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29일 금요일

77. 어모니모세 (於慕尼慕是)

일본서기는 21대 유랴쿠(雄略) 천황이 서기 457년 즉위하여 479년 사망했다고 하였다. 백제의 개로왕과 겹치는 그의 재위기간 중 서기 461년 백제의 곤지가 열도에 들어왔고 시마왕(후일의 백제 무령왕)의 탄생기사가 있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의 멸망이라는 대형사건이 그의 임기 중에 일어 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기의 유랴쿠 천황 기록은 놀랄 만큼 간단하다. 그의 기록은 “1) 가족사항, 2) 하얀 바둑이 헌상, 3) 미와강의 소녀, 4) 요시노강의 소녀, 5) 카즈라기산의 신(), 6)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 의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사기는 가족사항에서 단 2명의 자식을 기록하였다. 자식의 숫자가 적다는 것은 그의 재위기간이 의외로 짧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위의 6개의 기사 가운데 ”5) 카즈라기산의 신()” 은 “63. 유랴쿠시대의 진상”에서 다루었다. 표면적으로 신화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기사에서 역사를 읽어 내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이 기사를 쓴 사람들이 아닌 척 하면서 후인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남겨 둔 표지를 찾아 온 몸으로 더듬어야 된다. 카즈라기산의 신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또 어느 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거대한 맷돼지가 나타났다. 천황이 활을 쏘자 맷돼지가 성을 내고 굉음을 지르며 공격해 왔다. 천황은 겁에 질려 개암나무 위로 뺑소니쳤다.
 
또 어느때 천황이 카쯔라기산(葛城山)에 올랐는데 모든 수행원들이 빨간 허리띠를 매고 파란 옷을 입었다. 그 때 건너 산에서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의복이나 모양이나 사람들이 천황의 행렬과 꼭 같았다. 거기서 천황이 “야마토에 나 말고 왕이 없는데 거기 가고 있는 것은 누구냐?”고 묻자 대답하는 모양도 천황과 똑 같았다. 그래서 천황은 크게 노하여 모두 활을 겨누자 저 쪽에서도 똑 같이 활을 겨누었다.

거기서 천황이 “이름을 대라. 이름이나 알고 싸우자”하니 상대가 “먼저 물었으니 알려주마. 나는 흉한 일이든 길한 일이든 한 마디로 분별하여 말하는 카쯔라기(葛城)의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 다” 라 하였다. 천황이 겁에 질려 “알아 모시겠읍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신령님께서 현세(現世)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읍니다.”라고 말 하며 대어도(大御刀)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 그러자 히토코토누시 카미(一言主神)는 손을 치며 모든 물건을 받았다.

위의 신화가 역사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해석은 어떨까요? 대어도와 활을 비롯하여 모든 관인들이 입고 있던 의복까지 벗겨 절하며 헌납하였다는 말은 유랴쿠가 왕위에서 쫒겨 났다는 의미를 고사기의 저자가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백제에서 서기 455 21대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일본서기 유랴쿠 2년 추7월 백제가 천황을 위하여 이케쯔히메 (池津媛)라는 여성을 보냈으나 이 여성이 천황을 싫어하고 이시카하노 타테 (石川楯)라는 자와 눈이 맞아 천황이 격노하여 그 남녀를 불태워 죽였다.

 백제신찬 (新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 해 개로왕이 즉위하였다. 천황은 아레나코(阿禮奴跪)를 파견하여 여자를 구 하였다.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 챠쿠케이에하시토 (適稽女)을 착식(着飾)하여 제출(提出)하였다. 유랴쿠(雄略)는 백제의 개로왕이 보낸 여자를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한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데리고 일본 쿄우토우(京都) 북부해안 미야즈 (宮津)에 상륙하여 질풍노도처럼 나라분지의 카쯔라기산 (葛城山)까지 밀고 들어 와 유랴쿠(雄略)를 제압하였다. 서기 458년 일어난 일로 본다.

서기 458년 유랴쿠는 퇴위되어 연금상태에 놓인다. 서기 461년 곤지의 열도행을 일본서기는 천황을 모시기 위해서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열도를 통치하기 위하여 들어 온 것이다. 그와 함께 큐우슈우에서 갓 태어 난 시마왕과 그의 어머니 이히토요히메 (飯豊皇女)가 동행하였다.   

오오노 야스마로(太安万侶, 660 723)가 고사기를 편찬하여 겐메이(元明) 천황에게 바친 것은 서기 712년 정월이었다. 고사기를 편찬한 오오노 야스마로가 고사기의 유랴쿠기에 남긴 카즈라기산의 신은 후세 사람들이 이해할 것을  기대하며  쓴 역사가 아니었을까?

6개 가운데 남은 4개의 설화의 성격 또한 카즈라키산의 신에 못지 않게 난해하다. 하얀 바둑이 헌상, 미와강의 소녀, 요시노강의 소녀, 궁정 파티에서의 위기의 4개의 기사는 모두 사춘기 젊은이들의 연정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사춘기의 천황(?)이 미모의 소녀를 보고 풋풋한 사랑을 전하는 내용인데 그 가운데 미와강의 소녀를 소개한다.

또 어느 때 천황이 놀러 나가 미와강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빨래하던 소녀를 만났다. 소녀의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다. “이름을 아카이코(赤猪子)라 하나이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그리고 천황은 궁에 돌아왔다. 그러나 아카이코가 천황의 명령을 받들어 기다리는 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마르고 늙어 젊은 날의 미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일생 동안 기다렸다는 내 마음은 전하고 죽어야  . 그녀는 천황에게서 받은 정표를 챙겨 천황을 찾아갔다. 천황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너는 어디서 온 할멈이냐?” 하고 물었다. “모년 모월 천황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을 받들어 오늘에 이르렀나이다늙어 볼 품 없는 모습이 되었으나 제 마음만은 전해 드리고자 오게 되었나이다.” “잊고 있었다. 헌데 너는 명령을 기다리며 좋은 시절을 다 보내 버리고 말았구나.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 놀라고 미안하여 마음 속으로 이제라도 받아 들여 혼인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 늙은 모습에 주저하였다.

대강 위와 같은 내용이다이런 비슷한 4개의 설화가 유랴쿠기에 들어 있다. 오오노 야스마로(太安万侶)라는 역사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기사를 역사서에 남겼을까?

일본서기 닌켄(仁賢) 천황기에 해괴한 이야기가 나온다. 서기 493 9월 히타카노 키시(日鷹吉士)를 사자로 고구려에 파견하여 기술자를 구하였다. 이 사절단이 출발한 뒤 나니하(難波)의 미쯔항(御津港)에서 아쿠타메(飽田女)라는 여자가 울고 있었다. “어머니에게도 세(), 나에게도 세()였는데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 떠나고 말았네!” 라면서 기구한 사연을 털어 놓았다. 그 당시의 “세”는 여자의 남자 형제를 뜻하나 남편도 “세” 불렀다 한다. 오늘 날의 형을 성”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가 카라마(韓白水)의 하타케()에게 시집가서 나쿠메(哭女)를 낳았다. 나쿠메(哭女) 스미찌(住道)의 야마키(山杵)와 혼인하여 아쿠타메(飽田女)를 낳았다. 하타케()와 나쿠메(哭女)는 이미 죽고 없으나 야마키(山杵)는 처의 어머니인 후나메(鮒魚女)와 관계하여 아라키()를 낳았다. 이 아라키()가 아쿠타메(飽田女)와 부부가 되었는데 이번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구려에 갔기 때문에 아쿠타메(飽田女)가 그렇게 섭게 울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복잡한 가족관계는 그냥 들어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쪽이 빠르다. 일본의 역사 애호가들이 작성한 가족관계 도표를 빌려 왔다.

유라쿠기에 들어 있는 미와강의 소녀나 닌켄 6(서기 493)의 일화는 당시 천황가와 연관되는 설화임에 틀림 없으나 설화는 일회성으로 그치고 관련되는 역사적 정보는 전무하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편자들이 퍼즐 게임처럼 기록한 역사를 모색하여 본래의 모습을 밝히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은익한 내용을 누군가 찾아 낼 수 있도록 약간의 접근로를 마련해 놓았을 것이다. 후인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분방자재한 가설을 세우고 따져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後勘校者 知之也). 후감교자 지지야란 문구는 일본서기 케이타이(繼體) 편 마지막에 기록된 말이다.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라 불리는 이 설화의 탁월한 해석이 눈에 띄었다.  "www.daangoon.pe.kr" 이란 사이트의 인현천황 편에 있다. Daangoon이란 필명으로 통하는 이 분이 최초 해석자인지 또는 다른 원조가 있는지는 모른다. 한글 웹 사이트는 복사본이 너무 많아 어느 것이 원본인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있. Daangoon 가설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서기 485년 정월 켄조우(顯宗) 천황이 즉위하고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을 황후로 세웠다. 오노왕은 인교우(允恭)천황의 증손이다.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은 위에 나온 설화의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와 동일 인물이다. 켄조우천황은 스미찌(住道)의 야마키(山杵)에 대응한다. 그러면 카라마(韓白水)의 하타케()란 누구인가?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당시의 실제 역사에 접근해야 된다. 실제 역사란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기록된 역사와 다르기 때문이다.

서기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남하하여 신라를 구원하였다. 신라를 공격하던 가야와 왜의 군대를 무찔렀다. 김해의 가락국은 재기불능의 피해를 입었다. 그 시절 일본 열도는 과연 고구려로 부터 자유로웠을까?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이와 관련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광개토대왕비는 중요한 부분이 너무 훼손되어 애매하다.

우리는  23. 19代 允恭天皇(393 453) 그 역사기록의 허상,  62. 고구려 산성 코우라산 코우고이시 (高句麗山城 高良山神籠石), 63. 雄略時代의 眞相" 에서 고구려와 일본 열도의 관련을 살펴 보았다. 고구려는 대군으로 일시에 열도를 장악하는 대신 광개토대왕의 왕자를 한명 선정하여 일본열도를 장악하는 임무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왕자의 이름이 남송의 송서에 나오는 왜왕 진()이다. 고진(高珍)이라 이름하는 고구려의 왕자가 일본열도 공략의 임무를 띄고 큐우슈우에 들어 와 코우라산에 고구려식 산성을 쌓았다.
()이란 글자는 열도에서 “우즈”라고 읽는데 이 “우즈”를 한자로 옥수(玉垂)라 표기하게 되고 옥수(玉垂)를 다시 일본식으로 “타마타레”로 읽어 고진은 열도에서 타마타레노 미코토(玉垂命)라 불렸다. 후쿠오카 현(福岡県) 쿠루메시(久留米市)에 코우라대사(高良大社)에서 모시는 신이다옛날에는 코우라 타마타레노 미코토 신사(高良 玉垂命神社) 또는 코우라 타마타레궁 (高良玉垂宮)으로 불렸다.  

당시의 야마토는 닌토쿠(仁德)천황의 시대였다. 닌토쿠와 타마타레노 미코토간의 전쟁은 장기간 계속되었다. 서기 419년 닌토쿠 천황이 아와지시마 전투에서 전사하고 야마토가 패배하였으나 타마타레는 야마토로 진군하지 않고 큐우슈우로 퇴각하여 10여년 동안 휴전상태가 된다. 타마타레노 미코토가 전쟁중 입은 상처때문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고 보인다. 10년 간 고구려는 큐우슈우와 세토나이의 곳곳에 고구려식 산성을 쌓고 방어하였다. 그 때 남겨진 고구려의 산성들을 지금 코우고이시(神籠石)라 부른다. 그가 신라에서 온 의원의 치료를 받고 몸을 일으켜 다시 야마토를 장악하고 인교우(允恭) 천황이 된 것이 서기 432년이다.

서기 453년 인교우(允恭)천황이 장남 카루()에 의해 독살된다. 카루황자는 아버지의 후궁과의 정분이 발각되자 선수를 쳐서 아버지를 살해하였다.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신라의 군대도 큐우슈우에 주둔하고 있었다. 후쿠오카의 아나호(穴穗)국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장군 김무(金武)가 문상차 궁에 들어 와 카루황자를 처단하고 천황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가 안코우(安康)천황이다. 안코우는 어린애가 딸린 황녀와 혼인하였는데 3년 후 이 남자 아이가 잠자고 있는 안코우천황을 칼로 찔러 죽고 말았다. 여기서 유라쿠(雄略)천황이 등장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황위에 오른다. 유라쿠는 인교우(允恭)의 친 아들이다. 서기 457년의 일이다.
 
한편 야마토의 사정은 서기 419년 야마토의 닌토쿠(仁德)천황이 전사하고 닌토쿠의 아들 리쮸우(履中)가 즉위하였다. 서기 432년 리쮸우도 인교우와의 전쟁에서 사망하였다. 닌토쿠는 오우진(應神)천황의 아들이니 야마토 황실은 백제의 혈통이다. 야마토가 패배하자 리쮸우의 아들 이찌노헤노 오시하황자 (押磐皇子)는 오미(近江)의 카야노(蚊屋野, 현 滋賀県蒲生郡)로 도망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고구려의 피를 이은 유라쿠는 서기 456 10월 오시하황자의 거처를 찾아 살해하였다. 백제계 왕위 계승권자를 제거한 것이다.

이 때 제거된 오시하 황자의 어린 자식들이 고난에 찬 도피생활을 헤치고 백제의 개로와 곤지에 의하여 역사에 모습을 드러 내게 된다. 무령왕의 어머니 이히토요 황녀(飯豊皇女)와 두 남 동생 닌켄(仁賢)과 켄조우()천황이다

서기 458년 카쯔라기산의 신()으로 그려 진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 혈통의 유랴쿠를 제거하고 도피 중이던 이히토요 황녀(飯豊皇女)를 찾아 백제로 데려 갔다. 개로와 이히토요는 모두 근구수왕의 4대 손으로 같은 항렬이다.

서기 461 6월 이히토요 황녀가 열도에 들어 오는 길에 후쿠오카에서 무령왕을 낳았다. 이히토요 황녀(飯豊皇女)의 열도행은 왕명 때문이 아니라 그 녀 자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그 녀는 소식을 모르는 두 남 동생을 공권력을 이용하여 탐문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아직도 도망자의 신분으로 세상 눈을 피해 살고 있을 어린 동생들을  하루라도 빨리 찾을 일념으로 만삭의 몸을 이끌고 곤지와 함께 열도행의 배에 올랐다. 곤지는 7월 서울에 도착했다.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일본서기는 못 박고  있다.

그러나 이때 곤지의 나이 스무 살 정도로 독신이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52. 飯豊皇女 참조). 그에게는 자식이 없다. 무령왕을 출산한 이히토요 황녀와 곤지의 나이는 거의 같다. 왜 일본서기는 위의 기사에 곤지가 5명의 아들을 데려 왔다고 했을까이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린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를 공격하여 왕과 왕후 왕자들을 몰살하였다. 그 후 공주로 옮겨 백제의 명맥을 이어 가던 문주왕과 삼근왕이 살해되어 후손이 끊어지고 말았다. 열도에 있던 곤지와 새로 태어 난 무령왕 그리고 이히토요 황녀가 찾고 있는 두 남 동생이 백제왕실 혈통의 전부였다.

서기 479 4월 백제의 삼근왕이 죽었다. 천황은 체재중인 곤지의 5명의 아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말다왕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백제왕이 되도록 하였다. 무기를 주고 쯔쿠시국의 병사 5백인으로 호위하여 본국에 보냈다.

그가 동성왕(24)이다. 바로 동성왕이 열도와 관련없는 백제 출신이라고 강조하기 위하여 곤지가 열도에 올 때 아들 5명을 데려 왔다고 뻥을 쳤던 것이다. 곤지가 동성왕으로 내 보낸 것은 이히토요의 동생 닌켄(仁賢)이었다. 그는 열도의 닌켄 천황이 되기 전 이미 백제의 동성왕으로 근무한 것이다. 닌켄(仁賢)과 켄조우()라는 천황의 시호를 사용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오케”로 읽히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다

일본서기는 유라쿠 457 479, 세이네이(靑寧) 480 484 1 16, 켄조우 485 1 1일 – 487 4 25일로 재위기간을 기록하고 이히토요 황녀가 세이네이와 켄조우 사이의 484 1 16일 – 485 1 1일 재위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유라쿠 457-458, 세이네이(곤지) 461 476, 왜무왕(무령왕) 477 - 479, 이히토요 황녀 480 484년이며 그 후 켄조우로 이어진다고 본다. 왜무왕은 서기 477 11월 남송에 조공을 보내고 스스로 使持節都督 倭百新羅任那加羅 秦韓慕韓 七諸軍事 安東大軍 倭王라 칭하였다.

서기 461년 출생한 무령왕이 왜무왕이 되었던 서기 477 17세가 되었다. 백제 개로왕의 피를 받은 유일한 왕자이다이 무렵 그가 미와강에서 아카이코(赤猪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미와강의 아카이코(赤猪子)는 인교우천황의 4대 손으로 고구려의 피를 이은 공주이다. 사춘기를 맞은 백제왕자와 고구려의 공주가 나라현의 미와강 가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다. 카라마(韓白水)의 하타케()란 바로 왜무왕 즉 훗날의 무령왕이었다. 켄조우 천황기는 아카이코(赤猪子)를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이라 하고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의 설화는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라 하였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라는 말을 남기고 무령왕이 열도를 떠난 것은 서기 479년이다 (61. 宋書의 倭武王 上表文 참조). 그들의 나이 열 아홉 살 때 일이다. 그 때 이미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는 임신 중이었다떠나면서 무령왕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 헤구리노 시비(平群鮪臣)에게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의 신변을 부탁하였다.

서기 479년 이후 곤지와 무령왕의 행적은 묘연하다. 서기 485년 이히토요 황녀의 동생 켄조우가 즉위한다. 이히토요 황녀가 사망하고 켄조우가 즉위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쿠데타의 가능성이 많다. 켄조우는 오호토모노 카나무라 (大伴金村連)를 시켜 헤구리노 시비를 죽이고 나니하노 오노왕을 자기 여자로 만든다. 조카의 여자를 빼앗은 것이다. 아카이코(赤猪子)는 무령왕과의 언약을 지킬 힘이 없었다. “딴 데 시집가지 말고 나를 기다려 다오.” 하고 떠난 무령왕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없었다.

오호토모노 카나무라 (大伴金村連)는 “ 59. 大伴大連金村”에서 다루었다. 카나무라는 인교우천황 시절의 오호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의 손자이다. 무로야는 인교우와 함께 고구려에서 온 사람일 것이다.

일본서기 서기 485년 정월 켄조우(顯宗) 천황이 즉위하고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을 황후로 세웠다. 오노왕은 인교우(允恭)천황의 증손이다.

그리고 열도의 대외정책이 급변한다.

일본서기 서기 487년 키노 오히하노 스쿠네 (生磐宿禰)가 미마나(任那)의 임지에서 고구려와 접촉하였다. 서쪽으로 삼한의 왕이 되려고 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신성(神聖, 일본에서 카미라고 읽는데 왕이라는 의미) 이라 하였다. 그런 가운데 미마나(任那)의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등과 계략을 써서 백제의 챠쿠마쿠 니게 (適莫爾解)를 니리무(爾林, 고구려의 영내이다)에서 살해하고 시토로 모로노 사시(山城)를 쌓아 교통로를 억압하고 항구에서 백제의 군대에 보급하는 식량을 차단하였다

是歲,紀生磐宿禰跨據任那,交通高麗.將西王三韓,整脩宮府,自稱神聖.用任那左魯、那奇他甲背等計,殺百濟適莫爾於爾林.爾林,高麗地也.築帶山城,拒守東道,斷運糧津,令軍飢困.

백제왕은 격노하여 방면장관의 코니게(古爾解)와 관인의 마쿠코게(莫古解)등을 파견하여 시토로 모로()를 공격케 하였다. 오히하노 스쿠네(生磐宿禰)는 미마나(任那)를 지원하여 맞아 싸웠으나 점점 열세로 몰려 정책실패를 깨닫고 미마나(任那)로 퇴각하였다. 백제국은 사루(左魯)와 나카타카후하이 (那奇他甲背) 300인을 살해하였다.

百濟王大怒,遣領軍古爾解、內頭莫古解等,率眾趣于帶山攻. 於是,生磐宿禰進軍逆擊,膽氣益狀,所向皆破,以一當百. 俄而兵盡力竭,知事不濟,自任那歸.由是百濟國殺佐魯、那奇他甲背等三百餘人.

서기 487년의 일본서기 기사는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비상한 관심을 갖는 부분이다. 관심이 많은 만큼 다양한 해석이 나와 있다. 니리무(爾林)의 후보지는 한반도는 물론 대마도, 큐우슈우까지 거론된다. 그 가운데  홍익대학교의 김태식 교수는 니리무(爾林)를 충북 음성으로, 시토로 모로 성(山城)을 충북 증평군 도안면의 이성산성(도살성)에 비정하였다. 괴산군 청천면에 대산(大山)이라는 산이 있으나 대산과 도살성은 가까운 곳이지만 같은 장소는 아니다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서기 1979년 고구려의 석비가 확인되었다. 충주 중원 고구려 비라 부른다. 이 석비가 발견되므로서 서기 475년 한성 백제를 멸망시킨 장수왕이 충북지역까지 진출하였음이 확인되었다그리고 서기 487년 충북의 진천, 증평, 괴산, 음성 충주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열도에서 서기 485년 정권을 장악한 켄조우 천황과 오호토모노 카나무라는 반 백제, 친 고구려, 임나(任那)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임나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접촉하였다. 오히하노 스쿠네 (生磐宿禰)는 임나와 짜고 백제의 장군들을 유인하여 살해하였고 임나는 타사강(帶沙江, 현 섬진강) 유역을 철통같이 봉쇄하여 백제의 항로를 차단하였다.

켄조우 천황은 무령왕의 여자를 빼앗고 백제에 도전하였으며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피를 이은 카나무라의 무력에 의존하므로서 카나무라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부터 서기 530년 경까지 카나무라를 중심으로 열도의 정치가 움직였다.  

일본서기는 서기 487 4월 켄조우(顯宗)천황이 사망하고 488년 정월 닌켄(仁賢) 천황이 즉위했다고 한다. 당시의 켄조우는 40대의 나이일 것이다백제의 동성왕은 동생 켄조우의 배반에 경악하였다. 그리고 손자 모대(牟大)를 백제왕위에 세우고 열도에 들어 와 배신자 켄조우를 처단하고 열도를 다스렸다. 그가 닌켄(仁賢) 천황이다.

닌켄과 켄조우 형제에게 백제의 개로와 곤지는 은인중의 은인이다. 아버지가 유랴쿠에게 살해되자  그들은 신분을 감추고 숨어 살고 있었다. 개로와 곤지가 유랴쿠를 제거하고 이히토요 황녀를  발견함으로서 그들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원래의 신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닌켄은 곤지의 말을 듣고 백제의 동성왕으로 부임하여 신명을 바쳐 봉사하였다그런데 열도에 남았던 동생 켄조우는 은혜를 저버리고 조카의 여자를 가로채고 백제를 배반하였다. 백제의 동성왕은 자기 손으로 동생의 패륜을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기 489 9월 나니하노 오노(難波小野) 황후가 자살하였다. 무령왕에게 마음을 주었던 녀를 빼앗아 황후로 세웠던 켄조우는 몰락하였다. 일본서기는 자살의 이유를 옹색하게 변명하고 있으나 사랑의 언약을 관철할 없었던 여인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미와강의 아카이코(赤猪子),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 그리고 나니하노 오노왕 (難波小野) 동일 인물이다. 무령왕이 떠난 녀는 나쿠메(哭女) 출산하였다.

그런 다음 서기 493년 기사로  “어모니모세 아레니모세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가 나온다.

나니하(難波)의 후나메(鮒魚女)가 카라마(韓白水)의 하타케()에게 시집가서 나쿠메(哭女)를 낳았다. 나쿠메(哭女) 스미찌(住道)의 야마키(山杵)와 혼인하여 아쿠타메(飽田女)를 낳았다. 하타케()와 나쿠메(哭女)는 이미 죽고 없으나 야마키(山杵)는 처의 어머니인 후나메(鮒魚女)와 관계하여 아라키()를 낳았다. 이 아라키()가 아쿠타메(飽田女)와 부부가 되었는데 이번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구려에 갔기 때문에 아쿠타메(飽田女)가 그렇게 섭게 울고 있다고 한다.

서기 498년 카나무라가 닌켄(仁賢) 천황과 그의 측근 헤구리노 마토리(平群眞鳥, 眞鳥는 의 부친)를 제거하고 켄조우(顯宗)의 어린 아들 아라키()를 부레쯔(武烈)천황으로 옹립하였다

나니하노 오노왕(難波小野), 나쿠메(哭女), 아쿠타메(飽田女), 아라키()에게는 고구려의 피가 흐르고 있다. 고구려에  파견되는 사신과 함께  고구려의 피를 이은 아라키()가 고구려를 방문하였다. 열도의 외교정책은 이 무렵 친 고구려, 반 백제가 되었다.

서기 501년 백제의 말다왕(末多王) 포악한 짓을 하여 인민을 괴롭혔다. 국인이 왕을 폐하고 시마왕을 옹립하여 무령왕(武寧王)이라 하였다. 백제 24 동성왕이 모대(牟大) 세우고 열도에 들어 동생 켄조우를 응징하였다. 여기서 백제의 말다왕이란 모대를 뜻하며 백제 24 동성왕과 다른 인물이다.

서기 479 미와강의 아카이코(赤猪子)에게 기다려 달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난 무령왕은 서기 501 나이 41 되어서야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열도의 왜무왕이 아니라 열도의 어버이의 나라 쿠다라(百濟) 오호키미(大王) 것이다. 미와강의 아카이코는 서기 489 9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와강의 소녀”에서 고사기의 저자 오오노 야스마로는 “잊고 있었다. 헌데 너는 명령을 기다리며 좋은 시절을 다 보내 버리고 말았구나.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라고 무령왕이 아카이코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서기 504 10 백제국이 마나키시(麻那君) 파견하여 공납하였다. 천황은 백제국이 얼마동안 공납하지 않았던 것을 수상하게 생각하여 사자를 붙잡아 두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서기 505 백제의 왕이 시가키시(斯我君) 파견하여 공납하였다. 특별한 문서를 첨부하여이전 파견한 마나키시(麻那君) 백제의 왕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새로 시가키시(斯我君) 파견하여 삼가 봉사하도록 하겠읍니다.라고 제안하였다. 호우시키시(法師君) 태어났는데 그가 야마토노 키미(倭君) 조선이다.

무령왕이 열도에 보낸 마나키시(麻那君) 시가키시(斯我君) 현대적 표현으로 대통령 특사에 해당되는데 여기서 부터 열도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무령왕의 의지가 나타난다. 백제의 무령왕은 당시 열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오호토모노 카나무라(大伴金村)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특사는 원래 열도의 주인은 왜무왕이니 열도를 내 놓으라고 주장하였다서기 505년 기사는 당시의 특사들이 열도에 눌러 앉아 훗 날 야마토의 왕(倭君)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케이타이 이후 야마토를 접수하였다. 호우시키시(法師君)란 킨메이(欽明) 천황의 이름이다.

카나무라(大伴金村)는 케이타이(繼體) 등장시켜 무령왕에게  대항한다. 왜냐하면 케이타이도 개로왕의 아들(서자)이기 때문에 열도의 주인으로 손색이 없다는 논리이다. 그리하여 부레쯔() 천황을 폐위시키고 서기 507 후쿠이현 (福井縣) 시골에 살던  58세의 노인을 끌어내 야마토 왕위에 앉히니 그가 케이타이(繼體) 천황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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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0일 금요일

76. 우금암(禹金巖)을 아시나요




우금암은 전북 부안군 상서면(上西面)의 우금산(331 미터) 정상에 있다. 산 꼭데기의 거대한 바위가 현저하게 눈에 띄어 바위의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바위의 이름을 따라 산의 이름이 우금산이 되었으며 이 봉우리를 포함하고 있는 백제시대 산성도 우금산성이라 불린다

전라북도 문화관광사이트는 다음과 같은 우금산성 정보를 제공한다

우금 산성은 1974 9 27일 전북기념물 제 20호로 지정된 산성으로 주류(周留), 위금암(位金岩 )산성 혹은 울금바위 산성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성곽은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주변 산봉우리와 함께 아래의 산골짜기를 감싸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3,960m에 달하며 높이는 3m 내외로써 인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성곽이다. 성곽의 북쪽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북장대(北將臺)가 있고, 남쪽에는 남장대(南將臺)가 있다. 성의 내부에는 묘암사(妙岩寺) 터와 함께 많은 건물지들이 남아 있다. 이 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에 가 있던 부여풍(扶余豊)을 받들어 백제 부흥군이 663년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우금암(禹金巖)은 위금암(位金巖), 우진암(禹陣巖), 우금암(遇金巖), 울금바위 등으로도 불린다. 왜 그렇게 불리는지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오고 있으나 한결같이 근거없는 낭설일 뿐이다. 신라 장군 위금이 이 바위에 와서 석성을 쌓고 적을 막아서 위금암이라 부른다거나 삼한시대 우, 진 두 장군이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므로 우진암이라 한다던지 당의 소정방이 김유신을 이 곳에서 만났으므로 우금암(遇金巖)이라 한다는 둥 무의미한  정보가 카피되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조시대 그려진 이 바위의 그림이 미국에서 발견되었다. 서기 1770년 그려진 그림에 우금암(禹金巖)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이 바위는 이조시대에도 우금암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의 울금바위 그림 찾았다.   
 
 18세기 조선 화단의 총수(總帥)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이 서기  1770 2월 전북 부안 변산반도 일대를 스케치한  유우금암기(遊禹金巖記)가 미국 LA  카운티 박물관에서 발견됐다. 길이 268.4, 높이 25.6, 닥종이에 먹으로 그린 두루마리 그림으로 스케치 6점과 여행기로 구성됐다.

표암은 아들 완() 1770년 부안현감으로 발령난 것을 계기로 지인(知人)이었던 정읍현감과 함께 부안 지역 경승지를 여행했다. 표암은 우금암(현재 울금바위로 불림)과 용추(龍湫·현재 직소폭포), 월명암 낙조대(落照臺), 지금은 없어진 실상사와 극락암 등을 방문했고, 이를 화폭에 담았다.”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가 취재한 2005 3 14일 기사)

이 바위에 복신굴(福信窟)이라 불리는 굴이 조성되어 있다. 200여명의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굴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서기 662년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용삭 2(662) 7월에 인원과 인궤 등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과 대산책(大山柵)·사정책(沙井柵) 등의 목책을 함락시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고 요충지에 해당되므로 군사를 더하여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독려하여 성가퀴에 육박하였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성으로 들어가 800명을 베어 죽이고 마침내 신라의 군량 수송로를 뚫었다. (이하 생략)

이때 복신이 이미 군권을 독점하면서 부여풍(扶餘豊)과 점차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풍이 이것을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는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

위의 기사 중 우리의 관심은 복신이 병을 핑계로 굴() 속 방에 누워서 풍장이 문병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는 부분이다. 복신이 당시 굴 속에 기거하고 있었다고 하며 우금암에 복신굴이라고 불리는 굴이 현존한다. 그리하여 우금산성이 백제의 최후의 항전 중 수뇌부들이 있었던 곳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우금암을 포함한 능선 양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동쪽이 묘암(妙巖), 서쪽이 개암(開巖)골이다. 개암골에 개암사가 있다. 묘암골에 백제 부흥군이 옹립한 풍장왕의 거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 폐허로 남아있다.

일본서기 텐찌(天智) 원년 서기 662 5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텐찌천황은 백제의 왕자 풍장등에게 원군을 인솔하여 백제에 파견하였다. 백제 부흥군은 산악지의 요새, 주유성(일본서기 州柔城, 삼국사기 周留城)에 농성하면서 나당 연합군과 대치가 계속되었다. 그해 12월 주유성의 장군들이 모인 가운데 풍장이 제안을 내 놓았다. 그것은 주유성을 버리고 피성(避城, 현 전북 김제)으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주유성은 식량 생산지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가 매말라서 인민들이 기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두 조용히 듣고만 있는 가운데 에찌노 타쿠쯔(朴市田來津)간언하였다. 주유성이 식량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힘 든 장소라는 잇점이 있다. 거기다 피성은 적의 근거지에서 하룻밤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적이 지금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유성이 공격하기 힘 들어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유성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 닥치지도 않은 걱정을 하는가. 이 곳을 떠나 우리에게 살 길이 있다고 믿는가. 주유성을 버리는 것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의 간언은 받아 들여지지 않고 피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타쿠쯔가 예상했던데로 두 달후 다시 주유성으로 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 663 3월 전장군 카미쯔케노노 키미 와카코(上毛野君稚子), 하시히토노 무라지 오호후타(間人連大蓋), 중장군 코세노 카무사키노 오미 오사(巨勢神前臣), 미와노 키미 네마로(三輪君根麻呂), 후장군 아헤노 히케타노 오미 히라부(阿部引田臣比邏夫), 오호야케노 오미 카마쯔카(大宅臣鎌柄)를 보내 2 7천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서기 663 6월 백제왕 풍장은 복신에게 모반의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신하들에게 물은 다음 복신을 참수하였다. 그 해 8 13일 신라는 백제왕이 우수한 장수를 참수한 것을 듣고 백제에 들어 와 주유성을 취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신라의 의도를 간파하고 제장들에게 지금 대일본국의 구장() 이호하라(廬原君臣)가 만여명의 건아들을 인솔하고 바다를 건너 오고 있다. 제장들은 백촌강에 나가 그들을 맞으라.” 고 하였다.

17일 적이 주유성에 이르러 그 왕성을 포위하였다. 대당(大唐)의 군장들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진을 쳤다. 27일 일본의 선두 선단이 도착하여 대당의 선단과 교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불리하여 물러나고 대당은 진지를 견고하게 지켰다.( 戊戌, 賊將至於州柔,繞其王城. 大唐軍將率戰船一百七十艘,陣列於白村江. 戊申, 日本船師初至者與大唐船師合戰. 日本不利而退, 大唐堅陣而守)

28일 일본제장과 백제왕은 기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 우리가 앞 설테니 너희는 뒤 따르라고 서로 주장하였다. 거기다 일본의 중군은 대오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대당의 견고한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대당은 좌우에서 협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군의 패배가 이어지고 물에 빠져 익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배의 방향을 돌릴 수도 없었다. (현해탄을 건너 온 대군이 흘린 피로 백촌강이 핏빛으로 물든 가운데) 타쿠쯔는 하늘을 우러러 죽기를 맹세하고 이를 갈며 수십명의 적을 도륙한 뒤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은 몇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己酉,日本諸將與百濟王,不觀氣象而相謂之曰「我等爭先,彼應自退.」更率日本亂伍中軍之卒,進打大唐堅陣之軍.大唐便自左右夾船繞戰.須臾之際,官軍敗績.赴水逆死者眾.艫舳不得迴旋.朴市田來津仰天而誓,切齒而嗔,殺數十人,於焉戰死. 是時,百濟王-豐璋與數人乘船逃去高麗)
 
9 7일 백제의 주유성이 당에 항복하였다. 이 때 나라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주유가 떨어졌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백제라는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다시 올 수 있겠는가! 테레성(弖禮城)에 가서 일본의 군장들과 앞 일을 의논하자. (九月,辛亥朔丁巳,百濟州柔城,始降於唐.是時,國人相謂之曰:「州柔降矣,事無奈何.百濟之名,絕于今日.丘墓之所,豈能復往.但可往於禮城,會日本軍將等,相謀事機所要.」)

드디어 침복기성(枕服岐城)에 수용되어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고 알렸다. 11일 무테(牟弖)에 도착. 13일 테레(弖禮)에 도착하다. 24일 일본의 선사(船師)와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 곡나진수(谷那晉首), 억례복류(憶禮福留)와 국민들이 테레성(弖禮城)에 도착하였다. 25일 일본을 향하여 출항하였다.
(遂,教本在枕服岐城之妻子等,令知去國之心. 辛酉,發途於牟. 癸亥,至禮. 甲戌,日本船師及佐平余-自信、達率木素貴子、谷那晉首、憶禮-福留并國民等至於禮城. 明日,發船始向日本)

서기 1997년 전영래(全榮來) 원광대학교 교수는 삼국사기, 신구당서, 일본서기가 기록한 백촌강과 주유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비정하였다. 우선 기벌포(伎伐浦)와 백강(白江)을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백제의 개화(皆火), 흔량매(欣良買)로 보았다. 이곳이 바로 현재의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강 하구 유역이다. 당의 13만 대군을 끌어들인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불의에 도성을 함락당한 백제유민은 임존(任存), 주류(周留)의 두 성에 의지하여 웅진의 당군을 곤경에 빠뜨린다.

신라는 이를 구원한다는 명분아래 출병하였으나 실은 이를 틈타서 독자적으로 두량이성(豆良伊城)을 탈취하려 꾀하였다. 이 두량이성을 일본서기는 쯔누성(州留城), 삼국사기는 주류성(周留城)이라 하였다. 서기 661 3 12일 신라군은 고사비성(古沙比城)에 주둔하여 백제의 두량이성과 8 – 9 킬로미터 떨어져 서로 대치하였으나 4 19일 헛되이 퇴각한다. 신라장군 품일은 고부의 고사비성에 머물며 두량이성(사산산성) 36일 간이나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고사비성은 정읍시 고부면의 금사동산성(金寺洞山城)이다.

일본서기가 기록한 지명 무테(牟弖)는 옛 미동부리(未冬夫里) 즉 현재 전남의 남평(南平) 광주지방이다. 후일 무등산 혹은 무진악(武珍岳)으로 불리는 이름이다. 테레(弖禮)는 백제의 동노현(冬老縣) 지금의 보성군 조성(鳥城), 득량(得粮)면 일대이다.

주유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난민들은 9 7일 부안의 주유성을 떠나 11 200리 떨어진 광주(무테)에 도착하였고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여 13일 광주에서 135리 떨어진 보성의 득량에 이르렀다. 피난의 행렬은 하루 약 45리 꼴로 걸은 셈이다. 24일 침복기성의 가족들도 득량에 도착하였고 이들은 9 25일 일본으로 출항하였다.

이 장면의 역사기록은 설명이 필요하다. 백제의 최후를 몸소 체험한 지배층이 향하고 있는 일본이란 백제사람들에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사람들이 현재 갖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정서로 이 시점의 역사를 이해하면 안 된다. 이해의 시작은 일본이란 국명이 서기 670년 무렵에야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기 663년 백제부흥전쟁이 무위로 끝난 시점에 일본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고 왜()로 표현된 열도의 집단은 백제의 일부였다. 일본서기가 이 무렵의 기사에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제인들은 9 25일 보성군 득량만을 떠나 타국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열도에 있는 자기 나라 땅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풍장의 어머니가 전쟁중 사망한 사이메이(齊明)천황이며 풍장의  또 다른 이름이 오호아마황자 (大海人皇子, 훗날의 天武天皇, 622 – 686)이다.  그는 고구려고 간게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전쟁터를 빠져나온 풍장을 태운 선박이  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은 일본이다. 그가 가장 안전한 곳을 버리고 왜 고구려로 가겠는가? 부여풍장과 오호아마황자와 관련된 기사는 지금까지 "21. The Battle of Baekgang, 32. 죠메이(舒明)천황, 34. 부여풍장은 누구인가, 41. 선광사 연기, 71. 일본국의 출현"에서 나왔다.

삼국사기 지리지가 기록한 백제의 개화(皆火)는 지금 계화(界火)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계화도 간척사업이 있었던 곳이 바로 백제의 개화(皆火)현이다. 한자로 개화라 하였지만 우리 말은 갯벌이었을 것이다. 그냥 갯벌. 개는 발음되는 그대로 개, 벌은 불 화()가 된 것이다. 갯벌의 또 다른 표현이 기벌(伎伐)이다. 그리하여 개화(皆火)든 기벌(伎伐)이든 모두 갯벌인 것이다.


그러면 흔량매(欣良買)의 원래 우리말은 무엇이었을까? 흔량매는 희얀() ()였을 것이다. 백강 또는 백촌강이란 이름이 바로 흔량내에서 유래한다. 흔량내를 지금 동진강이라 부른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내륙의 땅처럼 보이지만 현 동진강 하류는 대부분 갯벌을 통과하여 서해로 흘러 들었고 그 곁에 백산(白山)이 자리잡고 있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백산성이 있다. 백산성에서 동진강이 내려다 보인다. 백제의 흔량매현을 통일신라는 희안(喜安)현으로 고쳤다. 우리 말 희얀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동진강 하구의 백산은 높이 47미터에 불과한 낮은 산이지만 주위가 온통 갯벌인 평지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이며 옛부터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항구로 사용되었다.  

개암사는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서기 634(무왕 35) 백제의 왕사(王師) 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라고 전해 온다. 사찰의 이름을 개암(開巖)이라 부르게 된 배경은 뒷산 정상의 웅장한 우금바위(또는 우금암)의 전설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찰이 그렇듯이 개암사 창건에 대한 역사기록도 조선후기에 편찬된 사적기(寺蹟記)에 의존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적기는 1658년 금파당(金波堂) 여여(如如)스님이 엮은 개암사중건사적기(開巖寺重建寺蹟記) 1640년 월파자(月坡子) 최경(崔勁)이 지은 법당중창기문(法堂重創記文), 1941년 주봉당(舟峰堂) 상의(尙毅) 스님이 편찬한 개암사중건연혁기 (開巖寺重建沿革記) 등이 있으나(www.simjeon.kr/xe 사찰순례) 그냥 전해오는 내용을 적은 것으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개암사 뒷 산 꼭데기에 있는 우금암에 복신굴이 있다고 하였다.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는데 서쪽 바위에 복신굴이 있고 인접한 동쪽 바위에 또 다른 굴이 조성되어 있다. 복신굴처럼 지상에 조성된 게 아니라 지상에서 약 20 미터 높이에 위치하므로 사다리가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다. 이 굴의 이름이 원효방 또는 원효굴이라 불린다. 서기 676년 신라의 원효가 개암사에 와서 수도했으므로 원효방이라 한다고 전 해 온다. 그러나 서기 676년 원효(617 - 686)는 변산반도에 와서 한가로이  수도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인격이었다.

고려시대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 원효방(元曉房)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이규보는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 兼 掌書記)라는 첫 벼슬을 받아 전주로 부임, 의욕적으로 각 고을을 돌아 다니며 보고 들은 바를 수필 형식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남행월일기이다.

서기 1200(庚申) 8 20 부령(扶寧 지금의 부안) 현령(縣令) 이군(李君) 다른 손님 6 - 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뜨락과 창과 문이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 오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이후생략)

원효방은 겨우 8 되는데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헤어진 누비옷에 도를 닦는 모습이 고고하였다.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초상화가 있고 외실에는 () 하나 켤레 찻잔(茶병) 불경놓은 책상만이 있을뿐 때는 도구도 없고 시자(侍者)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蘇來寺, 현 내소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 : 불공)에 참예할 뿐이라 한다.

개암사 뒷 산에 있는 우금암에서 고부쪽을 바라보면 우금산 코 앞에 삿갓 모양의 작은 산이 있다. 해발 107미터에 불과한 작은 산이며 입산(笠山) 또는 사산(蓑山)이라 불린다. 백제 시대 이 산의 우리 말 이름이 도롱이(蓑 또는 笠)뫼이다. 도롱이란 풀을 엮어 비 올 때 뒤집어 쓰던 우비(雨備)이다. 도롱이뫼가 한자로 두량이산(豆良伊山)이며 이 곳에 구축된 성이 두량이성이다. 따라서 주유성이란 의미상으로 이 곳을 말하나 근거리에 있던 본성 우금산성도 지금 주유성이라 불리고 있다


우금산성을 정면에서 수호하는 전초성은 두량이성과 바로 옆에 위치한 주산(舟山, 231))의 소산리 산성이다. 주산(舟山)은 원래 배뫼였으며 백제시대에는 이 곳까지 선박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배를 맨다는 의미로 배맷산이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배뫼의 뫼는 산()을 뜻하며 배뫼가 주산의 원래 이름이었다고 본다.   

우금암을 울금바위라고 한다는 전승은 14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진실에 근접한다. 개암사 뒷 산의 거대한 바위의 순수한 우리말 이름은 울근바위였을 것이다. 지금은 울퉁불퉁, 울쑥불쑥, 울근불근으로 남아 있는 우리 말이다. 설악산의 울산바위는 울산에 있던 바위가 금강산으로 옮겨 가다가 힘이 빠져 설악산에 주저 앉게 되었다고 하나 이 바위 또한 울근바위였을 것이다. 주위보다 불쑥 튀어 나온 바위라는 의미의 보통명사가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울금바위가 되었고 그것을 한자로 적다 보니 우금암이 된 것이다.

백제의 갯벌현은 현대인들의 눈에도 갯벌로 인식되고 있다. 서기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식량증산을 목표로 간척사업이 시작된 백제의 개화현은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새만금 방조제 건설 공약으로 또 다시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이 된다. 그리고 백제인들이 바라보던 갯벌은 모두 육지가 되었다. 그 땅 속 어딘가에 서기 663 8 27일 백강의 전투중 전사한 1만 여명의 백제인들이 잠 들어 있다.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은 막대한 양의 골재를 필요로 하였다. 변산반도의 산악지대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골재를 채취할 수 없다. 국립공원을 제외하고 주변의 야산에서 골재를 채취해야 되는데 백제가 갯벌현이라 불렀을 정도로 평탄한 땅에 야산이 별로 없다.  

위에서 거론한 부안군 주산면의 주산(배뫼산)은 소산리 산성이 있는 곳이다. 주산은 지금 새만금 방조제 공사용 골재 채취장이 되었다. 주산의 허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

우금암에서 고부평야를 바라보면 고부면의 두승산 (444미터)이 보이고 두승산 전면으로 영원면 은선리에 천태산(195)과 응봉산(229)이 있다.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백제시대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으로 비정되는 금사동토성(金寺洞土城)이 이 곳에 있다. 이 성은 장문리(長文里)와 은선리(隱仙里)의 경계를 이루는 응봉산(鷹峯山, 229미터)의 북쪽 계곡을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石築山城) 이다. 성의 이름은 골짜기의 이름 금사동을 따서 삼았다. 성의 둘레는 2,365m인데 북쪽 골짜기에 문터(門址)와 수구(水口)가 있다. 산의 정상쪽으로는 봉우리가 있으면서 내성(內城)을 이루었고, 남문터와 내성 북쪽으로는 우물터 세곳과 수구터 세곳이 있다. 이와같이 내외이중(內外二重)의 성터는 옛 백제지역(百濟地域)의 중요한 성터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형식의 것으로서 주목되며, 따라서 이 성은 백제(百濟) 후기(後期) 5방성(五方城) 가운데 중방(中方)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의 터로 추정된다

은선리 삼층석탑 동쪽으로 보이는 천태산도 새만금 방조제 골재 채취장이 되었다. 백제 부흥전쟁의 최후의 항전지의 양측 유적, 부안 주산면의 주산과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천태산이 동시에 새만금 방조제 공사용 골재를 제공하면서 산 허리가 잘려 나가고 있다현지의 개발반대 기사를 전라도닷컴(www.jeonlado.com)에서 발췌한다.

“문화유적의 보고 배메산 훼손 중단하라! (http://jeonlado.com/v3/print_paper.php?number=8244)
주산 주민들, 배메산 문화유적 문화재 지정 촉구 (20060308)

지난 2 7일 오전 10, 부안 주산에서 새벽에 집을 나서 눈길을 달려온 주산 주민들과 문화연대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 위원회 위원장, 문화재 전문위원)는 서울 창덕궁 앞에 위치한 문화연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화유적의 보고 배메산 훼손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배메산은 오는 3월 하순께 새만금방조제 최종 2.7km 구간의 전진공사와 끝물막이 공사를 앞두고 토석 채취 작업이 한창이다. 공사를 맡고 있는 현대건설 관계자에 따르면 “들어가는 돌은 160만㎥ 가량인데 90% 정도 확보했고 대석 36만㎥ 외부에서 들여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16만여㎥는 이미 확보했고 앞으로 20만여㎥ 가량의 물량이 더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토석을 채취하기 위해 방조제 인근 야산에 석산개발 허가가 나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고 있는 중이며, 주산면 배메산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배메산의 주산쪽 개발업체의 허가 물량만 해도 약 47만㎥이며 방조제를 다 막은 후에도 내부개발을 위한 138km의 방수제를 쌓으려면 토석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배메산의 토석채취 허가는 더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부안읍에서 남쪽으로 약 10㎞ 지점에 해발 231m의 배메산(주산)이 있다. 옛날에는 이 산 바로 앞에까지 조수가 드나들어 배를 메어두었다 하여 ‘배메산’이라 불렀다 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에서부터 조선시대 유물까지 출토되고 있다.

이미 1975년 전주시립박물관장 전영래씨에 의해 볍씨 토기가 발견되었다.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 소산(배메산)성터에서 발견된 토기편은 사질민무늬토기로서 홍도(紅陶), 흑도(黑陶), 마제석검편(磨製石劍片), 석촉(石鏃), 삼각형돌칼, 홈자귀 등과 함께 발견된 것인데, 그 아랫면에 찍힌 볍씨자국은 길이 6.5mm, 3.8mm로서 장폭비(長幅比) 1.71이다. 소로리 볍씨 발견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유물로 당시 일본이 주장했던 벼농사 일본 전래설을 뒤집는 발견이었다.

서기 2000년 문화재 지정신청이 되었으나 전라북도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부안군은 이 일대에 대한 채석허가를 내주기 시작했다. 2003 8월부터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으나 특별한 유물이 없다고 하여 채석을 해도 무방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기 전에 이미 채석 허가가 난 상태이다. 문화재보호법상 3만 제곱미터 이상의 개발에서는 지표조사를 해야 한다는 효력은 1999년부터 이지만 이곳의 채석은 3만 제곱미터를 초과했는지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이나 부안군은 답변이나 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다.

1984년 문화재 지표조사와 2004년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에서 유물산포지도를 작성했다. 당시 유물산포조사는 이 일대의 문화유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2003년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문화재지표조사에 심각한 허점이 있는 것이 발견된다. 문화재청과 전라북도와 부안군은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한 지표조사에 대해 정밀 확인을 하지 않고 채석 허가를 해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배메산의 채석 상황은 유물산포지역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마치 유물산포지역을 섬 처럼 만들어 놓고 채석을 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잘못된 지표조사와 잘못된 채석허가로 인해 고대 백제의 주요 문화유적지가 흔적을 알 수 없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배메산은 고대 백제의 역사문화경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눈에 보이는 유물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해 문화유적의 진정성을 파괴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유적은 당해 문화유적이 내포하는 진정성과 역사문화경관 차원에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한다.”

개발과 보존사이에서 어디 쯤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위의 기사는 2006 3 8일 나왔지만 공사는 계속되어 서기 2011년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는 완료되었고 주산과 천태산은 처절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간척사업으로 확보한 내륙의 광활한 토지를 앞으로 어떤 용도로 쓸지 알 수 없다.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는 땅을 만들고자 간척사업을 해 온 것이 된다. 지금은 농경용 토지가 필요한 시대는 지났다. 남한은 생산되는 쌀이 남아돌아 걱정인 시대가 되었다. 새만금 사업은 단군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이지만 사업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즉흥적인 선거공약 때문에 타당성이 의문시되는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인 것이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쓴 책 이름이다. 그는 하바드 대학교 정치철학 교수이다. 이 책이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10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한국사람 50명 가운데 1명이 이 책을 구매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라는 물음에 목 말라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개발과 보존사이에서 현명한 판단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