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4일 토요일

81. 쿠가미미노 미카사(玖賀耳之御笠)




고사기 스진(崇神)조에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을 타니하국(旦波国)에 파견하여 쿠가미미노 미카사(玖賀耳之御笠)를 죽였다 (日子坐王者遣旦波國 令殺玖賀耳之御笠)는 한 줄의 기사가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이 기사가 없다. 밑도 끝도 없이 한 번 나오고 마는 이 이름이 역사상의 누구인지, 이 사건이 언제, 왜 일어 난 일인지 밝혀진 바 없다.    

다행히 그의 역사적 실상을 추리할 수 있는 약간의 정보가 풍토기(風土記)에 남아 있다. 풍토기의 이 기록이 없었다면 그의 모습은 영영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풍토기(風土記)란 고사기가 편찬되고 1년이 지난 뒤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이 관명으로 각 지방에 편찬을 명한 것으로 이즈모(出雲), 하리마(播磨), 히타찌(常陸), 히젠(肥前), 붕고(豊後)등의 풍토기가 남아 있다. 그 밖의 나라에 관한 것도 일문(逸文, 흩어져 그 일부만 남아 있는 글)의 형태로 타 문헌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 하나가 탄고국(丹後国) 풍토기이며 보통 탄고국 풍토기 잔결(丹後風土記残欠)이라 불린다.

중앙정부가 각 지방관청에 지방의 풍토기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명한 것은 고사기가 발행되고 1년이 지난 서기 713년이다. 마을의 이름, 물산, 토지의 비옥상태, 산천원야의 명칭의 유래, 옛부터 전해오는 전승등을 살펴 기록하도록  항목을 명백히 하였다. 옛부터 전해오는 전승등이 황실의 역사가들에게 최대의 관심사였을 것이다. 고사기에 기록된 기사라도 황실의 이데올로기에 배치되는 지방의 전승들은 일본서기 편찬시 용납되지 않도록 하였을 것이다. 탄고국 풍토기 잔결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노인들이 이르기를, 스진천황(崇神天皇) 치세 탄고국 아오바산(青葉山) 속에 쿠가미미노 미카사(陸耳御笠)라는 쯔찌구모(土蜘, 황명에 거역하는 토박이 도적)가 있어 인민을 괴롭혔다. 조정은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를 보내 정벌케 하였다. 탄고국(丹後国)과 와카사국(若狭国)의 경계에 이르자 홀연히 명동(鳴動)하며 빛을 뿜는 바위가 있었다. 그 모습이 투구와 비슷하여 장군의 투구바위(甲岩)라 하였다. 또 그곳을 나리우(鳴生, 현 마이쯔루시 나리우(舞鶴市成生))라 하였다. 

옛날, 히코이마스왕이 천황의 명을 받아 쯔찌구모를 추격할 때 갖고 있던 검이 바닷물에 닿아 녹 슬고 말았다. 그 때 니호토리(鳰鳥, 논병아리)가 줄을 지어 날아와 검에 부딪쳐 죽어갔다. 그 때문에 녹이 벗겨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곳을 니호(爾保)라 한다. 

옛날, 히코이마스왕이 관군을 이끌고 쿠가미미노 미카사(陸耳御笠)를 토벌할 때 아오바산에서 그들을 몰아 내 이 곳에 이르렀다. 그들이 크게 자란 농작물 속에 숨어 있었다. 히코이마스왕이 서둘러 말을 몰아 농작물 속에 들어가 죽이려 하자 쿠가미미가 구름을 일으키며 하늘을 날아 남쪽으로 도망쳤다. 히코이마스왕이 농작물을 심하게 어지럽혔으므로 그곳을 시타카(荒蕪)라 한다. 시타카(志託, 京都府舞鶴市西部の志高(しだか))는 본래 시타카(荒蕪)라 표기하였다. 


옛날 히코이마스왕이 쿠가미미(陸耳)와 필녀(히키메(匹女))등을 뒤 쫒아 아리지 마을(蟻道の郷)의 찌하라(血原)에 이르러 먼저 필녀를 죽였다. 그래서 그 곳을 찌하라(血原)라 한다. 그 때 쿠가미미도 항복하려 하였으나 야마토에타마 (日本得玉命)가 강의 하류로 부터 추격해 와서 쿠가미미는 서둘러 강을 넘어 도망쳤다. 그래서 관군들은 방패를 이어 강을 지키며 메뚜기가 튀듯 화살을 퍼부었다. 쿠가미미 군이 화살에 맞아 시체가 물에 떠내려 갔다. 그곳을 가하모리(川守, 현 京都府福知山市北部 大江町河守(こうもり))라 한다. 또 관군의 주둔지를 가하모리 타테하라(川守楯原, 현 福知山市大江町蓼原(たでわら))라 한다. 그 때 배가 한척 강을 내려왔다. 그 배로 도적들을 쫒아 마침내 유라 항(由良の港)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적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약돌을 주워 점을 쳐 보고 쿠가미미가 요사의 오오야마(与佐の大山)에 들어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 곳을 이시우라(石占, 현 京都府宮津市東部の石浦(いしうら))라 한다. 또 그 배를 타테하라(楯原)에서 제사지내고 후나토신(舟戸神)이라 하였다. 

지금까지 인용된 내용이 탄고국 풍토기 잔결의 쯔찌구모 기사이다. 스진천황(崇神天皇) 시대 정벌군 대장으로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이 등장하므로 연대를 상정하는데 충분한 자료이다. 쿠가미미노 미카사는 아오바산(青葉山)에 웅거하고 있었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아오바산의 서쪽으로 도주하여 오오에산(大江山)으로 들어갔다. 오오에산은 토요오카시(豊岡市)로 나갈 중간 기착지이다. 아오바산에서 오오에산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30키로미터, 현 마이쯔루시(舞鶴市)의 동쪽에 있는 아오바산에서 마이쯔루시의 서쪽에 있는 오오에산까지 군사를 물린 셈이다. 그 사이에 필녀(匹女)라고 기술된 쿠가미미노 미카사의 왕비가 전사하였다.

그러나 쿠가미미노 미카사의 군대는 패주하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오오에산에 들어 가 은신한다. 오오에산(大江山)은 표고 833미터로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귀신의 전설들을 가지고 있다. 그 귀신들 가운데 가장 저명한 귀신이 지금 거론 중인 쿠가미미노 미카사이다. 관군의 추격은 계속되었으나 도적들은 쫓기면서도 방전(防戦)하는 양상이 계속되어 전쟁이 쉽게 결말이 나지 않는다. 고사기는 쿠가미미노 미카사를 죽였다고 하였으나 탄고국(丹後国)과 국경을 접한 타지마국(但馬国, 兵庫県北部)의 고문서는 쿠가미미노 미카사가 서쪽으로 도주하여 타지마의 요로이우라(鎧浦, 현 兵庫県香美町香住区 鎧周辺)에서 히코이마스왕에게 토벌되었다고 하였다.

전편 “75. 카미에서 인간으로 (II)”에서 우리는 아메노 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의 여러 개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이름을 바꾸어 여러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于斯岐 阿利叱智 干岐), 우쯔시코오(内色許男), 스이닌(垂仁)천황이 한 사람의 호칭이라고 하였다. 거기 더하여 여기서 또 한개의 이름, 쿠가미미노 미카사를 보태야 된다.

쿠가미미노 미카사(玖賀耳之御笠, 陸耳御笠)가 무슨 뜻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고사기는 쿠가미미(玖賀耳), 탄고국 풍토기잔결은 쿠가미미(陸耳)로 한자표기를 달리 하였다. 도적의 이름에 미(御)라는 존칭이 왜 붙었는지도 의문이다. 고사기의 편찬자들은 역사의 작은 파편들은 위의 여러 이름을 빌어 남기고자 한 셈인데 단편적인 구슬이 꿰어져 전체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바라지 않은 듯하다. 황실의 이데올로기에 배치되는 내용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로 이해되도록 배려한 느낌을 받는다. 아메노 히호코는 스이닌(垂仁)천황으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하면서 그의 또 다른 모습은 쿠가미미노 미카사라는 도적으로 남겨 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을 구슬로 꿰어 전체의 그림을 그려 내고자 한다. 쿠가미미노 미카사가 아메노 히호코라고 주장한 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서기 268년경 도망친 아내를 뒤쫒아 열도에 들어 온 아메노 히호코는 오오사카 상륙이 불허되자 일본해 측으로 뱃머리를 돌려 타지마국(多遅摩国)의 토요오카(豊岡)를 점령하고 이즈시신사(出石神社)를 본거로 삼는다. 서기 272년경 야마토 코세(御所)의 이나키(稻城)에 불을 질러 도망 친 아내 사호히메를 죽이고 타니하의 히바스히메(고사기 氷羽州比売命, 일본서기 日葉酢媛命)와 혼인하였다. 히바스히메를 고사기는 타니하 미찌누시(丹波道主)의 딸이라 하였는데 그래서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타니하 미찌누시는 서기 300년 대, 히바스히메는 서기 250년 대의 인물이다. 히바스히메는 서기 275년 경 야마토히메(倭姬)를 낳았다.

타니하 지역은 호아카리(天火明命) - 아들 카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 – 아들 타케다세(建田背命) – 아들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의 혈통이 지배해 왔는데 아메노 히호코의 등장 이후 그와 풍운을 다툰 것은 타게모로스미의 시대였다. 아메노 히호코가 30대, 타케모로스미가 20대의 나이였을 것이다. 서기 270년 대 초 히바스히메와 아메노히호코의 혼인은 이 두 가문이 한 배에 탄 것을 의미한다. 히바스히메는 타케모로스미와 형제간이며 타케다세의 딸로 본다.    

히바스히메와의 혼인을 통하여 아메노 히호코는 타니하의 전역을 장악하고 현 쿄우토(京都) 지역에 진출한다. 타니하의 맹주 타케모로스미가 그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기 287년 일본서기 스진 10년 추 7월 타케하니야스히코(武埴安彦命)의 반란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만주에서 부여의 의려(依慮)가 서기 285년 모용외(慕容廆)에게 패하여 피난길에 오르고 최종적인 기항지가 나니하(難波)였다. 부여의 피난민들이 야마토의 코우안(孝安, 오호모노누시)천황을 몰아내고 야마토의 장군 타케하니야스히코(武埴安彦)와 야마시로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타케하니야스히코의 아버지는 코우겐(孝元)천황으로 기록된 사호히코, 어머니는 타케쯔누미의 딸 하니야스히메이다. 이는 그의 모계쪽이 타니하의 맹주와 같은 집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전쟁에 아메노 히호코가 방관적일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전쟁에 개입하여 타케하니야스히코를 지원하였을 것이다.

전쟁후의 상황을 보면 타케하니야스히코는 몰락하였으나 아메노 히호코는 실리을 챙겨 타케하니야스히코의 영지라고 생각되는 야마시로 지방으로 진출하여 야마토의 새로운 지배자 코우레이(孝靈)천황과 대치하였다. 훗날 황실은 타케하니야스의 이름을 익명으로 하여 쿄우토 시(京都市)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 보통 카미가모신사(上賀茂神社)로 불린다) 에서 제신으로 모시게 하였다. 황실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역사는 조작하였으나 타케하니야스의 영웅적인 애국심은 길이 추앙받기를 바란 탓이다.

쿄우토 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 쿠미야마쬬(久御山町) 이찌타(市田)에 스이닌천황(垂仁天皇)을 모시는 타마키신사 (珠城神社)가 있다. 이찌타는 스이닌천황의 궁성, 타마키궁(珠城宮)이 있던 자리이며 궁성터에 신사를 지었으므로 타마키신사(珠城神社)라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스이닌의 타마키궁이 야마토의 마키무쿠(纏向)에 있었다고 거짓 증언을 하였다. 스이닌 천황은 야마토를 지배한 적이 없다.따라서 그의 무덤이 마키무쿠에 있을 턱이 없다. 

코우레이(孝靈) 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하자  타니하국(丹波國, 현 쿄우토 지역)의 스이닌 천황은 쿄우토 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까지 진출하여 타마키궁(珠城宮)을 짓고 야마토의 턱밑까지 진출하였다. 나라(奈良)분지의 남북에서 코우레이와 스이닌이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 전쟁에 돌입한 기록은 없다. 피차간 서로 상대를 공격할 힘이 없었던 모양으로 서기 300년까지 그러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스이닌의 두번 째 황후 히바스히메는 타니하국(丹波國, 현 쿄우토 지역) 출신인데 그녀가 사망한 뒤 야마시로(山背)출신의 오토 카리하타토베와 혼인하였다. 이는 서기 290년 대 스이닌(垂仁)의 활동반경이 야마시로 지역으로 이동했음을 나타낸다. 야마시로는 후일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帯比売命, 気長足姫尊, 神功皇后)의 근거지이다. 

서기 297년 만주벌판의 풍운이 해일처럼 열도에 이른다.  서기 285년 의려(依慮)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부여를 탈출하여 열도에 들어 와 코우레이(孝靈)천황이 되었고 서기 297년 그의 아들 의라(依羅) 또한 모용선비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망망대해의 피난길에 오른다. 서기 297년경 이들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먼저 정착한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으면서 반도를 남하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13년 (서기 298) 가을 9월에 한(漢)과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한(漢)과 맥인(貊人)으로 표현된 이 사람들이 사실은 부여를 탈출한 보우트 피플들이다. 백제의 책계왕이 부여의 피난민과의 교전에서 전사할 정도이니 피난민이라 하나 이들은 부여의 정규군이다.  

이들 일행의 행로에 쯔시마(對馬島)가 있고 일본서기 스진 65년 소나카시찌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스진(崇神) 65년 추 7월 미마나국(任那国)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 미마나는 쯔쿠시국(筑紫國)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으로 바다를 끼고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 여기 나온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는 의라(依羅)의 본명이거나 관직명일 가능성이 있다. 스진 65년 소나카시찌가 열도의 스진천황에게 파견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스진 65년이란 가공의 연대이며 소나카시찌 자신이 열도를 장악하고 스진천황이 되었다.

서기 300년 부여의 의라가 또 난민을 이끌고 와 열도를 장악한다. 그는 코우레이 천황의 아들이므로 큰 전쟁을 치르지 않고 열도를 장악했을 것이다. 그가 스진(崇神)천황이다. 스진은 스이닌(垂仁)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서기는 8대 코우겐(孝元)천황의 이름을 오호야마토네코(大日本根子) 히코쿠니쿠루(彦国牽)라 하였다. 오호야마토네코는 수식어에 해당하는 미칭이라 하므로 실제 이름은 히코쿠니쿠루인데 이 사람이 전편에서 나온 사호히코(沙本毘古王, 狭穂彦王)이다. 일본서기는 이 사람을 코우레이(孝霊)천황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코우레이는 부여왕 의려(依慮)이며 서기 287년 야마토를 장악하였다. 히코쿠니쿠루(彦国牽)는 코우쇼우(孝昭, 5대 천황), 즉 신대의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아들이다.

코우쇼우(孝昭)의 이름은 미마쯔 히코 카에시네(観松彦香殖稲)이며 이토쿠(懿徳)천황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실제로 그는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의 아들이다. “74. 카미에서 인간으로(I)”에서 그가 백제의 사반왕(沙伴王)이라 하였다. 스사노오가 백제의 초고왕이며 오호쿠니누시가 구수왕(仇首王, 貴須王)이다. 그들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일본역사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진무동정에 의하여 오호쿠니누시의 장자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가 몰락하고 코토시로누시의 딸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気余理比賣)가 진무천황의 정비가 됨으로써 코토시로누시 가문은 이후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이 된다. 그러나 가문의 구성원들이 국난을 당하여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어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겪는다. 형제끼리 적으로 만나 전쟁터에서 죽고 죽이는 운명이 된다.

일본서기는 코우쇼우의 아들을 아마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天足 彦国押人命)와 야마토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日本足 彦国押人命)의 2명을 기록하고 동생인 야마토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가 코우안(孝安)천황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진무동정의 기사 가운데 에우카시(兄猾)와 오토우카시(弟猾)의 이야기가 나온다. 8세기의 학자들이 선택한 한자 우카시(猾)를 보면 오토우카시를 결코 호의적인 안목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우카시와 오토우카시 형제의 이야기는 바로 코오쇼우의 두 아들 아마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와 야마토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를 의미한다. 형은 큐우슈우의 정벌군과 대치하였고 동생은 큐우슈우 군과 내통하여 형을 밀고하여 죽게 하였다.

젊은 나이에 전사한 아마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天足彦国押人命)가 히코쿠니오케쯔(日子国意祁都命)라는 아들을 남겼다. 그는 와니노 오미(丸邇臣)의 조(祖)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는 그의 후손이라면서 방대한 가문을 열거하였다. 코우안(孝安)천황이 된 동생의 밀고로 젊은 나이에 죽은 형의 후손이 훗날 어떻게 그렇게 번창하게 되었을까? 세월이 바뀌면서 전란중 억울하게 죽은 형의 후손들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특별한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 – 오토우카시(孝安)로 이어진 카모씨(鴨氏)의 후손들 가운데 코우안(孝安)천황이 된 오토우카시는 가문내에서 결코 명예로운 평가를 받지 못 하였을 것이다.

진무이후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은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 – 히코쿠니쿠루(孝元天皇) – 그의 딸 일여(壹與) 라인인데 일여의 남편되는 사람이 위에 나온 히코쿠니오케쯔(日子国意祁都命)이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아무도 카이카(開化)천황이 여자라고 말 하지 않는다. 히코쿠니오케쯔와 일여사이에 태어 난 것이 히코이마스왕(日子坐王)으로 탄고국 풍토기 잔결의 토벌군 대장이 바로 이 사람이다.

코우겐(孝元)천황과 우쯔시코메(고사기 内色許売命, 일본서기 欝色謎命) 사이에서 오호히코(大彦命)와 일여(壹與)가 태어났다.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孝昭) – 아마타라시 히코쿠니오시히토 – 히코쿠니오케쯔 – 히코이마스는 부계로 본 가계이다. 일본서기는 카이카(開化)천황을 남자로 만들어 코오쇼오(孝昭) – 코오안(孝安) – 코오레이(孝靈) – 코오겐(孝元) – 카이카(開化) – 히코이마스(日子坐王)로 이 가계를 바꾸었다. 그러나 카이카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진실은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孝昭) – 히코쿠니쿠루(彦国牽, 孝元) – 카이카(開化) – 히코이마스의 라인이 맞다.

서기 270년 대 초 히코이마스(日子坐王)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280년 대 초 어머니 카이카 천황이 죽자 할아버지의 형제인 코우안(오토우카시)이 권력을 장악하였고 서기 287년 부여의 의려가 피난민을 이끌고 왔을 때 코우안이 야마토의 왕위에 있었다. 

한편 히코쿠니쿠루(彦国牽), 즉 사호히코(沙本毘古王, 狭穂彦王)가 서기 245년 경 타케쯔누미(建角見命)의 딸 하니야스히메(埴安姬)와 혼인하고 250년 경 타케하니야스히코(武埴安彦命)를 낳았다. 서기 287년 부여의 의려가 야마토에 상륙했을 때 타케하니야스히코는 주전파였고 오호히코(大彦命)는 항복파였다. 타케하니야스히코와 오호히코는 형제간이다. 부여에서 들어온 의려는 오호히코로 하여금 타케하니야스히코를 치도록 하였다. 그 전쟁의 내용이 일본서기 스진조에 나온 타케하니야스히코의 반란이란 기사이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 추 7월 천황은 사도장군(四道将軍)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사도장군의 한 사람인 오호히코(大彦)의 군세가 와니고개(和珥坂, 天理市和珥)를 넘을 때 일족의 타케하니야스히코 (武埴安彦)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황은 오호히코(大彦)와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를 야마시로(山背)에 파견하여 타케하니야스비코(武埴安彦)를 치도록 하였다.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彦国葺)는 혈통이 의심스러운데 우리는 이 사람이 히코이마스(日子坐王)와 동일인이라 본다. 왜냐하면 카이카천황을 남자로 만들어 히코이마스를 카이카의 아들이라 하고 히코쿠니부쿠(彦国葺)는 히코쿠니오케쯔(日子国意祁都命)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히코쿠니오케쯔(日子国意祁都命)와 카이카(開化)여왕이 부부 간이며 한 아들을 양쪽에 기록할 때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다. 히코쿠니부쿠(彦国葺)는 서기 287년의 전쟁시 숙부이며 외삼촌인 오호히코(大彦命)의 부관으로 참전하였다. 나이가 고작 열 예닐곱 정도일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 타케하니야스히코는 몰락하고 오호히코와 히코이마스는 코우레이의 신하가 되어 관직에 있었다. 야마토 북쪽의 야마시로, 타니하, 아후미(近江), 타지마, 와카사지방을 장악한 아메노 히호코는 야마토 북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나 코우레이 천황의 야마토와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서기 299년 의려(依慮)가 부여에 남겨두고 온 아들 의라(依羅)도 부여를 버리고 백제를 거쳐 나니하에 들어온다. 그의 이름을 일본서기는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라 하였다. 아버지 코우레이 천황을 이어 야마토를 차지한 의라(依羅)는 스진(崇神)천황이라 기록된다. 그는 야마토 북쪽에서 거대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아메노 히호코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메노 히호코를 정벌하라는 명령이 히코이마스(日子坐王)에게 떨어진다.

그런데 아메노 히호코와 히코이마스는 남남지간이 아니다. 히코이마스의 어머니 카이카의 외삼촌이 아메노 히호코이다. 히코이마스가 이 때 30세, 아메노 히호코는 60세를 약간 넘은 나이일 것이다. 히코히마스가 지휘하는 야마토 군과 아메노 히호코 군의 전쟁은 서기 302년 경의 일이다. 만주 대륙에서 모용외의 군대와 싸워 온 정벌군은 아메노 히호코의 군사를 압도하였으므로 아메노 히호코 군은 점점 북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이 편의 첫 머리에 나온 마이쯔루시 동쪽에 있는 아오바산(靑葉山)에서 아메노 히호코 군대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주의해야 될 또 하나의 세력이 있으니 바로 타니하의 맹주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이다. 타니하 지역 아마베씨(海部氏)의 본가는 호아카리(天火明命) - 아들 타케쯔누미(建角見命) – 아들 타케다세(建田背命) – 아들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로 이어졌으며 타케모로스미의 시대 아메노 히호코와 이 가문은 손을 잡았다. 서기 270년 대 초 히바스히메와 아메노히호코의 혼인은 이 두 가문이 한 배에 탄 것을 의미한다.

아마베씨(海部氏)의 본가가 이 때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다. 앞 서 인용한 탄고국 풍토기 잔결의 기사중 “옛날 히코이마스왕이 쿠가미미(陸耳)와 필녀(匹女)등을 뒤 쫒아 아리지 마을(蟻道の郷)의 찌하라(血原)에 이르러 먼저 필녀를 죽였다. 그래서 그 곳을 찌하라(血原)라 한다. 그 때 쿠가미미도 항복하려 하였으나 야마토 에타마(日本得玉命)가 강의 하류로 부터 추격해 와서 쿠가미미는 서둘러 강을 넘어 도망쳤다. 그래서 관군들은 방패를 이어 강을 지키며 메뚜기가 튀듯 화살을 퍼부었다. 쿠가미미 군이 화살에 맞아 시체가 물에 떠내려 갔다.”라는 내용이 나왔다.

여기 나온 야마토 에타마(日本得玉命)가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의 아들이다. 대강 히코히마스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타케모로스미의 아들이니 아메노 히호코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를 보면 아메노 히호코와 야마토 에타마가 적으로 조우한 것처럼 씌여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래 같은 편이었으나 전쟁의 상황이 불리하므로 타케모로스미(建諸隅命)의 가문은 정벌군 대장 히코이마스에게 투항하여 가문을 보전하였을 것이다.

히코이마스와 야마토 에타마는 모두 스사노오의 피를 받은 카모씨(鴨氏)이며 이 둘은 비슷한 나이로 항렬이 같은 형제간이다. 서로 아는 사이일 것이다. 야마토 에타마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고 있다.  

위에 나온 필녀의 존재는 아메노 히호코의 말년의 황후이다. 고사기가 스이닌(垂仁)의 말년의 아내로 야마시로노 오호쿠니노 후찌(山代大國之淵)의 딸 카리 하타토베(苅羽田刀弁)와 그 동생 오토카리 하타토베(弟苅羽田刀弁)를 기록했는데 필녀란 이 두 사람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오토카리 하타토베가 낳은 후타지노 이리히메(布多遅能伊理毘賣)가 훗날 야마토 타케루(日本武尊)와 혼인하여 쥬아이(仲哀)천황을 낳았다.

아메노 히호코의 아내가 살해될 정도로 이 전쟁은 치열하게 전개되고 아메노 히호코의 군대는 도주하면서 싸우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움직였다. 이즈시신사(出石神社)가 있는 토요오카시(豊岡市)는 아메노 히호코의 최초의 정착지이다. 이들은 토요오카마져 버리고 도주하였다.

아오바산에서 오오에산까지 직선거리 30키로, 오오에산에서 토요오카까지 35키로, 토요오카에서 타지마의 요로이우라(鎧浦, 현 兵庫県香美町香住区鎧周辺)까지 30키로의 거리인데 산지가 많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이 추격전은 장거리에 걸쳐 진행되었을 것이다.

히코이마스는 천황의 명령으로 어머니의 외삼촌을 토벌하고 있지만 쿠가미미노 미카사를 죽일 수 없는 처지이다. 그는
아메노 히호코(天日槍)를 열도에서 추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였다. 아메노 히호코와 히코이마스간에 최후의 담판이 타지마의 요로이우라(鎧浦)에서 이루어지고 스진(崇神) 천황의 결정이 내린다. 열도를 떠나서 쯔시마(對馬島)에 정착하라. 그리고 쯔시마를 미마끼천황의 이름을 따라서 미마나(任那)로 부르도록 하라. 

말년에 쯔시마(對馬島)로 쫒겨 간 아메노 히호코는 천의 얼굴을 남겼다.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于斯岐 阿利叱智 干岐), 우쯔시코오(内色許男), 스이닌(垂仁)천황, 그 위에 우리는 또 하나의 이름 쿠가미미노 미카사(玖賀耳之御笠, 陸耳御笠)를 덧붙인다.     


- 끝 -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80. 열도의 인맥으로 본 임나일본부


일본서기 권19 제2화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란 기사가 있다. 서기 541년 4월  아라(安羅)의 시칸키(次早岐), 이톤케이(夷呑奚), 다이후손(大不孫), 쿠스누리(久取柔利),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코덴케이(古殿奚), 소쯔마(率麻)의 칸키(旱岐), 산한게(散半奚)의 칸키(旱岐)의 아들, 다라(多羅)의 하칸키(下旱岐) 이타(夷他), 시니키(斯二岐)의 칸키(旱岐)의 아들, 시타(子他)의 칸키(旱岐)와 임나(任那)의 일본정부의 키비노 오미(吉備臣)가 백제에 가서 함께 조서(詔書, 야마토의 킨메이 천황의 조서)를 받았다. 그리고 성명왕이 참석자들에게 하는 스피치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옛적에 나의 선조이신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대 아라(安羅), 가라(加羅), 토쿠쥰(卓淳)의 칸키(旱岐)들이 처음으로 사자를 보내 두터운 친교를 맺었다. 형제와 같이 함께 번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라에게 속아 천황의 노여움을 사고 임나(任那)로 부터 원망을 듣게 된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스스로 깊이 뉘우치고 있으며 하부중좌평(下部中佐平) 마로(麻鹵), 성방갑배(城方甲背) 마나(眛奴)를 가라(加羅)에 보내 <임나일본부(任那の日本府)>와 만나 맹약을 교환하였다.>

일본서기에 임나일본부란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백제 성명왕이 주로 등장하는 킨메이(欽明)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란 실체가 실제 존재하였는지, 누가, 왜 만들었으며 역할이 무었인지 밝혀진 바 없다. 일본에서는 임나일본부를 조선총독부와 비슷하게 이해하고 싶어한다. 서기 541년 임나를 다스리는 일본의 총독부가 아라(安羅, 현 함안군)에 있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사용된다. 옛부터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받은 적이 있으므로 1910년 다시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은 역사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이슈와 만나면 양국 국민들은 예외없이 네셔널리즘에 빠져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결국 삿대질로 끝난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 무렵 일본서기가 기록한 내용을 면밀히 살펴 역사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5세기 열도에 살던 인간들도 현대의 한국과 일본이라는 개념으로 살았을거라는 믿음이다.  일본인들이 열도를 단일국가로 인식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5세기의 인간들은 가문과 부족을 위해 살았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임나일본부를 누가 왜 언제 만들었을까? 과연 그 시대 일본정부라고 불릴 만한 주체가 있기나 하였을까? 혹시 열도에 있던 어떤 가문이 만든 사적인 조직같은 건 아닐까?

고사기의 세이네이(淸寧)천황 편은 단 2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두 왕자 발견 (二王子発見)” 그리고 2장 “우타가키의 결투(歌垣の決闘)”이다. 우타가키(歌垣)란 젊은 남녀가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며 (歌舞飲食) 짝을 찾아 구혼하던 옛 습속이라고 한다.

두 왕자 발견의 두 왕자란 닌켄(仁賢)과 켄죠우(顯宗)를 말한다. 서기 456년 유우랴쿠(雄略)가 등장하여 백제계 왕위 계승권자 이찌노베노 오시하(市辺之忍歯) 황자를 살해하였다. 그 때 오시하 황자의 장녀와 두 아들이 도망하여 신분을 감추고 초야에 숨어 살았다. 이 장녀가 나중 백제의 개로에게 발견되어 한성으로 갔다. 그녀의 이름이 이히토요(飯豊) 황녀이다. 이히토요 황녀는 시마왕(무령왕)을 임신하고 일본에 돌아왔다. 서기 461년 곤지가 이히토요 황녀와 함께 일본에 들어와 세이네이(淸寧) 천황이 되었다. 유우랴쿠는 서기 458년 왕위에서 쫒겨나 유폐되었다. (여기 거론되는 역사는 일본서기 기록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읍니다. 일본서기 내용이 왜곡되었을 경우 이를  재해석하여 바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히토요 황녀가 열도에 돌아와 숨어 살던 두 형제를 찾아낸 것을 두 왕자 발견이라 하며 이들이 왕실에서 성장하여 백제와 열도의 역사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형 닌켄(仁賢)은 온순하고 착실한 성격이었으나 동생 켄죠우(顯宗)는 어둡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서기 477년 곤지는 시마왕(나중 백제의 무령왕)을 왜왕(왜왕 무)으로 세우고 백제에 나가 공주 천도를 돕는다. 왜왕 무는 나이 17세로 야마토의 왕이 되었고 고사기의 유우랴쿠기에 소꼽장난하는 사춘기 천황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고사기 유우랴쿠기의 4개의 장(章)이 17세의 왜왕 무의 모습이라는 것은 “77. 어모니모세(於慕尼慕是)”에서 나왔다.  

서기 479년 백제의 삼근왕이 암살된 뒤 열도에 있던 닌켄(仁賢)이 백제에 나가 동성왕이 되었다. 그 해 곤지는 왜왕 무를 대동하고 어디론지 떠났다. 그리고 열도는 왜왕 무의 어머니 이히토요 황녀가 통치하였다. 서기 484년 이히토요 황녀가 죽고 켄죠우(顯宗)가 누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고사기는 우타가키(歌垣)의 결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히토요 황녀을 이을 켄죠우(顯宗)가 아직 즉위하기 전 헤구리노 오미(平群臣)의 조상(祖), 시비노오미(志毘臣)가 우타가키 무대에 나와 켄죠우가 혼인하려 하던 미인의 손을 잡았다. 그 낭자는 우다노오비토(菟田首)의 딸 오후오(大魚)였다. 그러자 켄죠우도 우타가키 무대로 나갔다.

거기서 시비노오미가  “그대의 궁전 한 구석이 기울었네”라고 노래를 시작하고 켄죠우에게 다음을 이을 것을 요구하였다. 켄죠우가 “목수의 솜씨 탓에 그리 된거다.”

다시 시비노오미가 “대왕의 마음이 우유부단하니 신하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왕자가 다시 “얕은 바다의 파도가 부서지는 것을 보면 헤엄쳐오던 시비(鮪) 곁에 아내(妻) 서 있는 것 보이네”

시비노오미가 화가 나서 “왕자의 울타리는 튼튼할 것 같지만 칼에 잘리고 불에 탄다.” 왕자가 다시 “ 시비(鮪, 오후오)를 노리는 어부여, 그걸 놓치면 슬퍼질거야. 시비(鮪, 오후오)를 노리는 시비(志毘)여.” 이와같이 노래하며 밤 새 싸우다 각자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닌켄과 켄죠우 형제는“조정의 대신들은 아침은 조정에 출석하나 낮이 되면 시비(志毘)의 문전에 모이곤 해. 그러나 지금 시비(志毘)는 틀림없이 자고 있을거야. 지금은 문전에 사람이 없어. 지금 거사하지 않으면 실행하기 힘들어.” 그리고 군사를 모아 시비노오미(志毘臣)의 집을 포위하고 잡아 죽였다.

일본서기에도 이와 비슷한 우타가키(歌垣) 기사가 있다. 고사기는 22대  세이네이(淸寧) 천황기, 일본서기는 25대 부레쯔(武烈) 천황기에 나온다.

닌켄(仁賢) 치세 11년 8월 천황이 붕어했다. 헤구리노 마토리노 오미 (平群真鳥臣)가 국정을 제멋데로 하고 일본의 왕이 되려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황태자를 위해 궁을 짓는다고 하면서 완성되면 자기가 들어가 살았다. 매사 교만하기 짝이 없고 신하로서의 절도를 지키지 못하였다. (승자의 논리로 정변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기록된 역사이므로 사실과 다르다. 헤구리(平群) 부자(父子)는 백제 측 황실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이 때 황태자는 모노노베노 아라카이(物部麁鹿火)의 딸 카게히메(影媛)에게 마음을 두고 사람을 보내 길에서 지나는 척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카게히메는 이전 마토리(真鳥) 대신의 아들 시비(鮪)에게 몸을 더럽혔다. 카게히메는 황태자의 기대를 저버린 것을 두려워하며 “나는 쯔바키찌의 교차로에서 기다리겠나이다.” 라고 대답을 주었다.

황태자가 그곳에 가서 카게히메와 데이트하고 있는데 시비노오미(鮪臣)가 나타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어 고사기에서와 비슷한 우타가키가 된다. 한참동안 우타가키의 수작이 진행되는 동안 황태자는 시비(鮪)가 이미 카게히메와 통정한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매사 무례한 그들 부자(父子)의 행태에 격노하였다. 그날 밤 오호토모 카나무라 (大伴金村) 무라지(連)의 집에 가서 병사를 모아 시비(鮪)를 칠 군사를 일으켰다. 오호토모 군은 나라산에서 시비를 죽였다.

겨울 11월 11일 오호토모 카나무라는 마토리(真鳥)도 토벌할 것을 진언하였고 스스로 병을 이끌고 대신(大臣)의 집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마토리는 살해되었다. 12월 오호토모 카나무라는 적당(賊黨)을 평정하고 정권을 황태자에게 돌려 주었다. 부레쯔(武烈)천황의 시대가 열리고 오호토모 카나무라(大伴金村)가 오호무라지(大連)가 되었다.

고사기는 헤구리노 오미(平群臣) 시비(志毘), 일본서기는 시비(鮪)라고 표기하였고 그는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의 아들이다. 고사기의 세이네이(淸寧)기는 시비(志毘)를 죽이고 켄죠우(顯宗)천황이 즉위하였고 일본서기는 시비(鮪)와 그의 부친 마토리(真鳥)를 죽이고 부레쯔(武烈)천황이 등극하였다고 기록했다.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는 일본서기 유우랴쿠 즉위 기사에 등장한다. 유우랴쿠 즉위시 헤구리노 마토리를 대신(大臣), 오호토모 무로야(大伴室屋)와 모노노베 메(物部目)를 오호무라지(大連)로 임명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유우랴쿠 즉위가 아니라 곤지가 세이네이(淸寧) 천황으로 즉위한 서기 461년의 대신들의 면면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서로 다른 기사에서 헤구리(平群) 씨와 오호토모(大伴) 씨의 정쟁과 등극하는 천황들과의 관계를 짚고 갈 필요가 있다. “59. 大伴大連金村”, “ 77. 어모니모세(於慕尼慕是)”에서 대강 나온 이야기이다. “59. 大伴大連金村”에서 우리는 그가 고구려 출신이라 하였다. 카나무라의 할아버지 무로야(室屋)는 고구려 왕자 고진(高珍)과 함께 열도에 온 사람이다. 고진(高珍)이 열도를 장악하고 인교우(允恭)천황이 되었다. 무로야(室屋)란 인물은 인교우 시대 등장한다. 그리고 유우랴쿠 천황은 인교우의 아들이다.

우리는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真鳥)를 백제 출신으로 본다. 그는 서기 461년 곤지를 수행하고 열도에 들어온 백제의 장군이다. 마토리(真鳥)는 서기 440년, 그의 아들 시비(志毘,鮪) 460년, 카나무라(金村) 460년 경의 인물들이다. 시비와 카나무라는 시마왕(왜왕 무 = 백제 무령왕)과 동연배이다.

고사기가 기록한 우타가키 기사는 켄죠우(顯宗)가 왕위에 오른 연유를 밝힌 것이다. 우타가키의 내용은 역사가들의 작문에 불과하므로 무시한다.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하여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보면 된다. 서기 485년 켄죠우가 즉위한 뒤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왕을 황후로 세운다. 그녀는 인교우(允恭) 천황의 증손이다. 그러므로 나니하노 오노는 고구려인이다.

고사기 유우랴쿠기 “미와강의 소녀”에 나온 아카이코(赤猪子)와 일본서기 어모니모세(於慕尼慕是)의 설화에서 나온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 그리고 켄조우 천황기의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이 동일인이라고  하였다.

켄죠우는 정변을 통하여 왕위에 올랐다. 나니하노 오노왕은 시마왕(왜왕 무)의 딸을 낳은 아카이코(赤猪子)이며 헤구리노 시비는 나니하노 오노의 후견인이었다. 헤구리노 시비의 세력을 꺾지 않고 켄죠우는 나니하노 오노를 차지 할 수도, 왕이 될 수도 없었다. 켄죠우는 곤지와 같은 항렬이므로 시마왕의 숙부인데 조카의 여자를 탐하여 고구려 출신인 오호토모 가문을 시켜 시비(志毘,鮪)를 제거하고 오노왕을 황후로 취한 것이다. 고사기의“우타가키의 결투”는 사실과 부합되는 기사이다.

고구려 출신의 오호토모 가문을 통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고구려 출신의 황후를 세운 켄죠우(顯宗) 천황이 친 고구려 정책을 펴고 백제와 적대하는 것이 서기 487년이다. 켄죠우는 백제왕실의 적통을 이을 시마왕의 여자를 취하는 순간 고구려를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무렵 열도의 권력이 당시 소백산맥까지 남하한 고구려와 손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열도의 역사는 이 무렵 오호토모 가문이 집요하게 고구려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 485년 열도에서 쿠테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한 고구려 출신의 오호토모(大伴) 가문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충청북도 충주, 괴산, 증평지역으로 진출한 고구려와 접선하여 열도에 친 고구려 정권을 세우려 하였다. 이들이 접촉하기 위하여 선택한 중간거점이 아라(安羅)였고 그 곳에 상주하는 세포조직을 운영하였다. 어쩌면 아라(安羅)는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시 고구려에 항복하여 그 때부터 고구려에 협조하여 왔을 가능성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아라인술병(安羅人戌兵)이란 용어는 이를 뒷바침한다.

열도의 오호토모(大伴) 가문이 고구려와 접촉하기 위하여 아라에 만든 세포조직을 역사가들은 뭐라고 명명해야 될까? 8세기의 일본서기 작자들이 이것을 임나일본부라고 일본서기에 기록함으로써 지금도 한일간에 역사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모습이 아닌 이름을 가지고 싸우고 있으니 역사의 실타래는 풀릴 길이 없다. 실제와 가까운 이름이라면 “아라에 설치된 오호토모 가문의 고구려 접선거점” 정도가 아닐까? 아라왜신관(安羅倭臣館)도 합당한 이름이 아니다. 당시 열도에는 정통성을 가진 왕도 존재하지 않았고 왜왕이 신하를 아라에 보낸 일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오호토모 가문이 고구려의 힘을 빌려 열도를 장악하려는 움직임만 있었다.

서기 487년 일본서기에 “백제와 임나(任那)의 분쟁”이란 기사가 나온다. 신화적으로 기술되어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의 현 경남 경북 지역에 13개의 가야 소국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령의 대가야, 합천의 다라(多羅), 그리고 함안의 아라(安羅)가 큰 나라였다.

이때 만들어진 고구려 접선거점은 열도의 외교기관이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며 킨메이(欽明) 시대까지 존속하였으나 오호토모 가문의 퇴진과 더불어 소멸되었다. 
일본이란 국호가 서기 670년 경 성립되므로 서기 541년 4월 일본서기 킨메이(欽明)기에 처음 등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일본부 또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이것을 김태식 교수는 아라왜신관(安羅倭臣館)이라고 불렀다. 

일본서기 서기 487년 키노 오히하노 스쿠네 (紀の生磐宿禰)가 임나(任那)의 임지에서 고구려와 접촉하였다. 서쪽으로 삼한의 왕이 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 일본에서 카미라고 읽느데 왕이라는 의미) 이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임나(任那)의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등과 계략을 써서 백제의 챠쿠마쿠 니게 (適莫爾解)를 니리무(爾林, 고구려의 영내이다)에서 살해하고 시토로 모로노 사시(帯山城)를 쌓아 교통로를 억압하고 항구에서 백제의 군대에 보급하는 식량을 차단하였다.

백제왕은 격노하여 방면장관의 코니게(古爾解)와 관인의 마쿠코게(莫古解)등을 파견하여 시토로 모로(帯山)를 공격케 하였다. 오히하노 스쿠네(生磐宿禰)는 미마나(任那)를 지원하여 맞아 싸웠으나 점점 열세로 몰려 정책실패를 깨닫고 미마나(任那)로 퇴각하였다. 백제국은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등 300인을 살해하였다. (이때 살해된 임나(任那)의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 등의 후손들은 아라(安羅)의 접선거점을 킨메이(欽明) 시대에도 운영하고 있었다.)

열도에서 서기 485년 정권을 장악한 켄조우 천황과 오호토모 가문은 반 백제, 친 고구려, 친 임나(任那)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임나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접촉하였다. 오히하노 스쿠네 (生磐宿禰)는 임나와 짜고 백제의 장군들을 유인하여 살해하였고 임나는 타사강(帶沙江, 현 섬진강) 유역을 철통같이 봉쇄하여 백제의 항로를 차단하였다.

서기 485년 천황이 된 켄죠우는 2년 후 갑자기 사망했다. 갑자기라는 말은 또 다른 정변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서기는 서기 487년 4월 켄조우(顯宗)천황이 사망하고 488년 정월 닌켄(仁賢) 천황이 즉위했다고 한다. 당시의 켄조우는 40대의 나이일 것이다.  백제의 동성왕(닌켄)은 동생 켄조우의 배반에 경악하였다.  그리고 열도에 들어 와 배신자 켄조우를 처단하고 열도를 다스렸다. 그가 닌켄(仁賢) 천황이다.
 
서기 489년 9월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 황후가 자살하였다. 시마왕(무령왕)에게 마음을 주었던 그녀를 빼앗아 황후로 세웠던 켄조우는 몰락하였다. 일본서기는 자살의 이유를 옹색하게 변명하고 있으나 두 남자를 따라야 했던 여인의 말로였다.
 
아라(安羅)에 설치된 고구려 접선거점이란 논의와 관련하여 서기 493년 9월 “고구려와의 접촉”이란 기사가 일본서기에 보인다.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를 사자로 고구려에 파견하여 기술자를 구하였다. 서기 492년 고구려는 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이 즉위하였다. 서기 487년 켄죠우를 응징한 닌켄(仁賢) 천황은 이 무렵 권력을 상실하고 열도의 실권은 오호토모 카나무라가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카나무라는 끈질기게 고구려 커넥션을 추구한다.

“ 77. 어모니모세(於慕尼慕是)” 는 현대 한국어와 발음이나 뉘앙스가 많이 닮았는데 “어머니에게도 남편” 이란 뜻이다. 그 기사에 의하면 서기 493년 고구려에 파견된 사신 가운데 나이 7세의 어린애가 끼어 있었다. 아라키(麁寸)라 기록된 이 아이는 “어모니모세”의 설화에 의하면 켄죠우(顯宗)천황과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 황후 사이에 태어난 왕자이다. 혈통으로 인교우(允恭) 천황의 5대손, 광개토대왕의 6대손이 된다.

당시 고구려의 문자명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손주다. 열도에서 태어난 광개토대왕의 6대손을 문자명왕에게 보내 열도의 주인으로 낙점 받고자 시도한 흔적이다. 사신들은 아라(安羅, 함안), 다라(多羅, 합천), 가라(加羅, 고령의 대가야)를 통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의 전진기지가 있던 충주까지 왕래하였을 것이다.

그해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가 고구려에서 돌아왔다. 기술자의 즈루키(須流枳)와 누루키(奴流枳)를 데리고 왔다.

서기 498년 8월 닌켄(仁賢) 천황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글 첫머리에 나왔던 마토리노 오미(真鳥臣)와 시비노 오미(鮪臣)를 공격하는 오호토모 카나무라의 정변이 발발한다.  이 정변에서 성공한 카나무라는 케이타이(繼體) 천황 시대까지 열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실력자였다.

일본서기는 498년의 쿠데타로 헤구리노 오미의 부자(父子)를 처단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이는 오류이다. 서기 498년의 쿠데타는 헤구리노 마토리(眞鳥)를 제거하였다. 헤구리(平群) 씨는 백제 출신이다. 서기 479년 동성왕을 보좌하여 헤구리노 마토리는 백제로 나갔고 아들 시비는 열도에 남아 나니하노 오노왕과 궁성을 호위하던 중 서기 485년 켄죠우의 정변으로 사망하였다. 아버지 마토리는 닌켄과 함께 487년 열도에 돌아와 켄죠우를 처단하였다.

그는 닌켄(仁賢) 천황의 경호실장이었으므로 오호토모 카나무라에게는 처치해야 될 상대였다. 서기 498년의 정변을 통하여 카나무라는 백제세력을 제거하고 “어모니모세”에 나온 아라키(麁寸)를 옹립하여 부레쯔(武烈) 천황이 탄생한다. 일본서기는 부레쯔가 닌켄을 어어 왕이 되었으므로 닌켄의 아들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켄죠우(顯宗)와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 황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일본서기는 두번의 정변에서 승자(大伴金村 大連)를 칭송하고 패자(平群真鳥臣)를 매도하였다.

일본서기를 아무리 살펴도 서기 479년부터 531년까지 임나를 경영할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은 열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의 천황들은 실권이 없었고 오호토모(大伴) 가문이 두 차례의 정변을 거쳐 권력을 장악하고 친 고구려 정책을 폈다. 서기 485년의 정변이후 아라(安羅)에 고구려 접선거점을 마련한 오호토모(大伴) 가문은 몇 세대에 걸쳐 이를 운영하면서 고구려 커넥션을 추구하였다.

서기 487년 니리무(爾林)에서 전사한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의 후손들이 서기 548년까지 아라(安羅)에서 고구려와 내통하고 있었다. 열도의 오호토모 가문은 아라(安羅)에 주재원을 상주시켜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의 후손들과 협력하였다. 그들은 비밀리에 고구려를 접촉하여 백제를 정벌할 것을 요청하였고 서기 548년 정월 고구려가 6천의 군사를 보내 백제의 독산성(마진성, 충남 예산)을 공격하였다.  

서기 720년 저작된 일본서기는 오호토모 가문이 아라에 설치한 고구려 접선거점을  <임나일본부> 라고  기록함으로써 뭔가 거대한 것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를 호도하였고 후세는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 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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