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15일 금요일

56.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 - 乎鞆王 在意柴沙加宮時

와카야마(和歌山)현 하시모토(橋本)시에 있는 스다 하찌만 신사(隅田八幡神社)가 소장하고 있던 동경(銅鏡)으로 경배(鏡背)에 씌여 진 48자의 명문(銘文)은 일본 고대사의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고대일본에서 오오키미(大王)를 기술한 금석문으로서는 이나리야마 철검명(稻荷山鐵劍銘), 에다 후나야마 철도명(江田船山鐵刀銘)이 있는데, 이 인물화상경도 오오키미(大王)란 단어를 쓰고 있어서 야마토의 왕이 언제 오오키미(大王)를 칭하였는지를 해명해 줄 단서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일본의 왕이 언제부터 대왕을 칭하였나 하는 문제는 나라의 국력 및 주권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된다. 왜냐하면 백제라는 대왕국이 뒤에 버티고 있는 한 일본은 대왕을 칭할 수 없다. 백제의 왕권을 갖는 사람만이 일본에서 대왕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다.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 것은 백제를 대왕국으로 받든 것을 의미한다. 구다라는 한자로 “大王”이라고 쓴다. 그런데 이나리야마 검이나 에다 후나야마 대도에 대왕이란 단어가 나왔다. 이 시절 어떤 일본의 역사서도 직접적으로 대왕이란 호칭을 역사적인 개인에게 사용한 적이 없는데 대왕이란 말이 세번 째로 스다 하치만 신궁의 인물화상경에 나타났으니 놀랄 일이 아닌가.

삼국사기 백제 무왕 37(서기 636) 3월 왕은 측근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비하(泗沘河)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양쪽 언덕에는 기이한 바위와 돌이 들죽날죽 서 있고, 간간이 기이하고 이상한 화초가 끼어 있어 그림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를 타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고 수행한 자들도 여러차례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곳을 대왕포(大王浦)라 하였다. 그곳을 21세기의 지금 구드레 포구(부여시 구드레 공원)라고 부른다. 구다라란 말은 정확히 대왕이란 말과 대응한다.

2009 120일 익산 미륵사지를 발굴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봉안기를 발굴하여 서기 639년 탑을 만들 때 창건내역을 밝힌 당시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가로 15.5cm, 세로 10.5cm의 금판에 194자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속에 “원 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 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 라고 나온다. 구다라(百濟)는 “대왕폐하”를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스다 하치만 신사의 인물화상경은 청동제로 지름 19.9cm, 근세의 지지류(地誌類)에도 이 거울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아주 옛날 출토(?)된 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출토 연대나 출토지는 모른다. 경배(鏡背)는 원형의 꼭지()를 중심으로, 내구에 고대중국의 전설상의 인물인 동왕부, 서왕모등 9명의 인물이 나타나고, 그 주위에 반원형과 방형으로 되는 문양대, 그 외측에는 톱니문양을, 테두리에 한자 48자로 이루어진 명()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주출하였다.


이 거울의 원경(原鏡=母鏡)에 해당되는 화상경은, 오오사카 부(大阪府) 야오 시(八尾市)의 코오리가와 쿠루마쯔카 (郡川車塚) 고분, () 후지이데라 시(藤井寺市) 나가모찌야마(長持山) 고분, 쿄우토 부(京都府) 쿄우타나베 시(京田邊市)의 토쯔카 고분, 후쿠이 현(福井縣) 와카사 쵸우(若狹町)의 니시쯔카(西塚) 고분, 토우쿄우 도(東京都) 코마에 시(貃江市) 의 카메즈카(龜塚) 고분등에서, 동형경(同型鏡) 또는 동형경의 자손에 해당하는 거울들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견본이 된 거울과 이 거울은 동왕부, 서왕모를 중심으로 그려진 문양이 모두 거꾸로 주조되어 있다. (Wikipedia)

수입한 중국경(中國鏡)을 모형(母型)으로 일본에서 주형(鑄型)을 만들고 그 주형에 의해 주조된 거울을 모경에 대한 동형경(同型鏡)이라 한다. 또 동범경(同范鏡)이란 말을 쓰는데 이는 한 주물형에서 태어난 형제 거울들을 말한다. 따라서 동형경과 동범경은 다른 뜻을 갖는다.

이 인물화상경은 일본에서 많이 출토된 중국경의 모조품으로 품질이 열악하여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본다. 이 거울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타케치 시유(高市志友, 1751 1823) 1812년에 편술한 “키이국 명소도회(紀伊國 名所圖會)”라는 서물이다. 저자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 소개하면서 이 거울이 원래 진구우(神功)황후에게 헌상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이 거울을 장기간 보관하여 온 스다 하찌만(隅田八幡)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호무다와케노 미코토(譽田別尊), 타라시 나카쯔 히코노 미코토 (足仲彦尊) 그리고 오키나가 타라시 히메노 미코토 (息長足姬尊) 3, 즉 오우진(應神), 쥬우아이(仲哀), 진구우(神功)이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 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 / 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 / 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 / 上同二百旱作此竟



사진에 보이듯 거울의 테두리 빙 둘러 48자의 글이 위와 같이 새겨져 있다.  보기 편하도록 10자씩 갈라 놓았다. 거울의 테두리에 48자의 글자가 들어가도록 정확히 설계되었으므로 글자 한자 한자를 빠짐없이 해석해야 된다.

 “계미년 810일 대왕치세에 男弟王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시마(斯麻)가 장수를 기원하여 개중비직(開中費直)  예인 금주리(穢人今州利)의 두 사람을 보내 품질 좋은 백동 2백 근을 구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혹자는 “日十大王”을 日十大王이란 왕명이 있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또 혹자는 大왕으로 보지 않고 大를 六으로 보기도 한다. 大를 六으로 본다면 日十大王年은 日十六王年 이 되어 대왕이 사라지게 된다. 十六日이라 표기하지 않고 日十六으로 표기한 것은 16왕년과 16일의 “16”이 중복되어  하나를 생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계미년이 언제인지, 男弟王 斯麻 누구인지 밝혀져야 된다.  일본역사에서 男弟王 등장하는 것은 이곳 뿐이며 男弟王이라는 해독이 오류일 가능성도 있다. 七支刀 銘文 가운데 璽書聖音이라고 오독한 것처럼 男弟王이 오독이라면 모든 논의는 여기서 시작되어야 된다.

七支刀 銘文
()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暢德興福祖
()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  世子奇生 璽書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에 등장하는 왕명은 男弟王이 아니라 王(オトモノオホキミ)이다. 일본 고대사에 鞆라는 글자를 쓰는 왕은 한 사람 뿐이다. 大鞆和気命가 그 사람이다. 銘文에는으로 분리하여  취한 것이다. 라는 글자의 왼편에 보이는 것이 가죽 변이다. 옳은 명문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八月日十六王年 / 乎革()王在意柴沙加宮時 / 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 / 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 / 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을 두고 여러 설이 있으나 서기 443년과 503년설이 지금까지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443년이라면 왜왕 제(倭王濟)가 유송(劉宋)에 사자를 보내 안동장군왜국왕의 칭호를 받은 해이므로 대왕은 인교우(允恭)천황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 오시사가궁(意柴沙加宮)은 오시사카노 오호나카쯔히메(忍坂大中姬) 황후와 뭔가 연관성이 있다고 보인다. 男弟王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503년 설은, 당시 왜국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갖고 대륙의 문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던 백제 무령왕 (재위 502 523)의 이름이 시마왕(斯麻王)이므로 거울의 작자 시마를 무령왕으로 추정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男弟王을 케이타이(繼體) 천황으로 본다. 그러나 케이타이(繼體)는 개로왕(蓋鹵王)의 사생아였지만 시마왕보다 12세 연상이다. 

서기 383년 설은 어떨까? 역사란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료 부족으로 증명이 안 되니까 그냥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역사이다. 그러면 “서기 383(16 왕년) 816일 이 옷사카(忍坂)의 궁에 있을 때 시마노 스쿠네(斯麻宿禰)가 장수를 기원하여  開中費直과  穢人今州利를 보내 질 좋은 백동 2백 근을 구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라고 새길 수 있다.   


서기 383년은  神功摂政 治世이므로 366  등장하는 斯摩宿禰가 383년 隅田八幡神社人物画像鏡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위의 해석에서 하나의 단서가 나타난다. 서기 383 왕위에 오른지 16 째인 왜왕이 있었나? 서기 383년이 16 왕년이라면 368 왜왕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서기 368 왜왕을 임명했던 기록은 덴리시(天理市) 이소노가미 신궁 (石上神宮) 보관 중인 칠지도(七支刀) 기록과 맞물린다.

神功紀 年表



362.2
仲哀天皇が筑紫の橿日の屋敷で亡くなった,  古事記は壬戌年(362)崩御とする.
362.12
皇后は筑紫で誉田天皇を生んだ
363.10
豪族たちは皇后を皇太后(天皇の母)と呼ぶことにした. これを摂政の元年とする.
365
誉田別皇子を皇太子(後継ぎ)とした
366
斯摩宿禰を卓淳国に派遣した
368 (倭王元年)
世子奇生 璽書 故爲倭王
369.11.16
泰和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錬鐵七支刀
372.9
久低たちが千熊長彦とともにやって来た. そして七枝刀、七子鏡等様々な宝物を献上
383 (16倭王年)
癸未年八月日十王年在意柴沙加宮時
384
枕流〔トムル〕王卽位

서기 368이 왜왕이 되었으나 나이 6세에 불과하여 神功皇后이와레(磐余) 와카사쿠라노미야  (若櫻宮)에서 섭정하였다.  이와레(磐余) 와카사쿠라노 미야(若櫻宮) 거처인 옷사카(忍坂)궁에서 가까운 곳이다.

神功十三年, 武内宿禰太子가 쓰누가(角鹿)(福井県敦賀市)의 케히대신(笥飯大神) 참배하였다. 거기서 태자는 자기 이름 대신 호무다와케(譽田別)라는 이름을 쓰기로 약속하였다. 태자의 이름은 (オトモ)였는데  호무다와케(譽田別)라는 이름을 쓰기로 약속함으로서 역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본래의 호무다와케(譽田別) 존재하고 태자도 호무다와케되었다면 두 사람의 譽田別있는 셈다. 두 사람을 한 사람인 것처럼 神功紀에 기록하였다. 神天皇(品陀和氣命)命(おおともわけのみこと)를 아버지와 아들로 구분해야  神功紀는 이해된다. 品陀和氣命神功皇后의 아들이 아니라 남편이었다.

神天皇에게는 다음과 같은 많은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 胎中天皇는 태자의 이름이다.

日本書紀
譽田天皇, 誉田別尊, 胎中天皇
古事記
品陀和氣命, 大鞆和気命(おおともわけのみこと)
播磨国風土記
品太天皇
『上宮記』逸文
凡牟都和希王(ほむたわけのみこ)

神功皇后(AD 340年代 出生)の夫と御子の名前

AD 320年代
AD 362
神功十三年 笥飯大神参拝
AD 384
誉田別  出生
誉田別
誉田別
貴須王 退位

誉田別 出生
元の名は大鞆和気命
太子の御名は誉田別になった
枕流〔トムル〕王卽位

AD 383年 神功皇后는 태자 (大鞆和気命)을 즉위시키고 誉田別命를 야마토로 귀국시킬 계책을 세운다. 神功皇后는 그 즈음 40대 중반의 나이였고 건강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斯麻念長寿라는 문구는 명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神功皇后의 건강에 문제가 있으니  너무 늦기 전 皇后를 보살펴 달라는 의도로 隅田八幡神社 人物画像鏡을 만들어  백제에 보내 貴須王을 압박하였을 것이다.

AD 384年 神功皇后의 뜻대로 貴須王 退位하고 枕流〔トムル〕王이 즉위하였다.


- 끝 -

2009년 5월 8일 금요일

55. 中國 漢時代의 銅鏡


동경은 동합금제로 만든 거울이다. 중국에서는 戰國시대부터 唐 시대에 주로 제작되었다. 앞장에서 소개된 다뉴세문경이 고조선 계통의 銅鏡인데 반해 중국경은 이와 다른 문양과 구조를 갖고 있다. 중국경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漢鏡과 唐鏡이다. 형태는 주로 원형이고 직경 수 십 cm 정도이며 잘 연마된 경면의 뒷면 중앙에 꼭지(鈕)가 있고 그 주위에 여러가지 畵像이나 文樣을 부어 넣었다.

고대 중국제의 동경에는 神像과 動物文을 주출(鑄出)한 神獸鏡이 많고, 기타 배면의 문양에 따라 “방격규구경(方格規矩鏡)”, “해수포도경(海獸葡萄鏡)”,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등 여러가지 형식으로 분류된다. 고온에서 주물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므로 기술수준에 따라 작품의 내용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용도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거울처럼 단순히 사물의 모양을 비추는 도구가 아니고, 제사나 주술용의 도구로 썼다고 생각된다. 漢鏡의 文樣 해설을 읽으면, 옛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더 심각한 기대와 원망(願望)을 가지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에서 나온 해설을 발췌하여 古鏡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으로9개의 사진과 설명을 붙였다. 사진으로는 모두 비슷하게 보이지만 실재의 문양은 아래 설명처럼 모두 다르다. 비교가 되도록 공주시 송산리 무령왕 머리맡에 놓여있던 의자손수대경 (국보 제161-2호 직경23.2cm) 사진을 참고로 올린다.

1. 細線獸帶鏡: 후한전기 – 중기 (AD 1C-2C) 직경18.9cm 무게 966.1g

꼭지(鈕) 주위를 변형된 당초문양대(唐草文樣帶)로 두르고, 이 때문에 좁아진 내구를 7등분하여, 細線표현의 문양 7개로 채웠다. 현무(玄武)를 포함한 四神을 갖추고, 그 밖에 사족수(四足獸), 청룡과 마주 보는 仙人과 청룡과는 다른 별개의 용이 있다. 외구에는 方格規矩四神鏡과 같은 흐르는 구름(雲)의 문양대가 둘러싸고 있다.

세선수대경의 문양은 四神에 다른 문양을 부가한 것이 많고, 표현도 細突線으로, 외구나 명문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방격규구사신경과 거의 비슷하다. 특히 圓圈規矩鏡을 시작으로, 양자의 중간성격의 문양구성을 갖는 거울도 있으므로 짐작컨데 방격규구사신경이 표현코자 하는 사상내용의 별개의 표현형태가 세선수대경일 거라고 생각된다.

永平7년( AD 64) 의 紀年鏡이 있고, 방격규구사신경과 병행하여, 중기까지 제작된 형식이다. 일본에서도 傳仁德天皇陵 古墳을 위시하여 다른 고분에서도 다수 출토되었다. 傳仁德天皇陵 古墳이란 仁德天皇陵에서 발굴되어 미국의 보스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대경을 말 한다.

2. 半肉彫神仙獸帶鏡: 후한중기 (AD 2C) 직경 18.6cm 무게810g

도-너츠상의 내구에 부조한 신선과 짐승을 빙 둘러 배치한 거울. 용과, 용에게 영지초(靈芝草)를 주고 있는 神仙, 범, 一角獸(기린?), 봉황, 곰이 그려져 있다. 현무는 보이지 않으나 용, 범, 봉황은 사신가운데 청룡, 백호, 주작의 표현의 가능성이 있다. 외구에는 용, 물고기, 거북, 물소이외에 삼족오, 구미호, 두꺼비등의 西王母의 권속에 해당되는 동물들이 平彫로 그려져 있다. 이들은 어느 것도 현실세계의 생물이 아니라 신선이 살고 있는 천상계의 신령스런 동물들이며 漢代의 사람들이 死後에 그렇게 살고 싶다고 소망하였던 동경의 이상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四神사상이 점차 神仙사상으로 이행하여 가던 과도기에 해당되는 시기의 거울로 서왕모를 중심으로 한 신선사상은 당초는 중심인물인 서왕모 자신은 거의 그리지 않고 주변의 신령한 동물들로 부터 그 존재를 연상시키도록 하는 형태로 행하여 졌다.

3. 方格規矩四神鏡: 후한전기 (AD 1C) 직경20.8cm 무게1254.8g

왕망(王莽)의 新(AD 4 – AD 23) 이후의 전형적인 양식을 갖는 방격규구사신경(方格規矩四神鏡)이다. 내구에 四神을 갖추고, 신령스런 짐승들이 모여있다. 方格의 네 귀퉁이와 V자형을 연결하는 소용돌이 모양의 선은 하늘과 땅을 잇는 구조물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동일한 표현이 T.L자형의 주위나 꼭지의 주위에도 보인다.

내구의 바깥에는 “漢有善銅……左龍右虎至四海……朱爵(鳥) 玄武順陰陽……” 라는 특유의 명문을 넣은 銘帶가 있고, 문양으로 표현된 사신을 비롯한 우주의 기능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方格內의 명문내용도 이와 통하는 내용을 갖는다. 거울에는 “尙方作鏡”의 銘을 갖는 예가 아주 많고, 이 스타일의 거울이 왕망시대이후의 尙方 (황실전용공방)에서 제작되어 민간에게도 의도적으로 대량 유출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작품은 후쿠오카의 平原遺跡등의 야요이시대의 유적이나 전기의 고분에서도 다량 출토되고 있다.

4. 環狀乳神獸鏡: 후한후기 (AD 2C – 3C) 직경16.8cm 무게785.0g

가장 진화된 형식의環狀乳神獸鏡. 내구에는 4필의 용이 휘감고 있고, 고개를 돌려 2개의 環狀乳의 중간에 신선을 태웠다. 꼭지를 끼고 대칭의 위치에 西王母와 東王公, 거문고를 타는 백아(伯牙)와 면관(冕冠)을 쓴 黃帝라고 생각되는 인물이 앉아있다. 백아는 중국고대의 거문고의 명수로, 신수경에서는, 그 연주되는 음악으로 음양을 조화시킨다고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음양을 대표하는 서왕모와 동왕공의 앉아있는 자리 중간에 끼어넣는 형식으로 그려졌다고 생각된다.

외구에는 六飛龍, 배(船), 日象, 月象을 받들고 있는 神仙등으로 이루어지는 소위 畵文帶가 있다. 畵像鏡의 외구의 畵像帶와는 사상적인 의미도 다른 듯, 삼족오, 구미호따위의 표현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전체로서 신수경의 문양에는 음양과 음양의 조화라는 생각이, 화상경에 비해 보다 추상화된 모습으로 주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畵文帶同向式神獸鏡: 후한후기 – 삼국 (AD 2C – 3C) 직경17.4cm 무게720g

내구의 신선과 짐승을 모두 한 방향을 보도록 배치한 화문대신수경의 한 형식. 꼭지 왼쪽에 서왕모, 오른 쪽에 동왕부, 윗 쪽에 거문고를 타는 백아와 이것을 듣고 있는 두 사람의 인물, 밑에는 黃帝라고 생각되는 높은 관을 쓴 신선이 보인다. 백아와 황제는 함께, 연주되는 음악으로 음양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로, 음양을 대표하는 서왕모, 동왕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좌상, 우상의 짐승은 상부의 삼신이 앉는 대좌의 양단을, 좌하, 우하의 짐승은 좌우의 서왕모, 동왕부와 하부의 황제가 앉는 대좌를 잇는 막대의 중간을 평형을 이루어 지지하고 있다.

외구에는 일상, 월상을 받든 신과 많은 星辰, 雲車를 타고 천상을 순회하는 天帝가 그려져있다. 전체적으로 봐도, 동서, 일월, 음양이라는 상반된 요소의 조화가 주제로 되어있고, 정치한 문양표현과 함께 화문대신수경의 사상표현의 중요한 특색으로 되어있다.

6. 神人歌舞畵像鏡: 후한후기 (AD 2C – 3C) 직경19.3cm 무게679.5g

작은 젖꼭지(小乳)에 의해 4구획으로 분할된 내구에 동왕공, 서왕모와 가무의 장면을 그렸다. 동왕공, 서왕모와 함께 오른쪽에 긴 통 소매를 휘날리는 인물이 있어, 旋舞의 표현이라 보인다. 나머지 두 구획도 모두 가무의 장면으로, 사진 오른편 구획에는 왼편에 거문고를 타는 인물, 오른편에 거꾸로 선 인물, 가운데는 양손을 들고 춤추는 인물, 오른편에 손벽을 치며 박자를 맞추고 있는지 노래를 부르는지 헷갈리는 모습의 인물이 있다.

이와같은 가무의 장면은 서왕모와 관련된 圖像으로, 전한말의 建平4년(BC 3) 발생한 폭발적인 서왕모 신앙을 기록한 문헌에는 민중이 六博이라 불리던 게임이나 가무를 행하여 서왕모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고 한다. 외구에는 서왕모의 권속인 삼족오, 구미호가 보이고, 따로 이름이 확실하지 않는 鳥獸들도 권속의 일종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내구에 있는 서왕모의 세계를 빙 둘러쌓고 경비한다. 말하자면 보디 가-드의 역할을 문양위에서도 하고 있다.

7. 神人龍虎車馬畵像鏡 : 후한후기 (AD 2C – 3C) 직경24.5cm 무게1581.2g

내구에는 서왕모와 車馬, 짐승 두 마리를 각각 꼭지를 끼고 대칭되는 위치에 배치했다. 서왕모는 자리에 앉아 시녀로 보이는 인물을 향하고 있다. 그 사이에는 술잔으로 보이는 용기가 놓여있다. 마차는 4마리가 끄는 것으로 객석 위로 지붕형의 덮개가 있고, 측면에도 울타리가 둘려있다.

병거(輧車)라 불리는 고귀한 인물용의 마차이다. 짐승 두 마리는 모두 머리를 길게 늘여 뒤를 돌아보고 있고 표정도 풍부하다. 외구에는 삼족오, 구미호등이 있다. 명문은 盤龍鏡에도 많이 보이는 것으로 양자의 近緣관계를 보인다. 화상경으로서는 희귀한 문양의 조합으로서, 야마쿠치 현(山口縣) 고카로우야시키(御家老屋敷)고분과 오오이타현(大分県) 칸도우(鑑堂)고분의 출토경의 예가 알려져 있다.

8. 四獸畵像鏡 후한후기 (AD 2C – 3C) 직경21.7cm 무게1452.5g

서왕모, 동왕공이나 마차, 가무등이 그려지지 않고, 신령스런 짐승만을 모티-브로 한 화상경의 일군이 있다. 표현기법은 다른 화상경과 동일하다. 꼭지 주위에 커다란 방격이 있고, 4개의 젖꼭지로 분할된 내구에는, 현무를 뺀 사신과, 날개달린 천마를 탄 선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청룡, 백호에도 선인이 타고 있고, 주작의 왼쪽 옆에도 선인이 있다. 외구에 삼족오, 구미호, 비목어등이 식별된다.

사수화상경은, 화상경 가운데 수대화상경과 함께 처음 나타난 시기가 반육각수대경(半肉刻獣帯鏡)와 매우 가까울 것으로 생각되며, 방격규구사신경(方格規矩四神鏡)의 계보를 잇는 유운문대(流雲文帶)를 외주에 사용하는 예가 많고 거울의 테두리(鏡緣)가 삼각 테두리(三角緣)로 된 것은 의외로 적다. 그려진 문양도 서왕모등 신선세계를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 수대경적인 문양 내용을 갖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9. 神人騎馬畵像鏡 후한후기 (AD 2C – 3C) 직경21.6cm 무게1319.1g

희귀한 문양의 화상경이다. 서왕모는 왼쪽을 보고 앉아, 긴 소매를 펴고 춤 추는 인물과 마주 보고 있다. 동왕공도 왼쪽을 향해 앉아, 양손을 드러내, 밑에 놓인 술 병을 권 하는 듯 보이고, 왼쪽의 긴 소매를 한 인물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東王父坐”의 傍題가 있다.

나머지 두 구획은 희귀한 문양으로, 긴 머리칼을 뒤로 나부끼는 羽人이 말을 타고 질주하고, 2 마리의 봉황에게 羽人이 무릅을 꿇고 먹을 것을 바치고 있다. 현재 구체적인 의미를 밝힐 수는 없으나 이것도 서왕모가 사는 신선세계의 한 모습으로 이해되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외구에는 구미호 이외에도, 코키리, 신록( 神鹿), 養龍氏와 용, 飛鶴, 뱀이 휘감고 있는 물고기등이 보인다.

2009년 5월 2일 토요일

54. 다뉴세문경

다뉴세문경((多(金+丑)細文鏡) 이란 거울 뒷면에 여러 개의 꼭지와 가는 무늬가 있는 구리거울(銅鏡)을 말 한다. 1985년 조사된 후쿠오카 시(福岡市) 요시타케 타카키(吉武高木)유적의 3호 목관묘에서 다뉴세문경이 청동기 무기류와 함께 출토되었다. 요시타케 타카키(吉武高木) 유적은 후쿠오카(福岡)시 서구 사와라(早良)평야에 있다. 이이모리(飯盛)산 산록에 펼쳐진 선상지(扇狀地) 로 한가운데 무로미강(室見川)이 흐르고, 남쪽으로 사가(佐賀)현과 경계를 접하는 背振山系에 연결된다. 강을 내려가면 현해탄이다. 현해탄의 의미는 이곳이 곧 바로 한반도와 연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일대는 요시타케 유적군으로 알려져 있고 부근에는 야요이(弥生) 후기에서 古墳시대에 걸쳐 大集落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野方遺跡의 주거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다뉴세문경은 거울 뒷면에 2 –3개의 꼭지(金변에丑)가 있고 가는 선의 기하학문양을 가진 조선반도계의 구리거울(銅鏡) 이며 야요이(弥生)시대 中期前半에 열도에 들어왔다고 본다. 조몬시대(繩文時代)까지 일본열도에 금속제의 거울이 대륙에서 들어온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야요이시대에 들어와 최초로 출현하는 동경이 다뉴세문경이다. 이 거울은 조선반도를 중심으로 일부는 랴오닝성과 연해주등 동북아시아의 일부로 퍼져 나갔다. 야요이시대 중기전반이 되면 日本古來의 마가타마(勾玉)등과 함께 부장품으로 출토된다.

킨키지방에는 야요이시대 중기경 동경전파의 제1파로서 다뉴세문경이 들어왔다. 유행은 단기간이었으나 큐유슈우에서 킨키, 다시 중부지방의 나가노 현(長野縣)까지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파되어 현재까지 9점의 다뉴세문경이 출토되었다.

北九州나 야마쿠치(山口)에서는 동검(銅劍), 동모(銅矛), 동과(銅戈)등 3종의 청동기무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는 지역의 지배자들의 부장품이 정형화되어 간 것으로 본다. 다뉴세문경 유행기로부터 50 – 100년후 중국에서 동경이 대량으로 들어오는 야요이 중기후반이 되면 지역의 지배자의 묘에 1개의 동경이 아니라 대량의 동경이 매납되었다. 이는 중국이나 조선반도에 유례가 없는 왜인사회 특유의 현상이며 이 습속은 고분시대까지 계속된다.

고대의 사람들이 銅鏡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였는지 또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물건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얼굴을 보는데 필요하리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쉽게 소유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종교의식을 위한 물건이거나 무병장수나 영혼불멸등의 믿음체계와 관련되었을 수 도 있다 .

다뉴세문경과 중국경은 다소 다른 점이 있다. 꼭지(손잡이)의 수는 전자가 2 – 3개인데 반해 후자는 1개이다. 경면은 전자가 약간 오목하고(凹面) 후자는 평면 또는 약간 볼록면(凸面)이다. 문양은 전자가 기하학문이며 후자는 신선계(神仙界)의 圖文외 다양한 문양을 자랑한다. 명문은 전자에는 없고 후자에는 있는 경우가 많다. 거울의 크기는 양자가 거의 동일하고 형체 또한 원형으로 같다. 다뉴세문경과 비파형동검은 고조선계열의 유물로 중국의 황하문명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양식과 문양 및 전파지역을 가진다. 만주, 한반도, 일본에 국한된 이들 유물의 연구는 극히 중요한 일이나 한국에 동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한국측 검색창에 드러나는 다뉴세문경에 관한 정보는 극히 단조롭고 거의 모두 국보 제141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 박물관 소장의 다뉴세문경의 기록이다. 청동기 시대의 구리거울로 지름 21.2 센티미터이고 뒷면에 꼭지가 2개가 있으며 내구, 중구, 외구로 3등분하여 각 구에는 사선삼각형문과 대향삼각형문을 동심원식으로 배치하였으며, 외구에는 세로로 엇물리게, 중구에는 가로로 엇물리게 하였고, 내구에는 이를 4구분하여 세로와 가로로 엇물린 것을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이 밖에도 외구에는 동심원 8개를 2개씩 짝지어 상하좌우에 배치하였다.

이리하여 빛의 반사를 변화무쌍하게 연출하게 되니 옛날 사람들이 이를 보고 겁을 먹지 않았겠는가. 위세품으로 당당한 물건일 것이다. 거울의 재료는 주석이 많이 함유된 소위 백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빛이 더욱 잘 반사된다. 다뉴세문경은 북방계 청동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며 여기 사용되는 삼각형문양은 주술에서 재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에서 과학적 보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3D 스캔 데이터를 이용한 기본형상을 조합하여 8개월만에 세문의 도면화에 성공하였다 한다. 그 과정에서 다뉴세문경은 가로 21.2 센티, 세로 21.8센티의 원 속에 새겨진 줄무늬의 갯수는 무려 1만 3천개, 1 mm에 3줄 무늬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현대 첨단 과학기술로도 아직까지 복제품을 만들어내지 못 했을 정도로 정교한 제품임이 증명된 것이다.

1971년 전남 화순군 대곡리 마을에서 우연히 다뉴세문경 2점, 팔주령 2점, 쌍두령 2점, 한국형 세형동검 3자루, 청동도끼 와 새기개 등 총 11점이 발견되어 이듬해 국보 제 143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같은 장소를 조사하여 청동검 2점을 더 찾아내었다. 이렇게 하여 2400여년 전 청동기인들이 영원불멸(?)을 기원하며 부장했던 청동기 세트를 모두 찾아 낸 것이다. 이 대곡리 유적은 적석목관묘로 확인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적석목관묘가 기원전 3 – 4 세기쯤 출현하여 기원전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곡리 청동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다뉴세문경과 청동방울이다. 2400여년 전 재정일치 시대의 왕은 제사장이었다. 그는 양손에 든 청동방울을 흔들며 신을 부르고 가슴팍에 단 다뉴세문경으로 태양의 신비로운 빛을 백성들에게 비추어 위세를 과시하였을 것이다. 빛은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는 매개이며 이해할 수 없는 신령스러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청동방울 특히 팔주령과 쌍두령은 비슷한 시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한반도 특유의 청동유물로 알려져있다. 팔주령은 방사상의 여덟개 가지 끝에 방울을 만든 형태이다. 오목한 불가사리 모양의 판에 방사상의 돌기가 달리고 그 끝에 각각 둥근 방울이 하나씩 붙어있다. 방울 안에는 청동구슬이 들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난다. 쌍두령은 양끝에 방울이 있고 그 안에 구슬을 넣었다.

대곡리 청동기 사진은 남녀 1조의 퍼포먼스를 암시하고 있다. 큰 거울은 남자용, 작은 거울은 여자용, 팔주령은 남자용, 쌍두령은 여자용, 동검 또한 그런 모습으로 짝지어 질 것이다. 멀고 먼 옛날, 신과 인간의 사이를 연결한다고 믿어졌던 제사장 부부는 이러한 기구를 동원하여 퍼포먼스를 벌리며 조직사회의 운명을 예언하고 조직의 미래를 결정하였을 것이다.