나 아버지와 형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나 이제 자신이 그 뜻을 실현코자 한다고 하며 송 황제의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황제는 그를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앞서 “14. 왜의 5왕(The five kings of Wa)” 편에서 다룬 이 기사는 한일 양국의 학자들에게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있고 또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전혀 나오지 않는 내용이므로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설명이 되지 아니할까? 중국사서도 사람의 손으로 씌여진 이상 전적으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은 사마천이 확립한 역사 편집의 정신만은 유지하면서 역사를 다루어 왔다. 일본서기는 황실의 정통성을 확보하여, 당시의 황실이 영원히 군림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씌여진 것이므로, 역사기록에 작위의 가능성이 커진다. 진실보다 황실의 이해관계가 우선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은 하나의 왕조가 끝 나고 역사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현 왕조의 영원성을 확보하려는 작위를 역사서에 가미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송서에 나온 당시의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많으며, 이 사실이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는 일본서기가 오히려 작위의 냄새를 풍긴다. 서기 478년의 상표문을 살펴보자.

황제의 책봉을 받은 저희 나라는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外臣으로서 그 藩屛이 되는 나라입니다. 옛부터 저희 祖先은, 스스로 갑주를 입은 채, 산과 강을 누비며, 쉬는 날도 없이, 東으로 毛人을 정벌하기를 55국, 西로 衆夷를 굴복시키기를 66국, 바다건너 평정하기 海北 95국에 이르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었읍니다. 王道는 멀리까지 고루 미치고, 영토는 광활하게 펼쳐져, 중국의 위세가 머나 먼 변방까기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고, 저희 나라는 대대로 중국에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을 빠지지 않았읍니다.

저는 비록 아둔하지만, 황공하옵게도 先代의 뜻을 받들어, 제 밑에 있는 사람들을 독려하여, 천하의 중심인 중국에 歸一하고, 백제를 경유하는 항로를 통하여 조공할 수 있도록 선박을 마련하였읍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게도 백제의 정복을 꾀하여 변경을 침범하고 살륙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조공이 지체되고 순풍이 불더라도 배를 띄울 수 없고, 사신이 길을 나서더라도 순조롭게 조공을 바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읍니다.

저의 亡父 濟王은, 원수의 나라 고구려가 倭가 중국에 가는 길을 가로 막는 것에 분노하였고, 백만의 병사는 이 정의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떨치고 일어나 바다를 건너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때, 돌연히 아버지와 형들을 잃어 모처럼의 기회를 잃고 말았읍니다. 그리하여 상을 치르기 위하여 군을 움직일 수 없어 결국 잠시동안 휴식하느라 고구려 세력을 꺾지 못하고 있읍니다. 이제 때가 되어 武備를 갖추어 父兄의 유지를 다하려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용사로서 떨쳐 일어나, 눈 앞에 번쩍이는 칼날이 들어 와도 물러 설 수 없읍니다.

황제의 은혜를 입어, 이 강적 고구려의 힘을 꺾고 곤란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父祖의 공로에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의 官을 칭하고, 제 밑에 있는 제장에게도 각각 칭호를 내려 충성을 독려하고자 합니다.

封國偏遠, 作藩于外. 自昔祖禰, 躬擐甲冑, 跋涉山川, 不遑寧處.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 王道融泰, 廓土遐畿. 累葉朝宗, 不愆于歲. 臣雖下愚. 忝胤先緖. 驅率所統. 歸崇天極. 道遙百濟 裝治船舫. 而句驪無 道圖欲見呑. 掠抄邊隸 虔劉不已. 每致稽滯 以失良風. 雖曰進路或通或不. 臣亡考濟, 實忿寇讐 壅塞天路, 控弦百萬, 義聲感激, 方欲大擧. 奄喪父兄, 使垂成之功, 不獲一簣. 居在諒闇, 不動兵甲, 是以堰息未捷, 至今欲鍊甲治兵, 申父兄之志, 義士虎賁, 文武効功, 白刃交前, 亦所不顧. 若以帝德覆載, 摧此强敵, 克靖方難 無替前功. 竊自仮開府儀同三司 其余咸仮授 以勸忠節

5세기의 왜왕 武는 한 반도의 고구려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니 송 황제도 지원해 달라는 상표문을 올리고 있다. 한반도의 작은 나라들은 그의 눈에 보이지도 않은 것처럼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명칭을 요구하더니 478년에는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의 관직을 요구한다.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는 황제 밑에 있는 최고의 관직이다. 그러나 이 요구에 대하여 송 황제는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까지는 허락한다. 백제를 빼고 6국제군사는 인정한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의 諸國보다 우월한 왜왕의 지위에 만족해 한다.

그런데 東征毛人 五十五國, 西服衆夷 六十六國,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기사가 있다. 모인55국, 중이66국이 일본열도라는 것은 일본학자도 인정한다. 문제는 渡平海北 九十五國부분이다. 이 부분이 한반도를 지칭하는 것은 확실하게 보인다. 과연 그 시절 倭武王의 아버지 倭濟王이 한반도에 건너와 95국을 평정한 역사가 있었을까? 또 그가 고구려을 공격하려고 한 것이 사실일까? 한국 역사가들이 단연 No라 하는 이 부분을 우리는 Yes라고 답한다.

앞에서 거론한 바 있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를 지금 우리의 현재의 가치판단을 가지고 이해하면 안 된다. 임진왜란 한일합방등으로 얼룩 진 굴절된 역사에 의하여 형성된 현재 한국인의 대일 감정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새로운 의식지평에서 이해되고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기분이나 이념성향으로 5세기의 역사를 볼 수는 없다. 그때 일본과 백제는 같은 나라였으므로 백제왕은 아버지가 맡고 왜왕은 아들이 맡고 있었다. 백제왕과 왜왕이 한 집안 식구였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시절 서기 392년부터 백제는 시련을 맞는다. 야마토의 신라공격과 대방공격 및 고구려의 가야정벌 기사가 나오는데, 일본열도는 그 시절 고구려로 부터 자유로웠을까? 일본서기는 이에 대하여 말이 없다. 일본황실은 만세일계를 고집하므로 일본을 정복한 사람도 皇系의 사람으로 위조하여 역사를 기록한다. 한 두번이 아니다. 일본의 19대 允恭천황이 바로 광개토대왕의 왕자로 일본을 정복하고 왕이 되었으나 일본역사는 그가 정복자임을 감추었다.

다만 그의 이름을 해괴하게 기록하였다. 고사기에 允恭天皇 (393 - 453 )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라 하였다. 宿禰는 천황의 신하의 姓인데 宿禰天皇이라고 야유했으며, 間稚子란 이름을 썼는데 이는 高安(광개토왕의 이름)의 어린새끼라는 뜻이 된다. 일본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만세일계를 믿는다. 신용할만 한 동시대의 문자자료가 없으면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기록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서기 432년 允恭은 明日香村 遠飛鳥宮에서 즉위한다. 일본열도도 마침내 고구려 세력이 된 것이다.

백제의 반격은 개로왕자에 의하여 서기 440년경부터 시작된다. 近畿지방의 允恭의 예봉을 피하여 모인55국, 중이 66국의 關東, 東北지역과 九州의 남부지역이 이에 포함된다. 고구려군에게 초토화된 한반도의 가야지역 역시 민심을 수습하고 백제를 중심으로 다시 결속하도록 독려한다. 渡平海北 九十五國의 95국이라는 숫자는 얼마나 의미를 갖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國이란 신라나 백제같은 國이 아니라 훨신 작은 단위의 인간집단을 가리킨다.

서기 453년 允恭이 친 아들에 의하여 독살되고 456년 安康이 살해되는 혼란을 틈 타 雄略이 정권을 잡았으나 백제세력은 때를 놓치지 않고 458년 雄略을 제거하고 야마토를 탈환한다. 서기 455년 개로왕자가 백제왕으로 즉위한다. 서기 461년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일본에 보내 일본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한다. 이 해 시마왕이 태어난다.

바로 그 무렵,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51 년 (서기 463) : 송나라 세조(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장수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책봉하였다.

일본열도는 백제가 다시 장악하였으나 백제 위례성에 들어 온 개로왕은 자나깨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당한 치욕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궁리해 낸 것이 중국의 북위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개로왕 18년(서기 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렸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서기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四道]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危懼] 혹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일본서기 雄略 20년(서기 475) 겨울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 와 7일간 밤 낮으로 왕성을 공격했다. 왕성은 함락되고 본거를 잃었다. 국왕과 황후, 황자들은 적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 년 (서기 476) : 봄 2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漢北)의 백성(民戶) 들을 이주시켰다. 3월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여름 4월에 탐라국(耽羅國)이 토산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사자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가을 8월에 해구(解仇)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서기 476년 문주왕 2년 송나라에 가던 사신이 고구려에 막혀 되돌아 왔다. 이 시대 왜나 백제에서 송나라에 가는 항로는 九州 후쿠오카, 잇키 섬, 쯔시마, 거제도, 한산도, 남해도, 돌산도, 완도, 해남, 진도, 압해도, 지도, 변산반도, 선유도, 태안반도, 덕적도, 영종도, 강화도를 경유하여 백령도에서 중국의 산동반도에 이르고 거기서 양자강 하류까지 육지를 따라 내려간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의 남진이후 황해도 전역이 고구려 영토가 된다. 당연히 상기 항로의 요충 백령도와 황해도 장연, 옹진지역이 고구려 수중에 들어가 고구려의 Coast Guard가 관할한다면 백제와 왜의 대중국 항로는 심대한 타격을 받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3 년 (서기 477) : 봄 2월에 궁실을 고치고 수리[重修]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 으로 삼고, 맏아들 삼근(三斤)을 봉(封)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에 검은 용이 웅진(熊津)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서기 477년 야마토의 淸寧천황 곤지가 백제에 나왔다. 야마토를 떠날 때 시마왕을 倭武王으로 봉하여 왕권을 넘겼다고 본다. 왜무왕은 일본서기에 천황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그러나 누락되었다. 8세기의 일본에 있던 백제의 역사가들은 왜무왕의 정체가 1971년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에서 백일하에 드러 날 것을 알고 누락시킨 것처럼 절묘하다.

宋書 順帝 昇明1년 (서기 477) 倭에서 사신이 와서 興이 죽고 동생 武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武는 스스로 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7국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을 칭하였다. 전사한 개로왕의 장자가 백제를 포함한 7국제군사를 자칭하는 것이니 별로 모순되는 요구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송서 순제 승명2년(서기 478) 왜왕 무는 다시 송에 조공하면서 장문의 상표를 올린다. 거기서 백제에 대한 지원과 함께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하며 공식적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송 황제는 그를 使持節 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秦韓, 慕韓, 6국諸軍事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하였다.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를 자칭한 것은 서기 463년 장수왕이 송으로 부터 이 관직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무왕의 상표문에 의하면 亡父 濟는 475년 이전 고구려를 응징하려고 하였으나 475년 고구려가 먼저 침입하여 아버지와 형들이 죽었다고 한다. 472년 북위를 끌어들인 일이 성사되었다면 고구려 응징이 실현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북위도 고구려를 두려워 하고 있었으므로 개로왕의 상표문은 장수왕에게 그대로 알려진다. 그리하여 장수왕의 백제 섬멸 계획은 3년간 치밀하게 이루어 졌다.

일본서기 雄略 23년 (서기 479) 여름 4월 백제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하고 있는 곤지왕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차남의 末多王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을 명하였다. 찌쿠지국(筑紫國)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24대 동성왕이다. 雄略 23년이라 하나 淸寧천황 즉 곤지의 치세이며 그에게는 이 때가 가장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 될 시기였다.

일본서기는 윗 기사에 이어, 同年 백제의 공납이 예전보다 많았다. 거기서 찌쿠지국(筑紫國)의 아치노 오미(安致臣)와 우마카히노 오미(馬飼臣)등 에게 선단을 인솔하여 고구려를 공격시켰다. 이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는 유일한 관련기록이다. 이때, 479년, 淸寧천황과 왜무왕이 위의 선단과 함께 일본에서 사라진다. 그들이 어디서 무었을 하였는지 모른다. 야마토는 이이토요 히메미코(飯豊皇女)가 통치하였다.

이 두 사람이 일본을 비운 사이 顯宗천황 武烈천황을 거치면서 大伴金村이 권력을 장악하고 백제에 저항하였던 이야기는 앞에서 나왔다. 서기 479년부터 501년 왜무왕이 백제 무령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나 478년 송에 보낸 상표문과 관련하여 고구려에 대한 적대행위를 했을 것으로 본다.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실적이 미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기 484년 삼국사기 동성왕 6년 대 중국 항로가 고구려에 의하여 제지 당하는 모습이 또 나온다. 봄 2월에 왕은 남제(南齊)의 태조[祖]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을 책봉(冊封)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복속[內附]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가을 7월에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약사(若思)는 서해 바다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하였다.

2009년 6월 13일 토요일

60. 繼體天皇

서기 2007년11월4일 福井縣 후쿠이시(福井市) 아스와야마(足羽山)의 아스와신사(足羽神社)에서 繼體天皇 즉위 1500년 봉축기념대제가 열렸다. 서기 2007년은 제26대 繼體天皇 (450 – 531)이 서기 507년 즉위한 이후 꼭 1500년이 되는 해이다. 야마토의 중심지 나라분지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의 바닷가에 위치한 변방이었던 코시노쿠니 (越國)에서 배출된 유일한 천황이니 지금도 그 곳 사람들은 자기 고장의 자랑거리로 봉축기념대제를 열어 향토애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제외하면, 까마득한 그 옛날, 변방에 살던 사람이 어떻게 제왕이 되었는지 알려주는 기사는 없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506년 武烈천황 (489 – 506)이 후사없이 붕어하였으므로, 오호무라지(大連) 오호토모노 카나무라(大伴金村)등이 에치젠(越前)에 가서 應神천황의 5세손, 오오도왕(男大迹王)을 추대하였다. 이를 승낙한 왕은 다음 해 58세때 가와치국(河內國) 쿠스바노 미야(樟葉宮)에서 즉위하고 仁賢천황의 황녀 타시라카노 히메미코 (手白香皇女)를 황후로 하여 사내아이를 낳으니 그가 아메쿠니 오시 하라키 히로니와노 미코토 (天國排開廣庭尊, 欽明 510 – 571)이다. 이 사람이 본처소생으로 嫡子이나 나이 어린 관계로 2명의 형들이 먼저 국정을 잡은 후 천하를 다스렸다.

즉위 前의 妃였던 오와리노 무라지 쿠사카(尾張連草香) 의 딸 메노코히메(目子媛)는 시코부(色部)라고도 하며 2인의 아들을 낳았다. 첫째를 마가리노 오오에 황자 (勾大兄皇子)라 하며, 그가 훗날의 히로쿠니 오시타케 카나히 천황 (広国排武金日天皇, 安閑 466 – 535)이다. 두째를 히노쿠마노 타카다 황자(桧隈高田皇子)라 하며, 훗날의 타케오히로쿠니 오시타테 천황 (武小広国排盾天皇, 宣化 467 – 539)이다.

일본서기는 오오도왕(男大迹王)이 應神천황5世의 孫으로, 父는 히코우시왕(彦主人王), 母는 垂仁천황7世의 孫, 후리히메(振媛, 434 – 485)라 하고 있으나, 應神에서 繼體에 이르는 중간4대의 계보는 생략되어 있다. 중간4대의 계보는 카마쿠라(鎌倉) 시대의 “釋日本紀”에 인용된 “上宮記”逸文에 의하여 밝혀졌다. 이에 의하면 應神天皇 –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 오오호도왕(意富富杼王 또는 大郞子) – 오이왕(乎非王) –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 彦主人王) – 乎富等大公王 (=繼體天皇)으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나 上宮記에 의하면 오오도왕(男大迹王)의 父는 近江의 高嶋郡三尾 (滋賀縣高島郡) 나리도코로(別業)에 있던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이다. 코시노쿠니 미쿠니(越國三國) 사카나이(坂中井)의 타카무쿠(高向)에서 절세의 미인으로 알려진 후리히메(振媛)가 近江의 高嶋郡三尾의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을 모신 것은 서기 449년 경의 일이다. 다음 해 출생한 오오도왕(男大迹王)이 어려서 부친을 잃고 후리히메(振媛)의 친정, 사카나이(坂中井)의 타카무쿠(高向) 에서 성장하였다.

그 시절 5세기의 에치젠(越前)은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변경의 땅으로 알기 쉬우나 福井평야에서 고분의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중앙의 정치세력에 뒤지지 않는 선진성과 강대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 졌다. 쿠즈류가와(九頭竜川)가 福井平野로 흘러드는 마쯔오카쵸우(松岡町)와 마루오카쵸우(丸岡町)의 산에 거대한 古墳群이 있다. 松岡町의 테구리가죠우야마 고분(手繰ケ城山古墳), 니혼마쯔야마 고분(二本松山古墳), 카스가야마 고분 (春日山古墳), 丸岡町의 로쿠로세야마 고분 (六呂瀬山古墳)등 百 미터를 넘는 前方後円墳이 계속된다. 古墳에는 九頭竜川에서 운반해 온 후키이시(葺き石)가 있고, 하니와(埴輪)가 나란히 서 있다. 福井市 아스와야마(足羽山)의 샤쿠다니이시(笏谷石)로 만든 巨大한 石棺을 古代人은 山頂까지 운반해 왔다.

振媛의 実家는 이런 巨大한 古墳을 건설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豪族이었다. 近江에서 母에 이끌려 온 男大迹王은 그러한 환경의 외갓집에서 자랐다. 백제왕가의 후손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으리라. 그들은 당시 最新의 文化圏이었던 朝鮮半島와 密接한 関係를 갖고 있었다. 男大迹王이 살아 있었을 五世紀末 축조된 標高273미터의 山頂에 있는 二本松山古墳의 石棺에서 金과 銀을 칠 한 冠, 甲冑나 鏡등 豪華한 副葬品이 出土되었다. 以前 話題가 되었던 奈良県의 후지노키 고분(藤ノ木古墳)에서 出土된 有名한 冠보다도 一世紀 빠른 時代의 것으로 畿内보다도 越前 쪽이 오히려 文化의 先進地였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출토된 유물과 산 꼭데기에 축조된 고분은 가야와의 관련성을 강력히 암시한다.

男大迹天皇의 治世元年春1月4日、大伴金村가 회합의 참석자들에게 말한다. “男大迹王은 性情이 너그럽고, 효심도 깊다하니, 皇位를잇기에 적합한 분인 것 같소. 우리 모두 나서서 그 분에게 권하여 황위를 번영토록 해야 하오”. 物部麁鹿火가 응대한다. “황손들을 골라 살펴보니, 賢者는 확실히 男大迹王이라 할 수 있읍니다”. 許勢男人도 맞장구를 친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男大迹王에게 天下를 다스리도록 합시다” 이렇게 세 사람이 합의한 뒤 6日、무라지(連)들이 君命을 받든 황제의 깃발과 가마를 준비하여, 미쿠니( 三国)로 향했다. 보무도 당당히 호위무사들이 도착하자 男大迹王은 평상시의 넉넉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侍臣을 整列시키고 이미 天子의 風格이 있었다.

서기 507년 2월 男大迹王은 大阪府 히라카타시(枚方市) 쿠스바노미야(樟葉宮)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오호토모노 카나무라(大伴金村)를 오호무라지(大連)로, 코세노 오히토(許勢男人)를 오호오미(大臣)로, 모노노베노 아라카이 (物部麁鹿火)를 오호무라지(大連)로 옛 職位를 그대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코시노쿠니(越國)에서 야마토에 왔는데 전임의 천황들이 있었던 카시하라(橿原) 또는 사쿠라이(櫻井) 지역이 아닌 쿠스바노미야(樟葉宮)가 繼體천황에게 처음 주어진 皇居이다. 현 메트로 오오사카의 최북단으로 나라분지의 카시하라(橿原) 또는 사쿠라이(櫻井)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4년후 서기 511년10월 현 京都府 京田邊市의 쯔즈키노미야(筒城宮)로 황거를 옮긴다. 7년후 서기 518년3월 현 京都府 長岡京市의 오토쿠니노미야 (弟國宮)로 황거를 옮긴다. 8년후 서기526년9월 드디어 奈良縣 사쿠라이시(櫻井市) 이와레노 타마호노미야 (磐余玉穗宮)로 옮긴다.

야마토의 변두리를 전전하기 무려 20년, 왜 繼體천황이 곧 바로 야마토의 수도에 들어오지 않고 변두리에서 20년을 보내야 되었는지 알려주는 역사서는 없다. 쿠스바노미야(樟葉宮)는 요도강(淀川)가에 위치한 현재 오오사카府 히라카타시(枚方市) 쿠스바(樟葉), 쯔즈키노미야(筒城宮)는 키즈강(木津川)가로 현 京都府 京田邊市, 오토쿠니노미야(弟國宮)는 카쯔라강 (桂川) 을 끼고 있는 곳으로 현 京都府 長岡京市에 해당한다.

継体天皇의 墓는 古事記등에 미시마노 아이노노 미사사기(三嶋藍野陵)라고 적혀있다. 이 능을 궁내청은 大阪府 이바라기시 (茨木市)의 오오다챠우스야마 고분 (太田茶臼山古墳)이라고 비정하고 있으나, 축조시기가 5세기 중엽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最新의 研究결과 이웃한 타카쯔키시(高槻市)에 있는 이마시로쯔카 고분 (今城塚古墳)이 継体陵이라고 거의 断定되어, 市教委에 의하여 発掘調査가 행해지고 있다. 2006년12월1일 10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사적공원 정비공사가 진행중이다. 궁내청의 관할이 아닌 高槻市敎委소관이므로 발굴조사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궁내청은 고대 천황가와 그 친척들의 무덤으로 740개의 고분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으나 지정된 고분의 신분이 확실한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고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고분들의 학문적인 조사를 청원하고 있으나 고고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천황가의 고분들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今城塚古墳은 요도가와(淀川) 北岸에 위치한 거대한 전방후원분으로 전장 약 350미터, 분구장 190미터, 전방부의 폭 148미터, 높이 12미터, 후원부직경 약 100미터이다. 고분이 축조된 것은 6세기전반으로 상정되며 고분에서 높이 약 1.7미터로 일본최대급의 家形하니와(埴輪), 갑옷을 입은 武人하니와외 여러가지 모양의 하나와가 출토되었다.

고분발굴시 石棺의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3종류의 석재가 확인되었다. 熊本縣, 大阪府의 二上山, 兵庫県 播磨의 세 地方에서 나온 것으로 3개의 석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継体천황의 석관이라면 나머지 두개는 누구의 관일까? 3가지 석재 가운데 熊本의 阿蘇山의 噴火로 만들어 진 핑크色의 석재가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이것이 継体의 石棺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出土되는 하니와(埴輪)나 石棺의 破片은 요도강(淀川)을 사용한 水上交通은 물론 九州와의 交流를 암시한다.

繼體天皇(450 – 531)의 계보는 應神天皇 – 와카누케 후타마타 (稚野毛二派 또는 若沼毛二俣) – 오오호도왕(意富富杼王 또는 大郞子) – 오이왕(乎非王) –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 彦主人王) – 乎富等大公王 (=繼體天皇)으로 되어 있다.

應神(320 – 394) -稚野毛二派(372 – 424) -意富富杼王(391 – 432) -乎非王(412 – 465) -彦主人王(429 – 475)의 계보를 백제의 계보로 대치하면 근구수왕(320 – 394) – 아신왕(372 – 424) – 전지왕(391 – 432) – 毗有왕(412 – 465) – 개로왕(429 – 475, 倭濟王)이 된다. 繼體(450 – 531)와 무령왕(461 – 523, 倭武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이렇게 백제와 야마토의 왕들은 두 얼굴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우리는 意富富杼王의 富杼를 浮屠와 같은 초기 불교용어 Buddah로 보았다. 따라서 男大迹王의 오도(大迹)는 富等, 浮屠가 되어 오오도는 小浮屠의 의미로 증조부 큰 부처의 이름을 딴 작은 부처라는 뜻이다.

古事記 雄略時代의 기록을 보자. 일본서기는 이 부분을 훨신 완화하여 박진감이 떨어진다. 천황은 葛城山에 올랐는데 거대한 맷돼지가 나타났다. 천황이 활을 쏘자 맷돼지가 성을 내고 굉음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천황은 겁에 질려 개암나무 위로 뺑소니쳤다.

또 어느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모든 수행원들이 빨간 허리띠를 메고 파란 옷을 입었다. 그 때 건너 산에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복이나 모양이나 사람들이 천황의 행렬과 꼭 같았다. 거기서 천황이 “야마토에 나 말고 왕이 없는데 거기 가고 있는 것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는 모양도 천황과 똑 같았다. 그래서 천황은 크게 노하여 모두 활을 겨누자 저 쪽에서도 똑 같이 활을 겨누었다.

거기서 천황이 “이름을 대라. 이름이나 알고 싸우자”하니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알려주마. 나는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한 마디로 분별하여 말하는 葛城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 이다” 라 하니 천황이 겁에 질려 “알아 모시겠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신령님께서 現世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읍니다.”라 하며 大御刀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 그러자 一言主神는 손을 치며 모든 물건을 받았다.

위의 구절을 서기 458년 雄略이 백제의 개로왕과 곤지에게 제압되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大御刀는 천황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雄略은 이후 퇴위되어 죽을 때까지 유배된다. 雄略의 재위가 23년간이라고 기록되는 것은 역사의 표면에 백제가 드러나는 것을 덮기 위하여 고안된 장치이다. 신화와 역사 사이에 흐르고 있는 강은 넓고도 깊다.

위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가 우시왕 (三水변에 于斯王)이며 히코우시왕(彦主人王)이며 백제의 개로왕이 젊을 때 일본에서 불린 이름이다. 후쿠이(福井)는 왜무왕의 상표문에 나오는 毛人55국의 하나이다. 倭濟王은 아주 활동적이고 가는 곳마다 여자를 밝히던 정력적인 사나이였던 것 같다. 倭武王의 아버지 倭濟王이 允恭천황 시절 후쿠이를 근거로 모인55국을 평정하였는데 그 무렵 후쿠이의 호족의 딸 후리히메(振媛)를 만나 男大迹王을 낳았다.

백제왕실은 이 결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奈良분지와 가와치(河內)는 백제의 조상들의 무덤이 남아 있는 聖地이다. 따라서 백제의 무령왕은 繼體天皇의 奈良進入을 강력히 경고하였을 것이다. 무령왕이 죽은 후 서기 526년에야 繼體는 奈良縣 사쿠라이시(櫻井市) 이와레노 타마호노미야 (磐余玉穗宮)에 들어온다.

継体天皇은 1명의 황후와 8명의 妃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어디까지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신하들이 불러들인 나이 58세의 노인이 결혼동맹을 맺어 왕권을 강화하였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의 관심은 천황을 배출한 皇后 타시라카노 히메미코(手白香皇女)와 妃 메노코히메(目子媛)뿐이다. 황후는 欽明을, 妃는 安閑과 宣化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 우리는 타시라카노 히메미코(手白香皇女) 즉 欽明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황후로 보고, 메노코히메(目子媛)는 개로왕의 妃로 본다. 安閑과 宣化는 欽明의 형제가 아니라 작은 아버지이다.

백제혈통을 야마토 獨自의 혈통으로 만드는데 필요했던 것이 일본역사의 継体天皇이다. 그가 후쿠이에서 지방의 호족으로 살았다면 행복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의 大伴金村의 정략에 이용되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大伴金村는 백제의 압력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던 継体天皇을 중앙으로 불러내 욕보인 셈이다.

일본서기는 繼體천황 마지막 부분을 묘하게 끝맺고 있다. “ 어떤 책에 의하면 천황은 치세 28년 붕어했다고 한다. 그것을 치세 25년붕어로 한 것은 백제본기에 의해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그 기록에 “치세 25년 3월, 진군하여 安羅에 이르러 걸둔성(乞屯城)을 쌓았다. 이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또 들리기를 일본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와 맞춰보면 신해년은 치세 25년에 해당한다. 후세에 따져보는 자는 알게 되리라.

백제의 무력 시위 앞에서 야마토의 大伴金村는 繼體천황, 황태자, 황자를 모두 죽이고 구주백제군을 야마토에 무혈 입성시킨다. 이 때부터 구주백제의 斯我王이 야마토의 27대 安閑천황 (466 – 535)으로 기록된다.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 535년 安閑천황이 야마토에서 사망하자 그의 동생이며 구주백제왕인 사비왕이 야마토로 가서 28대 宣化천황(467 – 539)으로 즉위하고 구주백제왕으로 무령왕의 두째왕자 사귀왕(斯貴王)이 부임한다. 이 사람이 29대 欽明天皇(510 – 571) 이며 백제 聖明王( - 554)의 친 동생이다. 

일본 천황및 황태자, 황자 모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安閑, 宣化, 欽明이 다음 천황으로 즉위하는 것은 이들이 繼體의 자식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