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4일 월요일

­­­­­­­­­­­­­­­­­­­­­­­­­­­­­­­­­­­­­­­­­­­­­­­­­75. 카미(神)에서 인간으로 (II)


서기 245년 경 구야국(狗邪國)에서 야마토에 돌아 온 사호히코(沙本毘古王, 狭穂彦王, 孝元天皇)에게 혼처(婚處)가 기다리고 있었다. 카즈노 현주(葛野県主)가 되어 쿄오토오(京都)지역에 근거를 마련한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의 딸 하니야스히메(波邇夜須毘賣)와 혼인하여 서기 250년 경 타케 하니야스히코(建波邇夜須毘古命, 武埴安彦命)를 낳았다. 고사기는 그녀를 코우찌(河内)의 아오타마(青玉)의 딸이라고 기술하여 하니야스히메가 가모타케쯔누미의 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자 하였다. 또 이카 가시코메(伊賀迦色許賣命, 伊香色謎命)와도 혼인하여 히코 후쯔오시노 마코토 (比古布都押之信命, 彦太忍信命)를 낳았다. 그가 유명한 타케시우찌 (武内宿禰)의 할아버지이다.

일여(壹與)의 어머니, 구야국의 공주 우쯔시코메(고사기 内色許売命, 일본서기 欝色謎命)가 야마토에 자리잡자 구야국과 야마토의 왕래가 많아진다. 우쯔시코메의 어린 동생 우쯔시코오(内色許男)가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구야국 거등왕의 왕자이다. 서기 265 년경 구야국의 우쯔시코오와 코토시로누시의 딸 사호히메(고사기 沙本毘賣命, 일본서기 狭穂姫)가 사랑에 빠져 혼인하였다. 그녀가 스이닌(垂仁)천황 황후로 기록된 사호히메(고사기 沙本毘賣命, 일본서기 狭穂姫)이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에게 우쯔시코오는 어머니 쪽을 따르면 외삼촌, 아버지 쪽을 따지면 고모부가 된다. 우쯔시코오와 사호히메는 구야국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결혼은 곧 파국을 맞는다. 사호히메가 혼인을 포기하고 몰래 바다를 건너 나니하(難波, 현 오오사카)에 와서 머물렀다. 그녀가 나니하의 히메코소신사(比売碁曾社)에 진좌하고 있는 아카루 히메(阿加流比売神)이다. 여자 측에서 일방적으로 혼인을 파기한 듯 우쯔시코오는 아내를 단념하지 못 하고 그 뒤를 쫓아 열도에 들어온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는 그에게 아나토(穴門, 현 야마구찌현)에 머물 것을 명한다. 이 때 그는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란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사를 종합하면 이쯔쯔히코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나니하(難波)로 쳐들어 간 것 같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 천황 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는 아내가 도망친 것을 알고 바다를 건너 그녀를 찾아 나니하에 입항하려 하였으나 그 해협의 신(海峡の神)이 가로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뱃머리를 돌려 타지마국(多遅摩国, 현 효고현 일본해에 면한 지역)에 정박하였다. 이 기사가 오우진 천황편에 기록되어 있으니 오우진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연대는 자의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무시한다. 오우진(應神 )은 서기 362년 이후 야마토의 왕이 되었으며 우리는 지금 260년 대의 역사를 더듬고 있다.     

야마토 정부는 그의 나니하(오오사카) 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호히메의 안전을 염려한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사가 이어진다.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호코(天日槍)가 배를 타고 하리마국(播磨国, 효고현 남부 현 코베 부근)에 도착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천황은 오호토모누시(大友主)와 나가오찌(長尾市)를 파견하여 사정을 알아 보게 하였다. 천황은 그가 머물 곳을 시사하 마을(宍粟邑)과 아하지섬(淡路島)의 이데사 마을(出浅邑)로 한정하였다.

역시 그의 오오사카 상륙은 허가되지 않았다. 오오사카에는 그에게서 도망쳐 온 아내 사호히메(아카루히메)가 숨어 있다.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를 통하여 오오사카에 들어 갈 수 없게 되자 그는 방향을 바꾸어 일본해 측으로 돌아 가 타지마국(多遅摩国)을 점령하고 장기전에 들어간다. 타지마국의 왕이 되어 눌러 앉은 것이다.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와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라 표기되었던 그의 이름은 일본해 측에서 다시 바뀌어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또는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于斯岐 阿利叱智 干岐)로 표기된다. 이 신화를 해석하면서 그가 가져 왔다는 8종의 신보(神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런 평가를 거부한다. 아메노히호코는 신라의 왕자, 쯔누가 아라시토는 대가라국의 왕자라 하였다. 신보를 전하기 위하여 그가 열도에 온 것이 아니다. 신보란  당시 가라국 왕자의 휴대품 정도로 보면 된다.  

일본서기 스이닌(垂仁)천황기에 쯔누가 아라시토의 기사가 이어진다. 같은 사람의 기사를 여러 시대에 일어난 별개의 일인 것처럼 풀어 놓았다. 스진(崇神)천황 시대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배에 타고 코시노쿠니(越国)의 케히노우라(笥飯浦)에 왔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나는 카라노쿠니(大加羅国)의 왕자이다. 이름을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또는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于斯岐 阿利叱智 干岐)라 한다. 야마토에 성왕(聖王)이 계신다 하여 찾아왔으나 아나토(穴門)에서 길을 헤메다 북쪽 바다를 따라 이즈모노쿠니(出雲国)를 거쳐 케히까지 오게 되었다.”

그 사이 스진(崇神)은 죽었고 스이닌(垂仁)이 즉위하자 그를 모신지 3 년이 지난 어느 날 천황이 고향에 가고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향 생각이 간절하던 참입니다.” “네가 길을 잃고 헤메지 않고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선제(先帝)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미마키(御間城)천황(崇神)의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

아내를 찾아 온 쯔누가 아라시토가 코시노쿠니의 케히에 온 것은 서기 268년 경이다. 일본서기는 이쯔쯔히코(伊都都比古), 아메노히호코(天之日矛, 天日槍),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 우시키 아리시찌 칸키(于斯岐 阿利叱智 干岐), 우쯔시코오(内色許男), 스이닌(垂仁)천황을 개별적인 사람으로 묘사하였으나 이는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이다. 또 미마키천황(崇神)은 서기 300 년 아마토에 들어 왔으므로 일본서기의 이 부분의 기술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구야국의 왕자 우쯔시코오(内色許男)는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던지 타지마국(多遅摩国)을 점령하고 거기서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살면서도 사호히메에 대한 집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게릴라부대를 양성하여 야마토로 보내 도망친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일본서기 스이닌(垂仁)천황기의 사호히코 왕(狭穂彦王)의 모반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스이닌이 사사로운 증오심에서 부하들을 보내 전처를 살해한 사건이다. 사호히코왕과 사호히메가 부친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거성 이나키(稻城)에 거처하고 있는 것을 정탐한 우쯔시코오의 특수부대는 코세(御所)에 있던 이나키에 불을 질러 그들 자매를 불태워 죽인다.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의 공권력이 유린되고 그녀의 부친과 고모가 희생되었다. 서기 272 년 경이다. 스이닌은 이 작전의 책임자 야쯔나다(八綱田)의 공로를 치하하였다.

효고현(兵庫県) 토요오카시(豊岡市)에 이즈시신사(出石神社)가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제신(祭神)의 아메노히호코(天日槍命)는 신라의 왕자였으나 8 종의 신보를 가지고 도래하여 타지마국(但馬国)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는 타지마국(但馬国)을 점령하고 이곳에 궁을 지었다. 그는 점차 세력을 키워 타니하국(丹波國, 현 쿄오토오 지역)을 거쳐  야마시로(山城), 오우미(近江), 와카사(若狭), 에찌젠(越前)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가 야마토의 왕이 된 적은 없다.야마토의 마키무쿠(纒向)에 도읍하고 타마키궁(珠城宮)에 거주했다는 일본서기 기록은 허구이다. 

그가 야마토의 권위를 무시하고 야마토의 북쪽 국경을 위협하고 있던 시절에도 일여는 여전히 야마토의 왕이었다. 서기 270년 대의 그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그가 남긴 후손을 살펴 보는 것이다. 스이닌(垂仁)천황의 첫 황후는 사호히메(狭穂姫命)이다. 그녀는 서기 272년 경 코세(御所)의 이나키(稻城)에서 살해되었다. 고사기는 사호히메가 히코이마스(彦坐王)의 딸이라 하였으나 그것이 오류임을 지적했다. 그녀는 코토시로누시의 딸이다. 코세(御所)는 코토시로누시의 근거지이며 카모쯔바(鴨都波)신사가 있는 곳이다. 스이닌의 두번 째 황후는 타니하국(丹波國)의 히바스히메(日葉酢媛命)로 야마토히메(倭姫命)를 낳았다. 

야마토히메는 비교적 역사적인 인물로 이세(伊勢) 땅에 아마테라스(天照大神)를 모신(현 이세신궁) 황녀이며 이것이 제궁(斎宮)의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전해 온다.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공주이며 신녀였다. 스이닌이나 야마토히메에게 아마테라스는 구야국 왕실의 조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야국의 후손인 스이닌이 자기 조상을 위하여 이세신궁을 지은 것이다. 그가 야마시로에 있던 서기 295년 경 야마토 히메를 시켜 아마테라스를 모실 장소를 물색한 결과 현 이세신궁 자리를 골랐다. 야마토 천황가가 천손강림 신화를 만들면서 아마테라스를 천황가의 신으로 둔갑시켰지만 야마토히메가 아마테라스를 모실 터를 고르고 있을 무렵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조상신이었다.  

야마토 히메는 야마토 타케루가 서기 320년 대의 정벌전쟁에 올인하고 있을 때 그를 도왔으며 이세신궁에 보관하고 있던 아마노 무라쿠모노 쯔루기(天叢雲剣, 열도 지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신물)를 그에게 내어주었다. 야마토히메는 서기 270년 대 중반의 인물로 야마토 타케루보다 한 세대 앞 선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서기는 야마토 히메를 야마토 타케루(日本武尊)의 숙모라고 기술했다. 이 보검은 지금 나고야의 아쯔타신궁(熱田神宮)에 보관되어 있으며 스사노오가 이즈모국 (出雲国)에서 퇴치한 야마타노 오로찌(八岐大蛇)의 꼬리에서 나왔다고 하나 이 검의 내력과 관련된 역사적 진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스사노오(백제의 초고왕)가 이 세형동검을 야마타이국의 히미코에게 신표로 주었을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추측이다. 스사노오는 오시호미미(天忍穂耳尊)의 아버지이므로 아마테라스는 당시의 백제왕 스사노오의 위세를 빌어 오시호미미가 큐우슈우를 지배할 명분을 확보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카라노쿠니(加羅国)의 왕자 쯔누가 아라시토(都怒我 阿羅斯等)는 토요오카시(豊岡市)의 이즈시신사(出石神社)에 군림하면서 서기 272년 게릴라부대를 야마토에 보내 전처 사호히메를 불 태워 죽였다. 그리고 그 무렵 히바스히메와 혼인하였다. 고사기가 기록한 히바스히메의 족보는 히코이마스(日子坐王, 彦坐王) – 미찌누시(丹波道主命) – 히바스히메 (氷羽州比売命, 日葉酢媛命)로 되어있다. 그러나 히비스히메가 서기 250년 대의 인물이고 히코이마스가 270년 대의 인물이니 이 계보는 맞지 않는다.

스이닌(垂仁)을 스진(崇神)의 아들로 만들기 위하여 스이닌 주변 인물들의 족보가 무리하게 편집된 탓이다. 그러나 스이닌은 서기 240년 대, 스진은 서기 270년 대의 사람이다.

스이닌 32년 두번 째 황후 히바스히메(日葉酢媛命)가 죽었다. 스진 34년 야마시로(山背)의 오토 카리하타토베(弟苅羽田刀弁)를 후궁으로 하였다. 그녀가 후타지 이리히메(両道入姫命)를 낳았다. 후타지 이리히메는 야마토 타케루와 혼인하여 쥬우아이(仲哀)천황을 낳았으니 서기 300년 경의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히바스히메의 사망은 서기 290년 대 전반으로 보이며 이 무렵이면 스이닌의 나이도 50대에 들어섰을 것이다. 

스이닌의 두번 째 황후 히바스히메는 타니하국(丹波國, 현 코오토오 지역)출신인데 그녀가 사망한 뒤 야마시로(山背)출신의 오토 카리하타토베와 혼인하였다. 이는 서기 290년 대 스이닌(垂仁)의 활동반경이 야마시로지역으로 이동했음을 나타낸다. 야마시로는 후일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帯比売命, 気長足姫尊, 神功皇后)의 근거지이다.  

쿄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 쿠미야마쬬(久御山町) 이찌타(市田)에 스이닌천황(垂仁天皇)을 모시는 타마키신사 (珠城神社)가 있다. 이찌타는 스이닌천황의 궁성, 타마키궁(珠城宮)이 있던 자리이며 궁성터에 신사를 지었으므로 타마키신사(珠城神社)라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스이닌의 타마키궁이 야마토의 마키무쿠(纏向)에 있었다고 하였다.

서기 290년 대 스이닌천황은 코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에 진출하여 타마키궁(珠城宮)을 지었다. 아마토의 북부지역 대부분이 그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서기 280년 대 초반 야마토의 여왕 일여(壹與)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진무시대에 출세가도를 달리던 오토우카시(弟猾)가 왕위를 이었다. 그는 코토시로누시의 아들이다. 다른 이름은 오호모노누시 쿠시미카타마 (大物主櫛甕玉)이다. 일본서기는 그를 코우안(孝安)천황이라 기록하였다.

서기 287년 야마토에 전란이 닥친다. 서기 285년 모용외(慕容廆)의 공격에 의하여 만주 대륙에서 부여의 전군이 격파되고 부여왕 의려(依慮)는 배를 타고 부여를 탈출하여 야마토까지 피난하였다. 야마토는 부여의 피난민을 당하지 못하고 야마토의 왕 오호모노누시와 그의 아들 오호타타네코(大田田根子)는 도망쳤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이 야마시로의 키즈강(木津川)가에서 벌어진다.

일본서기는 이 사건에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의 반란이란 제목을 달았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 추 7월 천황은 사도장군(四道将軍)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사도장군의 한 사람인 오호히코(大彦)의 군세가 와니고개(和珥坂, 天理市和珥)를 넘을 때 일족의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황은 오호히코(大彦)와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를 야마시로(山背)에 파견하여 하니야스비코(埴安彦)를 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와니고개(和珥坂)를 넘어 정예군을 이끌고 나라산(那羅山, 奈良市北部 丘陵)에 올라 싸웠다. 그리고  와카라강(輪韓河, 木津川)까지 진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하니야스비코 (埴安彦) 군과 대치한다. 양군이 키즈강 (木津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하니야스비코(埴安彦)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의 군세를 바라보며 “왜 너는 군세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느냐?”하고 물었다.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너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자(者)다. 너는 제사권(祭祀権)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관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온 것이다. 이는 천황의 명령이다.”라 대답했다. 그래서 신(神)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활을 쏘았는데 맞지 않았다. 다음에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활을 쏘자 가슴에 명중하여 하니야스비코 (埴安彦)가 죽었다. 이것을 본 적군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관군은 강을 건너 북쪽의 적을 쳐부수고 반 이상의 목을 베었다.

하니야스비코(埴安彦)와 오호히코(大彦)는 어머니는 다르지만 사호히코 왕(狭穂彦王)의 아들이다. 히코쿠니부쿠(彦国葺)는 하니야스비코의 조카이다. 오호히코(大彦)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는 부여의 의려(依慮)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였고  하니야스비코(埴安彦)는 외적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국난을 당하여 집안끼리 적이 되어 싸운 것이다. 부여의 난민을 이끌고 온 의려가 야마토의 왕이 되었다. 일본서기는 그를 코우안(孝安)의 아들, 코우레이(孝靈) 천황이라 하였다. 스진 10년이라는 일본서기 기록은 오류이다. 스진은 서기 300년 야마토에 들어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서기 287년이며 타케하니야스는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키던 충신이었으나 만세일계라는 황실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일본역사는 그를 평가절하하였다. 그러나 이름을 감춘 채 쿄오토오의 카미카모신사에서 제신으로 모신다. 명예는 잃었지만 제삿밥은 얻어먹는 셈이다.

쿄오토오시(京都市)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는 보통 카미가모신사(上賀茂神社)로 불린다. 짝을 이루는 가모미오야신사(賀茂御祖神社)가 있는데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로 불린다. 불행하게도 가모와케 이카즈찌 (賀茂別雷)라는 인물이 역사상의 누구인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시모가모신사는 진무동정시 야마토에 진출한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와 그의 딸을 제신으로 모신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가모와케 이카즈찌(賀茂別雷)라는 익명으로 처리된 사람의 실명을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라고 보는 것이다. 황실과 국가를 동일시하였던 일본은 타케하니야스비코의 역사적 의미 해석에서 혼란을 보일 수 밖에 없다.
타케하니야스비코는 반란을 일으킨 수괴로 만들고 카미가모신사의 제신은 가모와케 이카즈찌라는 가공의 이름으로 처리하였다.

이 부분의 일본 고대사를 해석하는데 가모와케 이키즈찌의 실명이 타케하니야스비코라고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일본 고대사 해석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내용을 포함한다. 이는 학계에서 말하지 않는 역사가 거론되고 있음을 뜻한다. 

코우레이(孝靈)천황 시대 야마토 역사의 아이돌은 야마토 토토히 모모소(倭迹迹日百襲姫)이다. 그녀는 코우레이가 축출한 전왕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의 아내이다. 그녀에 관한 기사도 스진(崇神) 천황기에 들어 있다. 이름이 너무 길어  그냥 모모소히메(百襲姫命)라 칭한다.

모모소히메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 해 온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카미는 낮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밤에만 나타났다. 모모소히메가 남편에게 졸랐다. “야밤에만 오시니 얼굴을 볼 수 없어 안타까워요. 아침까지 계시면…?”.  “그럼 내일 아침 당신의 머리빗 통 속에 있을테니 놀라지 마오!” 

모모소히메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려 빗통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 작은 뱀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카미는 다시 사람의 모습이 되어 “네가 나를 수치스럽게 하였으니 나 또한 너를 수치스럽게 하리라.” 하고 말했다. 모모소히메는 미모로산(御諸山, 三輪山)에 올라 하늘을 쳐다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다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져 앉았다. 그때 젖가락에 음부를 찔려 죽고 말았다.

모모소히메는 오호찌(大市, 大和国 城上郡 大市郷, 현 桜井市 北部 마키무쿠(卷向) 유적지)에 매장되었는데 그런 전설 때문에 그녀의 무덤을 하시하카(箸墓, 箸墓古墳)라 부른다. 이 무덤은 낮에는 사람이 만들고, 밤이면 귀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오호사카산(大坂山, 香芝町)의 돌을 날라 만들었는데 산에서 무덤까지 인민들이 열을 지어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했다고 한다.

신화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신화를 너무 현학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는 것을 배격한다. 서기 287년 부여의 의려의 공격으로 야마토의 왕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가 패하고 도망쳤다. 그의 아내 모모소히메는 죽음을 면하고 살아 남았다. 늙은 도망자가 밤이 되면 몰래 아내를 찾아 왔다 새벽이 되면 산으로 피신하곤 하였다.

뱀이니 젖가락이니 하는 이야기는 본질이 아니며 패전한 전왕과 왕후의 눈물겨운 해후가 밤 사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뱀은 남 모르게 움직여야 되는 비밀스러움을 나타내고 젖가락은 남녀로 맺어지는 운명적인 연대를 암시한다.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는 지금 나라(奈良)의 미와산 기슭에 있는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의 제신이다. 카모씨에서 갈려 나온 그의 후손들이 미와(三輪)씨로 불린다. 오호모노누시는 스사노오의 증손이다.

모모소히메는 코우레이(孝靈)천황 치세에 살아 남아 스진(崇神)시대까지 살았다. 그녀는 전후 정권은 물론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는지 일본 역사상 가장 화려한 매장 의식이 거행된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하시하카가 일본 전방후원분의 효시이기 때문이다.   

코우레이(孝靈) 천황이 야마토를 장악하자  타니하국(丹波國, 현 코오토오 지역)의 스이닌 천황은 쿄오토오부(京都府) 쿠세군(久世郡)까지 진출하여 타마키궁(珠城宮)을 짓고 아마토의 턱밑까지 진출하였다. 나라(奈良)분지의 남북에서 코우레이와 스이닌이 대치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 전쟁에 돌입한 기록은 없다. 피차간 서로 상대를 공격할 힘이 없었던 모양으로 서기 300년까지 그러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서기 300년 부여의 의라가 또 다시 난민을 이끌고 와 열도를 장악한다. 그가 스진(崇神)이다. 스진은 스이닌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스이닌은 스진에게 패하여 열도를 떠나 쯔시마(對馬)로 쫒겨났다. (69. 부여의 엑소더스 참조).

앞에서 인용된 스이닌기의 기록을 보자. “그 사이 스진(崇神)은 죽었고 스이닌(垂仁)이 즉위하자 그를 모신지 3 년이 지난 어느 날 천황이 고향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향 생각이 간절하던 참입니다.” “네가 길을 잃고 헤메지 않고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선제(先帝)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미마키(御間城)천황(崇神)의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 

위의 기사 가운데  앞의 부분은 소설이다. 그러나  “그러니 미마키(御間城) 천황(崇神)의 이름을 따서 너의 나라 이름을 바꾸도록 하라.”는 언사는 스진이 스이닌을 쯔시마(對馬)로 추방하며 내린 명령이다.  위의 기사에 의거하여 쯔시마(對馬)를 미마나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마나(任那)라는 지명이 역사상 처음 나타나는 기록이다. 이 지명은 세월이 지나면서 한반도의 가야를 지칭하는 것처럼 의미가 왜곡되어 임나가야로 발전한다.


도망친 아내에 대한 증오로 아내를 뒤쫓아 열도에 들어 온 아메노히호코(天日槍)는 전처 사호히메를 불 태워 죽이고 열도에 수 많은 후손을 남긴 뒤 말년에 쯔시마로 쫓겨갔다. 그는 쯔시마에서 죽어 거기 묻혔을 것이다. 일본서기는 그를 스이닌(垂仁)천황이라 기록하였다.

일본서기 스이닌기의 마지막에 “타지마모리(田道間守)의 순사(殉死)”라는 구절이 들어있다. 아메노히호코 (天日槍)가 타지마국(但馬国)에 와 정착하고 마에쯔미미(前津耳)의 딸 마타노오(麻陀能烏)와 혼인하여 타지마 모로스쿠(但馬諸助)를 낳았다. 그가 키요히코(清彦)의 할아버지이다. 스이닌 90년 봄 2월 천황이 귤을 구해 오라고 타지마모리(田道間守)를 구야국(常世国, 멀고 먼 상상의 나라)에 보냈다. 99년 가을 7월 천황이 죽었다. 향년 140세였다. 다음 해 3월 타지마모리가 귤 열매와 나무를 구해 왔으나 천황이 이미 붕어한 것을 듣고 쓰러져 절규하더니 숨이 끊어졌다.

이 기사는 쯔시마에서 죽음을 맞는 스이닌과 관련된 기사이다. 평안한 죽음은 아닌 듯 그를 모시던 타지마모리가 약을 구하러 구야국에 가야 할 정도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병 치레를 했던 모양이다. 타지마모리는 위에 나온 키요히코와 형제간이다. 고사기는 타지마모리와 키요히코가 아메노히호코의 4대손이라 하였으나 이는 고의적으로 시간을 늘리기 위한 구실이다. 아메노히호코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네 아들이 마치 네 세대였던 처럼 기록하여 연대를 늘리고자 하였다. 먼 곳 (구야국) 에 가서 약을 구해 왔으나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으니 무덤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는 이야기이다.

타지마모리와 키요히코의 등장은 훗날 태어 날 오키나가 타라시히메(息長帯比売命, 気長足姫尊, 神功皇后)의 신화를 여기 연결하기 위한 배려이다.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의 어머니가 이 가문 출신으로 아메노히호코의 손녀이다. 

일본서기는 진무(神武, 초대) -  스이제이(綏靖, 2대) – 안네이(安寧, 3대) – 이토쿠(懿德, 4대) – 코우쇼우(孝昭, 5대) – 코우안 (孝安, 6대) – 코우레이(孝靈, 7대) – 코우겐(孝元, 8대) – 카이카(開化, 9대) – 스진(崇神, 10대) – 스이닌(垂仁, 11대) – 케이코(景行, 12대)로 천황의 순번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 해석은 일본서기와 다르다. 우리는 진무(재위 245-256) – 일여(재위 257 – 283) – 코우안 (재위 284-287)– 코우레이(재위 288 – 299) – 스진(재위 300 – 318) – 케이코(재위 319 – 344)의 순이다. 그 밖의 인물들은 야마토의 왕이 된 적이 없다. 이토쿠(懿德)는 신대(神代)의 아지스키 타카히코네 (阿遅鋤 高日子根神)이며 신대의 왕이다. 일본서기는 니기하야히를 안네이(安寧), 코토시로누시를 코우쇼우(孝昭), 사호히코를 코우겐(孝元)으로 이름지어 왕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일여는 히미코의 종녀라 하였으나 두 사람이 만난 적은 없다. 그녀는 역사적으로 절묘한 시기에 태어나 백제와 가야를 평화의 다리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백제와 가야 사이에 핀 한 송이 꽃(開花) 이었다.  꽃(花)은 일본어로 하나이며 하나는 한국어로 일(壹)이다.   

                                                                        – 끝 -

--> 주) 이 글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를 역사로 이해하기 위하여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를 참조하여 씌여진 것입니다. 이 웹사이트는 열도의 고대사를 한글로 해설한 가장 방대하고 탁월한 역작입니다. 특히 열도의 천황계보와 백제왕실과의 관련, 그리고 천황들의 인적상황에 관한 가설은 독창적이고 혁명적이라 할 수 있읍니다. 열도의 고대사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과 조우했을 때 그의 해석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곤 하였읍니다.  열도의 고대사에 관심있으신 분은 반드시 읽어야 될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2011년 1월 10일 월요일

74. 카미(神)에서 인간으로 ( I )


 

서기 239년 일본서기의 카미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로 전환된다. 모든 카미들이 기존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인간으로 등장한다. 이름이 뒤죽박죽이 되어 카미와 인간의 동일성을 담보할 수 없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이 다르고 씨성의 계보도 어느 게 진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씨성의 계보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기록에 의지하여 자기 가문을 미화하고자 하므로 과장이 더 심하다. 진무천황 즉위년을 서력 기원 전 660 년이라는 가설아래 계보들이 제작되어 부분적인 진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로서는 가공의 세대가 삽입되어 불합리하다.      

혼란의 정점에 니기하야히(고사기 邇藝速日命, 일본서기 饒速日命)가 있다. 일본서기는 니기하야히도 큐우슈우의 니니기(瓊瓊杵)처럼 하늘에서 내려 와, 야마토를 다스리는 천신의 아들로 기록했다. 천신의 아들이면서 니기하야히는 큐우슈우의 정벌군에게 항복하여 이와레비코 (伊波礼毘古 = 火火出見 =神武天皇)의 신하가 되었다. 그의 아들 우마시마지 (宇摩志麻遅命, 可美真手命 )는 모노노베노 무라지 (物部連)의 선조가 되었다. 

카미의 역사에서 스사노오의 아들 가운데 오호토시(大年神)가 있었다. 오호토시의 큰 아들이 오호쿠니미타마 (大國御魂)이며 다른 이름은 쿠시타마 니기하야히 (櫛玉饒速日尊)이다.  

따라서 스사노오 – 오호토시 – 니기하야히 – 우마시마지 라인이 모노노베 씨의 계보이다. 서기 239년 진무동정시 니기하야히는 마흔을 갖 넘은 나이였다.  스사노오 – 오호토시 – 니기하야히는 가모씨(鴨氏)이다.    

스사노오의 후계자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의 큰 아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는 야마토의 왕이었다. 진무동정시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와 나가스네히코(那賀須泥毘古, 長髓彦)는 큐유슈우의 정벌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니기하야히의 측근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니기하야히는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의 신하였다.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아지스키 타카히코네 라인이 가모씨(鴨氏)의 본류이다. 

선대구사본기(先代旧事本紀)는 니기하야히의 이름을“天照國照彦天火明 櫛玉饒速日尊”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이름의 전반부의 아메노 호아카리(天火明)와 뒷 부분의 니기하야히(饒速日尊)가 다른 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런 식으로 천지개벽 전후의 아이덴티티는 난맥상을 연출한다. 따라서 천지개벽 전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카미와 인간의 족보를 약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호아카리(고사기 天火明命, 일본서기 火明命)와 니기하야히(饒速日尊)는 동일인이 아니다. 전편의 카미의 역사에서 스사노오의 아들 가운데 오호쿠니누시, 오호토시 그리고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가 나왔다. 카미의 역사의 우카노 미타마가 인간의 역사의 호아카리이다. 그의 흔적은 타니하(丹波)지역에 많이 남아 있으며 진무이후 그의 아들 카모타케쯔누미 (賀茂建角見命)는 카즈노현주(葛野県主, 山城国葛野郡)가 되어 쿄오토(京都)로 진출하였다. 

모노노베씨(物部氏)와 오와리씨(尾張氏)는 니기하야히에서 갈려 나왔는데 옛 기록의 오류 때문에 호아카리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니기하야히를 야마토의 왕인 것처럼 등장시켜 이와레비코에게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야마토는 큐우슈우의 정벌군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하였다. 저항의 선봉에 에시키(兄磯城)와 나가스네히코(고사기 那賀須泥毘古, 일본서기 長髄彦)가 있었다. 따라서 니기하야히는 당시 야마토의 권력중추의 인물이 아니라 이와레비코와 내통하여 가문을 파멸로 이끈 배신자였다. 그의 아들 타카쿠라지(高倉下, 宇摩志麻遅)는 쿠마노(熊野)에서 난관에 처한 이와레비코를 구출하였다. 

인간의 역사의 에시키는 카미의 역사의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였다. 에시키와 니기하야히는 사촌간이다. 정벌군에게 저항한 나가스네히코(長髄彦)는 신대(神代)의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이다. 그는 오호쿠니누시의 아들로 타카히코네와 배 다른 형제이다.  카미의 역사에서 그는 이즈모(出雲)를 천손에게 양도하는데 반대하여 천손측의 타케미카즈찌(고사기 建御雷神, 일본서기 武甕槌)와 힘을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이는 그가 인간의 역사에서 천손측에 항거하는 선봉장임을 암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전편에 나왔던 스사노오, 오호쿠니누시와 오호토시의 계보를 다시 삽입한다.

고사기에 스사노오의 계보(系譜)가 나와 있다.
1)     쿠시나다 히메(櫛名田比賣)가 야지마지누미(八嶋士奴美神)를 낳았다.
2)     카무오호이찌 히메(神大市比賣)가 오호토시(大年神)와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를 낳았다.

오호쿠니누시 (야지마지누미)의 계보중 역사상 중요한 인물만 고르면 다음과 같다.
1)     타키리비메 (多紀理毘賣)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와 타카히메(高比賣) 다른 이름은 시타테루히메 (下光比賣命)를 낳았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지금 카모대어신(迦毛大御神)으로 불린다.
2)     카무야타테히메 (神屋楯比賣)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을 낳았다.
3)     어머니가 분명하지 않은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

오호토시(오호쿠니누시의 배 다른 동생)의 계보는 많은 인물이 열거되어 있지만 우리가 거론하게 될 사람은 오호쿠니 미타마 (大國御魂神)와 오호야마쿠히(大山咋神) 다른 이름은 야마스에노 오호누시(山末之大主神)이다. 오호야마쿠히는 히에이산(日枝山)과 카즈노(葛野)의 마쯔오 (松尾)에서 제신으로 모신다. 

코노하나노 사쿠야히메(고사기 木花之佐久夜毘売、일본서기 木花開耶姫)도 혼돈의 원천이다. 그녀는 오호야마쯔미 (大山津見 )의 딸로 오호쿠니누시와 혼인하여 호데리(火照命)를 낳았다. 훗날 니니기를 만나 하룻 밤을 자고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들은 니니기는 “내 아이일 리 없어, 쿠니쯔 카미(國津神)의 자식일거야.”  (佐久夜毘賣 一宿哉妊 此胎必非我子 而為國津神之子) 라며 코노하나 사쿠야히메를 의심한다. 이는 코노하나 사쿠야히메의 첫 남편이 쿠니쯔 카미(國津神) 이었음을 암시한다. 쿠니쯔 카미란 오호쿠니누시를 말한다. 고사기는 그녀가 불속에서 호데리(火照命), 호스세리 (火須勢理命), 호오리 (火遠理命)의 3명을 한꺼번에 낳은 것처럼 기록했다. 마지막의 호오리가 호호데미(고사기 穂穂手見, 일본서기 火火出見)이며 진무천황이다. 

천손가는 아마테라스(天照大神), 오시호미미(忍穗耳命), 니니기(瓊瓊杵命), 호호데미 (火火出見命)로 혈통이 이어졌으며 그 이외의 곁가지들은 신화의 첨가물이다. 고사기는 오시호미미가 아메노 호아카리(天火明命)와 니니기(瓊瓊杵)를 낳았다고 하였고 진무천황을 호호데미의 손자로 묘사하였으니 고사기를 편찬한 역사가들까지도 혼돈의 시대의 실상을 헷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호데리(火照命)의 계보 역시 난맥상을 보인다. 그는 오호쿠니누시 (大國主神)와 코노하나 사쿠야히메 사이에 태어 난 아들이며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되었으나 큐우슈우의 쿠마소(熊襲)를 탐하여 대마도(對馬島)를 호호데미에게 주고 쿠마소를 취하였다. 호데리가 우미사치(海幸彦)였으며 호호데미가 야마사치(山幸彦)였다. 

스사노오의 아들 야지마지누미(八嶋士奴美神)가 오호야마쯔미(大山津見)의 딸 코노하나찌루 히메(木花知流比賣)와 혼인하여 후하노모지 쿠누스누 (布波能母遅 久奴須奴)를 낳았다. 

야지마지누미가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이며 코노하나 찌루히메가 코노하나 사쿠야히메이다. 후하노모지 쿠누스누가 바로 호데리(火照命)이며 쿠마소로 진출한 뒤 아다노 하야토(阿多隼人)씨의 시조가 되었다. 

야마토 정벌을 완료한 진무천황(神武天皇)은 서기 245년 1월 1일 카시하라궁(橿原宮)에서 즉위한 뒤 승전의 전공에 따라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미찌노오미(道臣命)에게 택지와 집을 내리고 오호쿠메(大來目)를 우네비산 서편 강가에 살게 하였다, 또 시이네쯔히코 (椎根津彦)를 야마토노 쿠니노 미야스코 (倭国造), 오토우카시(弟猾)를 타케다무라(猛田邑) 현주(県主)로, 오토시키(弟磯城, 黑速 )를 시키(磯城)현주로, 쯔루기네(剣根, 高倉下)를 카쯔라기노 쿠니노 미야스코(葛城国造)로 임명하였다. 또 야타가라스(八咫烏) 에게 상을 내렸다. 그의 자손이 카즈노(葛野) 현주(県主) 이다 (山城国葛野郡).  

 새로운 정권에서 요직을 맡아 출세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권이 바뀌면서 몰락하는 구정권의 실세들이 있다. 소호노 아가타(層富県) 하다(波多)의 오카사키(丘岬)에 니이키도베(新城戸畔)라는 여두목이 있었다. 또 와니(和珥 - 天理市) 고개 밑에 코세노 하후리(居勢祝) 라는 자가 있었다. 호소미의 나가라(臍見の長柄) 오카사키에 이노하후리(猪祝) 란 자가 있었다. 이하레비코(磐余彦尊 – 진무천황의 다른 이름)는 군사를 보내 이들을 모두 죽였다. 또 타카오와리 마을(高尾張邑)에 쯔찌쿠모(土蜘蛛 – 항거하는 토착민)가 있었다. 그들은 키가 작고 손발이 길었다. 이하레비코의 군사들은 이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새로운 정권의 실세로 등장한 미찌노오미와 오호쿠메 그리고 시이네쯔히코는 큐우슈우에서부터 호호데미와 동행하였으므로 정권의 실세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오토우카시, 오토시키, 쯔루기네 그리고 야타가라스가 누구인가이다.

오토우카시(弟猾)는 침략자에게 항거하던 자기 형을 적에게 고발하여 죽게하고 전쟁이 끝나자 타케타(猛田) 현주가 되었다.  그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아들로 진무치하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는 여러 개의 이름을 남겼다. 카모누시(鴨主命), 아메노히카타 쿠시히카타 (天日方奇日方), 쿠시미카타마(櫛甕玉), 쿠시미카타 (櫛御方), 오호모노누시 쿠시미카타마 (大物主櫛甕玉)등이다. 그는 진무의 황후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気余理比賣)와 동기간이니 진무천황의 처남이 된다. 

진무이후의 인간의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고사기 大倭帯日子国押人命 (オホヤマトタラシヒコクニオシヒト), 일본서기 日本足彦国押人 (ヤマトタラシヒコクニオシヒト) 天皇(第6代孝安)으로 나타난다. 

오토시키(弟磯城, 黑速)는 침략자에 대항하던 형 에시키(兄磯城)를 등 지고 적과 내통하여 전쟁이 끝난 뒤 시키(磯城)현주가 되었다.  그가 바로 니기하야히이다.  니기하야히는 호호데미에게 항복하여 시키(磯城)현주가 되고 그의 아들 우마시마지(宇摩志麻遅, 高倉下, 劍根)는 카쯔라기노 쿠니노 미야스코(葛城国造)가 되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니기하야히는 고사기 師木津日子玉手見命 (シキツヒコタマデミ), 일본서기 磯城津彦玉手看 (シキツヒコタマテミ)天皇(第3代安寧)으로 기록된다. 

 야타가라스(八咫烏)는 의문의 인물로 전쟁의 논공행상으로 카즈노 현주 (葛野県主)가 되어 쿄오토(京都)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는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의 아들, 카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이며 쿄오토의 시모가모신사의 제신이다.  스사노오 – 우카노미타마 – 카모타케쯔누미 라인 역시 가모씨(鴨氏)이다.

그런 인연으로 쿄오토시(京都市)  후시미 이나리대사(伏見稲荷大社)에서 우카노미타마를 제신으로 모신다. 후시미 이나리대사는 전국 약 4만개의 이나리신사(稲荷神社)의 총본궁이다. 일본사람들은 이나리신(稲荷神)이 농업의 신이며 오곡풍양, 상업번성, 교통안전을 가져온다고 한다.


진무는 야마토를 점령하고 현지의 여인을 취하여 정비로 하였다.  그의 나이 51세 때이니 혼인할 나이는 아니지만 정치에는 정치의 논리가 있다. 야마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현지의 실력자의 딸과 혼인하여 피 지배층의 협조를 얻고자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선택된 여인을 고사기는 미시마노 미조쿠히(三島湟咋) 의 딸 세야다타라히메 (勢夜陀多良比賣)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사이에 태어 난 이스케요리히메(伊須気余理比賣), 일본서기는 미시마노 미조쿠히미미 (三嶋溝杙耳)의 딸 타마쿠시히메(玉櫛媛)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사이에서 태어 난 히메타타라 이스즈히메 (媛蹈鞴五十鈴媛)라고 했다.

카미의 역사의 오호토시(大年神)가 인간의 역사에 기록된 미시마노 미조쿠히(三島湟咋 )이다. 진무천황의 새로운 황후 이스즈히메의 아버지는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 어머니는 세야다타라(勢夜陀多良)이다. 

이스즈히메 (五十鈴媛)는 당시 스무 살 정도의 나이일 것이다. 그러면 정복자가 파트너로 선택한 야마토 현지의 실력자 코토시로누시 (事代主神)란 어떤 인물일까?  그는 오호쿠니누시와 카무야타테히메 (神屋楯比賣)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당시의 야마토의 왕,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의 배 다른 동생이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살해되고 그 동생 코토시로누시의 딸이 진무천황의 황후가 됨으로써 코토시로누시 가문은 전쟁의 피해를 면하고 이후의 야마토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 라인 역시 가모씨(鴨氏)이지만 그의 후대에서 미와(三輪),  와니(和珥, 和邇, 丸邇)를 위시한 수 많은 씨성으로 분리된다. 


 
카쯔라기(葛城)에 있는 3개의 카모(鴨)신사 가운데 고세시(御所市)의 타카카모신사 (高鴨神社)는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를 모시며 카모쯔바(鴨都波神社, 下鴨社) 신사는 코토시로누시를 모신다. 카쯔라기 미토시(葛木御歳神社)신사는 오호토시(大年神)를 모시며 나카가모(中鴨)신사라 불린다. 이들은 모두 스사노오의 후손으로 야마토를 건설한 장본인들이다.


전편 “73. 신대의 역사”에서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의 야마토 진출과 관련된 기사가 나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호쿠니누시가 물으니 “너는 나의 사키미타마(幸魂)  쿠시미타마(奇魂)다.”라 하였다.
“과연. 당신이 나의 사키미타마 쿠시미타마였군. 지금부터 어디서 살 생각입니까?” 하였더니 “나는 야마토노쿠니 (日本國)의 미모로산(三諸山)에 살고자 한다.” 그래서 그 땅에 궁전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것이 오호미와노 카미 (大三輪之神)이다.



미모로산(三諸山)은 지금 미와산(三輪山)으로 불리는 높이 467 미터의 산이다. 미와산 기슭에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가 있고 오호모노누시(大物主神)를 제신으로 모신다. 일본서기나 고사기의 오호모노누시란 명칭은 일관성이 없다. 어떤 곳에서는 오호쿠니누시, 또 다른 곳에서는 코토시로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오호모노누시를 코토시로누시의 두째 아들로 고정하여 사용한다. 스사노오 – 오호쿠니누시 – 코토시로누시 – 오호모노누시 라인이   미와씨(三輪氏)를 이룬다. 코토시로누시는 인간의 역사에서 고사기 御真津日子訶恵志泥命 (ミマツヒコカヱシネ), 일본서기 観松彦香殖稲,  (ミマツヒコカヱシネ, 孝昭)로, 오호모노누시는 고사기 大倭帯日子国押人命 (オホヤマトタラシ ヒコクニオシヒト), 일본서기 日本足彦国押人 (ヤマトタラシ ヒコクニオシヒト, 孝安) 으로 표기되었다.

이스케요리히메와 오토우카시(弟猾)의 아버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아내를 고사기는 미시마노 미조쿠히(三島湟咋)의 딸 세야다타라히메 (勢夜陀多良比賣), 일본서기는 미시마노 미조쿠히미미(三嶋溝杙耳)의 딸 타마쿠시히메(玉櫛媛) 라 하여 단 한 명의 아내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왕조가 파트너로 선택할 정도의 실력자에게 아내가 하나 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호호데미의 동정이전 야마토의 왕이었던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기록은 없으나 그에게는 많은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코토시로누시와 혼인한 딸도 있었을 것이다. 진무동정시 처형된 소호노 아가타(層富県) 하다(波多)의 오카사키(丘岬)에 니이키도베(新城戸畔)라는 여두목이 있었다. 우리는 이 니이키도베를 타카히코네의 딸이며 코토시로누시와 혼인한 여인으로 본다. 물론 니이키도베는 익명이다.

스이닌(垂仁)천황 황후로 사호히메(고사기 沙本毘賣命, 일본서기 狭穂姫), 다른 이름은 사하지히메 (佐波遅比賣)가  등장한다. 그녀에게 사호히코(고사기 沙本毘古王, 일본서기 狭穂彦王)라는 오빠가 있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이들의 족보를 엉뚱한 곳에 붙여 놓았다. 어머니를 사호노 오호쿠라미토메 (沙本之大闇見戸売)라 하였는데 위에서 처형된 니이키도베(新城戸畔)와 동일인으로 본다. 그녀는 타카히코네의 딸이며 아버지와 운명을 함께 하였을 터이다.

사호(沙本)라는 말은 나라시(奈良市) 중심부를 흐르는 사호천(佐保川)에서 연유하는데 모계(母系)의 근거지가 사호천 주변일 것이다. 그래서 아들과 딸이 사호히코 사호히메라 불렸다. 이렇게 등장하는 사호히코는 코토시로누시의 아들이다. 고사기는 이들의 아버지를 히코이마스(日子坐)라 하여 엉뚱한 곳에 붙였다. 그러나 히코이마스는 서기 270년 경의 인물이며 사호히코(狭穂彦王)는 서기 220년 대의 사람이다. 혈통으로 따지면 코토시로누시 - 사호히코 – 일여 – 히코이마스로 된 것인데 역사는 히코이마스가 사호히코의 아버지라고 기록한 것이다.

진무동정중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호히코는 야마토를 떠나 구야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구야국에서 그 나라 공주와 혼인이 이루어졌다. 공주의 이름을 우쯔시코메(고사기 内色許売命, 일본서기 欝色謎命)라 하였으며 일여(壹與)를 낳았다.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서 일여를 히미코의 종녀(宗女)라고 한 것은 일여의 어머니가 구야국의 공주이므로 히미코와 같은 집안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여가 히미코의 종녀라는 것은 구야국 왕실의 계보에 따른 것이다.


진무치하 야마토에서 코토시로누시의 안전이 보장되므로써 구야국에 피신해 있던 사호히코도 신변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고 야마토로 돌아 왔다. 일여(壹與)는 구야국에서 출생하였으며 사호히코와 우쯔시코메가 오호히코(大彦)와 일여(壹與)를 안고 야마토에 돌아간 것은 서기 245년 경의 일이다. 

서기 245년 나이 51세에 야마토의 천황이 된 진무는 서기 256년 경 사망하였다. 그가 큐우슈우에서 낳은 첫 아들 타기시미미 (고사기 当芸志美美命, 일본서기 手研耳命)는 서기 215년 경 출생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이스케요리 히메보다 연상의 나이일 것이다. 그는 진무동정시 24세의 청년이었다.  

서기 256년 진무천황 사망시 타기시미미의 나이 41세, 진무와 이스즈요리히메 사이에 태어 난 아들이 10세 쯤이다. 타기시미미는 그 동안 정치에 참여하였고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부왕을 이어 왕위에 오를 위치에 있었다. 진무 사망후 그의 권력승계는 이스즈히메 황후측의 반대로 좌절되고 야마토는 내전상태에 빠진다. 야마토의 기존 세력들이 큐우슈우 세력의 왕위승계를 반대한 것이다. 큐우슈우와 야마토 세력간에 내전이 격화되고 그 와중에서 타기시미미가 살해된다.  

삼국지 위서 왜인전에 정시중(正始中, 240-249) 히미코가 죽고 다시 남자 왕을 세웠으나 나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고 서로 싸워 히미코의 종녀 일여(壹與)를 왕으로 세웠다. (正始中 卑彌呼死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復立卑彌呼宗女 壹與年十三為王 國中遂定). 

큐우슈우의 히미코는 서기 247년 이전 어느 땐가 사망하였다. 위의 기록은 서기 256년 진무 사망 후 야마토의 정치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진무가 죽자 큐우슈우에서 온 정복자 그룹과 야마토의 가모씨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져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양쪽의 혈통을 가진 일여(壹與)를 왕으로 추대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 진다. 일여(壹與)는 사호히코와 우쯔시코메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서기 257년 나이 13세의 소녀 일여(壹與)가 야마토의 왕이 되자 평화가 찾아왔다.  일여(壹與)는 고사기에서 若倭根子日子大毘毘命(ワカヤマトネコヒコオホビビ), 일본서기 稚日本根子彦大日日 (ワカヤマトネコヒコオホヒヒ, 第9代 開化)로 표기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 -

2010년 10월 17일 일요일

73. 신대(神代)의 역사

서기 245년 1월 1일 진무천황(神武天皇)은 나라현(奈良県) 카시하라시(橿原市)의 우네비산(畝傍山) 기슭 카시하라궁(橿原宮)에서 즉위했다.

신유(辛酉)년 춘정월 초하룻날이었다 하며 이 해를 천황의 원년으로 하고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의 딸 이스즈히메 (五十鈴媛命)를 정비로 세웠다. 당시의 신유(辛酉)년 1월 1일을 그레고리오력(曆)으로 환산하면 BC 660년 2월 11일이라면서 서기 1967년부터 일본은 이 날을 건국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서기 245년(을축년)에 가장 가까운 신유년은 서기 241년이다. 일본사람들은 오랜 세월 신화에 세뇌되어 자국의 역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 전 시작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호호데미 (火火出見命)는 “우리가 동정(東征)에 나선지 6년이 흘렀다. 황천(皇天)의 위광에 힘 입어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땅은 아직도 완전히 평정되지 않아 할 일이 많지만 야마토 주변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없어졌다. 이제 여기서 황도(皇都)를 열어 새 나라를 건설하자.”라고 선언한다.

 自我東征於茲六年矣 頼以皇天之威 凶徒就戮 雖辺土未清 余妖尚梗 而中洲之地無復風塵 誠宜恢廓皇都 

큐우슈우(九州)의 천손(天孫)세력이 킨키(近畿)에 원정하여 야마토를 정복하고 나온 첫번째 성명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언사는 황천(皇天)이란 말이다. 황천이란 호호데미가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의미로 쓰고 있으며 두 사람의 조상을 의미한다.

일본서기를 편찬한 역사가들은 신화의 형식을 빌어 역사를 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일본서기의 신화란 신화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역사로 기록된 것이다. 호호데미가 신화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전쟁을 했겠는가? 우리는 신화를 통하여 당시 인간들의 구체적인 욕망과 역사의 필연성을 읽어야 된다. 

서기 239년 전쟁을 시작하면서 큐우슈우(九州)의 출정식에서 나온 성명서가 있다. 호호데미 (火火出見命)가 45세가 되었을 때 형제와 자식들을 모아 놓고 “우리 일족의 신화에는 타카미무스히(高皇產靈尊)와 아마테라스(天照大神)가 지상세계를 평정한 뒤 이를 니니기(瓊瓊杵尊)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다. 니니기는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내려 와 이 서쪽 변경의 땅을 다스렸다. 그로부터 179만 2470여 년이 흘렀으나 ….” (45. 神武東征 참조)

及年四十五歲,謂諸兄弟及子等曰:「昔我天神,高皇產靈尊、大日霎尊,舉此豐葦原瑞穗國而授我祖-彥火瓊瓊杵尊. 於是 火瓊瓊杵尊,闢天關,披雲路,驅仙蹕,以戾止.是時運屬鴻荒,時鐘草昧.故,蒙以養正,治此西偏.皇祖皇考,乃神乃聖,積慶重暉,多歷年所.自天祖降跡以逮,於今一百七十九萬二千四百七十餘歲.

한글로 쓰면 신들의 이름이 너무 번쇄하여 신들의 존칭을 생략한다. 존칭을 포함하면 타카미무스히노 미코토와 아마테라스 오호카미가 되어 너무 긴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황천(皇天)이란 타카미무스히(高皇產靈尊)와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남녀 2명의 신을 뜻한다. 니니기는 호호데미의 아버지로 천손강림의 주인공이다. 아마테라스, 오시호미미(忍穗耳命), 니니기(瓊瓊杵命), 호호데미 (火火出見命)로 혈통이 이어졌다.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이 혈통을 2세대 더 늘려 놓았다. 천손(天孫)이란 아마테라스를 정점으로 한 이 혈통을 말하며 천손족이라 하면 그 주변인물까지 포함한다.

호호데미란 바로 삼국지위서 왜인전의 경초 2년 (서기 238) 기사에 나오는 난승미(難升米)이다. 경초 2년  6월 왜의 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등을 파견하여 대방군에 와 천자를 뵙기를 청하였다. 대방태수 유하(劉夏)가 관리를 파견하여 사신들을 인솔하고 낙양에 들어왔다.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 太守劉夏遣吏送詣京都

난승미의 난은 일곱을 뜻하는 부여 말이다. 한자로 쓰기 전의 난승미는 칠뜨기, 칠되미 또는 칠데미란 이름이었으며 소위 칠삭동이를 의미한다. 되를 되승(升)으로 하고 미는 소리나는 데로 쌀미(米)로 하여 승미가 되었고 데미는 데(出) 미(見)로 훈독한 한자를 쓴 것이다. 심지어 되승 대신 말두(斗)를 써서 난두미(難斗米)로 쓴 기록도 있다. 고귀한 신분이 되자 난을 호호(火火)로 바꾸어 호호데미 (火火出見)가 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기사가 나온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연오랑이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더니 (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연오랑을 등에 업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이것을 본 왜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세워서 왕을 삼았다.  

세오녀(細烏女)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바닷가에 나가 찾아 보니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이 있었다.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그 바위는 또한 세오녀를 업고 마치 연오랑 때처럼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다. 이리하여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그녀를 귀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에 광채(光彩)가 사라졌다. 일자(日者)가 왕께 아뢰기를, "해와 달의 정기(精氣)가 우리 나라에 내려 있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생기는 것입니다" 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서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이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일인데 어찌 돌아갈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비단을 주니 사자가 돌아와서 사실을 보고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 뒤에 해와 달의 정기가 전과 같았다. 이에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수하고 국보(國寶)로 삼으니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한다. 또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한다.

아마테라스(天照大神)는 12 후(后)를 거느렸다고 하는데 12후 가운데 세오리쯔히메(瀬織津姫)가 있다. 세오리쯔는 아마테라스(天照大神)의 아라미타마(荒御魂)로 여겨지고 있다. 세오리쯔가 바로 아마테라스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의 세오녀(細烏女)와 일본신화의 세오리쯔는 동일인의 이름이며 비단을 짜는 여자라는 뜻이다. 이 여인이 훗날의 왜여왕 히미코(卑彌呼)이다. 일본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天照大御神)의 모습은 서기 157년 10대의 소녀였다.   

구야국(狗邪國)의 2대 거등왕(居登王)이 서기 199년부터 253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구야국의 건국은 서기 42년이며 초대 수로왕(首露王)이 157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하나 이는 초기 기록이 누락된 결과이므로 거등왕은 수로의 아들이 아니라 몇 세대 이후의 인물일 것이다. 거등왕이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고 가정하더라도 서기 157년 10대의 세오녀(細烏女)가 거등왕보다 2세대 정도 앞 선 세대이며 그녀는 신라인이 아니라 구야국의 공주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타카미무스히 (高皇產靈尊)는 구야국의 수로왕으로 그려지는 인물로 아마테라스와 함께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오히려 아마테라스보다 상위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기 245년 야마토를 점령한 호호데미가 제일성으로 “황천(皇天)의 위광에 힘 입어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 고 한 것은 자기 자신을 구야국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구메(來目)의 군사를 동원하여 야마토를 정복하였다. 구메(來目)란 당시의 구야국 수도의 이름이다. 구메(來目)를 김해(金海)로 바꾼 것은 통일신라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흉도를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흉도란 누구일까? 아마테라스에서 호호데미까지의 혈통 속에는 부성(父性)이 탈락되어 있다. 증조 할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성장한 후손들이 증조 할아버지의 후손들을 흉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부계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아마테라스의 분노가 후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부계 타도로 이어진다. 호호데미의 야마토 정복은 아마테라스의 평생의 한을 풀어 주었고 이 소식을 듣고 히미코는 서기 247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본신화 속에 그려진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이 스사노오(고사기 須佐之男命, 일본서기 素戔鳴尊)이다. 일본신화는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가 마치 형제간인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태어났다는 것은 숨기지 않았다.

일본신화는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와 국토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일본열도의 여러 섬들을 만들기 시작하는 신의 이름이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로 남녀의 신이다. 이름이 아름답고 귀에 낯 설지 않는 이 신들이 사실은 가야의 정견모주의 아들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서기 2010년 MBC에서 방송된 연속극 김수로(극본 김미숙, 연출 최종수 장수봉)에서 가야산 정견모주의 두째 아들로 나온 이진아시(伊珍阿豉)가 바로 일본신화의 정점에 등장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열도에서 살았고 그의 부인 이자나미는 열도보다 고향 땅이 좋았던지 일찍 황천에 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마 가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 그리고 마한출신으로 알려진 쯔쿠요미이다. 쯔쿠요미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신이므로 무시해도 좋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스사노오이다. 이자나미(伊邪那美)가 떠난 뒤 이자나기의 왼쪽 눈에서 아마테라스가, 오른쪽 눈에서 쯔쿠요미(月讀尊), 이자나기의 코에서 스사노오(素戔鳴尊)가 태어났다.

백제 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166 - 214),  6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 – 234)을 이어 7대 사반왕(沙伴王)이 서기 234년 즉위하였으나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 - 286)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이즈모(出雲, 현 시마네현)에 돌아온다.  이들 3명이 살았던 시대가 열도의 스사노오, 아마테라스,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 그리고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살았던 시대와 겹친다.

스사노오의 이야기는 이즈모(出雲, 현 시마네현)에서 시작되며 그는 아마테라스와 동시대인이다. 가야의 아마테라스와 백제의 스사노오가 열도의 역사를 연다. 아마테라스는 구야국의 신녀, 스사노오는 백제의 왕자이다. 

스사노오와 아마테라스 사이에서 타코리히메(田心姫), 타기쯔히메(湍津姫), 이찌키시마히메(市杵嶋姫)의 세 딸이 태어났다.이들은 무나카타 삼신(宗像三神)이라 불리며 지금도 추앙받는 신이다.  또 오시호미미(天忍穂耳尊), 아마노호히(天穂日命), 아마쯔히코네(天津彦根命), 이쿠쯔히코네(活津彦根命), 쿠마노노쿠스비(熊野橡樟日命)의 5명의 아들을 낳았다. 여기 나온 오시호미미가 바로 아마테라스가 직접 낳은 아들이며 진무천황 호호데미의 할아버지가 된다.

스사노오(素戔鳴尊)는 난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타카아마노 하라(高天原, 신들의 나라)에 와도 좋다는 아마테라스의 허락을 받았으나 그의 행동은 막무가네였다. 아마테라스는 밭을 가꾸고 있었는데 스사노오는 봄에 도랑을 메꾸는가 하면 논두렁을 부수고 모종을 마구 옮겨 심곤 하였다. 가을이면 말을 풀어 밭을 망쳐놓았다. 또 아마테라스가  니이나메노 마쯔리(新嘗祭)를 할 때 그 방에 똥을 쌌다.  또 아마테라스가 신의(神衣)를 짜기 위하여 신성한 하타도노 (機殿)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건물의 지붕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을 통하여 얼룩말의 가죽을 벗기고 시체를 떨어 뜨렸다.  이때 아마테라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베틀의 북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아마테라스는 하늘의 바위굴에 들어가 바위문을 닫아 잠그고 숨어버렸다.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가 바위문을 안에서 잠그고 숨어버렸으므로 온 나라 (国中)가  빛을 잃고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신라에서 태양 빛이 사라져 암흑의 세상이 되었었는데 이제 일본에서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으니 신기할 뿐이다. 우리의 짐작데로라면 양쪽이 동일한 태양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스사노오는 신라의 소시모리(曾尸茂梨, 牛頭山)에서 배를 타고 이즈모에 들어왔다 하며 야마타노 오로치(八岐 大蛇)를 퇴치하고 근거를 마련한다. 야마타노 오로치(八岐大蛇)란 이들의 정벌에 대항한 토착세력으로 본다. 신라의 소시모리는 기록시점에 따라 신라도 될 수 있고 고구려도 될 수 있고 백제도 될 수 있다. 소시모리는 삼국의 사이에 낀 지방이다. 한반도 동해안의 춘천에서 함흥까지의 어디 쯤이라고 비정된다. 그는 현 시마네현 (島根県) 스가(須賀)에 스가궁(須賀宮)를 짓고 도읍한다. 헌데 심상치 않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전해 오는 당시 스사노오의 야쿠모 타쯔(八雲立)라는 노래가 있다.

구름일렁이는 이즈모(出雲)에
겹겹의 구름 울타리 둘러
아내가 편히 살 여러겹 울타리
아아 여러겹 울타리

호쯔마쯔다에(秀眞傳)는 환단고기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서물인데 아마테라스에게 12명의 신녀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8명의 신녀들을 압송하여 이즈모의 스가궁에 가두고 그녀들은 스사노오의 후비가 되었다. 8명의 후비에서 태어난 것이 앞의 신화에서 언급한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다.  스사노오에게서 태어난 배 다른 형제들이다.  아마테라스도 여기 끌려 와 스사노오의 아이를 낳았다.  그 아들 이름이 오시호미미(天忍穂耳尊)이다. 아마테라스는 오시호미미를 나중 구야국에 보내  타카미무스히 (高皇產靈尊)의 딸과 혼인시켜 니니기(瓊瓊杵)가 태어났다. 

일본서기는 카미(神)의 역사(神代)와 인간의 역사(人代)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역사는 호호데미가 야마토 정벌에 나서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역사감각으로 서기 239년부터 사람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연히 카미의 역사는 서기 239년에서 끝난다. 인간이 서기 239년을 경계로 카미와 인간으로 분리될 수 없으므로 카미의 역사의 마지막에 기록된 카미들은 인간의 역사에 참여해야 된다. 

그런데 동일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신의 역사의 아무개가 인간의 역사의 누구에 해당하는지 눈치로 맞출 수 밖에 없다. 눈치로 해야 되는 역사는 정통파 역사학자의 영역이 아니다. 심증을 역사적 증거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사노오 계보 (출처)

고사기에 스사노오의 계보(系譜)가 나와 있다.
  1. 쿠시나다 히메(櫛名田比賣)가 야지마지누미(八嶋士奴美神)를 낳았다.
  2. 카무오호이찌 히메(神大市比賣)가 오호토시(大年神)와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를 낳았다.
야지마지누미가 오호야마쯔미(大山津見)의 딸 코노하나찌루 히메(木花知流比賣)와 후하노모지쿠누스누 (布波能母遅 久奴須奴)를 낳고 다시 5세대 후에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오호쿠니누시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면서 오호나무지(大穴牟遅神), 아시하라시코오(葦原色許男神), 야치호코(八千矛神), 우쯔시쿠니타마 (宇都志國玉神)를 나열한다. 그런데 이 복잡한 계보는 곧 엉터리로 판명되고 처음 나온 야지마지누미와 오호쿠니누시 이하 5개의 이름이 동일인이다. 왜냐하면 6대손이라는 오호쿠니누시가 바로 스사노오의 딸 스세리히메(須勢理姬命)와 혼인하기 때문이다.

오호쿠니누시는 스사노오의 후계자이다. 백제 5대 초고왕(肖古王, 재위166 - 214)이 서기 166년 왕위에 올랐다는 역사기록이 도움이 된다. 스사노오는 한자로 표기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발음이며 초고(肖古) 또는 속고(速古)란 스사노오의 한자표기일 것이다. 서기 166년 스사노오는 백제의 초고왕으로 즉위하고 그의 아들 오호쿠니누시가 이즈모에 남아 부친의 과업을 이어간 것으로 본다.

스사노오의 후손중 오호쿠니누시 계열과 오호토시 계열은 이즈모 경영을 완성하고 야마토로 진출하였고 우카노미타마 (宇迦之御魂神)는 쯔시마와 큐우슈우 그리고 구야국을 잇는 해상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들은 히미코의 천손족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진무동정(神武東征)에 참여하여 야마토로 진출한다. 따라서 야마토을 선점하고 있던 오호쿠니누시 후손과 진무동정 이후 새로 온 우카노미타마 후손들이 함께 야마토에 살게 되고 이들을 모두 가모씨(賀茂氏)로 칭한다. 결국 스사노오의 후손들이 가모씨(賀茂氏)인 것이다. 오호쿠니누시와 우카노미타마는 배 다른 형제간이다. 우카노미타마의 후손들은 진무동정의 포상으로 카즈노현주(葛野縣主)가 되어 현 쿄오토오(京都)지역에 뿌리를 내린다.

서기 166년 스사노오가 백제의 초고왕으로 나갈 때 이즈모의 스가궁 여러 겹의 구름 울타리에 갇혀 있던 신녀들 8명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머지 신녀들은 아마테라스를 따랐다고 본다. 훗날의 기록에 이들이 낳은 아들들이 아마테라스를 위하여 일하기 때문이다. 다섯 살이 된 어린 아들 오시호미미를 안고 아마테라스(당시의 이름 아마테루)가 간 곳은 친정인 구야국일 것이다. 아마테루히메 즉 세오녀의 나이 스물 두 세살 무렵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왕 20년(서기 173년)  왜여왕 히미코(卑彌呼)가 사자를 보냈다. 아마테라스가 다시 열도에 돌아와 가야왕실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우니 야마타이국이다.

오호쿠니누시 계보 (출처)
오호쿠니누시의 계보중 역사상 중요한 인물만 고르면 다음과 같다.
1)    타키리비메 (多紀理毘賣)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와 타카히메(高比賣) 다른 이름은 시타테루히메 (下光比賣命)를 낳았다. 이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지금 카모대어신(迦毛大御神)으로 불린다.
2)    카무야타테히메 (神屋楯比賣)가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을 낳았다.
3)    어머니가 분명하지 않은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

오호토시(오호쿠니누시의 배 다른 동생)의 계보는 많은 인물이 열거되어 있지만 우리가 거론하게 될 사람은 오호쿠니미타마 (大國御魂神)와 오호야마쿠히(大山咋神) 다른 이름은 야마스에노 오호누시(山末之大主神)이다. 오호야마쿠히는 히에이산(日枝山)과 카즈노(葛野)의 마쯔오 (松尾)에서 제신으로 모신다. 

지금 열거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일본열도의 역사를 연다. 오호쿠니누시의 큰 아들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를 낳은 타키리히메가 스사노오가 낳은 3명의 딸 가운데 타코리히메 (田心姫)이다. 고사기는 타키리비메 (多紀理毘賣), 일본서기는 타코리히메(田心姫)로 표기한다. 배 다른 형제끼리의 결혼이다.

카쯔라기(葛城)에 있는 3개의 카모(鴨)신사 가운데 아지스키 타카히코네는 현 나라현 고세시(御所市) 타카카모신사 (高鴨神社)의 제신이며 고사기는 그를 카모 오호미카미 (迦毛大御神)라 기록했다. 오호미카미(大御神)로 고사기에 기록된 카미는 일본역사에서 아마테라스와 아지스키 타카히코네의 두 사람뿐이다. 카쯔라기(葛城)에 카모쯔바(鴨都波)신사가 있고 코토시로누시를 모신다. 신사이름에 카모(鴨)가 붙게 된 것은 스사노오의 후손들이 스스로를 카모씨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며 이들의 후손들이 분리해 가면서 오호미와(大三輪), 와니(鰐), 카쯔라기(葛城)등의 새로운 왕실의 씨성을 열어간다. 

쿄오토오시(京都市)의 가모와케 이카즈찌신사 (賀茂別雷神社)는 보통 카미가모신사(上賀茂神社)로 불린다. 짝을 이루는 가모미오야신사(賀茂御祖神社)가 있는데 시모가모신사(下鴨神社)로 불린다. 불행하게도 가모와케 이카즈찌 (賀茂別雷)라는 인물이 역사상의 누구인지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시모가모신사의 제신은 진무동정시 야마토에 진출한 스사노오의 다른 아들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의 아들로 여겨지는 가모타케쯔누미(賀茂建角見命)라 하며 일본서기는 그를 야타카라스 (八咫烏)로 기록했다.

이즈모(出雲)의 오호쿠니누시는 점차 세력을 키워 야마토로 진출하였는데 그와 관련된 기사를 일본서기는 이렇게 처리하고 있다.

그 뒤 오호쿠니누시는 여러 지방을 순행하면서 나라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즈모(出雲)에 돌아와 “그런데로 나라가 안정되었다. 이제 나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없다. 지금 나 이외에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고 말 했더니 신비한 빛으로 바다를 비추며 홀연히 나타난 카미(神)가 있어 이르기를 “내가 없었으면 너는 이 만큼 해 낼 수 없었다. 내가 있었으므로 이만한 공적을 이룰 수 있었다.” 라 하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오호쿠니누시가 물으니 “너는 나의 사키미타마(幸魂)  쿠시미타마(奇魂)다.”라 하였다.
“과연. 당신이 나의 사키미타마 쿠시미타마였군. 지금부터 어디서 살 생각입니까?” 하였더니 “나는 야마토노쿠니 (日本國)의 미모로산(三諸山)에 살고자 한다.” 그래서 그 땅에 궁전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것이 오호미와노 카미 (大三輪之神)이다.

이 신의 아들이 카모노키미(甘茂君), 오호미와노키미(大三輪君)등이며 또 히메타타라 이스즈히메 (姫蹈鞴五十鈴姫) 이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가 와니(鰐)로 변하여 미시마의 미조쿠히히메 (溝杙姫) 또는 타마쿠시히메 (玉櫛姫) 에게 통하여 이스즈히메를 낳았다고 한다. 이 여인이 호호데미천황의 황후이다.

이즈모는 작은 나라이다. 이즈모를 완전히 평정하였지만 오호쿠니누시의 자아(自我)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비전이 좋은 땅으로 야마토를 점 찍고 현 나라현 사쿠라이시(奈良県桜井市)의 오호미와신사(大神神社) 자리에 궁전을 짓고 옮겨왔다. 비로소 오호쿠니누시의 야마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서기 214년 백제의 초고왕이 죽고 6대 구수왕(仇首王, 재위  214 – 234)이 즉위한다. 구수왕을 우리는 여태까지 추적해 온 오호쿠니누시로 보고 있다. 오호쿠니누시가 야마토를 비우고 그의 장자 아지스키 타카히코네(阿遅鋤高日子根神)가 야마토의 왕이 된다. 

큐우슈우에 야마타이국을 세운 아마테라스는 서기 170 년경부터 오호쿠니누시에게 로비를 사작한 것 같다. 자기 아들에게 이즈모(出雲)를 양보해 주도록 스사노오의 후계자 오호쿠니누시를 설득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낸다. 첫번째 사자가 아메노호히 (天菩比)로 스사노오와 신녀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고 오호쿠니누시에게 봉사하였다.

두번째 사자로 아메노와카히코(天若日子)를 보냈는데 그는 오호쿠니누시의 딸 시타테루히메(下照比賣)와 혼인까지 하고 아예 눌러 앉아 8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신화상으로는 하늘나라에서 타카미무스히 (高皇產靈尊)와 아마테라스 (天照大御神)가 함께 상의하여 일을 처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하여 카미의 초월적인 힘으로 아메노와카히코를 살해한다. 자객을 보내서 배신자를 처단했다는 뜻이다.

세번째 사자로 타케미카즈찌(建御雷之男神)를 보냈다. 이 때 오호쿠니누시는 자기 아들 코토시로누시(事代主神)와 타케미나카타(建御名方神)의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한다. 코토시로누시는 천신(天神)의 아들(御子)에게 이즈모(出雲)를 바치겠다며 사라져 갔으나  타케미나카타는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타케미카즈찌가 힘으로 제압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이렇게 이즈모를 평정하여 저항세력이 없게 만든 다음 그 유명한 천손강림이라는 이벤트가 연출된다. 천손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려와서 군림하기만 하면 되는 구조이다. 세월이 지나는 바람에 천신(天神)의 아들(御子)이 오시호미미에서 니니기로 한 세대 지나갔지만 아마테라스의 끈질긴 권력욕은 손자를 왕위에 올리려고 집착한다.

이 기록은 7세기 말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직접 자기들의 육안으로 아마테라스의 모델이 된 권력욕에 눈 먼 권력자를 보면서 만든 스토리이다. 40대 텐무(天武)천황의 아내이며 다음 천황이 되는 지토우(持統)가 자기 후손에게 왕위를 물려 주기 위하여 얼마나 집착하였는지 당시의 역사가들은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과 달리 실제의 역사에서 천손에게 이즈모를 양도한 일은 없었다. 또 진무의 천손족과 오호쿠니누시 의 가모(鴨)족과는 계통이 다르다. 천손족은 구야국 계통 스사노오는 백제계이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진무이후의 역사가 천손족의 단일혈통인 것처럼 만들어 7세기의 황실도 천손으로 만들었다. 천손족의 호호데미는 이즈모을 양도받아 야마토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실력으로 아마테라스의 꿈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7세기의 일본황실에게는 진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자기 후손들이 영원히 왕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카미보다 좋은 도구는 없다는 것을 7세기의 일본황실은 알고 있었다. 

로마에서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며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비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당시까지 로마황제는 선거에 의하여 뽑혔으며 원로원의 승인을 받는 존재였다. 인간보다 우월하고 특별한 권위라는게 없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한 것이 콘스탄티누수 대제(275? – 337)이다. 그는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로마황제와 접목시켜 황제의 자리는 하늘이 내리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지만 그의 관심은 기독교가 아니라 황제의 자리였다. 황제란 인간이 이렇쿵 저렇쿵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신이 내린 자리이니 인간의 시비를 초월한다는 논리가 그의 생각이다. 그 때부터 아무나 함부로 황제가 되겠다고 나설 수 없었다. 

7세기의 일본황실이 최선의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것이 4세기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생각이며 이 방법은 21세기의 지금도 유효하다. 천손을 거역하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천황은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는 주장만큼 천황가를 즐겁게 할 이데올로기가 있겠는가? 

그런 연유로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천손을 누누히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일본역사가 씌여지고 있던 7세기 말 지토우천황의 염원이었다. 지토우천황 다음에 집안의 여인들이 여럿 왕위에 오른다. 사내아이들이 어려서 사망하니 다음 사내아이가 자랄 때까지 남에게 왕위를 주지 않고 유지하기 위하여 집안 여인들이 왕위를 꽤 차고 앉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백제가 사라지고 일본이 홀로 섰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백제가 열도를 관리하던 시절에는 누가 다음 왕이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이 홀로 선 뒤에는 누가 다음 왕이 될지 예측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지토우천황계보 (출처)
지토우는 서기 671년의 임신의 난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텐무의 황후로 백촌강 전쟁의 와중인 서기 662년 쿠사카베 황자를 낳았다. 서기 679년 텐무천황과 황후, 그리고 6명의 황자들이 요시노에서 맹약(吉野盟約)을 교환하였다. 6명의 황자란 쿠사카베(草壁皇子, 662 – 689), 오오즈(大津皇子, 663 – 686), 타케치(高市皇子, 654 – 696), 오사카베(忍壁皇子, ? – 705), 카와시마(川島皇子, 657 – 691), 시키(芝基皇子,668 – 716)로 카와시마와 시키는 텐치천황의 소생, 나머니 4명은 텐무의 아들이다. 텐무는 황자들끼리 싸우지 말고 협력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그들을 하나하나 포옹하였다. 황후도 황자들을 포옹하였다. 

형제간에 정의로운 맹약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잠재적인 황위 계승권자들에게 다음 천황은 내 아들이니 욕심내지 말라는 경고나 마찬가지이다. 지토우의 아들 쿠사카베황자를 서열 1번으로 공인하고 나이도 연장이며 나라에 공적도 많은 타케치를 서열 3번으로 못 박아 대권욕심을 접게 하는 것이 황후의 의도였을 것이다. 서기 681년 쿠사카베황자를 태자로 결정한다.

서기 686년 9월 40대 천황 텐무가 사망하고 다음 달 모반의 죄를 씌워 오오즈황자를 처형한다. 오오즈황자는 10월 2일 체포되어 10월 3일 처형되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사태의 진전이었다. 오오즈의 아내는 맨발로 뛰어나와 남편을 따라 분사했다 하며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사카베황자는 황위에 오르지도 못한 채 서기 689년 나이 27세로 사망하고 모후인 지토우가 41대 황위를 이었다.  

서기 697년 어린 손자가 14세가 되자 지토우는 손자에게 양위하고 섭정으로 남는다. 그가 42대 몬무천황 (文武天皇, 683 – 707)이다. 서기 703년 지토우가 사망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몬무천황도 서기 707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그가 남긴 것은 6세의 아들이다. 이 아이가 즉위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집안의 여인들이 황위를 꿰어 찬다. 처음에 아이의 할머니가 등장한다. 쿠사카베의 아내이며 몬무의 어머니인 43대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이 등장하여 서기 715년까지 황위에 있었다. 할머니가 노령이 되어 감당하기 힘들게 되자 아이의 고모가 나선다. 몬무의 누나인 44대 겐쇼우천황(元正天皇 )을 세워 715 년부터 – 724 년까지 황위를 붙들고 있다가 아이가 23세가 되자 황통을 물려준다. 그가 45대 쇼우무(聖武)천황이다.
 
단명으로 끝난 쿠사카베 황자의 양친, 처, 아들과 딸이 모두 황위에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백제가 사라진 뒤 열도에서 발생한다. 어린 사내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집안 여인들이 보위를 차지하고 곁가지 혈통의 황자들은 얼씬 못하게 한다. 일본서기 마지막 등장인물 지토우천황의 금쪽같은 내 새끼를 끼고 도는 모습이 3세기 천손족의 아마테라스에게 투영되어 천손강림 신화가 만들어진다. 

지토우(持統)란 시호의 의미는 핏줄을 지켰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핏줄에 매달렸다는 의미일까? 그러나 역사의 전개는 지토우천황의 처절한 염원데로 되지 않았다. 쿠사카베황자와 그의 아들 몬무의 단명, 그리고 무자비한 정적제거는 텐무계통의 혈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49대 코오닌(光仁) 천황부터 텐찌의 후손들이 황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