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1일 수요일

72. 미야누시야카히메 (宮主宅媛)

중국의 사서에 일본열도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 신비의 4 세기에 열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다건너 백제에서 서기 346년 즉위한 근초고왕은 백제역사상 최초로 중국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왕이다. 서기 372년 백제가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동진(東晋)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으며 동진은 백제왕 여구(근초고왕)를 진동장군영낙랑태수로 제수한다는 기사가 진서 간문제기(晉書 簡文帝紀)에 나온다. (咸安二年 春正月 百濟 林邑王 各遣使貢方物 六月 遣使拜百濟王餘句 爲鎭東將軍 領樂浪太守 ). 그후 백제의 동진에 대한 조공은 몇 차례나 계속되었고 침류왕(枕流王) 원년에 동진에서 불교가 들어왔다. 서기 1984년 서울대 박물관의 석촌동 3호분 발굴조사에서 중국동진(中國東晉)시대의 청자 반구호 구연부편(盤口壺口緣部片)이 출토되어 석촌동 3호분이 근초고왕(346 – 375 재위) 의 무덤으로 비정되기도 하였다.

4세기의 백제는 비류왕 (서기 304 – 344 재위), 계왕 (344 – 346), 근초고왕 (346 – 375), 근구수왕(375 – 384), 침류왕(384 – 385), 진사왕(385 – 392), 아신왕(392 – 405), 전지왕(405 – 420)의 순서로 왕위를 잇는다. 이 기간 일본열도는 스진(崇神) – 케이코(景行) – 세이무(成務) – 쥬아이(仲哀) – 진구우(神功) – 오우진(應神) – 닌토쿠(仁德)의 순이다. 일본서기는 스이닌(垂仁)을 스진(崇神) 다음 세대로 배치하였으나 스이닌은 스진보다 앞 선 세대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기년(紀年)의 개념이 없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주변국과의 외교기사를 보고 단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할 수 밖에 없다.
이 무렵 케이코(景行) – 세이무(成務) – 쥬아이(仲哀) – 진구우(神功) – 오우진(應神) – 닌토쿠(仁德)의 6대의 천황을 모신 것으로 기록된 타케시우찌노 스쿠네(武内宿禰)라는 인물이 있다. 일본서기 케이코(景行) 3년조에 그의 탄생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고 마지막 기사가 닌토쿠(仁德) 50년에 나온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케이코(景行) 3년과 닌토쿠(仁德) 50년이 서력으로 몇년에 해당하는지 보증할 권위를 갖는자료가 부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본인들이 정사(正史)라고 믿고 있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현 주소이다.

일본서기는 각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에 의거하여 타케시우찌(武内)의 수명을 계산하면 287년이 된다. 닌토쿠(仁德) 50년의 기사는 “야마토에 기러기가 알을 낳았다는데 집안에서 가장 연장자인 그대 생각은 어떤가?” 하고 천황이 묻는 내용이므로 타케시우치는 그 보다 더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타케시우찌는 287년 이상 살았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므로 타케시우찌는 가공된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시간을 재는 기년(紀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타케시우찌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무렵 천황들의 재위기간을 합산하면 스진(崇神) 68년, 케이코(景行) 60년, 세이무(成務) 60년, 쥬아이(仲哀) 9년, 진구우(神功) 69년, 오우진(應神) 41년, 닌토쿠(仁德) 87년 등으로 총394년이 된다. 1 세기 정도의 시간이 4 배로 부풀려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69. 부여의 엑소더스” 편에서 부여의 의라왕(依羅王)이 일본열도을 장악하고 스진(崇神) 천황으로 기록된 것을 서기 300년, 그가 다시 케이코(景行)에게 패하여 사망한 것을 서기 318년(무인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케이코(景行) 원년을 서기 319년으로 친다.

일본서기는 타케시우찌를 코우겐(孝元)천황의 증손으로 고사기는 손자로 기술하여 1 세대의 편차를 보인다. 타케시우찌는 세이무(成務)와 같은 날 태어나서 세이무와 특별한 관계였다 하니 세이무와 동갑내기라고 볼 수 있다. 타케시우찌의 4명의 아들들은 서기 392년 야마토의 장군의 반열에 올라 백제의 아신왕을 즉위시키고 진사왕을 야마토로 압송하였다. 4명의 아들 가운데 장남을 이 때 45세 정도로 보면 서기 347년 경 출생한 셈이 된다. 타케시우찌가 장남을 20세에 보았다면 타케시우치의 출생은 서기 327년 경이다. 세이무(成務)천황 또한 이 무렵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고사기는 세이무(成務)와 쥬아이(仲哀)가 사망한 간지를 각각 을묘와 임술년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서기 355년과 362년에 해당하며 사실과 부합되는 정보로 보인다. 다만 붕어년이라고 기록하였지만 우리는 그들이 권좌에서 물러난 해로 이해한다.

진무(神武)에서 겐쇼(元正)천황까지 일본천황의 한풍시호는 일본서기가 완성된 이후에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 – 785)가 지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슬픈 이름을 받은 쥬아이(仲哀)란 어떤 삶을 살았던 사람일까? 대부분의 천황에게 60여년의 넉넉한 재위기간을 할해한 일본서기가 그에게 부여한 재위기간은 겨우 9년이다. 또 모든 천황들의 궁이 야마토나 카와치(河內)에 있었는데 쥬아이는 재위 9년 가운데 6년을 야마쿠치현(山口縣) 아나토(穴門)의 토유라(豊浦)궁에서 보냈다. 일본서기는 왜 그가 서울을 떠나 궁벽한 한촌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 시대 열도의 명실상부한 주역은 일본서기가 기록한 야마토 타케루노 미코토 (日本武尊)와 오우진(應神)천황 그리고 그의 비(妃)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이며 백제의 주역은 근초고왕과 귀수(貴須 또는 貴首)왕자였다. 우리는 근초고왕의 생몰년을 서기 295 – 374년으로 귀수왕자를 서기 320 – 394년으로 본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이 시대의 인물로 세이무(成務), 쥬아이(仲哀), 진구우(神功)황후가 등장한다. 일본열도의 세이무(成務), 쥬아이(仲哀), 진구우(神功)가 근초고왕과 귀수왕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세이무는 케이코천황의 아들이며 쥬아이는 야마토 타케루의 아들이다. 세이무와 쥬아이는 동년배의 비슷한 나이이며 진구우로 그려진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氣長足姬)는 이들보다 10여 년 젊은 나이일 것이다.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는 쥬아이(仲哀)의 황후이며 오우진(應神)의 어머니라 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녀는 서기 363년 12월 쯔쿠지(筑紫)의 우미신궁(宇美 神宮)에서 오우진(應神)천황을 출산하였다. 그 때 그녀의 나이를 26세 정도로 보면 그녀는 서기 337년 출생한 셈이다. 이 기사를 근거로 오우진(應神)천황의 즉위연대를 4세기 말로 비정하는 역사가들이 많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사는 황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가공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오우진(應神)천황의 비(妃)가운데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가 있다. 고사기는 와니(丸邇)의 히후레노 오호미 (比布礼能意富美)의 딸 미야누시 야카하에히메 (宮主矢河枝比売)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宇遅能和紀郎子)를 낳았다고 했다. 일본서기는 와니노오미(和珥臣)의 조선(祖先),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의 딸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 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황자를 낳았다고 기록했다. 고사기는 오우진(應神)천황이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상세히 묘사하였다.

어느 때 천황이 찌카쯔 아후미노 쿠니 (近淡海国)에 넘어 가려고 우지노(宇遅野) 주변에 서서 카즈노(葛野)를 바라보며 “카즈노를 바라보니 넉넉하게 사는 민가의 정원이 보이네. 풍요로운 나라의 모습이 보이네.”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코하타노 무라 (木幡村)에 왔을 때 십자로에서 빼어난 미모의 처자와 마주쳤다. 천황이 처자에게 누구의 딸이냐고 물으니 “와니(丸邇)의 히후레노 오호미 (比布礼能意富美)의 딸로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하에 히메 (宮主矢河枝比売)라 하나이다.” 라 하였다. 천황이 “내일 돌아 오는 길에 너의 집에 들리겠다.”하고 길을 떠났다. 야카하에 히메가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전하자 “천황에 틀림없다. 받들어 모셔야 한다.”하며 집안을 말끔히 청소하고 기다리니 이튿 날 천황이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큰 잔치가 벌어지고 야카하에히메의 큰 술잔을 받은 천황이 흥에 겨워 노래하였다.

“이 이쁜 게(蟹)야! 어디서 온 게(蟹)냐? 머나 먼 쯔누가(角鹿)에서 온게(蟹)다. 옆으로 기어서 어디로 가느냐? 이찌지시마 (伊知遅島)나 미시마(美島)에 닿는다. 거기 사는 물새가 잠수하거나 밖에 나와 숨을 쉬듯 기복이 있는 사사나미(佐佐那美) 의 길을 가다 코하타(木幡)의 길에서 마주친 처자여. 뒷 모습은 방패와 같이 날렵하고 치열은 잣나무 씨알처럼 고르고 희구나. 이찌히이(櫟井)의 와니사(丸邇坂)의 흙을, 표면의 흙은 너무 연하고 깊은 곳의 흙은 너무 진하여 가운데 흙을 골라 불에 직접 닿지않게 만든 물감으로 이마를 그리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비너스같은 여인이여! 이렇게 하고 싶다 또 저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여인을 마주하고 있다. 가까이 하고 있다.”

오우진(應神)천황이 소년처럼 즐겨워 하던 때는 서기 362년 경이며 오우진(應神)이 42세, 야카하에히메 26세 정도였다고 본다. 이렇게 혼인하여 생긴 황자(御子) 우지노 와키 이라쯔코(宇遅能和紀郎子)가 서기 363년 12월 쯔쿠지(筑紫)의 우미신궁 (宇美 神宮)에서 태어났다.

신비의 4세기에 일본열도 최초의 통일왕조 야마토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오우진(應神)천황을 기쁘게 한 미모의 후궁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의 아버지를 와니(和珥)씨의 조(祖),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라 기록했다. 히후레노 오미는 이 기록뿐이며 모계에 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사기의 쥬아이(仲哀)조에 카고사카왕 (香坂王)과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역을 진압하는 기사가 있다. 거기서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息長帯日売)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 장군이 와니노 오미(丸邇臣)의 조(祖)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이다. 타케후루쿠마 (建振熊)장군과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는 동일인물이다.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는 장군의 딸이었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 추 7월 천황은 사도장군(四道将軍)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사도장군의 한 사람인 오호히코(大彦)의 군세가 와니고개(和珥坂, 天理市和珥)를 넘을 때 일족의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황은 오호히코(大彦)와 와니노오미(和珥臣)의 먼 조선(祖先)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를 야마시로(山背)에 파견하여 하니야스비코(埴安彦)를 치도록 하였다.

그들은 와니고개(和珥坂)를 넘어 정예군을 이끌고 나라산(那羅山, 奈良市北部 丘陵)에 올라 싸웠다. 그리고 와카라강(輪韓河, 木津川)까지 진격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하니야스비코 (埴安彦) 군과 대치한다. 양군이 키즈강 (木津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하니야스비코(埴安彦)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의 군세를 바라보며 “왜 너는 군세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느냐?”하고 물었다.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너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자(者)다. 너는 제사권(祭祀権)을 탈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관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온 것이다. 이는 천황의 명령이다.”라 대답했다. 그래서 신(神)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타케하니야스비코 (武埴安彦)가 활을 쏘았는데 맞지 않았다. 다음에 히코쿠니부쿠 (彦国葺)가 활을 쏘자 가슴에 명중하여 하니야스비코 (埴安彦)가 죽었다. 이것을 본 적군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관군은 강을 건너 북쪽의 적을 쳐부수고 반 이상의 목을 베었다.

여기 등장하는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는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의 할아버지이다. 일본서기 스진(崇神) 10년의 윗 기사는 사실은 스진시대의 일이 아니라 스진의 아버지 부여의 의려왕(依慮王)이 열도에 들어 와 기존의 왕조와 싸우는 전쟁이다. 의려(依慮)의 공격을 받은 기존왕조는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쪽과 항복하자는 쪽으로 갈라져 형제간의 골육상쟁에 돌입한다. 서기 287년 의려(依慮)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야마토의 코우레이 (孝靈) 천황이 되었다.

하니야스비코(埴安彦)와 오호히코(大彦)는 둘 다 코오겐(孝元)천황의 아들이다. 오호히코(大彦)와 히코쿠니부쿠 (彦国葺)는 부여의 의려왕(依慮王)에게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였고 하니야스비코(埴安彦)는 외적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서기 354년경 쥬아이(仲哀)조의 카고사카왕 (香坂王)과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역을 진압하는 전쟁터와 서기 287년 타케하니야스비코의 반역을 토벌하는 전쟁터가 와니고개, 야마시로(山背), 키즈강(木津川), 우지노(宇遅野) 등으로 현재의 야마시로(山城, 京都府 南部)지역에 해당된다. 서기 287년 전쟁은 할아버지가, 쥬아이조의 반역을 평정하는 전쟁은 그 손자가 맡았다. 여기 등장하는 우지(宇遅)지역은 야카히메의 조상들이 웅거하고 있던 땅이며 오우진과 야카히메사이에서 태어난 우지노 와키 이라쯔코(宇遅能和紀郎子)의 이름에 붙은 우지(宇遅)가 바로 이곳이다.

일본서기 케이코(景行) 58년 봄 2월 천황이 아후미노 쿠니(近江國, 현 滋賀縣)에 가서 아나호(穴穗, 현 오오즈(大津)시 아노오 (穴太))의 저택에 잠시 머물렀다. 그로부터 2년 후 케이코천황은 그 저택에서 사망했고 이어서 그의 아들 세이무(成務)가 아후미(近江)의 타카아나호노 미야(高穴穗宮)에서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建內宿禰)를 대신(大臣)으로 하고 크고 작은 나라의 경계와 쿠니노 미야스코(國造)을 정하고, 지방의 현(縣)과 현주(縣主)도 정하였다.

고사기는 케이코(景行)천황이 기록에 남은 아들만 해도 21명, 기록되지 않은 아들이 59명 도합 80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했다. 스진천황에게 빼앗긴 열도를 탈환하기 위하여 백제에서 파견된 왕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의 말년 일본열도에 그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분할하여 후세들에게 나누어 통치하도록 한 것 같다. 소위 분봉정책이다. 그 자신의 후계자인 세이무(成務)는 아후미노 쿠니(近江國) 즉 현 시가현 (滋賀縣)을 맡고 야마토 타케루의 아들 쥬아이(仲哀)는 야마토를 분봉받았다. 그런데 야마토 타케루가 역사기록과 달리 케이코(景行) 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당시 백제 비류왕의 아들이다. 케이코(景行) 말년 쥬아이(仲哀)가 야마토를 맡았다는 것은 야마토 타케루의 영향력이 케이코천황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서기 344년 케이코(景行)천황이 사망한다. 세이무(成務)와 쥬아이(仲哀)는 피 한방을 섞이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경쟁관계이다. 세이무는 오호미의 왕, 쥬아이는 야마토의 왕이다. 야마시로(山城)라는 땅은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낀 땅이다.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氣長足姬)의 조상들의 근거지가 이 지방이며 아후미(近江)의 타카아나호노 미야 (高穴穗宮)에서 멀지 않는 곳이다. 역사는 그녀를 쥬아이(仲哀)의 황후라고 기록했으나 우리는 그녀가 세이무 (成務)의 아내였다고 믿는다. 역사를 기록할 때 진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세이무와 쥬아이를 바꿔 기록했다고 본다. 가장 강력한 근거가 이들의 무덤의 위치이다. 진구우와 세이무는 지하에 나란히 누워 있다. 여러 번 결혼한 여인이 죽으면 첫 남자의 무덤 옆에 묻는 것이 옛날의 법도이다.

그러면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될 역사란 무었이었을까? 그만큼 은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의 진구우 – 오우진 시대에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왕래는 눈 부신 데가 있다. 우리는 그 눈 부신 교류의 기록을 일관된 권력의지의 산물로 이해한다. 권력의지의 주체는 백제의 귀수왕자와 열도의 미야누시 야카히메이다. 귀수왕자의 또 다른 얼굴이 오우진(應神)이며 그는 쥬아이의 형이다. 일본서기가 그토록 감추고자 한 것이 그의 진면목인 것이다. 열도의 야마토 타케루는 서기 34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되었고 귀수왕자는 바로 그의 아들이다.
 
경쟁관계인 세이무와 쥬아이간의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이 일본서기 쥬아이조에 적혀있다. 코시노쿠니(越國, 현 후쿠이현)에서 쥬아이에게 헌상하는 백조(白鳥)가 야마시로(山城) 우지강(菟道河)에 왔을 때 훼방꾼이 나타나 헌상품인 백조를 훼손한다. 쥬아이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쥬아이는 군사를 보내 범인을 찾아 처형한다. 자기의 영토에서 벌어진 쥬아이의 군사행동에 대해서 세이무가 항의한다. 이렇게 시작되어 서기 354년경 전면전으로 발전한다. 이 전쟁을 지휘했던 장군이 다름아닌 와니노 오미(丸邇臣)의 조(祖) 나니하네코 타케후루쿠마 (難波根子建振熊)이며 그가 이 장의 주인공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부친이다.

일본서기 진구우 섭정 1년 3월 쥬아이의 왕자 카고사카왕(鹿坂王) 오시쿠마왕(忍熊王)의 반란기사가 이 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 전쟁이 바로 야마시로(山城)의 우지강(菟道河)에서 벌어지고 반란의 주모자 오시쿠마왕 (忍熊王)은 아후미(淡海)의 세타목(瀬田済)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수일 후 그의 시체가 우지강( 菟道河)에서 발견되었다.

쥬아이의 주력부대를 야마시로에서 궤멸시킨 뒤 세이무의 군대는 야마토를 접수한다. 서기 355년 쥬아이는 오오사카를 버리고 야마쿠치현의 토유라즈(豊浦津)로 도망간다. 거기서 그는 아나토노 토유라궁 (穴門豊浦宮)을 짓고 6년을 보낸다. 이것이 쥬아이천황이 아나토(穴門, 현 시모노세키 근방)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낸 이유이다.

고사기가 세이무와 쥬아이의 사망연대를 서기 355년과 362년으로 기록하였다. 서기 355년(을묘) 쥬아이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을 세이무가 사망한 것으로 또 세이무가 서기 362년(임술) 권좌에서 물러난 것을 쥬아이가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더 나아가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의 남편 또한 세이무에서 쥬아이로 바꿔버렸다.

쥬아이가 시모노세키를 피난처로 선택한 것은 백제의 도움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백제로 탈출하기 쉽기 때문이다. 당시의 백제왕이 누구인가? 바로 쥬아이의 아버지가 아닌가? 쥬아이는 아나토의 피난처에서 세이무에게 저항하였으므로 세이무는 그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움직인 것이 서기 360년경이다. 이 전쟁에 세이무와 동행한 것이 그의 비(妃)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였다. 그녀는 당시의 전쟁영웅 타케후루쿠마 (建振熊)의 딸이다.

일본서기 쥬아이 2년 7월 5일 오키나가 타라시히메가 토유라즈(豊浦津)에 도착했다. 그날 두 사람은 해안을 산보하다 황후가 여의주(如意珠)를 손에 넣었다. 이 문장을 삽입하여 오키나가 타라시히메가 장차 고귀한 운명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일본서기 저자들은 암시한다. (仲哀天皇二年 秋七月辛亥朔乙卯 皇后泊豊浦津 是日 皇后得如意珠於海中)

쥬아이가 6년간 기거하던 아나토노 토유라궁 (穴門豊浦宮)를 버리고 쯔쿠지(筑紫)의 나가아가타(儺県, 博多湾岸)로 도망가서 카시이궁(橿日宮, 福岡市 香椎)에 머물렀다. 세이무의 추격이 계속되고 큐우슈우 전체가 내란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큐우슈우의 각 나라들도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쥬아이 8년 9월 천황은 카시이궁에서 신하들과 쿠마소(熊襲) 토벌에 관해 협의 한다. 그 때 황후가 귀신에 씌어 “쿠마소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그보다 신라(新羅)라는 보물로 가득 찬 땅이 있지 않느냐? 그 곳을 쳐라. 그러면 쿠마소는 저절로 복종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쿠마소 정벌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 해 2월 5일 천황은 신의 저주로 급사했다.

위의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쥬아이의 기사로 취급되고 있지만 세이무에 관한 기사로 읽어야 된다. 이 무렵의 역사기록에 신(神)과 신탁(神託)의 출현이 빈번해 진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대의 주인공들의 시호에 신(神)이라는 글자가 붙여진다. 오우진(應神)과 진구우(神功)가 그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귀신을 의미할까? 아니면 지금 일본열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가진 인간 누군가를 의미할까? 서기 360년 귀수 왕자 40세, 세이무 33세, 쥬아이 33세,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24세 무렵으로 본다.

쿠마소의 아무 쓸모 없는 땅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 는 신탁은 백제의 귀수왕자가 세이무에게 보내는 경고이다. 열도에서 집안 사람들 끼리 싸울 힘이 있거든 그 힘을 차라리 신라를 치는데 써라. 그러나 세이무는 귀수왕자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귀수왕자의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귀수는 백제의 군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열도내의 쿠니노미야스코 (國造)들을 동원하여 세이무를 제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귀수왕자를 도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3년 등장하는 모로가타노 키미(諸県君) 우시모로이(牛諸井)이다. 그는 히무카노 쿠니(日向国, 九州南部 현 미야자키현)의 대호족으로 그의 딸 카미나가히메 (髪長媛)가 닌토쿠(仁德)의 비가 되었다. 일설에는 히무카(日向)의 모로가타노 키미(諸県君)는 노령으로 조정에 출사할 수 없게 되어 귀국하였고 대신 카미나가히메 (髪長媛)를 봉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그는 당시 야마토의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의 귀신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이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과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이다. 귀수(貴須)를 뒤집으면 수귀(須貴)가 되고 이것을 다시 주길(住吉)로 기록하여 귀수왕자를 의미한다. 스미요시 삼신은 소코쯔쯔노오 (底筒男命), 나카쯔쯔노오 (中筒男命), 우와쯔쯔노오 (表筒男命)의 총칭이며 스미요시의 신들은 오키나가 타라시히메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스미요시대사 신대기 (住吉大社神代記)는 옛부터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에 전래해 온 유래를 기술한 고전적(古典籍)인 데 신대기(神代記)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전승은 진구우황후 (神功皇后)와 관련된 것으로 진구우황후(神功皇后)가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과 밀사(密事)가 있었고, 속된 표현으로 부부관계였다고 적혀있다.

우리는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을 백제에서 귀수와 동행한 용맹한 3명의 장군들로 본다. 귀수왕자는 일거에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야마토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세이무는 서기 362년 항복하였고 귀수왕자(스미요시대신)는 세이무를 비롯한 오키나가 타라시히메, 타케시우찌노 스쿠네등의 거취를 결정하였다. 이 때 귀수왕자는 소문으로만 듣던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를 처음 면담하였다. 고사기는 그녀를 직접 면담한 그가 어떤 결정을 하였는지 자세히 기록하였다. 타케시우찌는 세이무가 가장 총애하던 신하였으므로 새로운 정권에서 등용하기 거북한 사람이었다. 타케시우찌가 새로운 정권에 충성할 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9년의 타케시우찌의 위기라는 기사는 타케시우찌가 새로운 정부의 검증을 무사히 통과하여 스미요시 대신의 신임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서기 362년 세이무를 퇴위시키고 일본열도는 귀수왕자의 통치 아래 들어가며 이 때부터 그는 오우진(應神)천황으로 기록된다. 이 무렵 전쟁 포로로 잡혀있던 오키나가 타라시히메를 방면하여 자기의 비(妃)로 만들고 이름을 미야누시 야카히메로 바꾸었다. 이 여인을 얻고 기뻐 하는 모습을 고사기가 문학적으로 묘사한 것을 위에서 보았다. 스미요시대사 신대기 (住吉大社神代記)의 기록은 그리하여 역사적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진구우황후 (神功皇后)가 오우진(應神)의 어머니라는 것은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집자들의 최대의 승부수였다. 이것을 뒤 집을 역사적 자료가 혹시 오우진(應神)이나 진구우황후 (神功皇后)의 무덤 속에서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 황실은 영혼의 평안을 헤치면 안 된다면서 결사적으로 천황들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진실은 두려운 것이다.
 
서기 363년 오우진(應神)천황은 최고의 전리품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데리고 백제의 수도 (漢山 또는 漢田)를 방문하여 근초고왕에게 새 며느리를 인사시켰을 것이다. 백제의 수도 한전(漢田)에서 오우진의 또 다른 이름 호무다(譽田)가 나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이 해 12월 백제에서 돌아오던 길에 쯔쿠지(筑紫)의 우미(宇美) 신궁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 아들이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 363 – 422)이다. 일본서기는 이 아들이 오우진(應神)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감추고 혈통을 바꾸며 소설을 쓰면서 감추고자 하였던 귀신은 귀수(貴須)였고 오우진(應神)이었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6년부터 백제와의 통교(通交)가 시작되는 외교기사가 모여있다. 가장 먼저 백제의 3명의 장군들의 이름이 나온다. 46년 춘3월 시마노 스쿠네 (斯摩宿禰)를 토쿠준노 쿠니(卓淳国)에 파견했다. 시마노 스쿠네(斯摩宿禰)는 어느 씨족의 사람인지 모른다고 한다. 토쿠쥰(卓淳)의 왕 마키무칸키(末錦旱岐)가 시마노 스쿠네에게 “ 2년 전의 7월 백제의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이 방문하였을 때 동방의 야마토에 강대한 국가가 새로 생겼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고 바다를 건너야 되므로 통교를 요구할 수 없었다.” 이를 들은 시마노 스쿠네는 종자의 니하야(爾波移)와 토쿠준(卓淳)의 와코(過去)의 2인을 백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이를 환영하며 니하야에게 비단과 화살, 40매의 철연(鉄延)을 주며 “이후로 교류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백제의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은 귀수왕자의 휘하장군으로 보이며 이들은 서기 369년부터 시작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서기 360년경 이들은 귀수왕자와 함께 열도의 내란을 평정하고 역사에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으로 신격화되어 기록되었을 것이다. 스미요시 삼신이란 귀수의 3 장군이란 뜻이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7 년 백제의 왕이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3인을 파견하여 조공했다. 이 때 신라의 사신도 쿠테이(久低)등과 동행했다. 황태후(皇太后)와 호무타와케(誉田別) 황자가 크게 기뻐하며 “쥬아이(仲哀) 천황이 살아 계셨다면 크게 기뻐하셨을 텐데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호족들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헌데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해 보니 신라의 공물이 많고 진기한 반면 백제의 것은 양도 적고 보잘 것 없었다. 쿠테이(久低) 등에게 이유를 묻자 “저희들이 사히노 시라기 (沙比新羅)에 도착했을 때 신라인들은 우리를 체포하고 3개월 간 감금하였읍니다. 저주를 입에 담았으므로 죽이지는 않았으나 우리들의 공물을 몰수하고 신라의 보잘 것 없는 공물과 바꿔치기 하였읍니다. 그러면서 만약 이를 발설하면 귀환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였읍니다.”하고 대답했다.

황태후와 호무타와케 (誉田別)황자는 신라의 사자를 꾸짖고 진위를 판단하기 위하여 천신(天神)에게 점궤를 물었다. 그리하여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内宿禰)와 협의하여 찌쿠마노나가히코 (千熊長彦)를 사자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신라가 백제의 공물을 탈취하였음이 사실로 밝혀져 이를 꾸짖었다.

위의 기사에서 또 다시 천신(天神)에게 점궤를 물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제는 누구의 눈에도 이 천신(天神)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확실하다. 황태후란 진구우(神功)황후, 호무타와케(誉田別) 황자란 오우진(應神)이라고 일본서기는 주장하나 우리는 황태후란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 황자란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천신(天神)이란 귀수왕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부분의 역사를 해석한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9년 춘 3월의 기사를 우리는 “50. 영산강 유역의 갈등의 역사”에서 다루었다. 서기 369년 진구우 황후의 군사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백제에 주었다는 내용이다. 그 기사에 이어서 칠지도(七枝刀)가 나온다.

여름 5월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가 쿠테이(久低)들과 함께 백제에서 귀환했다. 황태후가 기뻐하며 “바다 건너의 지반도 안정되어 야마토(日本国)에 볼 일도 별로 없을 터인데 어찌 오셨는가?” 라고 묻자 쿠테이(久低)들이 “저희들의 왕은 야마토의 협력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우호를 더욱 깊게 하고자 왔읍니다.”하고 대답했다. 황태후는 “잘 말 해 주었다. 이 쪽도 원 하던 바다.” 라 하며 야마토측의 세력하에 들어 온 타사성(多沙城)을 주어 왕래의 거점으로 삼도록 하였다.

진구우(神功) 51년 춘 3월 백제의 왕이 다시 쿠테이(久低)를 보내 조공했다. 황태후는 태자와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内宿禰)에게 “백제와의 친교는 기쁜 일이다. 진기한 공물을 차례로 보내주어 나도 잘 쓰고 있다. 내가 죽더라도 우호를 지켜 나가도록…” 하고 말했다. 동년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를 백제국에 파견하여 쿠테이(久低)들을 보냄과 동시 영원의 친교의 뜻을 전했다. 백제의 왕과 왕자는 황송하여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맹세하였다.

진구우(神功) 52년의 가을 9월 쿠테이(久低)들이 찌쿠마노 나가히코 (千熊長彦)와 함께 왔다. 그리고 칠지도(七枝刀), 칠자경 (七子鏡)등 여러가지 보물을 헌상하고 “우리나라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일 주일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수원이 나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수원이 있는 코쿠나(谷那)의 철산(鉄山)의 철을 채굴하여 영원히 헌상할 것입니다.” 라는 왕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또 왕은 손자인 토무루왕(枕流王)에게 “내가 교류를 계속해 온 동방의 야마토 (日本国)는 우리나라의 세력확대에 협력하였고 그에 의거하여 지반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너도 우호를 중시하고 공물이 끊기지 않도록 하면 내가 죽은 뒤에도 나라는 평안하리라.”라 하였다 한다. 그 뒤로 매년 조공이 이어졌다.

진구우(神功) 55년 백제의 초고왕(肖古王, 근초고, 재위346 –375)이 죽었다.

진구우(神功) 56년 백제의 왕자 귀수(貴須, 近仇首, 재위 375 – 384)가 즉위하였다.

진구우(神功) 64년 백제의 귀수왕이 죽었다. 왕자의 토무루왕(枕流王, 재위 384 – 385)이 즉위하였다.

진구우(神功) 65년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이 죽었다. 왕자의 아화(阿花)가 연소하여 숙부의 진사(辰斯, 재위 385 – 392)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고사기의 오진(應神)조에 주목할 만한 기사들이 모여 있다. 이 시대 아마베(海部), 야마베(山部), 야마모리베(山守部), 이세베(伊勢部)를 정했다. 또 쯔루기노 이케(剣池)를 만들었다. 또 신라 사람들이 건너 왔다. 그래서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建内宿禰)가 이들을 인솔하고 쯔쯔미노 이케(堤池)에 사역하여 쿠다라노 이케(百済池)를 만들었다. 또 백제의 국왕 초고왕 (照古王, 근초고)이 암수 한쌍의 말을 아찌키시(阿知吉師)에 딸려 헌상했다. 이 아찌키시(阿知吉師)는 아찌키노 후비토 (阿直史)등의 조(祖), 또 타찌(横刀)와 대경(大鏡)을 헌상했다.

또 백제국에 “ 학문이 높은 분이 있으면 보내라” 하였더니 와니키시(和邇吉師)라는 사람이 백제국에서 왔다. 그가 논어 10권, 천자문 1 권, 총 11권을 가져왔다. 이 와니키시(和爾吉師)는 후미노 오비토(文首)등의 조(祖), 또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 이름은 타쿠소(卓素)와 쿠레하토리(呉服)의 사이소(西素)의 두 사람을 보내왔다.

또 하타노 미야스코(秦造)의 조(祖), 아야노 아타히(漢直)의 조(祖)와 술(酒)을 빚는 전문가(専門の人), 이름이 니호(仁番) 또 다른 이름은 스스코리(須須許理)등이 바다 건너 왔다. 이 스스코리(須須許理)가 오호미키(大御酒)를 빚어 헌상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천황은 즐거워 하였다.

고사기는 기사만을 나열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서기는 몇년 몇월 며칠의 시간개념을 도입하고 있지만 진실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필요에 의해 연기(年紀)나 선후가 제 멋데로 바뀌어 있으므로 해석은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는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4년 춘 2월 백제의 왕이 하타오리(機織)의 마케쯔(真毛津)를 보내왔다. 현 쿠메노 키누누히 (久目衣縫)의 시조이다.

동년 유즈키노 키미(弓月君, 하타(秦)씨의 시조)가 백제에서 건너와, “ 내가 다스리는 120현(百二十県)의 인민을 데려 오고자 하나 신라의 방해로 가라국(加羅国)에 머물러 있읍니다” 라 하였다. 그래서 카쯔라기노 소쯔히코 (葛城襲津彦)를 파견하여 유즈키(弓月)의 인민을 가라(加羅)에 대기시켰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소쯔히코(襲津彦)가 귀환하지 않았다.

오우진(應神) 15년의 추 8월 백제의 왕이 아찌키(阿直岐)를 파견하여 양마 2필(良馬二匹)을 헌상했다. 그래서 아찌키 (阿直岐)로 하여금 카루노사카(軽坂, 橿原市大軽町)의 마굿간에서 사육시키고 그 곳을 우마야사카(厩坂)라 하였다. 아찌키(阿直岐)는 또 문헌에 밝았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의 스승으로 하였다. 천황이 “백제에 그대와 같은 후미요미히토(博士, 글을 아는 자)가 있는가?” 묻자 아찌키가 와니(王仁)라는 자(者)를 추천했다. 그래서 카미쯔케노노 키미(上毛野君)의 조선(祖先) 아라타와케(荒田別)와 카무나키와케(巫別)를 백제에 보내 와니(王仁)를 데려 오기로 하였다. 아찌키(阿直岐)는 아찌키노 후비토(阿直岐史)의 시조이다.

16년 춘 2월 와니(王仁)가 왔다. 그래서 태자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의 스승(師匠)으로 하였다. 여러 문헌을 학습하고 다방면의 지식을 공부했다. 와니(王仁)는 후미노 오비토(書首)등의 시조이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조에 오우진이 오호토모와케 (大鞆和気)라고 불린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천황이 태어나기 전 천신지지 (天神地祇)의 보호를 받아 신라원정에 성공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출생했을 때부터 팔의 근육이 토모(鞆)의 형상으로 솟아 있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오호토모와케(大鞆和気)로 불리게 되었다. 토모(鞆)란 일본에서 만든 글자((國字)이며 활을 쏘는 사람의 왼 팔을 보호하도록 가죽으로 만들어 끼는 보호대라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52년과 64년의 기사에 토무루왕(枕流王)이 나온다. 그는 근구수 다음의 15대 침류왕을 뜻하는데 왜 일본서기가 침류(枕流)를 토무루로 읽었는지 설명이 없다. 우리는 이 토무루라는 말이 위의 토모(鞆)에서 온 말이라고 보며 오토모와케란 오우진이 아니라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의 별명이었다고 본다. 서기 384년 근구수왕이 죽고 385년 토무루왕(枕流王)이 즉위했는데 이 토무루왕이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였다.

미야누시 야카히메(宮主宅媛)는 장군의 딸이라 하였다. 그녀 또한 활을 들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여 토모(鞆)를 팔뚝에 끼고 사는 일이 많았다. 그런 연유로 왼 팔뚝에 굳은 살이 박히고 그것이 전설이 되어 그녀가 낳은 아들의 팔에 태어 날 때부터 토모(鞆)처럼 굳은 살이 박혀 있어서 오호토모와케로 불렸다 한다. 와니노 오미(和珥臣)의 조선(祖先)의 히후레노 오미(日触使主)의 딸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宅媛)를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서기 384년 침류왕 즉위 기사에서 아이부인 (阿尒夫人)이라 기록했다. 와니부인(和珥夫人, 또는 丸邇夫人)이란 뜻이리라.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46년부터 52년까지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 쿠테이(久低), 미쯔루(弥州流), 마쿠코(莫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귀수와 미야누시 야카히메를 잇는 최 측근 참모들이다. 서기 365년부터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백제 출입이 잦아졌을 것이다. 시아버지 근초고왕은 백제의 최고 권력자이다. 오우진(應神)천황에게는 우지노와키 이라쯔코 (菟道稚郎子)보다 나이 많은 아들들이 즐비하다. 손 위의 형제들을 젖히고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다. 가장 중요한 거점이 근초고왕이었다. 할아버지의 인증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을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모를 리 없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40년 춘정월 천황은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를 불러, “너희들도 자식 이쁜 줄 알게다”라고 말 하니 둘이 함께 대답했다. “예. 알고 있읍니다”. 그러자 천황은 “다 큰 자식과 어린 자식이 있으면 어느 쪽이 더 귀여우냐?” 하고 물었다. 오호야마모리 (大山守)는 “나이 많은 쪽입니다.”하고 답 하였다. 오호사자키 (훗날의 仁德천황)는 천황의 안색을 보고 그 마음 속을 헤아려, “다 큰 자식에게 불안이 있을 턱이 없지요. 그러나 어린 자식에게는 여러가지로 신경쓰게 되므로 애정도 더 깊을 것입니다.”라 하니, 천황이 매우 기뻐하며 “그 말이 맞다.”라고 하였다. 천황은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를 태자로 세우고 싶어서 나이 많은 아들들의 의향을 물어 본 것이다. 같은 달,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를 태자로 정하고, 오호야마모리 (大山守命)에게 산천임야등 국토관리를 맡겼다. 오호사자키(大鷦鷯尊)는 태자의 보좌역을 맡겼다.

할아버지의 인증이 지금 역사의 유물로 남아있다. 서기 368년 우지노와키 이라쯔코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 근초고왕으로부터 왜왕(倭王)의 칭호를 받았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칠지도이다. 칠지도의 명문 “百濟王世子 奇生璽書 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은 근초고왕이 다섯 살 된 손자 기생(奇生, 우지노와키의 백제 이름)을 왜왕으로 명한다는 뜻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서기 368년 근초고왕이 31세의 며느리 미야누시 야카히메에게 준 선물이었다. 칠지도가 열도의 미야누시 야카히메에게 전달된 것은 서기 37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서기 368년 이미 왜왕의 공인은 이루어졌을 것이다.

오우진(應神) 15년의 추 8월 백제의 왕이 아찌키(阿直岐)를 파견하여 양마 2필(良馬二匹)을 헌상했다는 기사는 서기 368년 근초고왕이 손자 왜왕에게 말을 선물로 보낸 것으로 이해한다. 칠지도는 제작하는데 시간이 걸리므로 뭔가 당장 눈에 띄는 표지가 필요하여 말을 골랐을 것이다. 헌데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말을 가지고 온 아찌키가 글을 읽을 수 있는 것 을 알고 아들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아들을 제왕으로 키우기 위하여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 같다.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기록한 아찌키(阿直岐)와 와니(王仁)의 기사는 아들을 제왕으로 길러 내고자 하는 어머니의 심모원려에 다름 아니다. 그 시대에 백제 최고의 학자를 야마토로 불러 들여 아들의 스승으로 모신다. 아마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는 당대의 권력자들 가운데 최고의 학문을 수학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서기 368년 왜왕으로 임명된 우지노와키 이라쯔코(菟道稚郎子)는 열도의 왕이 된 것이며 이 때부터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섭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무렵 고구려의 남진정책이 시작되면서 백제의 북쪽 국경에 전운이 감돌고 귀수왕자는 백제를 비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우진(應神)천황은 말만 야마토의 왕이지 아버지를 대신하여 백제 방어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근초고왕 73세, 귀수왕자 48세, 미야누시 야카히메 31세, 왜기왕 5세였다.

고사기의 오우진(應神)조의 기록 가운데 눈에 띄는 기록이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 이름은 타쿠소(卓素)와 쿠레하토리 (呉服)의 사이소(西素)의 두 사람을 보내왔다. 또 술(酒)을 빚는 전문가(専門の人), 이름이 니호(仁番) 또 다른 이름은 스스코리 (須須許理)등이 바다 건너 왔다. 이 스스코리(須須許理)가 오호미키(大御酒)를 빚어 헌상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천황은 즐거워 하였다.” 이다.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는 쇠를 잘 다루는 사람이며 쿠레하토리 (呉服)는 의상의 전문가이다. 또 이들은 양조(釀造) 전문가도 필요로 한 모양이다.  

쇠를 다루는 사람은 무기의 제작과 관련이 있겠지만 당시 일본열도는 이상할 정도로 동경(銅鏡)에의 집착을 보인다. 중국의 한경(漢鏡)은 손에 넣기 힘 들고 값이 너무 비싸 열도에서 동경(銅鏡)의 제작을 시도했을 것이다. 서기 383년 제작된 스다 하찌만 신사의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은 여기 등장하는 테히토 카라카누찌 (手人韓鍛)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의상(衣裳)은 상식적으로 체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상이란 역사적으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신분을 구분하기 위하여 발전하였다. 백제에서 의상 전문가를 데려 올 필요를 느낀 열도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차별화할 의상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14년 춘 2월 백제의 왕이 하타오리(機織)의 마케쯔(真毛津)를 보내왔다. 현 쿠메노 키누누히 (久目衣縫)의 시조이다. 하타오리(機織)란 방직(紡織) 기술자이다.

동경(銅鏡), 의상(衣裳), 방직(紡織), 양조(釀造)등의 문화적 취향에 관심을 가졌던 권력자로 우리는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얼굴을 떠 올린다.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서기 368년부터 일본열도의 섭정이었다. 백제의 근초고왕과 구수왕자는 미야누시 야카히메가 필요로 하는 기술자들을 지체없이 보내 주었을 것이다.
서기 375년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이 백제의 귀수왕이 된다. 그리하여 이와레(磐余)의 와카사쿠라노미야 (若櫻宮) 에서 미야누시 야카히메 (宮主媛) 12세의 왜왕(倭王)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섭정으로서 정사(政事) 돌본다. 오우진(應神)천황이 정무를 보던 가시하라(橿原) 아키라노 미야 (輕嶋之明宮), 이와레(磐余) 와카사쿠라노 미야 (若櫻宮), 왜왕(倭王)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거처 옷사카(忍坂)궁이 모두 현재의 사쿠라이 (櫻井)시와 카시하라(橿原)시로 지척의 거리에 있었다.

일본서기 진구우(神功) 13 2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內宿禰)에게 명하여 태자를 쯔누가 (角鹿, 福井縣 쯔루가 (敦賀)) 케히대신(笥飯大神)에게 참배시켰다. 같은 , 태자가 돌아왔다. 황태후는 연회를 베풀어 태자에게 술을 따라 주며 한다. “ 술은 내가 빚은 아니라 술을 전문으로 빚는 스쿠나 미카미 (少御神) 머나 곳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빚어 보낸 술이니라. 들거라옆에 있던 타케시우찌노 스쿠네 (武內宿禰) 태자를 대신하여 술을 빚은 분은 절구(臼)대신 (鼓) 둥둥 치면서 빚었을 겁니다. 술의 풍부한 맛을 보면 압니다. ! 드십시요.” 하고 거들고 나섰다.

위의 기사를 일본에서는 오우진(應神)천황의 성인의례(成人儀禮) 때의 일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우진(應神)천황은 백제의 근구수왕이었으며 왜기왕의 성인식에 축하의 술을 보낸 것이다. “스쿠나 미카미 (須久那御神)” 스쿠나란 귀수왕의 수귀(須貴) 뜻하며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 스미요시(住吉) 같은 의미로 썼다. 우리는 위의 기사가 서기 379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16세가 되어 성인식을 치른 일로 본다. 위의 진구우(神功)황후의 언급은 백제 땅에서 아버지가 너의 성인식을 축하해서 보내주신 술이니 들고 기뻐 하여라라는 의미가 된다. (구자일 설). 이 타케시우찌노 스쿠네의 나이 52, 귀수왕 59, 미야누시 야카히메 42, 왜기왕 16세였다.

미야누시 야카히메는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밑으로 딸을 낳았는데 ( 가운데 야타노 이라쯔메가 훗날 닌토쿠의 황후가 되었다.) 서기 365 이후 귀수왕자는 주욱 백제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백제 나들이가 빈번하였을 것으로 상정할 있다. 쯔쿠시(筑紫)지역에 전해오는 진구우 황후의 많은 전승은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잦은 백제 나들이의 파편들일 것이다.

서기 384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진다. 백제의 귀수왕이 죽고 다음 침류왕이 즉위하였다. 우리는 왜왕이 21세가 되자 백제와 야마토를 부자간에 바꾸었다고 본다. 그와 관련된 역사를 해석한 것이 “56.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 이다. 오우진(應神) 64, 미아누시 야카히메 47, 토무루왕 21세였다.

백제에서 돌아 오우진(應神)천황은 일단 수도를 카시하라(橿原)에서 카와치(河內) 옮긴다. 카시하라(橿原) 가루시마노 아키라노 미야 (輕嶋之明宮) 들어 가지 않고 나니와의 오호스미노미야(大隅宮, 大阪市)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진구우(神功) 65 (서기 385) 백제의 토무루왕(枕流王) 죽었다. 왕자의 아화(阿花) 연소하여 숙부의 진사(辰斯, 재위 385 – 392)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 숙부 진사(辰斯) 실제 모습이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이다. 오우진 (應神)천황이 서기 368년 후계자로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 지명할 때부터 염려하던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우지노 와키이라쯔코 (菟道稚郞子)보다 16 – 17 나이많은 형이다.

서기 385 중국대륙은 2 전의 비수대전(淝水大戰))으로 전진(前秦) 부견(符堅) 몰락하고 군웅할거의 혼란속에 빠져든다. 침류왕의 중국파병과 관련된 역사적 자료는 알려진게 없다. 아마 근초고왕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동진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파병은 시급하게 이루어졌던 모양으로 당시 14세였던 동생 아화(阿花, 아신왕) 왕으로 남기고 부랴부랴 대륙에 건너 갔다.

대륙에 건너 간 백제인들은 100년이 지난 백제의 동성왕 시절 본국과 협력하여 대륙에 백제의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서기 488 화북지역의 패자 북위는 대륙의 백제세력을 공격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자치통감은 백제가 중국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화북 지역의 패자(覇者)였던 북위(北魏) 침략을 물리친 전쟁을북위(北魏)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배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西), 진평(晉平) 2 (郡) 차지하고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권력의 진공상태를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탈취하여 진사왕(辰斯王) 되었는데 역사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진사왕(辰斯王) “57.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의 왕자의 에서 이미 다루었다.

진구우(神功) 69 (서기 389) 4 황태후가 와카사쿠라노 미야(稚桜宮)에서 죽었다. 서기 389 미야누시 야카히메의 사망기사는 역사적 진실로 보인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3 (서기 385) 백제의 진사왕(辰斯王) 즉위했다. 서기 392 카시코키쿠니(貴国) 천황(貴須) 에게 실례(失禮) 범했으므로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 하타노 야시로노 스쿠네(羽田矢代宿禰), 이시카하노 스쿠네(石川宿禰), 쯔쿠노 스쿠네(木菟宿禰) 파견하여 외교자세를 탓하자 백제의 국인(国人)들이 진사왕(辰斯王) 죽여 사죄하였다. 키노쯔노노 스쿠네(紀角宿禰)들은 아화왕(阿花王, 17 아신왕, 재위 392 - 405) 즉위시키고 귀환하였다.

서기 392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은 391) 진사왕이 고구려에 패배하자 야마토의 오우진(應神)천황은 야마토의 장군들을 백제에 보내 아들 진사왕(大山守命) 야마토로 귀환시키고 원래데로 아신왕을 복위시킨다. 그로부터 2 서기 394 오우진 천황도 나이 74세로 사망하였다. 이렇게 역사의 주역들의 퇴장과 함께 신비의 4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주) 이 글은 구자일의 www.daangoon.pe.kr 을 참조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 내용을 해석한 것입니다.

2010년 2월 28일 일요일

71. 일본국의 출현

고대부터 왜(倭, 야마토)로 불리던 열도의 이름이 일본으로 바뀐 것은 서기 670년 경이다. 서기 663년 백강의 전투 (The battle of baekgang) 이후 “대왕의 나라 쿠다라(百濟)”가 사라지자 열도는 홀로 서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어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 하였으며 이 때부터 비로소 자주권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일본열도는 백제의 일부였으며 백제왕실의 관리 아래 있었다. 본국은 망했지만 일본열도를 관리하던 백제왕실은 천손강림의 역사관을 열도에 정립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하여 자신들을 하늘의 자손으로 신격화하고 일본의 왕을 천황이라 칭하였다. 백강의 전투에 참전하였던 텐무천황 (622 – 686)이 일본의 역사서 편찬을 명하였다 하니 실로 발 빠른 대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부터 일본이라는 국호가 처음으로 사용되고 많은 용어가 새로 등장한다. 천황, 동궁(東宮), 태자(太子)등의 용어도 이때 등장하였다. 이 때까지 야마토에서는 현직의 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이는 백제에서 야마토의 왕을 결정하므로 야마토에서는 누가 다음 왕위에 오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해당되는 동궁이나 태자 등의 용어를 쓰지 않았다. 백제가 멸망한 뒤 일본에서는 부왕 재위중 동궁이나 태자를 지정하여 자기 후손이 왕위를 잇도록 하는 장치를 만든다. 백제멸망 이전에는 열도에 없던 제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서기 670) 12월 왜국(倭國)이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붙였다고 하였다. 倭國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以爲名

서기 945년 성립한 구당서(旧唐書)에 일본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일본국은 왜의 다른 명칭이다. 이는 나라가 해뜨는 곳에 있어서 만들어진 이름이요, 혹은 말하기를 왜국이라 함은 떳떳치 못한 이름이어서 스스로 싫어해서 이름을 일본이라 고친 것이다.

日本國者、倭國之別種也。以其國在日邊、故以日本爲名。或曰、倭國自悪其名不雅、改爲日本。

백제의 무령왕 이후 야마토에 대한 영향력을 되찾은 것은 안칸천황이 케이타이의 뒤를 이어 야마토를 장악한 서기 531년이다. 안칸(安閑)– 센카(宣化) 는 무령왕의 동생이며 킨메이(欽明)는 무령왕의 아들이다. 그 뒤 안칸(安閑)– 센카(宣化) – 킨메이(欽明) – 비타쯔(敏達) – 요메이(用明) – 스슌(崇峻) – 스이코(推古) – 죠메이(敍明) – 코오교쿠(皇極) – 코오토쿠(孝德) – 사이메이(齊明) – 텐찌(天智) – 코우분(弘文) – 텐무(天武) – 지토우(持統)까지 일본서기에 나온다. 위에 기록된 천황들 가운데 스슌과 스이코시절 야마토는 백제에 반기를 들고 열도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나 큐우슈우를 장악하고 있던 백제 세력에 의해 모두 좌절되었다.

서기 587년 4월 2일 요메이(用明)왕이 병에 걸려 신하들을 모아 놓고 불법승 (仏法僧)의 삼보(三宝)에 귀의 (帰依)하겠다고 선언한다. 천연두가 창궐하던 시대였다. 천연두에 걸린 왕이 절에 들어가 부처님께 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데리고 왕이 누워 있는 내실로 들어갔다.

서기 587년 4월 야마토의 요메이(用明)왕이 불문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고 그 해 6월 카시키야 히메 (炊屋姫尊, 후일의 스이코 여왕) 의 명에 의하여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와 야카베황자 (宅部皇子)가 토벌된다. ( 64. 아좌태자 및 67. 간고지 가람연기의 암시 참조). 그 해 7월 요메이(用明)왕이 죽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가 토벌되고, 8월 스슌(崇峻, 530 – 592)이 등극한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을 일본서기는 불교도입을 둘러 싸고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일으킨 전란쯤으로 기술하였으나 간고지 가람연기에는 이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다. 이는 이 사건이 불교와 관계없는 순수한 정치적 사건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서기는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카시키야 히메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린 것으로 기록하여 주살된 것 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아나호베황자는 당시 큐우슈우 왕이었고 요메이(用明)왕이 불문에 들어가면 야마토왕이 될 사람이었다.

당시 야마토는 비다쯔(敏達)의 비(妃) 카시키야 히메 (炊屋姫尊, 후의 스이코여왕),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 스슌(崇峻)등을 중심으로 야마토의 자결권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노노베노 모리야 (物部守屋)가 이에 반대하여 백제와 큐우슈우가 지정한 아나호베황자 (穴穂部皇子)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를 제거한 것이 서기 587년의 모노노베노 모리야 토벌이었다고 본다. 불교도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라는 일본서기 설명은 큐우슈우의 존재를 감추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때 주살된 아나호베황자가 킨메이(欽明)왕과 그의 비 소가노 오아네(蘇我小姉) 사이에서 태어 난 아나호베황자(穴穂部皇子)로 본다. 그러나 큐우슈우 왕 아나호베황자 (? – 587) 는 백제 성명왕의 아들이며 요메이(用明)왕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나호베황자 (? – 587)와 관련된 일본서기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아나호베황자의 주살은 백제와 큐우슈우에 대한 야마토의 반역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백제의 의지에 없던 스슌(崇峻)이 출현한다. 일본서기는 요메이(用明) 왕이 587년 7월 9일 죽었다고 기록했으나 그는 토요국(豊国)의 법사(法師)를 따라 우사시 (宇佐市)의 불문에 귀의했을 것이다. 당시의 우사(宇佐)는 “67. 간고지 가람연기의 암시”에서 거론된 법흥황 (훗날의 백제 법왕)의 수도였다.

서기 587년의 야마토의 반란은 591년 큐우슈우 정벌로 이어진다. 스슌(崇峻) 4년 (서기 591) 11월 4日, 키노 오마로노 스쿠네 (紀男麻呂宿禰), 코세노 사루노 오미 (巨勢猿臣), 오호토모노 쿠이노 무라지 (大伴嚙連), 카쯔라기노 오나라노 오미 (葛城烏奈良臣)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각 씨족의 오미(臣)와 무라지(連)를 부장(副将), 대장( 隊長)으로 하여 2만여의 군사를 딸려 쯔쿠지(筑紫)에 출병하였다

서기 591년 야마토의 큐우슈우 정벌의 결과를 알리는 기사는 없지만 591년 큐우슈우의 법흥년호(法興年號) 선포, 592년 야마토의 스슌(崇峻) 암살은 큐우슈우 세력이 그 후의 사태를 주도하였다는 증거이다.

스슌(崇峻) 5년 (서기 592) 11월 3일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는 스슌(崇峻)천황을 살해하고 당일 쿠라하시노 오카노 미사사기 (倉梯岡陵)에 매장하였다. 이 시역사건에 대하여 소가노 우마코( 蘇我馬子)는 아무 문책도 받지 않았고 계속하여 권좌에 있었다. 이는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의 의지에 따른 행위였기 때문이다. 야마토의 천황보다 상층의 권력자란 누구일까?

우리는 일본열도의 역사가 만세일계였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거론되고 있는 시대에 세개의 권력주체가 존재하였다. 하나는 백제본국의 위덕왕, 또 하나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야마토의 천황, 세번째 주체는 열도의 역사에서 지워져 버린 구주백제 (九州百濟)의 존재이다. 이 시대 야마토의 천황은 큐우슈우(九州)를 지배하지 못 하였다.

스이코(推古) 4년 (서기 596) 11월 호코지(法興寺) 가 완공되고 다음 해인 서기 597년 4월 백제의 아좌태자가 아스카를 방문하였다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아좌태자 (570 – 598)는 일본역사에 오시사카 히코히토노 오호에 (押坂彦人 大兄) 황자라고 기록되었고 여러가지 정황을 참작하여 서기 598년 아스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아좌태자는 백제 위덕왕의 장자이며 큐우슈우의 왕이었고 현 오오이타(大分)현 우사시(宇佐市)가 그의 수도였다. 당시 야마토는 큐우슈우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서기 598년 12월 백제의 위덕왕 또한 역사의 인물이 된다. 같은 해에 백제왕계의 본류 위덕왕 부자(父子)가 사망한 것이다. 백제왕위는 위덕왕의 동생 혜왕과 법왕이 즉위하나 단명으로 끝나고 서기 600년 무왕이 즉위한다. 백제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큐우슈우 왕으로 아좌태자의 8살 된 어린 아들, 타무라(田村) 황자가 즉위하자 기회를 엿보던 야마토는 열도의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큐우슈우를 공격한다. 섭정 우마야도 토요토 미미 (廄戶豐聰耳) 황자가 이 독립전쟁(?)에 가장 열성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는 백제왕실의 방계이므로 야마토의 왕이 될 가능성도 없었고 서기 602년과 603년의 큐우슈우 원정군 사령관들이 모두 그의 동생들이다.

8 세기 일본서기 편찬시 야마토의 유일정통성을 확보하려던 역사가들이 섭정 우마야도 토요토 미미 (廄戶豐聰耳) 황자의 대 백제 독립노선을 높이 평가하고자 한 것이 그 후의 쇼토쿠태자 (聖德太子) 의 기록들이다. 백제본국이 없어지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되었던 7세기 말 일본은 쇼토쿠태자를 이상적인 성인 정치가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야마토는 백제와 아무 관련도 없으며 쇼토쿠태자와 같은 이상적인 지도자들이 열도에 율령제를 도입하여 근대적인 국가의 틀을 만들었다고 역사를 미화한다. (37. 성덕태자 편 참조)

스이코(推古) 8년 (서기 600) 춘2월 신라와 임나가 서로 공격하였다. 여왕은 가야를 구하기 위하여 사카이베노 오미 (境部臣)를 대장군으로, 호쯔미노 오미 (穗積臣)를 부장군으로 임명하고 일만여의 병사를 주어 신라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곧장 신라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 신라에 상륙하였고 다섯 개의 성(城)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신라왕은 백기를 들고 투항하여 타타라(多多羅), 스나라(素奈羅), 호찌키(弗知鬼), 와다(委陀), 남가라(南迦羅), 아라라(阿羅羅)의 여섯개의 성(六城)을 할양하였다.

일본서기는 야마토가 큐우슈우를 공격한 것을 모두 신라를 공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서기를 읽을 때는 문자에 구애되지 말고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서기 562년 킨메이 (欽明) 시대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하였으므로 이 시대 임나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았고 야마토가 큐우수우를 공격한 것을 신라을 공격하였다고 빗 대어 기록한 것이다. 초전에서 소정의 성과를 거두고 철군한 듯 한데 그 후 큐우슈우 측이 고분고분하게 야마토를 따르지 않고 저항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는 백제 무왕이 즉위한 뒤 곧 정권을 안정시키고 큐우슈우의 안보를 챙긴 결과일 것이다. 야마토의 우마야도 토요토 미미 (廄戶豐聰耳) 황자는 서전의 승리로 권력기반을 다지고 자기의 궁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스이코(推古) 9년 (서기 601) 2월 황태자가 이카루가궁(斑鳩宮)의 건설에 착수한다. 그 해 9월 신라의 첩자 카마타(迦摩多) 가 쯔시마에서 체포되어 야마토로 압송되고 11월 조정은 신라침공에 관해 논의한다. 신라의 첩자 또한 신라가 아니라 큐우슈우에 대한 이야기로 본다. 대백제 강경파 우마야토 (廄戶) 황자가 반란의 목소리를 높이던 스이코(推古) 10년 (서기 602) 봄 2월 쿠메황자(來目皇子)를 격신라장군(擊新羅將軍)으로 임명하고 25,000명의 군사를 배속시켰다. 그 해 4월 쿠메황자는 쯔쿠지(筑紫)에 상륙하여 시마노 고오리(島郡)로 진군하여 군량수송 선박을 징발한다. 6월 오호토모노 무라지 쿠이 (大伴連囓), 사카모토노 오미 아라테 (阪本臣糠手)가 백제에서 돌아왔다. 이 때 쿠메황자는 병들어 누워 정벌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10월 백제승 관륵(觀勒)이 입조하여 역본, 천문, 둔갑, 방술(方術)의 서적을 바쳤다. 다음 해 (서기 603) 봄 2월 쿠메황자가 쯔쿠지에서 사망하였다.

일본서기는 쿠메황자가 큐우슈우에서 병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전쟁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서기 602년 야마토 군은 큐우슈우군의 반격을 받아 야마토의 사령관이 부상으로 전사한다. 쿠메황자는 당시의 섭정 우마야도 (廄戶)황자의 동부동모의 친동생이다. 백제왕의 명을 전하는 사절들이 분주하게 백제와 야마토를 왕래한다. 관륵과 같은 거물 승려가 야마토에 들어 와 선진의 문물을 전수하고 야마토의 지배자들에게 백제왕의 뜻을 전한다.

스이코(推古) 11년 (서기 603) 4월 쿠메황자의 배 다른 형 타기마(當麻)황자를 정신라장군(征新羅將軍)으로 임명하였고 7월 3일 타기마황자가 나니와(難波)를 출항하였다. 그는 7월 6일 하리마(播磨)에 도착하였으나 그와 동행하던 그의 처 토네리 히메왕 (舍人姬王)이 아카시(赤石)에서 사망하여 아카시의 히가사노 오카노 우에(赤石檜笠岡上)에 장사지내고 타기마황자가 돌아 와 전쟁이 중지된다. 그 해 10월 천황은 거처를 오하리다 궁(小墾田宮)으로 옮긴다.

서기 603년의 타기마황자의 큐우슈우 원정 또한 실패로 끝난 듯 하다. 큐우슈우 군이 반격에 나서 야마토를 향하여 진격한다. 현재의 오오사카를 출항한 타기마황자의 군대가 코오베(神戶)에 도착했을 때 이미 큐우슈우의 군대는 거기까지 진출하여 야마토의 원정군을 괴멸시켜 사령관의 아내가 전사하고 큐우슈우 군은 야마토를 접수한다. 일본서기에 큐우슈우 군이 야마토를 접수하였다는 직설적인 기록은 나오지 않으나 전후사정을 고려하면 그렇게 추측된다.

일본서기는 신라원정군의 기사를 흐지부지 마루리하고 곧 쇼토쿠태자의 제도개혁으로 주제를 바꾼다. 12 관위제와 17조 헌법이 나오고 불교흥륭의 조가 발표되며 견당사가 파견된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이 모든 개혁정치를 야마토의 것으로 만들고 이 시대 야마토의 자주권을 추구하였던 쇼토쿠태자의 공로인 것 처럼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기를 읽어가면 변명이나 거짓으로 기록하기도 하지만 전후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명백한 인과관계를 밝히지 않은 채 주제나 인명을 달리 하는 기사가 이어져 나오는 수법을 구사한다. 후인들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며 역사를 기록 한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큐우슈우의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는 이 전쟁의 주모자 들을 관대하게 처벌한 것 같다. 주모자 우마야도 황자는 모든 정치에서 손 떼고 불교에 전념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다리시북고의 할머니에 해당하는 스이코 여왕은 그대로 왕위에 남아 다리시북고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불교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수서 왜국전에 기록된 다리시북고는 타무라(田村)황자이며 아좌태자의 아들로 서기 600년 큐우슈우 왕이 되었다.

스이코 시대의 견당사 기사는 모두 다리시북고의 견수사 기록의 카피이며 서기 630년 죠메이 2년의 제 1차 견당사 기사는 다리시북고의 견수사의 후속편이다. 왜냐하면 서기 628년 할머니 스이코(推古) 여왕이 운명하자 큐우슈우 왕 다리시북고가 죠메이(敍明)천황으로서 야마토를 직접 통치하기 때문이다. 수서 왜국전에 나오는 그의 견수사 파견은 그가 큐우슈우 왕일 때의 기록이며 서기 630년 야마토의 제 1차 견당사는 그가 야마토의 죠메이(敍明)천황이 되어 파견한 기록이다.

일본서기는 서기 629년 죠메이천황의 즉위와 관련하여 장문의 권력투쟁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 부분은 소설로 친다. 앞서 거론한 바와 같이 야마토는 스스로의 왕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적이 없으며 스이코 여왕의 야마토 정권은 서기 603년의 패전이후 사실상 다리시북고의 지배 아래 있었다.

서기 670년 출현하는 일본은 서기 629년 즉위하는 죠메이 천황에서 그 뿌리가 시작된다. 일본서기는 죠메이 천황과 관련된 기록을 최소화 하였으나 이 사람은 백제, 큐우슈우, 야마토를 호령했던 자이안트이다.

서기 663년 백제의 멸망과 일본의 출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 34년전, 서기 629년 야마토의 죠메이천황이 등장한다. 일본서기는 죠메이천황기에 그의 전력에 관하여 일절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기 593년생이며 629년 죠메이 천황등극시 37세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백제 위덕왕의 직계손자인 타무라황자가 나이 37세가 될 때까지 일절 공직을 수행하지 않고 개인의 신분으로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일본의 역사에 이 부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역사에 드러나지 않은 죠메이천황에 관련된 보다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사람의 아들들에 의하여 일본국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오직 수서 왜국전에 서기 600년과 607년 다리시북고의 견수사 기사가 남아 있지만 일본서기에 다리시북고의 기록이 없으므로 일본은 다리시북고 = 타무라황자 라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서기는 그의 시호를 오키나가 타라시히 히로누카 천황 (息長足日廣額天皇) 이라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타라시히 히로 (足日廣) 부분이 위의 다리시북고 (多利思北孤)와 같은 말이라고 본다. 타라시(足)는 다리시(多利思)와 같은 말이며 히히로(日廣)가 북고(北孤)와 대응한다.

그는 비타쯔천황의 손자이며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彥人大兄皇子)와 어머니 누카테 히메(糠手姬) 황녀사이에서 서기 593년 태어났다. 우리는 지금까지 히코히토 황자란 백제의 아좌태자(570 – 598)의 일본 이름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의 족보는 백제 위덕왕 – 아좌태자 – 다리시북고 (타무라 황자)로 되는데 위덕왕 (일본이름 야타노 타마카쯔노 오호에)을 일본서기에 기록할 수 없으니 위덕왕의 친 동생 비타쯔의 후손으로 처리하였다.

서기 628년 3월 7일 스이코(推古)천황이 사망하고 629년 정월 4일 타무라 황자(田村皇子)가 즉위하니 그가 죠메이(敍明) 천황이다. 그 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서기 593년 큐우슈우의 토요노쿠니(豊國) 우사(宇佐), 현재의 우사신궁 (宇佐神宮) 자리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누카테 히메(糠手姬) 황녀는 타무라(田村)황자, 나카즈(中津)왕, 다라(多良)왕의 3 형제를 낳았다. 누카테 히메의 이름은 타무라(田村) 황녀라고도 하는데 그녀의 이름을 따라 장남의 이름이 타무라 황자가 되었고 이후 이들 주변에 타무라(田村), 타카라(寶), 다메(田眼)등의 비슷한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일본서기 죠메이 2년 (서기 630) 정월 12일 타카라(寶)황녀를 황후로 세워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가 카즈라기(葛城)황자, 두째 하시히토(間人) 황녀, 셋째 오호아마(大海)황자이다. 여기 등장하는 두 황자가 나중 텐찌(天智)와 텐무(天武)천황이 되어 현 일본천황가의 조상이 되므로 죠메이(敍明)천황이야말로 천황가의 뿌리인 것이다.

또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딸 호테이노 이라쯔메(法提郎媛)와의 사이에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 615 – 645) 황자를 낳았다. 그런데 고사기의 비타쯔 기록에는 비타쯔와 스이코 사이에 태어 난 타메(田眼)황녀가 죠메이(敍明) 천황에게 시집갔다고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는 이 기록이 빠져 있다. 고사기는 스이코천황에서 끝나므로 죠메이시대의 역사는 고사기에 없고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부분이다. 고사기에는 없고 일본서기에서만 다룬 제 34대 죠메이 천황에서 41대 지토천황까지의 역사는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당시 황실의 역사관에 맞춰 적극적인 가공을 서슴치 않았을 부분이다. 8 명의 천황이 기록된 세월이지만 죠메이 당대와 그의 자식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이다.

타메(田眼)황녀의 기록과 관련하여 고사기가 완성된 서기 712년과 일본서기가 완성된 서기 720년의 역사인식에 변화가 감지된다. 고사기가 기록한 타메(田眼)황녀의 기록을 일본서기는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죠메이(舒明) 3년 (서기 631) 3월 백제왕 의자(義慈)가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가 나온다. 훗날의 기록을 보면 이 때 풍장(豊章)뿐 아니라 왕자 선광(善光)이 함께 야마토의 죠메이천황에게 왔다. 당시 백제는 무왕의 치세로 의자왕은 서기 641년 즉위한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서기 631년 의자왕이 일본에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고 적었다. 일본역사가들은 통상 죠메이천황의 둘째황자 오호아마(大海)가 서기 631년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풍장과 오호아마가 동일인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때부터 그는 두 개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죠메이 13년 (서기 641) 10월 9일 천황이 쿠다라노 미야 (百済宮) 에서 죽었다. 10월 18일 천황의 빈소를 차렸는데 동궁 (東宮) 히라카스 와케 황자 (開別皇子) 가 16세의 나이로 조사를 읽었다는 기사로 죠메이기가 끝난다. 죠메이기의 마지막에 한 줄 무심하게 첨가된 히라카스와케의 나이 16세라는 기사는 심오한 역사적 의미를 함축한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쿠테타를 통하여 천황가를 탈취한 텐찌천황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예로부터 상(上)을 범(犯)하는 것을 가장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보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은 천황가에서 확립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권력을 장악한 자기 자신들이 바로 을사의 변이라는 쿠테타를 통하여 황실을 범하였다. 세월이 지나 그 후손들이 자기 조상들의 행위를 미화하고 역사를 재단하여 상(上)을 범(犯)했던 일이 없었던 것으로 만든 것이 서기 720년 일본서기를 완성한 사람들이 한 일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42년 (서기 641) 봄 3월 왕이 죽었다. 서기 641년 의자왕이 즉위했다. 백제의 무왕이 서기 641년 3월 사망하고 그 해 10월 9일 야마토의 죠메이 천황도 사망하고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한다. 요새 말로 하면 백제 주식회사 일본지점장이 백제본사 사장으로 부임한 것이 아니겠는가?

서기 641년 히라카스와케 황자가 나이 16세로 조사를 읽었다는 기사는 텐지천황의 생년이 서기 626년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삽입된 기사이다. 왜 그의 후손들은 그가 서기 626년에 태어났다고 증언할 필요가 있었을까? 첫째 이유는 죠메이 천황과 그의 부친 히코히토노 오호에 황자 ( = 아좌태자) 는 백제 위덕왕의 적통이므로 쿠테타 세력들은 자기들의 혈통을 히코히토 또는 죠메이에 연결하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죠메이와 텐찌의 모친 사이메이(齊明)가 함께 생활한 것이 10여년 밖에 되지 않으므로 그 10여년 간에 해당되는 서기 626년 텐찌가 태어난 것 처럼 하기 위하여 첨가된 기사일 것이다. 이 기사 때문에 일본 사학계에서는 아무도 텐찌의 서기 626년 출생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서기 671년 병사한 텐찌는 46세의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 되었다. 몸이 허약했다는 기록도 없고 요양다닌 기록도 없는 건강한 텐찌가 46세에 죽었다는 것은 어딘가 수상하다. 그의 동생 텐무는 65세를 살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타무라(田村)황자는 서기 593년 토요노쿠니(豊國)의 우사(宇佐)에서 당시 큐우슈우 왕 아좌태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무렵 아좌태자의 숙부 법왕대왕 (서기 599년의 백제 법왕)은 아좌태자에게 큐유슈우 왕의 자리를 맡기고 불법을 펴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좌태자가 서기 598년 야마토에서 사망한다. 서기 600년 수서왜국전에 나오는 아베계미(阿輩雞彌)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나이 8세로 큐우슈우의 왕이 되었다. 아베계미(阿輩雞彌)는 일본에서 오호기미(大王)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의 시대 서기 600년과 607년의 견수사 기사가 있고 수의 배세청이 608년 큐우슈우의 다리시북고를 면담하고 돌아갔다.

백제 위덕왕 사후 백제왕권이 안정되지 않고 큐우슈우왕으로 나이어린 손자 다리시북고가 즉위하자 야마토의 스이코 여왕은 섭정 우마야토 황자의 주청에 따라 서기 600년, 602년, 603년 큐우슈우를 병합하고자 3 차례의 정복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야마토가 패배하여 이후 우마야토 황자는 정치에서 은퇴한 것으로 보이며 스이코 여왕은 큐우슈우의 개혁을 받아 들인다. 여기에서 17조 헌법이니 12 관위제가 등장한다. 서기 610년이 지나면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가 혼인 할 나이가 된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딸 호테이노 이라쯔메(法提郎媛)가 큐우슈우에서 후루히토노 오호에(古人大兄)황자를 출생한 것은 서기 615년 경의 일이다. 따라서 호테이노 이라쯔메(法提郎媛)와의 혼인은 서기 614년경의 일이 된다.

야마토의 스이코 천황은 큐우슈우의 무력앞에 굴복하였고 자기 손자에 해당하는 다리시북고에게 넷째 딸을 주었다. 그녀가 문제의 비타쯔 천황의 딸 타메(田眼)황녀이며 서기 613이나 614년경 혼인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타메(田眼)황녀는 천황의 딸이므로 황후로서 손색없는 혈통이다. 고사기에는 기록되었으나 일본서기가 무시하고자 한 타메(田眼) 황녀는 불행하게도 자식을 생산하지 못 하였다. 자식을 남기지 못한 탓으로 그녀는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운명이 된다. 역사는 중조(重祚, 두번 왕위에 오름)라는 특이한 케이스를 여기 적용하여 타메(田眼)황녀와 사이메이(齊明)를 동일인으로 만들어 타메(田眼)황녀를 역사에서 지워버린다. 그렇게 하여 조상들이 상(上)을 범(犯)한 전례 또한 역사에서 삭제하는 효과를 거둔다.

죠메이 천황에 이어 제 35대 코우교쿠(皇極)천황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타메(田眼)황녀이다. 그러면 역사의 승자들의 그룹인 사이메이(齊明)는 어떻게 되었을까?

죠메이(敍明) 2년 (서기 630) 정월 12일 타카라(寶)황녀를 황후로 세워 2남 1녀를 낳았다. 첫째가 카즈라기(葛城)황자, 두째 하시히토(間人) 황녀, 셋째 오호아마(大海)황자이다. 자식들을 보면 사이메이(齊明)의 기사지만 타카라(寶)황녀라는 기술은 타메(田眼)황녀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타메황녀를 지우고 사이메이로 덧 칠했기 때문에 타카라 황녀가 실제 사이메이의 이름인지 아닌지 혼란이 생긴다. 이러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사이메이(齊明)는 시종 사이메이로만 지칭한다.

사이메이(齊明)의 출생년을 두고 일본 역사가들은 둘로 갈린다. 서기 594년 설과 601년 설이다. 사람이 둘이므로 두개의 출생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일본서기를 정사(正史)라고 믿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코우교쿠(皇極)와 사이메이(齊明)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코우교쿠(皇極)를 서기 594년 생, 사이메이(齊明)를 601년 생이라고 본다. 일본서기는 이 두 사람을 한 사람으로 기술하므로 혼란이 가중된다.

일본서기는 코우교쿠(皇極) 천황 즉위기에서 아메토요 타카라 이카시히 타라시 히메 ( 天豊財重日足姫= 皇極)천황은 비타쯔 천황의 증손이고 히코히토 오호에(彦人大兄)황자의 손자로 찌누왕(茅渟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키비히메왕 (吉備姫王)이다라고 기술했다. 여기 등장하는 찌누왕은 사이메이(齊明)의 아버지이며 히코히토 황자와 오호마타왕 (大俣王, 漢王の妹)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고사기에 나오지만 아이덴티티가 확인되지 않는 인물이다. 우리는 “64. 아좌태자” 편에서 사이메이(齊明)의 혈통이 조작되었다고 하였다. 이들의 연령상 사이메이(齊明)와 죠메이(敍明)의 항렬이 다를 수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억지로 사이메이(齊明)의 혈통을 히코히토 황자에게서 찾는다. 이는 히코히토의 혈통이 백제왕실의 본계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기록을 의문시 하는 우리는 찌누왕(茅渟王)을 백제의 무왕(무강왕, 마동)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

백제의 무왕은 사이메이(齊明) 공주를 큐우슈우의 다리시북고에게 떠 맡겼다. 토요노쿠니(豊國) 의 수도 나카즈(中津)에서 다리시북고가 사이메이(齊明) 공주를 맞은 것은 서기 618년 경이다. 당시 그곳에는 비타쯔의 딸 타메(田眼) 황녀가 황후로, 호테이노 이라쯔메가 비(妃)로 함께 살고 있었다. 이미 후루히토노 오호에 황자가 네살 쯤 됐을 무렵이다. 여기서 약간 비약적인 추리가 요구된다. 사이메이(齊明) 공주가 시집와서 열 달이 채 되기 전에 해산(解産)하는 일이 벌어졌다. 서기 619년 사이메이가 아야황자 (漢皇子)를 출산하였다.

일본서기는 사이메이(齊明)천황 즉위기사에서 처음에 요메이(用明)천황의 손자 타카무쿠왕(高向王)을 만나 아야황자 (漢皇子)을 낳았다. 후에 죠메이(敍明)천황을 만나 2남 1 녀를 낳았다. 죠메이 2년 (서기 630) 황후가 되었고 서기 641년 겨울 10월 죠메이천황이 붕어하자 다음 해 정월 황후가 천황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우리는 서기 630년 황후가 된 것은 비타쯔 천황의 황녀 타메(田眼)이며 그녀가 죠메이 이후 코오교쿠천황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면 사이메이(齊明)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이메이(齊明)는 죠메이(敍明)천황과 혼인하기 전 사고를 겪었을 것이다. 함께 가까이 지내던 황자 급의 청년, 어쩌면 다리시북고의 친 동생과의 사이에 염문이 있었거나 겁탈 당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의문의 청년의 이름이 일본서기 어딘가에 어떤 형태로든 적혀 있다고 본다. 일본서기는 타카무쿠왕을 만나 아야황자를 낳았다고 했는데 타카무쿠왕의 아이덴티티도 파악되지 않는다. 문자에 얽메어 찌누왕이나 타카무쿠왕을 파악하려고 땀 흘려 온 수 많은 역사가들이 아직도 정체를 파악하지 못 한다. 이는 이 이름들이 역사적 의미맥락을 갖는 게 아니고 그냥 적어 놓은 암호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기 618년 큐우슈우의 나카즈에 시집 온 사이메이(齊明)가 서기 619년 시집 온 지 열달이 되기 전 아야황자를 낳았다. 아야황자는 죠메이 천황의 자식으로 입적되나 왕위계승 서열에서 밀려난다. 그의 이름이 코우교쿠 천황기에 기록된 교기(翹岐) 이다. 쿠테타와 같은 방법이 아니고는 그는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출신이었다. 교기에 관한 기사는 “65. 한인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를 죽였다” 에서 자세히 나왔다. 서기 642년 교기가 큐우슈우에서 추방되어 야마토에 흘러 들어왔을 때 그는 이미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서기 619년 생이라면 나이 24세때 야마토에 흘러들었고 을사의 변을 일으킨 서기 645년 27세, 텐찌천황으로서 사망시(서기 671) 53세가 된다.

다리시북고에게 사이메이(齊明)가 시집 온 것은 서기 618년, 다리시북고가 죠메이 천황으로 야마토로 옮겨 간 것은 서기 629년이다. 그러므로 사이메이(齊明)가 다리시북고와 함께 한 것은 약 10여년에 불과한 셈이다. 히라카스와케 황자가 서기 626년 태어났다고 기록한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의도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히라카스 와케 황자 즉 훗날의 텐찌가 죠메이의 아들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죠메이 13년 (서기 641) 10월 9일 천황이 쿠다라노 미야 (百済宮) 에서 죽었다. 10월 18일 천황의 빈소를 차렸는데 동궁 (東宮) 히라카스 와케 황자 (開別皇子) 가 16세의 나이로 조사를 읽었다.” 일본서기 기록데로라면 그는 17 세때 처자를 거느리고 야마토에 흘러들어와 20세 때 을사의 변이라는 쿠테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나이 46세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현실감이 떨어진다.

사이메이(齊明)는 다산(多産)의 체질이었는지 2남 1녀를 낳았다고 하였다. 서기 622년 풍장을 낳고 625년 선광을 낳았다. 하시히토(間人) 황녀는 아마 풍장보다 먼저 태어났을 것이다. 풍장은 오호아마(大海)황자란 이름도 갖는다. 백강의 전투이후 당과의 전쟁책임을 둘러 싼 교섭에서 백제부흥전쟁에 참가한 제 1 급 전범인 풍장을 살리는데는 오호아마 황자란 이중의 신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백제의 왕자로 인질로 와 있던 풍장은 부흥전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일본을 떠났고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고 잡아 떼었을 것이다. 오호아마 황자는 그러한 교섭이 진행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서기 629년 다리시북고가 야마토로 옮길 때 큐우슈우의 통치는 사이메이(齊明)에게 맡겼고 타메(田眼)황후와 호테이노 이라쯔메 (후루히토 오호에 황자의 어머니)는 천황을 따라 야마토로 옮겼다. 서기 631년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큐우슈우에서 어머니 사이메이(齊明)와 함께 살던 풍장과 선광이 야마토의 아버지 죠메이 천황에게 옮겨 간 것을 뜻한다.

사이메이(齊明)와 그녀의 남동생 카루황자(輕皇子, 603 – 654, 훗날의 孝德천황)는 큐우슈우에 남았다. 서기 642년 큐유슈우에서 사이메이(齊明) 여왕의 모친 키비히메왕이 사망하여 초상을 치르던 중 카루황자가 쿠테타를 일으켜 큐우슈우의 왕권을 장악하고 사이메이 여왕, 하시히토 황녀, 교기왕자와 그의 처등 유명인사 40여인을 섬에서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코오교쿠 천황기에 기록된 이와 관련된 내용은 “65. 한인들이 쿠라쯔쿠리노 오미를 죽였다.” 에서 자세하게 나왔다.

그러면 사이메이(齊明)의 첫 남자 즉 아야황자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일본서기가 타카무쿠왕 (高向王)이라는 암호로 처리하고 끝낸 듯 보이면서 몇 군데 흔적을 남겨 놓고자 한 청년을 우리는 다리시북고의 친 동생, 나카즈 왕 (中津王)이라고 본다. 그는 여기저기서 세성충승(塞上忠勝)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2월 2일 아즈미노 야마시로노 무라지 히라후 (阿曇山背連比羅夫), 쿠사카베노 키시 이와카네 (草壁吉士磐金), 야마토노 아야노 후미노 아타히 아가타 (倭漢書直県)를 백제의 조사(弔使)에게 보내, 그 나라의 근황을 물었다. 조사(弔使)는 “백제국왕은 나에게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 귀국하는 사신에 딸려 귀국시켜 달라고 하거든 천황은 허락하지 말라』고 말했다” 고 한다. 백제의 조사(弔使)의 종자( 従者)들은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 (大佐平 智積)이 죽었다. 또 백제의 사인이 곤륜(昆倫)의 사자를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금년 1월, 국왕의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누이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들 40여명이 섬에 버려졌다.』고 한다.

위의 세성(塞上)은 백제 의자왕의 동생으로 읽힌다. 그리고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와 그 어머니 누이 여자 4명, 내좌평 기미( 內佐平 岐味),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들 40여명이 섬에 버려졌다.』고 한다. 여기 제왕자(弟王子)의 아들 교기(翹岐)라고 나온다. 제왕자(弟王子)란 세성(塞上)을 뜻한다.

코우교쿠(皇極) 원년 (서기 642) 4월 10일 소가노 오호오미(蘇我大臣)가 우네비(畝傍)에 있는 자택으로 백제의 교기등을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고 좋은 말 한필과 20정의 쇠붙이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 (蘇我大臣 於畝傍家 喚百済翹岐等 親対語話 仍賜良馬一疋 鉄二十[金+廷]唯不喚塞上)

소가노 오호오미(蘇我大臣)가 우네비의 자택에 교기를 초대하였는데 세성(塞上)은 부르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왜 기록하지 않아도 좋은 세성(塞上)의 이름을 이곳에 남겼을까? 아들은 불렀지만 그 생부는 부르지 않았다는 의미로 역사가들이 남겨 둔 표지처럼 보인다.

일본서기 코우토쿠(孝德)천황기 백치원년 (서기 650) 2월 15일 연초의 조하를 드리듯 조정에 의장대를 설치하고 좌우대신 백관들이 자하문밖에 4열로 도열하였다. 전면에 흰꿩을 실은 수레를 네 사람이 끌고 아와타노 오미 이이무시 (粟田臣飯蟲)가 이들을 인솔하고 어전으로 나아갔다. 좌우대신이 백관 및 쿠다라노 키미 풍장 (百済君豊璋), 그 동생 세성충승 (其弟塞城・忠勝), 고구려의 시의 모치(毛治), 신라시학사등(新羅侍学士) 등을 인솔하여 정면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그 동생 세성충승 (其弟塞城・忠勝)이라 하여 풍장의 동생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백제 의자왕의 동생으로 새겨야 되며 세성(塞城)의 한자 표기가 다르게 나온다. 세성(塞城)과 충승(忠勝)은 동일인의 이름이다. 후에 백제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가 나오므로 이들은 타무라(田村)황자의 동생들 나카즈왕(中津王)과 다라왕(多良王)의 백제식 이름으로 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형제는 백강의 전투시 주류성(周留城)에 있다가 당의 포로가 되었다.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된 뒤 사이메이(齊明) 6년 (서기 660) 10월 여왕은 조서를 발표하고 백제부흥전쟁을 명한다.

“옛적에도 백제가 우리에게 군사적지원을 요청한 경우가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와주고 단절된 왕조를 복원시켜 주는 것은 우리가 언제고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다. 백제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해 우리의 지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처한 우리의 결단은 확고하다. 나는 우리 장수들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갈래로 진군하도록 명 할 것이다.”

.”詔曰「乞師請救, 聞之古昔。 扶危繼絕, 著自恒典。 百濟國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枕戈嘗膽, 必存拯救。 』遠來表啟, 志有難奪。 可分命將軍, 百道俱前。 雲會雷動, 聚集沙彔, 翳其鯨鯢, 紓彼倒懸。 宜有司具為與之, 以禮發遣。 」云云。 送王子豐璋及妻子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立豐璋為王, 立塞上為輔, 而以禮發遣焉。

위의 조서가 끝나고 왕자 풍장과 처자, 그의 숙부 충승등을 보냈다. 이들의 실제 출전은 사이메이 7년의 일이다. 어떤 책에 이르기를 천황이 풍장을 왕으로 세성(塞上)을 대신으로 삼아 출전식을 거행하고 보냈다고 한다. 역시 세성과 충승은 동일인이었다.

위의 기사에 의하여 세성(塞上)은 의자왕의 동생임이 확실하다. 의자왕이 서기 593년 생이므로 세성(塞上)은 아마 595년 경 태어났을 것이다. 서기 601년 생인 사이메이와 큐우슈우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으므로 서기 618년경 두 사람이 사고 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하다. 물론 이 사고(事故)는 다리시북고에게 사이메이를 주기로 결정되기 이전에 생긴 일이므로 지탄 받을 일은 아니었고 그냥 철부지 아이들의 불장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꾸어버린 불장난이었다.

코오교쿠 원년 (서기 642) 기사에서 “ 백제국왕은 나에게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 귀국하는 사신에 딸려 귀국시켜 달라고 하거든 천황은 허락하지 말라』”라 하였다. 세성(塞上)은 항상 나쁜 짓만 하고 있다는 의미는 사이메이가 시집가기 전 그가 사고를 친 장본인이라고 증언함이 아닐까? “세성은 나쁜 짓만 하고 다니므로 …”라고 의자왕의 언사를 빌어 일본서기를 편찬하던 역사가들은진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1월 1일 금요일

70. 발해의 길 일본도(日本道)

발해군왕의 사자(使者), 수령(首領) 고제덕(高斉徳)등 8인이 데와노쿠니(出羽国), 현 아키다현(秋田県)북부에 도착한 것은 서기 727년 9월 21일의 일이다. 이 소식을 접한 쇼우무천황(聖武天皇, 701 - 756)은 사자를 파견하여 의복을 제공하고 정중히 먼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 해 12월 29일 사신을 보내 고제덕등에게 의복, 관과 신발을 내렸다. 발해군이란 옛 고구려국을 말한다. 서기 668년 10월 당장(唐將)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쳐서 멸하고 그후 조공이 끊어졌는데 지금 발해군왕이 요원장군 고인의(高仁義)등 24인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러나 에미시(蝦夷) 경계에서 인의(仁義)이하 16인이 모두 살해되고 수령 제덕(斉徳)등 8인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고 왔다. 서기 728년 정월 3일 천황은 타이코쿠텐(大極殿)에서 왕신(王臣) 백료(百寮)및 발해사등의 조하를 받았다.(속일본기)

열도 역사상 최초로 외국의 사신이 조하에 참석한 장면이다. 동년 정월 17일 고제덕등이 천황에게 발해국 국서와 방물을 바쳤다. 발해국의 대무예(大武藝)왕이 보낸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武藝啓。山河異域、國土不同。延聽風猷、但増傾仰。伏惟大王天朝受命、日本開基、奕葉重光、本枝百世。武藝忝當列國濫惣諸蕃、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但以天涯路阻、海漢悠悠、音耗未通、吉凶絶問、親仁結援。庶叶前經、通使聘隣、始乎今日。謹遣寧遠將軍郎將高仁義・游將軍果毅都尉將徳周・別將舍那婁等廿四人、賚状、并附貂皮三百張、奉送。土宜雖賤用表獻芹之誠、皮幣非珍、還慚掩口之誚、主理有限、披膳未期。時嗣音徽、永敦隣好。

무예 아뢰옵니다. 산하가 다르고 국토 또한 같지 않사오나 귀국의 소문을 근근히 들으며 오직 우러러 볼 따름입니다. 대왕의 천조, 하늘의 명을 받아 일본의 개국을 열었으니 본가(本家)와 분가(分家)가 다 같이 영원히 번영토록 삼가 엎드려 기원하나이다. 무예는 황공하옵게도 여러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여 많은 번국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를 되 찾아 부여의 습속을 지키고 있읍니다. 그러나 머나 먼 하늘 끝에 있어 길은 멀고 바다는 광활하기 그지없으니 소식을 듣기 힘들고 길흉을 묻는 것도 끊어진 바 되었나이다. 인(仁)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서로 돕기를 약속하며 원하옵건데 전경(前經)의 가르침에 따라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는 일을 이제 시작하려 합니다. 삼가 영원장군낭장 고인의(高仁義), 유장군과의도위 장덕주(將徳周), 별장 사나루(舍那婁)등 24인을 보내 국서와 함께 담비가죽 300장을 보냅니다. (후략)

천황은 고제덕등 8인에게 정6위상(正六位上)의 벼슬을 내리고 연회를 열어 아악(雅楽)을 연주하고 활쏘기 대회를 열어 발해 사신들을 극진히 환대하였다.

위의 국서가운데 키워드는 본지백세(本枝百世)라는 단어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지십(文王之什) 문왕편에 본지백세 (本支百世)로 나오는 말이다. 무왕이 주 나라를 세운 뒤 무왕의 아버지 문왕을 우상화시킨 노래이다. 주나라 황실이여 영원하라는 의미로 본지백세가 등장하는데 문왕의 본가는 물론 곁가지들도 영원하라는 뜻이다.

만주대륙에 위치한 발해국의 대무예(大武藝)는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대무예는 서기 727년 발해가 처한 대당 대신라등의 국제 정치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본을 우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사전 예고없이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국서에 기록된 본지백세라는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국서에서 대무예왕은 발해와 일본을 형제의 나라로 보았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계승한다고 선언하면서 일본은 발해의 형제의 나라라고 암시한다. 이 말은 일본황실 또한 부여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인들은 이 표현을 그냥 외교상의 수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금 진지한 사람들은 “69. 부여의 엑소더스”에서 거론되었듯 제 10대 스진천황(崇神天皇)이 부여왕 의라(依羅)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의 현 천황가는 모두 백제왕실의 후손으로 본다. 그러면 부여 – 백제 – 일본의 계통과 부여 – 고구려 – 발해의 계통으로 나뉘고 발해와 일본이 본지(本枝)의 관계라는 것이 대무예의 견해이다.

서기 2001년 12월 18일 일본의 헤이세이(平成)천황이 황거 이시바시노마(石橋間)에서 기자회견중 “저 자신으로서는 칸무(桓武)천황 (737 – 806)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씌여있으므로 한국과의 연고를 느끼고 있읍니다. 무령왕 (461 – 523)은 일본과 관계가 깊고 그 때 이래 일본에 오경박사가 대대로 초청되게 되었읍니다. 또 무령왕의 아들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칸무천황의 생모란 타카노(高野)황후 (? – 790) 로 코오닌(光仁) 천황후이며 이름이 니이가사(新笠), 본성은 야마토우지(和氏), 오토쯔구(乙繼)의 딸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야마토우지(和氏)의 조선(祖先)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純陀)에서 나왔다고 한다. 일본서기는 서기 513년 백제태자 순타(淳陀)가 죽었다는 기사를 싣고있다.

서기 2002년 세계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일본천황이 백제와의 인연을 겨우 타카노 니이카사 황후가 백제 순타태자의 후손인데서 찾고 있을 뿐으로 천황의 남계가 바로 무령왕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사실데로 거기까지 말 했다면 일본국민들은 패닉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백제 도래인인 황후의 피 한 방울이 섞인 게 아니라 현 천황가의 조상이 백제 무령왕이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60. 케이타이 천황” 편 참조)

발해국은 현재의 북한, 중국, 러시아의 영토를 망라하므로 발해국의 역사를 둘러싸고 관련국이 많으며 또 그들의 입장이 다르다. 발해국을 건국한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 발해국민의 주류가 고구려인지 말갈인지를 두고 나라마다 자국의 입장에서 역사를 말한다. 중국의 변방에 위치하고 당으로 부터 발해군왕의 책봉을 받은 대조영의 발해는 당연히 중국의 일부이며 발해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와 신당서도 발해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애매한 기술을 남겼다. 구당서는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며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풍속은 고구려 걸안과 같다 (風俗與高麗及 契丹同) 고 하여 고구려에서 갈려나온 종족으로 치고 있다. 구당서보다 후대에 씌여진 신당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 (粟末靺鞨)이나, 고구려에 붙었고 성은 대씨(大氏)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라 하여 고구려와의 종족적 관계를 애매하게 하고 있다.

한국과 북한은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이며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는 당연히 한(韓)민족의 나라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와 일본은 중국과 한국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중국사서에 기록된 것을 제외하고 발해인 또는 고려인의 기록으로 남은 발해의 역사기록은 전무하다. 따라서 발해에 대하여 알려진 역사는 극히 단편적이다.

발해는 서기 698년부터 926년까지 현 중국의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리룽쟝(黒龍江)의 삼성(三省), 북한, 러시아의 연해주에 걸쳐 영토를 갖고 있던 나라로 5경(五京), 15부(十五府), 62주(六二州)의 지방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구국(旧国)은 지린성 돈화현(吉林省 敦化県)의 육정산 (六頂山), 영승유적(永勝遺跡), 성산자산성일대 (城山子山城一帯)이며, 문왕(文王)대에 천도한 중경현덕부 (中京顕徳府)는 현재의 지린성허룽현 (吉林省和龍県) 서고성자(西古城子)로 추정된다. 또 상경용천부 (上京龍泉府)는 헤이룽쟝성 영안현 (黒龍江省寧安県) 동경성진(東京城鎮)에 위치한 유적, 그리고 동경용원부 (東京龍原府)는 지린성 훈춘현 (吉林省琿春県) 팔련성(八連城)의 유적, 서경압록부 (西京鴨緑府) 는 지린성 통화(通化)부근의 임강(臨江), 남경남해부 (南京南海府) 는 함경북도 북청(北青)이 유력시 된다.

발해가 수도를 옮긴 순서는 동모산(東牟山), 중경현덕부, 상경용천부, 동경용원부, 상경용천부의 순이다.

당서에는 “용원의 동남에 바다에 면하여 일본도(日本道)가 있다”라고 씌여있다. 용원이란 동경용원부 (東京龍原府)를 말하며 현 지린성 훈춘시 (吉林省琿春市)로 밝혀졌다. 훈춘시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엔벤조선족 자치주 동단에 위치한 현급시(県級市)로 인구의 40% 이상이 조선족이다. 남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나선특급시(羅先特級市)가 있으며, 동은 러시아의 연해지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동해바다까지 15키로미터 떨어진 곳이며 러시아의 포시에트(Posyet)항과 화물철도로 연결된다.

훈춘에 팔련성(八連城)의 유적이 남아있고 이곳이 동경용원부이다. 이곳에서 장령자(長嶺子)라는 산을 넘으면 러시아 영토이며 크라스키노(Kraskino)란 국경마을이 되고 이곳의 항구 이름이 포시에트 항(Port of Posyet)이다. 해안에 가까운 곳에 평성(平城)의 거대한 유적이 있는데 이를 크라스키노 토성(土城)이라 부른다. 이 유적은 블라지보스토크 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가 서기 1998년부터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해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반영하여 한국과 북한, 일본의 학자들도 발굴조사에 참여하였다. 발굴조사후 이 유적이 발해의 항만이었을 가능성이 커졌고 이곳에서 출발한 선박이 동해를 횡단하여 일본열도의 서해안에 닿았다고 생각된다. 발해국은 처음 사자를 보낸 서기 727년부터 서기 919년 까지 34회에 걸쳐 이 길을 통하여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발해의 선박이 일본에 올 때 항상 같은 곳에 도착하지 못 하고, 북으로 혹카이도, 서(西)로는 야마쿠치 현에서 쯔시마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역에 걸쳐 제 멋데로 들어왔다. 이는 당시의 항해가 주로 자연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노도(能登)에 발해선이 도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노도반도(能登半島)가 100 킬로미터 정도 동해(=일본해)로 돌출된 관계로 발해선이 표류중 육지에 걸린 것으로 생각된다. 표류하면서 이곳에 걸리지 못하면 아키다현이나 혹카이도까지 밀려 갈 수 밖에 없다. 서기 727년 처음 온 발해선이 아키다현에 닿아 고인의 (高仁義)등 16명이 에미시에게 살해되었다.

8세기와 9세기에 발해선의 일본 도착지가 확연히 구분되는데 8세기 중에는 모든 발해선이 이시카와현 (石川縣) 카나자와(金澤) 이북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9세기 이후 모든 발해선박이 서일본 쪽에 입항하였다. 이는 인위적으로도 선박의 도착지를 콘트롤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100 프로 자연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일본 후쿠이현의 자료에 의하면 발해사는 주로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일본에 도착했으나 약간의 예외를 빼고 일본도착 시기를 크게 나누면 서기 814년을 경계로 전반은 음력 10월 중순에서 11월 중순, 후반은 12월 중순에서 3월 상순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포시에트를 출항하여 어떤 항로를 따라 일본에 왔고 또 어떤 항로를 따라 모항으로 귀항하였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적국이었으므로 신라의 연안을 따라 동해를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발해사의 항로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나 오호쯔크 해에서 한반도 동해안으로 남하하는 리만한류와 쯔시마에서 일본열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쯔시마난류 그리고 겨울철의 북서 계절풍이 발해선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조건일 것이다.

그러면 발해에서 일본에 올 때 신라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리만한류를 타고 동해를 남하하고 일본에서 돌아 갈 때는 일본열도를 따라 북상하여 사하린을 거친뒤 대륙으로 방향을 바꿔 리만해류를 따라 블라지보스토크 경유 포시에트로 돌아간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일본의 학계는 대체로 이 설을 받아들인다. 포시에트는 겨울에 항구가 얼어 함경남도 신창항(新昌港)을 대체항으로 이용한 경우가 있었다.

서기 776년 겨울 발해국사 사도몽(史都蒙)등 187명은 코오닌천황(光仁天皇) 즉위의 축하및 발해국왕(文王欽茂)의 왕비의 상(喪)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발해의 남해부 토호포(南海府吐号浦)를 출항하였다. 남해부는 발해의 오경의 하나인 남경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北靑郡 荷湖里)로 확인되었다. 서기 773년 일본정부는 발해사도 큐우슈우의 다자이후(大宰府)에 내항(来航)하도록 의무화시켰으므로 이번 발해사는 쯔시마의 다케무로노즈 (竹室之津)를 목표로 항해하였으나 도중의 악천후로 항로를 잃고 에찌젠국(越前国)의 연안에 이르러 착안(着岸)하려 하였으나 돛대가 부러져 표류하여 12월 22일 가가군(加賀郡)에 표착하였다. 이 조난에 의하여 생존자 46명은 가가군에 거치되어 보호를 받았다. 해가 바뀌어 서기 777년 2월 20일 대사 사도몽등 30명의 입경이 허락되었으나 사도몽의 요구에 의하여 46명 전원의 입경으로 변경되었다. 이 때 141명의 발해인이 해난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익사하여 표착한 발해사인 30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에찌젠국에 매장하였다고 하나 그 위치가 어딘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위의 기록에 의해 발해사의 출발지가 남경남해부 토호포임을 알게 되었으며 토호포는 현 함경남도 신창항(新昌港) 으로 밝혀졌다.

서기 841년 내항한 발해사의 구성인원을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행은 총 105명으로 사두(使頭) 1명, 부사 1명, 판관 2명, 녹사(録事) 3명, 역어 2명, 사생(史生) 2명, 천문생(天文生) 1명, 대수령(大首領) 65명, 초공(梢工) 28명으로 구성되었다. 발해사의 초기에는 23 - 24명의 소규모였으나 나중 300명을 넘는 일행이 내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코우닌(弘仁) 연간(서기 810 – 824)에 들어와 100명에서 105명으로 정착되었다. 천문생 1명은 천문의 지식을 가지고 항로을 파악하고 기상예측을 담당한 직책이었고 대수령이란 교역을 목적으로 온 말갈 제 부족의 수장으로 자기 부족의 생산품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사람이다. 초공이란 순수한 선원이다.

서기 2009년 12월 18일 조선일보에 유석재의 신역사속의 Why라는 역사 칼럼으로 “당나라 벌벌 떨게 한 발해수군 장문휴”라는 여기 꼭 필요한 기사가 있었다. 그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서기 732년 9월 당(唐)나라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은 갑작스런 급보에 혼비백산했다. 산동(山東) 반도 북단 현 봉래(蓬萊)시에 치소가 있던 등주는 지금의 연대(煙臺)와 위해(威海)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해상 교통과 물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등주를 급습한 병력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발해의 장군 장문휴(張文休)가 이끄는 해군은 순식간에 상륙하여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자사 위준을 죽였다.

武藝遣其將張文休率海賊攻登州刺史韋俊。詔遣門藝往幽州徴兵以討之,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屬山阻塞凍,雪深丈餘,兵士死者過半,竟無功而還。武藝懷怨不已,密遣使至東都,假刺客刺門藝於天津橋南,門藝格之,不死。詔河南府捕獲其賊,盡殺之 (구당서 관련기록)

북한 학계에선 장문휴가 인근 내주(萊州)까지 산동반도 전역을 공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에서 이 소식을 들은 황제 현종(玄宗)은 기겁했다. 황제는 좌령장군 개복순(蓋福順)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발해군을 치도록 했다. 이것은 이미 산동 일대의 당나라 주둔군이 장문휴 군대에 의해 거의 궤멸된 상황이었음을 의미한다. 등주에 도착한 개복순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문휴 군대가 이미 모두 철수해 버렸던 것이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기동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육지 쪽에서 또다시 급보가 전해졌다. 발해군이 요하를 건너 만리장성 아래까지 진격한 것이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수륙(水陸) 양 방면의 전격전이었다. "대문예(大門藝)를 내놓아라!" 발해와 당이 전쟁을 벌이게 된 경위는 발해를 세운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 죽고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 으로 즉위한 7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왕은 인안(仁安)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옛 고구려 영역 수복에도 힘썼다. 이를 곱게 볼 리 없던 당은 북쪽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손잡고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자칫 협공당할 수 있는 형국에서 무왕은 726년 동생 대문예를 장군으로 삼아 흑수말갈 정복전을 벌였다. 그러나 친당파였던 대문예는 도중에 군사를 버리고 당나라로 망명했다. 현종은 대문예에게 벼슬을 내리고 보호했는데 무왕은 거듭 사신을 보내 대문예 송환을 요청했다. 서기 727년 일본에 보낸 최초의 발해사는 이런 국제정세하에서 일본을 이용하여 신라를 견제하려는 포석이었다.

732년 7 월 현종은 발해에 칙서를 보냈다. 도망자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형제애에 흠이 갈까 우려하는 것이라고 변명한 뒤 은근한 협박까지 했다. 이 칙서를 쓴 공으로 승진한 사람이 저 유명한 시인 장구령(張九齡)이었다.

무왕은 당과의 전면전을 택했다. 칙서 두 달 만에 등주를 공격한 것은 이미 훨씬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장문휴의 해군은 압록강 - 요동반도 남단 -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거쳐 등주를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당이 미처 손을 써볼 틈이 없이 초토화됐던 전격전이었다.

거의 동시에 무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당의 영토로 진격해 요서(遼西)의 마도산(馬都山·지금의 승덕 부근)에까지 이르렀다. 신당서가 400리에 걸쳐 큰 돌을 쌓아 방어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군세였다.

당은 유주(幽州·지금의 하북성) 일대에서 군대를 징발했는데 그 해 세금을 감면해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위기를 느낀 당은 신라에도 원군을 요청했다. 733 년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 (金允中) 등이 신라군을 이끌고 발해로 진군했지만 때마침 폭설이 내려 군사의 반을 잃고 돌아섰다. 이제 발해는 당과 신라 모두에 새로운 강국(强國)으로 떠올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2년 (서기 733) 가을 7월에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쳐들어 갔으므로, 당나라 현종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왕에게 관작을 더해 주어 개부의동삼사 (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한 길 남짓 되었으므로 산길이 막히고 군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 없이 돌아왔다.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遣太僕員外卿金思蘭歸國 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南鄙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功而還

서기 1998년은 발해건국 1300년이 되는 해로 일본에서는 발해국 교류연구센터가 설립되고 토오쿄오에서 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9월, 한국에서 9월, 북한에서 10월 심포지움이 열렸다. 이러한 각국의 발해에 대한 관심에 앞 서 서기 1997년 12월 31일 오후 2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한 뗏목 탐사선이 있었다.

탐사대장 장철수(1960 – 1998), 선장 이덕영(1949년생), 사진담당 이용호(1963년생), 통신담당 임현규(1971년생) 의 4명이 승선한 이 뗏목 탐사선은 발해1300호로 명명되었고 1300년전 발해인들의 항해를 재현하고자 제주도 성산포를 목표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항하였다. 탐사대의 발해항로 학술대탐사 항해계획서와 항해일기를 “balhae1300ho.org” 홈페이지에서 발췌한다. 이 홈페이지는 고인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뜻을 이어 발해 1300호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1. 발해 그 감동의 역사를 찾아서 (도입부 생략)

1998년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발해가 건국된지 1300 년이 되었다. 우리는 그 역사를 밝혀야 할 엄숙한 싯점에 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바다를 통하여 국가경영을 이룩한 해양국가의 모습이었다.

학문연구에 있어 지나친 확대해석이나 추측을 배제하고 사실과 근거에 입각하여 연구하여야 한다면, 육지에는 유적이나 고고학적 유물을 통하여 그 자료들을 구할 수도 있지만, 바다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단지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화를 통하여 어느 곳으로 이동했을 거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우리가 하려는 발해의 뱃길항로탐사는 발해인들이 어떤 항로를 따라 일본열도에 왕래하며 해상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밝혀 발해사를 복원하는데 조그만 기여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의 현실은 우리의 탐사시도의 장애 요인이었고 불필요한 오해를 받는 수도 있었다. (이하 생략)

2. 발해 항로 학술탐사개요 (생략)

2-1. 가상의 이동경로 (생략)
2-2. 선박의 구조 (생략)
2-3. 항해거리와 항해속력

가. 항해거리 : 러시아 크라스키노 – 제주도 성산포간 672 해리 (1245 킬로미터)
나. 항속 : 북서풍의 속도 감안 3 - 7노트 (평균 3.5노트) 로 추정
다. 항해기간
- 1일 3.5노트 ×24 = 84해리
- 672해리 ÷84해리 = 8일
- 편차 3 ∼ 7일

2-4. 항해방법과 항해장비: 돛 2개, 노 4개, 키(예비) 1개, 물돛 1개

2-7. 뗏목의 제원

가. 길이 11 x 폭 5 미터
나. 돛대 10 미터와 8 미터 길이로 2개 설치
다. 돛폭 1) 5 ×4 ×7 M (예비1개), 2) 5 ×4 ×6 M (예비1개)
라. 노

3. 항해개요

3-1. 대상지: 러시아 크라스키노 - 울릉도 중간 기착 - 제주도 성산포 (총 672해리)

다음은 장철수 대장의 항해일기와 육상 지원팀의 지원기록을 짜집기 하여 순차적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서기 1998년 1월 8일(9일째) 탐사팀은 제주 성산포로 가려던 처음 계획을 이날 부산으로 변경한다. 중간 기착지인 독도 울릉도는 예정대로 들르기로 하였다. 자연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가혹하여 뗏목의 돛과 키의 손상이 심하고 해수의 범람때문에 생리를 처리하는데 곤욕을 치른다. 바닷물의 비말이 얼음이 되어 뗏목은 온통 얼음으로 덮인다. 1월 11일 (12일째) 38 선을 지나다. 1월 12 일 (13일째) 울릉도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1월 13 일 대원들이 지쳐있다. 나의 지도력도 이제 힘을 잃어 가는 것 같다. 22 시 동쪽해류가 강해진다.

뗏목이 울릉도 근처에 도착한 것은 14일 오후 2시쯤. 이 곳의 한 해군기지 레이더에 몇 분동안 뗏목이 포착됐다. 이에 앞서 12시쯤 탐사팀은 울릉도 지원팀과 교신을 통해 저동항에 입항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교신하는 그 시간에 동해 전 해상에 또 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려졌다. 해경경비정도 출항하지 못 할 만큼 기상상태가 나빴다. 뗏목도 끝내 접안에 실패했다.

1월 16 일 (17일째) 이 날 폭풍주의보가 해제됐다. 뗏목은 육지쪽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경에 문의한 결과 그대로 순항하면 17 – 18일께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답변을 들었다. 이에 맞춰 부산의 지원팀과 해양대에서는 인양선을 준비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뗏목은 무풍지대에서 맴돌았다. 18 일 낮까지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1월 17 일 (18일째) 빵이 상했다. 소시지도 상했다. 여전히 무풍지대다. 1월 18 일 새벽 2시 지원팀이 해경경비정을 동원하여 경북 후포앞 41마일 지점에서 식량과 편지를 전하고 돌아갔다. 이날 밤 8시 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리고 만 하루가 지나서 해제되었다. 그러나 쯔시마해류의 영향을 받은 뗏목은 동쪽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1월 19 일 (20일째)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 지고 뗏목은 걷잡을 수 없이 동쪽으로 밀린다. 이제는 한국방송이 아닌 일본 방송만 들린다. 뗏목은 계속 동쪽으로 밀려 독도주변을 지나게 된다. 탐사대는 1월 20일 부터 부산입항을 포기하고 독도접안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21일 아침 울릉도 독도 해상에 다시 폭풍주의보가 발효되어 이 시도마져 무산되었다.

1월 20 일 (21일째) 바다는 참 마음데로 안 된다. 일본의 오키(隱岐)섬 쪽으로 동쪽으로 밀려간다. 1 월 21 일 좌표는 점점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아무 조치도 할 수 없다. 1월 22 일 오전 8시 햇빛이 너무 좋다. 육지의 실루엣이 보인다. 22시 20 분 아무리 최선을 다 해도, 바람도 해류도 따라 주지 않는다.

1월 23 일 오전 7시 장비고장과 소모가 많다. 눈 앞에 등대가 보이고 항로는 오키(隱岐)섬으로 들어서고 있다. 10 시 뗏목이 종횡무진이다. 16 시 바다가 거칠어지고 있다. 배가 섬으로 밀려가고 있다. 우선 섬으로 피신을 했으면 한다. 16 시 16분 도와달라. 도고(島後)섬 8 km 전방이다. 이대로 가면 섬에 충돌할 것 같다. 20 시 08분 도고섬과의 거리가 2 km 남았다. 20 시56분 일본순시선이 왔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한국해경으로 부터 뗏목구조를 요청하는 팩스를 받은 것은 오후 6시 30분, 해안보안청은 즉시 뗏목 위치 파악에 나서 오키섬 앞 5마일 지점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높은 파도로 사고를 염려한 해상보안청은 일본 도고(島後)섬의 사이고(西鄕)로 예인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해상보안청의 브리핑에 의하면 밤 8시 30분쯤 순시선은 통신교신이 가능할 만큼 뗏목 가까히 접근했다. 순시선의 레이더에 잡힌 뗏목은 점점 섬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시선 사령탑은 대원들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닻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당시 뗏목과 섬과의 거리는 1백50여 미터에 불과했다. 구조에 나선 일본 순시선이 뗏목의 불빛을 발견한 시각은 밤 9시쯤, 순시선에서는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파도속에 묻혀 요동치는 뗏목의 위치는 좀체 확인되지 않았다. 해상보안청에서는 해상자위대에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헬기는 24일 새벽 1시쯤 현지에 도착했다.

1월 24 일 (25일째) 출동한 헬기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현장을 수색했지만 강풍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위치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첫번째 두번째 헬기는 연료부족으로 회항하고 말았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시선 레이더에는 뗏목이 포착됐고 쌍안경으로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때 뗏목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부터 헬기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아침 6시쯤 도고(島後)섬 서북쪽 후쿠우라(福浦)항 남쪽 반도 해변에 좌초해 있는 뗏목을 발견했다. 육지에서 1백 미터 떨어진 바다 위에는 2명의 대원이 엎드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또 한명은 뗏목에 몸을 묶은 채 파도를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헬기에서 내려간 다이버는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2명 가운데 이용호 대원을 먼저 구조했지만 숨져 있었다. 그 사이에 또 한명은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육지로 부터 불과 수십미터 거리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바로 임현규 대원이었다. 뗏목에 묶여있던 사람은 이덕영 선장, 그러나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흔들리는 뗏목에는 돛대에 묶인 그의 발목만 남아 있었다. 발해항로 재현의 꿈은 이렇게 파도속에 묻히고 말았다.

서기 776년 12월 22일 발해사 187명 가운데 141명이 조난 당해 사망한 바다에서 서기 1998년 1월 24일 4명의 발해탐사대원이 희생되었다. 추진력이 없는 뗏목에 타고 있던 4명의 탐사대원은 겨울의 밤 바다의 험한 파도와 해류 그리고 바닷가의 암초에 노출되어 구조를 기다렸다. 그러나 20세기의 무선통신, 인터넷, 육상자위대 헤리콥터,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가지고도 그들을 구출할 수 없었다. 한 겨울의 추위와 칠흑같은 밤, 거친 바람과 파도 그리고 쯔시마해류는 오늘도 거기에 있다. 옛 발해인들은 그 추위와 파도 그리고 해류를 넘어 일본도를 왕래하였다.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69. 부여의 엑소더스

후한 말, 중평(中平) 6년 (서기 189) 공손도 (公孫度, ? – 204)가 동탁(董卓, ? – 192)에게 발탁되어 요동태수가 되었다. 공손도는 요동에서 주변지방을 평정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고구려, 부여, 선비와 대치한다. 이 때 고구려와 선비의 사이에 끼어 생존을 모색하던 부여가 공손도와 손 잡는다. 공손도는 부여왕 위구태에게 딸을 주어 결혼동맹을 맺는다.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公孫康, 172 – 221)이 위(魏)의 태조 조조(曹操, 155 – 220)에 의하여 양평후(襄平侯)로 봉해진 것이 건안(建安) 12년 (서기 207)의 일이다. 후한이 멸망한 것은 건안 25년, 위 문제의 시대, 황초(黃初) 원년 (서기 220)이다. 3대 째의 공손연 (公孫淵, ? – 238)은 위의 명제(明帝)로 부터 태화(太和) 2년(서기 228)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그는 오(吳)의 손권(孫權, 182 – 252)과도 영합하는 등 위나라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며, 경초(景初) 원년(서기 237) 자립하여 연왕(燕王)을 참칭하였다.

위(魏)의 명제는 경초 원년(서기 237)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 ? – 255)을 시켜 공손연을 토벌코자 하였으나 관구검이 패하고 돌아왔다. 경초 2년(서기 238) 봄, 태위 사마선왕(司馬懿, 179 – 251)을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한다. 6월 위군이 요동에 도착하여 양평(襄平, 현 요양시)을 공격하고 8월 연(淵)의 부자가 참수되어 공손 3대는 50년의 막을 내린다.

부여는 원래 현도군에 귀속되어 있었다. 한나라 말년, 공손도(公孫度)가 바다 동쪽 지방에 세력을 넓혀 바깥 오랑캐들을 위엄으로 복종시켰을 때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다시 요동군에 귀속되었다.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공손도는 두 오랑캐 틈에 끼어 있는 부여왕 위구태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왕위에 섰다. 그러나 위거에게는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 마여만이 있었다. 위거가 죽자 제가(諸加)들이 함께 마여를 세워 왕을 삼았다 (후략)… 마여가 죽자 그 아들 의려는 나이 겨우 6세였다. 이 의려를 세워서 왕을 삼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부여전)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 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 尉仇台死 簡位居立 無嫡子 有孽子麻余 位居死 諸加共立麻余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歳 立以爲王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는 북사와 수서를 인용한다.“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 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未知孰是

건안년 중(서기 196 – 219)에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이라 하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서 유민들을 수집해서 군사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를 치니 옛날 살던 백성들도 차츰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후로는 왜(倭)와 한(韓)은 드디어 대방에 소속되었다.

경초년중(서기 237 – 239)에 명제가 비밀리에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바다 건너보내 이군(二郡)을 장악하게 하였다. 여러 한국(韓国)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그 아래에는 읍장(邑長)의 인수를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옷과 두건을 갖춘 정장(正裝)차림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래 백성들까지도 관청에 나갈 때 정장을 빌려 입고 나간다. 이제는 명제가 하사한 옷을 입고 두건을 쓴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韓)의 나라(國)들을 통치했었으므로 진한 8국을 떼어 낙랑군으로 하겠다고 하니 통역이 잘못되어 한의 신지들이 격분하여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 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치다가 궁준이 전사하였으나 두 군은 드디어 한을 멸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한전)

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餘有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서기 204년 공손강은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거친 땅을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이라 하였다. 이곳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방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구태(仇台)는 백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사람의 하나로 그의 실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요동의 공손씨와 연합하여 부여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만주의 부여인들이 서기 204년 대거 대방으로 이동하였다. 새로운 땅에 이주한 이들은 강력한 세력이 되어 온조왕 이래의 백제의 왕권을 탈취하여 백제왕이 되었다. 그가 8대왕으로 기록된 고이왕(古爾王, 234 – 286)이다. 그는 즉위후 국가체제의 정비와 왕권강화에 주력하여 백제가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시대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고이왕 3년(서기236)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고이왕 5년(서기238) 봄 정월에 천지에 제사를 지냈는데 북과 피리를 사용하였다.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5년(서기 169)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고 나오는데 여기 나온 부산(富山)과 백제본기 고이왕 5년(서기 238)의 부산(釜山)의 기사는 동일한 장소의 지명으로 본다. 이 부산은 요동의 부여를 가리키며 순수한 부여어 “불달”을 부산(不山), 부산(釜山), 부산(富山)으로 적었다.

공손도와 결혼동맹을 맺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부여의 위구태와 대방고지의 대방을 근거로 백제왕이 된 고이왕이 어떤 관계인지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학자도 있으나 활동했던 시대를 계산하면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의 연령 차이를 고려해야 된다.

공손연을 괴멸시킨 위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발빠르게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을 손에 넣는다. 공손연 토벌시 고구려는 군사를 파견하여 위를 도왔으나 동천왕 16년(서기242)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서안평은 현 단둥시 근방으로 요동에서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에 들어올 수 있는 통로이다. 이 사건은 서기 244년의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의 원인이 된다.

정시(正始)년간 (서기 240 – 249)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칠 때 현도태수의 왕기(王頎)를 부여에 파견하자 위거는 대가를 교외에 보내 군량을 제공하고 왕기를 환영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부여전)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조에서 서기 246년 관구검이 1회 침공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중국사서를 보면 서기 244년과 245년 2회에 걸쳐 침공하였음이 확인된다.

서기244년 8월 관구검은 보기 1만의 군사로 현도성에서 출진하여 비류수(압록강)로 진격한다. 고구려는 관구검 군을 막기 위해 동천왕이 직접 보기 2만을 거느리고 출전한다. 양군은 양맥곡(梁貊谷)에서 충돌했다. 초전에서 작은 승리를 거둔 동천왕은 관구검을 얕보고 철기 5천으로 관구검 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관구검은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이번에는 고구려 군의 대패였다. 고구려 2만 병력은 이 한번의 싸움에서 1만 8천 명을 잃고 말았다. 동천왕은 기병 1천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서기 244년 10월 관구검은 환도성을 함락시켰다. 환도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수천 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관구검은 전쟁포로를 현도군에 넘긴 뒤 서기 245년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때 위나라의 작전은 고구려의 남북에서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현도 태수 왕기가 관구검과 같이 고구려 공격전에 참가하였고,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이 동원되어 고구려 남쪽에서 작전을 전개한다. 낙랑과 대방 군은 고구려의 속국인 동예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동천왕은 수도의 함락, 남부의 동예 함락으로 옥저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관구검은 현도 태수 왕기에게 동천왕의 추격을 명했다. 왕기는 옥저를 지나 북쪽 길로 올라가 읍루와의 경계지역까지 수색하였지만 동천왕은 남옥저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왕기는 8천여 명의 포로를 잡는 등 전공은 세웠지만 동천왕을 찾는데는 실패했다. 동천왕은 추격해온 위나라 장수를 암살하고 소수의 추격군을 무찌른 뒤 겨우 사직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쑥밭이 된 환도성에 다시 도읍할 수 없었던 동천왕은 평양성을 쌓고 그곳으로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정시(正始) 6년 (서기 245)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예(嶺東濊)가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으므로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다. 불내후(不耐侯) 등이 온 고을을 들어 여기에 항복했다. 정시 8년 (서기 247) 이들이 궁에 들어와 공물을 바치자 다시 조서를 내려 불내예왕으로 봉하였다.(삼국지 위지 동이예전). 불내(不耐)는 낙랑군 동부도위의 치소였으며 현재 강원도 안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서기 246) 가을 8월에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궁준(弓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들을 돌려주었다.

서기 238년 이후 공손연이 토벌된 뒤, 위구태가 죽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부여를 위하여 간위거를 즉위시켜 왕통을 잇게 하는데 백제의 고이왕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이왕 5년(서기238) 2월에 부산(釜山)에서 사냥하고 50일만에 돌아왔다는 기사가 이와 관련되지 않을까? 고이왕 계열의 부여인들은 서기 204년경 조국을 떠나 왔으므로 이 시대까지 부여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보다 훨신 후대인 서기 286년 책계왕 시대에도 백제가 대방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 (서기 286) 책계왕이 왕위에 올랐다.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하였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품이 웅장하고 뛰어났다. 고이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부여는 진(晉) 무제(武帝)때 자주 와서 조공하였으나 태강(太康) 6년 (서기 285) 모용외(慕容廆)에 의하여 부여의 전군이 격파되고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자제(子弟)들은 옥저(沃沮)지역에 몸을 숨겼다. 황제가 조를 내려 “부여왕은 대대로 충효를 지켰는데 오랑캐에게 망한 것은 심히 유감이다. 혹시 남은 백성을 모아 나라를 부흥하려 하거든 좋은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 주라”고 명하였다. 호동이교위 (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의 구원에 나서지 않고 기략의 호기를 놓쳐 그리 되었으므로 그를 파면하고 하감(何龕)을 임명하였다.

다음 해, 부여왕을 계승한 의라(依羅)가 하감(何龕)에게 사자를 보내 나라를 수복하기 위하여 귀국하고자 하니 도와 달라고 하였다. 감(龕)이 군대를 소집하고 독호(督護) 고심(賈沈)으로 병을 인솔하여 의라를 호송하였는데 모용외 (慕容廆)가 그 길목을 지켜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외(廆)가 퇴각하고 의라는 나라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모용외(慕容廆)는 매번 부여인을 납치하여 중국에 팔았다. 황제는 이를 측은히 여겨 또 조칙을 내려 국가예산으로 부여인을 사서 돌려 보내고, 하사(下司), 기(冀)의 두 주(州)에서 부여인 노예거래를 금지시켰다. (진서 동이부여전)

武帝時、頻來朝貢、至太康六年、為慕容廆所襲破、其王依慮自殺、子弟走保沃沮。帝為下詔曰:「夫餘王世守忠孝、為惡虜所滅、甚愍念之。若其遺類足以復國者、當為之方計、使得存立。」有司奏護東夷校尉鮮于嬰不救夫餘、失於機略。詔免嬰、以何龕代之。明年、夫餘後王依羅遣詣龕、求率見人還復舊國、仍請援。龕上列、遣督護賈沈以兵送之。廆又要之於路、沈與戰、大敗之、廆衆退、羅得復國。爾後毎為廆掠其種人、賣於中國。帝愍之、又發詔以官物贖還、下司、冀二州、禁市夫餘之口。

한(漢), 위(魏)이래 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맺어 국가안보를 도모하던 부여는 서기 265년 사마염의 진(晉)이 건국되자 진에 의지하게 된다. 서기 285년 선비족의 모용외가 강성하여 부여를 공격하였는데 진의 호동이교위 (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부여가 정복된다. 부여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남은 자제(子弟)들은 옥저(沃沮)지역에 몸을 숨겼다. 다음 해, 서기 286년 부여왕을 계승한 의라(依羅)가 진의 도움을 받아 부여를 재건하였다. 나라를 재건하였지만 모용선비는 부여인을 제 멋데로 붙잡아서 중국에 노예로 내다 팔았다는 것이 진서 부여전의 내용이다.

진서는 의려(依慮)는 자살했고 의라(依羅)가 나라를 수복했으나 백성을 지킬 힘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구세주를 갈망할 말세중의 말세였다. 의라(依羅)가 나라를 수복한 곳은 현 철령현(鐵嶺縣) 서남 60리에 있는 의로(懿路)라고 본다. 신당서에서 읍루고지(挹婁故地)라로 불렸던 이 곳이 지금 철령현 남쪽의 의로성(懿路城) 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상식적인 역사를 넘어 논리를 비약(?)시켜야 된다. 서기 285년 의려(依慮)는 해로(海路)를 통하여 부여를 탈출하였고 서기 297년경 의라(依羅) 또한 모용선비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망망대해의 피난길에 오른다. 이들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먼저 정착한 기득권층과 마찰을 빚으면서 반도를 남하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책계왕13년(서기 298) 가을 9월에 한(漢)과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한(漢)과 맥인(貊人)으로 표현된 이 사람들이 사실은 부여를 탈출한 보우트 피플들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외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불현듯 생각하니“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뒤를 맡기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넜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三神)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에게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북옥저로 도망쳐 몸을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였으나, 이 때부터 모용외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었다.'라고.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正州依慮國所都。爲鮮卑慕溶廆所敗、憂迫欲自裁忽念、我魂尚未泯、則何往不成乎。密囑于子扶羅、踰白狼山夜渡海口。從者數千、遂渡定倭人爲王。自以爲應三神符命、使羣臣獻賀儀。或云、依慮王爲鮮卑所敗、逃入海而不還。子弟走保北沃沮。明年子依羅立。自後、慕溶廆又復侵掠國人。依羅率數千、越海、遂定倭人爲王。

부여 왕계는 구태 – 간위거 – 마여 – 의려 – 의라 – 현(玄)으로 이어진다. 모용선비는 더욱 강성해져 전연이 되었고 서기 342년 고구려의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346년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현을 포함 주민 5만여구를 이주시켜, 부여의 존재가 만주에서 사라진다. 위의 대진국본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건너 왜인을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부분만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려 또한 바다건너 왜를 정복하고 왕이 되었다는 이중의 기사로 읽는다.

의려가 탈출하면서 거쳐간 백랑산의 위치는 당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건창현(建昌縣)의 백랑산(白狼山)은 높이 1140 미터로 요서에서 두번 째로 높은 산이며 발해만으로의 접근성이 좋다. 당시 부여의 수도 의로는 현재의 심양시와 철령시 사이에 있었다. 이 당시의 부여는 지금 역사가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후한시대의 요동개척은 해안지역에 한정되었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중국의 힘이 미치지 못 하였다. 당시 부여왕이 이 경로를 따라 탈출하였다면 의로에서 백랑산까지 300 킬로미터, 백랑산에서 발해만까지 80 킬로미터의 거리를 주파한 셈이다.

부여를 탈출하려면 요동의 발해만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야 된다. 백제해안을 전전하면서 남해안, 가라해의 가락국을 거친 뒤 다시 쯔시마, 잇키, 쯔쿠시에 상륙하게 된다. 많은 인원이 먹을 식량과 물을 구하기 위하여 자주 상륙하게 되고 가는 곳마다 토착민과 갈등이 생긴다. 백제정도의 큰 나라와는 전쟁양상의 갈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지방에서는 부여 이주민의 규모가 오히려 토착세력을 능가하여 필요한 것을 약탈하는 일도 있었으리라. 이 대규모의 민족이동은 중간 기착지에 부여의 무덤이나 무기등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선진의 농업과 공업기술등의 소프트웨어를 남기게 된다.

이들의 경유지 가운데 쯔시마는 매우 중요하다. 부여의 민족이동의 규모만으로 쯔시마는 쉽게 장악할 수 있을테니까 오랫만에 외부에 적의 위협이 없는 쯔시마에서 이들은 느긋하게 앞 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미마나(任那)라는 단어가 일본서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스진(崇神) 65년 추 7월 미마나국(任那国)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 미마나는 쯔쿠시국에서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으로 바다를 끼고 계림(신라)의 서남쪽에 있다”라는 기사이다.

崇神 六十五年秋七月 任那國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미마나의 나(那)는 라(羅)와 마찬가지로 벌판을 뜻하므로 미마나에서 중요한 부분은 미마이다. 미마를 “任”으로 표기하여 마마나(任那)가 되었으나 스진왕의 일본식 시호는 미마키 이리비코 이니에 (御間城入彦五十瓊殖)로 미마를 “御間”로 표기하였다. 고사기는 미마키 이리히코 이니에 (御眞木入日子印惠)로 “御眞”로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는 임나(任那)라는 단어가 열전 강수전에 딱 한번 임나가라(任那加良)라고 나온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미마나(任那)는 219회 나온다고 일본의 야지 잇슌(矢治一俊)씨는 지적한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 자는 조공하고 어떤 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리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는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서기 401)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광개토대왕)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任那者本在對馬島西北界。北阻海有治曰國尾城。東西各有墟落、或貢或叛。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故自是任那乃對馬全稱也。自古、仇州對馬乃三韓分治之地也、本非倭人世居地。任那又分爲三加羅。所謂加羅者首邑之稱也。自是三汗相爭、歳久不解、佐護加羅屬新羅、仁位加羅屬高句麗、鷄知加羅屬百濟是也。永樂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轄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

쯔시마가 사고(佐護), 니이(仁位), 케찌(鷄知)의 3 개의 가라(加羅 = 韓)로 나뉘어 있었다는 말은 오직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만 나오는 기사이다. 한단고기의 위서논쟁이 뜨겁지만 이 부분의 기사는 함부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일본서기에도 나오지 않는 사고(佐護), 니이(仁位), 케찌(鷄知)라는 지명은 지금 쯔시마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카미아가타 마찌 사고(上縣町 佐護), 토요타마 마찌 니이(豊玉町 仁位), 미쯔시마 마찌 케찌(美津島町 鷄知)가 그것이다.

우리는 위의 인위(仁位)가 스진(崇神)천황의 시호, 미마키 이리비코 이니에 (御間城入彦五十瓊殖)의 이니에(五十瓊殖)와 대응함에 주목한다. 그러면 미마키는 임나(任那)와 이니에는 인위(仁位)에 대응하여 스진천황의 시호는 임나(任那)와 인위(仁位)를 내포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스진 65년 미마나국(任那國)이 소나카시찌(蘇那曷叱知)를 파견하여 교류를 구하였다는 기사는 의라의 역사기록이다. 서기 299년경 부여왕 의라(依羅)는 인위가라를 근거로 쯔시마 전역을 장악하고 일본열도 공략에 들어간다. 쯔시마가 미마나(任那)로 불린 것은 이 때 부터이며 그가 야마토를 장악하고 스진천황으로 기록된 것은 서기 300년경의 일이다.

오오사카(大阪)시 스미요시(住吉)구에 오오요사미(大依羅)신사가 있다. 주변에 있었던 고대의 인공(人工)저수지 요사미노이케(依網池)는 일본서기 기록을 따르면 스진 62년 12월 만든 것으로 나온다. 스진천황 시절 식량증산을 위하여 부여의 선진기술로 일본열도에 처음 만들어진 대규모의 인공저수지이다. 서기 1704년 야마토강(大和川)의 유로(流路)를 바꾸면서 야마토강이 요사미노이케(依網池)를 관류하게 되었고 일부는 매립되어 현재 사카난(阪南) 고등학교 운동장이 되었다. 의망지(依網池)는 의라지(依羅池)이며 망(網)과 라(羅)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일본어로 양쪽 다 요사미로 읽는다. 오오요사미(大依羅) 신사가 사카난(阪南) 고등학교 운동장 한켠에 남아있다.

의려와 의라 부자(父子)는 부여를 탈출한 뒤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의 장악에 성공하여 일본의 천황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황실의 만세일계의 논리는 이들을 진무(神武)이래의 황계속의 족보에 끼어 맞춘다. 의라는 9대 카이카 (開化)천황의 두째 아들로 족보가 만들어져 10대 천황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열도에 뿌리가 없는 스진(의라)천황은 백제계와 가야계의 호족들을 회유하여 그들의 협조를 필요로 하였다. 가야의 아마테라스 오호미 카미 (天照大御神)와 백제의 오호모노누시노 카미 (大物主神 = 三輪山神)를 성대하게 제사지냈다고 한다. 또 백제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오호모노누시의 황후였으며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야마토 토토히 모모소 (倭迹迹日百襲姫, 235 – 318)를 극진히 예우한다. 현 나라(奈良)현 사쿠라이(桜井)시 북부의 마키무쿠(纒向)에 그녀의 무덤이 남아 하시하카(箸墓)라 불린다. 그녀의 남편 코우안(孝安 = 大物主神)천황은 부여에서 온 의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은둔하였다.

스진천황을 비롯한 정복세력은 물론 백성들도 패망한 전 왕조의 황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바쳤던 것 같다. 역사는 그녀와 관련하여 해괴한 신화를 기록하였지만 “하시하카(箸墓)는 낮이면 사람이 만들고 밤이면 귀신이 만들었다고 전해온다”라고 하였다. 낮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무덤을 축조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밤이면 그녀를 기리는 민초들이 돌과 흙을 날라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고사기는 스진천황이 나이 168세로 무인(戊寅)년 12월 죽었다고 기록했다. 무인(戊寅)년은 서기 318년으로 보나 역사를 보는 사람의 판단에 따라 전후로 60년씩 출입이 가능하다.

의라가 열도를 장악한 뒤 열도에 먼저 와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백제왕실의 탈환작전이 전개된다. 이 탈환작전 에서 다음 세대의 리더로 부상하게 되는 것이 야마토타케루 즉 훗날의 백제 근초고왕(295 – 375)이다. 의라는 스진(崇神, ? - 318) 천황으로 역사에 남았으며 서기 318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열도의 주도권은 다시 백제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